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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初期의 정치적 변화와 士林派의 등장

          김훈식(Kim Hoon-sik)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11 한국학논집 Vol.0 No.45

          15세기 후반 成宗 무렵 조선왕조에는 士林派로 불리는 새로운 지식인 집단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고려말기까지 소급하였고, 그 결과 鄭夢周·吉再·金叔滋·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道充論이 정립되었다. 이 도통론을 받아들인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처음부터 사림파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학문·사상을 이해하였다. 근·현대의 유학사 인식 역시 이 도통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조선초기 유학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이러한 인식이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官學派가 조선초기의 학계를 지배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건국을 전후한 시기부터 관학파와는 다른 學風·文風을 가진 유학자 집단 혹은 유학자들이 존재했다는 인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흔히 이러한 유학자들을 가리켜 '節義派'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절의파'를 계승하는 유학자들이 성장하여 성종 무렵에는 훈구파와 대립하는 학문·정치세력, 즉 사림파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글은 절의파의 계기적인 발전 속에서 사림파의 등장을 설명하기 보다는 15세기 후반기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사림파 등장의 계기를 찾고자 하였다. 세조의 즉위 이후 관학파는 훈구파로 변화하였다. 그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이 절의의 문제였다. 관학파는 절의라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면서 새로운 왕조의 관료윤리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 이후 훈구파로 변화한 집권세력은 더 이상 절의라는 가치를 강조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절의를 부정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종 때 사림파로 불리는 한 무리의 새로운 유학자 집단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절의라는 가치를 내세워 훈구파에 맞섰고, 그 절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도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들의 학문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통을 정립할 때 그들이 선택한 인물이 역성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불사이군'의 충절을 실천했던 정몽주와 길재였다. 역성혁명 이후에 충절을 실천한 인물이 길재 한 사람 뿐은 아니었겠으나 마침 길재는 김숙자의 스승이었고, 김종직은 김숙자의 아들이었다. 정몽주와 길재 사이의 학문적 관계는 권근과 길재 사이의 관계에 비해 훨씬 미약한 것이었지만 절의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정몽주에서 길재로 이어지는 계통이 설정되었다. 이처럼 사림파의 戀痛命은 실제 학문·사상의 繼起的 發展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5세기 후반기 이후 사림파의 정몽주·길재에 대한 再解釋을 통해 성립한 것이었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문·사상을 계승한 학자들이 사림파로 결집한 것이 아니라 사림파로 결집한 학자들이 정몽주와 길재를 자신들의 학문적 선구로 설정했다는 것이 훨씬 더 사실에 가깝다. In the late 15th century, the reign of King Seongjong (成宗), A new group of intellectuals called Sarimpa (士林派) appeared. They traced their academic origin from the late Koryo dynasty. As a result, they founded Dotong (道統), the genealogy of their school from Jeong-Mongju (鄭夢周) succeded by Gil-Jae (吉再), Kim-Sukja (金叔玆), Kim-Jongjik (金宗直). The Confucian scholars embraced Dotong unsderstood the ideas and studies of Chosun dynasty with Sarimpa as the center. Recently,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Guanhakpa (官學派) was the main stream of Confucianism of the early Chosun dynasty. However, there are an opinion that there were a group of Confucian scholars called Jeoleuipa (節義派) from the beginning of Chosun Dynasty. Jeoleuipa was different with Guanhakpa in the aspects of academic traditions and the style of a writing. The scholars succeeding Jeoleuipa became Sarimpa, and made confrontation with Hungupa politically and academically. This paper is about the advent of Sarimpa in the late 15th century. The this writer tried to explain the cause of the appearance of Sarimpa from the political situation and changes of that time not from the genealogy of them. The reign of king Sejo, Guanhakpa changed to Hungupa 世祖 (勳舊派). Guanhakpa had put emphasis on the word 'Jeoleui (節義)', which means integrity and loyalty. Guanhakpa adopted Jeoleui as the ethics of government official. However, in the process of King Sejo's accession Guanhakpa abandoned the value of Jeoleui themselves so that they couldn't emphasize Jeoleui anymore. A new group of Confucian scholars appeared in the reign of King Seongjong. They advocated the value of Jeoleui and confronted with Hungupa. They asserted the necessity of studying Dohak (道學) and tried to establish the genealogy. They chose Jeong-Mongju and Gil-Jae as their pioneers. Both Jeong-Mongju and Gil-Jae were the renowned scholars resisted establishment of Chosun dynasty and put Jeoleui into practice by death. And Gil-Jae was teacher of Kim-Sukja whose son was Kim-Jongjik, the leader of Sarimpa. Although Jeong-Mongju and Gil-Jae had week relationship with each other, Sarimpa connected them in the genealogy in the aspect of practicing Jeoleui. At this point, Dotong, the genealogy of Sarimpa didn't reflect the advance of Sarimpa's ideas and studies but was established from the reinterpretation of Jeong-Mongju and Gil-Jae. It has to be said that Sarimpa set up Jeong-Mongju and Gil-Jae as their pioneers ex post fac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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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와 전망

          김훈식 ( Hun Sik Kim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2 嶺南學 Vol.0 No.22

          The Theory of Dotong(道統) has reigned The understanding of Confucian history in Choseon Dynasty. Therefore, the existing studies of Kim Going-pil(金宏弼), an Confucian scholar in 15thcentury, has been strongly affected by the Theory of Dotong. This misunderstanding about Kim Going-pil was due to lack of critical apparatus. Recently there are some new researches interpreting the life of Kim Going-pil and his acadmic achivements in different way from the Theory of Dotong. This article is to summary existing studies and seek the way to overcome the Theory of Dotong for understanding Kim Going-pil. The existing studies about Kim Going-pil has called his thought as Moral Philosophy(道學) and called him as the progenitor of Moral Philosophy. However this view has caused the problem of subjectivity. Since the concept of Moral Philosophy had been existed before Kim Going-pil, and it can be interpreted in various ways. Therefore, this article would suggest that his thought should be interpreted in historical context of Moral Philosophy. 『SoHak(小學)』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subject to explain Kim Going-pil`s Moral Philosophy. The point is the difference between his 『SoHak』 and the 『SoHak』 before his study. 『SoHak』 had been emphasized as textbook for KwaGeo(科擧) and for children`s education. In opposition, Kim Going-pil`s 『SoHak』 had no relationship with KwaG대 and he studied 『SoHak』 for his lifetime. 『SoHak』 had so large part of Kim Going-pil`s study that most researches on him leaned toward 『SoHak』. In the result of those biased studies, Kim Going-pil has been seen that he only focused on moral training(修己) instead of governing(治人). But, this article insist of the view that 『SoHak』 and 『DaeHak(大學)』 were connected in his Moral Philosophy organizationally would be appropriate. Kim Going-pil`s personal relations are also useful way to understand his academic and political position in history of Chosun Dynasty. The relationship between Kim Going-pil and Kim Jong-jik(金宗直), his master, is very important part to understand Kim Going-pil. Most researches about them has focused on the differences rather than common ground between them. And the researches have insisted that those differences created conflict. But recent studies has revealed that the conflict between Kim Jong-jik and Kim Going-pil made progress in The Theory of Chulcheo(出處) which is core concept of Neo-Confucianism. Meanwhile, Jo Kwang-jo(趙光祖) has been regarded the only disciple of Kim Going-pil. Besides him, however, there were a few more literary men who had to be noticed. The researches on Kim Going-pil`s literary men are very insufficient. This paper would review advanced researches on Kim Going-pil`s life and studies, and suggest that follow-up studies find out the new meaning of Kim Going-pil in Confucian history of Chosun-Dynasty. 사에 대한 인식은 더욱 그러하며, 15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金宏弼에 대한 인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김굉필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도통론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그 연구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자료의 한계라는 근본적인 제약 때문이다. 이글에서는 김굉필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면서 그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김굉필을 연구한 거의 모든 글은 그의 학문을 道學이라고 부르며, 그가 도학을 처음으로 정립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도학 역시 성리학이라는 범주 속에 포함되며, 김굉필 이전에도 도학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제까지는 주로 도학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러나 먼저 도학의 개념을 규정하고, 이 개념에 맞추어 김굉필의 학문·사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한계가 있다. 도학의 개념 규정이 주관적일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이 보다는 15세기에 도학이라는 개념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개념이 역사적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김굉필의 도학을 살피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김굉필의 도학에 관한 설명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내용이 『小學』공부이다. 그러나 『小學』을 중시한 것은 이미 성리학 도입 초기부터이다. 따라서 김굉필의 『소학』공부가 그 이전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기왕의 연구를 통해 김굉필 이전의 『소학』은 어린 아이들이 읽어야 하는 책으로, 혹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으로 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반해 김굉필의 『소학』공부는 과거공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또 평생의 공부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김굉필의 『소학』공부가 그 이전과 다른 점이 이 정도에 그치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차이를 밝혀나가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김굉필의 도학에서 『소학』공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다보니 대부분의 연구는 그 방면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 결과 김굉필은 성리학 공부의 두 가지 측면인 修己와 治人 가운데 수기에만 관심을 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최근 김굉필의 도학에서 『소학』과 『대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구가 이루어져 그의 학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김굉필에 대한 연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사실이 그의 스승인 金宗直과의 관계인데, 대부분의 연구는 그 두 사람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학문적 차이나 정치적 견해의 차이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이 갈등을 겪게 되었다고 이해한다. 최근의 연구는 이 두 사람의 갈등 속에서 出處論이 정착되어가는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출처론은 성리학의 이념체계 속에서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 이념에 대해 주목한 연구는 거의 없다. 성리학 도입 이후 출처론이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출처론의 전개 과정 속에서 김굉필의 출처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피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김굉필이 조선시대의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門人에게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왕의 연구는 그의 문인 가운데 趙光祖에게만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 외에 거론되는 문인으로는 김안국 정도를 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제 김굉필의 문인 가운데는 이들 이외에도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에 대한 연구 역시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있다. 김굉필의 문인과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그의 문인으로 거론되는 인물들 가운데 師弟관계를 확인하기 힘든 인물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김굉필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는 <寒氷戒>와 관련이 있는 潘佑亨이라는 문인은 자세한 검토가 필요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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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順天刊本’ 『景賢錄』의 편찬과 내용

          김훈식(Kim, Hun-Sik) 부산경남사학회 2013 역사와 경계 Vol.86 No.-

          寒暄堂 金宏弼(1454∼1504)은 조선시대의 유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나, 그가 남긴 글은 매우 적다. 김굉필의 글을 모은 『景賢錄』에서도 그의 글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경현록』은 다른 사람들이 그에 관해 쓴 글을 모은 實紀類의 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굉필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이 책뿐이다. 『경현록』이 김굉필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글로 채워져 있다면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책이 편찬되었는지 세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김굉필에 대한 어떤 연구도 이를 실증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경현록』은 2권 1책의 ‘順天刊本’과 6권 3책의 ‘道東刊本’의 두 가지 版本이 있다. 이 두 판본은 새로운 내용이 덧붙여진 것 이상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김굉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판본을 비교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글은 우선 ‘순천간본’의 편찬과 간행을 살펴 그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1563년에 순천부사로 부임한 李禎이 『경현록』을 처음 편찬하였으나, 이후 이황의 의견에 따라 대폭 수정하였다. 그 두 사람이 편찬한 내용, 즉 ‘龜巖定本’과 ‘退溪定本’을 합쳐 1565년 순천에서 간행한 책이 ‘순천간본’ 『경현록』이다. 이 ‘순천간본’의 가장 큰 특징은 上卷은 김굉필에 관한 내용을, 下卷은 曺偉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다는 점이다. ‘구암정본’과 ‘퇴계정본’은 그 내용이 서로 다른 부분이 꽤 있었다. 특히 ‘구암정본’에 온전하게 실렸던 〈家範〉이 ‘퇴계정본’에는 실리지 않았다. ‘순천간본’에는 〈가범〉에 대한 간략한 언급만 있다. 그 결과 〈가범〉을 통해 살필 수 있는 김굉필의 모습을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정에 의해 ‘순천간본’이 간행된 이후에도 『경현록』은 몇 차례에 걸쳐 重刊되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판본으로는 박민헌의 甲戌중간본, 이수광의 戊午중간본, 이시만의 乙丑중간본이 있다. 『경현록』은 중간될 때마다 그 내용에 약간씩의 변화가 있었으며, 간행되는 장소도 바뀌었다. 이정이 처음 『경현록』을 간행한 곳은 순천 관아였다. 그러나 이시만이 을축중간본을 간행하기 이전부터 이미 옥천서원에서 『경현록』을 간행하고 있었다. 순천 관아에 있던 판본이 어느 시점에 옥천서원으로 옮겨졌고, 이후는 옥천서원에서 『경현록』을 간행했다. Although Kim Goengpil is an important figure in Confucian history of Chosun dynasty, there are only few remaining writings of him. Kyunghyun-Rok is almost the only text providing us the way to understand him. However, a greater part of Kyunghyun-Rok is comprised of writings about him which were written by others, not by Kim Goengpil himself. Therefore, we need to figure out writers and process of compiling Kyunghyun-Rok first. Then we can understand Kim Goengpil properly. Kyunghyun-Rok has two major editions, Suncheon Edition and Dodong Edition. Firstly, this article would focus on Suncheon Edition and trace back the process of compiliation. The initial Kyunghyun-Rok were published by Lee Jeong in 1563. And it was revised in opinion of Lee Hwang. The former is called Guam Edition, the latter is called Toegye Edition. And those two were merged into Suncheon Edition in 1565. The most important difference between Guam Edition, the first edition of Kyunghyun-Rok and Suncheon Edition is in their contents. Guam Edition contained Kim Goengpil’s thought about the family rules. But, Lee Hwang regarded the contents on family rules are not necessary for describing Kim Goengpil as a moralist. So, importance of the contents about family rules was reduced significantly in Suncheon Edition. As appears by this case, the stance of compiler had great effect on each versions of Kyunghyun-Rok. Add to this, it’s restricted sources to approach Kim Goengpil caused many misunderstanding. That is why this article tries to figure out the process and the subjects of compi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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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에 대한 조선시대의 평가와 그 의미

          김훈식(Hun Sik Kim)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6 동방학지 Vol.0 No.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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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 韓ㆍ中 『內訓』의 여성윤리

          김훈식(Kim Hun-Sik) 부산경남사학회 2011 역사와 경계 Vol.79 No.-

          『內訓』은 1475년 仁粹大妃 韓氏가 편찬한 여훈서이다. 인수대비는 여러 시기의 다양한 형태, 다양한 내용의 글 가운데서 여성윤리와 관련이 있는 것들을 모아 이 책을 편찬하였다. 이 보다 70여 년 전에 명나라의 文皇后 徐氏 역시 같은 제목의 책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이 두 책을 구분하기 위해 前者는 『大妃內訓』, 後者는 『皇后內訓』이라고 하였다. 이 두 책은 그 편찬체제나 서술 방식이 전혀 다르며, 또 인수대비는 문황후의 책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책에 담겨있는 여성윤리의 기본 내용은 정확하게 일치하였다. 이 두 『내훈』이 보급되기 이전의 대표적인 여훈서는 『女誠』였다. 『여계』에 담겨있는 여성윤리는 陰陽尊卑論과 敬順論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敬順은 남편의 권위에 복종하는 마음가짐과 행동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다. 음양존비론은 여성이 이 경순이라는 도덕규범을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논리이다. 남녀를 자연의 양과 음에 배당하고, 그 양과 음의 본성을 강유, 존비로 설명함으로써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을 정당화한다. 두 『내훈』 모두 이 음양존비론과 경순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두 『내훈』은 모두 『여계』의 여성윤리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이미 『소학』을 통해 새로운 여성윤리, 즉 德性論이라는 윤리사상과 節義論이라는 도덕규범을 포함하는 여성윤리가 제시되었고, 인수대비와 문황후는 이 새로운 여성윤리를 보급할 여훈서를 편찬하고자 하였다. 여성윤리로서의 절의론은 아내가 남편에게 지켜야 할 의리가 守節과 內助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여성이 이러한 의리를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을 여성이 갖추고 있는 도덕적 본성, 즉 德性에서 찾는다. 두 『내훈』 모두 여성의 도덕적 실천은 여성 자신에 내재하는 도덕적 본성의 실현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그 내용에서 言行을 비롯한 여성의 修身에 관한 부분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또 절의를 여성들이 실천해야 하는 도덕규범으로 제시하면서, 그 절의의 내용 가운데서 수절에 관한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내조에 관한 내용에만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두 『내훈』은 공통적이다. 이러한 특징은 『내훈』을 편찬한 두 사람이 염두에 두었던 가장 중요한 보급대상이 왕실의 여성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Naehun』(內訓) is the book of women ethics, published by Queen Dowager Insu(仁粹大妃) in 1475. She compiled the book gathering various books related to ethics of women. To distinguish the book of same title written by Queen Seo(皇后 徐氏) of Myung-Dynasty, the former called 『DaebiNaehun』(大妃內訓), the latter called 『HuanghuNaehun』(皇后內訓). Queen Dowager Insu wasn’t aware of the book of Queen Seo, written 70 years before her book. Also two books were totally different in terms of the compilation system and the narrative. Although the difference between two books, however, the basic information of two books on ethics of women were exactly same. Before the publication of those two books, there were 『Yeogye』(女誡) for book of women ethics. The contents of 『Yeogye』 were characterized in Theory about YinYang(陰陽論) and Theory about Obedience(敬順論). Obedience is the concept indicating the obedience of women to their husbands. Theory about YinYang explains the appropriateness of practicing obedience as their moral standard to women. Theory about YinYang regarded men as Yang, women as Yin. The nature of Yang is strongness and nobility, and the nature of Yin is weakness and baseness. This assumption justifies the obedience of women to their husbands. The two 『Naehun』 adopted the concepts of Yin Yang and Obedience. But, they weren’t ended up at the level of 『Yeogye』 in the aspect of the ethics of women. Because in the times of 『Naehun』, the new ethics of women were suggested already by 『Sohak』(小學). The ethics of women written in 『Sohak』 contained Theory about Moral nature(德性論) and Theory about Fidelity(節義論). Queen Dowager Insu and Queen Sea of Myung-Dynasty intended to spread this new ethics of women to the women of royal families by publishing their books. Both 『Naehun』 emphasizes fidelity as the nature of women. fidelity can be translated to the loyalty of women to their husbands. And Theory about Fidelity contains the concepts of maintaining chastity and giving assistance to husband. Between maintaining chastity and giving assistance to husband, 『Naehun』 put emphasis on the latter in common. It’s why the main readers of those book were women of loyal families. Theory about Moral nature is the basis of justification of Theory about Fidelity. In Theory about Moral nature, the loyalty of women is regarded as their nature. In the context of 『Naehun』, for women, the practicing fidelity is the manifestation of moral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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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조선시대의 길재 추숭과 출처의리(出處義理)

          김훈식 ( Hun Sik Kim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4 嶺南學 Vol.0 No.26

          길재는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추숭된 흔치 않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5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길재에 대한 추숭이 한결 같지는 않았다. 추숭의 주체와 방법, 추숭의 내용 등은 시기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15세기의 길재는 ‘孝子吉再’이자 ‘忠臣吉再’였다. 16세기 이후 士林들은 道學者로서의 吉再像을 만들고 키워갔다. 이제 길재는 ‘충신 길재’일 뿐만 아니라 ‘道學者吉再’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무게 중심은 점차 후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길재를 도학자로 그리기 위해 도통론을 비롯한 새로운 내용들이 덧붙여졌다. 그 새로운 내용 가운데 하나가 출처의리였다. 사림은 길재를 추숭하면서그가 恭讓王2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사실을 주목하고, 이를 출처의리의 실천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조선 왕조 개창 이후의 길재가 보여준 忠節과는 또 다른 내용의 節義였다. 고려 말에 출처의리를 실천한 길재를 가리켜‘逸民’이라고 하였다. 이 ‘逸民吉再’는 ‘충신 길재’보다 앞서 성립했던 길재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출처론에 따르면 도를 실현할 수 없는 조정에서는 물러나야 한다. 그러한 처신이 절의를 실천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했는데, 이때의 절의는 충절이 아니라 출처의리를 가리켰다. 사림들이 길재의 출처의리를 강조하면서 주목한 것은 선비의 도덕적 완성, 즉 ‘潔己之道’의 실천이었다. 군주에 대한 충절 못지않게, 혹은 그 보다 더 선비의 도덕적 완성에 무게를 둘 때 비로소 출처의리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하게 된다. 길재가 이 ‘결기지도’를 실천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그가 도학자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출처의리의 실천은 도학 공부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출처를 위해서는 政局의 機微를 살필 줄 아는 ‘見機之明’을 길러야 한다. 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굳게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지혜와 용기는 모두 도학 공부를 통해서만 길러진다. 따라서 길재가 출처의리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도학자였기에 때문이라고 하였다. 길재의 출처의리를 드러내는 것은 ‘도학자 길재’를 추숭하는 새로운 내용 가운데 하나였다. Although Gil-jae(吉再) was held in respect during the whole periodof Chosun Dynasty, the aspect of the reverence was changed with thetimes. In the 15thcentury, Gil-jae was respected as a model of loyalty. However, after the 16thcentury, Salim added the image of Dohak-ja(道學者) to him. And Salim(士林) conferred Gil-jae an authenticity ofChosun`s Confucianism. By then, Gil-jae was famous for his loyalty to the Goryoe Dynasty. He showed the loyalty by rejecting the offer of government post fromthe Chosun Dynasty. However, Salim rather focused on the fact thatGil-jae had resigned the government post in the Goryeo Dynasty. Because ‘Discussion of on serving or not serving in the govermemt’(出處論) required that Seonbi(선비) should resign the government post ifthe government does not conform with Righteousness. For Salim, thefidelity(節義) was not just a loyalty, but ‘Righteouness about on servingor not serving in the government`(出處義理). Therefore, Gil-jae`sresignation in the Goryoe Dynasty was recognized as the example ofmorality. Salim insisted that Gil-jae had been able to lead a moral life bystudying Dohak(道學). Sailm thought that Dohak could influence peopleto make correct judgement about the situation, and have an indomitablewill. As their point of view, Gil-jae`s virtuous behavior was due to thefact that Gil-jae was Dohak-ja. And this was one of the reason thatSalim considered and admired Gil-jae as a symbolic figure in Chosun`s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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