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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형이상학의 구조와 본성

        박준호(Park Joon-ho) 대한철학회 2006 哲學硏究 Vol.100 No.-

          형이상학에 대한 섣부른 재단은 형이상학에 대한 부적절한 상위 가설 즉 부적합한 상위 형이상학에서 비롯된다. 상위 형이상학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어 문제로 취급한 라제로비츠를 소개하고 그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상위 형이상학과 그 자신이 스스로 제시한 상위 형이상학을 모두 검토하여 형이상학에 관한 적절한 상위 이론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라제로비츠는 형이상학이 일정한 구조를 갖고 있음을 지적하였으나, 그가 제시한 구조는 진술의 체계로 이루어진 소산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여기서는 형이상학과 형이상학의 구성요소가 구별되어야 한다는 논지가 전개되었다. 마지막으로 본고에서 제시하는 상위 형이상학은 라제로비츠가 꼽고 있는 상위 형이상학적 이론의 덕목 즉 형이상학적 이론 간에 상존하는 불일치와 논란에 대한 설명력이라는 덕목 역시 만족시키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Morris Lazerowitz is one of the earliest philosopher who recognized that meta-hypothesis about metaphysics i.e. metametaphysics had to be distinguished from normative or substantial metaphysics. He classified several metametaphysical theories and put forward his own meta theory. I will critically examine his theory and criticism. To do this examination well, the distinction between metaphysics and some components of metaphysics would be needed. His idea that metaphysics has two or three layers is brilliant, because the layer concept indicate metaphysics has not unitary characteristic but complex structure. But by introducing layer concept to metaphysics he commits generic fallacy. According to Lazerowitz, constant dispute and disagreement in metaphysics should be explained. That contrary to his claim his metametaphysics is not good at account for this plain phenomenon is one of my points. Since most highly general theory is suffer from underdetermination, a simple phenomenon is not peculiar to metaphysics.

      • KCI등재

        ‘지혜론’으로서의 칸트 ‘형이상학’에 대한 고찰 - 칸트『형이상학의 진보』에서 ‘자유’, ‘신’, ‘영혼불멸’의 “실천적 실재성” 증명을 중심으로

        염승준 대동철학회 2017 大同哲學 Vol.78 No.-

        본 연구는 칸트의 “지혜론”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칸트는 종래의 형이상학에서 ‘초감성적인 것’, 즉 신의 존재, 영혼불멸을 이론적으로 증명하고자 한 것과 달리 그 둘의 객관적 실재성을 이성의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증명한다. 이에 대한 논거로 칸트가 『형이상학의 진보』에서 제시한 봄철가뭄의 “곡물거래”의 비유와 ‘선험철학’과 ‘본래적 형이상학’의 차이를 주목하였다. 이 두 가지 설명은 철학과 형이상학을 전공하지 않은 ‘보통의 인간 이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도 “초감성적인 것은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명제를 칸트가 의도한 대로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칸트는 자신의 형이상학이 종래 형이상학과 완전한 단절이며 형이상학의 부활이며 혁명이라고 확신하는 데, 이러한 확신을 독자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 그가 고안한 척도가 바로 “공간과 관념의 관념성의 이론”이며 “자유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에 관한 이론”이다. 칸트는 이 두 척도에 의거하여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등장한 첫째 단계인 독단적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둘째 단계인 이성의 회의적 정지상태의 한계와 의의를 논의한 후 자신의 형이상학이 최종의 완성된 형태임을 강조한다. 『형이상학의 진보』는 칸트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유용한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분트(Wundt, M)가 이미 밝힌 바처럼 칸트 철학 체계의 전체성을 이해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칸트가 자유가 형이상학의 출발지점이고 도덕의 존재 근거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본 연구는 형이상학, 자유, 그리고 도덕, 이 세 가지의 체계적이고 내적인 연관성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This study is for understanding metaphysics as “The doctrine of wisdom” of Kant. While previous metaphysics proves ‘the super-sensible’, namely ‘There is a God’ and ‘Immoratality’ in the sphere of theory, Kant does ‘objective reality’ of both in the practical and moral sphere of reason. As the proof of this, he notes the analogy of "the corn trade" of spring-season famine presented in “What real progress has metaphysics made in Germany since the time of Leibniz and Wolff” and the difference of ‘transcendental philosophy’ and ‘metaphysics proper’. These two explanations are of use in that even people with ‘ordinary human reason’ as non-specialists in philosophy and metaphysics are able to understand the proposition that the super-sensible objectively exists in the morally-practical point of view as intended by Kant. Kant is sure that his own metaphysics is resurrection and revolution of metaphysics as well as perfect disjunction from previous metaphysics. Also, in this vein, he devises the yardstick of ‘the doctrine of the ideality of space and time’ and ‘the doctrine of the reality of the concept of freedom’ for readers assurance. And, on the basis of these two sure yardsticks, Kant criticizes the dogmatic metaphysics as the first stage in the history of metaphysics and discusses both the meaning and the limit of doubtful standstill of reason as the second stage, thenceforth highlights that his arguing is the ultimate form of metaphysics. “What real progress has metaphysics made in Germany since the time of Leibniz and Wolff” is not only the useful text for understanding Kant's metaphysics but, as already clarified by Wundt, M, is able to offer some clues in the understanding of the totality of the system of Kant-philosophy as well. As Kant clarifies that freedom is the starting point of metaphysics and the root of existence of morality, this study is meaningful in that it testifies the systematic and internal relations of metaphysics, freedom and morality.

      • KCI등재

        Sur les certaines strategies de deconstruction pour echapper a la metaphysique traditionnelle

        김진택(KIM, Jun-Taek) 프랑스학회 2010 프랑스학연구 Vol.51 No.-

        니체와 데리다의 해체적 사유와 전략은 아직도 많은 오해와 왜곡 속에서 읽혀지는 듯하다 많은 오류 중 하나는 어떤 대상을 해체한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해체되는 대상이 사용하고 작동시켰던 개념과 사유의 메커니즘에 대한 엄격한 고민 없이 그것을 다시 재사용하면서 자신의 해체작업을 수행하려는 오류일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해체되는 대상의 표적을 해체작업을 통해 깔끔하게 노려낼 수 있다는 오해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론적 실천으로서의 해체는 현실적 실천으로서의 해체만큼이나 어렵고 복잡하게 전개되기에 이러한 전면적 전복과 해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데리다의 텍스트로부터 배우는 것은 바로 전통적 형이상학의 해체작업이라는 것이 결코 명분과 의지만을 앞세운 슬로건만으로는 실천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글은 주로 데리다의 텍스트가 제안하는 엄격하면서도 통찰 깊은 몇몇 해체적 전략과 개념들을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몇 개의 해체적 이론의 성찰은 단순한 부분의 고찰이 아닌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진행과 전개의 본질적인 속성을 드러내주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실험하고 실천한 철학적 텍스트들 중 데리다의 텍스트와 관점과 교차하고 조우하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이론적 실천도 함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세계와 사물을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에는 안과 밖, 선과 악, 현상과 본질등의 이분법적 사유가 매우 깊게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메커니즘이 쉽게 전면적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행사하고 규정해왔던 오랜 관념적 전통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떻게 이러한 구조가 작동할 수 있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을 수행한다 텍스트의 해체는 그 텍스트의 바깥에서, 그 바깥에만 존재하는 고유의 개념과 사유로 무장하여 해체하려는 텍스트의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방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형이상학적 규정에 의해 만들어진 안과 밖의 경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그것에 균열을 주는 작업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텍스트 내부에서는 균열이 바로 해체적 전략의 엄격하고도 효과적인 전략이며 이를 위해서는 텍스트 내부로 일종의 ‘마스크’을 쓰고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를 반복하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차이와 모순과 균열을 파악하는 지점이 바로 안으로서의 바깥, 혹은 바깥으로서의 안을 다시 새롭게 조망하는 탈형이상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해체적 작업의 전략을 따르게 되면 언제나 근원과 표피, 본질과 현상이라는 근원주의적 형이상학의 메커니즘 역시 흔들리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데리다가 말하는 근원의 보충이라는 논리가 작동된다 근원이라고 말하여지는 중심, 본질이라는 개념과 형상은 언제나 독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미 외부로부터의 개입과 침입을 받아들이는 보충의 사태를 언제나 경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원의 보충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때, 순수 현전과 순수 근원을 향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음이 추적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 형이상학이 이러한 근원적 형이상학의 욕망을 간직한 채 로고스 중심주의와 신학적 새계관과 공고히 결속된 관념과 구조를 강제하고 있음을 파악한다 특히 절대적 진리/선의 발견과 구현이라는 사태는 실존적인 관계로 구조화되기전에 형이상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현존재자에게 떠맡겨지는 형이상학적 빚의 경제 구조로 전환된다 나쁘고 저속한 것으로 강탈되어 존재자들에게 드러나는 진리는 우리 존재자들에게 고스란히 채무로 남게 된다 탕감되지 못하는 빚은 언제나 존재자의 어깨에 눌려 있는데, 이 빚은 신학적 세계관에 의해 탕감되어지는 기만적 전환의 순간을 맞는다 니체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존재자의 채무관계의 생성과 소멸의 메커니즘과 결합하는 신학적 세계관의 은밀한 침투와 결속에 주목하고 실존적 차원에서 그 지점에 대한 비판과 해체를 실헌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빛의 청산은 이상주의적 전통적 형이상학에게 드러나는 진리 개념, 그리고 신학적 세계관과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실존적 차원에서 매순간 해체되고 재구조화되어야하는 과제로서 남는다 그것이 푸코와 들뢰즈가 각기 다른 길에서 실천한 탈형이상학적 노력들이라 할 수 있을 것며 그것은 언제나 현실의 실존적 공간에서 매순간 수행되는 사유의 모험을 요구한다

      • KCI등재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의미

        신승환 한국하이데거학회 2009 현대유럽철학연구 Vol.0 No.20

        현대철학이 처한 상황을 하버마스는 “형이상학 이후의 사유” (nachmetaphysisches Denken)라 이름한다. 그것은 이른바 철학의 종 말 담론과 형이상학의 근본 패러다임이 한계에 도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언 어학적 전환”에 따른 철학이다. 이 논문은 탈형이상학이란 개념이 지니는 의 미와 내용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과연 이 개념은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나 거부의 철학인가, 아니면 형이상학의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인 가.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형이상학 이후의 사유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형이상학의 본질과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사유를 굳이 탈형이상학으로 이름하 는 까닭은 사유되지 못하고 잊혀져왔던 근원을 회상하는 과제는 형이상학의 역사적 경험을 떠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사유를 감내하면서 그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형이상학의 역사적 운명은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존재망각성으로 정의된다. 탈형이상학은 이러한 형이상학의 역사적 운명을 초월적으로 극복하면서 이루 어진다. 그것은 사유하지 못했던 존재진리를 사유하는 형이상학에서 시작된 다.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존재회상의 사유이며, 존재 드러남의 현재에서 이 루어지는 사유를 의미한다. Jürgen Habermas nennt die Situation der gegenwärtigen Philosophie und dessen Denken als “Nachmetaphysisches Denken”. Dies Denken wird von dem Ende der Philosophie und der Grenze der metaphysischen Grund Paradigma hergeführt. Der Terminus wird im Hinblick auf die sogenannte “Linguistische Wende” gestalten. Es handelt sich um den Artikel die Bedeutung und den Inhalt des Terminus der “Postmetaphysik”. Nach Martin Heidegger wird das Geschick der Metaphysik als die Seinsver- gessenheit bestimmt. Die Postmetaphysik wird in bezug auf die Verwindung der Geschichte der Metaphysik ausgeführt. Dies zeigt sich in ein gewisses Denken, das sich die noch nicht gedachte Wahrheit des Seins denkt. Das postmetaphysische Denken zeigt sich in das Andenken des Seins und das dem Sein höriges Denken. Das von daher herauskommende Denken wird in der Präsenz der Erschlossenheit des Seins bestanden.

      • 에디트 슈타인에서 형이상학의 새로운 정초 -스콜라철학과 현상학을 넘어서-

        이은영 ( Lee Eun-young ) 한국하이데거학회 2010 존재론 연구 Vol.22 No.-

        형이상학이 과연 학문일 수 있는가? 본 글은 그 이름만으로도 신화적이고 비과학적이며 관념론적이라 평가했던 형이상학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반형이상학적 학문들과 이론들의 결과가 기계문명으로 인한 자연의 파괴, 인류 정신문화의 황폐 등으로 ‘인간성상실’ 시대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에 기존의 형이상학과 오늘날의 반형이상학적 입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이상학 이론을 모색하는 지점에서 필자는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 1891-1942)의 형이상학을 제시하고자 한다. 슈타인은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현대의 후설 양자 간의 연관성을 통하여 자신의 형이상학적 위치를 지정한다. 우선 후설 현상학을 ‘주체에로의 전회’라는 표현을 통하여 관념론적 현상학으로 규정하며 비판한다. 후설의 현상학을 극복 할 수 있는 대안으로 그녀는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을 제시하며 이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형이상학을 정초한다. 그렇다면 과연 슈타인은 토마스주의자인가? 슈타인의 형이상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을 수용하지만 ‘과정을 중시하는’ 그리고 그 과정에는 ‘발전한다는 측면에서의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토마스주의자와는 구별됨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슈타인이 실재론적 현상학의 입장을 따르지만, 괴팅겐 현상학자들의 입장과는 차이를 보였던 바로 그 지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필자는 중세 스콜라철학과 현대 현상학, 양자의 입장을 수용과 비판을 통하여 ‘넘어서는’ 슈타인의 형이상학은 ‘과정을 중시하는 형이상학’이라는 점과 ‘발전적 측면을 강조하는 역동적 형이상학’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그녀의 독창적 형이상학은 한편으로는 현대의 결과중심주의 사회에 과정을 중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과 우리의 삶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부여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점을 극복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을 인간 존재 접근의 유효한 방안으로 제시함으로써 인간성 상실시대에 ‘인간적 소통’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판단된다. Der Ausgangspunkt dieser Studie ist die heutigen antimetaphysischen Wissenschaften und Theorien. Durch solchen antimetaphysischen Wissenschaften und Theorien sind die heutigen Menschen in die ungeheuerliche technische Zivilisation eingetreten. Und infolgedessen haben wir heuzutage eine Naturvernichtung, Geistesverlorenheit und Heimatlosigkeit. Die Verfasserin versucht in dieser Studie “eine neue Metaphysik” an Hand der “Metaphysik von Edith Stein(1891-1942)” aufzustellen. Edith Stein setzt mit der Phänomenologie von Edmund Husserl(1859-1938) und mit der Metaphysik von Thomas Aquinas(1225-1274) auseinander. Durch diesen intensiven Auseinandersetzungen konnte Edith Stein “eine neue Metaphysik” grundlegen. Zunächst kritisiert sie Hussel: Husserl's Philosophie hat “eine Wende zum Subjekt”, daher seine Phänomenologie ist “eine idealistische Phänomenologie.” Dagegen stellt sie ihre Phänomenologie als “eine realistische Phänomenologie” auf dem Grund der “Wende zum Objekt” auf. Dann ubernimt sie einerseits Thomas(Realismus) und andererseits kritisiert Thomas: In der Ontologie von Thamas findet Edith Stein keinen Prozess(Entwicklung). Dagegen betont sie in ihrer Metaphysik den Charakter des Prozesses(Entwicklung). Diese Studie hat folgende Ergebnis: Edith Stein ubernimt einerseits die mittelalterliche Scholastik und die gegenwärtige Phänomenologie und andererseits kritisiert beides. Durch solche Auseinandersetzungen uberwindet Edith Stein die Scholastik und Phänomenologie. Und sie stellt “eine neue Metaphysik” auf.

      • KCI등재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조현수(Jo, Hyun-Soo)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0 철학사상 Vol.35 No.-

        이 글은 형이상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베르그손의 생각이 무엇이며, 그가 어떠한 사유의 과정을 거쳐 이러한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글이다. 베르그손은 형이상학을 ‘실재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베르그손의 이와 같은 명료하고 솔직한 정의가 왜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지를 이야기하였다. 그에게 형이상학은 결코 사유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어떤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추구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그 탐구목적과 대상에서 결코 과학과 구별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언제나 그 안에 살고 있으면서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 즉 경험적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가지며 이 경험적 세계의 객관적 진리를 참되게 인식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형이상학(metaphysique)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과학(science physique)으로부터 구별될 수 있게 해주는 그 <meta>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형이상학의 정체성을 과학의 정체성과 대비시켜 규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형이상학이 과학과 달라질 수 있는 것은 결코 그것이 과학의 물음과는 다른, 그만의 고유한 물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에나 그것에게나 공통된 하나이고 동일한 물음에 대해 과학과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럴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형이상학과 과학의 차이는 그 탐구의 시작이나 과정에서보다는 그 결과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여러 다양한 복수(複數)의 과학들, 즉 저마다 서로 다른 대상들을 각기 탐구하는 상이한 여러 과학들을 모두 ‘과학’이라는 하나의 단수(單數)의 이름으로 묶을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지식의 논리(epistemologie)>가 무엇인지를, 즉 ‘참된 객관적 지식’을 가져다주는 진정한 현대과학으로 대접받는 모든 학문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지식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실재의 본질을 어떻게 보고있는가를 규명하려 하였다. 베르그손이 과학적 지식이 곧 실재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과학의 인식방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독특한 인식방식을 사용하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된 것은 과학의 기계론적 설명방식을 초과하는 어떤 초기계론적인 본성의 힘이 생명체의 활동을 주도하는 힘으로서 우리가 사는 실재 속에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바로 이러한 초기계론적인 힘이 실은 생명체의 활동을 주도하는 원리로서만 작용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물질을 포함한 실재의 모든 것의 활동을 지배하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What is metaphysics? The answer that Bergson gives to this essential philosophical question is very clear and frank. His answer says that the aim of metaphysics is nothing else but to gain absolute knowledge of the real, i.e. of the empirical world in which we always live. That is to say that he does not think the reason metaphysics could exist as an independent science distinguishable from other sciences lies in its ability to have a different objective of investigation than those sciences do. His definition of metaphysics proposes the idea that it has exactly the same objective of investigation as other empirical sciences, because these sciences also have in mind as their objective of investigation to gain absolute knowledge of how the empirical world works. By consequence, ‘experience’, normally considered as being able to serve as the definitive criterion for the distinction between metaphysics and science(physical science), cannot play such a role for Bergson, because the only way by which metaphysics could accede to the absolute knowledge of the empirical world is to refer to experience. As metaphysics has the same objective of investigation and, in order to accomplish this objective, must employ the same method(experience) as science, it is necessary for him to pursue his investigation with a long companionship with science. It means that it is not from the start, but only at the arrival that metaphysics would, if it is possible, separate itself from science, because their difference does not exist in that they raise respectively different questions - if this is the case, their separation would have been existed from the start -, but only in that they give respectively different answers to the one and same question they have in common, i.e. the question of how the empirical world works. Bergson declares that the answer given by metaphysics conceived by himself is not only different from, but even superior to the one that science gives to this same question. That is to say that he accords the value of absolute knowledge exclusively to his metaphysical knowledge in, at the same time, condemning scientific knowledge to a mere relative knowledge. Thus, we ask in this paper what the reason that makes Bergson place his metaphysical knowledge above scientific knowledge is.

      • KCI등재

        오늘날 형이상학적 헤겔?

        ( Ralf Beuthan ) 한국헤겔학회 2016 헤겔연구 Vol.0 No.40

        본 논문은 `형이상학적 헤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형이상학적 헤겔 해석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다룬다. 즉 본 논문은 피핀의 영향력 있는 헤겔 해석과 관련하여 `비형이상학적` 헤겔이라는 테제에 기초하는 해석모델과 논쟁한다. 비형이상학적 헤겔해석이 분석철학의 맥락으로부터 오늘날의 헤겔연구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해석에 대한 대안으로 `형이상학적 헤겔`을 다시 중심부에 놓으려는 해석모델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비형이상학적 헤겔 해석`의 장점을 강조한 다음, 형이상학 개념의 핵심요소들을 구별하여 그러한 해석에서 형이상학적인 것의 어떤 측면이 배제되고 부정되어지는지를 구별하고 평가한다. 여기서 필자는 피핀의 해석과는 반대로 헤겔에게서 형이상학의 모든 핵심 요소들이 중요하며 증명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필자는 `비형이상학적 헤겔`이라는 테제가 형이상학적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단서들의 특징을 재구성하고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형이상학적` 헤겔 독해 내지 `형이상학적 헤겔`이라는 테제에 기초하여 새롭게 논의될 수 있는 체계적 물음들을 제시한다. Der Beitrag geht der Frage nach, ob eine `metaphysischer Hegel`, genauer: eine metaphysische Hegelinterpretation gegenwartig noch sinnvoll sein kann. Es werden im Anschluss an Robert Pippin Grundzuge der gegenwartig dominierenden nicht-metaphysischen Lesart der Hegelschen Theorie herausgearbeitet. Dabei wird fur die These argumentiert, dass eine erneute `metaphysische` Lesart dennoch moglich und sinnvoll ist. Die Argumentation soll sowohl Vorteile eines nicht-metaphysischen Ansatzes als auch theoretische Moglichkeiten eines dazu gegenlaufigen `metaphysischen` Interpretationsansatzes sichtbar machen. Zur Verdeutlichung der Unterschiede wird eine Typologie von Metaphysikauffassungen erstellt.

      • KCI등재

        형이상학의 변형 - 강한 이성에서 약한 이성으로

        최신한 철학연구회 2022 哲學硏究 Vol.- No.136

        근대 이후의 형이상학은 주관성 형이상학에서 탈형이상학을 거쳐 상호주관성 형이상학으로 이행한다. 이러한 이행은 형이상학과 탈형이상학의 병존 또는 강한 이성에서 약한 이성으로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이행과정을 서술하고 그 타당성을 밝히려고 한다. 칸트의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을 염두에 두었으나 제한된 이성의 형이상학에 그쳤다. 헤겔의 형이상학은 전체 존재를 파악하는 이성의 체계학으로 발전했으나 개별성과 우연성을 중시하는 반형이상학을 통해 저지되었다. 분화와 해체의 분위기 속에서도 최소한의 합의를 중시하는 상호주관적 관점은 오늘의 형이상학이 도달한 지평이다. 약한 이성은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면서도 세계를 합리적으로 파악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약한 이성이 주도하는 형이상학은 대화의 형이상학이다.

      • KCI등재

        형이상학적 일원론 모델로서의 ‘예술가-형이상학’

        백승영(Baek, Sung-Young)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6 철학사상 Vol.61 No.-

        예술가-형이상학은 『비극의 탄생』 전체의 뿌리이자 결정체다. 『비극의 탄생』이 선보인 다른 사유들, 즉 예술론, 비극론, 문화 및 시대비판론은 그것과의 연계 없이는 그 전모를 밝힐 수 없다. 그래서 예술가-형이상학에 대한 공정한 평가야말로 『비극의 탄생『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 필요불가결하다. 이런 예술가-형이상학은 존재적-인식적 일원론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술가-형이상학이 ‘존재-생성’ 및 ‘참-가상’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지점, 아폴론적 힘과 디오니소스적 힘의 모순성 및 비극성을 존재의 특징으로 주목하는 지점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술가-형이상학이 이런 것이라면, 니체의 성숙한 후기 사유는 초기 사유의 발전적 완성이자 결실로 평가할 수 있다. 후기의 생기존재론 및 관점주의 인식론은 세계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해명하려는 방법적 일원론, (초월적)목적론적-실체적-도덕적 사유방식과의 결별 같은 초기 사유의 단초와 방법론을 그대로 수용한다. 하지만 ‘존재와 생성’ 및 ‘참과 가상’의 이원적 구분에 대한 대립과정이나, 가상의 존재적-인식적-가치적 복권의 시도들은 예술가-형이상학에서는 불분명하게 드러나거나 비명시적인 형태로 숨겨져 있는 것들로서, 후기 사유는 이것들을 명시적으로 구체화시켜 완성시킨다. 물론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은 후기의 새로운 설명 장치로, 아폴론적 힘과 디오니소스적 힘이라는 개념을 흡수하고 모순성보다는 관계성을 주목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사유의 단절이나 관점의 전환이라기보다는 발전의 지점으로 읽힐 수 있다. 해석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식적 가상의 ‘완전한’ 복권을 수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예술가-형이상학을 이렇게 이해하면, 『비극의 탄생』은 후기 사유를 씨앗의 형태로 품고 있는 저작이 된다. Artisten-Metaphysik is both the root and crystallization of 《The Birth of Tragedy》. Of other thoughts presented in 《The Birth of Tragedy》, i.e., those on art, tragedy, and culture and age, we cannot gain a full picture without linking them to Artisten-Metaphysik. Thus, for a proper understanding of 《The Birth of Tragedy》, it is indispensable to make a fair assessment of Artisten-Metaphysik. Artisten-Metaphysik can be understood as ontological-epistemological monism. This can be confirmed at the points at which Artisten-Metaphysik overcomes the dualism of ‘being-becoming,’ ‘truth-illusion’ and ‘reality-appearance’ and where the contradictoriness and tragicalness of Apollonian and Dionysian powers are regarded as the features of being. As far as Artisten-Metaphysik is understood in this way, we appraise Nietzsche’s late thoughts as the advanced completion and fruit of his early thoughts. His late ontology and perspectivism accommodate, as they are, methodological monism, which attempts to explicate the world and human beings by an identical ‘one’ principle, along with the idea and methodology which are separated from teleological-substantive-ethical thinking. However, the conflict process against dualism, and the rehabilitation process of appearance (becoming, illusion) are not clearly exposed, or hidden, in Artisten-Metaphysik. These are explicitly materialized and completed in his late thoughts. Clearly, the notion of will to power, as a new explaining device, absorbs Apollonian and Dionysian powers and focuses on the relationship itself rather than contradictoriness. However, it can also be read as a point of development rather than a severance of thinking or a change of view. The same is true with regard to the ‘complete’ rehabilitation of epistemological illusion through the concept of interpretation. If Artisten-Metaphysik is understood in this way, we can appraise 《The Birth of Tragedy》 as a work which broods upon his late thoughts in the form of a seed.

      • KCI등재

        휴머니즘의 脫 - 형이상학적 (II) - 老子의 道사유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를 중심으로 -

        여종현 대동철학회 1999 大同哲學 Vol.3 No.-

        우리는 휴머니즘은 진리와 자유로 구성되는 인간의 초월성(본질)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에서 정초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초월성을 주체성으로, 존재(자연)를 가치로 사유하고, 휴머니즘을 인간학주의와 동일시하는 주체성 형이상학(서양 형이상학 및 동양의 유교 형이상학)에서 휴머니즘은 그것의 본래적 의미 상실)을 야기한다. 그래서 본고는 참된 휴머니즘(그 본래적 의미 회복)은 주체성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형이상학, 즉 탈-형이상학에서 가능하다고 보고 그것에서 정초한다. 이 경우 우리가 도입하는 탈-형이상학은 노자의 도 사유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이다. 그리고 본고가 극복하고자 하는 주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시작되고 니체에서 완성된 서양 형이상학이다. 이 서양의 완성된 형이상학에서 존재(자연)는 경제적 가치로, 주체의 본질은 동물성으로, 진리는 주체가 자연을 인공화(비품화)하는 방법의 진리로, 자유는 주체가 자연을 인공화하는 무제약성으로 각각 사유된다. 인간은 그러한 진리와 자유를 통해서 마침내 자연을 인간의 이성 안에 가두어 그것을 무제약적으로 지배하게 하고, 그 결과 인간과 자연은 인간성과 자연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휴머니즘의 본래적 의미가 상실된다. ....와 하이데거의 탈-형이상학, 즉 휴머니즘의 본래적 의미회복은 주체(인간)에 의해 왜곡, 은폐, 망각된 존재(도)를 회복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그것의 회복은 우선은 주체가 자연 자체(....에서 무위자연, 하이데거에서 피지스)에로 귀환하는데서 시작된다. 이 귀환은 형이상학적 자연, 즉 인간의 이성 안에 갇힌 자연을 원래의 그것에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자연 차체는 주체와 주체에 의해 규정된 자연의 근원이다. 휴머니즘의 본래적 의미 회복은 인간이 그러한 자연 자체에 귀환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데서 가능하다. 자연 자체는 존재(도) 자체에 따른 존재자(..)의 존재이고 인간 역시 하나의 존재자인 이상, 인간이 자연 자체에로 귀환하자면 존재(도) 자체에 따라야 한다. 인간은 어떻게 그것에 따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 인간과 존재(도)의 관계를 ....의 “......”과 하이데거의 “Esgibt Sein”에 함축된 도(존재)의 의미에서 찾았다. 그것에 함축된 존재(도)의 의미는, 존재(도)가 존재자 (..)에로 자신을 탈은폐하면서(보내면서) 자신을 은폐하는(거둬들이는) 것이다. 이러한존재(도)의 의미는 존재(도)의 진리, 존재(도)의 역사(운명), 존재(도)의 완전한 자기화, 자유로 표현되었다. 이에 존재(도)는 진리, 역사, 자유로 ....(..)하되, 존재자에서, 특히 모든 존재자들 중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자에서 그렇게 현성 생 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존재 ( ) . (도)의 진리 안에 섬이다. 그 때에 우리는 휴머니즘의 본래적 의미 회복이 가능하다고 본다 I think that humanism can be founded in metaphysics which researches human transcendence composed of freedom and truth. But I think that humanism loses its original sense in ‘the metaphysics of subjectivity which considers human transcendence as subjectivity, Being(nature) as value, and identifies humanism with anthropologism. So, I think that humanism is possible in metaphysics that attempts to overcome the metaphysics of subjectivity, namely in meta-metaphysics and found it in meta-metaphysics. The meta-metaphysics being discussed in this essay is Lau-tzu's thinking of Tao and Heidegger's thinking of Being. The main metaphysics that we attempt to overcome in this essay is Western metaphysics that begins with Platon and ends(finishes) in Nietzsche. In this finished Western metaphysics, Being is considered as economic value, the essence of subjectivity as animality, truth as the truth of method that subject make nature artificially, and freedom as unconditionality that subject make nature artificially. On the basis of such truth and freedom, man locks nature in his reason and controls it unconditionally. From that follows the loss of naturality of nature, and from the loss of naturality follows the loss of humanity, namely the loss of original sense of humanism. Lao-tzu's meta-metaphysics and Heidegger's meta-metaphysisocs are charactered as recovering Being(Tao) interpreted wrongly by subject. Its recovering begins with returning to ‘nature self(........ for Lao-tzu, '.''. for Heidegger)’of subject. And this returning let metaphysical nature, that is, nature locked in human reason go back to nature as it is. The nature self is the source of subject and of nature formed by it. The recovery of original sense of humanism is possible when man returns to such nature and reconciles himself with it. The nature self is Being of being entrusted to Being(Tao) self. Man is also a being among beings belonging to such nature self. Therefore, man must follow Being(Tao) in order to return to nature self. Can man follow it really? To answer to this question, we explained the correlation of Being(Tao) with man in the sense of Being(Tao) implied in Lao-tzu's “......” and Heidegger's “Es gibt Sein”. The sense of Being(Tao) implied in them is that Being(Tao) reveals self unto being and withdraws self. This sense of Being(Tao) is the truth of Being, the mittence(Geschick) of Being, the event(Ereignis) of Being, freedom. Being(Tao) now comes-to-presence(wesen) as them, but as them only in man among all beings. The essence of man is his standing in the truth of Being(Tao). I think the original sense of humanism can be recovered when man stands in the truth of Being(T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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