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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의 형이상학 - 왜 우리는 청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않는가?

          정세근 대동철학회 2017 大同哲學 Vol.78 No.-

          이글은 우리말이 왜 청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않은가에 대한 시론적인 답변이다. 색깔을 다섯으로 한정시키는 오행론적 사고에서 청록을 함께 묶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말에서 ‘파랗다’와 ‘푸르다’는 때로 녹색을 때로 청색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문에서도 청색은 녹색을 가리키기도 한다. 다만 녹색의 외연이 청색보다 작아 녹색이 청색을 가리키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무지개의 경우, 뉴턴 이후 유대기독교적인 사유에서 창조의 완결수인 7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 영향 아래 우리는 무지개가 ‘빨주노초파남보’라는 형식적인 사고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사유에서 무지개는 ‘오색영롱’(五色玲瓏)하다. 그것은 오행으로 무지개를 보고자 하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이는 일종의 형이상학으로 일련의 전제(a set of assumptions)로 이루어진다. 형이상학도 나름의 눈이 있어서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렇게 틀을 잡는다. 고대그리스의 사유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우리의 오행은 세계와 우주의 이해뿐이 아니라 윤리철학까지 담고 있는 정교한 형태의 형이상학으로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지개 자체는 아날로그로 되어있지만 무지개의 색깔을 보고 말하는 우리의 사고는 디지털로 되어있어, 그것의 색깔을 다섯 가지나 일곱 가지로 다르게 보고 있다. 그것은 형이상학이 자연물에 개입한 좋은 예다. 우주를 질서 있게 보고자 하는 피타고라스의 정신이 코스모스(kosmos)를 낳았다면, 우주를 질서 이전의 상태로 보고자 하는 장자의 정신이 혼돈(混沌)을 낳았다. This paper is a sketch on why Korean do not distinguish between the blue and the green. Colors are restricted within the limits of 5 in the theory of wuxing(5 elements), so green and blue colors must be one as ‘parata’(blue/green) in Korean language. The meaning of parata sometimes means blue, sometimes green. Chinese also has the same case. For example, qing(blue/green) frequently includes blue and green color, but lü(the green) does not denote the blue. How many colors does rainbow have? Newton explained rainbow as 7 colors under the Jude-Christian record of Genesis. We, Korean, also formally learned the colors of rainbow are 7 as red-orange-yellow-green-blue-indigo-violet. Rainbow, however, has 5 colors in traditional way of thinking. It derives from wuxing as a sort of metaphysic consisted of ‘some fundamental assumptions’(Whitehead). Metaphysic also has its own eyes for what it wants to see, and makes frame according to it. Ancient Greek thinking is not an exception, either. Especially, wuxing influences us even today for an exquisite metaphysic including a philosophy of Ethics and an understanding of world and universe. Rainbow itself spreads by analogue, but our way of thinking which is looking for colors of rainbow is made by digital as 5 or 7. This is a good example that metaphysic intervenes in physical objects. The mind of Pythagoras who regarded universe as an order produced kosmos; Zhuangzi who regarded universe as a disorder produced hundun(cha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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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주의와 노자철학

          정세근 대동철학회 2014 大同哲學 Vol.66 No.-

          어떻게 하면 노자를 쉽게 읽을 수 있는가? 노자를 읽는 간단한 암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여성성이 다. 여성성이란 말은 한국사회에서는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때로 그것은 순종이나과격한 사회 운동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오늘 여성성은 철학의 한 분과로서 중요한 개념으로 성립한다. 도가가 여성주의를 강조하는 반면, 유교는 가부장주의를 대표한다. 노자는 세계최초의 페미니스트라 고 할 수 있다. 노자의 부드러운 여성주의가 비록 현대의 굳센 여성주의와는 같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고대 사유를 변환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불행히도 현대의 사상가는 노자에게서여성주의보다는 무정 부주의를 찾아냈다. 노자는 전체주의적인 방어기제를 지닌 민족주의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주의는 거개가 애국주의 라는 미명 아래 여성의 권리를 억압한 민족주의에 반대한다. 이를테면, 프랑스혁명의 정신인 ‘박애’는 인류애가 아니라 남자끼리의 우정이다. 노자는 남근중심주의에 반대하는 해체론을받아들일 수 있다. 여성을 반(反)진리, 주변, 부산물로 취급한 백색신화를 거부한다. 노자의 여성성은 철학을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지위로 복원시킨다. 서구/아시아, 외국어/모국어, 지 식/행위, 남/나의 우열을 없애는 것이다. 세상은 유가를 대신할 여성철학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아이이다. How to read Laozi easily? There is a simple code to understand it. The answer is femininity. At the first time, Femininity is not familiar in Korean society. Sometimes, it was understood as submissiveness or radical social movement. Now, however, femininity became an important conception as one section of philosophy. Confucianism represents patriarchism while Taoism emphasizes feminism. We could say Laozi was the earliest feminist in the world. Though Laozi's tender feminism is not like modern tough feminism, it contributes to the variation of ancient thought. Unfortunately, modern thinkers merely discovered anarchism in Laozi instead of feminism. Laozi does not agree with nationalism including the totalitarian defensive mechanism. Feminismis almost against nationalism which suppresses woman rights to stress patriotism. For example, fraternité in French revolution was not philanthropy, but it was just for man. Laozi could accept deconstructivism which is against western phallicism in white mythology representing women asanti-truth, outsiders, and byproducts. Laozi's femininity restored philosophy to the equal state for male/female, Europe/Asia,foreign/domestic language, knowledge/action, and others/self. This world needs feminine philosophylike Taoism which is alternating Confucianism. We are all the sons of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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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맹의 정신론

          정세근 대동철학회 2015 大同哲學 Vol.70 No.-

          이글은 공맹의 정과 신의 용법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다.『노자』와 『장자』에서는 점진적으로 정과 신에 대한 강 조가 도드라지며, 마침내 『회남자』에 이르러 정신의 탄생이 정식화된다. 이 과정 속에서 신은 정에 대한 우위를, 정신은 형해에 대한 우위를 갖게 된다. ‘귀신’에서조차 신은 귀에 앞선다. 이런 경향은 정신의 독립적인 영역을 확 보하려는 도가의 철학적 자세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런데 절대적 자아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가의 경우는 이와는 상반된 현상이 나타난다. 유가에게는 객관세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사회나 국가의 역할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개인의 정신보다는 문화적 전통 속에서 배태된 예(禮)가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인간에게 예는 사회의 질서와 인간의 규범이다. 『논어』에서 ‘신’은 ‘귀신’의 신으로 7차례 등장한다. 그렇지만 공자는 귀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말할 수 없다면 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귀신보다는 이 세계의 인문화가 공자에게는 중요했다. 『맹자』에서 ‘신’은 단 한 차례 ‘온갖 신’(百神)과 같이 귀신이라는 뜻을 갖지만 그것조차 민의를 담는데 치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신과 백성(百姓)은 가치적으로 동일선상에 놓인다. 신은 저절로 되는 교화의 신비스러움을 가리 키기도 하며, 인격의 최고경지를 표현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공자와 맹자에게 중요한 것은 정과 신이 아니라 예였다. 나아가 귀신을 뛰어넘는 하늘(天)이야말로 그들이 섬기고 자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영역을 극대화시키는 정신의 역할보다 백성을 이롭게 하는 현실주의가 우선되었 다. This paper aims at arranging Jing(pure matter) and Shen(pure soul) in the philosophy of Confucius and Mencius. Jing and Shen had been emphasized gradually in Laozi and Zhuangzi. Finally, Jingshen(spirituality) which combined Jing and Shen has been born formally in Huainanzi. In this process, Shen is superior to Jing; Jingshen is superior to body(Xinghai: shape and skeleton). Even between Gui and Shen(Guishen: ghost), Shen is proceed to Gui. This sort of tendency is related with Taoist attitude which is willing to ensure an independence of spirituality. However, Confucian who cannot accept an existence of absolute self has the opposite opinion. For them, the most important thing is not only an objective world, but also a role of society or state. Li(rite) which was conceived in the cultural tradition is more meaningful than an individual spirituality. Li is an order of society and a norm of human beings. In the Analects of Confucius, Shen appears 7 times as Guishen(ghost) though Confucius said that he could not know and tell about ghost. Confucius wanted to keep his distance against ghost. For him, humanization of this world is more significant than ghost. In Mencius, Shen appears just 1 time as Guishen. But it means whole ghosts(one hundred ghosts) which represents the will of whole people(one hundred people). Shen also means a mystery of education and the highest stage of character. The most momentous thing is Li rather than Jing and Shen for Confucius and Mencius. Futhermore, They hope to worship Tien(heaven) overcoming Guishen. Their Realistic point of view to benefit people have precedence over spirituality which maximizes the realm of individ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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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필의 노자지략과 노자

          정세근 대동철학회 2021 大同哲學 Vol.94 No.-

          Now Wangpi is famous for the Commentary of Laozi. He, however, had maintained a remarkable reputation as a interpreter of the Book of Change before Neo-Confucian established their own interpretation on it in Song Ming dynasty. Wangpi was classified as a taoist due to wonderful commentary for Laozi. Is it right? Wangpi shows us his direction and summary with Summation of Laozi. Hereby Wangpi emphasizes the status of shapelessness and namelessness until shape and name come to the present world. The status of shapelessness and namelessness is not the absolute nothingness but a start and a root of existence. Therefore Wangpi does not hesitate to give a status of patriarchic origin to the nothingness. The nothingness is a lord, and a lord is one, so the nothingness becomes one in his conclusion. Laozi claims the third situation above relativities. It is tao. Wangpi, however, let us choose one between two. It is the way of dualistic distinction which does grasp the root between root and branch. Because Wangpi’s theory of root and branch unfolds a value judgment, it is attractive for later Neo-Confucians who assert the principle(li) and its activities(qi). 왕필은 하상공과는 다른 입장 때문에 노자주 로 이름이 나있지만, 송명 이학(理學)자들의 해석이 득세하기 전까지 그의 주역주 는 십삼경주소 의 하나로 가장 정평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노자주 의 위상 덕분에 왕필은 도가로 분류되었다. 그것은 옳은가? 왕필은 노자지략 을 지어 자기 주해 속의 지향과 요략을 분명히 드러낸다. 여기서 왕필은 무보다는 무형과 무명을 내세워 꼴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상태를강조한다. 무형과 무명은 절대무가 아니라 유의 시원이자 근본이 된다. 따라서 왕필은 무에 종주(宗主)의 지위를 부여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에게 무는 종이고 종은 하나(一)이기 때문에 결국 무는 하나가 된다. 노자는 상대성을 떠나 제3의 세계를 말한다. 그것이 도다. 그러나 왕필은 상대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뿌리와 가지 가운데 뿌리를 잡으라는 이원적 차등법이다. 왕필의 본말론은 확실한 가치 판단을 보여주고 있다. 노자는 귀천을 떠난 도를 말한다. 자연의 세계는 귀천이 있을 수 없다. 귀천은 지배와 통제를 위한 인위의 명령일 따름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왕필이 존비와 귀천을 담는 주역 으로 단순히 선후나 상하를 말하는 노자 를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왕필은 본말론을 내세워 언제나 한쪽에 손을 들어준다. 그가 벌이는 가치 판단은 이후의 이기론자와 같은 철학자에게 매력적으로 쓸모 있게 다가왔다. 왕필의 가치와 용도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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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

          정세근 대동철학회 2016 大同哲學 Vol.76 No.-

          이글은 ‘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 아래 진행된 여러 분야의 철학전공자들의 답변을 정리했다. 2014년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우리철학연구소 창립과 더불어 진행된 학술회의에서 전통한국철학전공자, 서양철학전공자, 동양철학전공자, 북한철학전공자, 20세기 한국철학(서양철학)전공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발표했고, 각각 그에 맞는 논평자의 평론이 있었다. 2시간가량의 종합토론에서 논평자들의 비판에 대한 발표자의 답변이 있었고, 이어 열린 토론이 있었다. 대회보에 담겨져 있지 않은 토론의 내용도 간략하게 이글에 담았다. This paper introduced the conference on Our Philosophy in celebration of the establishment of Our Philosophy Institute of Chosun University at 2014. The conference topic was ‘How To Do Our Philosophy Beyond Imported Philosophy And Exegetics?’ There were 5 presentations, 5 reviews, and 2 hours open discussion by whom majored in traditional Korean philosophy, Western philosophy, Eastern philosophy, North Korean philosophy, 20th century Korean (and Western) philosophy. I recorded argumentations and refutations above the procee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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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새기다

          정세근 대동철학회 2009 大同哲學 Vol.49 No.-

          ‘철학의 번역’에서 발생되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번역의 철학’을 정립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철학의 번역, 번역의 철학’은 번역철학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 철학계의 현실에서 중심화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번역의 가치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과 번역 대상 원전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이다. 번역의 주관성과 다수성 그리고 시대성을 모르고 절대유일의 초시간적인 번역을 추구하려는 것은 지적 오만과 낭만적 이상에 불과하다. 번역은 원전에 충실하려고 무단히 시도할 뿐, 원전 그 자체가 결코 될 수 없다. 나의 사고가 그 시대의 사고로 아무리 귀착되어 있어도 나의 언어가 이미 그 시대의 언어로부터 유리되어있기에, 원전과 번역의 이중성은 상존한다. 글이라는 것은 나의 손을 떠나는 순간, 벌써 시간과의 이중성, 타인과의 이중성, 그리고 다른 언어와의 이중성을 전제한다. ‘문헌학에서 철학에로’라는 서양식 사고는 ‘소학에서 대학에로’라는 동양어로 번역되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번역에서 철학에로’ 나가야한다. 공연한 남의 문제의 전이보다는 진정한 나의 문제가 번역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도 식민지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말로 새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세계관이 없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It is meaningful that we find out problems from ‘translation of philosophy’, and establish ‘a philosophy of translation’. ‘Translation of philosophy, or philosophy of translation’ is an important topic for us to treat numerous translations in philosophy. The matter is that we have a groundless prejudice against translation and the unconditional worship of original text. If we have pursued absolute, unique, and transcendent translation beyond subjectivity, multiplicity, and time, it would be an intellectual arrogance or an romantic ideal. Translation only attempts to devote to its original text, but cannot be the text in itself. Even though my thinking arrived at the thought of the age, my words already departed from the language of the age, so there could be duplication between text and translation. The western way of thinking as ‘from philology to philosophy' would be translated in the eastern way of thinking as ‘from the little learning to the great learning'. More positively, translation should be promoted to philosophy. I prefer to represent the real issue of ours rather than receive the others. Otherwise, we are still staying in colonial studies. The proposition that ‘It can not be translated in Korean.’ probably denotes the fact that ‘I as a Korean have no my world view.’

        • 공자학의 미래

          정세근 한국공자학회 2009 孔子學 Vol.17 No.-

          이 글은 공자에 대한 시각변화를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30년간의 추이를 통해 일화별로 그려냈다. 먼저, 국가차원에서의 공자학을 말하면서 오늘날도 유지되고 있는 석전대례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공자의 77대손에 대한 대만의 정치적 배려와 2006년에 태어난 80대손을 과연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를 물어보았다. 다음으로, 공자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주자학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논어』의 번역문제와 누구에게도 가치 있는 공자의 말을 강조했다. 세 번째로는, 우리에게 유교가 공식적으로 종교가 된 까닭을 설명하고, 그럼에도 로마 교황청은 제사문화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소개했다. 네 번째로는, 공자에 대한 비난과 옹호, 그리고 그 전환의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공자는 역사적으로 통치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마르크스에서 공자에로의 전환은 공자당(CCP: Chinese Confucian Party)의 탄생을 예견하게 한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중국정부가 공자학을 전세계적인 가치로 내세우는 까닭에 대해 물어보았다. 현대세계에서는 민주가 민족보다 중요함에도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중국정부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미래 공자학의 대상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 이데올로그가 아닌 학자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공자이다. 공자학은 한 방향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비판적 공자학의 탄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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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어려움

          정세근 대동철학회 2010 大同哲學 Vol.51 No.-

          이글은 평화라는 주제를 아래 다루어진 여러 철학과 그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를 정리하고 비판했다. 군국주의에 찬동한 니시다 키타로 철학의 전체주의적인 성격에 대해 의심했고, 히틀러에 동조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속에 감춰진 무관용적 존재론에 대해 반성했다. 아울러 유태인 아렌트가 독일인 하이데거를 어떤 의미에서 받아들였고 그렇지 않았는가를 물었다. 아렌트의 말처럼 악은 무척이나 평범(banal)하며, 생각 없는 삶은 정치적 악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는 힌두교와 계급과 평등의 문제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이를테면 ‘무기업’(無記業)은 일용의 직업이기 때문에 업을 쌓지 않는다. 그러나 힌두교는 그런 개념이 없다. 따라서 계급은 유전되고 죄도 누적된다. 불교는 평등의 종교이지만 힌두교는 불평등의 종교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들어오면서 그것은 바가바드기타와 너무 비슷해지고 부처조차 많은 신 가운데 하나가 되면서, 불교는 자멸한다. 불평등 속에서 가장된 평화가 아니라, 평등 속에서의 참 평화가 중요하다. 칸트는 사변적인 비판서만이 아니라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도 깊었다. 그는 아시아에 대한 서구열강의 침탈은 부당하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조처는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밝히기에만 급급했던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영구평화를 꿈꿨다. 국제연맹은 아무리 공상적이라도 숙고되어야 했으며, 보편적 세계사를 이룩하는 것이 인류의 과제였다. 그러나 칸트도 자유를 남용할 ‘악한 지도자’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갈퉁은 평화학의 창시자로 소극적인 평화와 적극적인 평화를 구별한다. 앞의 것은 무력 아래의 평화이며 전쟁을 감춘 평화이다. 뒤의 것은 갈등조차 비폭력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얻어지는 평화이다. 그런데 왈저는 ‘정의로운 전쟁’이란 개념을 제시하면서 정의롭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지만 옹호될 수 있는 전쟁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갈퉁은 평화학자이고 갈퉁은 전쟁학자이다. 갈퉁의 구별대로라면, 왈저는 소극적 평화론자일 뿐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의 의미는 야스퍼스와 아렌트가 동의했듯이, 미래를 위해 좋은 예를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판은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고 감정적인 부분이 많았다. 불교는 평화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느 종교도 마찬가지로 평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반드시 불교를 말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칸트는 평화를 위해 개개인의 도덕적 성숙을 강조했다. 그러나 주체적인 삶이나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삶은 아직도 몽매한 인류의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철학적으로는 평화보다는 학살을 말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철학의 의무 가운데 하나는 형이상학 속에 숨어있는 폭력의 구조를 밝혀내는 일이다. This paper discussed on many philosopher’s views of peace. I doubted totalitarian character of Nishida Kitaro who aligned himself with militarism, and reflexed Heidegger’s metaphysic which accepted Hitler's suggestion, and wondered how Jewish Arendt assented to German Heidegger. Arendt found out ‘The banality of Evil’, and thought that living without thinking was the origin of political evil. Buddhist egalitarianism is contradictory to Hindu caste system. Skillful action did not make Karma in Buddhism, but hereditary classes cannot be overcame by one's exertion in Hinduism. In later years, Mahayana Buddhism lost its identity and became such a part of Hinduism as Bhagavadgītā. Kant concerned about current politics as much as his speculative critics. He judged Western imperialism vicious, and vindicated Chinese and Japanese actions on it. Kant was busy not only to clear the limit of reason but also to dream of eternal peace in the real world. Foedus Amphictyonum like contemporary U.N. should be considered for the world peace. Galtung invented a peace study, and divided the conception of peace into the negative and the positive. Negative peace is a peaceful status under the power. Walzer maintains a concept of ‘Just War’ concept although it needs lots of conditions. Walzer’s Just War might be Galtung’s negative peace. Eichman’s court, a war criminal trial, should be an ideal example of ‘the crime against humanity’ in future ages. Buddhist ethics might be expected not as general religions do, but as a concrete doctrine endeavoring to achieve the world peace in detail. Kant emphasized individual moral maturity, but human responsible subjectivity is not accomplished yet. We had to talk about massacre rather than peace. One of jobs for philosophers is a discovery for the structure of violence behind metaphy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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