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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 조선학(朝鮮學) 운동과 ‘실학자(實學者) 정다산(丁茶山)’의 재발견

          최재목(Choi Jae-Mok)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2 다산과현대 Vol.4,5 No.-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Dasan Jeong Yak-yong in 1930"s japanese imperialism era of modern korea. In 1935, J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Dasan Jeong Yak-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J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Dasan Jeong Yak-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ong won and Su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Dasan Jeong Yak-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Dasan Jeong Yak-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 KCI등재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의 『풍류정신(風流精神)』에 대한 검토

          최재목(Choi Jae-Mok),정다운(Chung Da-Un)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9 동북아 문화연구 Vol.1 No.20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study thought of Kim, Jeong-Seol. His thought appeared to his hook An Liegant Spirit(『風流精神』). An Llegant Spirit(『風流精神』) was made after he died, and it was called His main text with A story cf The Flower Man(『花郞外史』). This hook has a different writing 4 papers. The papers are The Flower Man(「花郞」), A though of Choe, jae-woo(「崔濟愚論」), A though of Yin and Yang(「陰陽論」), Chweseong Kim si-seup 「贅世翁 金時習」). And as well as the purpose of these papres, there are different form. However, the core of this article is 'The Harmony(調和)'. This 'The Harmony(調和)' is read again in today's life history It is difficult to find his thought through 『An Llegant Spirit(風流精神)』. But the new approach to text is needed

        • KCI등재

          金源極을 통해서 본 1910년대 陽明學 이해의 특징

          최재목(Choi Jae-mok) 한국양명학회 2009 陽明學 Vol.0 No.23

          이 논문에서는, 아직 학계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양명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金源極(1871-1927)을 통해서 그가 ‘유교 이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이자 근대적 학술이 본격 유입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면서 ‘양명학’을 어떤 방식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김원극에 대한 소개는 서경석ㆍ김진량 엮음의 『식민지 지식인의 개화 세상유학기』, 최재목의 「日帝强占期 雜誌를 통해서 본 陽明學 硏究의 動向」, 금장태의 『한국 양명학의 쟁점』에 부분적으로 소개되어 있고, 본격적인 연구에 이르지는 못했다. 김원극은 그는 함경남도 永興郡 출신 유학자로, 松南, 春夢, 春夢子, 松南春夢 등의 필명을 사용하여 1908년부터 『西北學會月報』, 『太極學報』, 『大韓興學報』 등에 많은 다양한 글을 싣고 있다. 『태극학보』에는 주필로 활동하였고, 西北學會에서는 副總務로 활동하던 중 1909년(明治四十二年) 11월 11일 伊藤博文 被擊事件 嫌疑者로서 眞相調査를 받았으며 1910년에는 朴殷植에 이어 『서북학회월보』의 주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1934년 11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학과 경제학을 겸비한 정치객이었던 바 그 외에도 문맹퇴치에도 노력하여온 드문 지사이었던 바 지난 소화 2년 8월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김원극은 유교를 1910년대 당시의 서세동점, 약육강식의 세계사적 현실에 맞도록 근대적, 실천적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의 개혁적 특성은 이태리 건국 삼걸의 강조하고 그러한 기풍을 한국의 청년들에게 계몽할 것을 기대하고 촉구한 데에서, 아울러 유교를 서구 기독교에 대항할만한 근대적 콘텐츠(교리, 텍스트 등) 및 종교적 체제를 갖추도록 요구한 바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수구적 보수 유림들과 사고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김원극은 박은식의 대동교 정신에 동조하는 유교 개혁 쪽에 서 있었다. 그는 유교의 본질은 계승하되 구체적 내용들은 한국의 지금ㆍ여기에 맞는 ‘時中’의 유교를 지향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유교가 새로운 체제로 개혁하고 나아가서 利用厚生 및 국민ㆍ청년계몽이라는 세계사적 문명에 발맞출 수 있는 학술이어야 함을 적극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교에 대한 관점은 그대로 양명학 이해에도 적용된다. 김원극의 양명학 이해는 「明代諸儒의 學說」과 「王陽明學論」에 잘 드러나 있는데, 먼저 「明代諸儒의 學說」에서는 양명학과 불교의 ‘합일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양명학과 불교의 합일론은, 「王陽明學論」에서는 양명학이 나의 정신을 번롱하여 단순히 悟道를 주안으로 한 禪家와 다름을 지적하고 ‘人倫交際의 道’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각 학술은 그 세부적 특성을 유지하지만, 큰 틀에서는 합치됨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王陽明學論」에서는 근대학문의 한 장르인 ‘倫理學’으로서 양명학을 이해하는데 큰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의견은 아마도 1908년 그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얻은, 당시 일본에서 유포되고 있었던 최신의 양명학 지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추정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한국적 상황에서 근대적 학술체계로 전통사상을 이해하려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양명학이 근대적 학문에 어울리는 특징이 있음을 평가하고자 했음을 인정해도 좋겠다. 김원극이 구상한 「倫理?」으로서의 양명학은 주체성과 능동성을 갖고 있으면서 ‘人倫交際의 道’로서 실제 사회에서 실용성을 갖춘, 化學ㆍ物理學ㆍ金石學ㆍ地質學등의 제 학문과 대등하게 내세울 수 있는 ‘인륜의 학문’(=윤리학)이었다. 다시 말해서, 1910년대의 한국에서, 외국의 신지식을 수용하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양명학을 근대적 학술로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노력이 당시의 여러 양명학 연구가와 비교해 볼 때 큰 특징점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This study focus on Kim Wongeuk(金源極. 1871-1927)’s Yangmyonghak(陽明學), especially, through reexamining his the famous two articles, Myongdaejeuhakseol (the Neo-confucian’s theories in Ming dynasty of china. 明代諸儒의 學說) and Yangmyonghakron(Essay on Yangmingxue. 王陽明學論). Kim Wongeuk is a man unknown to fame to us till now. But his Yangmyonghak (陽明學), during the Japanese imperialism era in modern korea, is very important to know what is the characteristic of Modern Korea. He studied at Japan for a number of years, and so he had many information about Modern knowledge on sciences and academism in Japan. Based on this, I think, most of his knowledge on Yangmyonhak(陽明學) is also from modern japanese academic, scientific research information, such that modern japanese youmeigaku (Yangmyonghak, 陽明學) by Inouetetsujirou(井上哲次?)’s Youmeigaku-notetsugaku(陽明學派之哲學), Takasetakejiro(高?武次?)’s Ouyoumeisyouden(王陽明詳傳), and the Youmeigaku(陽明學) edited by Higasikeiji(東敬治). The most korean thought’s knowledge and action in Yangmyonghak(陽明學) are from these modern japanese. Kim Wongeuk try to define Yangmyonghak as Oriental ethics. And he think the Yangmonghak is one with the Buddhism. His the definition and interpretation on Yangmonghak are does not correspond with the original. an orthodox method. Most people in Joseon dynasty and modern Korea criticize the Yangmyonghak are very like with Buddhism, but it is a distinguishing mark that Kim Wongeuk take an active a point of view the two are fusing with.

        • KCI등재

          일제강점기 정다산(丁茶山) 재발견의 의미 -신문,잡지의 논의를 통한 시론(試論)-

          최재목 ( Jae Mok Choi ) 다산학술문화재단 2010 다산학 Vol.- No.17

          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하 ‘다산’ 혹은 ‘정다산’) 관련 기사 및 논고를 토대로 당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재발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제강점기 ‘정다산’의 연구와 ‘언론 매체’가 본격적으로 만나는 계기는 바로 1930년대에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한국학’인 ‘조선학’ 때문이다. 그 핵심 세력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고 협조를 거부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연구자들 즉 안재홍安在鴻(1891~1965)·백남운白南 雲(1895~1979)·최익한崔益輪(1897~?) 등이었다. 그들이 펼친 조선학은 ‘조선문화 부흥’의 일환이며, 그것은 문화제국주의의 한국학인 ‘청구학靑丘學’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 대립되는 양자는 ‘한국사회·한국문화 특수성론’으로 공통되어 있었다. 그것은 전자가 후자의 전도형태 顧倒形態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든 정다산에 대한 연구는 1934년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산 서거 98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그들은 조선학 부흥운동을 꾀하면서 그 일환으로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비롯하여 여타의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실학 연구의 기념비적인 작업은 역시 1938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東亞日報』 2면 기사에 「茶山與觸堂全書 完刑記念祝寶 來十六日 明月館에서」 라고 있는 것처럼, (1934년에 시작하여) 1938년 12월에 이뤄지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신조선사新朝雖社 출판)의 완간 작업이었다. 『여유당전서』의 출판에 참여한 인물로는 실학 관련 기사를 쓴 정인보, 최익한, 문일명文一平(1888~1936), 안재홍 등이다. 최익한은 65회에 걸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讀힘」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그는 다산의 『여유당전서』의 핵심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에 다산 서거 100주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조선학운동에서 ‘정다산`은 분명 우리나라 ‘위인’의 표상이자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지식, 개념, 인물을 새롭게 영유領有하는 방법론이기도 하였다. 그를 둘러 싼 좌의 ‘세계’ 지향과 우의 ‘민족’ 지향이 서로 맞서는 가운데 ‘근대적’ 학술의 논의가 진척되었고 ‘허虛의 학’을 넘어선 ‘실實의 학’을 추구해가는 절실한 논의의 지명이 열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 크게는 〈구(전통-구식)〉⇔〈신(현대-신식〉이 극명하게 대립되고, 그 대립 속에서 새로운 이념들이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익’측에서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한 대응 논리로 포괄적인 민족사상 및 학문의 전통 확립을 위해 정인보鄭寅普가 ‘얼’을, 안재홍이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분일평이 ‘조선심朝鮮心’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주도해갔다. 이에 반해 ‘좌익’측에서는 이청원, 백남운 등이 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도입하여 세계사의 보편성에서 한국사체계를 구성해 사회경제사학을 확립하는 한편 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정당화하였다. 이처럼 ‘세계’에 관심을 둔 좌, 민족에 관심을 둔 우의 ‘시점視點’은 정다산, 실학, 나아가서는 조선학을 서술해가는 방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바로 정다산 논의는 ‘민족民族’과 ‘세계世界’ 사이에서 새로운 연구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is study on the meaning of rediscovery of Tasan Cheong Yagyong in japanese imperialism era, especially, here focused the media and the journal in those days. In 1935,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as a moment, begin the movements of Josonhak(Joseon Studies) that is entirely different as before. The Josonhak means that is one of the indigenous, traditional, char-acteristic studies for Korea, by and of the korean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The Josonhak, starts area studies in the beginning, for example in Choi Nam-seon, but it becomes to be different much in the period of movements of Josonhak. Cheong Inbo, An Jaehong and Choi Ikhan publish a slogan Tasan Cheong Yagyong who is the most prominent figure succeed to the intel-lectual line of Silhak from Bangye Yu Hyeongwon and Seongho Lee Ik, in the Joseon intellectual history. Then they can appropriate a new view point for nation and world in Joseon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The other hand, Tasan Cheong Yagyong` Silhak inherit the traditional intellectual heritage Sil(實), Silsim(實心) in korean Yangmyonhak. We can see the process of intellectual move from Yangmyonhak to Silhak. By this they seeks the best way of their own`s against the cultural, intellec-tual violence of imperialism under that situation. The Josonhak movement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Tasan Cheong Yagyong, so to speak, grope in the dark between nation and world under japanese imperialism era.

        • KCI등재

          퇴계상(退溪像)의 변모 -초상화(肖像畵)를 통해서 본 선비상(像)의 변천에 대한 시론(試論)

          최재목 ( Jae Mok Choi ) 퇴계학연구원 2011 退溪學報 Vol.130 No.-

          退溪 李滉(1501~1570)(이하 퇴계)의 경우에 지금까지 초상화나 영정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유통되는 천원권 지폐 속의, 현대의 화가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의 초상화를 통해서 퇴계의 모습을 그려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중에 간행된 한 책자에는 우리의 천 원 권 지폐에 나오는, 玄艸 李惟台(1916-1999) 화백이 그린 퇴계초상화 다른 모습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필자는 여기에 주목하여「퇴계의 초상화에 대하여- 근·현대기 ``퇴계상`` 탄생에 대한 성찰을 겸해서-」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여기서 퇴계라는 인물이 ``초상화`` 라는 형태로, 근현대기의 굴곡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새롭게 형성되고 인식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더욱이 최근 필자는 종전의 논문에서 다루지 못했던 두 건의 퇴계 초상화를 새로이 접하였다. 한 건은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이고, 또 하나는 해방 이후에 그려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이전의 내 논문을 새로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울러 퇴계의 초상화를 통해서 선비로서의 퇴계상이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1)조선시대 1건, (2)근대기(일제강점기) 1건, (3)현대기(해방 이후 현대까지) 2건 총 4 건의 초상화를 근거로 퇴계상이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살펴보고, 거기에 내재한 선비像과 그 굴곡의 단면을 논하였다. 여기서 퇴계의 초상화에는 각기 그 시대가 요구했거나 상상했던 이념들, 이미지가 잘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고정된 하나의 퇴계상은 없고, 우리나라의 복잡한 역사적 사정에 발맞춰서 거기에 걸 맞는 여러 가지 퇴계상이 새롭게 창출되어 왔던 것이다. 퇴계가 조선시대 및 근현대기를 통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儒者 혹은 老人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초상 자체의 이미지 면에서 볼 때 전통시대, 근대기에는 근엄, 위엄, 강건의 측면이 부각되고 있었으며, 현대기에 와서는 대조적으로 문약, 병약한 이미지로 왜곡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퇴계초상은, 크게 보면, 전통적 유자에서 국민적 어른·노인으로 진화해 갔는데, 이것은 각 시대가 요구한 유자로서의 퇴계상, 선비로서의 퇴계상이 달랐던 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퇴계의 초상화를 통해서 본 ``선비``의 모습은 결국 그 시대 시대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며, 한 가지 고정된 형태로 있었던 것이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었다. Until now, the Toegye Yi Hwang(1501-1570)` Chosanghwa, a portrait, is not found. So today, we usually imagine Toegye` shape really so through the 1,000 won bill`s, created by a modern painter Hyeon Cho Lee Yutae(玄艸 李惟台). However, a few years ago I discovered that was a new portrait of Toegye, is made by someone during Japanese Ruling Era of Korea. Then I wrote a paper. titled A Study on Tyoegye`s Portrait of Korea in Toegyehaknonjip. However, I recently have knew, in addition to this, a new two portrait of Toegye of Joseon Dynasty and modern era are existed in our country. So I decide to to improve them on the basis of these data. In addition, I think, through these portraits of Toegye reconsider a Toegyesang, Toegye image, as a Sonbi(士, a true confucian gentleman) in korean confucian context. This paper is written in awareness of these issues. Catching how to transform the image of Toegye, through portraits of Toegye, is very meaningful work, apart from studying the text of Toegye who is left. We know, In the period of our modern and contemporary, in political and social context, had needed to be established a new Toegye image for the public enlightenment, education, and governance. As shown in this paper, Toegye portrait of that era had asked each of imagination and ideology is reflected in it. So there is no one fixed Toegye image, but Toegye image have produced depending on the situation of our country. Toegye image, in common, through the Joseon Dynasty, modern, contemporary, was a senior Confucian scholars(國老) who represents Korea society. However, the image portrayed in the Joseon dynasty and modern times are hardy dignified appearance. On the other hand, we feel the image as a weakness scholars. Such this, Toegye creation of the image is currently underway, is not done. Toegye images as Sonbi, so called a true gentleman in Korea, still open in the door to whatever is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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