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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민속학사(南道民俗學史) -연구동향과 동아시아에서 남도민속의 위상-

            이경엽 ( Kyung Yeop Lee ) 남도민속학회 2008 남도민속연구 Vol.16 No.-

            학사(學史)를 점검하는 목적은 한 분야의 학문적 궤적을 살펴보고 미래를 창조적으로 전망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남도민속학사를 다루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의미 있는축적 과정만큼 논의가 심화되고 새 과제가 제시되는 것이 학문의 본질이다. 남도민속 학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전망을 새롭게 모색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내적 문제에 집중했던 기존의 관심을 발전시켜 안팎을 아우를 수 있는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 지역 단위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대내외적 시각을 포괄함으로써 남도민속학 전반의 관심과 위상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남도민속학은 성립기부터 일관되게 지역민속학의 기반을 튼실하게 다져왔다. 성립기, 발전기, 성숙기를 거치면서 분야별 전문성을 갖춘 연구자들이 늘어났으며, 민속현장을 연구와 긴밀하게 연결하는 학회 활동을 통해 내실화를 다져왔다. 최근 들어 체계적인 자료집을 간행하고 지역학과 마을민속 연구, 민속활용론 연구를 활성화하는 노력들은 지속적인 성장 기반을 다져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자료집 간행이 주목된다. 민속학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학문적인 기반을 다져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연구사적으로 볼 때, 남도민속의 위상은 동아시아 차원의 구도 속에서 구체적으로 탐색된다. 문화적 유사성에 토대를 둔 한·일, 한·중 간의 비교 연구가 가장 활성화되어 있다. 특히 남도와 오끼나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 남도민속의 보편성과 특성을 탐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국내외 많은 학자들이 주목해온 농촌 사회, 당골 세습무, 씻김굿, 판소리, 강강술래, 줄다리기, 고싸움, 초분 등은 지역성이 짙은 연구대상이다. 그러면서 다른 지역과 연계되고 또 대비되는 민속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당골 세습무의 존재는 동아시아 권역에서 보편적인 존재이면서 독자성이 두드러진 남도민속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진도를 통해 남도민속의 대외적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진도는 남해안에 있는 한 섬이지만 문화적 위상은 물리적 공간의 범위를 넘어 전국적이고 국제적이다. 진도의 사례에서 보듯이, 남도민속은 공간적인 경계를 넘어 수많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시간적·공간적 검색 창으로 활용돼왔다. 남도민속이 대내외에서 주목받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도민속학은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다. 기존의 지역 단위의 활동을 객관화하고 안팎을 아우르는 시각을 확보해갈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지역민속학의 지향성도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남도의 오랜 전통에 해당하는 농경문화, 도서·해양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비교 연구가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해왔던 남도와 오끼나와 비교연구를 더 심화하고, 동아시아 차원의 큰 구도 속에서 남도민속학의 위상을 새롭게 모색해가야 한다. The purpose of examining the history of a discipline is to look at academic trace of one field and to put the future into perspective in a creative manner. It``s for the same reason that we are dealing with the history of Namdo folklore. The essence of learning is to present new tasks as discussion is strengthened through the meaningful accumulation process. There is a need to find new prospect through new approach to the history of Namdo folklore. Especially, there is a need for change from the existing perspective which focused on the internal matter to develop it to cover both internal and external matters. Not constrained by locality, it will be possible to establish the interests and prestige of overall Namdo folklore by including the external and internal perspectives. Namdo folklore, from its birth, has laid the foundation on a sturdy base as a local folklore in a consistent manner. Through the birth period, development period, maturation period, there came researchers with expertise and through the society activities which connect the folklore field with the research, it was able to focus on substance. Recent publication of systematic materials and recent efforts to activate the local studies, town folklore research, and folklore research can be said to comprise the process for continuing growth. Of particular, the publication of materials is to be reckoned with. For continuing development of folklore, there must be efforts to build up the academic foundation. From the perspective of research history, the prestige of Namdo folklore can be explored in detail in the composition of Eastern Asia. Its comparative research between Korea and Japan and between Korea and China based on the cultural similarity is one of the most activated. Especially, there is research bewteen Namdo and Okinawa in order to study the universality and characteristics of Namdo folklore. Agricultural society, Dangol Sesupmoo, Sitgim Gut, Pansori, Kangkangsullae, a tug of war, Goe fight, tumulus to which close attention by domestic and international scholars are research topics with deep locality. At the same time, they are connected with some regions and contrasted with others. Of notable examples, the existence of Dangol Sesupmoo shows the prestige of Namdo folklore which possesses universality as well as uniqueness in the Eastern Asia. Through Jindo, we can confirm the external prestige of Namdo folklore. Jindo, an island in the Southern coast, has a cultural prestige that extends well beyond the physical boundary to be national and international. As observable from the case of Jindo, Namdo folklore has transcended the spatial limits and it is used as a exploring window of time and space to solve numerous riddles. This is where we can be sure that Namdo folklore is an object of special attention from inside and outside. Namdo folklore has new tasks. There is a need to objectively arrange the existing region-level activities and to secure a perspective that covers inside and outside. Through this, the orientation of local ethnic customs can take concrete shape. There is a need for full-scale comparative research on agricultural culture, islets and oceanic culture which are of profound tradition of Namdo. We need to intensify the comparative research between Namdo and Okinawa and find new ways to raise the prestige of Namdo folklore in the bigger composition of Eastern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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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현상으로서의 남도굿 연구 방향

            최진아 남도민속학회 2018 남도민속연구 Vol.37 No.-

            본 연구는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남도굿을 문화현상의 관점에서, 남도굿 연구를 위한 방향을 제안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남도굿 무속 연구를 위한 방향을 크게 세 가지로 제안해 보았다. 첫째는 연구대상과 연구영역 확장의 필요성이다. 기존에 논의의 중심이 선굿을 행하는 세습무의 씻김굿에 집중되었다면, 이제는 현재 다양한 의례 주재자의 등장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남도무속에 나타나는 강신형 보살과 법사의 강세, 그리고 이들과 세습무와의 협업으로 인해 남도굿이 변화하고 있다. 정통성을 논하며 남도굿을 예술적인 틀 속에서만 분석하고 또한 그러한 굿만이 원형을 지닌 굿으로 주목한다면 당대의 문화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특성은 간과될 수 있다. 따라서, 당대에 나타나는 의례 주재자들의 무속 현상을 연구하는 현상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한 접근을 통한 연구는 곧 남도무속 변화의 문화사적인 변화상을 파악하는 근거자료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지역을 벗어난 巫의 사례 및 지리적 인접 경계지역 연구에 대한 방향을 제안해 보았다. 무속의례의 규모 축소나 변화는 이미 1990년대 이전부터 巫가 본인들의 거주 지역을 벗어나 대도시로 이동하여 무업을 행하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속의 소비가 줄어들면서 지방의 무(巫)는 청송무당으로 도시굿에 불려가거나 아예 남도를 벗어나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형태의 굿을 재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남도무속은 남도라는 지리적인 공간 내에서 보편성이 존재하지만, 한편 그 안에서도 전북의 남․북 간 그리고 전남의 동․서 간 각각의 특수성이 존재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또한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충남과 경남 등의 경계지역 무속과 유사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경계지역 무속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찾는 연구에도 가치부여가 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실제 신앙목적으로 행해지는 굿과 무대에서 실연되는 공연굿의 정체성 문제를 제안해 보았다. 근래 무대에서 실연되는 공연굿은 하나의 정형화된 틀로 재정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제장에는 의례에 쓰이는 상징물을 크고 화려하게 제작해 장식하며, 무복 또한 특정 거리에 상관없이 착용하고 있다. 그런데 간혹 실제굿에 무대공연굿의 상징물과 무복 등을 사용하는 등 무속을 주재하는 이들 내부에서도 정체성의 혼란이 야기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무대공연굿과 실제굿과의 구분 및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propose a direction for studying Namdo-gut(exorcism), which appears in various aspects from the viewpoint of cultural phenomenon. Three directions have been proposed for the study of Namdo-gut shamanism. The first is the need for the expansion of research subject and research area. The central point of the discussion was focused on Ssitgim Gut by Seseummu (hereditary shaman) who perform Standing Gut. However, now we have to pay attention to a phenomenon that is emerging with the advent of various ritual presiders. The strength of spiritual bodhisattva and buddhist monk who appear in Namdo shamanism, and cooperation between them and Seseummu (hereditary shaman) is changing Namdo-gut. If we analyze Namdo-gut only in the artistic framework while discussing the legitimacy and notice that such gut is the prototype of the gut, we may overlook cultural characteristics that appear in contemporary cultural phenomena. Therefore, a phenomenological approach is needed to study the shamanic phenomena of the ritual presiders of those days. The study through such an approach will be a basis for understanding the cultural history changes in Namdo shamanism. Secondly, a direction has been proposed for the case of shamans out of the area and the study on geographical neighboring boundary. The shrinking or changing of the shaman rites was already carried out even before the 1990s, when shamans moved out of their residence area and moved to the big city to perform their work. As the consumption of shamanism decreased, the shaman in the province began to be called to the city gut as Cheongsong shaman or moved to the other area from Namdo and began reproducing a new type of gut. In addition, there is universality of Namdo shamanism in the geographical space of Namdo. However we have to notice that there is a specificity between the South and the North of Jeonbuk and the East and West of Jeonnam within Namdo. Moreover, there are also similarities between the geographically adjacent shaman areas such as Chungnam and Gyeongnam. Therefore, value should be given to the study of universality and specificity of shamanism in the border area. Thirdly, identity issues between the gut performed for actual faith purposes and the gut performed on the stage have been proposed. The stage performance gut that has recently been put on the stage has been reorganized into a stereotyped framework. In addition, the symbolic objects used for the ritual in the stage are made big, colorful and decorated, shamanism costumes are put on regardless of specific shaman songs. However, occasionally, there are some cases in which the confusion of identity is caused among those who preside in shamanic rituals, as they are using the symbols of the stage performance gut in the actual gut. Therefore, the discussion about the distinction and identity between the stage performance gut and the actual gut must be accompan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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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싸움놀이의 문화재 지정과 축제화, 재맥락화

            이경엽 ( Kyung Yup Lee ) 남도민속학회 2011 남도민속연구 Vol.23 No.-

            이 글에서는 고싸움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과 문화재 지정 이후 축제화되고 재맥락화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고싸움은 남도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민속놀이로 꼽힌다. 영산강과 탐진강 일대 여러 지역에서 고싸움이 전승되었지만,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채로 사장되고 ‘광주 칠석동 고싸움'이 선택적으로 특화돼왔다. 칠석 고싸움놀이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시연된 후 세계성을 지닌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외형화된 평가와 달리 간단치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으므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 오늘날의 고싸움놀이는 축제를 통해 재현되고 있다. 고싸움놀이축제는 30여년 지속되면서 일정한 기조를 유지하면서 또 새롭게 변화돼왔다. 고싸움놀이에 대한 기대가치는 여러 형태로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지자체의 문화정책이나 학계의 몇몇 논의는 고싸움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쪽에 집중돼 있고, 언론과 방송도 이런 방향에 힘을실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이 축제나 지역개발 프로그램으로 수용되고, 유용 주체의 재맥락화 논리로 차용되고 있다. 마을 내 유용 주체들은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정책에 맞춰, 이벤트화를 통해 고싸움놀이의 상업적 가치를 높이고 세계축제로 나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유용 주체의 정치지향성에도 불구하고, 고싸움놀이축제는외부의 지원 없이는 존립하기 어렵고, 내부적인 여건과 공동체에 내재된 자발성, 전승기반은 허약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과 세계적인 축제 또는 성공적인 축제 사이의 거리는 쉽게 좁혀질 것 같지 않다. 외형 확대 위주의 사업화를 경계하고 축제의 허실을 따지고 현실을 냉철하게 진단하는 작업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Gossaum is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folk games in Korea, not only in Namdo region, but also nationwide. Gassaum has been transmitted in many regions along Yongsan River, however, it has not received its due attention and died out with the exception of ‘Kwangju Chilsukdong Gossaum' which came into the spotlight and developed. Chilsuk Gossaumnori has received a lot of attention since it has been designated as a cultural heritage. Especially after its performance in Asian Games and Olympic, it has been deemed as a cultural heritage with universal beauty. Today's Gossaum is revived through festivals. Gossaumnori festival has been taking place over 30 years with certain form of consistency while also undergoing changes. Expectations for Gossaumnori have been presented in various forms. They have been accepted into festivals and expressed in different formats. Gossaumnori plays a dynamic role and raises expectation high through recontextualization under the new circumstances and contexts of the modern age. Attempts have been made to raise Gossaumnori``s commercial value and to find ways to help it become a world festival through diverse events. However, such attempts rely heavily on external support such as municipals instead of leading it with independent capability and planning. It is time to consider the path of the festival. It is the remaining task as to how to accept and revive the dynamic energy within Gossaumn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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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호남풍물굿 개인놀이의 분화과정 연구 - 서남해지역 버꾸놀이와 내륙의 설장구놀이를 주목하며 -

            송기태 ( Song Ki-tae ) 남도민속학회 2019 남도민속연구 Vol.0 No.38

            본고에서는 호남풍물굿의 개인놀이가 분화 발달하는 과정과 그것을 촉발한 세습무계 연희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마을풍물굿 전승이 왕성한 전남 남해안지역의 마을풍물굿에서 미분화된 개인놀이의 형태를 확인하였다. 미분화된 개인놀이는 개인별로 독자적 예능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예능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개인의 장기를 선보이는 방식으로 연행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전문적인 개인놀이의 발달과 관련해서는 설장구놀이를 중심으로 기원설과 가락구성, 문화적 상황 등을 살펴보았다. 호남지역에서 개인놀이를 비롯한 풍물굿 예능의 발달을 주도한 집단은 세습무계 출신의 연희자들이다. 풍물굿의 발달을 이룩한 예인들과 판소리·기악 연주자들은 큰 틀에서 세습무계의 네트워크로 얽혀있었다. 실제 풍물굿의 중심 역할을 한 세습무계 출신 예인들은 기악과 소리도 배웠다. 이러한 세습무계의 연망을 주목하여 설장구의 성립이 당대 판소리와 산조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존재한 것임을 추정하였다. 풍물굿의 발달을 이룩한 예인들과 기악 연주자들이 큰 틀에서 세습무계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산조의 태동과 근접한 시기에 설장구놀이 등의 풍물굿 개인놀이가 성립되었으며, 개인놀이에서 사용하는 장단의 명칭은 산조나 시나위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풍물굿의 개인놀이는 큰 틀의 ‘산조문화' 속에서 성립되고 발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풍물굿 개인놀이는 기본적으로 독자적인 내적 발달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산조의 형식을 차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예능으로 정착하고 성장해왔다고 할 수 있다. 세습무계 연희자에 의해서 분화되고 발달된 개인놀이는 풍물굿 예능이 타악 위주의 완성된 작품으로 발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개 풍물굿은 몇 개의 가락을 결합하여 하나의 굿거리를 완성하는데, 가락의 연결이 음악의 곡처럼 치밀하게 짜여져있는 것이 아니라 ‘내고 달아서 맺어 푸는' 대강의 틀을 공유한 채 동일한 가락의 반복과 축적을 수행하고, 연행 상황에 따라 다음 가락으로 넘어가거나 맺는 형태였다. 그러던 것이 세습무계 연희자의 풍물굿진출과 산조문화의 확대로 인해 짜임새 있는 개인놀이로 탄생된 것이다. 결국 호남의 세습무계 연희자들은 20세기 협률사 활동을 거치면서 스스로 전문풍물인이 되는 길을 개척하고 전문적인 공연풍물굿을 정착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과정에서 남도의 무속과 음악전통을 풍물굿에 접목시켜 예술적 성장을 이룩하고 현재의 풍물굿 판도를 재편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investigates the development and differentiation of solo performance (gaein-nori) in Honam pungmulgut, and the role of artists from hereditary shaman(seseummu) tradition on triggered such changes. First, the gaein-nori before its development into a specific form of pungmulgut was investigated. The microforms of gaein-nori were confirmed through the presence of gaein-nori in village-level pungmulgut. Generally, gaein-nori was limited to showing one's talents within the form of group performance, rather than an individual building and leading the performance independently. In regard to the development of performance led by one entertainer, or gaein-nori, factors such as theories of its origin, rhythm composition, and cultural contexts were discussed, with a focus on seoljanggu. In the Honam region(southwestern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the entertainers from seseummu tradition had led the rise of gaein-nori and other forms of pungmulgut entertainments. Indeed, notable entertainers, instrumental performers, and pansori singers who developed pungmulgut were associates within the seseummu network. Entertainers from seseummu genre were also trained in playing instruments and vocalization. Based on the large network of seseummu, it is hypothesized that the birth of seoljanggu reflects the cultural contexts of pansori and sanjo of that era. The rise of seoljanggu, a type of gaein-nori in pungmulgut performance, coincides with the development of sanjo. In addition, as the artists and instrumental performers who established pungmulgut had direct and/or indirect relationship with seseummu, the name of rhythms used in gaein-nori were likely be heavily influenced by sanjo and sinawi(a traditional form of Korean instrumental music). Hence, the development and establishment of gaein-nori in pungmulgut are best understood within the larger context of ‘sanjo culture'. Moreover, gaein-nori in pungmulgut developed independently beyond borrowing the style from sanjo, achieving the status of differentiated, unique form of entertainment that is distinct from other formats. Gaein-nori, developed and differentiated by artists from seseummu, became the trigger for pungmulgut to evolve into a form of entertainment that is marked by its focus on percussion instruments. In general, pungmulgut combines multiple rhythms to complete a gutgeori(a form of rhythm), or a piece. Unlike detailed and careful composition in other music, the rhythm is formed within a rough framework; identical rhythms are repeated and layered upon and loosely bridged as if ‘running and chasing'. It rapidly advances to the next rhythm depending on the play. However, with the expansion of sanjo culture and the introduction of seseummu, pungmulgut evolved into an organized performance, gaein-nori. In conclusion, the Honam region artists from seseummu are considered to have paved the way to become professional pungmulgut artists for themselves and served the role of establishing a structured form of pungmulgut performances in the 20 th century. During the process, they have combined the shaman culture and music traditions of the Honam region to achieve artistical advancement and reformation of the organization of pungmulg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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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진도아리랑 교육의 문제와 개선방안

            김혜정 ( Hey Jung Kim ) 남도민속학회 2013 남도민속연구 Vol.27 No.-

            현재 음악교육에서 진도아리랑은 남도민요의 대표악곡으로 남도민요의 특성을 교육하기 위한 소재로서 널리 다루어지고 있다. 진도아리랑은 7차 교육과정까지는 중학교 교과서 위주로 다루어졌으며, 2007 개정 교육과정에 의한 교과서부터 초등학교의 가창곡으로도 다루어지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우선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음악 교과서에서 진도아리랑의 문제점을 진단해 보고 교육 방안을 정리해 보았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가창영역에서 육자배기토리의 시김새는 ‘미라시도', 또는 ‘미라도-시'의 음계로 제시되어야 한다. 떠는 음, 꺾는 음, 평으로 내는 음과 같은 시김새는 자율적인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또 민요 가창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헤테로포니 현상이 수업에서 재현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받는소리나 메기는소리의 선율 제시가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기악영역의 장단은 중모리 장단을 골격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진도아리랑은 3소박 4박의 중중모리가 느려진 구조이므로 4장단 단위로 악구가 형성되며 12박 중 9번째 박에 강세가 붙는 형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중모리 장단의 구조를 이해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중모리 장단은 판소리와 산조에 사용하는 장단으로 남도 음악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당연히 진도아리랑에 중모리를 붙여야 지역적 정체성과도 맞아 떨어진다. 또 육자배기토리는 가야금과 같은 현악기와 가장 잘 어울린다. 2009 교육과정에서는 가야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국악기의 범주가 확대되어 있다. 따라서 진도아리랑 단원에 가야금을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셋째, 창작 분야의 활동으로 가사 바꾸기 활동은 재미있는 가사를 참고로 제시해 주거나, 기존 가사의 일부를 바꾸는 활동으로 제시한다면 쉽게 창의성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율 바꾸기나 가락짓기 등의 활동 역시 기존의 가락 일부분을 바꾸도록 하여 난이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 또한 속도나 장단을 바꾸는 활동도 가능하다. 진도아리랑을 느리게 불러 봄으로서 세마치를 빠르게 불러 3소박 4박의 중중모리형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시김새를 자유롭게 빼고 넣는 활동을 시도할 수 있다. 넷째, 감상 영역에서는 다양한 차원의 적용이 가능하다. 가장 직접적으로 전라도 민요의 세마치 장단형 악곡들을 통해 기존의 악곡을 활용한 새로운 악곡 만들기의 방법과 사례를 볼 수 있으며, 창의성을 자극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육자배기토리의 다양한 장르적 활용을 비교 감상하거나 진도의 많은 음악문화와 연계할 수도 있다. 진도아리랑을 둘러싼 다차원적 통합 교육도 시도할 수 있다. 통합에는 교과간 통합, 영역별 통합, 악가무 종합 예술적 통합 등이 있을 수 있다. 교과간 통합에서는 국어, 체육(무용), 사회 등과의 연계 교육이 있을 수 있고, 영역별 통합은 가창, 기악, 창작, 감상의 영역을 제한하지 않고 통합시키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영역별 통합은 더 나아가 악가무 종합 예술적 통합으로 심화될 수 있다. 이는 가창과 기악, 신체표현 등이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Currently, in music education, Jindo arirang is handled as a representative song of Namdo folksongs in order to educate characteristics of Namdo folksongs. Jindo arirang was taught at middle school level until the 7th national curriculum and after the 2007 revised curriculum it is dealt at elementary school level. This paper examines the issues of Jindo arirang in elementary school and middle school music textbook and propose measures for education. Firstly, in singing section, yukjabagitori and sigimsae should be presented in scales as ‘mi ra ti do' or ‘mi ra do-ti'. Sigimsae such as trill, bending notes, middle-level sound should be left to autonomous selection. In addition, in order for the natural heterophony which occurs in folksong singing to take place naturally in class, various melodies with giving sound and receiving sound be presented. Secondly, rhythms for instrumental part should be taught with Jungmori rhythm as the frame. Jindo arirang is a slower version of 3 small beat and 4 beat Jungjungmori, and therefore, sections are formed as 4 rhythm unit with the accent on the 9th beat of 12 beats. Therefore, there is a need to understand the structure of Jungmori rhythm. Jungmori rhythm which is used for pansori and sanjo originates from Namdo music and naturally Jindo arirang must go together with Jungmori for its regional identity. Also, yukjabagitori goes best with stringed instruments such as gayaguem. In 2009 curriculum the range of Korean traditional music is extended so as to use gayaguem. Therefore, there is a need to come up with a way to utilize gayageum. Thirdly, as an activity of creativity section, lyric-changing activities can stimulate creativity easily through the presentation of interesting lyric and be presented as an activity to change the existing lyric. Also, activities such as melody-changing activities and rhythm-making activities should be made easier by having students change a part from the existing rhythms. Also, activities to change the speed and the rhythms are possible. By singing Jindo arirang slower, semachi can be divided into Jinyangjo of 6 beat and by singing faster, it can be made to Jungjungmori of 3 small beat and 4 beat. During the process, activities to insert and remove sigimsae can be tried. Fourthly, in terms of appreciation section, various dimensions are feasible. Most directly, through semachi-rhythmed songs of Jeallado folksongs, methods and cases of creating new songs by utilizing the existing ones can be examined and it can stimulate creativity. Also, various genre utilization of yukjabagitori can be compared, appreciated, and correlated to the many cultures of Jindo. Multi-dimensional integrated education about Jindo arirang can be tried. For integration. there can be inter-disciplinary integration, sectional integration, and singing-playing music-dancing artistic integration, etc. For inter-disciplinary integration, Korean, physical education(dancing), and social civics can be related. For sectional integration, singing, playing musical instrument, creating music, and appreciating can be integrated without limit. Sectional integration can be intensified to singing-playing music-dancing artistic integration. This means singing, playing musical instruments, and physical expressions are performed simultaneous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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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의 차시(茶詩)에 나타난 보성의 차풍속(茶風俗) 연구(硏究)

            정서경 ( Seok Yeong Jung ) 남도민속학회 2010 남도민속연구 Vol.20 No.-

            보성의 민속은 이 지역의 자연적 여건과 역사적 요인, 그리고 사회성에 의해서 지연의 공감대를 가지고 형성되어 변형·발전되어 왔다. 그러므로 전승 되어온 민속에는 보성인의 감정과 정신이 깃들어 있을 뿐 아니라 생활의 소중한 지혜와 삶의 방법과 그 질서가 제시되어 있다. 보성군은 山紫水明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명승고적과 유람지가 많다. 예부터 자라고 있는 차나무가 많은 만큼 전남의 선조들은 茶와 더불어 살아왔던 터였음으로 차생활에 얽힌 기록과 그 흔적도 많다. 하지만 1950년대를 중심으로 차나무가 심어져 재배차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부터 보성은 고려시대의 대표적 飮茶 지역으로 熊岾茶所(웅치면)와 乫坪茶所(회천면)는 장흥도호부에 속한 때도 차를 貢茶하던 곳으로, 조선왕조실록 지리지의 세종 15년(1433)의 기록에서는 오곡, 봉, 왕골, 표고, 茶, 매화 등등이 난다고 발견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 부흥했던 18~19세기의 차문화는 일본의 식민지배 36년 동안 남부지역의 사찰지역으로 공간이 축소되면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한국 차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보성 차에 대한 그 역사성과 근원을 뒷받침 할 사료가 부족하여 역사적 고증이 필요한 때, 최근 녹차 수도 보성이라고 타이틀을 내걸은 보성이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평생을 글을 쓰면서 차인으로 산 雪舟 宋運會 선생이 남긴 『雪舟遺稿』가 국역으로 발간되었다. 이 글은 한국의 차문화 역사를 체계적인 조사와 자료를 통하여 그 근간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한 것으로, 『雪舟遺稿』에 실린 漢詩 중에서 차를 마시며 남긴 茶詩를 통해 근대 19세기 이후라는 시간적 배경하의 보성의 차문화의 전반적 흐름과 양상, 차풍속의 시기별, 분야별 특징, 그리고 그 안에서 보이는 차정신을 一瞥하고자 한다. 보성 지방을 중심으로 한 차문화와 일상의 차생활을 즐긴 정서가 여과 없이 투영되어 있는 『雪舟遺稿』를 통해 보성 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도의 차풍속과 더불어 향유되어 온 차생활의 추이를 이해할 수 있는 연구 자료가 되기를 희망한다. The custom of Boseong has been changed and developed with territorial sympathy according to the natural condition, the historical factor, and the sociality of this area. Therefore, in the traditional custom, there are not only the emotion and the mind of the Boseong residents but also there are the valuable life wisdom, life means, and the order. Boseong has scenic beauty and there are a lot of scenic spots and places of history and the sightseeing places because of the mild temperature. There have been lots of tea trees from old times in Jeonnam, so the ancestors of this area have lived with the tea, and there are many stories about tea lives and the traces. However, the most tea trees were planted sometime in 1950s, so they are called the cultivation tea, and they are not free from it. Boseong was the major tea drinking area in the Goryeo Dynasty, and Ungjeomdaso(Unchimyon) and Galpyungdaso(Hoeichonmyon) served the tea even when they were parts of a Jangheung government office. According to the record of Sejong15(1433) in the true record of the Joseon Dynasty geography book, it was said that there were the five grains, money, bulrush, mushroom, tea, apricot, etc. After the Goryeo Dynasty, the revived tea culture of the 18~19 century remained in existence while Korea was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for 36years, and it was downsized to a Buddhist temple area of southern regions. I catch a glimpse of overall flowing and an aspect of Boseong tea culture under the late 19th century, the characteristic of time and field of the tea custom and tea mind which was showed in it through the tea poems in 『Seoljuyugo』 left by Seolju Song, Un-hoe who lived as a tea man and wrote all his life in Boseong where it has lately made the name the capital of Green tea Boseong. Also I hope that this becomes the study which can understand the trend of the tea life enjoyed with tea culture of Namdo with Boseong as the center which works for the brand of Korean green tea production market. It intends to establish the source through the organized research and materials of Korean tea custom history, because there weren't enough materials to support the historicity and the origin of Boseong tea. It also reflects the emotions enjoyed the tea culture and daily tea life with Boseong as the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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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제 판소리의 의의와 음악적 활용 방안

            김혜정 ( Kim Hey-jung ) 남도민속학회 2018 남도민속연구 Vol.36 No.-

            판소리 중고제는 1990년대에 학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으며 판소리의 연원이나 지역적 특징이라는 면에서 관심이 촉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중고제 논의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으므로 중고제의 음악적 정체성을 정리해 볼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활용론적 입장에서 기존 중고제 음악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그를 통해 앞으로의 전승 방안을 찾아보려 하였다. 논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고제는 대목 구성이나 사설의 내용 등에 있어서 동편제나 서편제와는 다른 구성이 보인다. 악조에 있어서는 평조의 강세와 계면조의 약세가 강하게 드러나며 더 세부적으로는 하행하여 정격종지를 한다거나 계면조에서 꺾거나 떠는 시김새가 약해지는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장단에 있어서는 중고제 내에서도 서로 다른 특성들이 보인다. 결과적으로 방진관, 심정순, 이동백, 김창룡의 네 명창만을 두고 보더라도 각기 음악적 지향이 차이를 보인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판소리가 살아있는 음악문화였기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편제나 서편제의 명창들과 구별되는 차별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도 명백하다. 한국인들은 지역별로 서로 다른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방언은 억양이나 특별한 단어로 인식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발성과 음색부터 다르다. 현재의 판소리는 지나치게 남도화되어 있다. 남도민요에 사용되는 음계, 즉 계면조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남도지역 출신 명창들의 숫자가 많고 그들이 더 많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 되어 있다. 하지만 판소리가 진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악으로의 재기를 꿈꾼다면 향유지역과 미적 다양성을 확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중고제의 현재적 가치와 의미가 조명 받을 수 있다고 본다. Jung-go-je Pansori started attracting academic attention in the 1990s with a unique style from the Chungcheong region. The paper has been aimed at organizing the results of jung-go-je Pansori studies and finding a way to transfer them. The outcome of the discussion is as follows. Jung-go-je Pansori is a unique feature of a plot or content. The musical features also feature Chungcheong-do folk songs. However, the individual characteristics of the singer are also strong. Koreans use regional dialects. The dialect may seem to be recognized as an accent or a special word, but in reality it is different from the way it is spoken and sounded. The current Pansori is too southeasterly. However, if Pansori is a revival of a music that is loved by many people, then it is necessary to find a way to expand its area of entertainment. In that sense, I think the current value and meaning of jung-go-je Pansori can be illumin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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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호남풍물굿 개인놀이의 분화과정 연구 -서남해지역 버꾸놀이와 내륙의 설장구놀이를 주목하며-

            송기태 남도민속학회 2019 남도민속연구 Vol.0 No.38

            This study investigates the development and differentiation of solo performance (gaein-nori) in Honam pungmulgut, and the role of artists from hereditary shaman(seseummu) tradition on triggered such changes. First, the gaein-nori before its development into a specific form of pungmulgut was investigated. The microforms of gaein-nori were confirmed through the presence of gaein-nori in village-level pungmulgut. Generally, gaein-nori was limited to showing one's talents within the form of group performance, rather than an individual building and leading the performance independently. In regard to the development of performance led by one entertainer, or gaein-nori, factors such as theories of its origin, rhythm composition, and cultural contexts were discussed, with a focus on seoljanggu. In the Honam region(southwestern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the entertainers from seseummu tradition had led the rise of gaein-nori and other forms of pungmulgut entertainments. Indeed, notable entertainers, instrumental performers, and pansori singers who developed pungmulgut were associates within the seseummu network. Entertainers from seseummu genre were also trained in playing instruments and vocalization. Based on the large network of seseummu, it is hypothesized that the birth of seoljanggu reflects the cultural contexts of pansori and sanjo of that era. The rise of seoljanggu, a type of gaein-nori in pungmulgut performance, coincides with the development of sanjo. In addition, as the artists and instrumental performers who established pungmulgut had direct and/or indirect relationship with seseummu, the name of rhythms used in gaein-nori were likely be heavily influenced by sanjo and sinawi(a traditional form of Korean instrumental music). Hence, the development and establishment of gaein-nori in pungmulgut are best understood within the larger context of ‘sanjo culture'. Moreover, gaein-nori in pungmulgut developed independently beyond borrowing the style from sanjo, achieving the status of differentiated, unique form of entertainment that is distinct from other formats. Gaein-nori, developed and differentiated by artists from seseummu, became the trigger for pungmulgut to evolve into a form of entertainment that is marked by its focus on percussion instruments. In general, pungmulgut combines multiple rhythms to complete a gutgeori(a form of rhythm), or a piece. Unlike detailed and careful composition in other music, the rhythm is formed within a rough framework; identical rhythms are repeated and layered upon and loosely bridged as if ‘running and chasing'. It rapidly advances to the next rhythm depending on the play. However, with the expansion of sanjo culture and the introduction of seseummu, pungmulgut evolved into an organized performance, gaein-nori. In conclusion, the Honam region artists from seseummu are considered to have paved the way to become professional pungmulgut artists for themselves and served the role of establishing a structured form of pungmulgut performances in the 20th century. During the process, they have combined the shaman culture and music traditions of the Honam region to achieve artistical advancement and reformation of the organization of pungmulgut. 본고에서는 호남풍물굿의 개인놀이가 분화 발달하는 과정과 그것을 촉발한 세습무계 연희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마을풍물굿 전승이 왕성한 전남 남해안지역의 마을풍물굿에서 미분화된 개인놀이의 형태를 확인하였다. 미분화된 개인놀이는 개인별로 독자적 예능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예능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개인의 장기를 선보이는 방식으로 연행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전문적인 개인놀이의 발달과 관련해서는 설장구놀이를 중심으로 기원설과 가락구성, 문화적 상황 등을 살펴보았다. 호남지역에서 개인놀이를 비롯한 풍물굿 예능의 발달을 주도한 집단은 세습무계 출신의 연희자들이다. 풍물굿의 발달을 이룩한 예인들과 판소리․기악 연주자들은 큰 틀에서 세습무계의 네트워크로 얽혀있었다. 실제 풍물굿의 중심 역할을 한 세습무계 출신 예인들은 기악과 소리도 배웠다. 이러한 세습무계의 연망을 주목하여 설장구의 성립이 당대 판소리와 산조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존재한 것임을 추정하였다. 풍물굿의 발달을 이룩한 예인들과 기악 연주자들이 큰 틀에서 세습무계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산조의 태동과 근접한 시기에 설장구놀이 등의 풍물굿 개인놀이가 성립되었으며, 개인놀이에서 사용하는 장단의 명칭은 산조나 시나위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풍물굿의 개인놀이는 큰 틀의 ‘산조문화' 속에서 성립되고 발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풍물굿 개인놀이는 기본적으로 독자적인 내적 발달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산조의 형식을 차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예능으로 정착하고 성장해왔다고 할 수 있다. 세습무계 연희자에 의해서 분화되고 발달된 개인놀이는 풍물굿 예능이 타악 위주의 완성된 작품으로 발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개 풍물굿은 몇 개의 가락을 결합하여 하나의 굿거리를 완성하는데, 가락의 연결이 음악의 곡처럼 치밀하게 짜여져있는 것이 아니라 ‘내고 달아서 맺어 푸는' 대강의 틀을 공유한 채 동일한 가락의 반복과 축적을 수행하고, 연행 상황에 따라 다음 가락으로 넘어가거나 맺는 형태였다. 그러던 것이 세습무계 연희자의 풍물굿 진출과 산조문화의 확대로 인해 짜임새 있는 개인놀이로 탄생된 것이다. 결국 호남의 세습무계 연희자들은 20세기 협률사 활동을 거치면서 스스로 전문풍물인이 되는 길을 개척하고 전문적인 공연풍물굿을 정착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과정에서 남도의 무속과 음악전통을 풍물굿에 접목시켜 예술적 성장을 이룩하고 현재의 풍물굿 판도를 재편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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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민속학사 : 유럽에 뿌리를 둔 미국 초기 민속학

            로저자넬리 ( Rofer I. Janelli ) 남도민속학회 2008 남도민속연구 Vol.17 No.-

            본 논문에서는 미국의 초기 민속학이 유럽의 학문의 영향을 받아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의 그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유럽 민속학의 발달은 17세기 영국의 철학자인 존 로크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존로크의 견해에 대한 반론을 한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와 그의 제자인 헤르더를 들 수있다. 이후 헤르더는 칸트의 주장을 수정하면서 그림 형제가 설화를 수집하는데 원리적 동기를 부여하며, 다른 많은 유럽의 학자들을 고무시켰다. 그리고 영국에서 민속학은 테일러의 영향을 입어 다소 다른 방향을 전개되었다. 미국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지적 조건들이 민속 수집에 대한 다른 동기를 부여했다. 새로 설립된 미국민속학회의 공식적인 학회지인 미국민속학회지의 첫판은 옛날 영국 민속의 유산, 미국 남부 흑인들의 민간전승,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의 민간전승, 프랑스계 캐나다, 멕시코 등의 민간전승에 대한 과제들을 나열하고 있다. 첫 번째 민속의 과제는 미국 민속학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차일드의 학술적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 차일드의 또 다른 업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키트리지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키트리지는 다음에 톰슨을 지도했는데, 그 역시 유럽에 널리 유행했던 민속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에 매우 정통했다. 미국에서 민속학의 초창기 발전에 보다 영향력 있는 인물은 보아스라고 하겠다. 보아스의 관심이 비록 비교문화적 인류학, 형질인류학, 언어인류학, 고고학 등에 걸쳐있지만, 그의 문화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들은 구비서사와 여러 예술적인 자료를 다루고 있었다. 미국 민속학에 미친 보아스의 영향은 그 스스로 유럽에서 기원한 사상을 개조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의 제자들에게 쏟은 열정에 의해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 보아스가 죽고 나자 미국 민속학계에는 인류학자들보다는 문헌학적인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민속학사는 인류학적 민속학자와 문학적 민속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을 주요 쟁점으로 삼기도 하지만 이런 갈등 못지않게 두 학파 간에 중요한 협조와 협력이 있었다. 미국에서 민속은 원래 유럽의 학문분야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결코 유럽의 뿌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가지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유럽의 뿌리는 다른 정치적이며 학술적인 입장을 가진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이식되고 경작되어 미국민속학의 학풍을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ain the process on how the early American folklore was formed through being influenced by the learning in Europe. The development in European folklore starts from John Locke, who is a philosopher in England for the 17th century. And, the persons, who objected to John Locke``s opinion, may be raised Kant, who is a philosopher in Germany, and his disciple Herder. Since then, Herder had encouraged many of other scholars in Europe with giving a principal motive to Brother Grimm``s collecting tales while modifying Kant``s assertion. And, the folklore in England was developed in the slightly different direction through being influenced by E. B. Tylor. In America, the political, social, and intellectual conditions gave different motive to collection of folk customs. The first version for the American Folklore Society Journal, the formal academic journal in the American Folklore Society, which was newly established, is enumerating tasks on legacy in England``s old folk customs, on popular tradition in black people in the Southern part of America, on popular tradition in Indian tribe in North America, and on popular tradition in French Canada and Mexico. The first task in folk customs is reflecting the academic propensity of Francis James Child, who had been the first president for the American Folklore Society. What can be selected as Francis James Child``s another achievement is that he taught George Lyman Kittredge. Kittredge followed to guide Stith Thompson. He was also very familiar with the bibliographical approach to folk customs, which had been prevalent widely in Europe. The more influential figure upon the development in the pioneer day of folklore in America can be said to be Franz Boas. Even if Franz Boas had interest over comparative-cultural anthropology, physical anthropology, anthropological linguistics, and archaeology, most of his literary works related to culture had addressed oral narration and several artistic materials. The influence of Boas, who had impact on American folklore, didn``t stop at reconstructing the thought, which had itself originated from Europe, it was continued by passion that he devoted to his disciples. However, right after Boas died in the 1940s, American folklore circles came to be appeared scholars who have bibliographical background rather than anthropologists. Since the World War II, the history of American folklore had major issue as a conflict, which occurred between anthropological folklorist and literary folklorist. However, there had been important coordination and cooperation between two doctrinal factions with being not inferior to this conflict. People cannot reject the root in Europe at all against the issue on whether the folk customs in America are originally the academic field in Europe. However, other several roots can be discovered likewise. Also, the root in Europe was deliberately transplanted and cultivated by many scholars who have differently political and academic positions, thereby being able to be seen to have been formed the academic traditions in American folkl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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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민속학사 : 일본 민속학의 발자취와 전망 -야나기타(柳田) 민속학과의 관계로부터-

            사노겐지 남도민속학회 2008 남도민속연구 Vol.16 No.-

            야나기타 구니오는 민속학이란 일본인과 일본문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과학적으로 묻는 것이며, 인간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경세제민의 학문이라고 했다. 1930년 대에 야나기타 민속학은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일본 민속학의 전개는 야나기타 구니오의 생애, 학문에 대한 자세와 대부분 겹치는데, 야나기타 민속학과 전후 전개해 온 일본 민속학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민속학의 활성화와 재생의 길은 현실의 사회문제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근대사회의 민속학적 관심의 시초는 에도시대의 국학에 있다. 국학이란 외래사상에 영향 받지 않은 일본 고래의 문화로, 일본 고전이나 고대 역사 속에서 발견해 가고자한 학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풍과 흔적이 시골 생활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국학의 대성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지적했다. 한편 쓰보이 쇼고로는 진화주의적 인류학의 입장에서 풍속과 관습에는 전시대의 잔존이 인정되어 각지에서 토속 조사를 실시해 그결과를 비교하면, 풍속과 관습의 기원이나 변천이 증명된다고 주장했다. 일본 민속학은 에도시대 국학의 흐름을 잇기는 하였으나, 메이지 전기 영국 인류학을 소개한 쓰보이 쇼고로의 토속학 등의 영향도 받은 것이다. 근대 과학으로서의 일본 민속학의 탄생기는 1910년부터 1935년까지이다. 일본사회는 메이지유신에 의해 근대화가 급격하게 진행 되었으나 1920~1930년대에 걸쳐 전통적인 생활문화를 재평가하여 근대화의 의미를 상대화한 운동이 활발하게 행해졌다. 각 분야의 활동 목적이나 성격은 다르지만, 근대화 속에서 망각되고 낮은 평가밖에 받지 못했던 농산어촌의 전통적 생활문화에 존재의미가 있는 것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제시했다. ‘민속'이라는 말에는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재평가 입장의 표명과 그 생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운동론으로서의 뉘앙스가 있었다. 전후 민속학은 야나기타 민속학과 결별해 독립과학으로서 일본 민속학의 정립화로 특징지을 수 있지만, 오늘날까지 일본 민속학은 야나기타 민속학의 틀을 초극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에 야나기타의 경세제민의 학문으로서의 민속학을 계승하는 한편, 일본 민속학의 수립에 진력한 미야타 노보루가 사망한 2000년까지를 민속학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야나기타 사후 일본 민속학의 담당자로서는 대학과 지방 민속학회의 활동이 있고, 고도 경제성장에 따른 민속쇠멸에 대한 문화재적 관심이 민속지 작성의 기운을 고양했다. 메이지 시대를 산 야나기타가 피했던 테마라고 할 수 있는 ‘여성·성·차별'이라는 문제를 미야타는 민속학적 시점에서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민속학은 그 종합성에 의의가 있다고 한 논의로, 현재의 민속학은 ‘역사민속학·지역민속학·비교민속학·종교민속학·신도민속학·불교민속학·환경민속학·도시민속학·여성민속학·관광민속학·응용민속학' 등으로 그 모습을 갖춘 민속학이 많아지고 있고, 이러한 민속학의 세분화를 현대 민속학의 경향이나 동향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야나기타의 민속학은 일국민속학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향토'의 범위인식의 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회전축에서부터 향토의 범위는 넓어질 수 있으며, 야나기타가 말한 세계 민속학도 정보화 사회인 오늘날에는 실현의 가능성에 더 가까워졌다. 종래 사람의 구별인 ‘인종'·‘민족'·‘국민'·‘계급'을 넘어서 생활문화 수준에서의 공감과 세계 시민으로서의 공속의식을 가진 ‘세계 상민'이라는 개념이 오늘날의 세계에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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