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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五岳과 불교의 산신신앙 연구

        최진구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13 新羅文化 Vol.42 No.-

        산은 고대로부터 경외의 대상이었으며 생활의 터전이기도 하였다. 이는 곧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민간신앙 가운데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산악숭배의 형태로 나타나는 산신신앙이 되었다. 단군이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 민족의 산신신앙은 그 유래가 단군조선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가 각각 산신에게 제사하는 제도를 국법으로 행하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신라가 가장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다. 신라는 삼국통일 전부터 경주를 중심으로 오악이 성립되어 있었으며, 삼국통일 후 이 오악은 국토의 확장에 따라 확대되었다. 이렇게 확대된 삼산·오악의 제사 체계에 따라 왕이 친히 전국 명산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따라서 산악숭배에서 시원한 산신신앙은 우리 민족의 토착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에 대한 신앙은 산신에게 제사하는 산신제가 되었고 국가 제의로 발전하면서 산을 섬기는 것은 나라를 지키면서 왕권을 보호하는 것과, 천재지변을 물리치는 목적으로도 활용되었다. 이렇게 한반도 고대인들의 생활속에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던 산신신앙이 외래종교인 불교가 전래되면서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다.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큰 저항없이 왕의 권위에 의해 순조롭게 수용되었지만, 신라의 경우는 장기간에 걸쳐 내부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 이유는 신라사회에 뿌리내린 토착신앙이 상당히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차돈의 순교가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을 대표하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불교 교리는 타 종교에 비해 지극히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다원주의적 포용성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특성이 불교와 관련이 없던 토착신앙인 산신과 융합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불교의 성지신앙은 한국 특유의 산신신앙 및 산악숭배사상과 맞물려 청정과 광명숭앙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 신앙과 융합되었다. 산악에 대한 이러한 관념이 산신신앙을 쉽게 사찰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 내에서 산신의 지위는 가람의 수호신 역할의 기능과 함께 청정도량에서의 수행 생활의 평온을 기원하는 외호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KCI등재

        浙東 平水에서 鷄林鬻詩와 신라상인의 교역활동

        박현규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09 新羅文化 Vol.33 No.-

        당 元稹은 「白氏長慶集序」에서 친우 白居易의 시가가 세상에 널리 유행한 사실을 열거했다. 원진 서문은 長慶 4년(신라 憲德王 16년; 824)에 작성되었다. 여기에 신라상인이 백거이 시편을 구해 본국 재상에게 바치고 재상이 위조된 시편을 변별해낼 수 있는 이른바 鷄林鬻詩 고사가 열거되어있다. 鷄林은 신라를 지칭한다. 계림육시 고사 문구는 앞의 구절인 평수 학동이 백거이 시가를 학습하는 문구와 상관관계가 있다. 신라상인은 평수 저자를 드나들면서 백거이 시편 외에 주변 산지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구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매 물품 중에는 평수 지역의 명품이자 兩浙에서 품질이 가장 뛰어난 日鑄茶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 상류층과 사찰에는 차를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였고, 차를 소비하는 양도 많았다. 浙東 곳곳에는 신라상인이 드나들면서 활발한 교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 KCI등재

        통일신라시대의 공주와 공산성

        김수태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22 新羅文化 Vol.61 No.-

        이 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신라의 공주지역에 대한 지배방식이 어떠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가를, 그리고 공주에 살았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어떠하였는가를 다루어보았다. 통일신라는 옛 백제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를 위해서 공주를 정치적인, 사상적인 중심지로 삼았다. 이때 공산성이 지방통치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와 함께 통일신라는 왕경인이나, 지방인의 공주 이주를 통해서 옛 백제 사람들과의 융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공주지배는 중앙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기에는 이주해온 신라인이 옛 백제 사람들 보다 우위의 지위를 차지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작용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공주지역의 사회ㆍ경제적 상황이 매우 나빠지면서 나타난 농민층의 몰락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에 대해서 신라의 중앙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도, 할 수도 없었다. 이에 옛 백제 사람들의 불만을 이용한 신라인인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공주의 옛 백제 사람들은 견훤이 세운 후백제에 가담함으로써 신라를 붕괴시켰다. 이제 옛 백제 사람들이 통일신라를 거부하면서 백제의 새로운 부흥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 KCI등재

        신라시대 경주 북천의 수리에 관한 역사 및 고고학적 고찰

        강봉원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05 新羅文化 Vol.25 No.-

        This paper examines the suces and failure of water management on Kyongju, once the~936 A.D.) in ancient Korea. Many serious flods tok place in the city over a long period of time. By combining documentary sources, epigraphic records, and ue physical environment of Kyongju that 2 新羅文化 第 25輯repeatedly caused floods in Kyongju. I argued that the rulers of Sila probably constructed a levee along the Buk Chun[North Stream], which flows from the east to the west in the northern part of Kyongju city, sometime betwen the fifth and sixth centuries A.D. Furthermore, this paper examines how sucessfully the Sila Kingdom dealt with the flood problem and why water management in the later time period failed. This paper wil provide a case study on suces and failure of water management from the protohistoric to historic time period in Kyongju, Korea.

      • KCI등재

        울주 천전리 각석과 신라인의 바위신앙

        나희라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17 新羅文化 Vol.50 No.-

        울주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걸쳐 사람들이 남긴 많은 흔적을 간직한 바위이다. 사람들은 각석이 있는 이곳을 왜 찾았으며 여기서 무엇을 했을까. 특히 하단부의 명문과 세선 각화와 세선 흔적을 남긴 신라인들에게 각석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특정한 문양을 이루지 않는 쪼기흔이나 세선흔, 명문 가운데서는 單句나 單字에 주목하여 각석에서 이루어진 사람들의 행위를 추적해 보았다. 각석의 단자와 단구들을 살펴보면 새김 빈도가 높은 글자들이 있고, 서로 연관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들을 통해 각석에서 신라인의 ‘맹세’, ‘기자’, ‘기우’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고 보았다. 바위를 때리거나 선을 긋는 행위는 바위의 생명력을 끌어내고 그 힘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했음을 여러 민족지를 통해 살펴보았다. 각석의 쪼기흔과 세선흔도 이런 측면에서 볼 수 있다면, 이들은 신라인들이 바위에 맹세나 기자와 같은 기원을 하면서 그것을 보장받기 위한 주술적 행위로써 남긴 흔적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신라인들도 바위로부터 생명이 탄생하고 풍요로운 생산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바위의 문양이나 균열과 같은 흔적은 신성한 존재가 드나드는, 현실세계와 타계를 연결하는 문이라는 생각도 가졌던 듯하다. 신라인들이 바위에서 신성한 힘을 끌어내거나 그것을 옮겨 받기 위해 바위를 대상으로 쪼기나 선긋기와 같은 주술적 행위를 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 KCI등재

        신라 승려들의 여성 成佛에 대한 인식 - 『法華經』의 龍女 성불을 중심으로

        김영미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22 新羅文化 Vol.60 No.-

        여성 성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다양한 經論에서 발견된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法華經』에 나오는 龍女(사갈라 용왕의 딸)의 성불과 관련된 논의이다. 『법화경』의 진정한 의도는 원래 여성도 성불할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법화경』은 용녀가 성불을 위해 남방 無垢세계에 가서 남자의 몸으로 변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신라에 불교가 수용된 이래 『법화경』은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龍女 성불과 관련한 내용 중 신라 승려들이 어떤 점을 강조했는지 분석해보고 그것이 미친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중국 법상종 승려 窺基와 마찬가지로 7세기 중반 ~ 8세기 전반에 신라의 圓測, 憬興, 遁倫, 太賢 등 유식학 승려들은 용녀가 남방세계에서 남자로 변해 성불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반면 8세기 활동한 表員, 珍嵩, 見登 등의 화엄종 승려들은 중국의 智儼과 法藏의 주장을 따라 용녀의 빠른 성불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또한 재가신자들의 여성 성불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쳤다. 여성 성불에 대한 신라 승려들의 부정적 이해는 신라인들이 여성의 즉위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고, 진성여왕의 骨法이 남자와 비슷함을 강조하게 되었다. 반면 여성의 빠른 성불이 가능하다고 생각됨에 따라 여성을 포함한 모든 중생이 비로자나불이 되거나 바로자나불임을 깨닫기를 기원하는 발원문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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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羅 中代 渤海關의 變遷과 그 意味

        조이옥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05 新羅文化 Vol.25 No.-

        This paper is to study the development of the cognition on Balhae in the Midle Ages of Silaand its significance. At that time, Sila united neighboring countries and their people, kept the political stability, and also developed their culture. At the same time, Balhae, which the majority of Goguryeo's and Malgar's people lived in, was located on the north of the United Sila. Therefore, it has been thought that the understanding of Balhae during the Middle Ages must have functioned as the important parameter in studying the relationship betwen the United Sila and the BalhaeAfter Balhae had ben established, the Sila's views on the Balhae must have ben changed. On the whole, in the early times of the establishment of Balhae, Sila considered Balhae as a state which was built by the people who was called the Malgarian race. However, it could be found out that Balhae was the country which suceded Goguryeo from the mid-eighth century. The change of the Sila's thought about Balhae must have become the important turning-point which found the negotiations out of the conflict betwen the two states. To sum up, this paper could discover the important evidence of the theory on the era of the South-North state throughout the development of the Sila's cognition on Balhae in the Midle Ages of Sila Dynasty

      • KCI등재

        浙東 연해안에서 新羅人의 수로교통 -수로 유적과 지명을 중심으로-

        박현규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10 新羅文化 Vol.35 No.-

        Zhedong area was an administrative area of Tang(唐)-Song(宋) Dynasty era, then these is a whole areas of Zhejiang province(浙江省) except northwestern area on today. In early people of Silla(新羅) could traveled Zhedong cross sea by ship. Today there are many places of historic interests near the watercourse of Zhedong regarding traveling of the people of Silla. Yinshui(鄞水) in Ningbo(寧波) is the maritime entrance for both for Kim Cheong(金清), a businessmen of Silla, to do own business things and for the delegations of Silla Dynasty to travel to Zhedong. Pingshui(平水) market in Shaoxing(紹興) is the place for the businessmen of Silla to trade Baijuyi(白居易) poems, Rizhu(日鋳) tie, and a good of mountains and forests. Silla rock(新羅礁) in Putuoshan(普陀山) and the near temple are offered a vessel of Buddist temple for Silla's businessmen and vessels to navigate safely. Both Silla mountain village(新羅嶴村) in Xiangshan(象山) and Silla islet in Linhai(臨海) is the portal area of Silla's vessels(新羅嶼). Silla village(新羅坊) in Huangyan(黄巌) is the riverside for residence of Silla peoples. These places of historic interest are very important information to survey for the Silla's people and their works, like activities, watercourse and global management, in the Zhedong. The recent news in domestic mentioned that Amitabha Buddhist image(阿弥陀仏像) from Tianfeng tower(天封塔) in Ningbo was a Silla's Buddhist in 8 AD. However, according to the records from the underground of Tianfeng tower, it seems the Amitabha Buddhist image is Shaoxing(紹興) of South Song Dynasty(南宋) made by the offer Zhaoyun(趙允) and an artisan.

      • KCI등재

        신라 중대의 불교

        김복순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05 新羅文化 Vol.25 No.-

        The Sila Dynasty restored order keping balance after the faout the army of Tang Dynasty. The capital of the unified Silla named Serabol was changed the appearance. At this point the budhist society had a character of its doctrMyung-rang get a secret darma of Mun-du-roo under way and the foundation of the temple Sachunwangsa. Second is the writing a 쓿Panbiryangron씀 establish the capital buddhism being connected with the foundation of the temple sachunwangsa and try 2 新羅文化 第 25輯the transfer of the capital. The next the consideration on a 쓿Panbiryangron씀 and the argument a doctrin of the budhism is characteristic of the capital budhism. The rest in a section of the country the monk Yi-sang dwelled in the mountain Bu-suk, he teached the followers very easy. And it is fast growing an Hwa-en section after taking the monk Bupzang's writings to Sila.

      • KCI등재

        14면 주사위를 통해 본 신라 귀족의 놀이문화

        김정숙 동국대학교 WISE(와이즈)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10 新羅文化 Vol.35 No.-

        신라귀족들은 어떤 사교모임이 있었으며, 어떻게 친교를 유지했을까? 1975년에 신라왕조 동궁전의 연못인 안압지에서 발굴된 14면 주사위는 이런 질문을 또다시 수면위에 떠오르게 했다. 이 주사위는 세간에 많이 회자되어 잘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이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도 없고, 그에 관한 단편적 서술도 연구자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14면 주사위은 그 형태와 내용면에 있어서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주사위이다. 본고는 이 유물이 발굴된 이후 지난 35년간 14면 주사위에 관해 언급된 모든 글들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 용도를 추적하면서, 지금 혼용되고 있는 ‘주령구’와 ‘주사위’라는 명칭의 타당성을 검토했다. 그리고 이 주사위가 사용되었을 때의 놀이 현장을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신라의 풍습 등을 통하여 고찰해 보았다. 14면 주사위가 언급되어 있는 글은 인문계통에서 14곳, 그리고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계통으로 분류될 수 있는 논문 7편이 확인된다. 이중, 『안압지 발굴조사 보고서』에 게재된 김택규의 글이 주사위에 관해서 첫 번째로 발표된 글임과 동시에, 가장 많은 해석을 시도한 글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이기동이 14면 주사위로 사회발전단계를 진단해 내려고 시도했으며, 고경희 등의 단계에 이르러 酒令具라는 이름이 혼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자연과학계통에서는 이 14면체의 출현확률 조사와, 제작방법 규명작업 및 수학훈련 교재개발 등을 시도했다. 또한 관광분야에서 관광기념품 개발 등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를 다루었다. 그 결과 이 주사위는 각각 다른 모양의 14면을 가지고 있지만, 각면이 나올 확률이 일정하다는 결과를 얻었고, 이를 통하여 이 신라시대의 주사위는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임을 입증하였다. 결국, 이 주사위는 그 유물 자체의 중요성과 대중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명칭이나 사용 용도나 내용 등에 대하여 학계의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유물이 보존처리과정에서 불타 버리고 지금은 복제품만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꺼려했던 까닭이었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우선, 일반적으로 사용된 ‘주령구’ 또는 ‘주사위’라는 그 명칭의 타당성을 검토했다. 그 결과 이를 주사위라는 명칭으로 확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주사위가 놀이 자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본격적인 놀이 다음에 벌칙을 위한 도구인지를 검토하여 후자의 것으로 비정했다. 즉, 酒令이란 중국의 酒宴에서 술마시는 규칙 겸 놀이를 만들고 지키는 것인데, 이에는 여러 형식이 있다. 따라서 이 목제 유물을 주령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유물의 정확한 이름이 되기 어렵다. 또한 14면 주사위는 주령구라기 보다는, 특정 놀이에 부수된 벌칙 도구라고 생각된다. 더 정확한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는 이 유물의 명칭을 ‘14면 목제 주사위’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한편, 이 14면 목제 주사위의 각면에 쓰여진 내용과 唐代 성행했던 酒令을 비교할 때, 또 포석정의 流觴曲水나 신라사회의 시짓기 등 귀족들의 생활태도로 미루어 보면, 신라귀족 사회는 文字令을 주로 했던 듯하다. 또, 14개 벌칙을 통해 볼 때, 신라의 주연은 음주가무와 문장 창작이 어우러진 고급 잔치였다. 이곳에는 물론 여성도 참여했다. 그리고 당시 술이 곡주인만큼 술잔도 주발처럼 컸을 것이다. 안압지 연못에서 나온 벼루, 주발, 등잔 등은 바로 이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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