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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기독교 문화와 토착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박도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2020 한국기독교문화연구 Vol.13 No.-

        본 연구는 한국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 된 이후 지금까지 어떻게 토착화되어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문화적으로 이 땅의 종교로 뿌 리내릴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120년의 역사 속에서 스며들어 왔다. 문제는 현대에 와서 기독교가 조금씩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세상에서 비난받는 종교가 되고 있 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찾아보고, 그것을 통해 기독교가 좀 더 깊 이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연구를 위해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의 과정을 살펴보고, 포스트 모 더니즘의 핵심 가치인 다원주의 정신이 확산하는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의 길이 예수임을 내세우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회가 교회다 움을 잊어버리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종교로 남는 길이 무엇인 지를 모색하고자 한다. 그것이 기독교가 이 땅에 깊이 뿌리내려 스 며들 수 있는 길임을 밝히고자 한다. This study explores the possibility of contextualization of Korean Christianity as it examines how Korean Christianity has been contextualized and been culturally rooted in this land so far since its introduction. Christianity has permeated through 120 years as one of main religious institutions in Korea. The problem is that Christianity is gradually losing its vitality and recently becoming a religion criticized by people in Korea. This research diagnoses the reason of this issue and endeavors to find a way how Christianity might be rooted firmly in this land. This research examines the process of indigenousization of Korean Christianity and explores the way how Christianity becomes the institution for salvation within this post-modern world which emphasizes the pluralism. Thus, this study proposes the way how Christianity can be deeply rooted and permeated into this post-modern society.

      • KCI등재후보

        한국기독교 선교와 근대 학교 설립과정

        임종권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2021 한국기독교문화연구 Vol.15 No.-

        한국 근대 교육은 기독교 선교에서 시작되었다. 초기 국가가 주 도한 국영 근대교육기관은 철저하게 신분제에 따른 사대부 양반 자 제들 중심의 교육으로 인하여 나태와 불성실 그리고 학교 운영을 맡은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한편 기독교 선교를 위해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처음엔 복음 전도와 교회 설립에 치중하였으나 이는 당시 한국 정치, 사회 등 여러 상황에 맞지 않아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자립, 자치, 자전의 세 가지 원칙을 채택하여 의료와 교육사업에 치중하게 되었다. 한 국교회가 근대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한국이 종교적으 로 유교나 혹은 불교의 전통이 강하고 더욱이 서세동점의 위기 속 에서 서양 선교사들의 기독교 복음전파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런 문제 직면한 한국교회는 비기독교인에게 쉽게 접근 하여 복음을 전파할 방안이 곧 의료와 교육사업임을 깊이 인식하게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 선교본부는 물론 한국선교회에서도 순수한 복음전파 사업과 교회 설립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기존 선교방침을 고수함으로써 개교회들은 자체적으로 학교를 세워 운영하였다. 이 신식학교는 복음 선교에 큰 성과를 거두자 한국선교회는 미국 선교본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독자적으로 교육사업을 추 진하여 근대교육기관인 기독교 학교를 평양과 서울 등 대도시 중심 으로 설립함으로써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이 과정에 서 자립정신에 입각한 복음 사업, 그리고 교육사업을 통해 민족교 육이 자생적으로 강화되어 기독교 민족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이 로써 한국기독교 학교는 곧 복음전파에 머물지 않고 한국의 근대화 사업을 이끌어 갈 기독교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기독교 민족교 육의 요람이란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The Korean Modern School was begun by the Christian Missionary Work. The First modern educational institution in Korea had failed because of a corruption and graft of government official who managed schools and indolence and infidelity caused by education for only children nobleman. On the other hand, at the first time, Christian missionaries had put emphasis on the establish of church and evangelical work. But these works had gone against many situations of politics, society etc. in korea. So, Missionaries needed New strategy of mission, These were Three principles of self-reliance, autonomy, rotation. Through these principles, Missionaries had focused on the educational and medical works. The imperativeness that Korean Church had to establish modern schools was a thing that it was not easy to spread the gospel, Because Korea had a strong Confucianism and Buddhism tradition and was on the brink of invasion of Europe at that time. Korean Church facing these problems was deeply aware of that Medical and educational works were only measure to spread the gospel. But United States Missionary Headquarters and Korean Missionary Church sticked to the existing policy that the mission was to focus on the church establishment and preaching of the gospel. So, Each Korean churches had set up and run a school. Let’s make this new school a great achievement in evangelism, Even Though The Korean Missionary Church did not receive financial support from the U.S. Missionary Headquarters, had pursued an independent education project, Therefore, many Christian schools were established in Pyeonyang and Seoul, hereby, Christain leaders had been produced. In this process, national education was strengthened autonomously through evangelical projects based on the spirit of self-reliance and education projects. Korean Christian Schools had cultivated Christian national leaders to lead the modernization of Korea Instead of staying in evangelism.

      • KCI등재후보

        ‘주체’ 개념에 대한 기독교철학적 이해

        신응철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2021 한국기독교문화연구 Vol.15 No.-

        나는 기독교 문화와 비기독교 문화 간의 소통의 지점은 ‘나’와 ‘우리’, 즉 문화적 주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기독교적 ‘주체’에서 비로소 소통은 시작되는 것이다. 문제는 기독 교적 ‘주체’ 개념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적 주체 개념 이 전통적인 철학적 의미의 ‘주체’ 개념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그것이 왜 문화간 소통을 위한 출발점이 되는지를 규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기독교적 주체 개념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인물로 나는 기독교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 1906-1995)와 리차드 니버 (Richard H. Niebuhr 1894–1962)를 꼽는다. 이들은 소위 자아 중심의 주체에서 타자중심의 주체로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나아 가 이들의 주체 개념은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태도에서 타자에 대 한 책임을 강조하는 태도로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타문화 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이 글은 궁극적으로 문화의 생산자요 향유자로서의 인간, 그 인간 이 지녀야할 문화적 삶의 태도를 염두에 두면서 기독교적 주체란 무 엇인가? 라는 물음에 답변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서 먼저, 서양철학 사상에서의 주체 개념의 변화상과 이것과 기독교적 주체 개념과의 연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서 레비나스의 윤리적 주 체 개념과 니버의 책임적 주체 개념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문화 소통의 논의에서 기독교 주체 개념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I think that communication spot is I and We, that is, the cultural subject between Christian Culture and Non-Christian Culture. So all communication begins in the Christian Subject. Anyway what is the Christian Subject? What is the difference in contrast with western traditional philosophical concept of subject? I think that Emmanuel Levinas(1906-1995) and Richard H. Niebuhr(1894–1962) are the representative in terms of the concept of Christian Subject in the tradition of Christian Philosophers. These two Christian Philosophers insist the change of the concept of Subject from the Ego centrism to the Alter-Ego centrism. Also these two Christian Philosophers insist the responsibility about Alter-Ego more than my right in the concept of Christian Subject.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answer the question, that is, what is the concept of Christian Subject? In this context, firstly we will deal with the difference in contrast with western traditional philosophical concept of subject. And we will discuss Levinas’s the concept of Ethical Subject, and R.H. Niebuhr’s the concept of Responsible Subject. Lastly we will discuss the meaning of the concept of Christian Subject in context of cultural communication.

      • KCI등재후보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와 구세군의 교육 사역

        강종권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2021 한국기독교문화연구 Vol.15 No.-

        이 논문에서는 한국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했던 개신교와 한국 구세군의 교육선교사역 과정과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조선에서 개신교 기독교는 반서양 반기독교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임금으로 부터 승인 받은 대로 의료와 교육 선교를 하였다. 병원과 진료소를 세워 적극적으로 병자들을 치료한 데 비해 조선 사람들의 전통적 정서로 인하여 교육은 마음먹은 것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청 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은 후에 갑자기 수많은 학교들이 세워지고운영되었다. 두 전쟁들 사이에서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문이 자주 독립을 위하여 서양의 근대화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 이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10년까지 839개의 종교 계 사립학교를 포함한 민족학교와 일반 사립학교가 5,000여개나 세워질 정도였다. 물론 일제가 개정한 사립학교 규정으로 1919년 5월에는 1,154개소로 줄었고, 종교계 학교도 298개로 줄었지만 개 신교 기독교는 한국 근대화 교육의 선봉에 서서 그 역할을 감당하 였다. 감리교와 장로교보다 23년 늦게 한국 선교를 시작한 구세군 도 영적인 전투를 위해 교육의 최 일선에서 의로움을 앞세우겠다고 포부를 밝힌 대로 최선을 다해 교육 사역을 하였다. 감리교와 장로 교에 비길 것은 못되겠지만 한국에서 선교하던 다른 교단들에 뒤지 지 않을 정도로 교육 사역에 열정을 다했다. In this paper, I will examine the process and characteristics of the educational missionary ministry of Protestants and the Korea Salvation Army, which played a large role in the modernization of Korea. In Korea, Protestant Christianity performed medical and educational missions as approved by the king in the anti-Western anti-Christian social atmosphere. Compared to the establishment of hospitals and clinics to actively treat the sick, education was not as easy as decided due to the traditional sentiment of the Joseon people. Then, after the Sino-Japanese War and Russo-Japanese War, a number of schools were suddenly built and operated. It was because I felt that Doklipsinmun(the Independence Newspaper) and Daehanmeilsinmun(the Daehan Maeil Newspaper) argued that Western modernization education was essential for independence between the two wars. As a result, by 1910, there were about 5,000 national and general private schools, including 839 private religious schools. Of course, due to the Japanese rule's revised private school regulations in 1915, in May 1919, the number of schools decreased to 1,154, and the number of religious schools decreased to 298, but Protestant Christianity stood at the forefront of the modernization of Korea and took on its role. The Salvation Army, who began missionary work in Korea 23 years later than the Methodists and Presbyterians, did their best in education as they expressed their ambition to put righteousness at the forefront of education for spiritual battles. Although not comparable to the Methodists and Presbyterians, he devoted his passion to the ministry of education to the extent that it was comparable to other denominations that were missionary in Korea.

      • 전쟁과 기억 : 잊지 못하는 기억, 잊어버린 기억

        최태육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2019 한국기독교문화연구 Vol.11 No.-

        한국전쟁 당시 기독교인들과 관련된 학살 사건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북한의 인민군과 치안당국(내무서, 정치보위부), 지방좌익에게 학살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인 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데 가담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전자는 휴전 이후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면서 한국기독교인들의 잔공신앙을 형성하는데 깊은 영향을 주었다. 후자는 기독교인들은 물론, 민간인학살을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알지 못하는 사건이다. 북한 치안당국은 1946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부터 기독교를 ‘악질종교’로 규정하였고, 기독교인 상당수가 남한의 정치인과 미국을 지지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동년 4월 경부터 보안국은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기독교내 다수의 교 인을 친미주의자라고 판단하면서 기독교 내에 반동분자를 사찰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치안당국의 기독교 적대정책은 한국전쟁 개전 직 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종교인 사찰로 이어졌다. 인민군과 내 무서원이 후퇴하면서 여러 곳에서 인민군, 내무서원의 지원을 받는 지방좌익에게 기독교인들이 집단희생 되었다. 논산군 성동면 병촌 교회의 경우 66명이 2일 동안 개척리 뒷산에서 학살되었다. 이는 북한 치안당국이 기독교인을 특정집단, 즉 반동으로 규정하였기 때 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오제도, 조병옥, 장도영 등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한국전쟁 중 민 간인 학살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현장에서 직접 학살을 지시한 사 람들이라기보다 학살을 지휘명령한 사람들이었다. 오제도는 ‘회개’ 라는 기독교적 신념을 가지고 국민보도연맹원을 분류하였고, 조병 옥은 세계를 사탄의 진영과 선한 진영으로 나누고, 사탄의 진영을 멸하는 것을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사탄의 진영은 5.10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 주민이었고, 대구경북 에서 체포된 이른바 오열들이었다. 장도영은 1947년부터 하나님의 군대론을 주창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진영을 수호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6월 28일 수원에서 적색분자소탕 을 지시하였고, 이 지시를 받은 육군정보국 방첩과장 한웅진과 부 산경북지역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은 민간인처형을 주도하였 다. 문제는 오제도, 조병옥, 장도영 등 학살을 지휘명령한 사람들의 신앙이 당시 한국기독교의 주류 신앙과 일치하였고 이러한 신앙을 신념화 하였다는 점이다. 이 신념은 학살을 정당화 내지 적극화하였다. 이러한 신념화의 본질은 자신과 다른 신앙과 이념을 가진 사 람을 적대하는 배타적 이원론이었다.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15일 이후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도 상 호 적대에 근거한 배타적 이원론이었다. 자기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가 세계를 지배했고, 이 논리에 입각해 소련은 ‘팽창’ 정책을, 미국은 ‘봉쇄’ 정책을 펼치면서 서로를 대체하려 하였다. 이렇게 시 작된 냉전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호 적대 이념은 종교까지 파고들었고, 한국의 기독교와 북한의 치안당 국은 이에 충실했다. 결국 상호 적대라는 신념과 이념이 충돌하면 서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발생하였다. 기독교가 돌아볼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사랑과 평 화를 말하는 기독교인들이 왜 학살에 가담했는지, 그에 대한 회고 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 북한 치안당국도 기독교인들을 사찰했고, 반동으로 규정 이들 중 일부를 처형한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 시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적대의 기억은 우리에게 화해의 길 열어 줄 것이다. Genocide related to Christians during the Korean War is twofold: Christians were killed by the North Korean people’s army, police, and local leftists on the one hand and Christians participated in mass killings on the other. The first has affected to generate and reproduce the faith of ‘anti-communism’ in church groups whereas the latter has remained unknown to Christians as well as experts of massacres until today. At first, North Korea’s police had classified Christianity as a wicked religion ever since February 1942 when the interim National People’s Congress was established, and took a position against the Christian alliance of South Korean politicians and the United State of America. From April in the same year, National Security Bureau of North Korea labelled the act of the U.S. in the Korean peninsula as Imperialism and started inspecting reactionaries among Christians, judging them as the pro-United States. The inspection was based on the hostile policy towards Christianity, and thereby Christians were slaughtered by North Korean soldiers and local leftists while the people’s army retreated. By contrast, numerous Christians joined in civilian massacres during the Korean War. Several among them were in high positions, organizing and commanding mass killings. They represented the mainstream Christian belief at that time and used it for the justification of such violence. Importantly, the belief was founded on a dualism that excludes religious and ideological others. For example, Jae-Do Oh categorized members of Bo-do League rooted in a Christian creed, ‘repentance’ while Byung-Ok Jo divided the world the good and the evil, and understood that eliminating the evil bloc advances the Kingdom of God. Do-Young Jang regarded guarding the capitalistic bloc along with the U.S. as his vocation, advocating ‘God’s Forces’ in 1947. By this ideology, Chang-Ryung Kim was able to justify the civilian massacres at his hand. Likewise, the exclusive dualism has been affecting the Korean Peninsula ever since August 15th, 1945 just as the cold war was founded along with this exclusion and dualism. This ideology permeated religions. South Korean Christians and North Korea’s security forces were loyal to it. Civilian massacres at the hand of Christians took place by such an ideological collision. This is the point of reflection that why Christians who speak love and peace participated in mass killings. Throughout this paper, I illustrate these historical records and argue that reconciliation can be achieved only when both South Korea’s Christians and North Korean security forces acknowledge what had happened in the past and express their regrets.

      • 한국 근대에 대한 논쟁의 역사와 변화

        윤정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2019 한국기독교문화연구 Vol.12 No.-

        지금까지 한국 근대에 대한 논쟁의 역사와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 았다. 한국 근대에 대한 논쟁이 촉발된 것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이 몰락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사의 전개과정, 근대성에 대한 논 의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80년대 후반까지 학계의 통설이었던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이를 반박하여 일제강점기를 통해 근대화가 이루어 졌고 이를 기반으로 1960년대 경제성장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에는 이렇게 시작된 논쟁은 2000년 들어서 실증적인 사례를 통해 서로 논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교과서 포럼을 조 직하여 그들의 주장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식민지근 대화론을 주장하던 학자들이 대체로 경제사 전공자들이었는데, 교 과서 포럼이 조직된 이후에는 정치학, 사회학, 서양사, 역사교육학 등이 전공자들도 가세하였다. 그들은 2017년에는 국정교과서를 발간하였고, 이에 한국사학계 에서는 거리로 나가 이를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결국 국정 교과서 발간을 정책의 목표로 삼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됨으로써 이 논쟁은 가시적으로 종결된 상태이다. 동시에 1980년대 후반 이후 근대성에 대한 논쟁도 활발하게 전개되 었다. 근대성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하는 논의에서부터, 한국근대성의 정체성을 특징짓는 여러 개념들이 제안되었다. 예를 들어 식민지근대 성, 환원근대, 중층근대성론, 유교적근대성론 등을 들 수 있다. 2018 년에 숭실대학교에서는 인문한국플러스 사업의 아젠다로 한국의 근대 전환공간을 분석 및 검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젠다는 “한국 근대 전환공간의 인문학, 문화의 메타모포시스”이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 근대의 성격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질문했다면, 이 사업에서는 근대 전환공간에서 한국의 근대가 자신의 원래 특성을 잃지 않은 채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를 역사사회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This article looks at the history and changes in the debate about modern Korean history. The controversy over Korea’s modernity began with the fall of the Soviet Union and other Eastern blocs. The theory of internal development, which had been the norm in the academic world until the late 1980s, was criticized by colonial modernists. Colonial modernists refuted the theory that the development of Korean history was self-reliant and voluntary. They claimed that the modernization through the Japanese occupation and argued that economic growth in the 1960s was achieved through such modernization. The dispute, which began in the 1990s, was developed in the 2000s through empirical cases. They then organized a textbook forum to spread their opinions to the public. Scholars who advocated the theory of colonial modernization were mostly economic historians, and after the textbook forum was organized, political science, sociology, Western history, and history education scholars joined it. They published government-designated textbook in 2017, and the Korean historians fought against them by taking to the streets. After all, Park Geun-hye who was targeted for publication of national textbook was impeached for president, and this debate ended. At the same time, there has been a lively debate about modernity since the late 1980s. From the ground-breaking discussion of modernity, various concepts that characterize the identity of modernity in Korea were proposed. For example, colonial modernity, reduction modernity, complex modernity theory, Confucian modernity theory, etc. In 2018, Soong-sil University is working on analyzing and reviewing Korea’s modern transition space as an agenda for the HK+ project. The agenda of the HK+ project group at Soong-sil University is “The metamorphosis of the humanities and culture of Korea’s modern transition space.” So far, scholars have asked what the personality of modern Korea has been like. Soong-sil University’s HK+ business group is historically and sociologically trying to figure out how Korea’s modern era emerged without losing its original characteristics in the modern transition space.

      • KCI등재후보

        선교사와 문화; 초기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사업과 한국인들과의 문화적 관계 (1884-1945)

        장성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2021 한국기독교문화연구 Vol.16 No.-

        이 논문은 조선개항이후 시작된 한국 내 개신교 선교를 위한 내 한한 외국국적 선교사에 대한 연구로서, 봉건제도 하의 조선이 근 대화의 요구에 직면해 있을 당시, 서구문화권에서 온 선교사들이 경험한 한국문화 및 한국인들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이와 동시에 한 국인들이 외래문화로서의 기독교문화와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갈등 그리고 수용 및 변용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내한 선교사총람, 1884-1984』의 자료집을 근거로 1945년에 내한이 확인된 선교사 1,529명을 기반으로 선교사 수의 69.3%를 차지하는 미국출신 선교사들의 활동들을 살펴보았다. 조선인접 국 가들의 서구문화 유입과 근대화 과정 상황 속에서 내한한 선교사들 이 조선에 미친 영향과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 해, ‘선교사와 정치; 알렌과 언더우드’와 ‘선교사와 교육 및 의료; 여성을 위한 여성사역(Women’s Work for Women)’로 주제로 역사적, 그리고 종교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연구하였다. 이를 내한한 서구문명 기반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국주의 식민 지화의 위기라는 조선의 역사적 특수한 상황에서 다른 선교지와 차 별화된 문화적 선교방식을 채택하였고, 이 선교방식이 근대화의 열 망을 지닌 한국인들의 지지와 적극적인 참여의 결과로 나타났고, 이는 한국의 시대적 근대화의 시작이 되었다. This is a study on foreign missionaries who visited Korea for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that started after the Open Ports Act of the Joseon Dynasty. When the Joseon Dynasty of feudalism system was facing the demands of modernization, it investigated how the experiences of missionaries from Western cultures about Korean cultures and relationships with Koreans. At the same time, this study examines how Koreans reacted to, conflicted with, and accepted and changed Christian culture as a foreign culture and the activities of missionaries. Based on the databook of 『General List of Missionaries to Korea, 1884-1984』, based on 1,529 missionaries who were confirmed to have visited Korea in 1945, the activities of missionaries from the United States, which account for 69.3% of the number of missionaries, were examined. To examine the influence of Korean missionaries on the Joseon Dynasty and the Koreans’ response to it, ‘Missionary and Politics; Allen and Underwood‘ and ’Missionaries and Education and Healthcare; With the theme of ‘Women’s Work for Women’, this research was conducted from a historical, religious, social and cultural perspective. Protestant missionaries based on Western civilization who visited Korea adopted a cultural mission method differentiated from other mission fields in the special historical situation of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crisis of imperialism and colonization. appeared, and this marked the beginning of the modernizat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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