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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 청양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활용 방안

        박경목(Park Kyung-mok)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0 충청문화연구 Vol.5 No.-

        With the recent extension of leisure time for people from 5-working days and others and interest on history and culture, each local government has developed the tourism industry as the future core industry. From the major resources, the issues to facilitate on historic and cultural relics that reflect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have become a key now. A great role is undertaken within this flow is the historic site for independent movement of modern time to represent the recent regional sentiment. Cheongyang also is the area undertaken for representative volunteer military work during the Daehan Empire era and massive 3.1 Independent Movement during the colonialization period with famous leaders in civil militants. Therefore, it is urgent to seek for plans to facilitate the relevant historic site for independent movement. However, with the exception of a few historic sites, most have insufficient management with almost no existence of facilitation plans. Therefore, through their historic site for independent movement, the plan to publicize the historic site for independent movement is shown with the linkage with the tourist industry to be the foundation of the local advancement. As a part thereof, it indicates to prepare the conditions through the formation of emotional consensus of local residents on conservation and facilitation of the historic site, linkage with the surrounding tourism resources, establishment of plan to fit into the local situation and the like. Mter preparing the conditions, it presented the plan on arranging short-term youth experiment program operation, information personnel and major historic site and others. On mid-term and long-term basis, it proposed to build up major landmarks in the special area to represent the museum establishment and independent movement of Cheongyang. In this process, the economic conditions and local scale are considered to present the method for active facilitation of existing facilities, such as, accommodation facilities already made around and closed school and others. Through this process, the facilitation of the historic site for independent movement of the Cheongyang area would be the creative activities for the local advancement by establishing the historic implication of the Cheongyang area and strengthening the local competitiveness.

      • KCI등재

        일제강점기 수형기록카드 현황과 명칭

        박경목(Park, Kyung-mok)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64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작성되었던 수감자에 관한 수형기록에 대해 그 현황과 성격, 명칭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이 기록물을 ‘일제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이하 카드)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730호로 지정했다. 이에 그 의의와 가치를 학술적으로 객관하기 위한 연구의 일환이다. 카드는 총 6,264장이 보관되어 있으며, 원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다. 수록 인물은 중복자를 제외하고 4,837명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에 의해 분류된 소위 ‘사상범’으로 항일 독립운동가로 볼 수 있다. 주요 기재 항목은 앞면에 사진과 이름, 나이, 신장, 특징, 지문번호, 뒷면에 본적, 출생지, 거주지, 신분의 인적 사항과 직업, 죄명, 형명·형기, 언도연월일, 형의 시작, 언도재판소, 집행 감옥, 출소연월일, 출소 사유의 수형사항과 전과, 비고 등 20여 가지이다. 1913년 2장, 1918년 1장을 제외하고 모든 카드는 1919년 3월 1일 3·1운동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작성되기 시작했다. 즉, 일제는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수형기록 관리와 감시 체제를 강화했던 것이다. 이는 양식의 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양식은 총 4가지로 분류된다. 1919~1920년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던 A형 카드는 대부분 3·1운동 관련자 들이다. 1923부터 1931년까지 사용된 B형은 1925년 치안유지법 제정, 발효를 기점으로 ‘사상범’에 대한 감시, 통제 강화 정책에 따라 수감자 개개인에 대한 신상정보 파악을 상세화 했다. 1930년을 전후로 사용된 C형은 1928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사상 통제로 수감자의 급증과 일반인의 저항이 늘어남에 따른 과도기적 현상을 보인다. 이전 양식에서 일선 현장 실무에 불필요한 기재 사항을 과감히 삭제했다. 1930년 이후부터 해방까지 쓰였던 D형은 식민지 경영의 공고화를 위해 수감자의 인적 관계망 또는 소속 조직 및 단체 동향을 확보하여 주요 수감자를 지속적으로 관리, 감시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 이러한 카드는 4개소의 감옥 관서와 20개소의 경찰 관서 총 24개소에서 작성되었다. 이는 사진 촬영 장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카드에 부여된 사진 보존원판 번호의 일관성으로 볼 때 한 곳의 기관에서 이것을 수집,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 대상자의 수감 감옥이 대부분 서대문형무소였다는 점으로 볼 때 그 관리 기관은 서대문형무소로 추정된다. 작성주체와 관리처가 이원화 되었던 것이다. 카드의 주요 기재 항목은 철저히 수형기록 위주였다. A형 카드의 경우 ‘수형사항’이라는 분류하에 죄명, 형명형기, 언도연월일, 형의 시작, 언도재판소, 집행기관, 출옥연월일 및 기타 총 7가지의 수형 관련 기록을 기입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나머지 B, C, D형 카드도 마찬가지 양상이다. 반면, 수형기록과 무관하게 수배용이나 감시용으로 작성된 카드도 전체의 약 2.9%, 182장이 보인다. 이는 일제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경계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수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는 수형기록 관리 목적 외에 일부 부가된 기능일 뿐이다. 카드를 작성한 주체가 감옥관서와 경찰관서로 수록 대상자가 모두 수감예정이거나 수감중인 점, 그 목적이 사상범에 대한 수형기록 관리인 점, 실제사용 사례로 수감자 이동시 본인 유무를 확인했다는 점 등으로 비추어 볼 때 카드는 ‘감시’의 성격 보다는 ‘수형기록 관리’의 측면이 우선적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에 따라 카드의 성격과 특징을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명칭으로 ‘수형기록카드’가 보다 합리적임을 제시했다. 이러한 수형기록카드는 그 속에 기재된 다양한 정보 분석을 통해 독립운동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작성된 소위 ‘사상범’에 대한 수형기록이지만 이제는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기록물로서, 또 일상 속에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문화재로서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 Recently,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designated the card that records prison matters of prisoners in Japanese colonial period as Registered Cultural Asset No. 730 under the name of ‘Main monitored person card by the Japanese imperialism’ Thus, this thesis reviewed the status and name of the cards above. The total number of cards is 6,264 and the originals are owned by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Main items are photo, name, age, height, feature, and fingerprint number on the front page. There are personal details of permanent address, birthplace, residence, and identity on the back side while there are occupation, name of crime, name of punishment, prison term, sentence date, beginning of punishment, sentence court, execution prison, and date of release from prison, The cards were prepared in earnest after the 3·1 Independent movement in 1919. The Japanese imperialism strengthened the prison record management and surveillance of independent activists from the March First movement. There are 4 types of card forms pursuant to period. They were divided into A, B, C and D for convenience. Type A was used intensively in 1919~1920. Most of them are the March First Movement activists. Type B was used from 1923 to 1931. They detailed personal information on the prisoners according to the surveillance and control of so-called “political offender”. Type C was used around 1930. When the prison inmates surged due to full-scale ideological control of Japanese imperialism, unnecessary entries were removed, Type D was used from 1930 onwards until liberation. Description column of the personal relationship of the prisoners, their organization and trends of group were added. The main items of the card are classified according to the form, such as prison service(受刑事項, type A), disposition result(處分結果, type B), recent sentence(最近刑, type D), and they were mainly comprised of name of crime, name of punishment, prison term, sentence court, date of entrance, date of release from prison, and execution prison. There are no categorizations of type C but 7 items from crime name to arrest institution are organized mainly in relation to prison service. In view of the fact that the subjects were arrested by the Japanese imperialism police and were under the imprisonment or being imprisoned and that most of the persons were in violation of the law of ideology, the cards had strong aspect of ‘management of prison record’ of the independence activists. If we look at the main items and the recorded subjects, this thesis reveals that the name of the card is ‘Prison record card’ containing its characteristics.

      • KCI등재

        3.1운동 공간의 기억과 기념 -홍성지역을 중심으로-

        박경목(Park, Kyung-mok)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 No.

        이 논문은 홍성지역을 중심으로 3.1운동이 일어났던 공간의 기억 양상과 기념 형태를 살펴보고, 지속 가능한 기억과 기념의 과제를 도출한 것이다. 홍성에서는 1919년 3월 7일부터 4월 9일까지 34일간 9개 지역에서 19회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현장은 시장, 마을 인근 산, 면사무소 앞 등 주민들의 생활터전이었다. 그날 그곳에 참여한 이들은 「범죄인명부」에서 295명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 가운데 183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았다. 3.1운동의 기억이 아직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홍성 3.1운동 공간의 기념은 기념비에 의존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전 시기에는 노인회 같은 지역 공동체에서 집단기억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후에는 개인에 의해 개인기억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념비가 설치되었다. 사회적 기억과 기념의 지속 가능 여부는 지역 공동체의 마을 커뮤니티 유무와 직결된 것이었다. 이에 마을 커뮤니티 형성과 활용을 기억과 기념의 첫 번째 과제로 삼아 ‘금마면 가산리 3.1만세운동 연극’을 예시로 커뮤니티 형성을, 시장 상인연합회의 ‘시장 만세 할인 이벤트’를 예시로 커뮤니티 활용을 살펴보았다. 3.1운동이 마을 단위의 주민 공동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점에 착안하여 마을과 시장 속 기념도 그에 충실하다면 지속 가능한 것임을 모색한 것이다. 두 번째 과제로 일상 속의 기념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서 ‘마을 전시관’ 사업과 ‘시장길 만세 발자국’ 설치를 구상해 보았다. 전자는 마을 곳곳을 기억의 공간으로, 후자는 시장을 기념의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방안이다. 기억의 확대·재생산을 위해 기념 방식의 다변화를 모색해 보았다. 계층별 기념 프로그램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3.1운동의 현장을 체험학습의 장소로 활용하거나 사회과 교과목의 정규 과정으로 ‘홍성 3.1운동 현장 탐방’ 학습을 진행할 수 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자유학기제와 연동하여 ‘홍성 3.1운동’을 주제선택 활동과 동아리 활동 분야의 수업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평생학습의 차원으로 접근하여 이론강좌와 현장 답사를 병행한 지역 특화 프로그램을 통해 수료자를 지역 3.1운동사 전문가로 양성할 수 있다. 지역 축제와 연계한 관광자원으로의 가능성도 모색해 보았다. ‘홍성역사인물축제’를 홍성 전역으로 확대하여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재현, 체험, 연극 등 다양한 콘텐츠를 구성하고, ‘홍성남당항대하축제’와 연계하여 관광객을 대상으로 3.1운동 현장 방문 인증 이벤트를 제시해 보았다. 결국 3.1운동은 지역 공동체가 주도하는 일상 속 기억과 기념 방식의 다변화를 통해 지역사회에 지속 가능한 기억으로 기념될 수 있을 것이다. The current study discussed how the space of 3.1 Movement in 1919 is remembered and commemorated by us. The target area is Hongseong, Chungcheongnam-do. In Hongseong, there were 19 Manse Movements from March 7 to April 9 in 1919. It was very active. The space included everyday places, including markets, hills behind villages, and in front of district offices. The people of Hongseong have installed monuments to commemorate the 3.1 Movement since the 1970s. There are five monuments and one temple in Hongdong-myeon, Geumma-myeon, Gyeolseong-myeon, Janggok-myeon, and Guhang-myeon. These monuments are how the local people remember and commemorate the 3.1 Movement. However, there are no monuments at the 3.1 Movement space that were inside the places of everyday life, such as markets and villages. The villagers are in need of memorial events to remember the past. For the market, the most important space of the 3.1 Movement, I suggested arranging the marks such as small ‘stones’ along the route of Manse parade. Also, programs reflecting the characteristics of Manse movements of each village are suggested. The 3.1 Movement will be an ongoing history when the local people remember and commemorate that the space of everyday life used to be the space for the 3.1 Movement.

      • 계룡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활용과 호국보훈문화 센터 건립

        박경목(Park, Kyung-mok)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3 충청문화연구 Vol.11 No.-

        This study examines these of historic sites of independent movements in Gyeryong-si, Chungcheongnam-do and establishment of patriots and veterans culture center for efficient utilization of historic sites and tourism resources. Located under Gyeryong Mountain, Gyeryongsi was called as ‘Sindoan’ by being selected as a new capital of Joseon right after the foundation by King Taejo Lee, Seong-gye. In fact, there was about a year of royal palace construction work, but the plan of relocation of capital was cancelled. Since 1910, many national religious leaders gathered to escape the colonial rule of the Japanese Imperialism. Accordingly, many independent movement activities carried out independent movements with this region as its center. After the liberation, the head quarters of Army, Navy and Air Force were installed in 1989 playing as a military city and urban and rural complex city. In 2003, the city was formally promoted as ‘Gyeryong-si.’ Currently, it is the smallest city in the country with 60.7㎢ in size and population of 41,550. Because of such historic reasons, there are many historic sites of independent movements of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and also many remains related on the capital relocation of Joseon, and shrines of Confucian scholars of Joseon. Representative sites include house site of Han, Hoon who organized Gwangbokdan, Gwangbokdan death-defying band monument, house site of Bae, Young-jik who carried out March 1st Independent Movement, Samsindang as the sphere of activity of Jeong, Won-kang, an national religious leader, and Sindoan foundation stone. Meanwhile, head quarters of Army, Navy and Air Force were installed in 1989 in Gyeryong-si, and ‘Gyeryongdae’ and ‘Gyeryongdae monument’ are used for national security tourism resources. Accordingly, it is necessary to use historic sites of independent movements, historic remains and identity of current military city in order to activate the city. In connection with the above resources, it is also required to take partial restoration of some historic sites of independent movements, storytelling of those sites, open of restricted remains in the military area and tourism merchandising on the patriotic experiences. And, ultimately, it is also recommended to have a certain facility that plays a role of land mark in the tourism of Gyeryong-si that integrated and managed resources of Gyeryong-si. It is tentatively called as patriots and veterans culture center to demonstrate regional identity and long-term urban activation.

      • KCI등재

        일제강점기 대전형무소 설치와 확대

        박경목(Park, Kyung mok)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 No.73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대전형무소의 설치 배경과 개소 시점, 시설 확대 과정에 주목하였다. 아울러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을 발굴하고 그 현황을 분석했다. 대전형무소 설치는 1918년 2월 사법부장관 고쿠부 산가이의 언급으로, 4개년 사업으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강점 후 일제 조선총독부의 예상과 달리, 늘어나는 수감자로 인한 감옥 과밀현상과 특히 1919년 3·1운동으로 인한 수감자의 급증으로 설치를 서둘러 1919년 5월 8일 ‘총독부령 제86호’로 확정 고시했다. 그리고 5개월 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같은 해 10월 19일 공식 개청식을 통해 개소하였다. 건축공사는 1918년 9월부터 1938년 10월까지 20여 년간 지속되었다. 이를 3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1단계는 수감자 수용을 위한 옥사 3개동 등 초기 기반시설이 마련되는 설립기이고, 2단계는 중앙간수소와 청사 등 수감자 감시와 관리를 위한 부대시설이 마련되면서 감옥운영이 정착되는 정착기이다. 3단계는 소위 ‘사상범’ 수용을 위한 격리 옥사시설 3개동과 여옥사가 설치되어 수용기능이 확장되는 확장기이다. 이 과정을 통해 1938년 11월 옥사 7개동에 감방 259칸, 총 수용 면적 2,282.84㎡를 갖추었다. 수감인원은 시설 확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개소 초기 1919년 12월 말 250명에서 1938년 12월 말 1,250명으로 5배 늘었다. 이 수치는 1938년 한때 전국 28개소 감옥 가운데 서대문형무소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대전형무소 수감자는 신문기사와 수형기록카드를 참조하여 140여 명을 살펴보았다. 신문기사를 통해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았고, 수형기록카드를 통해 115명의 특징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연령대는 20대의 비중이 가장 높았으며 10대의 비중이 가장 낮았다. 형량은 징역 2년 이상이 가장 많았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보안법, 폭발물취체규칙 등 사상법률 위반이 대다수로 분석 대상 인원 대비 94.78%를 차지하였다. Daejeon Prison(大田刑務所) is the output of the prison expansion policy enforced by the Japanese imperialism in colonial Korea. The plan for constructing Daejeon Prison was discussed in 1918 to be scheduled in 4 years. However, as the number of prisoners was increased after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the Japanese imperialism decided to construct the prison and made an announcement in May 8, 1919. And it officially opened the prison in October 19 in that same year. Because of the March First Movement, Daejeon Prison was opened 3 years earlier than scheduled. The expansion of the prison was continued for 20 years after its opening. Throughout the periods of establishment, settlement and Expansion, 259 prison cells in the area of 2,282.84㎡ were built in a total of 7 buildings of the prison(獄舍). Since 1928, 129 solitary confinements in the area of 807.1㎡ were built in a total of 3 buildings of the prison to keep political offender. Daejeon Prison played a ‘critical’ role in the political offender(思想犯) detention policy enforced by the Japanese imperialism. As the prison was expanded, the number of prisoners was continued to increase. The number of prisoners was increased by 5 times, from 250 prisoners at the end of December in 1919 to 1,250 prisoners in 1938 when the expansion of the prison was completed. The results of analyzing the data of 220 prisoners showed that a large proportion of the prisoners were in their 20s. Also, the long-term prisoners as well as the political offender made up a large proportion. In the end, Daejeon Prison was operated as the major prison to monitor and punish the long-term political offender for the Japanese colonization.

      • KCI등재

        <기획논문 -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3·1운동 관련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현황과 특징

        박경목 ( Park Kyung Mok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인문과학연구 Vol.26 No.-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 분석을 통해 1919~1920년 사이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인원 1,013명을 확인하였다. 본고는 이들의 연령대, 신분과 직업, 죄명과 해당 형량, 수감자 사이의 관계망을 살펴보았다. 수감자들의 연령은 10대부터 60대까지 전 연령대에서 고르게 참여했다. 특히 20대의 참여 비중이 57%에 달하는 독립운동 전반의 경향과 비교하여 20대의 비중이 42%로 보다 연령대별 고른 참여분포가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3·1운동은 전 계층이 참여한 민족운동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직업분포도 70여 종에 이르는 다양한 직업이 확인되었다. 학생, 종교인, 교사 등 지식인층은 물론 상인, 자영업자,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3·1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특히 일제 식민통치의 말단으로 여겨졌던 면사무소 면장과 면서기, 순사보 등도 참여하여 3·1운동이 전조선인의 거족적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 수감자들은 일제로부터 정치사상범으로 인식되어 ‘보안법 범’으로 취급당했다. 따라서 ‘보안법 위반’등 정치사상적 죄명이 붙여졌다. 이들 가운데 99% 이상이 6개월이상의 형량을 받아 높은 행형이 적용되었다. 일제는 3·1운동을 체제 변혁 운동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단순 범죄가 아닌 정치적 사건으로 취급하였고 상대적으로 무거운 형량을 적용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추적을 통해 이들이 혈연 관계, 지역적 연고, 학교 관계로 상당 부분 연결되 있음을 확인했다. 3·1운동은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지역적 관계망을 통해 급속도로 전국에 전파되고 효과적으로 계획, 추진되면서 적극적인 운동의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이상을 통해 3·1운동은 단순한 ‘운동’차원을 넘어 일제 식민 체제를 변혁하려는 전 민족의 정치적 변혁 운동의 단계였음을 임을 알 수 있다. This study analyzed Seodaemun Prison's Inmate Record Cards(6,259 cards) to discuss the age, social status and occupation, offense and sentence, and relationships of 1,013 inmates who were confined at Seodaemun Prison because of the 3.1 Movement between 1919 and 1920. The inmates(收監者) had a wide distribution of age from teens to the 60s. In particular, 42% were in their 20s and participated most actively. There were about 70 kinds of occupations, from students, religious leaders, and teachers to merchants, business owners, and labor workers. They participated in the 3.1 Movement in their own ways. Chiefs, secretaries, and assistant police officers of town office, who were considered the pawns of the Japanese Imperial Rule, also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manifesting that it was a national movement for the people of Joseon. The inmates were recorded as political criminals who ‘violated the Security Act(保安法 違反), etc.’ and over 99% of them were sentenced to over 6 months in prison, which was longer than the sentences for general crimes. Japan treated them as political criminals because the 3.1 Movement was considered as a reformation movement. The inmates' mutual relationships were tracked to find that they were mostly related by kinship(血緣), regionalism(地緣), school relation(學緣) background. In other words, the 3.1 Movement quickly spread nationwide through kinship, regionalism, school relation as an active movement. This study concluded that the 3.1 Movement was not a mere ‘movement’, but a political reformation movement to reform the Japanese Imperial Rule.

      • KCI등재

        단신 : 활성탄에서의 아세트산 흡착거동 연구

        박경목 ( Kyong Mok Park ),남희근 ( Hee Geun Nam ),문성용 ( Sung Yong Mun ) 한국화학공학회 2015 Korean Chemical Engineering Research(HWAHAK KONGHA Vol.53 No.1

        본 연구에서는 활성탄을 흡착제로 사용하여 아세트산의 흡착 평형 실험을 313.15, 323.15 K에서 수행하였다. 아세트산의 흡착평형 데이터를 Langmuir, Bi-Langmuir, Freundlich model로부터의 계산 결과와 비교하였다. 이 과정에서 각 model 내 isotherm parameter는 실험값과 계산값의 차이의 제곱의 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결정하였다. 비교 결과활성탄상에서의 아세트산의 흡착평형 데이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model은 Bi-Langmuir model이었음을 확인하였다. In this study, the adsorption equilibria of acetic acid on activated carbon were investigated at the temperatures of 313.15 K and 323.15 K. The obtained adsorption data were then fitted by Langmuir, Bi-Langmuir, and Freundlich models, in which the relevant model parameters were determined by minimizing the sum of the squares of deviations between experimental data and calculated values. The comparison results revealed that Bi-Langmuir model could account for the adsorption equilibrium data of acetic acid with the highest accuracy among the three adsorption models conside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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