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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한요소법에 의한 타이어의 변형해석

        정상우,Jeong, Sang-U 대한타이어공업협회 1984 타이어 고무 Vol.111 No.-

        유한요소법에 의하여 축대칭 정적하중을 받는 승용차용 래디알 타이어의 변형을 해석하였다. 요소는 8절점 parabolic-isoparametric 요소를 사용하였으며 타이어를 구성하는 cord-rubber복합체를 선형직교성을 갖는다고 가정하고, 그 복합체의 물성치를 간단한 식으로 표시하여 적용하였다. 공기압으로 인해 변형된 모양 및 cord에 작용하는 장력을 계산해 냈으며 이 변형된 모양을 plaster cast를 이용하여 측정한 실험치와 비교하였다. 또 타이어를 구성하는 구조가 달라지면 공기압으로 인하여 변형형태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계산해 보았다. 이 결과로 belt의 cord수가 감소하거나 belt cord angle이 증가하면 타이어 외경이 증가함을 알 수 있다.

      • KCI등재

        현행 역사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서술의 학습 내용 계열성 검토

        鄭尙雨(Jeong, Sang-Woo) 역사교육연구회 2018 역사교육 Vol.147 No.-

        If repetition is inevitable in history education, discussions aimed at ensuring the sequence must begin with the recognition of it. So recent discussions on securing discrimination between middle and high schools while maintaining repeatability are drawing attention. This possibility can be seen through chapter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middle school “History” and the high school “Korean History” textbooks currently in use. Meanwhile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s presented as an content-element in both the Revised 2015 Curriculum of middle and high school. And according to the Revised 2015 Curriculum, the national movements are expected to be presented as a process of forming a modern nation state in middle school, and as a process of forming a modern nation state and independence movements. This is different from the current textbooks, but in the aspect of “ensuring the sequence through repeatability”, it can be said to be the same.

      • KCI등재

        『朝鮮史』(朝鮮史編修會 간행) 편찬 사업 전후 일본인 연구자들의 갈등 양상과 새로운 연구자의 등장

        정상우(Jeong, Sang-Woo) 한국사학회 2014 史學硏究 Vol.- No.116

        이 논문은 식민주의 역사학의 중추로서 평가되는『朝鮮史』편찬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본인 연구자들 사이의 갈등을 규명함과 아울러 사업의 장기화에 따라 새롭게 기용되는 인물의 면모를 확인하여 조선사편수회의 기능을 조망하기 위한 것이다. 1915년 이래 진행되던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을 대신해 새로운 사업으로서 『朝鮮史』편찬이 구상되던 때부터 이 사업을 기획하던 쿠로이타와 나이토는 과거 총독부에서 벌였던 연구?조사사업의 관계자들을 최대한 배제하며 사업을 독점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조선에 연고가 없던 새로운 인물들을 발탁하여 사업을 전담시키고자 했으며, 이는 이나바 이와키치의 사업 참여로 시작되어 스에마쓰, 나카무라의 기용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편수회에 상근하면서 『朝鮮史』편찬을 위한 주요한 위치를 장악하며 사업을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과거 총독부 주도의 연구?조사사업에 관여했던 이들은 편수회에서 멀어져 갔다. 이 과정에서 이마니시 류우는 사업에서 자신의 위상이 약화됨에 따라 편수회에 사표를 제출하는 등『朝鮮史』편찬 사업의 중추였던 쿠로이타와 이나바와 갈등을 겪었다. 한편 『朝鮮史』편찬이 장기화됨에 따라 과거 총독부 주도의 연구사업과는 무관한 이들의 사업 참여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새롭게 『朝鮮史』편찬을 맡게 된 이들은 경성제대의 조선사학 전공자 또는 도쿄제대에서 사학을 전공한 이들이었으며, 결국 『朝鮮史』는 이른바 ‘근대 역사학’의 세례를 입고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에 손을 빌려 1938년 3월 완결되었다. 그런데『朝鮮史』가 발간되기 시작한 1930년대 아카데미즘 내에서 조선사에 대한 열기는 사그러들고 있었다. 일본 내 대학에서의 조선사학 강좌는 사라졌으며, 그나마 2개의 강좌가 계속해서 유지되던 경성제대에서도 조선사학 전공자는 눈에 띄는 감소 추세였다. 이렇게 아카데미즘에서 조선사학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때 제국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당시 최고의 엘리트 연구자들이 편수회에 진입한 것이다. 이들은 당시 그 누구보다도 조선사 연구를 위한 사료들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朝鮮史』편찬을 위해 이를 읽고 정리해야만 했다.『朝鮮史』편찬 과정은, 이들 개개인에게는 조선사에 대한 연구 과정이었고, 이들은 보통 대학졸업 후 자신들의 첫 논문을 편수회 재직시절 『靑丘學叢』의 지면을 통해 발표하였다. 즉 『朝鮮史』 편찬을 위해 새로운 연구자를 그러모은 편찬위원회?편수회는 - 연구 기관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 당시 제국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이 조선사를 연구하게끔 유도하였으며, 편수회에 모인 ‘『朝鮮史』편찬자들’은 당시 조선사 연구의 중심이자 최대 집단이었다고 하겠다. 바로 이들에 의해 1930년대 이후에도 아카데미즘 내에서 조선사 연구는 계속 진행되었고, 식민주의 역사학은 전개된 것이다. 즉 편수회는 연구기관을 표방하지 않고 오직 사료의 수집과 편찬, 이를 바탕으로 한 『朝鮮史』편수만을 내세하며 사업의 ‘공정성’을 과시했지만 조선사 연구자의 재생산기관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는 가운데 식민주의 역사학의 중심기관으로서 기능했다고 하겠다.

      • KCI등재
      • KCI등재

        일제 강점기에 대한 수능 문항과 歷史像의 왜소화

        鄭尙雨(Jeong, Sang-Woo) 역사교육연구회 2018 역사교육 Vol.145 No.-

        ‘Korean history’ has become a compulsory subject in the College Scholastic Ability Test(CSAT) from 2017. At the same time, an absolute evaluation system was introduced. So how does the historical images sketched by questions about the Japanese imperialism era in CSAT come to change? This paper examines questions about the Japanese imperialism era in CSAT after 2004 to answer this question. By the three times of changes in History Curriculum, the number of questions about the Japanese imperialism era in CSAT has been reduced. And the format of question was simplified for the goal of ‘easy question’. So historical images which are presented in questions in CSAT were reduced. All three History Curricula are centered around the historical images of ‘domination and resistance’. However, the decline of the content in the History Curriculums has further enhanced the historical images of ‘domination and resistance’ in CAST questions. In relation to the ‘domination’, there were many questions about the society state in which a particular colonial rule was enforced. This is likely to overestimate the ruling power of society as a motive for social change. In relation to the ‘resistance’, questions about resistance showing the transition to modern society disappeared. Only are issues related to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Provisional Republic of Korean Government left.

      • KCI등재

        20세기 전반 일본인 학자의 `북방사` 연구 모습 ― 도리야마 키이치 (鳥山喜一)의 연구 궤적

        정상우 ( Jeong Sang-woo ) 한국사회사학회 2016 사회와 역사 Vol.0 No.112

        이 논문은 경성제대 교수로서 일본 관학 아카데미즘을 체현하며, 발해사를 중심으로 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했던 도리야마 키이치(鳥山喜一)의 연구 궤적을 살펴봄으로써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식민지기 만주를 비롯한 북방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단초를 얻기 위한 것이다. 도리야마는 발해사 연구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1945년 이전 그는 발해사만이 아니라 金, 만주 지역의 민족 등에 대해 다양한 논문들과 강연문을 남기고 있다. 도리야마 연구의 중심인 발해사 연구는 다양한 사료와 고고학적 조사를 기반으로 하여 철저한 실증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당시 다른 발해 연구자들처럼 발해의 지명을 고증하고 일본과 발해의 밀접한 역사적 관계, 발해에 미친 중국 문화의 영향을 해명하면서도, 발해 문화에 나타나는 고구려 문화의 요소와 발해의 고유문화를 이야기하였다. 물론 그는 발해 고유문화를 야만시했지만 발해 멸망의 원인을 고유문화의 상실에서 찾으며 그 가치를 중요시했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金과 만주 민족에 대한 연구들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金의 통치정책을 여진민족중심주의와 漢化로 대별하고, 猛安·謀克으로 대변되는 여진 고유의 제도와 國粹를 발견하고 중국문화의 유입에 따른 고유성의 변질을 멸망의 이유로 보았다. 이러한 연구의 한편에서 도리야마는 20세기를 아우르며 아시아의 역사를 조망하는 강연 활동을 벌였다. 그는 동북아시아 민족이 기원을 肅愼에서 찾고, 중국문화에 영향을 끼친 북아시아 민족의 문화, 漢字文化에 대응했던 여러 북아시아 민족들의 문자와 그 가치를 역설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17세기 중반 이래 러시아의 팽창에 따른 러일 교섭의 발생이나 만주와 몽고 지역의 위기 및 러시아에 맞서 이를 저지했던 일본의 역사적 위상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도리야마는 발해사를 중심에 두면서도 제국 일본의 팽창에 발맞추어 자신의 관심을 확대했다고 하겠다. 특히 그는 중국 왕조로부터 분리된 독립된 실체로서 발해, 金을 비롯한 북아시아의 민족을 바라보며 문자로 대변되는 이들의 고유문화를 강조했다. 이렇게 정치적·문화적으로 만주를 비롯한 북아시아를 중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20세기 개시 이래 대륙침략을 감행했던 일본의 야심과 맞닿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야마가 강조한 북방민족의 문화는 고유하지만 선진적이지 않다. 선진문화는 바로 중국문화로 북방민족의 발전을 위해 그 도입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漢文化의 난숙기는 이미 지났으며, 그래서 漢民族은 老人的이며 老獪하다고 보았다. 이는 만주국이 건국된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만주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저들을 지도하면서도 보호할 수 있는, 난숙기가 지나지 않은 새로운 문화의 지도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17세기 이래 북아시아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며 서구로부터 만주를 지켜 온 일본임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Kiichi Toriyama, embodied the academic scholarship of Japanese imperialism as a professor at the Imperial University of Keijo and is renowned as a researcher of Balhae history. As such, Balhae is at the heart of his studies. But before 1945, he actively made speeches on Asian general history as well as having conducted several studies and embarking on fieldwork to on cover historic remains of Balhae and Jurchen (Jin Dynasty). This paper is intended to investigate the attitudes of Japanese researchers about the North Asian history before 1945 through Toriyama`s research and lectures. Toriyama`s research on Balhae and Jurchen were thoroughly based on investigations of historical documents and archives. He thought that the influx of Chinese culture was essential to the development of North Asian people, and emphasized the influence of Chinese culture on Balhae and Jurchen. However, Toriyama discovered the essence of the North Asian people`s culture and emphasized its value. In other words, the native culture of North Asian people was barbaric, but it was essential for maintaining their countries. Along with the expansion of this kind of perspective, he looked globally at the flow of Asian history and emphasized the status of Japan, which contained Russian forces since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In conclusion, the North Asian people had to protect their own culture for their survival, but required advanced Chinese culture to develop. This adoption, however, fundamentally altered the native culture of the North Asian people, eventually leading their extinction. And the Chinese culture excessively matured, displaying itself as both old and sly. This was the same in the 1930s when Manchukuo was founded. For the Manchurian people, it`s necessary a new culture which guides them while protecting their native culture. And, looking at the historical flow of Asia, Japan emerged as a protagonist in North Asia since the 17th century and has protected Manchuria from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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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주의 역사학에서의 고려 시대 연구 - ‘蒙古襲來’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정상우(Jeong, Sang woo) 한국사학회 2021 史學硏究 Vol.- No.141

        19세기 후반 이래 근대화와 제국주의화가 동시적으로 진행된 일본사의 전개과정을 고려할 때, 당시 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주변으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측면과 더불어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일본의 근대 역사학의 성립과 전개는 ‘동양’의 형성 과정이었다고도 이야기된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사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일본인 역사가들의 연구는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성격, 즉 ‘동양’의 형성 과정 속에 위치짓고, 그 의미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편 피상적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는 대륙에서 연이어 등장한 북방민족의 거듭된 침략과 묘청의 난·무신정변 등으로 대변되는 눈에 띄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한국사의 대내외적 혼란을 보여줄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 과거 일본인 연구자들의 고려시대에 대한 연구와 서술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띈다. 바로 몽골의 고려침략과 元의 간섭 및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며, 특히 蒙古襲來를 전후한 시기 고려의 대외관계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시대를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한국사에 대한 ‘타율성론’에 입각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蒙古襲來’는 일본사와 직결된 것으로, 刀伊의 入寇와 더불어 제 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은 유이한 사건이자,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元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점에서 일본사의 위상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元, 고려, 南宋, 일본 등 당시 여러 국가들이 관련된 말 그대로 동아시아적 사건이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의미가 있는 몽고습래를 고려의 대외관계를 통해 접근했던 과거 일본인 역사가들의 연구를 이른바 ‘동양’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 역사가들은 고려에서 元의 종주권 확립이 元이 대일정책을 본격화할 수 있는 선결과제로 파악했다. 즉 대륙(원)과 일본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전제로서 고려의 대외관계를 바라본 것이다. 또한 蒙古襲來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서 元의 南宋경략은 물론 이들과 고려 및 일본과의 관계까지도 시야에 담으며 일본의 존재를 당시 동아시아 정국의 중요한 변수로 위치지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당시 연구자들은 13세기 중반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고려 건국 이래 고려와 송·일본이라는 동아시아 3국의 관계와 교통에 대한 고찰로 그 시야를 확대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이 대륙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즉 蒙古襲來라는 사건을 고려의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고찰해 나아갔던 과거 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이 사건을 동아시아적 사건으로 바라보며 대륙과 일본을 연결시켰음은 물론 대륙의 역사적 전개에 주요한 변수로서 일본을 위치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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