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학위유형
        • 주제분류
          펼치기
        • 수여기관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지도교수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酉山 丁學淵 詩文學 硏究

        김지영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16 국내박사

        RANK : 1919

        酉山丁學淵(1783~1859)是朝鮮後期實學的集大成者—茶山丁若鏞的直傳弟子及長子、詩人、醫術家,在十九世紀朝鮮詩壇上享有很高的聲望。本文旨在通過探討丁學淵的生涯、交遊關係及文學觀,在此基礎上究明詩的特點,探究十九世紀以後丁若鏞文學的繼承和演變,幷展現十九世紀詩壇的一個層面。 丁學淵自幼受業于身爲牧民官的父親,抱有靑雲之志。但受一八零一年的辛酉邪獄的影響,幾近廢族。之後他便開始在故鄕馬峴維持家計,幫助父親解除流配。丁若鏞叮囑他以經史之學爲基,培養經世意識,强調《詩經》里的詩含有符合人倫的淳厚情感和經世意識。受家學的影響,使得丁學淵的初期詩飽含了孝悌之情。通過打理園圃,將自己的農事經驗融匯于詩中,還關注到了實用學。他在田園詩里描述了馬峴的景象,如實地反映了當時百姓的生活。同時諷刺了渾濁的政治現狀,反映了民生的疾苦,批判了官僚們的橫征暴斂。此外從這一時期開始,他以文學和茶做爲溝通的媒介,與大芚寺的僧人交遊。由此可以看出,十九世紀的文人將與僧侣的交流看做一件高雅的行爲,把飮茶當做一項愛好。 自父親從流配中解除以後,丁學淵開始在與文人的交遊中主張重視創作主體情感的師心論,追求以王維、孟浩然、韋應物、柳宗元爲宗主的神韻。詩中自然而然表達出了個人情感的深化,進一步將這種情感提升爲一種哀傷的感情。 這一時期的作品中,包含了以梅花爲媒介,回憶與友人的過去、表現哀傷感的懷人詩。梅花連作詩,在纖細而柔和的氛圍中,表現出了濃厚的女性色彩;秋題連作詩,通過對秋日景物的描寫,表現了老年深深的悲哀。詩中表現出的痛苦與悲哀,以及帶有女性語調的特征,使丁學淵與婉約詞派詩人柳永和秦觀相提幷論。同時,丁學淵開始在詩會上創作聯句和分韻詩,來施展自己的詩才。他的懷人詩、梅花詩、秋題詩也具有相同特征。雖然這些特征在當代詩壇也已流行,但是丁學淵在他的懷人詩中採用了詠物的方式,在梅花詩中,將<落花詩三十首>和<梅花百詠>的複雜形勢融會貫通,幷且致力於巨篇連作詩。這同時來源於對自我才華的積極展現。 丁學淵的初期詩,顯然與父親丁若鏞的詩十分相似。但是他的文名自始于後期詩的創作,幷通過後期詩的創造,在詩壇上享有了眞正意義上的詩人聲望。詩人們從他的詩中,讀到了婉約之風格,虛閑之情懷。丁學淵後期里表現出的哀傷感,與他生活的桎梏緊密相關。丁學淵想通過交遊使父親能够從流配生活中獲得自由、實現自我的社會價値,以及家族文明的崛起。這導致了與追求官僚文人及學者生活的父親不和。在首爾的他仍未能一展抱負屢受挫折,直到老年依然爲一介布衣。 另外我們可以從丁學淵的後期詩中觀察到,在十九世紀的朝鮮文壇上,哀傷之詩風十分流行。這一時期文人的哀傷詩風,源于勢道政治背景下文人們所受到的政治排斥。 酉山 丁學淵(1783~1859)은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인 茶山 丁若鏞의 학문을 直傳한 長子이며, 시인이자 의술가로 19세기 시단에서 명성이 컸다. 본고는 정학연의 생애와 교유관계, 문학관 등을 토대로 그 시세계의 특징을 究明하고 이를 통해 19세기 이후 정약용 문학의 繼承과 變轉, 19세기 시단의 일면을 살피고자 했다. 정학연은 어린 시절 목민관인 부친에게 배우며 청운의 꿈을 품었지만, 1801년 辛酉邪獄으로 인해 廢族이 되었다. 그는 마재[馬峴]에서 家計를 꾸리며 부친의 解配에 힘썼다. 부친은 經史로 바탕 공부를 중시했고, 『詩經』의 시가 人倫에 맞는 淳厚한 정감과 經世意識을 지녔음을 강조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정학연은 초기시에 孝弟의 정을 담았고, 園圃를 경영하며 농사 경험을 詩化하고 實用學에 관심을 두었다. 전원시에는 마재의 實景을 묘사하되 백성들의 생활을 핍진하게 그렸다. 더 나아가 혼탁한 정치 현실을 풍자하고 민생의 괴로움을 드러내며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비판했다. 한편, 大芚寺 승려들과 문학과 茶를 매개로 교유했는데, 이를 통해 불승과의 교유를 고아하게 여기고 飮茶의 취미를 즐겼던 19세기 문인들의 특징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부친 해배 이후 정학연은 여러 문인들과의 교유 속에 창작 주체의 감정을 중시하는 師心論을 주장하고, 王維․孟浩然․韋應物․柳宗元을 종주로 하는 神韻을 추구했다. 자연히 시에서는 개인의 정감 표출이 심화되었고, 이것이 애상적인 감성으로까지 나아갔다. 이 시기 작품 중에는 매화를 매개로 벗을 그리워한 애상적인 懷人詩가 보인다. 매화 연작시에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여인의 감정을 농후하게 담았다. 秋題 연작시에는 가을 경물 속에 노년의 비애감을 짙게 드러냈다. 슬픔과 한탄, 여성적 어조를 보인 이들 시로 인해 정학연은 婉約詞派인 柳永과 秦觀에 비견되었다. 한편, 시회에서 聯句․分韻詩를 창작하며 자신의 詩才를 드러냈는데, 회인시, 매화시, 추제시도 이러한 특징을 보인다. 이들 시는 당대 시단에서 유행한 형식이지만, 정학연은 회인시에서 詠物의 방식을 썼고, 매화시에서 <落花詩三十首>과 <梅花百詠>의 형식을 활용했으며, 巨篇의 연작시 창작을 즐겼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 또한 자신의 시재를 발현하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정학연의 초기시는 그 부친의 것과 유사하지만, 그는 후기시를 통해 당대 시단에서 문명을 얻었다. 특히 문인들은 그의 시에서 婉約의 풍격을 읽었고, 虛閑하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정학연 후기시의 애상감은 그 삶의 질곡과 관련이 있다. 교유를 통해 부친의 해배와 자신의 사회적 진출, 가문의 문명 중흥을 꾀했던 정학연은 관료 문인이자 학자적 삶을 지향했던 부친과 不和했다. 서울 교유에서도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해 좌절감을 느꼈으며, 노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포의의 몸으로 지내면서 짙은 애상감을 띄게 된 것이다. 한편, 정학연의 후기시를 통해 19세기 문단에서 애상적 시풍이 유행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시기 문인들의 애상감은 세도정치 하의 문인들이 느꼈던 정치적 소외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 退溪 情學의 規矩方圓 構造 硏究 : 라캉 정신분석학과 비교를 중심으로

        이원진 성균관대학교 2015 국내박사

        RANK : 1854

        A Study on the Chiastic Structure of Toegye's Science of Feelings Toegye, the most prominent Korean Confucianist and Jacque Lacan, the postmodern french scholar do not share at all their space-time but in their spirit they have in common that they use the topology(or schema) in the core of his vast philosophical system. In particular, they desire to present clearly and compressively the theory of nature and mind through the triangular structure using X-schema(Chiasmus). Ten diagrams of Sage Learning and Écrits are the publication which is dissolved in this scheme-philosophy. Toegye introduced the six X-shape in his Ten diagrams of Sage Learning. Scheme X is a dialectical symbol, in which melt the subject who is the condensation of mom and dad/heaven and earth/yin and yang and heavely circle also, and through this sign, Toegye succeed to explain consistently the core concept of confucianism such as xing[性] and ging[情] and weifa[未發] and yifa[已發] in the conception ‘gyoung(敬)’. Toegye successfully tied the nature and mind in the one ring by laying gyoung(敬) around the center of gravity of the X-schema. Lacan have established the X-topology in his Écrits through his L, R , I schema. Like as Toegye had developed his scheme as successor of Chu-tzu, Lacan also succeded the problems of Freud's Oedipus complex, which was the most problematic concept in Western intellectual history, and eventually overcome the contradictions that Freud did not loosen by recalling the scheme R. Lacan restores the desiring subject by calling ‘metaphore paternelle' that is, moving the marginalized self who stayed in the economy of imaginaire to the economy of symbolic through his triangular diagram. The desiring subject obtains his identity by encompassing the imaginary-symbolic-realistic world through his enunciation. As a result, X scheme, which is across the East and the West, is one eloquent words that prove the nature and mind is constructed as mathematics so universally and self-evidently. Also the fact is found that the human being, which means the subject as I, enjoy a jouissance in the meaning of Lacan and fear and revere(敬畏) in the meaning of Toegye. Key Words: Toegye. Lacan, triangular diagram, X-schema, gyoung(敬), la metaphore paternelle 退溪의 情學의 規矩方圓 構造 硏究 본 논문은 退溪의 말년 저작이자 최고봉으로 평가되는『聖學十圖』에 총 7번 등장하는 X자 형태 도식에 주목했다. 이어『聖學十圖』가 성인이 되는 심법을 담은 그림과 글의 요체라면, 그 요체 중의 요체인 X자 도식을 통해 퇴계는 몸과 마음을 통솔하는 情을 말하고자 했음을 명쾌히 밝히고자 했다. 통상 사랑을 의미하는 X자 형태의 원조는 周子의「太極圖」에서 보듯 어머니와 아버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개체이나, 나의 몸을 낳아주신, 즉 나를 존재케 한 관계로서 서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다. 퇴계는 이를 바탕으로 음과 양, 미발과 이발, 그리고 性과 情, 그리고 몸과 마음의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구조를 X자 그림으로 설명하면서 바로 이것이 우리 感情의 구조임을 밝혔다. 그리고 감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敬)에 바탕할 때 心病은 해결될 수 있음을 말했다. 신기하게도 退溪 4세기 후에 태어난 라캉 역시 X자에 기초한 삼각구조 도식(R도식, L도식)을 통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면서 情(욕망)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정신병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X자는 원과 네모, 즉 규구방원이 모두 들어가 있는 도식이다. 원은 숫자로는 3이자, 하늘로서, 모든 것을 다 품는 순선(順善)하고 넉넉한 하나로서의 원이다. 그 원 밖에 아무것도 있지 않기에 그 원은 부족함이 없다. 네모는 숫자로는 4이자, 땅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네모는 원 안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마냥 위치를 변하지만, 원 밖을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마냥 변화하는 현실을 즐기면서 배우면서 살아간다. 퇴계는「天命圖」에서 원과 네모를 하나로 합쳐, 그것이 하늘로부터 품수받은 우리 현실의 모습, 즉 우리의 已發이자 우리의 情의 모습임을 확인했다. 퇴계는 이어「心統性情圖」에서 仁義禮智의 四端之情은 이 원 안에 들어있는 시시각각 감정의 모습으로 마치 元亨利貞처럼 자연의 이치를 따라 변화하며 돌아간다는 것을 밝혔고, 七者之情은 우리의 존재근거인 원 밖으로 탈출해 별도의 무엇이 있는 양 선의지로 충만해서 조장하려고 하는 우리의 착각이라서 자연의 이치일리 만무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이 감정의 X자 도식, 즉 감정의 규구방원을 통해 퇴계는 정은 만물이 생기듯 다 똑같이 하나의 원리인데, 다만 자기 자신을 이해할 때(四端之情)와 오해할 때(七者之情) 감정은 사람을 미치게도 하고 무한히 즐겁기도 한 것임을 확인했다. 요즘 엄마는 아이를 직접 키우는 것이 두렵다. 아이에 대한 자신감은 늘 외부(특히 사교육시장)에서 배워야만 알 수 있는 실시간 정보의 양과 등치돼 버렸다.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의 숨 막히는 피그말리온(부모가 원하는 대로 주조하려는 의도) 정책에 만정이 떨어지고 있다. 부모와 아이 모두 자기 자신으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돼 버린 현실이다. 공맹은 그리고 퇴계는 바로 이런 현실을 우려했다. 영원 무한한 성의 발출로서의 정은 우리가 무엇을 더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완전임을 알려준다. 맹자는 인의예지의 마음을 “나에게 본래 있는 것(我固有之)”이고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人皆有之)”이며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天之所與我者)라 하여, 도덕정감의 내재성·보편성·절대성을 강조했다. 퇴계는 이러한 맹자의 성선, 즉 四端之心과 장재의 心統性情, 주자의 性發爲情의 내용을 모두 수용하며 한층 심화해 四端之情으로 발전시켜 밝혀냈다. 그 결과 퇴계에게서 情은 순선하며 완전하다. 매순간 변화하는 정이지만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敬의 자세이다. 또 情은 우리가 무엇을 잊고 있는가를 매순간 알려준다. 그래서 퇴계에게서는 배우고(學) 생각하는(思)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렇듯 퇴계의 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자녀 교육에 있어 큰 공효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부모와 아이가 퇴계가 가르쳐주신 자신의 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서로가 ‘자기 넘어서기’를 요구하는 대신에 ‘자기’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아이는 더 이상 부모의 ‘자기 넘어서기’요구가 사단지정의 발로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것 때문에 고민하거나, 심각하게 자살에 이르기까지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부모에게 은밀하게 柬하며 부모가 자신의 정을 돌아보길 기도하며 공경할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학교에서의 성적과 학업태도가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며, 자녀가 대신 자신의 삶에서 情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주인으로서 살게 되기를 기도할 것이다. 그것이 엄마도, 사교육도 챙겨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인생의 나침반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尤庵 宋時烈의 碑誌文 硏究

        박관규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1 국내박사

        RANK : 1833

        본 論文은 557편에 달하는 尤庵 宋時烈(1607-1689)의 碑誌에 초점을 맞추어 尤庵 碑誌의 主人公인 墓主의 性向과 主題의 主要 領域 및 時代的 位相을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尤庵 碑誌의 具體的 面貌를 파악하였다. 그 결과 17世紀 朝鮮의 知性界에서 碑誌의 制作이 전대에 비하여 활성화되게 된 文化的 實狀과 原因, 特徵의 實態를 감지할 수 있었다. 尤庵은 17世紀 朝鮮 性理學의 수준을 대변하는 巨儒이자 山林으로서 그 학문적 位相과 정치적 지위가 뚜렷하다. 그는 文章에만 치력한 文士가 아니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講學과 作文 活動을 왕성하게 전개하여 그의 문집 &#985172;宋子大全&#985173;에는 그 누구보다도 한문학의 제 문체가 풍부하고 충실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551 편에 달하는 碑誌는 그 양적 부분이 매우 압도적이다. 특히 우암의 碑誌文은 淸陰 金尙憲(1570∼1652)과 谿谷 張維(1587∼1638)의 계보를 이어받아 당대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그의 필력은 웅혼하였고 韓愈와 歐陽脩의 영향 하에 주자의 문체를 參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尤庵 硏究는 朝鮮 後期를 이해하는 關鍵, 혹은 關門이라는 전제 하에 현재까지 철학과 사학 분야에서 연구가 꾸준하게 진행되어 왔으며 2007년 ‘우암 탄신 400주년’을 전후하여 학술 발표와 토론회가 개최되는 가운데 우암에 대한 여러 방면의 학술적 관심이 고조된 바 있다. 그러나 우암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17세기 이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전제로 하여 우암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것으로 양 극단에 치우쳐 그 실상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부족한 실정이다. 우암에 대한 褒貶은 주로 그의 정치적 처신과 행적에 대한 후인들의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객관적이며 심도 있는 접근 방식과 연구 결과는 현재 미진하다. 본 논문은 기존의 우암 연구에 있어서 제한적인 시각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일단 우암의 저작 가운데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550여 편에 달하는 尤庵의 碑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우암 비지가 획득한 존재의 실태와 문학적 수준, 시대적 위상을 도출해 내어 아직까지 활성화되지 못한 碑誌 硏究에 대한 한 대안을 모색, 17세기 비지 찬작의 정채로운 한 현장의 단면을 우선 밝혀내었다. 尤庵의 碑誌文에 대한 구체적이며 본격적인 접근은 17세기 비지 찬작의 실태와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우암은 栗谷의 생애 및 학문과 관련된 碑誌 2편, 孝宗(1619∼1659)의 생애를 정제된 구조 안에서 펼쳐 낸 &#65378;寧陵誌文&#65379; 등 陵誌 3편을 포함하여 약 557 편의 비지를 찬작하였다. 우선 조선시대를 통 털어 가장 다수의 작품을 찬작해 낸 점에서 그 사적 위상과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尤庵 碑誌가 양적으로 풍부하게 된 배경에는 이미 20대에 沙溪 金長生(1548∼1631)의 문하에 입문한 이후 西人系 名家 및 名人들과 인적·학적·정치적 교류의 범위가 확대되고 심화된 점과 무관치 않다. 청탁과 수락의 과정에서 우암은 비지에 대한 자신의 기본 관점과 서술 과정에 있어서 撰作의 動機와 敍述의 方向, 墓主-被撰者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평가의 방향, 교정의 세부 내용 등 비지에 관한 제반 미학적, 수사적 담론을 치밀하고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557여 편의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尤庵의 碑誌 전체에 우선 초점을 맞추어 찬작의 주요한 배경을 간파하기 위하여 우암 및 그 주변 인물들이 전개한 방대한 담론의 양상을 검토할 뿐만이 아니라 우암 비지와 직접 관련된 기사를 우암의 詩, 疏箚, 書, 祭文, 序文, 記文, 跋文 등에서 우선 두루 섭렵함으로써 당시 우암과 교류의 양상이 뚜렷한 17세기 지성들의 증언까지 함께 고찰하였다. Ⅱ장에서는 우선 17세기에 비지의 찬작이 유행하게 되는 분위기 속에서 비지의 功效에 대한 당대 인식과 우암 비지에 있어서 주요한 인물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이 검토를 통하여 우암이 비지를 다작하게 된 이유와 당시 우암의 지위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설명해 보았다. 우암이 다작을 하게 된 일차적인 배경에는 王室의 요청 및 17세기 西人系 家門의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특히 우암 및 그 주변 인물들의 비지에 대한 소통의 양상을 우암의 서간문 전체와 주변 인물들의 언급 등 방계 자료를 면밀히 조사하고 검토하여 비지의 功效와 찬작의 일반적인 관행, 우암의 기본적인 찬작 성향을 중심에 두고 찬작을 둘러싼 제반 논의들을 통하여 17세기 서인계 문인 사회에서 비지에 대한 제반 주요 논의의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Ⅲ장에서는 우암 비지에 形象化된 主題의 主要領域을 時代相의 反映, 君臣 知遇와 尊周大義의 追求, 正學 守護와 時流 批判, 政治的 危機와 晩節의 闡揚 네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밀도 있게 고찰하여 보았다. 이들 주제의 주된 영역은 尤庵의 碑誌에 있어서 가장 비중 있는 墓主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데, 우선 17세기 시대적 한계와 특수성 속에서 당대 명인들의 인상적인 삶을 양상과 지향, 시대에 대한 고민을 파악 가능케 한다. 우암은 시대의 폭압 속에서 명멸해 간 명인들의 삶을 애도하고 동조하였으며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는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가운데 시대와 인간 가치에 대하여 當爲의 準則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이들 조선 명인들의 삶을 통하여 우암이 지켜내고 현양하고자 한 삶의 가치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17세기 사대부 사회에서의 삶의 지향이 갖는 보편적 분위기와 전후의 시대와는 매우 변별적인 특성 등을 파악하는 가운데 우암 비지의 주요 작품이 획득하고 있는 미적 수준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암이 채택된 어휘의 심각성, 시대상의 면모를 통하여 비지의 찬자로서 우암의 시각과 문제의식 등이 구조적, 형식적으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 지 그 미적 수준의 정도를 간파되는 것이다. Ⅳ장에서는 17세기 비지의 찬작 현장에서 우암 비지의 위상을 정리하였다. 우암은 당시 정치와 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한 서인계 명가 뿐만 아니라 왕실과 학계로부터 비지의 찬작이 쇄도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비지의 문체 자체에 대한 인식과 그 사적 전개 양상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557편에 달하는 비지를 요청 받아 생산해 내는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여타 문장가들보다 비지의 서술 방향과 표현 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담론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17세기 비지의 찬작 현장과 작품 활동 양 측면에서 우암 비지의 위상은 간과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우암 비지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비지에 대한 우암의 기본 시각이 갖는 의미, 우암 비지에 관류하는 주제의 영역이 보여주고 있는 시대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17세기 비지의 정채로운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우암 비지의 성격을 도출하였다. 우암은 그의 일생 동안 문장가로 자부했던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의 인생 목표는 문장가로서의 삶이 아니라 전도된 시대의 가치를 교정하고 正學의 계보를 정립, 수호하는 학인으로서의 삶이었다. 우암 비지는 17세기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대변하는 주요한 시대적 소산으로서, 時代의 價値를 고수하면서 生死를 불고하다 명멸해 간 17세기의 지성과 명인들에 대한 尤庵의 哀悼이자 獻辭라고 하겠다.

      • 대학원 교육과정학 전공 교과목 개선 연구

        김유리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석사

        RANK : 1662

        최근 대학은 학생, 학부모 등 대학의 수요자는 물론 정부로부터 대학 교육의 질제고, 정원 감축, 특성화 등 구조개혁을 강력하게 요구받고 있다. 그동안 대학원을 포함한 고등교육기관이 양적 성장에 주력한 결과, 교육의 질에 있어서는 아직 미흡하고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대학의 구조개혁은 대학 교육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며, 대학 교육의 질과 경쟁력은 교육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대학의 구조개혁 및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교육과정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육과정에 대한 연구는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교육과정에 있어 타당성, 계열성, 균형성 등을 모범적으로 갖추어야할 대학원 교육과정학 전공 분야 교육과정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학문분야든 그 학문만의 체계를 갖추고 차세대에 그것을 전수함으로써 학맥을 이어간다. 그렇다면 교육과정학 전공자로서 갖추어야할 학문의 공통기반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 대학원 석·박사 과정은 해당 학문 분야를 선도해나갈 우수하고 전문적인 인재 양성을 책임진다. 더욱이 교육과정학 분야는 복잡하게 진행되는 교육 활동 실제에 일정한 기준을 제공하므로, 다른 전공에 비해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며, 모범적인 교육과정기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교육과정학 전공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지식과 능력으로서의 핵심역량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 핵심역량을 함양하기 위해 교육과정학 전공 교육과정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선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정하였다. 첫째, 교육과정학 전공자의 핵심역량은 무엇인가? 둘째, 교육과정학 전공자의 핵심역량 강화를 위한 전공 교과목의 이수 체계 및 교과목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연구방법으로 국내 대학원별 교육과정학 전공의 교육과정을 비교·분석하여 교육과정학 전공의 핵심역량, 교과목 등에 관한 의견 조사 내용 초안을 마련하였다. 전문가 의견 조사 설문지는 선행 연구 및 관련 문헌의 고찰을 토대로 1차 구안한 뒤, 지도교수와 교육과정학 박사들의 검토와 사전 설문지 테스트를 토대로 수정·확정하였으며, 교육과정학 전공자, 한국교육과정학회 회원, 고등교육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문헌연구 및 전문가 의견 조사 결과를 종합한 결과, 우리나라 대학원 교육과정학 전공 교과목 개선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과정학 전공자로서 공통적으로 갖추어야할 역량이 있으며, 이를 기르기 위해 대학원 전공에서는 일정한 수의 공통필수과목의 지정이 필요하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육과정학 전공자의 핵심역량은 ‘교육과정 이론의 이해, 교육과정의 연구방법론 이해와 적용 능력, 교육과정 이론의 비판과 개선 능력, 교육과정 총론의 이해와 개발 능력, 교육과정 실제의 개선 능력, 교육과정 평가의 이해 및 평가수행 능력’으로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이러한 핵심역량 함양을 위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교과목인 ‘교육과정론, 교육과정 개발, 교육과정 운영, 교육과정 평가, 교육과정 연구방법(론)’ 등을 박사학위 취득까지 반드시 이수해야할 교과목을 지정하는 데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공통필수 과목 지정 시 교육과정학 연구자들을 대표하는 학회에서의 숙의와, 관련 분야 실무 종사자들의 요구, 학문적 중요도, 국내외 대학원에서 개설하는 공통 교과목 등을 고려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공인 등을 거쳐 확정할 필요가 있다. 둘째, 공통필수 과목 지정 비율 및 졸업이수 학점 중 전공 교과목 이수 학점의 비율에 대한 응답 결과를 토대로 보면, 학위과정이 높아질수록 전공자로서 갖추어야 할 역량이 더 많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해당 전공에 대한 더 많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교육과정학 전공자의 핵심역량 강화를 위해서는 석사과정보다는 박사과정이나 석·박사통합과정에서 더 많은 수의 공통필수 과목 지정이 필요하며, 마찬가지로 교육과정학 전공 학위 취득을 위해 이수해야 하는 전공과목 또한 학위과정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비율의 전공과목을 이수하도록 이수 체계를 정비하여 구성할 필요가 있다. 셋째, 교육과정학 전공 교육은 전공자가 교육과정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실제적 개발까지를 책임질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구성할 필요가 있으며, 실제 교육과정 운영이나 공통필수 과목 지정에 있어서 교육과정의 이론적 이해와 실제적 개발이 균형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전공자의 핵심역량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실제 교과목의 교육목표나 강의 내용 선정 시 이를 고려하여 강좌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적은 교수와 강사의 수 등을 고려할 때 각 교과목은 복합적 목적을 지니고 폭넓은 범위를 포괄할 수 있도록 구성될 필요가 있다. 가령 ‘교육과정론’을 통해 교육과정 이론의 이해, 교육과정 이론의 비판과 개선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교과목 내용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교육과정 연구방법(론)’은 교육과정의 양적·질적 연구방법론 이해와 적용 능력을, ‘교육과정 개발’, ‘교육과정 운영’은 교육과정 총론의 이해와 개발 능력, 학교수준 교육과정의 이해와 개발 능력, 각론에 대한 이해 능력, 교육과정의 실행(경영과 운영)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강좌 내용이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육과정 평가의 이해 및 평가수행 능력과 교육과정 실제의 개선 능력 함양을 위하여 ‘교육과정 평가’ 교과목의 내용이 구성될 필요가 있다. 교육과정학 전문가를 육성하는 교육과정에 관한한 모범적인 실천전략을 택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다양성과 차이만을 강조하여 학생에게 편협하고 치우친 자질을 기르게 한다면 이 분야의 발전은 매우 더딜 것이다. 따라서 전공 수련과정을 체계화 하여 전공자의 핵심역량을 기를 수 있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전공자의 핵심역량이 무엇인지 최소 공통분모를 찾는 것은 해당 학문의 정체성 확립과도 관계가 있다. 또한 학계의 공통기반을 마련한다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교육과정학 분야의 학문적 발전과 이를 통한 실제의 개선을 위해서는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이 개별 대학원과 학회 차원에서 쇄신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연구와 숙의를 통해 전문가집단의 최소한의 합의가 요청될 것이다.

      • 북한에 대한 중국의 지정학적 인식변화와 대북정책 변화 : 중미, 한중 수교시기를 중심으로

        구정우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8 국내석사

        RANK : 1611

        本文从批判地缘政治学的观点主要考察中国对朝鲜的地缘政治认知的变化,以 及中国对朝政策的变化。 关于地缘政治学的现有主要研究认为世界政治结构是以海洋势力和大陆势力之间 的竞争关系所组成,导致国家之间的关系会常常出现“冲突”。特别是像朝鲜半岛, 大陆势力为了阻止海洋势力的入侵,并且进军海洋,海洋势力为了进军陆地,同时 防止大陆势力入侵海洋,因此两大势力势必会在朝鲜半岛发生“冲突”,是一个典型 的“缓冲地带”,甚至认为朝鲜半岛的分裂和战争更像是一场”宿命论”,把这些现象 变成合理化,理所当然的事情。实际上“冲突”并不是地缘政治学原本的意思,它不 是‘固有化’现象,它有着‘开放性和变化性’的特点。 基于这个思路,本文的第三章,第四章陈述了不同时期中国对朝政策的原因以及 特点。第3张是中美建交时期,分析了中国对朝鲜的地缘政治认知的变化以及对朝政 策的变化。70年代初期中国受到来自国内外的不同的威胁,陷入了困境,当时的中 国对北政策有两种特征。首先,对北政策隶属于美国和苏联之间的关系。第二,从国 家安全角度上,朝鲜地缘政治的“价值”上升了。第4章是中韩建交时期,分析了中国 对朝鲜的地缘政治认知的变化以及对朝政策的变化。与同时受到来自美苏武力威胁 的70年代不同,80-90年代初期从国家安全优先战略开始转向经济优先战略的中 国对朝政策有两种特征。首先,战略性认识的变化。第二,韩国的经济因素的相对上 升和朝鲜的安全因素的相对减弱。 本文从批判地缘政治学的观点、具体的对比了中美建交时期和中韩建交的时期, 中国对朝鲜的地缘政治认知的变化以及对朝政策的变化,从而观察了其中隐藏着的 中国地缘政治的世界观是如何适用于对朝政策的。通过笔者的研究从过去的经验摸 索当前的中朝关系,其含义得出朝鲜,以及朝鲜半岛并不是自古以来就是‘热门地区’ 或者是对中国非常重要的’缓冲地区‘,当前它只是被各个利益大国‘相中了‘,各个 大国的利益交织在该地区而已。从国家层面来看,“没有永远的朋友,也没有永远 的敌人,只有永远的利益”,这是符合世界政治逻辑的。 This paper is a critique of geopolitics in the context that mainly examines the changes of China's perception of North Korea's geopolitics and the change of China's policy toward North Korea. Existing research on geopolitics holds that the world's political structure is based on the competitive relationship between the maritime forces and the mainland forces, resulting in frequent "clashes" in the relations among nations. Especially like the Korean Peninsula, the mainland forces would prevent the maritime forces from invading and concurrently invade their sphere of influence. Similarly, the latter will protect their own sphere of influence and invade those of the former. Therefore, the two major forces are bound to have "conflicts" in the Korean Peninsula. This is a typical "buffer zone" to the extent that separatism and war in the Korean Peninsula are more like a "fatalism" and that these phenomena are rationalized and taken for granted. In fact, "conflict" is not the original meaning of geopolitics. It is not an "inherent" phenomenon. It has the characteristics of "openness and changeability." Based on this idea, the third chapter and the fourth chapter of this article set out the reasons and characteristics of China's policy towards North Korea in different periods. Chapter 3 is the period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ina and the United States. It analyses the changes of China's geopolitical understanding of North Korea and the changes of its policy towards North Korea. In the early 1970s, China suffered from different threats both at home and abroad. At that time, China’s policy towards North Korea has two distinct characteristics. First, the North's policy was subjected to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the United States, and China and the Soviet Union. Second, the "value" of North Korea's geopolitics has risen from a national security perspective. Chapter 4 is the period of establishing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ina and South Korea, analysing the changes of China's geo-political cognition to North Korea and changes in the policy towards North Korea. Unlike the 1970s, which were simultaneously threatened by the US and Soviet forces, China's policy toward the DPRK in the early 1990s shifted from a national security priority strategy to an economic priority strategy with two characteristics. First, changes in strategic understanding. Second, the relative growth of South Korea's economic factors and the relative weakening of North Korea's security factors. From a critical viewpoint of geopolitics, this article concretely compares the period of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ina and the United States and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ina and South Korea, the change of Chinese geo-political cognition toward North Korea and the change of the policy towards North Korea. From then on, it examines how China's geopolitical world outlook applies to its policy towards North Korea. Through the author's research of using history to explore the current relations between China and North Korea, North Korea and the Korean Peninsula were not the most important regions of the world since ancient times or "buffer zones" that are very important to China. At present, it is simply being "in the middle" of the great powers, whose interests are interwoven in the region. At the national level, "there is no permanent friend or eternal enemy, only permanent interests", which is in line with the political logic of the world. 본 논문은 북한에 대한 중국의 지정학적 인식변화를 고찰해보고 이에 근거해 중국의 대북정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연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지정학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국가 간의 관계를 '충돌'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정치구조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 경쟁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특히 한반도는 대륙세력이 해양세력의 진입을 막고 해양으로 나가기 위한, 해양세력은 육지로 진입할 수 있고 대륙세력의 해양진출을 막을 수 있는 '완충'지대이기 때문에 한반도에서의 분단과 전쟁은 당위론적 '숙명론'처럼 당연한 것으로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충돌'은 지정학의 본연의 뜻이 아닐뿐더러 지정학은 '고착화'된 현상이 아니라 개방성과 변화성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지정학의 시각에서 북·중 관계를 검토하였다. 본 논문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3,4장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분석하였다. 제3장은 중·미수교시기 북한에 대한 중국의 지정학적 인식과 대북정책을 연구하였다. 데탕트시기 대내외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국의 대북정책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대북정책은 미국과 소련과의 관계에 종속되어 있었다. 둘째, 국가안보의 차원에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가 상승되었다. 제4장은 한·중수교시기 북한에 대한 중국의 지정학적 인식과 대북정책을 연구하였다. 데탕트시기와 달리 국가안보가 우선에서 경제우선주의로 전략적 중심을 바꾸게 된 중국의 대북정책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전략적 인식의 변화이다. 둘째, 한국의 경제요인의 상대적 상승과 북한의 안보요인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본 논문은 비판지정학을 통해 중·미수교시기와 한·중수교시기 북한에 대한 중국의 지정학적 인식변화와 대북정책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그 속에 숨어있는 중국의 지정학적 세계관이 대북정책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검토하였다. 또한, 이는 북·중 관계를 과거의 경험에서 그 함의를 도출해내여 현재의 북·중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뜻 깊은 연구가 되리라 생각된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