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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프랑스사 연구 회고와 전망 -20년史, 프랑스사 연구의 용광로-

          신동규 한국프랑스사학회 2019 프랑스사연구 Vol.- No.41

          Twenty years ago, Korean Review of French History(KRFH) was born with the creation of the Korean Association of French History. The history of the KRFH shows the itinerary of research development on French history in South Korea. The research on French history that began with the first topics around the old regime and the French Revolution, the labor movement and socialism. develop through KRFH in various fields of research: business history, urban history, feminist history, history of cinema, history of migration etc. By including the period of the Vichy government and movement 68 as the new subject, and with the development of research on medieval history, its dimension is expanding and the new generation of researchers interested in colonialism and racism gives attention to new territories such as Africa and Indo-China with geographical expansion. 『프랑스사 연구』가 발간된 지 20년이 지났다. 한국프랑스사학회와 함께 시작된 『프랑스사 연구』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프랑스사 연구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로 요약되는 초기 프랑스사 연구가 『프랑스사 연구』를 통해 기업사, 도시사, 여성사, 영화사, 이주사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였으며, 비시 정부, 68 운동 등 연구의 범위가 확대되는 한편 중세사 연구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또한 식민주의, 인종주의 등 다양한 문제의식이 반영된 새로운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아프리카, 인도차이나 등 프랑스사 연구의 지리적 범위가 확대되었다.

        • KCI등재

          19세기 프랑스 식도락 문화의 발전: 러시아식 테이블 서비스의 도입에 관하여

          이홍 ( Li Hong ) 한국프랑스문화학회 2018 프랑스문화연구 Vol.36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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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요리에 대한 평판은 이미 수세기 전에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고, 식도락은 프랑스 문화유산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리하여 2010년 11월 16일에는 ‘프랑스의 식도락 식사'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리스트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식도락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초기 레스토랑이 등장하면서 프랑스의 요리 평판이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의 이웃 국가들에게까지도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바로 이 시기에 식도락에 관한 수많은 개론서들이 발행되었다. 앙토냉 카렘Antonin Careme, 위르뱅 뒤부아Urbain Dubois 또는 쥘 고페Jules Goffe 같은 요리사들과 장 앙템 브리아-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Alexandre-Balthazar-Laurent Grimod de la Reyniere와 같은 전문가들이 식도락에 관한 저서를 남겼는데, 새로운 요리 및 음식문화를 개발하기 위한 비평과 조언 등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새로운 식도락의 규칙에 무지한 식당 손님들을 일깨워주고, 식탁에 제공되는 포도주와 음식의 질에 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며 지켜야 할 식사 예절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는 소위 식도락의 ‘초심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본고는 이 당시 프랑스에 도입된 테이블 서비스의 유래 및 적용 과정에 대해 연구해보았다. 특히 여러 저술에서 언급된 주프랑스 러시아 대사인 알렉상드르 쿠라킨Alexandre Kourakine이 소개한 ‘러시아식 테이블 서비스'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었다. 러시아식 테이블 서비스는 위르뱅 뒤부아에 의해 프랑스에 전파되어 유행하게 되었는데, 프랑스식 서비스와 달리 러시아식 서비스에서는 식사의 각 단계에서 개별 음식이 차례로 테이블에 차려졌다. 또한 러시아식 상차림에서는 테이블의 장식이 간소했기 때문에, 테이블에 도자기나 은으로 된 고급 식기들을 많이 올려두지 않았다. 두 가지 상이한 서비스에 관해서는 각각 옹호자와 반대자들이 존재했다. 전통적인 프랑스식 서비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프랑스식 요리예술”의 장식 및 미학과 일종의 예식으로서 식사 서비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러시아식 서비스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요리사가 추천하는 적정 온도에 맞추어 요리를 맛보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간소한 방식으로 식사가 차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논쟁은 수 십 년간 계속되었고, 마침내 제2 제정이 시작되는 시기인 1850년 이후에 러시아 테이블 서비스가 프랑스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 KCI등재후보

          Charles-Paul Landon의 「박물관 연보와 오늘날의 화파」와 ‘과거 프랑스 화파'의 미술사적 의의

          김한결(KIM Hangyul) 프랑스학회 2019 프랑스학연구 Vol.0 No.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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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이후 프랑스의 과거 미술에 대한 서술은 이전과 달리 이탈리아, 홀란드 등 외국 미술의 헤게모니에 맞서 자국의 화파를 재조명하고 가치롭게 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는 미술관이라는 지식과 문화유산의 공유를 위한 새로운 공공의 장소의 탄생과 함께 등장한 소장품 도록을 통해 뚜렷이 관찰되는데, 더욱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분류와 목록화의 필요성에서 주로 연유한다. 본 논문에서 분석한 Landon의 「박물관 연보와 오늘날의 화파」는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품고 있는 여러 역설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 시대의 미술을 격려하는 한편 과거 프랑스 화파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예술 전통의 계보를 정립하여 이를 국가와 민족의 우수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근거로 삼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Landon은 프랑스 미술사에서 부재하다시피 했던 18세기 이전의 미술 전통을 대변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체로서 ‘과거 프랑스 화파'École française ancienne을 정의하고 이를 작품 설명과 비평을 통해 설파하였다. 이 러한 관점에서 이 책을 분석하여 19세기 초 프랑스의 과거 미술 서술의 특징을 정리하고 과거 자국 미술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은 정황을 파악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Au premier XIXe siècle en France, les idéaux révolutionnaires et d'un nationalisme s'immiscèrent en matières d'art et de critique artistique. À part l'exposition inédite des oeuvres d'art anciennes grâce à l'espace nouvellement créé sous le nom de “musée”, les catalogues s'opèrent comme un support visuel supplémentaire s'adressant à distance à un public plus large. Parmi les publications contemporaines, les Annales du musée et de l'école moderne des beaux-arts de Charles-Paul Landon sont remarquables pour leur accessibilité et l'analyse riche des oeuvres qui contribue à la mise en valeur de l'École française ancienne. Dans les volumes nommés l'“École française ancienne”, à côté de l'encouragement sans réserve de l'“école moderne des beaux-arts” dont dépendra l'avenir de la jeune France, se trouve l'éloge des maîtres anciens français. En reconnaissant chez ces derniers un mérite artistique sûr et une tradition continue, le catalogue de Landon ouvrit un spectre de goût plus divers quant à l'esthétique de l'art ancien. Aussi observons-nous ici une nouvelle définition du terme d'“école”: plus qu'un rassemblement d'artistes appartenant à une même nation, à un même atelier, ou pratiquant un style similaire, celui-ci incarne désormais l'image d'une généalogie, filialité sanguine de père à fils. Cette idée de parenté renforce un discours national dans l'histoire de l'art, qui privilègie la continuité et l'entité culturels et participe à la fabrique d'une identité nationale. À travers l'expérience visuelle et intelligente de l'art ancien offerte par Landon et ses contemporains, l'École française est interprétée, non sans difficultés et paradoxes, comme emblème de l'excellence universelle de la France.

        • KCI등재

          La France et la premiere etape de sa politique de securite europeenne : De la fin de la seconde guerre mondiale au debut de la cinquieme Republique

          이승근 한국프랑스학회 2004 한국프랑스학논집 Vol.46 No.-

          프랑스는 2차 대전 직후 자국의 안보유지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구사하게 되는데 그 기저에는 국가 안보의 유지 및 유럽에서 프랑스의 헤게모니 유지와 세계강국으로의 발돋움에 있다. 이를 위해 독일의 부흥방지, 소련의 위협회피, 이 둘을 위한 유럽에서의 공동방위체제 구축, 유럽통합의 추진, 유럽통합군의 창설 등의 정책을 구사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지배 하에 놓였고 유럽도 이러한 미․소 양대 축을 중심으로 동․서로 분할된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의도와는 달리 미국을 중심으로 서유럽이 유럽의 공동방위체제로서 NATO를 축으로 방위동맹을 형성한 뒤 프랑스가 이에 편입되고, 독일은 NATO에 편입된 가운데 주권회복과 재무장을 하게 된다. 자연히 프랑스가 추진한 유럽통합군 건설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점은 프랑스로서는 치욕적인 것이고, 1958년 드골대통령의 복귀는 이러한 환경에 기인한다. 드골은 집권 이후 프랑스의 위대성과 외부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확보하는 한편, 강력한 군사력의 유지 등 3개 노선을 중심으로 유럽안보 정책을 구사하게 된다. 드골이 집권한 당시 유럽 패권국으로서 강력한 프랑스의 재건을 꿈꾸며 자신의 정치․외교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한다. 이는 오늘날 현 프랑스 정부의 외교․안보상 정책적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골리즘'(gaullisme)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정치적 사변 (思辨)의 핵은 ‘국가'(nation)와 ‘힘'(puissance)으로 함축된다. 이의 구체적 표출은 프랑스의 과거 ‘위대성' (grandeur)의 회복과 외부로부터의 정치적 ‘독립'(indépendance) 확보, 자국의 ‘국력'(puissance) 유지로 나타나고 이를 바탕으로 드골은 프랑스를 세계 강대국의 하나로 다시 만들고, 미국과 소련 등 세계 초강대국들로부터 정치․외교적 독립을 유지토록 노력하게 된다. 특히 드골은 유럽 방위에 있어서 유럽인이 중심이 되는 기구설립, 유럽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유럽 데땅뜨 정책 및 ‘대서양에서 우랄까지'의 거대 유럽의 탄생을 꿈꾸게 된다. 한편으로, 대 미 종속을 탈피하기 위해 반대서양 통합 전략을 외교적으로 구사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 실시의 구체적인 결과로 드골은 66년 NATO 군사기구로 부터의 탈퇴를 결행하여 나토기구 내에서의 미국의 헤게모니 장악에 반대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서유럽동맹(WEU)이 유럽 안보 기구화 될 수 있도록 하였고 유럽공동체(EC)의 강화 정책을 펴서 서유럽의 결속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결국, 프랑스의 초기 정책들은 이후 5공화국 정부의 대외정책에 변형이 되기도 하였지만 지속적으로 반영이 되어 오늘날 유럽의 분단극복과 유럽에서의 ‘유럽인에 의한 유럽' 건설, ‘유럽통합'에 실질적으로 공헌한 것으로 평가된다.

        • KCI등재

          프랑스 혁명과 전쟁

          박윤덕(Youn-Duk PARK) 한국프랑스사학회 2014 프랑스사연구 Vol.- No.30

          혁명과 전쟁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근대의 혁명들은 전비 마련을 위한 증세와 함께 시작되었고, 기존체제 안에서 해소될 수 없는 긴장이 무장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혁명 프랑스는 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정복 전쟁을 포기했고, 인민주권과 민족자결의 혁명이념은 프랑스가 반혁명 세력에 맞서 혁명을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 혁명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혁명이념 자체가 프랑스와 그 이웃 국가들 사이의 전쟁의 필연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유럽은 이미 잉글랜드의 입헌군주제, 프랑스의 절대왕정, 스위스의 공화정과 같은 다양한 정치체제가 공존하는 것을 지켜 봐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명전쟁의 원인은 프랑스가 혁명 이념에 따라 한층 더 효율적인 국가로 부활할 가능성이 커지자, 유럽의 열강들이 전통적인 국가체제의 작동 원리에 따라 힘의 논리에 호소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Revolution and war seems to go hand in hand. Modern-days revolutions usually start with the levy of heavy taxes to finance wars, and breaks out when the unsolvable tensions plaguing the existing system are turned into armed conflicts. Well aware of these facts, the Revolutionary France attempted to maintained its newly established system by abandoning conquest wars, and the revolutionary ideas of popular sovereignty as well as self-determination enabled France to protect the Revolution from the Counter-Revolutionary powers. Then, why did revolutionary wars break out? The revolutionary ideas were not necessarily the root cause of the wars between France and its neighboring countries. Europe have had the experience of different states systems-including, England's constitutional monarchy, France's absolute monarchy, and Switzerland's Republic-coexisting on its land. The cause of the Revolutionary Wars is to be found in the fact that France, now equipped with its revolutionary ideas, was reemerging as a fully efficient and competitive country that would rival other European countries. Operating under the traditional mechanisms of balance of power and the fight for the hegemony of their own political system, France went into war with other European countries who saw France as a reviving threat.

        • KCI등재후보

          프랑스학과 프랑스 번역학,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향,윤성우 프랑스학회 2013 프랑스학연구 Vol.66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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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ns le domaine de la traductologie, on parle rarement de la traductologie 'française', parce que la traductologie est censée expliquer les aspects généraux de l'acte traduisant quelles que soient les langues ou les cultures impliquées. Pourtant, aucune traduction, aucun discours théorique sur la traduction ne pouvant être examiné correctement en dehors de son horizon linguistique ou socio-culturel, il est tout à fait justifié de parler de la traductologie dans le cadre des études françaises au sens large du terme. Si en Corée la traductologie est largement dominée par les théories et réflexions anglophones, il serait erroné de dire que la traductologie française n'y a jamais existé. De nombreux articles sur la traduction ont été publiés dans les revues consacrées à la linguistique, à la littérature et aux études françaises. Dans les deux revues coréennes représentatives des études françaises en Corée, à savoir la Revue d'Études Françaises et la Revue d'études franco-coréennes, une quarantaine d'articles sur la traduction a été publiée dans chacune de ces revues depuis les années 1990. Pourtant, à y regarder de plus près, on constate qu'une grande partie des ces études est de nature littéraire ou linguistique. TI est certain que les aspects littéraire et linguistique de la traduction constituent un objet d'étude incontoumable pour la traductologie. Cependant, il existe bien d'autres axes de recherche qui ont été peu explorés jusqu'à présent ; pratiquement aucune étude de nature diachronique ou synchronique sur les discours traductologiques en France n'a été réalisée dans le cadre des études françaises en Corée. Nous considérons que la traductologie française peut être abordée dans le cadre des Etudes françaises, en vue de détecter les éléments qui caractérisent les discours traductologiques en France. En guise d'étude préliminaire à cet ambitieux projet, nous avons relevé trois éléments qui caractériseraient les discours sur la traduction en France ; tradition cibliste, intérêt pour J'aspect éthique de la traduction, et discours epistemologiques sur la traductologie, Mais ces hypothèses doivent être vérifiées par une étude plus approfondie portant sur un corpus élargi, ce qui nous a conduits à fixer les principaux axes ci-dessous pour nos prochaines recherches. Dans un premier temps, nous allons procéder à des études diachronique et synchronique sur les discours traductologiques en France; nous allons examiner tous les discours traductologiques depuis la Renaissance jusqu'à nos jours pour vérifier nos trois hypothèses, et nous allons ensuite comparer les ciblistes français d'aujourd'hui pour déceler les nuances qui existent entre ces auteurs. Après ces études diachronique et synchronique, nous pourrons ensuite effectuer une étude comparative entre la France et J'Allemagne, et avec d'autres pays européens, voire avec la Corée. Au terme de cette étude comparative nous serons enfin à même de dégager les éléments typiquement français dans les discours traductologiques en France.

        • KCI등재

          ‘연옥'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시대적 고찰 : 마리 드 프랑스의 『성 파트리스의 연옥』 연구

          유승주(YU Seungju) 프랑스학회 2020 프랑스학연구 Vol.0 No.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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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 드 프랑스의 『성 파트리스의 연옥』은 『단시집』과 『우화집』에 이어 1189년 이후 집필된 작가의 마지막 저작으로 여겨진다. 『성 파트리스의 연옥』이 12세기에 인기를 얻었던 ‘연옥'에 관한 전설을 제재로 삼아 다시 쓴 작품이라는 사실은 12세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작품을 다시 읽게 한다. 또한, 이 작품이 프랑스 불문학에서 ‘연옥'을 처음으로 로망어[프랑스어]로 옮긴 작품이라는 사실은 작가가 이 제재를 차용하게 된 배경과 전설의 다시쓰기를 통해 행하고자 한 문학적 시도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본 논문은 『성 파트리스의 연옥』의 「프롤로그」와 주인공인 기사 오웬의 여정을 중심으로 12세기의 흔적을 찾는 과정을 통해 문학의 제재와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대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했다. 본고는 우선 『성 파트리스의 연옥』의 「프롤로그」를 다시 읽는 과정을 통해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그레고리우스를 거쳐 12세기에 체계화된 ‘연옥'이라는 개념을 살펴보고, 시대의 변화가 개념의 발전에 끼친 영향과 마리 드 프랑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양상을 검토하였다. 이어서, 마리 드 프랑스가 기존 전설에서의 인물의 여정에 변주를 더한 부분을 작가가 변모한 시대를 반영하여 그리고자 한 이야기와 연결지어 분석하였다. ‘연옥'이라는 신학적 모티프는 마리 드 프랑스의 손을 거쳐, 종교의 공간뿐 아니라 문학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시대를 반영한 공간이자 문학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공간이 된다. L'Espurgatoire de Saint Patrice de Marie de France est considéré comme la dernière oeuvre de l'écrivaine, rédigé sans doute après 1189, à la suite des Lais et des Fables. Sachant que cette oeuvre réécrit ‘la légende de Saint Patrice' popularisée à la deuxième moitié du 12ème siécle, il nous faut la relire dans son cadre historique. Par ailleurs, le fait que ce récit de Marie de France est la première oeuvre traitant “le purgatoire” dans la littérature française, nous amène à nous focaliser sur l'influence historique du contexte dans lequel l'écrivaine choisit sa source. Dans notre étude, afin de trouver la trace du siècle et la modification littéraire sous l'influence du contexte historique, nous nous sommes concentrés sur le Prologue et ‘l‘itinéraire d'Owein'. Dans le processus de relecture du Prologue de l'Espurgatoire de Saint Patrice, en examinant le concept de ‘purgatoire' systématisé dans le 12ème siècle via Saint Augustin et Saint Grégoire, nous avons découvert un rapport entre l'évolution du siècle et la transformation de ‘la légende du purgatoire' par Marie de France. Ensuite, en poursuivant le voyage du Chevalier Owein, nous avons remarqué la modification de la légende effectuée par l'écrivaine et le but littéraire qu'elle y recherche.

        • KCI등재

          제2차 세계대전과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노동자

          이재원(Jae-Won LEE) 한국프랑스사학회 2014 프랑스사연구 Vol.- No.30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노동자 관련 역사는 오랫동안 잊혀진 주제였다. 2차대전기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반면, 프랑스에 끌려간 인도차이나 징용노동자들의 운명은 현대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39년부터 1940년 6월 독일에 패배하기 전까지 9천여 명의 인도차이나인들이 보병으로 프랑스 군대에 징집되었으며, 2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들이 자발적 혹은 강제로 프랑스에 노동자로 오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해방 후에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지만, 14,000명 이상의 인도차이나인들은 전쟁기간 동안 비시(Vichy) 정부와 독일인을 위해 혹은 프랑스 민간기업을 위해 노동을 강요당하며 프랑스에 머물러야만 했다. 엄격한 군대규율의 통제하에 지내며, 수용소에 감금되어 부족한 식사와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가운데, 인도차이나 노동자들은 종종 폭력과 감금의 희생자가 되었고, 다수가 폐결핵을 앓았으며, 1천여 명이 넘는 이들은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만 했다. 역사가 망스롱(Gilles Manceron)이 언급했듯이 이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드러내는 것은 ‘참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The history concerning the Indochina workers in France has been a dismissed subject for a long time. While the problem of Korean and Chinese workers forced by Japanese government during World War II had repercussions all over the world, the destiny of Indochina draftees did not draw attention of contemporaries. From 1939 until June 1940, when France was defeated by German, more than 9 thousand Indochinese were drafted to the infantry and more than 20 thousand Vietnamese came to France as laborer voluntarily or by force. Some of them could returned to their country after liberation, but more than 14 thousand Indochinese had to stay in France, forced to work for Vichy, or for French private enterprises. Under the strict military discipline, held in camps with poor nutrition and overwork, Indochinese laborers often became victims of violence, imprisonment, and tuberculosis, more than thousand of whom died before the French liberation. As the historian Gilles Manceron referred, revealing this unknown event is not about the ‘repentance' but about the recognition of historic reality.

        • KCI등재

          세네갈 68년 5월 항쟁의 전개와 의의 -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설을 중심으로

          민진영 프랑스학회 2019 프랑스학연구 Vol.0 No.87

          이 글은 세네갈 1968년 5월 항쟁의 전개와 의의를 살펴보고, 이 항쟁에 대한 프랑스 68혁명의 영향력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분석한 논문이다. 68년 5월 다카르대학의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와 학생권익과 민주주의 정착을 요구하는 극렬한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 시위는 노동자들이 학생들에게 가세하여 다카르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정부는 국가비상사태의 상황에 빠진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 세네갈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정확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사건을 반란, 혁명, 시위, 운동, 항쟁 중에서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68년 5월 다카르 항쟁은 프랑스의 68혁명과 그 시기가 아주 유사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68혁명이 파리, 프라하, 시카고 등의 세계적 문화혁명운동으로 커져갔던 것을 볼 때 다카르의 항쟁 역시 프랑스 68혁명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동시에 세네갈 68년 5월 항쟁은 프랑스 68혁명과 무관하다는 역사적 해석을 받기도 한다. 일부는 세네갈 68년 5월 항쟁은 프랑스68혁명과 무관하다는 역사적 해석을 고수했다. 또 다른 일부는 항쟁에 대한 세네갈 정부의 대처가 프랑스의 정치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볼 때 프랑스 68혁명에 영향받았다고 해석한다. 세네갈 정권은 드골대통령의 68혁명 해결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이를 모델로 하여 세네갈 항쟁을 진압하였다.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세네갈 항쟁이 프랑스의 68혁명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셍고르 스스로 드골 정권의 처세에 의존하고 있었으면서 이를 감춘 채 시위대들의 외부영향을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네갈의 학생과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세네갈 68년 5월 항쟁에서 프랑스 68혁명의 세계적 확산에 발맞춤으로서 자유과 권리 확대를 외치는 것에는 기본적이었다. 다만 이들은 세네갈의 당시 상황에 대한 비판, 즉 신식민주의 통치체제에 대한 비판과 프랑스에 대한 높은 경제적 의존에 대한 비판을 좀 더 우선시하였다. 그런 면에서 외세의 손을 빌렸다는 셍고르의 표현은 옳지 않다. 외세의 손을 빌려 세네갈의 항쟁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 혁명인 프랑스 68혁명과 그 행보에 가세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Cet article consiste à examiner le déroulement et les valeurs de la révolte sénégalaise en Mai 68 ainsi que de ses diverses interprétations par l'influence du mouvement de Mai 68 en France. Les étudiants de Dakar ont appelé à une grève illimitée et à un boycott des examens. La police a étouffé les émeutes sur le campus. Durant les combats de rue qui ont suivi, un élève a été tué et arrêté. Les syndicats se sont mis en grève pour soutenir les étudiants. Les manifestations étudiantes se sont transformées en une opposition au gouvernement sénégalais et à son président, Léopold S. Senghor. Le chef d'État, qui était aussi un poète, a fermé l'université de Dakar et déclaré l'état d'urgence dans tout le pays. Cet évènement n'a pas encore eu de dénomination exacte ni au Sénégal, ni en France bien qu'elle ait été appelée sous différentes appellations : "la rébellion", "la révolution", "la démonstration", "le mouvement" ou "la rébellion". Ces événements se sont déroulés presque simultanément avec Mai 1968 en France, et ont été influencés par l'ancienne puissance coloniale, dont ils étaient cependant devenus indépendants. Mai 68 en France étant devenu un mouvement culturel révolutionnaire mondial qui est parti de Paris et qui s'est propagé à Prague et à Chicago, il est certain que la révolte de Dakar faisait partie de Mai 68. Ceci étant, d'un point de vue historique, la révolte "Mai 1968" sénégalaise a été considérée comme un mouvement qui n'avait aucunement été influencé par Mai 68 en France. Cependant, le fait que la réponse apportée par le gouvernement sénégalais à cette révolte soit étroitement liée à la situation politique en France, peut être considéré comme étroitement liée à Mai 68. En outre, ne serait-ce que parce que le président Senghor a réprimé la révolte de Dakar sur le modèle de la méthode employée par Charles de Gaulle lors de la répression de la Révolution de Mai 68 en France, en l'examinant soigneusement, on peut admettre que cette révolte de Dakar a été influencée par Mai 68. Toutefois, Senghor n'a pas raison de dire qu'elle a été impulsée par une force étrangère. Il serait approprié de dire que la résistance sénégalaise n'a pas été aidée par les mains de puissances étrangères, mais qu'elle a naturellement rejoint dans ses actions le mouvement français de Mai 68, qui était devenu une révolte mondiale. Lors des manifestations du 68 mai au Sénégal, il est évident que les étudiants et travailleurs ont joué un rôle fondamental dans la revendication de la liberté et des droits en s'appuyant sur les valeurs et l'expansion mondiale de Mai 68. Cependant, ils ont mis davantage l'accent sur les critiques de la situation à cette époque au Sénégal, à savoir, le régime néocolonialiste et la forte dépendance économique sur la France. Si l'on examine attentivement la performance des personnages principaux de la révolte de Dakar : les difficultés en politique d'Abdoulaye Bathily, qui était un des représentants de cette révolte, une revendication continue de l'autosuffisance de N'Diaye ou la déportation politique et la mort douteuse d'Omar Blondin Diop, des liens pertinents entre la révolte de mai 1968 au Sénégal et de Mai 68 peuvent être trouvés sans trop de difficulté. De plus, il est aisé de confirmer la tendance pro-gaulliste du gouvernement de Senghor par la suppression et l'exclusion.

        • KCI등재

          아나톨 프랑스의 자전적 작품에 나타난 회의적 세계관

          이선구(Seongu LEE) 프랑스학회 2020 프랑스학연구 Vol.0 No.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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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의 문학작품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한 방식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 본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에 나타난 삶은 현재의 순간적인 삶도 아니고, 불확실한 미래의 삶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에서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삶은 우리를 매혹하는 과거, 지나간 삶의 여정이다. 아나톨 프랑스는, 현재는 우리들에게 냉혹한 인간 조건을 느끼게 하는 것이고, 미래는 우리가 예견할 수 없는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게다가 현재는 너무도 찰나적이고,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과거의 삶을 되돌아 볼 때는 무척이나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함께 펼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나톨 프랑스는 과거만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라고 여기고 있다. 특히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어린 피에르』와 『꽃피는 나날』, 이 두 자전적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아나톨 프랑스가 과거의 시간에 대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나톨 프랑스는 과거만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과거가 유일한 현실이며, 과거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본유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아나톨 프랑스는 만년의 두 작품을 통해서, 과거의 시간을 ‘상상하기' 좋아했던 그리고 삶을 하나의 꿈처럼 여겼던 몽상가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아나톨 프랑스의 자전적 작품을 통해서 발견한 작가의 시선은 항상 과거로 향해 있다. 그런데, 그 과거는 인간의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아나톨 프랑스의 과거에 대한 애착은 결국 현실에 대한 애착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아나톨 프랑스는 현실을 사랑한 작가였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나톨 프랑스의 과거에 대한 사랑이 외견상,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 자신의 회의적 세계관과 맞물려, 지극히 회의적 결과를 나으리라 여겼지만, 그의 과거에 대한 사랑은 때로는 삶에 대한 소극적인 반응태인 듯 보이면서도 결국 현실에 대한 사랑으로 회의를 통한 적극적이며 동시에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À proprement parler, il n est pas exagéré de dire que l œuvre littéraire est une manière d approcher à tâtons de l homme et de sa vie. Or, dans l œuvre d Anatole France, cette vie n est ni une vie incertaine à venir ni la vie instantanée du présent. C est-à-dire que la vie, comme objet du tâtonnement dans l œuvre d Anatole France, est la vie passée qui nous charme. Il est vrai que, pour Anatole France, le présent fait surtout apercevoir à l homme son inexorable condition humaine et l avenir n est qu une illusion qu on ne peut pas prévenir. Quand l homme réfléchit sur sa vie passée, il peut l imaginer librement. Pour cela, Anatole France a affirmé que le passé est la seule réalité de l homme. Et le passé qu il peut revoir en esprit devient le thème littéraire de son œuvre tardive. Nous pouvons percevoir que l avenir est trop abstrait et que le présent ne dure jamais qu un instant chez Anatole France. En ce sens, il n existe que le passé d ouvert à notre connaissance : le temps humain n est que le passé. Enfin, il nous semble qu Anatole France considérait le passé comme la seule réalité humaine . Nous pouvons percevoir l attachement au passé d Anatole France surtout dans ses deux dernières œuvres, Le Petit Pierre et La Vie en fleur. D après Anatole France, le passé est notre seule réalité et l amour du passé est inné chez l homme . En résumé, Anatole France était un rêveur qui regardait la vie comme un rêve et qui aimait imaginer le passé. Ce regard que nous retrouvons dans ses œuvres autobiographiques est toujours dirigé vers le passé. Ce dernier est la seule réalité pour l homme, d après Anatole France, et c est pourquoi il aimait le passé ; en effet, il aimait la réalité : nous pouvons affirmer que son amour du passé est une attitude positive à l égard de la réali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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