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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普通元年(520)永陽昭王蕭敷墓誌銘>考 - 墓誌文의 譯註를 겸하여 -

        양진성 중국사학회 2024 中國史硏究 Vol.- No.147

        <梁普通元年(520)永陽昭王蕭敷墓誌銘>은 梁 武帝의 次兄인 蕭敷의 墓誌로 오늘날 原石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宋代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粧帖(剪裱本)이 유일하다. 이에 본고는 이 剪裱本의 圖版과 淸代 이래로 현재까지의 학자들이 남긴 釋文과 題跋을 종합하고 이를 비교, 검토하여 기존 釋文의 오류를 수정하였다. 본고는 확정된 釋文을 대상으로 한국어 번역과 注解를 진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련 문헌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묘지문에 담겨 있는 南齊, 梁代의 역사적 정황과 제도를 복원하는 한편 古代 墓誌의 정형화 과정에서 이 墓誌의 출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蕭敷는 梁이 건국되기 전인 南齊 明帝 建武4년(497)년에 사망했다. 따라서 그가 王號를 받은 것은 그의 동생 蕭衍이 황제가 되고 난 이후의 일이다. 즉 그가 永陽昭王에 追封된 것은 502년이다. 그런데 그의 墓誌는 520년에 제작되었다. 墓主의 사망시점과 墓誌의 제작시점이 이렇게 차이가 나게 된 까닭은 520년 蕭敷의 부인인 永陽太妃 王氏의 죽음 때문이다. 蕭敷와 달리 그의 부인 王氏는 太妃로 進封되어 天壽를 누리다가 520년에 사망했고, 당시의 장례제도에 따라 그녀의 시신은 남편의 무덤에 合葬되었다. 이를 위해 蕭敷의 무덤이 잠시 개방되었고, 이때 당시 황제인 武帝는 형을 추억하면서 墓誌의 제작을 명령했다. 武帝는 당대 최고의 文士이자 고위 관료인 尙書右僕射 徐勉에게 墓誌銘의 작성을 특별히 勅書로서 명했다. 이 때문에 이 墓誌를 필자는 ‘奉勅撰墓誌’ 규정했다. 이를 통해 武帝가 이 墓誌의 제작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蕭敷墓誌> 이전의 남조 墓誌들은 정형화 된 唐代의 墓誌들에 비해 그 구성과 형식이 불완전하고, 독창적이고 새로운 시도들도 종종 확인된다. 반면 <蕭敷墓誌>는 序, 誌, 銘의 엄격한 분리, 標題 하의 撰者의 姓名 표기 방식 등이 모두 唐代의 정형화 된 墓誌와 일치한다. 따라서 이를 통해 늦어도 <蕭敷墓誌>가 등장한 普通元年(520)부터 남조에서는 묘지명이 정형화의 단계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蕭敷墓誌>에 기술된 역사적 사실이 갖는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正史에 疏略한 그의 官歷은 墓誌에 상세한데 이를 통해 劉宋에서 南齊를 거치면서 東宮 소속의 관리인 太子洗馬의 위상이 提高되고 이것이 후에 梁 武帝의 18班制에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梁書 「武帝紀」에는 무제가 詔書를 내려 蕭敷를 왕으로 追封한 일만 기록되어 있고 그에게 정확히 얼마의 食邑을 내렸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蕭敷墓誌>에 인용된 追封詔書에는 武帝가 그에게 食邑 二千戶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고 이는 당시 생존하여 왕이 된 무제의 다른 동생들, 즉 蕭敷의 형제들과 같은 수치다. <蕭敷墓誌>를 통해 당시 親王에게 하사된 식읍은 당사자의 생존여부, 서열의 고하와 관계없이 이천호로 동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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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chelson 간섭계형 광섬유 간섭센서 어레이

        양진성,김명욱,이상배,조재철,최상삼 한국광학회 1990 한국광학회지 Vol.1 No.2

        구성이 간단하고 시스템화 하기에 용이한 시간분할(TDM)방식 Michelson 간섭계형 광섬유 간섭센서 어레이를 구성하고 다점계측에의 응용 가능성을 보였다. 세 개의 감지부분을 갖는 Michelson 간섭계형 광섬유 간섭센서 어레이에 광펄스를 입사시키고 각 광섬유 센서로부터 시간에 따라 되돌아오는 신호 광펄스들을 검출하기 직전에 Mach-Zehnder 간섭계 형태의 보상 간섭계를 두어 각 광섬유 간섭센서 부분에서의 외부 영향에 따른 위상변화를 관찰하였다. One method for time-division multiplexing (TDM) of Michelson type fiber-optic interferometric sensor arrays is proposed and demonstrated experimentally. This method has some advantages; fewer fiber-optic components. low cost. and high reliability.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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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부 데스모이드 종양에 대한 수술적 치험 − 2예 보고 −

        양진성,원용순,허균,오홍철,신화균 대한흉부외과학회 2010 Journal of Chest Surgery (J Chest Surg) Vol.43 No.2

        데스모이드 종양은 조직학적으로 양성이지만 임상적으로는 악성으로 취급된다. 완전절제가 최선이고재발 시에도 재절제를 시행하는 것이 권장된다. 본원에서는 흉부에 발생한 데스모이드 종양에 대한 재발 2예를 경험하였고 재수술로써 완전히 절제하였다. 두 환자 모두 수술 후 양호한 경과를 보여 퇴원하였고, 현재는 특이 합병증 및 재발 없이 외래 관찰 중이다. 이에 문헌 고찰과 함께 보고하는 바이다. Desmoid tumor is histologically benign, but this tumor is clinically considered to be malignant. Surgical resection is one of the most effective therapeutic options for patients with this tumor and resection is the best choice for cases of recurrence. We experienced two cases of recurrence of thoracic desmoid tumor, and the patients were repeatedly treated by surgical resection. The patients were discharged without any complications, and careful follow up has been performed periodically. Therefore, we report on these cases of recurrent desmoid tumor along with a review of the related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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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네일 건(nail gun) 사고에 의해 전경부 기도 손상은 있었으나 식도 손상 없이 장 내로 유입된 못에 대한 치험 −1예 보고−

        양진성,신화균,이재욱,원용순,박영우 대한흉부외과학회 2008 Journal of Chest Surgery (J Chest Surg) Vol.41 No.5

        A 42-year-old male was admitted because of an anterior neck injury due to accidental firing of a nail gun. On chest X-ray, the nail was stuck in the anterior neck, migrated to the chest, and then to the abdomen. Only the trachea was damaged, leaving no injury in the esophagus. The nail in the intestine was removed by colonoscopy. The patient showed complete recovery without complications after fasting and conservative treatment. We report this case with a literature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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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량대(梁代) 봉칙찬묘지(奉勅撰墓誌)를 통해 본 묘지명(墓誌銘)의 정형화(定型化)-묘지(墓誌)에 등장하는 왕언문서(王言文書) 운영방식(運營方式)의 분석(分析)을 겸(兼)하여-

        양진성 중국사학회 2016 中國史硏究 Vol.105 No.-

        現存的南朝時期墓誌中, 標注爲“奉勅撰”的共有3個. 具體來說就是《梁天監元年(502)蕭融墓誌》ㆍ《梁普通元年(520)蕭敷墓誌》和《梁普通元年(520)蕭敷妻王氏墓誌》等. 通過墓誌中標注的“奉勅撰”這個詞語可了解到這些文章也就是墓誌銘是受皇帝之命而制作的. 但“奉勅撰”中的“勅”字幷非代表皇帝命令的常用的說法. 也就是說, “勅”幷非“詔勅”的簡略語. 這裏的“勅”是與“詔”所不同系統和用途的?一種王言文書. 在南朝時期, 皇帝的文書行政方面作爲體現自身的意志的手段使用了詔與勅這兩個系統的王言文書. 詔就是詔書, ?是在中書書寫原案後經門下的審核後再傳達到尙書來執行, 而其使用在全國性公告以及需要執行的“大事”方面. 而與此相反, 勅是用於面向臣僚的皇帝個人私下的囑托或意見的交換, 器物的賜與以及詩文的撰述等這些“小事”中. 此外, 其傳送過程也是不經過門下的審核或尙書的執行, 而是由中書書寫後直接被執行. 因墓誌銘的制作也屬於詩文的撰述範疇, 皇帝通過勅來命令制作墓誌銘應符合當時勅的用途. 同時, 本稿中探討的3篇墓誌銘中詔與勅是嚴格區分開來的. 因而從以上事實來看, 墓誌銘中標注的“奉勅撰”的“勅”幷非對皇帝命令的總稱, 而指的是當時行政中使用的被稱爲飭的王言文書. 也就是說“奉勅撰”指的就是皇帝通過被稱爲“勅”的王言來發出制作墓誌銘的命令. 但皇帝發出飭來命令制作墓誌銘這件事從當時墓誌銘的制作慣例方面來看是相當破格的事情. 因爲, 一般此前的墓誌銘是由與亡者有著直接或間接關系的人們自發性制作的. 更何況本稿中列擧的蕭敷夫婦的墓誌銘雖均通過飭來制作, 但蕭融夫婦中只有丈夫蕭融獨自通過勅來制作墓誌銘, 而起妻子的《王纂韶墓誌銘》却幷非如此. 蕭敷與蕭融均在死後得到王的追封, 同時蕭敷的妻王氏與蕭融的妻王氏均在生前被冊封爲太妃, 從而?們二人的地位相同. 盡管如此, 從只有蕭敷夫妻與蕭融的墓誌銘通過勅制作來看, 可知勅撰的墓誌銘幷非因規定的制度而制作, 而是根據皇帝的本意來制作的. 換而言之, 勅撰的墓誌銘是需要皇帝特別的關心和關照才可以的. 從而可知, 墓主的家人正是爲了强調這一點而在墓誌銘中添加“奉勅撰”這個詞語. 而這一處理方式自然而然地使墓誌銘形式與此前的方式有所不同. 在“奉勅撰”這個詞語前列擧了撰者的官職和姓名. 這是在此前的墓誌銘中未得到確認的敍述方式. 記錄制作墓誌銘的人的官職和姓名, 幷標注其制作是經皇帝的飭所爲是在梁代首次得以確認的. 因此, 梁的奉勅撰墓誌從起制作經過與形式來看, ?在當時是屬於想到特殊的情況. 盡管如此, 也需要關注這一類型的墓誌銘幷未隨著梁的消失一同消失. 在墓誌銘的冒頭標注文章撰寫者的方式在此後陳的墓誌銘中也得到確認. 而唐的奉勅撰墓誌的形式與用途方面也與梁的奉勅撰墓誌類似. 墓誌銘的主人公主要局限於皇室的成員, “`奉勅撰”這個詞語的標注方式(標注撰寫者的官職及姓名以後, 按奉勅撰的順序列擧)等方面梁與唐是一致的. 因而, 可推斷出梁的奉勅撰墓誌是延續到唐朝, 給唐的奉勅撰墓誌的形成帶來了一定的影響. 從這一點來看, 可認爲梁的奉勅撰墓誌對中國墓誌銘的定型化起到了重要的作用. 與此相反, 至今未發現北朝的奉勅撰墓誌. 而且也未發現在北朝時期有皇帝命令朝臣制作墓誌銘的事例, 幷且在現存的宗室諸王的墓誌中幷無與奉勅撰墓誌形式類似的墓誌. 從而, 根據至今可確認的文物和記錄可知在梁首次出現的奉勅撰墓誌是越過北朝在唐再現的. 因此, 探究南朝奉勅撰墓誌是否對北朝有直接影響以及從北朝到唐的具體繼承關系將是今後的課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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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六國春秋輯補』 所收 「後秦錄」의 史的 考察(1): 後秦 前史 - 『十六國春秋輯補』 卷49, 「後秦錄」1 註解 -

        양진성 중국사학회 2023 中國史硏究 Vol.- No.144

        隴西지역의 羌 집단을 대대로 지배했던 姚氏 일족의 수장 姚弋仲은 西晉 永嘉시기에 羌人들을 이끌고 關中지역으로 들어와 세력화를 도모했다. 그는 前趙에서 後趙로의 교체기에 後趙에 협력했고 後趙의 군주 石虎와 그의 아들 石祉를 위해 여러 차례 큰 戰功을 세워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後趙로부터 높은 官爵을 수여 받고 일정한 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後趙 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姚弋仲과 姚襄이 여전히 직할의 군단을 보유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後趙 정권 내에서 姚弋仲의 羌 집단은 상당한 수준의 자립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後趙 정권이 붕괴된 후, 그는 다른 北族係 국가들에 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강남의 東晉과 제휴를 시도했는데 본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후 아들 姚襄이 東晉으로부터 官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진을 침공하는 한편 중원의 許昌, 洛陽 방면을 점령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姚襄의 계획은 동진의 반격으로 좌절되었다. 그는 최후로 다시 關中에 들어가 재기를 노렸으나 당시 關中지역을 장악했던 신흥 강국 前秦과의 대결에서 패하였으며 그 당시 前秦의 지휘관인 苻堅에게 사로 잡혀 죽임을 당했다. 다만 그의 동생 姚萇을 비롯한 형제들과 일족 및 휘하의 羌人들은 별다른 보복을 당하지 않고 그대로 前秦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苻堅의 배려 하에 세력을 유지하다가 前秦의 붕괴 이후 姚萇을 중심으로 재결집하여 後秦을 건국하게 된다. 다음으로 본고의 작업을 통해 資治通鑑 「晉紀」의 정확성과 사료적 가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十六國春秋輯補 는 그 내용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대한 결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원문 내에 각 사건의 발생 시점에 대한 구체적 紀年이 상당수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내용만으로는 사건들의 시점을 특정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이 바로 資治通鑑 이었다. 資治通鑑 「晉紀」에는 본론에서 검토한 바 있는 「後秦錄」 기사의 상당수가 수록되어 있고, 그 기사에서 언급된 사건들의 시점이 특정되어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資治通鑑 의 편년에 의거하여 十六國春秋輯補 「後秦錄」 기사의 시점을 확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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