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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장구 ?17세기 ‘몽문 연대기’에 보이는 한국관련 기록의 비판적 검토?에 대한 토론문

        권용철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6 동국역사문화연구소 학술대회지 Vol.- No.추계

        현재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17세기 몽문 연대기에 주목한 소수의 연구들이 있는 데, 이 중에서도 몽골어와 관련된 언어학적 연구들을 제외한 역사학적 연구는 더더 욱 많지 않은 실정입니다. 그나마 몽골원류의 번역1)에 이어 최근에 김장구 선생 님의 역주 몽골 황금사2)가 출간되면서 17세기 몽문 연대기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을 촉발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다양한 주제의 연구들이 이루어 질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이 글은 17세기 몽골문 연대기 사료들에서 ‘솔랑 가스’와 ‘가올리’라는 표현의 用例들을 언급하면서 당시 몽골인들이 한반도 일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연구를 발판으로 다양 한 관점에 입각한 몽문 연대기 분석이 진행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글을 읽고 궁금 했던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으로 토론자의 역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 KCI등재

        1년간 낙상위험 예측 평가 도구로서 최대보장검사의 유용성

        권용철,김석중,최진영,조비룡,박진호,김화정 대한가정의학회 2008 Korean Journal of Family Medicine Vol.29 No.1

        The Usefulness of Maximal Step Length to Predict Annual Fall RiskYong Chol Kwon, M.D., Seok Joong Kim, M.D., Hwa Jung Kim, M.D.*, Jinho Park, M.D.**, Jin Young Choi, Ph.D.***, Be Long Cho, M.D., Ph.D. Background: Many clinical measures have been used to assess fall risk in elderly adults. The first objective of this study was to assess the clinical availability of maximal step length (MSL) as a measurement predicting falling probability in future. The second objective of this study was to try to find out how to use MSL more easily in a clinical setting. Methods: The study population consisted of 50 community-dwelling people (≥60 yrs). Demographic data were reviewed by self-recorded questionnaire and MSL, US and TUG had been done when the subjects visited a clinic in March and April 2004. They revisited the clinic after one year and information of fall incidence was obtained and their visual acuity was examined. To examine the association between many performance tests (MSL Unipedal stance, Timed up and go) and their real falling after tests, we analysed data by Mann-Whitney rank Test, pearson correlation and multiple regression. Results: The average MSL predicted future falling (P-value 0.025), but Unipedal stance, Timed up and go did not. The predicting ability of MSL was preserved using many MSL measures (average MSL corrected by leg length and height, one direction measure among six directions of MSL, and average of left and right three directions of MSL). Conclusion: This study showed that MSL had the ability to predict elderly adults’ falling in future. And this study showed that MSL can be used more easily in a clinical setting. (J Korean Acad Fam Med 2008;29:26-33) 연구배경: 노인의 낙상 위험도 측정을 위해 이용되고 있는 많은 임상적 도구 중 최대보장검사(Maximal Step Length, MSL)로 노인의 향후 1년 동안의 실제 낙상 여부를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보고 최대보장검사를 임상적으로 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고자 하였다. 방법: 2004년 3, 4월에 일개 노인 대학에 다니는 60세 이상 노인 149명을 대상으로 사회인구학적 변수 및 우울 정도, 피로도를 평가하고, 최대보장검사, 외발 자세(Unipedal Stance, US), 의자에서 일어서 걷기(Timed Up and Go, TUG)를 면담 시 시행하였으며 이 중 추적 가능한 50명에 대해서 1년이 지난 2005년 4,5월에 추적 검사하였다. 이들 50명에 대해서 사회 인구학적 변수 및 우울 정도, 피로도, 지난 1년 동안의 낙상 여부를 조사하고 시력 검사도 수행하였다. 2004년에 측정한 MSL, US, TUG와 향후 1년 동안의 실제 낙상과의 관련성을 Mann-Whitney 검정, 상관분석 및 회귀분석을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결과: 로지스틱 회귀분석 결과 US, TUG은 향후 1년 동안의 다빈도 낙상 여부와 관련이 없었으나, 평균 MSL은 유의한 관련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양상은 하지 길이 또는 키로 보정하였을 때도 유지되었다. 좌, 우측 하지에 대해 전, 측, 후 방향으로 측정한 MSL의 평균치로 통계분석했을 경우에도 통계적 유의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경향성은 각각의 측정치들을 하지 길이 또는 키로 보정하였을 때도 유지되었다. 결론: 본 연구를 통해 노인의 낙상 위험도 측정 도구인 MSL이 실제로 향후 낙상 정도를 예측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본 연구에서는 MSL을 6방향 모두가 아닌 1방향만 측정하여도 낙상과 관련성을 보여, MSL을 임상적으로 보다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 KCI등재

        元代 말기 쿠르기스-옹기야누-셍게시리 三代의 행적 - 제국 조정의 정국 변화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권용철 한국중국학회 2019 중국학보 Vol.90 No.-

        본고에서는 대원제국 말기에 잠시 중서우승상에 임명되었던 옹기야누라는 인물의 등장 배경과 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옹기야누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父와 子를 포함한 三代의 행적을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원대 연구의 기본적인 사료인 『元史』만을 가지고는 확인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실들을 살펴보기 위해 문집, 필기 자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특히 許有壬의 『至正集』에 수록된 「晋寧忠襄王碑序」는 옹기야누의 부친인 쿠르기스의 행적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항을 담고 있는 문장임이 드러났다. 쿠르기스는 무종과 명종 황제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명종이 즉위하기 전에 정치적 위기에 빠졌을 때에도 끝까지 수행의 의무를 다하며 명종이 즉위했을 때에 중앙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는 점이 명백해진 것이다. 물론, 명종이 암살된 후 쿠르기스는 정치적 지위를 잃게 되지만 혜종이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중앙 관료로 성장하게 되었다. 옹기야누의 등장은 그의 부친 쿠르기스의 출세로 인한 결과였다. 쿠르기스는 혜종 재위 초기에 엘테무르 가문과 바얀 가문의 정치적 대립 정국에서 바얀을 지지했고, 결과적으로 바얀이 엘테무르 가문의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쿠르기스의 지위는 더욱 높아질 수 있었다. 옹기야누는 부친의 케식관 지위를 물려받아 활동했고, 부친 쿠르기스가 사망한 이후에는 톡토가 바얀을 몰아내는 궁정 정변을 지원하여 조정에서 안정적인 위상을 확보했다. 옹기야누는 이후 1340년대와 1350년대 전반까지 벌어진 치열한 정쟁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다가 至正 14년(1354)에 톡토가 폄출된 이후 중서우승상에 임명되면서 조정의 최고 관료 지위를 장악했다. 그러나 옹기야누가 중서우승상의 임무를 수행한 것은 단지 2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새로운 집권 세력의 등장으로 인해 옹기야누가 밀려나면서 벌어진 결과였다. 옹기야누의 아들인 셍게시리는 그의 부친을 중서우승상에서 물러나게 했던 카마를 원조하면서 중서평장정사의 지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카마와 셍게시리의 사이에 금이 가게 되었고, 카마가 중서좌승상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면되자 셍게시리는 주도적으로 카마의 죄악을 혜종에게 고발하면서 결국 카마가 유배를 가서 사형에 처해지게 만드는 것에 일조했다. 그러나 이후 셍게시리의 모습은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초스겐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셍게시리가 권력을 상실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쿠르기스-옹기야누-셍게시리 三代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들의 활동 이력은 대원제국 말기의 정국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쿠르기스는 무종의 측근 출신으로 그의 행적이 명종과 寧宗 및 혜종의 즉위를 통한 정국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으며 혜종의 즉위 이후부터는 쿠르기스-옹기야누-셍게시리 모두 혜종의 ‘宰相政治’로 인해 발생한 집권 세력의 변동에 막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엘테무르, 바얀, 톡토 등 중앙 조정에서 專權을 행사했던 權臣들의 정치적 행적을 분석하는 것 이외에도 그 주변에 있던 다양한 인물들의 활약을 통해 대원제국 말기 정국에 대한 검토가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앞으로 대원제국 중기 이후 정치사 연구에서 또 다른 인물들의 행적 ... In this paper, I analyzed not only activities of Ongγiyanu but also activities of his father and son, in order to examine the background and meaning of political rise of Ongγiyanu, who was briefly appointed to the Senior Chief Councillor of the Central Secretariat(中書右丞相) at the end of the Yuan Empire. In this process, I tried to actively utilize unofficial materials to look at various facts that are difficult to identify with only Yuan History(『元史』). Looking at the life of Qurgis, Ongγiyanu and Senggesiri, their history of activity is closely related to the change in the political situation at the end of the Yuan Empire. Qurgis is a close confidant of Emperor Wuzong(武宗) and has been directly linked to the change in political situation through the ascension of Emperor Mingzong(明宗), Ningzong(寧宗), Huizong(惠宗), and since Huizong’s ascension Qurgis, Ongγiyanu and Senggesiri have been greatly affected by the change in power caused by Huizong’s ‘Prime Minister Politics(宰相政治)’. In addition to analyzing the political activities of powerful vassal who played a role in central government such as El-Temür, Bayan, and Toγto, it is also possible to review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end of the Yuan Empire through various figures around them. It is hoped that the activities of other figures at the mid-to-end of Yuan Empire will be illuminated so that we can look at the history of this period from a various perspectives.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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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元代 말기의 정국과 고려 文人 이공수(1308-1366)의 행적

        권용철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0 인문학연구 Vol.59 No.2

        본고에서는 고려 말기의 文人 관료인 이공수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그는 원 제국 말기의 정국을 장악했던 기황후의 고종 사촌이었기 때문에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고려와 원 양국에서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공수 자신은 그러한 위상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공수는 공민왕이 위기에 처했을 때 큰 활약을 했다. 홍건적의 고려 침입으로 국가가 혼란해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고, 이후 기황후를 중심으로 공민왕을 폐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이공수의 활약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이공수는 사신으로 파견되어 원에 도착한 이후, 기황후를 상대로 상당히 과감한 발언을 하는 등 공민왕의 폐위를 막으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고려 말기의 ‘측근정치’로 인해 격렬한 파벌 정쟁이 일어나는 와중에서도 이공수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원 제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친척인 기황후에게까지 직언을 할 정도로 강직함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이공수가 활약했던 고려 말기와 원 제국 말기 모두 극도의 파벌 정치가 일어났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공수는 이에 휩쓸리지 않았던 文人 관료였다고 할 수 있다. This article specifically reviewed the activities of Yi Gongsu, a bureaucrat of the late Goryeo dynasty. As he was the cousin of Empress Ki, who dominated the political situation at the late Yuan empire, he would have had a unique status in both Goryeo and Yuan, if not intended. However, it appears that Yi himself had never thought of using such status politically. Yi Gongsu played a big role when King Gongmin was in crisis. Yi Gongsu’s role was highlighted at the forefront as the government began to recover from the confusion caused by the invasion of Goryeo by Red Turban Bandits, and the movement to abolish King Gongmin centered on Empress Ki. Yi Gongsu was dispatched as an envoy and arrived at the Yuan empire, and he made quite bold remarks against Empress Ki, making every effort to prevent King Gongmin’s abdication. Despite the violent factional strife of the late Goryeo dynasty, Yi Gongsu played his part silently. When he went to the Yuan Empire as an envoy, he also did his best in his duties. Considering the situation that extreme factional politics took place in both the late Goryeo dynasty and late Yuan empire, Yi Gongsu was an unmoved 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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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lculation of Beam Quality Correction Factor for Relative Positions of SOBP and Ionization Chamber Using Monte Carlo Simulations

        권용철,조현석,이세병,신욱근 한국물리학회 2021 새물리 Vol.71 No.10

        In proton radiotherapy, the dosimetry protocol TRS-398 does not provide the beam quality correction factors kQ;Q0 for all areas of the spread out Bragg peak (SOBP). Monte Carlo simulations using the TOPAS simulation toolkit were performed to calculate the beam quality correction factors at various depths of the SOBP to observe any variations. The SOBP of the generated proton beam had a range of 15 cm and a width of 15 cm. The beam quality correction factors kQ;Q0 were calculated not only at the reference depth of 7.5 g/cm2 recommended by TRS-398 but also at depths of 4 g/cm2 and 13 g/cm2. The comparison of the simulation results for the absorbed dose with actual measurements showed a slight difference at the surface above the water phantom, but the width of the SOBP was well matched with a difference of less than 1%. The kQ;Q0 factor calculated at the reference depth of 7.5 g/cm2 was 1.045, which is within the error range of the value of 1.030 provided by the TRS-398 protocol. The kQ;Q0 factors calculated at the depths of 4 g/cm2 and 13 g/cm2 were 1.041 and 1.048, respectively. While all the calculated values were within the error range of the value suggested by TRS-398, the observed increase in the kQ;Q0 factor with increasing depth suggests that a position-dependent beam quality correction factor determined through precise measurements may be required to calculate the correct d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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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제국 말기 재상 톡토의 至正 9년(1349) 再執權에 대한 검토

        권용철 대구사학회 2018 대구사학 Vol.130 No.-

        This article examines the specific process and the political background of the return of Toγto, who was one of the ministers of the late Yuan Empire. Toγto had been involved in conflicts in the imperial court since his departure in 1344, and finally he was forced to leave Dadu(大都), but in 1348 he was able to step back on his way through the call of Huizong(惠宗). Berke-Buqa, who was in the center of the contest at the time, was constantly impeached and did not have a strong faith in Huizong. Empress Ki, who was gradually expanding her power, had more trust in Toγto, who had a friendly relationship with her. Based on this background, it was not difficult to get to the top again. Before Toγto was re-elected as Chancellor of the Right(右丞相) in 1349, there was already a political framework for Toγto. As a result, Toγto became able to control all of the representative offices of the Yuan Empire. In addition to this, for the education of Ayushiridara the Heir Apparent’s Study(端本堂) was established and Toγto became the jurisdiction of the Heir Apparent’s Study. So, the relationship with Ayushiridara became more intimate. In addition, the person who defended the Toγto was appointed to the Bureau for the Empress’s Estates(資政院) which was the foundation of Empress Ki. This political landscape served as a background in which Toγto operated considerably arbitrarily in the 1350s. 본고에서는 대원제국 말기의 재상 중 한 사람이었던 톡토가 우승상의 직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하는 구체적인 과정과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톡토는 1344년에 병으로 사임한 이후부터 제국 궁정에서 벌어진 정쟁에 휘말리며 결국 쫓겨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1348년에 혜종의 부름을 받아 서서히 복귀의 길을 밟아 나갈 수 있었다. 당시 정쟁의 중심에 있었던 베르케부카는 지속적으로 탄핵을 당하면서 혜종의 굳건한 믿음을 얻지 못했고, 점점 권력을 확대하고 있던 기황후는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톡토를 더욱 신뢰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톡토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다시 우승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349년 톡토가 우승상으로 재집권하기 이전부터 이미 톡토를 위한 정국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톡토는 대원제국의 대표적 최고 官府인 중서성-추밀원-어사대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태자 아유시리다라의 교육을 위한 단본당이 설립되어 본격적인 황태자 교육이 시작되는데, 이를 역시 톡토가 관할하게 되면서 태자와의 관계 역시 더욱 밀접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기황후의 세력 기반이었던 자정원에도 톡토를 비호했던 인물이 임명되면서 톡토는 황제와 황후 및 태자의 지원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다. 이러한 정치 구도는 톡토가 1350년대에 상당히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 KCI등재

        고려-거란 관계사에 등장하는 거란제국의 인물 검토

        권용철 중국학연구회 2022 중국학연구 Vol.- No.100

        이 논문은 중국에서 출토된 묘지명 자료들을 기반으로 거란제국의 인물들 중 고려와 관련된 기록이 묘지명에 남아 있는 세 건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거란제국 및 고려 초기의 역사 연구를 위한 사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시기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묘지명이다. 묘지명은 正史에 매우 압축적으로만 기록된 인물의 행적을 더욱 자세히 복원할 수 있게 하고, 심지어 정사에서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의 행적과 그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묘지명 자료의 적극적인 활용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고려-거란 관계사 방면에서 다룰 수 있는 인물들의 묘지명을 선별하여 검토한 것이다. 거란의 고려에 대한 1차 침입에서 활약했던 야율원녕은 거란과 고려의 접경지대라고 할 수 있는 요동에서 이미 정치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야율원녕의 가문이 요동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고, 고려에 대한 침입 역시 거란의 요동 지역에서의 확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고려왕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고려에 파견된 적이 있었던 한춘과 맹초는 외교 혹은 학문 분야에서 이미 두각을 드러냈던 인물이었고, 거란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관료가 고려에 하생신사로 파견되었다는 것은 거란이 고려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본고에서 살펴본 3명의 행적은 고려-거란 관계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앞으로도 더욱 많은 사례들이 발굴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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