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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 朝鮮後期 王室의 硏究 : 顯·肅宗代를 중심으로

        이범직 건국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7 인문과학논총 Vol.29 No.-

        After Hyochong's(孝宗) death, the successions to the thrones of Hyunchong(顯宗) and Sukchong(肅宗) were very stable and smooth. The reason was that only one prince had the qualification to become a king. Of course, the politics theory including the clan regulation(宗法) related to blood ties and successions of the throne supported it. In other hand, it, however, had ever been blamed for the debate that the throne of Hyochong was not proper in the way of the clan regulation. he royal family(王室) gathered a lot of king's relatives to defense the political offensive and supported them economically. In this context, it is evident that the royal family had political power in relation to the political group(Sarim 士林), in those days. In other words, the royal family helped king's relatives abundent and made them their own supporters through Gungbanggeun(宮房田) As a result, the power of balance between political parties was maintained so that the royal family could be stabilized.

      • KCI등재

        조선시대 왕릉의 조성 및 그 문헌

        이범직 한국사상문화학회 2007 韓國思想과 文化 Vol.36 No.-

        Construction of Royal Mausoleums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and related text materials / Lee Bum Jik 왕릉은 왕과 왕후의 사후 공간이자 왕조를 수호하는 조상신의 신성한 영역이다. 또한 그 후대 왕들에게는 효로서 그 ‘친(親)’을 다하면서 혈통 및 지위 계승의 영속성을 표하는 성역의 장소가 된다. 특히 조선왕조에서는 왕릉 조성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를 정형화된 의례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기에 이르렀다.조선왕조는 흉례(凶禮)에 따라 왕과 왕후의 훙(薨)한 순간[初終]부터 성복(成服)과 발인, 견전, 안릉, 우제, 졸곡, 소상, 대상, 담제에 이르기까지 총 27개월에 걸쳐 그 의례를 행하였고, 그 속에서 왕릉 택지와 택일 등 왕릉의 조성 과정이 조정되었다. 그 전체 구조를 보면, 풍수의 형국에 따라 택지를 하면서 금천교를 만들었고 이어 왕릉의 영역을 표시하는 홍살문을 세웠다. 제향의 공간으로서 배위와 참도로 이어지는 정자각과 그 우측으로 수복청을 두었고, 또한 비각을 세우고 소전대와 감이 만들어졌다. 다음은 제향의 공간을 넘어 능침 공간으로 가는 곳으로 둔덕이 인공적으로 조영되었고, 무인석과 문인석,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호, 석양, 곡담이 능침의 전후좌우에 놓여졌다. 그리고 봉분을 둘러 난간석과 병풍석이 만들어졌고, 봉분 밑으로는 석실 혹은 회격으로 처리한 능실을 두었다. 이러한 능역에는 잡초가 침범하거나 나무들이 자라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으며 정기적으로 왕릉을 관리하기 위해 관원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계승군주가 의례를 갖추어 전왕의 국장을 치루고 그 능을 조성하여 왕조의 성역이자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려는 의지 속에서 역대왕의 실록에 그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또 이를 다시 종합 정리하여 의궤 그리고 능지를 편찬하였던 것이다.

      • KCI등재후보

        세종대왕의 음악관

        이범직 한국사상문화학회 2019 韓國思想과 文化 Vol.100 No.-

        The great King Sejong was the ruler who studied Confucianism. He deeply studied confucianism to realize the rule of Rites and succeeded the throne from his father King Taejong. Sejong’s records(sillok) present his understanding of the confucianism texts in various ways and his reform policy. Sejong organised ritual system and music to rule the country by rites based on the confucianism and left historical achievements. This achievements on the confucianism texts in his era was ranked as Chinese study on the texts and even named as Joseon confucianisms. Besides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Book of Rites was focused in his studies. Sejong believed the rule of rites is based on the collaboration of ritual manner and music. Classic of music had been excluded from the original six classics and he paid his attention on the music part in the Books of Rites. To understand his political idea, the book of rites should be noted as the background to emphasize the idea of music. King Sejong’s sillok include the national ritual system and music note as appendixes. These ritual system and music in the historical records of role of rites show us, the modern descendants King Sejong’s governing idea and thoughts. 세종대왕(1397~1450)은 유학을 공부한 군주(재위 1418.8.10.~1450.2.17.)였다. 세종은 예치를 구현하기 위해 유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고 왕위를 태종으로부터 양위 계승하였다. 특히 이러한 세종에 대해 실록은 다각적으로 유교경전의 해석과 현실개혁을 추진하였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세종은 예치를 위한 예제 정리와 음악에 있어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세종의 시대는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이해로 문학․사학․철학 등에서 중국경학과 비견되는 수준을 만들었다. 때문에 세종시대 사상에 대해 독창적 조선 유학이라고 명명되는 경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사서오경과 함께 특히 『예기』가 주목되고 있었다. 예치는 예악 즉 예와 음악으로 함께 기능해야 하는 것으로 정리한다. 유교 경전을 대표하는 육경에서 『악경』이 일실되자 『예기』의 「악기」가 주목되는 문헌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세종의 정치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을 중요시하고 강조한 배경이 되는 『예기』의 「악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세종실록』에는 연대기에 더해 부록으로 오례와 악보를 싣고 있다. 예제와 음악 즉 예악이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후대로 전승되고 있는 예치의 역사를 문헌으로 남겨 우리에게 예악의 정치 내용과 정신을 교시하고 있어 정치문화사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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