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펼치기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 KCI등재

        버클리大學 아사미文庫 所藏 六臣墓碑 拓本을 통해 본 金時習 六臣墓 造成 傳說의 定着 過程

        심경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1 어문연구(語文硏究) Vol.39 No.2

        This paper is to interpretate and introduce the rubbed copy of the epitaph of Dead Six Faithful Retainers(死六臣) housed in the Asami Collection at U.C. Berkeley, and to inquire into the tradition that Gim Siseup(金時習) buried their bodies. It was in the year of 1747 that Jo Gwanbin(趙觀彬) mentioned the tradition for the first time, as he was commissioned to write an inscription by Min Baekheung(閔百興), Hong Inhan(洪麟漢) and Sim Wu, when King Yeongjo(英祖) ordered them to erect a tombstone at the grave of faithful retainers. Henceforth, the story spreaded widely in the mid of 18th century, which proves the fact that the tradition formed around the time Jo Gwanbin composed the inscription. It is hard to prove that Gim Siseup carried the bodies of faithful retainers on his back and buried them at Noryang. But the noticeable is the fact that the common people at that time believed that there would be no one but Gim, Siseup, if someone had buried them and erected a monument at their graves. 本稿는 미국 버클리대학 동아시아도서관 淺見文庫 소장 六臣墓碑의 拓本을 판독하여 소개하고, 아울러 金時習이 六臣墓를 조성하였다는 傳說이 형성된 과정을 고찰하였다. 英祖가 1747년에 육신묘에 비를 세우도록 명하고, 愍節祠의 有司로 閔百興, 洪麟漢, 심우 등이 趙觀彬에게 碑文을 청하자, 조관빈은 김시습이 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시습의 육신묘 조성 전설은 이후 成大中의 『靑城雜記』에서도 다루어지는 등, 18세기 중엽 이후 널리 확산되었다. 육신묘와 관련된 김시습의 전설은 조관빈이 「鷺粱六臣墓碑」를 작성할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시습이 과연 사육신의 시신을 업고 가서 노량진에 묻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성대중이 말했듯이, 육신을 묻어 주고 무덤마다 푯대를 세운 사람은 김시습이 아니면 그렇게 할 사람이 없었다고 사람들은 믿어 온 것이다.

      • KCI등재후보

        정조의 문체정책과 제술부과

        심경호 진단학회 2016 진단학보 Vol.- No.127

        In late Joseon period, King Jeongjo on the one hand kept in mind relations with the huge empire of the Ching Dynasty established by Emperor Kangxi and Qianlong, and on the other hand made an effort to establish new standards of literature, scholarship and politics. He regarded the appreciation of Confucianism to be the government's priority. He established Gyujanggak (奎章閣 Royal Library) to enrich culture and made the metal type Imjin (壬辰), Chŏng’yu (丁酉) and Saengsaeng (生生) to print various sorts of books. In addition, he also compiled many sorts of collections of excerpts with selected civil officials, and he planned to edit “the complete works” of Zhu Xi. He emphasized unity of knowledge and action both in private cultivation and political practice, and he aimed to promote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 However, there was controversy over King Jeongjo’s excessive testing of selected civil officials (抄啓文臣) and students of the National Confucian Academy (成均館) through the composition examination (製述), which tested the ability to write parallel prose (四六文). King Jeongjo believed that he could change the writing of the civil examination to deal with actual social matters, but this was severely criticised by Jeong Yakyong, who had absorbed the academic nourishment supplied by King Jeongjo. King Jeongjo wished to lead discussions on the current affairs of the state by establishing the composition examination, and herein lies a deep contradiction between his politics and academic ideals. 정조는 영조를 이어 18세기 조선의 정치, 학술, 문화, 과학의 모든 분야에 혁신의 기운을 고취시켰다. 정조는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의 방향을 읽고, 각 분야의 혁신에 필요한 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군주가 숭유중도의 이념을 각 방면에서 실천한 것은 국체의 안정을 도모했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면서도, 현실인식의 평면화, 지향이념의 협소화, 문화 규모의 왜소화, 학문방법의 고답화를 초래할 우려도 있었다. 따라서 인식, 지향, 규모, 방법은 제왕 정조의 정치와 학술사상을 고찰할 때 주목해야 할 핵심 키워드이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초계문신들에게 제술, 그것도 사육변려체의 제술을 지나치게 강요했다. 심지어 정약용은 강요된 사육변려체의 제술을 모두 ‘후회를 기록하는’ 『冽水文簧』 3책에 몰아 두었다. 정조는 과거지문을 ‘就實之學’으로 혁신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기획은 정조의 학술사상에서 가장 자양분을 많이 흡수했다고 할 수 있는 정약용에 의해 통렬하게 비판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제술을 통해 당면의 현실 문제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논의를 형식 우위의 문체로 담아내게 했다는 사실, 여기에 정조의 정치 및 학술 이념과 방법 사이의 불균형이 숨어 있다.

      • KCI등재

        The Fundamental Studies Concerning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and the Associated Compilation of Texts with Collected Commentaries during the Reign of Sejong

        심경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Vol.22 No.1

        This study explores the level of sohak (minor learning) and philology, or fundamental studies, related to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which was prevalent during the Sejong period, and examines how this level was reflected in the nature of annotated editions (of the Classics) and the way in which works became classified as Classics via the publication of collected commentaries. It also looks at the fact that the parallel structure was considered an important factor when compiling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which led to this parallel structure being adopted in Korean verses too. In terms of compilation methodology, the books published during Sejong’s reign were all based on a number of specific principles, but we can find a variety of different features in the compilation of the different books. This study closely examines such differences by investigating a number of methodologies used in compilation of the Seokbo sangjeol, the Worin cheongang ji gok, the Worin seokbo, Hunmi jeongeum haeryebon, Yongbi eocheon ga, and so many publications during the Sejong’s reign.

      • KCI등재후보

        박지원과 이덕문의 文 교환에 대하여 - 박지원의『산해경』 東荒經 補經과 이덕무의 注에 나타난 지식론의 문제와 훈고학의 해학적 전용 방식, 그리고 척독 교환의 인간학적 의의

        심경호 한국한문학회 2003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31

        Regarding the exchange of humorous letters between Pak Chi-won and Yi dok-mu- Humanistic meaning of perspective on learning, humorous diversion of commentaries, and exchange of letters presented in Pak Chi-won's <Sanhaijing> 'Donghwangjing' 'Bogyong' and Yi Dok-mu's 'Chu : commentary'Sim Kyung-ho 李德懋가 26세(1969년)때 『耳目口心書』6편을 이룬 뒤 朴趾源이 그 책을 빌려 다 열람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해학적 내용의 尺牘을 교환하였다. 그리고 박지원은 『산해경』東荒經 補經을 짓고 이덕무는 주(注)를 지었다. 『산해경』보경과 주는 18세기 지식론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는 戱文으로, 한문산문에 訓學의 방법을 轉用하는 전통을 형성하였다. 또한 그들의 척독 교환은 知人들 사이의 흉허물없는 對面인 晤言을 보완하고 촉발하는 계기로서 기능하였다.이덕무는 ‘귀로 들음(耳聞)’을 중시하였는데, 그것은 ‘道問學’과 ‘尊德性’의 두 공부 가운데 ‘도문학’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이덕무의 識解博聞强記를 일정하게 평가한 것이나, 그 자신도 객관사실의 해부적 묘사와 실증적 분석에 중점을 두었던 것도 같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희문을 통하여, 그들이 인간과 역사(현실)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유력한 방법으로 博學의 가치를 재평가한 지향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산해경』등 자부의 서적들을 널리 읽음으로서 사유세계를 확장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 KCI등재

        고려 말 조선 초 문인-지식층의 분운(分韻)에 대하여

        심경호 국문학회 2013 국문학연구 Vol.0 No.27

        근대 이전의 문인-지식인들은 시문을 통해서 지적 교류를 행하고 당파와 집단을 형성하였다. 본고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신흥 사대부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면서 문학적 모임에서 분운을 사용한 예들을 살펴보았다. 분운은 지식층의 시회와 소집에서 상호 간의 유대와 작시 수련을 위해 매우 중시되었다. 한국에서는 그 관습이 대개 원나라 강점기의 고려 중엽에 발아하여 고려 말에 과거제가 정기적으로 실시되면서 문인-지식인 집단이 연속성을 지니면서 문화적, 정치적 세력을 구축하던 때에 극성하였다. 고려 중엽에는 과거에서 과부(科賦)가 매우 중시되어, 문인들이 즉석에서 평측 상간의 여러 운자들 활용하는 것을 평소 훈련해 두었으므로 분운의 즉석 창작이 가능한 문인-지식층이 성립하였다. 이제현이 신예의 전송연에서 이루어진 분운 연장의 시축에 서문을 쓴 것은 작시가 자유자재한 문인-지식층이 그 시기에 두텁게 존재하여, 문학과 정치의 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징표이다. 본고에서 다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외직으로 나가는 관료나 과거 후 귀근하는 유생에게 전별연을 베풀면서 분운 연장하는 일이 정착되었다. 이 분운의 방식은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 (2) 고려 말에는 좌주를 위한 연회에서 분운 연장하는 사례가 있었다. 좌주문생의 명족회는 조선시대에 회시 제도가 정착되면서 축소되었다. (3) 고려 말에는 승려를 중심으로 분운 연장이 이루어진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조선전기에 배불론이 대두되면서 승려를 중심으로 하는 분운 연장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4) 고려 말, 조선 초에는 국왕을 호종하는 문신들이 국왕을 위해 송축한 시에 호종신들이 분운하는 사례가 있었다. 송축시를 이용한 분운 연장은 조선 전기 이후 찾아 볼 수 없다. (5)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내외간상을 당하여 시묘 생활을 할 때 그것을 기념한 시를 만들고 또 분운 연장한 시를 시권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중기 이후로는 문인-지식인들이 시회와 시사를 갖는 일이 많아져, 후기에는 대단히 번성하였다. 이때에는 분운 구호와 분운 연장 등이 더욱 많았을 것이다. 분운은 문인-지식층이 문학 양식과 기호를 공유하는 장(場)의 의미가 문학 실질 내용보다 더욱 큰 의미를 지녔다. It was frequently occurred that literati in pre-modern period wrote poems to broaden the intellectual interchange and to form political groups. This paper is to survey the cases that literati during the late Goryeo-early Joseon period performed Bun-un(分韻) at literary coteries' activities. Bun-un was highly regarded as it was frequently perfomed at literary coteries' activities. It was also useful to practice verse writing. In Korea, the Bun-un tradition began around the middle of Goryeo, and prevailed in the late Goryeo as Gwa-geo(科擧, civil service literary examination) started to be fulfilled regularly. It became very usual consequently that they exercised to rhyme out poems readily as Gwa-bu(科賦) was highly valued at Gwa-geo, and as a result groups that could write and enjoy poems using Bun-un were naturally formed. The preface composed by Lee Jehyeon(李齊賢) for Si-chuk(詩軸, a roll of pomes) of Bun-un Yeon-jang(分韻聯章) suggests that not a few such groups existed at that time and they played a important part in political and literary activities as well. To summarize this paper is the same as follows. (1) In the late Goryeo-early Joseon period, to perform Bun-un Yeon-jang at farewell parties for those who went local government posts or returned home after finishing Gwa-geo, was regularized and it lasted until the late Joseon period. (2) In the late Goryeo period, there were cases that Bun-un Yeon-jang was performed at parties for Jwa-ju(座主, examiner), but Myeongjokhoe(名簇會) by Jwa-ju and Mun-saeng(門生, pupil) began to decrease as Huesi(會試) system was established in Joseon dynasty. (3) In the late Goryeo period, there were also cases that Bun-un Yeon-jang was performed by Buddhist monks, but these cases disappeared as religious oppression for Buddism began at the beginnig of Joseon dynasty. (4) In the late Goryeo-early Joseon period, there were cases that government officials wrote poems using Bun-un keeping harmony with poems in praise for kings, but these cases disappeared since early Joseon period. (5) In the late Goryeo-early Joseon period, there were also cases that one edited a collection of poems or of Bun-un Yeon-jang while visiting the tombs of his father or mother since he or she had been dead. From the middle of Joseon dynasty, literati had lots of chances to exercise Bun-un as literary coteries' activities increased, and it remarkably flourished in the late Joseon dynasty. It is assumed that there would be lots of cases of Bun-un Gu-ho(口呼) and Yeon-jang at that period. It is notable that literary coteries' activities practicing Bun-un had lots of meaning more than they appeared.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