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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논문 1> : 현대 과학기술과 생명의 위기에 대한 불교적 조망

        윤종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4 동아시아불교문화 Vol.0 No.18

        현대사회는 고도로 발전한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예전에 누릴수 없었던 극도의 편리함과 물질적 풍요함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인류를 위협하는 많은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이른바 과학 기술은 빛과 어둠의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양면성을 갖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핵개발이다. 핵개발을 계속 할 것인지 아니면 핵을 포기하고 새로운 대체 에너지를 개발해야 할 것인지는 21세기 과 학기술에 있어 가장 쟁점이 되는 사항이다. 이 글에서는 이에 대한 불교 적 관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는데, 불살생계와 연기론적인 생명관에 바탕하는 불교적 입장에서는 핵개발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불교의 자비의 두 원칙인 현실적인 측면에서나 본질적인 측면 모두 핵 개발은 부정된다. 現代社會は高度で發展した尖端的科學技術的發展によって, こ的前に 享受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極度的便利さと物質的豊かさを享受してい る. しかし, そ的 裏面には人類を脅威する多く的要素が內在している. い わゆる科學技術は光と闇的里面性を持っている的だ. そういう里面性を 持っている一番代表的なことが核開發だ. 核開發を續くか, それとも核を あきらめて新しい代替工ネ兒ギ-を開發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は;``世紀 科學技術に書いて一番 爭點になる事項だ. こ的文ではこれに對する彿敎 的觀點が何やらよく見たが, 不殺生戒と續起論的である生命觀に土台す る彿敎的立場では核開發 廢棄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的だ. すな わち, 彿敎的慈悲的二つ的原則である現實的な側面でも本質的な側面皆 核開發は不正される.

      • KCI등재후보
      • 경찰의 집회ㆍ시위에 대한 효율적 관리방안에 관한 연구

        윤종갑 대구대학교 2008 행정문제 연구 논집 Vol.1 No.

        The freedom of assembly and demonstration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basic right which contributes to development of democratic politics by pursueing the common interests through expression of collective opinion. This study finds several problems regarding assembly and demonstration such as people's recognition, the way demonstrators express their opinion and the way the police deal with them. Based on such recognition, this study aims to find effective management plans about assembly and demonstration. To do that, this study uses date on assembly and demonstration for the last(2005, 2006)two years and a case study. In order to solve these problems and to establish the culture of peaceful assembly and demonstration, this study suggested effective management plans about assembly and demonstration of police.

      • KCI등재

        企劃論文 : 건학이념 원융무애의 이해; 원융무애의 사상적 근거와 대승적 전개

        윤종갑 영산대학교 동양문화연구원 2010 동양문화연구 Vol.5 No.-

        모든 존재가 서로 ``방해됨이 없이 융합’한다는 ``圓融無?’의 근본정신은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즉 붓다의 전 생애는 원융무애의 삶이었으며, 이러한 붓다의 원융무애의 정신은 대승불교에 계승되어 더욱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러한의미에서 불교의 전 역사는 원융무애에 입각하여 전개 발전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원융은 원만하게 두루 융섭하여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연기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무애는 치우침이나 편견 없이 서로 통하여 완전한 일치 내지 조화를 뜻하는 중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원융과 무애는 연기와 중도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붓다의 연기와 중도의 사상을 대승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인물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龍樹(N?g?rjuna, 약 A. D. 150-250)이다. 용수는 붓다의 연기와 중도의 사상에 의거하여 어떠한 존재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空한존재로서 단지 假名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그 空한존재는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결코 無는 아니며 오히려 유와 무를 포섭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원융무애한 법계를 이루고 있음을 二諦說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였다. 용수의 연기설과 이제설은 후대의 불교사상에 큰 영향을 미쳐 인도의 中觀學派와 중국의 三論宗을 형성하게 하였으며, 특히 三諦偈와 相依說에 의거하여 중국의 天台宗과 華嚴宗이 독자적인 교설을 정초할수 있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사상적 근간은 연기와 중도로서, 이 세계를 연기에 의해 형성된 전일적·유기체적인 관계망으로 파악하며 그러한 관계망은 걸림 없이 상호 작용하며 소통하는 중도로 파악하였다. 그 구체적인 교리체계가 바로 천태의 三諦圓融과 圓融三觀, 화엄의事事無碍와 六相圓融이다. 이들 교리체계에 따르면 실재를 현상적 차원에서 보면 差別相을 지니지만 실재의 본성은 평등한 것이며, 모든 현상〔事〕은 이치〔理〕에서 생긴 것이므로 이치를 여의고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본 논문을 통하여 원융무애 사상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수 있다. 첫째, 각각의 것이 그 입장을 유지하면서 완전히 일체가 되어서로 융합하고 방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사물이 완전히 相卽相入하여 혼연일체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 완전, 원만하고 훌륭하다는 의미이다. 이때 ‘원’은 원만으로 가득 차 모자람이 없음을 말하며, ‘융’은 融融이란 뜻으로 용해됨을 말한다. 그리고 ‘무애’는 ‘자재하게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상태’, 즉 融通自在하여 모든 바깥 경계에 장애되지않고 그와 일체가 되어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이러한 원융무애의 정신은 오늘날 차별과 갈등, 그리고 투쟁으로 치닫는 21세기에 있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정신인 것이다.

      • KCI등재
      • 대승불교의 인욕사상과 靑潭 大宗師

        윤종갑 진주산업대학교 2005 마음사상 Vol.3 No.-

        靑潭 大宗師가 인욕제일의 禪師로서 널리 알려진 것은 평생에 걸쳐 행하였던 남다른 참회고행의 결과이다. 특히 ‘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이타적 자비심에 입각한 청담 대종사의 인욕정신은 대승불교의 보살도에 기반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인욕사상은 단순히 고통을 참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諸法實相이 공함을 깨달아 악한 행위를 하는 자와 당하는 자, 그리고 진실한 법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관찰하면서 정진하는 것이다. 인욕의 종류는 인욕의 대상과 내용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는데 그 기본은 有爲法(세간법)으로서의 生忍과 無爲法(출세간법)으로서의 法忍이다. 인욕의 실천은 無自性의 空觀에 바탕하여 이루어지는데, 이때 무자성의 공관이란 인과법(緣起)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의미한다. 인욕의 공덕은 한량없지만, 모든 악을 조복하고 중생들을 평안으로 이끌어 모두가 열반을 성취하게 한다. 청담 대종사는 이러한 대승불교의 인욕사상을 자신의 삶 자체로 받아들여 한 평생 인욕바라밀을 실천하였다. 즉 인욕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로서 받아들여 중생구제와 불교정화에 한 평생을 보냈던 진정한 참 수행자요 보살이었던 것이다. That Chungdam great priest was widely known as a priest of the k□a ̄nti first is the body which was missing from usually and carried out many confession and penance. ‘Spiritual enlightenment is pursued in a top and it asks for s in the bottom(上求菩提 下化衆生)’ are especially altruistic. The base of the k□a ̄nti thought of Chungdam great priest based on the mercy heart is carried out to the bodhisattva way of Mahayana Buddhism. The k□a ̄nti thought of Mahayana Buddhism does not finish with the place which bears pain simply. It is purified observing the doer who realizes and does wrong of the true figure in the world being vacant, a victim, and the figure which carries out truth. The kind of k□a ̄nti is classified according to the object and the contents of k□a ̄ntit. The standard is Sengin(生忍) and Bepin(法忍) as a world method and a method between success in life. Although practice of k□a ̄nti is realized by the empty view, an empty view means cause and effect. Infinity is carried out, wrong is refused and it leads to Nirvana. A accepted the k□a ̄nti thought of Mahayana Buddhism by raw itself one's, and practiced it usually. In other words, k□a ̄nti was accepted as an everyday life which it is not as an expedient of practice. A is a bodhisattva who is the person practicing asceticism who did the line of the Buddhism purification to creature relief usually, and who does bodhisattva.

      • KCI등재

        특집 2 : 한일불교(韓日佛敎)와 생명윤리(生命倫理) -낙태(落胎)를 둘러싼 한일불교(韓日佛敎)의 생명문화(生命文化)와 그 기저(基底)-

        윤종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07 동아시아불교문화 Vol.1 No.-

        본 논문은 낙태에 관한 佛典의 기본적인 교리를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 한일 두 나라의 불교계에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胎兒靈駕薦度齋``와 ``水子供養``을 중심으로 생명문화의 전통과 현황, 그리고 접근방법 등을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비교론적으로 살펴 본 것이다. 한국불교의 ``태아영가천도재``와 일본불교의 ``수자공양``은 낙태아에 대한 추모공양과 낙태한 신도의 죄업을 소멸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근래에 도입된 것이다. 그런데, 낙태(임신중절)된 태아(유산을 포함)만을 대상으로 하며, 낙태아(죽은 자)와 그 산모(산자)를 독립적 개체(이원적 존재)가 아닌 하나의 개체(일원적 존재)로서 파악한다는 점에서 생명윤리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아영가천도재``는 영가의 명복을 1차적인 목적을 두고 있는데 반해, ``수자공양``은 낙태를 행한 자의 죄의식의 소멸과 치유를 1차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처럼 한일불교는 전통적인 생명관과 문화적인 차이로 인하여 낙태아에 대한 생명윤리 의식 또한 그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곧 생명윤리는 각 나라의 역사적·사회적 관계 속에서 조망되어야 하며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정립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本稿は落胎に關する佛典の基本的である敎理を土台にして今日の韓日兩國の佛敎界で新しく照明を受けている「胎兒靈駕薦度齋」と「水子供養」を中心に生命文化の傳統と現況, そして接近方法などを生命倫理の觀点で比較論的によく見たのだ. 韓國佛敎の「胎兒靈駕薦度齊」と日本佛敎の「水子供養」は落胎兒に對する追慕供養と落胎を行った信徒の罪業を消滅させるための目的に近來に導入したのだ.ところが, 落胎(姙娠中絶)になった胎兒(流産を含み)のみを對象にして, 落胎兒(死者)とその産母(生者)を獨立的な個體(二元的な存在)ではない一つの個體(一元的な存在)として把握するという点で生命倫理の新しい觀点を提示するのだ. しかし「胎兒靈駕薦度齊」は靈駕の冥福を1次的な目的を置いているのに比べて, 「水子供養」は墮胎を行った者の罪意識の消滅と治癒を1次的な目的にする. このように韓日佛敎は傳統的な生命觀と文化的な差によって落胎兒に對する生命倫理の意識もその實際內容においては差を見せている. これはすなわち生命倫理は各國の歷史的·社會的な關係の中で眺望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しこのような土台の上で定立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意味する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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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緣起와 自性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龍樹의 입장

        윤종갑 범한철학회 2006 汎韓哲學 Vol.40 No.1

        The purpose of this treatise is that Nāgārjuna will often be seen whether define pratītyasamutpāda and svabhāva however. Why pratītyasamutpāda and svabhāva are incompatible again will often be seen. Nāgārjuna is that grasps pratītyasamutpāda by apekṣā. That is, it grasps as relations of interdependence. Therefore, pratītyasamutpāda and svabhāva are inconsistency relations at each other. It is of which pratītyasamutpāda and svabhāva cannot consist after carrying out the premise of the Realism-viewpoint. Moreover, phenomenon-existence and a view sense-reason cannot be realized, either. Nāgārjuna used prasaṇga, in order to prove this. It is a proof sake about pratītyasamutpāda and svabhāva being contradictory at each other, uses logic of emptiness such as denial of dilemma, infinite-return, movement, and time. If the premise of the svabhāva is carried out after all, no theories and noted titles can be realized It is denial to the substantiality of all existence which Nāgārjuna tended to show conclusively. It is made to return by emptiness, and substantialism-thinking is taken and removed. Consequently, a notional name and actual existence understand fabrication. If this is recognized, it comes to have Spiritual enlightenment which comes to understand a thing with phenomenal fact true as it is. 緣起說은 불교가 불교일 수 있는 제1근거로서 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교리이다. 龍樹(Ngrjuna)는 緣起를 ‘相依’로 해석하여 연기와 자성의 양립 불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이 글은 용수가 연기와 自性을 어떻게 정의하며, 어떠한 논리적 근거에서 연기와 자성이 양립할 수 없다고 하는지를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용수는 연기를 ‘A는 B에 의존하고 B는 A에 의존’하는 相依(apek)의 관계로 파악하여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만들어지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 자성(svabhva) 개념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자성을 전제한다면 說一切有部(Sarvstivda)가 주장하는 4가지 연(四緣)은 물론 일체의 현상적 존재와 개념적 사유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용수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프라상가(prasaga) 논법에 의해 이분화와 딜레마, 무한소급, 운동과 시간의 부정 등 다양한 주제와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취급하는 주제와 방식이 아무리 많을 지라도 결국 그의 비판의 초점은 자성을 상정한 입장에서는 어떠한 학설도, 어떠한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용수가 자성의 부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제 요소의 실체성을 空으로 환원시켜버림으로써 실체론적인 사고 그 자체를 지양하는 데 있다. 그 결과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 관행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명칭과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에 불과하며, 이를 자각함으로써 비로소 현상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지혜의 눈[반야바라밀]을 갖게 된다.

      • KCI등재

        대승불교의 진리관-龍樹의 空과 二諦說에 대한 中觀學派와 唯識學派의 논쟁을 중심으로

        윤종갑 대한철학회 2010 哲學硏究 Vol.116 No.-

        The two school Mādhyamika and Yogācāra act as a representative of Mahāyāna Buddhism in India. But the two school disputed with each other insisting śūnyatā-vāda and vijñaptimātravāda separately. To introduce the disputation shortly is as follow. Nāgārjuna explained the world and truth by two truth theories(二諦說) which carry out truth of a word and the dimension(spiritual enlightenment) which is absolute(ultimate) to it being lokasaṁvṛtisatya(世俗諦) about the truth which can be expressed verbally, and which is phenomenon-like (everyday) at paramaarthasatya(勝義諦). By the way, lokasaṁvṛtisatya and paramaarthasatya are actually distinction of the recognition which is not an ontological distinction. That is, lokasaṁvṛti(世俗) is paramaartha(勝義) as it is the time of seeing by the eyes of those who have realized. The two truth theories of Nāgārjuna was developed logical more precisely by his successors. With an everyday language, the position of Candrakīrti(月稱) that it cannot be expressed as the position of Bhāvaviveka(淸辨) that paramaarthasatya can be expressed logically is opposed to each other, and dissociates by Svātantrika(自立論證派) and Pārsagika(歸謬論證派). Confrontation of Svātantrika and Pārsagika is the dispute about the ability of s which is the highest truth to be proved logically. The Pārsaga of Candrakirti thinks that people exist truly, and is because it claims not existing in the world where a favorite thing is actually actual. However, Bhāvaviveka proved Sunyata(空性)을 positively based on the reliance to language and logic. Also the mokṣa of Mādhyamika is not recovery of original condition of vijñapti which is pure in itself as Yogācāra saying, as well as obtaining a thing which is dravya-sat as Sarvāstivādin saying. The mokṣa of Mādhyamika means a condition of liberated from karma and pains through extinction of prapañca and discrimination by realizing the real aspect of all dharma which is said by pratītyasamutpāda, prajñapti, niḥsvabhāva, śūnya, madhyamāpratipad.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을 성취하여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불교의 진리관은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 해탈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대승불교의 확립자인 龍樹(Nāgārjuna)는 붓다의 無我說과 中道說에 입각하여 아비달마불교의 法有說(三世實有 法體恒有)을 空과 二諦說에 의해 비판적으로 종합함으로서 대승불교의 진리관과 깨달음의 길을 논리적으로 체계화 하였다. 그 결과 공과 이제설은 대승불교의 진리관과 깨달음의 길을 대표하는 교리가 되었다. 용수에 의해 확립된 공과 이제설은 대승불교의 근간이 되어 이후 공과 이제설에 바탕한 中觀學派(Mādhyamika)가 형성되며, 또한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한 唯識學派(瑜伽行派, Yogācāra)가 나타나 ‘공과 이제설’을 둘러싸고 두 학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본 논문은 용수의 공관과 이제설의 중심 내용을 살펴본 후, 이에 대한 중관학파와 유가행파의 논쟁이 어떻게 치루어졌는지, 또 그 비판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용수는 『반야경』의 공사상을 계승하여 공이 緣起・中道・假名・無自性임을 이제설의 진리관에 의거하여 밝히고 있다. 이러한 용수의 이제설은 淸辯(Bhvaviveka)과 月稱(Chandrakīrti)을 비롯한 중관학파에 의해 보다 체계적으로 다듬어져 대승불교의 진리관으로 수용되었다. 중관학파의 이제설의 핵심은 모든 존재는 자성을 갖지 않은 공한 것으로, ‘무자성 공’을 주장하는데 있다. 그러나 유식사상에 근거하여 識과 空性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가행파는 중관학파의 ‘무자성 공’을 궁극적인 진실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즉, 일체법이 ‘무자성 공’으로 단지 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극단적인 허무론이며 공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惡取空이라고 중관학파를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유가행파의 비판에 대해 중관학파는 승의로서 識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연기설에 어긋나며, 나아가 승의로서 공성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허무론이라고 반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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