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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在唐 新羅人의 對日本 貿易活動

        권덕영 한국고대사학회 2003 韓國古代史硏究 Vol.31 No.-

        Among the documents compiled by Japanese at ninth century, many Silla people who engaged in trade with Japan appear. However they had Silla nationality and resided in T'ang region. So We can recognize them as Silla residents in T'ang region. Silla residents in T'ang China played an active part in trade with Japan from the latter half of eighth century. During sixty years at first stage, they participated in trade with Japan vigorously. So they made an exclusive sale of trade goods in Japan market. But after Chang po-go's(張保皐) death who was a excellent trader and a Commissioner of Cheonghae Garrison(淸海鎭大使), their trade activities with Japan were reduced. At that time Japanese looked at Silla merchants with dislike or keep a jealous eye on them. Accordingly Silla people could not help counterfeiting pose as T'ang people or doing business in partnership with T'ang merchants. In this way they kept up a trade business with Japan. By the way a serious occurrence which Silla pirate had robbed a tribute of the Japan Royal court happened at 869 AD. Owing to this event Silla merchants can not come and go to Japan at all. Ultimately Silla people's trade activities with Japan were broken off. Although their trade activities with Japan of Silla merchants resided in T'ang China were discontinued after one hundred years, they played an important role for ancient Eastern Asia World. First they brought private trade which had been forbidden by the government authorities into vogue and revitalized the Eastern Asia economy. Second their trade activities with Japan brought about new change of the ancient Eastern Asia World system. That is to say, the Asian feudal system controlled by China Royal court was collapsed and commercial bloc of Eastern Asia was taken form.

      • KCI등재후보

        9世紀 日本을 往來한 二重國籍 新羅人

        권덕영 한국사연구회 2003 한국사연구 Vol.120 No.-

        A Study of Silla Maritime Traders with Japan holding Dual Nationality in Ninth Century

      • KCI등재후보

        古代 東아시아인들의 國外旅行記 撰述

        권덕영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0 동국사학 Vol.49 No.-

        오늘날의 여행은 유람을 위한 관광(tour)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고대로 올라갈수록 유람보다 업무(business)를 위한 여행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여행기 찬술의 주역인 지식인들의 여행은 구도여행으로서 求法과 傳法, 공적인 使行과 유학이 대표적인 국외여행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의 구법 혹은 전법행위는 불교의 진리를 터득하거나 또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승려들의 巡禮旅行이다. 구법의 대상지는 주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와 서역, 동아시아 불교의 중심지인 중국 그리고 한반도였고, 전법을 위해서는 인도와 서역에서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에서 한반도와 일본으로 혹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여행하였다. 구법과 전법여행을 한 많은 승려들은 자신의 여행체험과 타지에서의 견문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것을 일괄 巡禮記라 할 수 있다. 현전하는 순례기로는 법현의 『불국기』, 현장의 『대당서역기』, 의정의 『남해기귀내법전』과 『서역구법고승전』,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원진의 『행력기』가 있다. 그리고 寶雲과 智猛을 비롯한 몇몇 승려들도 순례기를 찬술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사행과 유학 역시 고대 동아시아에서 주요한 국외여행의 한 형태였다. 사절단과 유학생들은 일정기간 외국을 여행한 후 의무적으로 혹은 지적 호기심에서 나름대로의 여행기를 남겼다. 중국인의 인도 및 서역 사행기로는 宋雲의 『魏國已西十一國事』, 裵矩의 『西域圖記』, 王玄策의 『中天竺國行記』가 있고, 한반도 삼국과 발해 사행기로는 陳大德의 『봉사고려기』, 高?의 『신라국기』, 馬于의 『신라기행』, 張建章의 『발해국기』가 있다. 그리고 일본 사절단의 당나라 여행기로는 伊吉連博德의 『이길련박덕서』와 難波吉士男人의 『난파길사남인서』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사행기 가운데 온전하게 전하는 것은 없고, 다른 문헌에 逸文으로 남아있거나 혹은 사행기의 제목만이 전한다. 이들 외에도 고대 동아시아인들은 수많은 순례기와 사행기를 저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전하는 여행기는 앞에서 소개한 십 수종에 불과하다. 특히 중국 주변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횟수의 사절과 가장 많은 수의 승려 및 학생들이 중국을 여행한 신라의 경우, 그들의 여행기가 전혀 전하지 않는 것은 불가사의하게 여겨진다.

      • KCI등재

        唐 長安의 新羅僧과 日本僧, 그 과거와 현재

        권덕영(?悳永) 한국사학회 2013 史學硏究 Vol.- No.110

        당대 장안은 세계 불교의 중심지였다. 이에 따라 신라와 일본을 비롯한 당나라 주변국의 많은 승려들이 장안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그들은 장안성의 여러 사찰뿐만 아니라 주위의 종남산 등지에 산재한 사찰을 찾아가 다양한 불교를 硏鑽하였다. 한국과 일본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후 자국의 구법승 관련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고 그들을 현창하였다. 특히 일본은 1980년대부터 구법승을 현창하는 작업을 왕성하게 추진하였는데, 청룡사의 惠果空海紀念堂과 공해기념비, 대흥선사의 공해 동상과 慈覺大師圓仁紀念堂, 대자은사의 공해 조각상 건립이 대표적이다. 역사기념물은 과거에 대한 집합적 기억을 되살려 그것을 문자 혹은 조각으로 형상화하여 미래에 전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조형물이다.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이 점에 주목하여 西安의 몇몇 사찰에 일본 구법승을 추념하는 각종 기념물을 조성하여 그들을 부활시키려 노력하였다. 한편 중국 산시성 시안시 정부는 2010년에 대자은사 정문 앞쪽에 약 2km에 걸쳐 당나라 ‘영광의 역사’를 조각물로 형상화한 大唐不夜城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첫 번째가 玄?, 慧能, 鑒眞, 그리고 일본 구법승 空海등 4명의 조각물이다. 반면 일본승 보다 훨씬 구법 활동이 활발했던 신라승은 대당불야성 같은 오늘날 중국의 ‘역사 만들기’ 현장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西安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역사공간이다. 당대 장안을 방문한 신라승과 일본승의 현재 모습은 그들에 대한 후대 역사를 예견하고 있다.

      • KCI등재후보
      • KCI등재

        중국 산동성 무염원에 대한 몇가지 문제

        권덕영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06 新羅文化 Vol.28 No.-

        無染院) temple was related with a SilaBuddhist priest Nanghye(朗慧和尙) Muyoum(無染) who had traveled to China in ninth century. In other Muyoumwon temple and stayed at 130 新羅文化 第 28輯there. But refering to inscription on a stone monuments and documentary records conected with the Muyoumwon temple, we can not find a hint or a clear statement related with Nanghye Muyoum. In addition to it, he inhabited mainly a Shnxi(陜西), Henan(河南) and Shanxi(山西) Province during the length of pursuing his s t u d i e s i n C h i n a . F r o m t h e v i e w p o i n t o f these, we may conclude that Muyoumwonm temple was irrelevant to Nanghye Muyoum.For al that Muyoumwon is worthy of atention. Many Sila people emigrated to T'ang and founded Silawon(新羅院) temple which was intend to band together Sila residents in T'ang China and aford a lodging convenience to Silla monks and travelers. Pubwhawon(法花院) temple established by Changpogo(張保皐) and Silawon of Yongheungsa(龍興寺) were typical of Sila temple.Muyoumwon temple was also established for the purpose of banding together Sila residents and afording a l o d g i n g c o n v e n i e n c e t o S i l a m o n k s a n d t r a v e l e r s . K i m c h u n g (金淸) who had emigrated from Sila to T'ang and accumulated a fortune by engaging in trade at the district south of Changjang(長江) founded Muyoumwon temple at the foot of Gonyousan(崑山) mountain of Shantung Province. Muyoumwon templ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a union of Sila residents of Shantung Province.[주제어] 무염원(無染院, Muyoumwon temple), 낭혜화상 무염(朗慧和尙 無染, Buddhist priest Nanghye Muyoum), 신라원(新羅院, Sillawon temple), 재당신라인(在唐新羅人, Sila residents in T'ang China), 김청(金淸, Kimchung), 곤유산(崑 山, Gonyousan mountain)

      •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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