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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东方杂誌》“近代文學批评”概念的建構 ― 兼論沈雁冰跟“文學研究會”相遇與其影响

        보고 중국어문학연구회 2011 중국어문학논집 Vol.0 No.71

        . 오사 이후, <동방잡지(东方杂誌)>의 “근대문학비평”과 “모방과 창조의 조화” 개념의 전개는 <동방잡지> 자체의 개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개혁은 <동방잡지> 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내부에 있는 기타 잡지들의 개혁과 연동되어 있었다. 그 중, 션옌삥(沈雁冰)에 의한 <소설월보(小说月报)>의 개혁은 <동방잡지>의 적극적인 변화를 촉발하였다. 구체적으로1921년을 전후해서, 션옌삥과 문학연구회(文學研究會)의 조우는 오히려 <동방잡지>에게 자신 내부에 대한 반성을 촉발하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상무인서관 내부에서 성장한 근대적 지식인들을 개혁의 전면에 배치하도록 하게 하였다. 본 논문은 근대 문학의 제도화 과정 속에서 <소설월보>의 개혁과 <동방잡지>의 근대 문학 이론 전개 사이에 존재했던 연동성을 먼저 확인하고, 이로 인해 확립된 문학관이 <동방잡지>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소설월보>와 <동방잡지>의 개혁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본 논문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구문학의 와해와 신문학의 건립 과정 속에서 션옌삥과 후위즈(胡愈之)라는 구시대 영역 내부에서 성장한 인물들이 어떻게 전통의 속박을 돌파하여, 근대 문학의 개념을 설정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자연히, 이들이 설정하는 근대문학의 개념적 상상은 바로 인습적인 문학 표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써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이들의 문학 주장은 비록 이 당시 반(反)-전통을 주장했던 신문학 진영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지만,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들이 상대주의적 시간관을 기초로, 호조론과 조화론적 관점을 문예 진화론적 시각과 결합하면서, 절대적 문학 판단 기준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절대적 문학 기준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고전의 문학 법칙과 그 체계의 질서뿐만 아니라, 이미 그 시대의 주류가 된 급진적 문학 주장, 특히 서구 가치에 대한 맹목적 추종들까지도 포함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에 대해 철저한 회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이들이 바로 절대성과 상대성의 경계에 서 있었던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회의의 근원에는 1차 세계 대전과 민국 혁명의 실패라는 역사적 사실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는 문명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서구에 비해 동양의 상대적 가치를 옹호해온 <동방잡지>의 기존 입장에 새로운 주류 이데올로기인 진화론적 세계관을 결합한 문예 이론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이를 대표하는 논리로서 귀납적 비평을 강조한 후위즈는 문학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과 판단을 중시하고, 기존의 권위적 문학 기준들을 부정하면서 근대 독자의 비평적 독서에 의해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것이 근대 문학 비평의 시작이라 보고 있다. 후위즈의 소위 “근대 문학 비평” 개념이나 미우펑린(缪凤林)의 “창작과 모방의 조화” 개념은 바로 이러한 속박을 파괴하는 방식에 있어서, 중국 지식계의 보수적 경향성 내부에서 성장한 개혁 주체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었고, 이러한 개념들은 개혁의 기원 및 그 원동력과 관련해서도 오사의 급진적 문화주의자들과 차별되는, 또 다른 복선(複线)적 역사 인식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본 논문이 오사 시기 경쟁 진화론과 대비되는 호조 진화론의 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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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方雜誌》“近代文學批評”槪念的建構

        李保高(Lee, Bo-go) 중국어문학연구회 2011 중국어문학논집 Vol.0 No.71

        오사 이후, 〈동방잡지(?方?誌)〉의 “근대문학비평”과 “모방과 창조의 조화” 개념의 전개는 〈동방잡지〉 자체의 개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개혁은 〈동방잡지〉 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상무인서관(商?印??) 내부에 있는 기타 잡지들의 개혁과 연동되어 있었다. 그 중, 션옌삥(沈雁?)에 의한 〈소설월보(小?月?)〉의 개혁은 〈동방잡지〉의 적극적인 변화를 촉발하였다. 구체적으로1921년을 전후해서, 션옌삥과 문학연구회(文??究?)의 조우는 오히려 〈동방잡지〉에게 자신 내부에 대한 반성을 촉발하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상무인서관 내부에서 성장한 근대적 지식인들을 개혁의 전면에 배치하도록 하게 하였다. 본 논문은 근대 문학의 제도화 과정 속에서 〈소설월보〉의 개혁과 〈동방잡지〉의 근대문학 이론 전개 사이에 존재했던 연동성을 먼저 확인하고, 이로 인해 확립된 문학관이 〈동방잡지〉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소설월보〉와 〈동방잡지〉의 개혁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본 논문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구문학의 와해와 신문학의 건립 과정 속에서 션옌삥과 후위즈(胡愈之)라는 구시대 영역 내부에서 성장한 인물들이 어떻게 전통의 속박을 돌파하여, 근대 문학의 개념을 설정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자연히, 이들이 설정하는 근대문학의 개념적 상상은 바로 인습적인 문학 표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써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이들의 문학 주장은 비록 이 당시 반(反)-전통을 주장했던 신문학 진영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지만,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들이 상대주의적 시간관을 기초로, 호조론과 조화론적 관점을 문예 진화론적 시각과 결합하면서, 절대적 문학 판단 기준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절대적 문학 기준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고전의 문학 법칙과 그 체계의 질서뿐만 아니라, 이미 그 시대의 주류가 된 급진적 문학 주장, 특히 서구 가치에 대한 맹목적 추종들까지도 포함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에 대해 철저한 회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이들이 바로 절대성과 상대성의 경계에 서 있었던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회의의 근원에는 1차 세계 대전과 민국혁명의 실패라는 역사적 사실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는 문명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서구에 비해 동양의 상대적 가치를 옹호해온 〈동방잡지〉의 기존 입장에 새로운 주류 이데올로기인 진화론적 세계관을 결합한 문예 이론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이를 대표하는 논리로서 귀납적 비평을 강조한 후위즈는 문학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과 판단을 중시하고, 기존의 권위적 문학 기준들을 부정하면서 근대 독자의 비평적 독서에 의해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것이 근대 문학 비평의 시작이라 보고 있다. 후위즈의 소위 “근대 문학 비평” 개념이나 미우펑린(??林)의 “창작과 모방의 조화” 개념은 바로 이러한 속박을 파괴하는 방식에 있어서, 중국 지식계의 보수적 경향성 내부에서 성장한 개혁 주체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었고, 이러한 개념들은 개혁의 기원 및 그 원동력과 관련해서도 오사의 급진적 문화주의자들과 차별되는, 또 다른 복선(??)적 역사 인식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본 논문이 오사 시기 경쟁 진화론과 대비되는 호조 진화론의 맥락을 추적하여, 그 안에서 형성되는 근대 문학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오사 신문화의 극단적 반(反)전통 담론이 빠지기 쉬운 역사 서사에 대한 독점적 경향에 대해 새로운 대안적 인식 공간을 발굴해 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 북경 및 요령성 객좌현 출토 청동기에 나타난 홍산 문화의 실체

        李日杰 간도학회 2021 간도학보 Vol.4 No.1

        홍산 유적지에서 발굴된 제단, 적석총, 여신묘(女神廟), 옥기 등은 고대시기의 우리 민족과 관련이 깊은 유적으로 인식되었다. 반면 중국 역시 홍산 유적을 화하(華夏)족 문화의 기원으로 규정하여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이름 지었다. 1세기 전 일본인 학자들은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왜곡시켰으며, 중국 학계조차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12세기에 한강 이북에 세운 기자조선을 우리 민족의 최초 국가라고 왜곡시키고 있다. 특히 홍산 유적지인 요령성 객좌현 일대에서 1970년대 발견된 청동기 명문(銘文)의 해석을 두고, 이형구 등 주류사학계는 허구의 기자동래(箕子東來)의 증거로 보았다. 이와 같은 주류 사학계 학자들의 주장은, 고힐강(顧頡剛)의 ‘고사부정론(古史否定論)’을 맹신하는 중국의 안완(晏琬)과 이학근(李學勤) 등의 논문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북경 및 객좌현 북동촌에서 발견된 청동기를 이학근(李學根) 역시 상대 만기(晩期), 즉 상대 후기로 단정하였지만 실제 이들 청동기의 제작 시기는 대략 10세기 이상 앞선 것이다. 대릉하 연안의 객좌현 일대에서 발굴된 수십 건의 청동기에 새긴 명문(銘文) 가운데에는 기후방정(㠱候方鼎), 언후우(匽候盂), 칭부신정(稱父辛鼎) 등이 있다. 이들 명문(銘文)에는 종족의 특징을 의미하는 독특한 부호인)인 족휘(族徽)가 새겨져 있다. 특히 ‘수이함환뢰(首耳銜環罍)’라는 제기(祭器)에 새겨진 6자의 명문(銘文)을 “父丁, 孤竹, 亞微”으로 해독한 이학근(李學勤)은 큰 오류를 범하였다. 이 명문의 올바른 해독은 “父珠晉(進)系(繼)諸(鏵)”라고 해야 옳다. 즉, “부주(父珠)인 내가 鏵족(神農과 舜계열)을 이어 왕이 되었다” 즉 부주(父珠)는 마지막 왕이었던 백익(伯益)을 지칭한 것이다. 기후방정(㠱候方鼎)의 기후(㠱候)는 고신(高辛)과 차비(次妃)인 간적(簡狄) 사이에 태어난 딸인 아황(蛾皇)이며, 간적(簡狄)은 요(堯)와는 남매간이다. 반면에 언후(匽候)는 요(堯)의 딸인 여영(女英)이며 언후(匽候)는 아오(亞吳)의 관직명이기도 하다. 아오(亞吳)는 오회(吳回)이며, 요(堯)의 두 번째 공공(公工)이 되어 정치를 관장하였다. 이학근과 이형구는 기후방정(㠱候方鼎)의 기후(㠱候)를 기자(箕子)라고 단정하였으며. 상말주초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왜곡된 추론에 의거 ‘孤竹’을 고죽국(孤竹國)으로 오인하였다. 이학근과 이형구의 해석에 의거하면, 결국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기자조선을 건국하여 통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홍산 유적지의 객좌현에서 발견된 청동기 명문(銘明)의 내용은 오제시기(五帝時期)의 요(堯), 순(舜), 우(禹), 백익(伯益)과 관련된 내용이지 기자(箕子)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다. 당시 안양(安陽)에서 제우(帝禹)의 아들인 하계(夏啓)에게 죽음을 당한 백익(伯益)을 따르던 신농족의 일파가 제도(帝都)인 곡부(曲阜)에서 탈출하여, 본래 고향이었던 홍산 지역으로 돌아온 것이다. Altars, stone mound tombs, goddess tombs, and jade jewels excavated from the Hongshan historic site have been recognized as relics closely related to the Korean nation in ancient times. Meanwhile, China named it the Liao River Civilization, defining Hongshan remains as the origin of the Huaxia clan’s culture. Japanese scholars distorted the history of Dangun Joseon (Gojoseon) one century ago as a myth, while even Chinese academia also denies the history of Dangun Joseon (Gojoseon) and distorts it by saying that Gija Joseon founded in the north of Han River in the 12th century is the first state of the Korean nation. In particular, concerning the interpretation of inscriptions of the bronzeware discovered in the Hongshan historic site in Kazuo, Liaoning Sheng in the 1970s, the mainstream learned circles of history including Lee Hyeong-Gu considered it proof of the falsity of Gija’s coming to east. The argument of scholars of the learned circles of history is based on the articles of Yan Wan and Li Xuegen of China, who have blind faith in Gu Jiegang’s ‘Denial of Ancient History.’ Li Xuegen also concluded that the bronzeware discovered in Beijing and Beidong, Kazuo was of the late Shang period, that is, the latter part of the Shang period. And yet, the period of the actual production of the bronzeware was more than 10 centuries earlier. Inscriptions carved on dozens of bronzeware excavated from Kazuo at the banks of Daling River include “Jìhoufangding”, “Yanhouyu”, and “Chengfuxinding,” etc., and on the inscriptions, the clan emblem (Unique sign symboliz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clan) is inscribed. In particular, Li Xuegen, who interpreted the inscriptions of six characters carved on the utensils used in ancestral rites called ‘Shouerxianhuanlei’ as “Fuding, Guzhu, Yawei” made a big error. The right interpretation of the inscriptions must be “Fuzhujinjihua.” In other words, “I, the Fuzhu, became a king following the Hua Clan (the lines of Shennong and Shun).” In other words, Fuzhu referred to Boyi, the last king. Jìhou in “Jìhoufangding” is Ehuang, a daughter of Gaoxin and the second concubine Jian Di, Jian Di is Yao’s sister. Meanwhile, Yanhou is Nuying, Yao’s daughter and is also the public office name of Yawu. Yawu is Wuhui, who became the second public worker of Yao to supervise politics. Lee Hak-Geun and Lee Hyeong-Gu concluded that Jìhou in “Jìhoufangding” is Gija and misrecognized Gu Zhu as ‘Gu Zhu Guo’ based on the distorted inference that Gija went to Joseon in the late Shang period and the early Zhou period. According to the interpretation of Lee Hak-Geun and Lee Hyeong-Gu, Gija finally went to Joseon and founded and ruled Gija Joseon. Thus, the details of inscriptions of the bronzeware discovered in Kazuo in the Hongshan historic site are related to Yao, Shun, Yu, and Boyi in the Five Emperors’ Period, but not related to Gija. In other words, a faction of the Shennong Clan that followed Boyi murdered by Xiaqi, a son of Diyu in Anyang at the time escaped Qufu in Imperial City, Didu and returned Hongshan, his home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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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新羅) 승장(勝莊)의 유식사상(唯識思想)

        만(Man Lee)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11 佛敎學報 Vol.0 No.59

        신라시대의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중반에 걸쳐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勝莊(684~?)은 그 행적 등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의 학문적인 성향을 간추려 보면, 圓測의 제자로서 일찍이 唯識學을 천착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일실된 『金光明最勝王經疏』는 慧沼와 憬興 등의 것과 더불어 이 방면의 연구에 중요한 주석서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勝莊의 유일한 현존서인 『梵網經述記』에서는 『瑜伽論』에서 논술된 내용을 인용하여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유식 사상가다운 면모를 엿볼 수가 있으며, 『涅槃經』등에서 일체 중생에게 佛性이 있다고 한 내용에서, ``일체``란 ``少分의 일체``로서 ``一部分``과 같은 의미인데, 이것은 수행에 따라서 法性의 妙理를 성취한 一部의 聖人과 성취하지 못한 중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승장은 一乘家보다는 三乘家의 입장을 그의 교학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승장의 諸識에 관한 견해는 몸을 지탱하기 위하여 필요한 4가지의 食物인 四食에관하여, 思食은 業食으로서 現識인 阿羅(賴)耶識을 일으켜서 6道 윤회케 하며, 識食은 眞識인 阿梨耶識으로서 眼, 耳 등 前6識을 일으키고, 觸識은 受愛와 想像 등 4陰인 諸心을 증장시키며, 段食도 色, 聲, 香 등 5境인 諸色을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四食에서 최고의 경지인 金剛心까지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부처님뿐이라고 논술한다. 불타의 세 가지 변화신인 化身과 應身 및 法身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범부들이 三心인 起事心과 依根本心 및 根本心 등을 없애지 못하기 때문인데, 勝莊이 이 三心에 관하여 해설하고 있다. 즉, 眼, 耳, 鼻 등 6識이 인식활동을 하는 것은 起事心이고, 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적인 事인 번뇌의 業果로서, 眼, 耳 등 6識이 貪慾, 瞋에 등을 일으켜 善惡業을 짓고서 五趣와 四生 등의 果事를 일으킴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밖으로 나타난 事로서 자기가 造作한 現象界로서, 眼, 耳 등 6識이 色, 聲 등의 경계를 攀緣하여 그의 種子를 重成해서 기세간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依根本心은 末那識으로서 阿賴耶識에 의지하고, 그의 見分을 반연하여 自心相을 일으켜 實我로 집착하며, 언제나 아뢰야식을 여의지 못하므로 依根本心이라 하며, 根本心이란 아뢰야식으로서 모든 有爲法의 所依處가 되어 제법의 종자를 함장하고, 제법을 생성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중국 法相宗의 有形象 唯識論과 일반 대승불교의 無形象 唯識論은 진여와 불성론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외에도 阿陀那(adana)識에 관한 해석도 상이하다. 즉, 法相宗 등 新譯에서는 阿陀那識을 阿賴耶識과 같은 심식으로 여긴 반면에, 地論宗, 攝論宗 및 天台宗 등의 舊譯家들은 阿陀那識을 末那識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三心說에 관하여 勝莊은 법상종의 견해와 같이 아타나식을 아뢰야식으로 여긴 내용이 보이고 있다. Seungjang(684~?) is assumed to live life from latter half of the 7th century to middle of the 8th century at the era of Silla Kingdom and most of his achievements have not been disclosed. Considering his scientific tendency, however, Seungjang who was a disciple of Woncheuk is thought to research vijnapti -matrata science from his young days: An explanation of Brahmajala that was sole book of Seungjang quoted Yogacarabhumi to show aspect of his thought of vijnapti-matrata. The Mahaparinirvanasutra said that all creatures had Buddhata: ``All`` means ``a part``, and not only saint that is a part of the accomplishment but also all creatures who are able to accomplish can exist together depending upon ascetic exercises.Seungjang thought of vijnana that four kinds of 食物 that could support human body: Vicitra-aharata that is activity-consciousness can produce alaya-vijnana to make cycle of human life at six ways. Buddha only is said to experience up to diamond meditation that belongs to the highest level of 四食. Layman is unable to attain three Buddhakayas that is three kinds of changes of the Buddha because he is unable to get rid of sad-vijnanani, mano-vijnana and alaya-vijnana: Seungjang explained three-cittas. Then, the Chinese Bubsang-sect regards adana-vijnana as alaya-vijnana, while not only Chuntae-sect but also Shubron-sect does adana-vijnana as mano-vijnana. As Bubsang-sect did, so Seungjang regarded adana-vijnana as alaya-vijn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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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초 개신교 선교사들의 중국 관련 지식 생산에 대한 인식 비판 -『차이니즈 레포지터리The Chinese Repository』의 중국 경전, 학문 체제를 해석하는 시선에 대하여

        보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2020 국제지역연구 Vol.24 No.2

        1832년 5월부터 광둥에서 발간되기 시작한 『차이니즈 레포지터리The Chinese Repository』의 주요 필진은 선교사 혹은 외교관, 무업 관계 종사자들이 주류였다. 본 논문은 바로 『차이니즈 레포지터리』가 처음 발간되었던 시기인 1830년대 초반 선교사들의 글을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새로운 지식 생산자로서 갖게 된 위상과 함께 그들의 내면에 감춰진 균열과 자기 정립 과정을 읽어 내고자 하였다. 본 논문은 『차이니즈 레포지터리』의 텍스트에서 이들이 읽고 있는 중국의 ‘경전’, 중국의 ‘학문 체제’에 대한 내용을 분석, 이들이 파악하고 있던 당시 중국 문명에 대한 인식을 살폈고, 전근대 중국의 문명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제도들이 갖는 특징 속에서 근대에 대한 이들 필진들의 시선을 거꾸로 재구성해 보았다. 본 논문은 이 지점이 바로 우리가 신교 선교사들을 평가할 때, 제국주의의 전구(前驅)로 보든 아니면 기독교적 양심의 실천가로 보든, 이전의 1800년대 초반과는 달라진 서양인의 모습이며, 이들의 서사는 근대성의 우월감과 자신감을 상대방에게 처음으로 과시하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한편으로 유럽에서 자신들이 생산한 지식이 유통되고 확산되어 그들의 선교 사업이 후원을 받고 궁극적으로 지적 권위와 위상을 획득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들의 중국 혹은 아시아에 대한 지적 권위는 지역의 현장성을 강조함으로써 확립되었다. 그리고 반면 근대의 과학·윤리·가치관을 동아시아로 가져와 변화의 동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즉 ‘동아시아에서의 계몽의 완성’이라는 목표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 스스로가 존재하고 또 근거하고 있는 현장으로서의 중국과 아시아를 단순히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 대한 지식을 재확립하면서 산발적 지식에서 지식 체계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Missionary, diplomats and trade-related people constituted the main contributors to 『The Chinese Repository』, which was first published in May 1832 in Guangdong. This research aims to address missionary’s new roles as the knowledge producers about the region and discuss the internal conflicts and self identity formation they went through in the early 1830s. This paper analyzed these individuals’ perspectives regarding Chinese civilization reflected in their interpretation of Chinese classics and academic system. This research shows that whether we see protestant missionary as precursors of imperialism or doer of Christian conscience, these Westerners demonstrated differences from the early 1800s in that their narratives began to demonstrate their modernity’s supremacy and confidence. On the one hand, they aimed to obtain intellectual authority and status as the knowledge they produced were consumed and disseminated in Europe and as their missionary work were supported. On the other hand, these individuals also aimed to accomplish the mission of enlightening East Asia by transferring science·ethics·values of modern times to East Asia, provoking the region’s transformation. They not just turned China and Asia into objects as regions they lived in but also constructed a knowledge system based on the sporadic knowledge they reestablished about China.

      • KCI등재

        匈奴·鮮卑 銅鍑의 특징과 변천

        李 海 蓮(Lee, Haeryeon) 부산고고학회 2014 고고광장 Vol.- No.14

        銅鍑은 북방 유라시아 일대에 보이는 고대 북방 민족의 취사도구이다. 중국 연구자들에 의하면 중국의 북부에서 유목민이 중국의 청동 제작 기술을 도입하여 만든 특수한 용기가 동복이며, 흉노· 선비 등 유목민족의 취사도구로 중국 북방 지역에서 출현해서 서방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글은 서한 시기 이후 몽골과 중국 지역에서 출토된 흉노와 선비 동복에 대하여 검토한 글이다. 동복은 대각의 유무, 귀의 형태에 따라 4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고, 동체 부의 문양 유무에 따라 세분할 수 있다. Ⅰ형은 대각이 있고 구연에 方形耳가 붙은 것, Ⅱ형은 대각이 있고 구연에 半圜耳가 붙은 것, Ⅲ 형은 대각이 없고 方形耳가 붙은 것, Ⅳ형은 대각이 없고 半圜耳가 붙은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한 특징으로 나누어 보면 흉노 동복은 대각이 있고,「 山」자 모양의 方形耳 옆에 작은 장식이 있고, 구형에 가까운 심복에 弧弦紋이 장식되어 있고, 대각의 투창은 작은 삼각형인 것이 특징이다. 대각이 있고 구연에 半圜耳가 붙은 것은 예가 극히 드물지만 반구형의 동체에 두 줄의 돌대가 돌아간다. 대각이 없고 半圜耳가 붙은 것은 장동의 심복형 동체에 호선문이 장식되어 있는 것, 무문일 경우는 구연에 붙은 귀에 작은 장식이 붙는 특징이 있다. 선비 동복은 대각이 있고「 山」자 모양의 方形耳 옆에 작은 장식이 없거나 흔적이 있고, 장동의 심복에 무문이 특징이다. 대각의 투창은 삼각형 혹은 방형이다. 대각이 있고 구연에 半圜耳가 붙은 것은 內蒙古 扎賚諾爾古墓 출토품을 제외하면 모두 심복에 무문이다. 대각이 없고 半圜耳가 붙은 것은 심복에 동체 상부에 선문 장식이 있다. 즉 ⅠA, ⅡA, ⅢA, ⅣA는 흉노 동복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ⅠB, ⅡB, ⅢB, ⅣB, ⅣC는 선비 동복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Bronze caldron is the cooking utensil of ancient northern races shown in the whole area of the Northern Eurasia. According to Chinese researchers, bronze caldron is an utensil made in the northern part of China as the special container manufactured by nomads in the northeastern region of China by introducing bronze manufacturing technologies of China, and it is said that it had been spread to the West after its emergence in the northern region of China as the cooking utensil of nomads such as the Huns and Xianbei, etc. This paper is the writing reviewed on bronze caldrons of the Huns and Xianbei with bronze caldrons excavated after the era of the Western Han in the Mongolian and Chinese regions as its target. Bronze caldron can be divided into four types in accordance with the fact whether there is any leg-type mount or not and the form of ear, and it can be subdivided as per whether any pattern is existed in the main body part. It can be classified as follows: Type Ⅰis the bronze caldron which has its leg-type mount and whose square ears are attached to its mouth, type Ⅱ is the one which has its leg-type mount and whose hemispherical ears are attached to the mouth, type Ⅲ is the one which has no leg-type mount and has square ears attached, and type Ⅳ is the one which has no leg-type mount and has hemispherical ears attached. Therefore, if it is divided on the basis of these features, the bronze caldron of the Hun is characterized with its leg-type mount, small ornaments located near square ears in the shape of threepronged fork(山), and round linear pattern ornaments at its deep middle part similar to the globular shape, and through holes of leg-type mount which are shaped as small triangles. Although example of the bronze caldron which has leg-type mounts and hemispherical ears attached to its mouth is extremely rare, two slightly protruded lines on the surface of caldron are surrounded around hemispherically shaped main body. The bronze caldron which has no leg-type mount and to which hemispherical ears are attached is featured with round linear pattern ornaments in the long main body of caldron with deep middle part type, or small ornaments attached to the ear that was attached to its mouth in case of the bronze caldron with no pattern. Bronze caldron of the Xianbei is characterized with its leg-type mount, no small ornament at the side of square ear in the shape of three-pronged fork(山) or vestige of the ornament, and no pattern at the deep middle part of the long main body of caldron. There are triangle or square through holes at the through hole location of leg-type mount. Except for the article excavated at the old tomb in Zhalainuo er(Jalainur), Inner Mongolia that has leg-type mounts and hemispherical ears attached to the mouth, all of them have no pattern at the deep middle part. The bronze caldron which has no leg-type mount and hemispherical ears attached has linear pattern ornaments at the top of deep middle part. That is, it may be said that types ⅠA, ⅡA, ⅢA and ⅣA have the features of the Huns bronze caldron, and types ⅠB, ⅡB, ⅢB, ⅣB and ⅣC have the features of Xianbei bronze cald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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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羅 義寂의 『大乘義林章』 散逸本 復元

        한국불교학회 2008 韓國佛敎學 Vol.52 No.-

        According to Samguk Yusa, Uijeok working mainly in the second half of 7 B.C. of the Silla period was known for one of the several disciples of Uisang. It is speculated that Choi Chiwon, who led an active life at later ages of Silla period, wrote a biography of Uijeok. Because he was not only done many types of monumental inscriptions but also wrote biographies of monks who founded and established the temple, Haeinsa in the year of the King Aejang, especially including the biography of a saint of Boosuk which the monk Illyeon called ‘the original biography’. Gyunyeo assumed in his work that Uijeok’s academic preference was inclined more toward the sect of Huayan(華嚴宗) changed from the sect of the phenomenal appearances of dharmas(法相宗). However, Choi Jing in Japan regarded Uijeok as the monk of the sect of the phenomenal appearances of dharmas. Anyeon also introduced Uijeok as followers of Xuanzang sānzàng(玄奘 三藏) in his book. As a result, Uijeok was believed to be one of the disciples of the sect of the phenomenal appearances of dharmas. More than 25 kinds of writing regarding Uijeok were made and ‘Daeseung-uirimjang’ was called either 12chapter or 12volume-chapter and Gyugi’s writings of ‘Daeseungbeobwonuirimjang’(7chapter) was called ‘a miniature chapter(略章)’ and that of Uijeok was called ‘a huge chapter(廣章)’ so that those writings were thought to make with scientific purpose. And, as the writing of Uijeok was to make revision, correction and preach of the Gyugi’s writing, so that recovery of a part of lost Uijeok’s writings at introduction of Gyugi’s writings of ‘Daeseung-beobwon-uirimjang’ could examine thought commonness and difference between that books. 신라시대의 7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義寂은 『三國遺事』의 「義湘傳敎」條에 보면 義湘(625~702)의 여러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적에게는 신라의 후대에 활동했던 ‘文昌侯’로 추봉되던 崔致遠(857~ ?)이 지은 傳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拙論, 「新羅 義寂의 一乘思想과 修行論」( 『佛敎學報』 제41집, 2004) 參照]. 왜냐하면 최치원은 『鳳巖寺碑文』, 『崇福寺碑文』, 『法藏和尙傳』등을 지었을 뿐만이 아니라 哀莊王 때(800~809)에 해인사를 창건한 順應과 利貞 두 스님 등에 관한 전기도 짓고, 일연 스님이 ‘本傳’이라고 불렀던 『浮石尊者傳』등도 있었기 때문이다. 의적의 학풍은 均如(923~973)가 그의 『圓通鈔』에서 의적의 학문적인 경향을, “法相宗에서 왔다”고 하여 화엄종에 귀하한 것으로 보았지만, 일본의 最澄(767~822)이 지은 『守護國界章』에서는 의적을 ‘法相宗의 沙門’이라고 하거나 安然(?~884)의 『敎時諍論』에서도 玄奘의 門人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 등으로 보아 의적은 법상종에 소속되었던 인물인 것 같다. 이러한 의적에게는 『大般若經綱要』 등 25여 종류에 달하는 저서들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大乘義林章』은 12卷 혹은 12卷章으로 불렀던 것으로서, 窺基의 이 방면의 저서인 『大乘法苑義林章』(7권)을 ‘略章’이라 하고, 의적의 이것을 ‘廣章’이라 命名했다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은 서로 같은 학술적인 목적을 가지고 저술되었던 것을 알 수 있겠다. 더구나 의적의 것이 규기의 章疏를 補正, 改正, 破斥, 論難, 彈劾 등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현재 규기의 『大乘法苑義林章』이 전해지고 있는 실정에서 일실된 의적의 것을 일부나마 복원한다면 이들 간의 사상적인 공통성 내지는 상이성 등을 알아보는 데 있어서 일익을 담당할 것으로 사료되어서 시도된 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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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四新文化運動前後出版市場的變動與『東方雜誌』

        李保高 중국어문학연구회 2011 중국어문학논집 Vol.0 No.66

        본 논문은 오사 신문화 운동 전후 시기 중국 출판 시장의 변동 과정과 그 내용을 『동방잡지(?方?誌)』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1897년 일본의 자본에 의해 근대적 출판사로 출발한 상무인서관은 1904년부터 종합성 잡지인 『동방잡지』를 출간한다. 이 잡지는 1948년 12월 종간될 때까지, 여러 역사적 사건의 원인들로 인해 수차례 편집진과 편집 방향의 변동 과정을 겪는다. 그 가운데 본 논문은 오사 이전 최대의 판매량을 자랑하던 상무인서관의 잡지들이 사회 가치의 변동에 따라 경영 상 위기를 맞게 되고, 그에 대응하여 신문화 담론을 흡수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당시 전체 출판 시장에서 발생한 양적 그리고 질적 변화의 내용을 추적하고자 한다. 본문에서는 먼저, 뚜야취엔(杜?泉)이 편집자를 맡았던 1914년부터 1920년 시기 『?동방잡지』?의 판매량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피고, 이 당시 근대의 가치에 대해 미온적 혹은 부정적이었던 이들의 태도가 잡지의 사회적 역할 인식 정립과 함께 그 지향의 측면에서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또 실제 지식 담론 내부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논쟁, 예를 들어 백화문을 둘러싼 개념상의 논쟁을 통해 이들이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던 보수적 가치관과 근대 국민국가 개념을 전제로 한 근대 독자군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어떠한 논리 전개의 과정으로 연결하고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사 이후 『?동방잡지』?의 편집상의 구체적 변화와 함께 이들 텍스트에 등장하는 “관수지식(灌?知?)”이라는 구호가 어떤 지식사회 내부의 논쟁적 맥락을 통해 출현하게 되는지를 재구성하고 있다. 본 논문은 오사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대표적 두 가지 시간관, 즉 오사를 역사 전개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보는 관점과 청말 이래로 지속되어 온 변화의 연속선 상 또 다른 한 지점으로 파악하는 관점에 대해 동시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순수한 실증의 의미로 보았을 때, 오사가 이전 만청 시기의 각종 사조로부터 촉발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본 논문의 시각은 이러한 질문들이 오사를 절대성을 지닌 근대성 이데올로기의 기점으로 파악하는 시각에게 더 넓은 연구의 범주를 제공해준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 당시 출판 산업의 변동에 대한 파악을 지식 사회의 네트워크[??]라는 관점으로 파악하고자 한 점은 바로 이러한 두 시간관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하나의 대안적 방법론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역사 사실에 대한 부단한 역사화의 반추 과정은 그 해석에 있어서 특정한 맥락의 전유를 극복하고, 그 대상을 입체적으로 인식하는데 선결 조건이 될 것이며, 이는 역사 텍스트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소명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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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身与心的设计者

        李?昊(Lee, Young-Ho) 한국양명학회 2013 陽明學 Vol.0 No.35

        유학은 공자 이래 오랫동안 윤리학의 범주에 머물러왔다. 그러다가 송대에 이르러 도가와 불가의 사상과 대립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이념을 흡수하여 새로운 형태의 유학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유학사에서 新儒學(道學혹은 朱子學)이라 하는데, 그 정점에 朱熹가 있다. 주희는 기존의 윤리학에다 우주론과 심성론을 첨가하여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의 통합체로써 기능하는 유학을 정립하였다. 특히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깊은 탐색을 통해 그 현재적 모습과 지향해야 될 모습의 형태를 제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설계도를 제시하였는데, 그 설계도는 이후 동아시아-특히 한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건국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자학적 이념은 한국의 정신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희에 의하면 인간의 原存在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하다. 純善의 理는 어떤 인간에게나 균등하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現存在는 매우 불안정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유전적 불평등이고 둘째는 환경적 불평등이다. 인간은 이 두 요인에 의하여 그가 부여받은 몸과 마음의 안정성을 잃어버리고 불안전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불안전한 인간들의 모임인 사회 또한 불안전하다. 여기서 주희는 몸과 마음의 설계도를 제시하여 이 설계도가 그려놓은 길을 따라가면 그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에 의한 불안등한 현존재를 극복하고서 원존재의 완전함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원존재에게로 다가갈수록 인간의 몸과 마음은 안정적 국면에 놓이게 되고, 이러한 인간들의 집합체인 사회 또한 안정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주희의 이러한 주장을 구현해 놓은 책이 바로 小學과 大學이다. 주희에 의하면, 소학은 몸의 설계도이고 대학은 마음의 설계도이다. 이 설계도는 조선에서 정부와 다수의 학자들에 의하여 실천되었으며, 현재도 소수의 집단과 개인들에 의하여 실천되고 있다. 현대는 인간 정신의 불안정과 그로 인한 매우 커다란 위기가 도래한 시대이다. 동아시아사회에서 경제가 발달할수록 이러한 현상은 극대화되는 감이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가 그러하다. 많은 이들이 경제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수치는 낮아지며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사태가 늘어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희의 몸과 마음의 설계도는 어느 정도 현재적 생명력을 가지고 기능할 여지가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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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자치단체의 관할구역에 관한 법적 고찰

        일세(Lee, Il-Se) 충남대학교 법학연구소 2016 法學硏究 Vol.27 No.3

        지방자치단체의 관할구역이란 지방자치단체의 자치권이 미치는 공간적 범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지방자치단체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주민의 권리의무관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법은 지방자치단체의 관할구역에 관하여 단지 ‘종전’에 의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판례에 의하면 ‘종전’이라 함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시의 지방자치단체의 관할구역이 원천적 기준이 된다고 한다. 이 논문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관할구역에 관하여 특히 다음과 같은 점에 중점을 두어 고찰하였다. 첫째, 지방자치단체의 구역에 육지뿐만 아니라 해상과 상공도 포함되는지가 문제된다. 국가의 영역에는 육지, 해상 및 상공을 포함하는데, 지방자치단체의 관할구역은 국가의 영역을 지방자치단체별로 분할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상과 상공도 포함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지방자치단체간의 해상경계를 결정하는 방법이 문제된다. 이에 관해 헌법재판소는 종래에는 국토지리정보원이 발간한 국가기본도(지형도)상의 해상경계선이 기준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2015년에 종전의 입장을 변경하여, 지리상의 자연적 조건이나 주민의 편익 등을 종합하여 헌법재판소가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해상경계를 결정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이 토지가 조성된 경우에 그것이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관할에 속하는지의 결정방법이 문제된다. 종래 지방자치법은 이에 관해 아무런 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지방자치단체간에 많은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에 2009년에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매립지의 관할을 결정하는 방법에 관하여 명시적인 규정을 두었다. 넷째, 지방자치단체를 통합하거나 분할하는 경우의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법에 관해 고찰하였다. 2004년 제정된 주민투표법은 지방자치단체를 합치거나 나누는 경우에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경우 주민투표의 결과는 법적 구속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지방자치단체간에 관할구역에 관한 분쟁이 발생한 경우에 그 해결방법에 관해 고찰하였다. 지방자치단체간의 해상경계에 관해 다툼이 있는 경우에는 지방자치법 제148조에서 정한 지방자치단체간의 분쟁조정제도를 활용할 수 있으며, 또한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매립지의 관할에 관해 분쟁이 있는 경우에는 종래에는 헌법재판소의 권한쟁의심판을 통해 해결하였다. 그런데 2009년 지방자치법에서는 매립지의 관할에 관해서는 행정자치부장관이 결정하도록 하고, 만일 행정자치부장관의 결정에 이의가 있는 경우에는 지방자치단체장이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하였다. 지방자치단체를 합치거나 나누는 것에 대한 분쟁이 있는 경우에는 지방자치단체가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할 수 있으며, 주민도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The jurisdiction of local government is the spatial extent of the local government’s autonomy, which has a significant influence not only on the local government itself but also the residents’ legal rights and obligations. However, the Local Autonomy Act poses a number of problems by stating that the jurisdiction “shall be as used before”. According to the judicial precedent, the base point of “before” is the jurisdiction of local governments on National Foundation Day, August 15, 1948. This paper focuses on the jurisdictions of local governments with particular emphasis on the following points. First, we will see if the local government’s jurisdiction includes not only land but also sea and airspace. The territory of a state includes the land, water and airspace, and the national territory is divided into local governments’ jurisdiction. Therefore, we can assume that the local government’s jurisdiction includes the sea and the airspace. Second, we will see how we can decide the maritime boundary. In the past, the Constitutional Court stated that the physical map from the National Geographic Information Institute was the standard for naval borders. However, in 2015, the Constitutional Court changed their position and stated that the Constitutional Court should determine the maritime boundaries rationally and equitably, by considering the geographic, natural conditions and the benefits of the residents etc. Third, we will see to which local government the jurisdiction goes, when new land is created by filling the sea. The old Local Autonomy Act did not have any rules regarding this so many disputes had arisen between the local governments. In 2009, the Local Autonomy Law was amended to clarify how to set the jurisdiction of filled ground. Fourth, I will study how to collect opinions of residents when integrating or dividing local government. The Residents Voting Act, enacted in 2004, allowed residents to vote in the case of merging or dividing local governments. In this case, the result of the referendum is not legally binding. Finally, I discussed how to resolve the disputes on jurisdiction between local governments. When there is a dispute over the maritime boundaries between local governments, the Dispute Mediation system set out in Article 148 of the Local Autonomy Law may be used. Also, the Adjudication on Jurisdiction may be filed with the Constitutional Court. When there is a dispute over the jurisdiction of a filled ground, in the past, it had been solved through the Adjudication on Jurisdiction of the Constitutional Court. However, in 2009, the Local Autonomy Act newly regulated that the Minister of Public Administration and Local Autonomy must decide on the jurisdiction of the filled ground and if there is any objection to the decision, the head of local government may file a lawsuit with the Constitutional Court. If there is a dispute when converging or dividing local governments, the local government may file an Adjudication on Jurisdiction to the Constitutional court, and the residents also may file an Adjudication on Constitutional Complaint to the Constitutional Co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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