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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일본기(日本紀)> 명칭에 관한 소고(小考)

        이재석 ( Lee Jae-seok ) 대구사학회 2020 대구사학 Vol.138 No.-

        이 논문은 720년 일본 최초의 정사로서 간행된 『일본서기』의 명칭의 문제에 관해 검토한 것이다. 기존의 주요 쟁점은 사서의 원래 명칭이 『일본서기』인가 ‘일본기’였는가 하는 문제였다. 필자의 입장은 『일본서기』가 원래의 서명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필자 나름의 근거를 몇 가지 제시하였는데, 첫째 『일본서기』 서명이 가장 먼저 보이는 730년대 후반기 성립의 古記(大寶令의 주석서)의 표기를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 둘째 『일본서기』의 찬진을 전하는 『속일본기』 양로 4년(720) 5월조의 기사(“修日本紀”) 속의 ‘일본기’는 사서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國史’의 의미로 사용된 보통명사적 의미였다는 점, 셋째 ‘일본기’와 ‘국사’의 호환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撰日本紀所’ · ‘撰國史所’의 용례를 포함하여 몇 가지 존재하는 점을 통해 상기 “修日本紀”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언급하였다. 한편 720년 『일본서기』의 편찬 이후에도 『일본서기』와 ‘日本紀’ 명칭이 공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797년 후속 사서인 『속일본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오로지 『일본서기』만이 유일무이한 국사이자 ‘일본기’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속일본기』 등이 편찬된 이후에도 ‘일본기’를 말할 경우는 대개 최초의 ‘일본기’였던 『일본서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굳어져 갔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만큼 『일본서기』가 차지하는 위상과 무게감이 후속하는 정사와는 남달랐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This paper reviews the issue of the naming of Nihonshoki, published in 720. The main issue of the past was whether the original name of the history book was 『Nihonshoki』 or ‘Nihongi’. My opinion is that 『Nihonshoki』 was the original title. The basis of the argument is as follows : First, it’s difficult to disregard the notation of ‘Koki’(古記, The commentary book of Taiho-ryo) which was established in the late 730s, when 『Nihonshoki』 was first appeared. Second, the term ‘Nihongi’ in the article (“修日本紀”) -the article written in May, the 4th year of the reign of Yoro(720) was included in the book 『Shoku-Nihongi』 which is about presenting 『Nihonshoki』 to the king- was not a book name but a common noun used in the mean of ‘Kokushi(history of nation)’. Thrid, there are several instances including the use of ‘Sen-Nihongi-sho (撰日本紀所)’ · ‘Sen-Kokushi-sho(撰國史所)’ as an example showing the compatible relation between ‘Nihongi’ and ‘Kokushi’. In the next breath, I pointed out that only 『Nihonshoki』 was recognized as the one and only history book and also recognized as ‘Nihongi’ until the appearance of the sequel book 『Shoku-Nihongi』 in 797, against the backdrop of the coexistence of the names 『Nihonshoki』 and ‘Nihongi’ after the compilation of 『Nihonshoki』 in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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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학계에서의 고대 한・일관계사 인식의 기원

        박현숙(Park, Hyun-Sook) 고려사학회 2016 한국사학보 Vol.- No.65

        본고에서는 유럽에서 한국학 및 동양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세기 말에 주목하여, 이에 영향을 준 일본에서의 國學연구에 대해 주목해 보았다. 초기 유럽의 고대 한・일관계사 인식에서 일본 국학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학자들의 『일본서기』 연구를 중심으로 그들의 인식과 국학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본서기』에는 한‧일관계사 인식에 결정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이 기술되어 있다. 이 신공황후 설화에 기반 한 일본의 神國思想과 대외의식은 대외적 긴장감이 높아질 때마다 강렬하게 표출되었다. 국학자들의 『일본서기』 연구 이전인 鎌倉시기에서 南北朝시기에도 『일본서기』는 황실에서 중요한 역사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근세와 『일본서기』를 단독으로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근세에 들어 국학의 출발은 중국의 고전적 텍스트에서 고대 일본의 텍스트로의 변화에 초점을 두었다. 국학자인 荷田春満는 고전으로의 회귀를 기본으로 『일본서기』 神代紀기사가 道를 알기 위한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하였다. 賀茂真淵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에서 고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고전’으로서의 의의를 보기 시작하였고, 텍스트에 대한 엄격한 문헌학적 방법론과 일본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국학의 집성자인 本居宣長를 통해서다. 그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임으로써 일본중심주의적 세계관 및 역사 인식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平田篤胤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平田篤胤는 本居宣長까지의 『고사기』에 대한 절대적 정통성으로부터 이탈해 나갔다. 국학자들은 점차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세계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고대의 언어와 신화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과 일본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고대의 일본 중심적 세계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이라는 국학의 특징에도 불구하고, 국학자들에게서 보이는 문헌에 대한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는 서양의 학자들이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일본서기』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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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古事記』『日本書紀』 における 「韓」 - テキスト論的な観点から -

        金静希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2012 비교일본학 Vol.26 No.-

        일본의 상대문헌에 나타난 ‘韓(한)’의 모습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한’ 에 대한 연구는 텍스트마다 다른 ‘한’의 모습을 일괄적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의 전체상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각각의 텍스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상대문 헌에 나타난 ‘한’을 비교하고, 특히 『고사기』『일본서기』의 ‘한’이 각각의 텍스트 속 에서 어떻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지 밝히고자 했다. 이것은 텍스트 분석론으로, 역 사적 사실을 밝히려는 작업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한’은 조선남부의 마한, 진한, 변한을 가리키고, 후에 백제, 신라. 가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인데, 일본 고대 율령의 ‘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 당과는 구분되어, 구체적인 도래 물품의 이름에 붙여져 있는 예가 있을 뿐이다. 그에 반해, 『풍토기』의 ‘한’은 그것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은 곳을 제외하면 모두 신 라를 가리키고 있고, 『만엽집』의 ‘한’은 당 또는 조선남부를 가리키고 있는 등 텍스 트에 따라 ‘한’의 모습은 다르게 나타나 있다. 1장은 한적, 금석문, 『만엽집』『풍토 기』속의 다양한 ‘한’의 모습을 고찰하면서 왜 『고사기』『일본서기』의 ‘한’을 일괄지어 생각해선 안 되는지 밝히려 한 장이고, 그 속에서 『고사기』에는 존 재하지 않은 ‘삼한’의 용례, 특히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의 개념은 신라통일 이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밝혀냈다. 2장, 『고사기』에 있어서의 ‘한’은 스사노오의 자손(韓神)이라는, 아마테라스로부터 이어지는 천황의 세계와 같은 근원을 가지는 세계이다. 『일본서기』처럼 번국으로서의 ‘한’이 아니기 때문에 ‘한’에 대한 부정의 요소를 가지지 않고, 전래기술이나 전래품이 도래되는 곳으로 나타난다. 『고사기』에 있어서의 ‘한’은 외국도 번국도 아닌 천손과 이어지는 국신의 자손으로서 천황의 치하에 수렴되는 종족으로서 표시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3장『일본서기』의 ‘한’은 고대중국의 중화사상(중심의 중국, 주변의 번 국)을 모방한 일본류의 중화적 세계관(중심의 일본, 번국=삼한, 고(구)려, 근린국가= 당)속에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서기』의 ‘한’은 『고사기』처럼 천황의 세계와 같은 근원을 가지는 나라도 아니고, 문물, 기술의 전래국도 아니다. 『일본서기』의 ‘한’은 ‘일본’과는 차별화된 정치적 색채가 강한 개념의 번국으로 나타난다.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작업이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텍스트는 편자에 의해 윤색, 각색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고사기』든 『일본서기』든 텍스트 속의 ‘한’의 모습 그대로를 실재 역사로서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선기사에 대해서는 한일 모두 각각의 충분한 텍스트 분석 없이 일괄지어 전체상을 말하는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왔고, 그렇게 만들어진 허구의 역사는 끊임없는 한일역사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사실 논쟁 이전에 있어야 할 텍스트 이해, 싸움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타자 이해의 과정을 소홀히 해 왔던 게 아닐까? 생략 없이 가감 없이 처음으로 돌아가 상대의 얘기를 들어보는 것, 그것이 달성되었는지는 차치하고 이 것이 본고가 의도했던 연구 방법, 『고사기』『일본서기』의 텍스트 분석이다. The description of ‘韓(Han, Kara)’** is different among various ancient Japanese texts. However, conventional studies have disregarded the differences among these texts, and had a tendency to treat it uniformly. My aim is to compare the description of ‘韓’ in these texts, especially ‘古事記(Kojiki)’ and ‘日本書紀(Nihonshoki)’ and clarify what each text is trying to convey. I want to state in advance that this is a textual analysis and has no implication on historical facts. It is widely accepted that ‘韓’ refers to the ancient countries of southern Korea namely ‘馬韓(Mahan, Bakan)’, ‘辰韓(Jinhan, Shinkan)’, ‘弁韓(Byonhan, Benkan)’ which later developed into ‘百済(Baekje, kudara)’, ‘新羅(Silla, Shiragi)’, ‘加羅(Kaya, Kara)’. However, the term ‘韓’ seen in the Ancient law codes is distinguished from ‘高麗 (Kokuryo, Koma)’. ‘百済(Baekje, Kudara)’, ‘新羅(Silla, Shiragi)’ and ‘唐(Tang, Kara)’, and only used prefixally to the names of imported goods. On the other hand, with some exceptions that are unspecific in location, all ‘韓’ seen in ‘風土記(Fudoki)’ refer to ‘新羅’, and ‘韓’ seen in ‘万葉集(Manyoshu)’ refer to either ‘唐’ or southern Korea. ‘韓’ seen in ‘古事記’ is a land of the descendant of ‘Susanoo’(Karakami, 韓神), which means it shares the same genealogical root with the imperial family that is related to ‘Amaterasu’. Therefore, it is not treated as a foreign barbaric country, so we see no negative description in ‘古事記’, and it is depicted as a place where new technologies and goods are brought in. Having the same genealogical background, ‘韓’ is signified as a ethnicial group that is subject to direct imperial rule in ‘古事記’. Whereas in ‘日本書紀’, ‘韓’ is positioned as a ‘蕃国(Bankoku, babarian countries)’ outside ‘中華(Chunghwa, the central world. In this case, Japan is considered to be the center of the world)’, the idea which is borrowed from the ancient Chinese political philosophy. In contrast to ‘古事記’, ‘韓’ in ‘日本書紀’ is not related to the ancestors of the Japanese emperor, and it is not a country that introduces advance technologies and goods. ‘韓’ is strictly differentiated from ‘日本’, and it is a foreign barbaric country with a strong political impl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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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江戶時代 谷川士淸 『日本書紀通證』의 백제 왕인 鍾繇 『천자문』 일본 전파 확인론

        노용필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23 백제문화 Vol.- No.69

        Tanikawa Kotosuga(1709-1776), as a Shintoist, recognized Nihonshoki as a sacred book of Shintoism, a perception that was universal at the time. In addition, in the midst of a general trend of emphasis on Nihonshoki and disregard for Kojiki, he began to write Nihonshoki-tsūshō as a form of Nihonshoki . Thus he completed the 35th volume of Nihonshoki-tsūshō in 1751 and published it in 1762. Tanikawa Kotosuga's scholarly contributions include Nihonshoki-tsūshō, which spans the entire Nihonshoki epigraph and is honored as a pioneer of Nihonshoki studies in the modern era. On the other hand, it can also be pointed out that he was well versed in Japanese and Chinese scholarship and was not obscured by Buddhist scriptures, so he took a rational and empirical method. Thus, to prove the arbitrariness of the Nihonshoki text was the ultimate purpose of his writing of Nihonshoki-tsūshō . As such, his Nihonshoki-tsūshō is characterized by a great deal of usage for a single character.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Baekje's scholar Wangin's dissemination of Zhong Yao's The Thousand-Character Text to Japan is, firstly, that he discussed this fact in Volume 15 Emperor Ojin 15 years entry. Second, we can commend Terajima Ryōan's Wakan Sansai Zhe for inheriting and developing the confirmation theory that Baekje's Wangin disseminated The Thousand-Character Text to Japan. And thirdly, through the analysis of the contents of the compilation book of The Thousand-Character Text, proved the confirmation theory that Zhong Yao's The Thousand- Character Text was disseminated to Japan by Baekje's Wangin. 타니가와 고토스가(谷川士淸)는 神道家로서 『일본서기』를 神典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인식은 그당시에는 보편적이었다. 또한 『일본서기』를 중시하고 『古事記』를 경시하는 풍조가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註釋書로서 『일본서기통증』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일본서기통증』 35권을 1751년 완성하여1762년에 간행하였다. 고토스가의 학문적 기여로는 『일본서기통증』이 『일본서기』 전편에 걸친 것으로서 근세에 있어서 『일본서기』 연구의 선구자라는 명예를 가진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한편 그가 일본 및 중국의 학문에 정통하고 佛典 에도 어둡지 않아 합리적이고 실증적 방법을 취하였다는 점 역시 지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일본서기』 본문의 字義를 입증하려는 것이 타니가와 『일본서기통증』 저술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고토스가의『일본서기통증』에는 하나의 문자에 대해서 매우 많은 용례를 제시한 특징이 있다. 고토스가가 백제 왕인의 종요 『천자문』 일본 전파 확인론을 입증한 사실의 역사적 의의로서는 첫째로, 권15 응신천황 15년조 ‘讀經典’항 및 ‘習諸典籍’항에서 상론하여 백제 왕인 종요 『천자문』 일본 전파 확인론을 피력하였음을 꼽을 수 있다. 둘째로는, 테라지마 료안(寺島良安) 『和漢三才圖會』의 백제 왕인 『천자문』 일본 전파 확인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겠다. 그리고 셋째로는, 『천자문』 集解書 내용의 분석을 통한 백제 왕인의 종요 『천자문』 일본 전파 확인론을 입증하였음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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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書紀』에 보이는 백제 한자음 연구

        金正彬(Kim Jung-vin) 구결학회 2007 구결연구 Vol.19 No.-

        일본서기에는 고대한국어 자료가 인용되어있다. 이것은 한일 간의 대표적인 학자에 의해 공인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취사선택에 의한 일부 음운에 한해서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보이는 고대한국어를 연구 자료로서 사용하고자 할 때, 그 자료성을 먼저 알아봐야 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일본서기에 보이는 고대한국어, 특히 백제어를 중심으로 그 차용한자음의 음운적 자료성과 당시의 음운체계를 알아본 것이다. 그 관점으로는 먼저 α群과 β群으로 설명되는 일본어 음운사와 중고 한어사를 배경으로 했다. 그 결과 일본서기에 보이는 고대백제어, 특히 차용한자음은 α群과 β群, 성모와 운모를 막론하고 백제시대 이후의 일본서기 편찬자의 음운의식이 가미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그 선별작업을 해야 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유효하다고 판단되는 음운의 그 체계는 현대한국의 음운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다루었다. 이와 같은 고대한국어의 차용한자음은 역사적으로 일본오음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동시에 그것은 고대한국어 자료가 일본에 존재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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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書紀』에 보이는 古代韓國漢字文化의 影響

        森博達 한국목간학회 2010 목간과 문자 Vol.6 No.-

        『日本書紀』(30卷, 720年撰)는 표기의 성격에 따라 α群 · β群 · 卷30의 셋으로 나뉜다. β群(卷1~13 · 22~23 · 28~29)은 和化漢文으로 쓰여져 있는데, 한반도의 한자문화와 공통되는 특징을 보인다. 본고는『日本書紀』에 보이는 한반도의 한자문화의 영향에 대해 논의한 것이다. ①「高句麗廣開土太王碑」와「埼玉?荷山??銘」에 나오는 音譯漢字「?字는「?」의 이체자로, 중국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日本書紀』의 본문에는 한반도의 지명이 쓰이고 있으며, 歌謠(全128首)에서「?」字가 11例 나타나는데, 모두 β群에 분포한다. ② 新羅碑文에 나오는「?」字는 生僻字로, 중국의『龍龕手鑑』에 의하면「道」字의 異體字(俗體)이다. 『日本書紀』에서는 α群의 본문에 3例가 쓰이고 있는데, 그 중 卷19「欽明紀」의 1例는 百濟聖王의 發話 중에 나타나는 것으로 百濟系의 史料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있다. ③ 소위「推古期遺文」에는 古韓音系의 萬葉假名가 다수 나타난다.「奇」·「移」를 각각「ガ」·「ヤ」의 ア列音의 표기로, 그리고「至」·「支」를 각각「チ」·「キ」의 표기로 사용한 것은 前漢이전의 중국 上古音에 따른 것으로, 이러한 예들은『日本書紀』의 百濟관계 기사에도 많이 나타난다. ④ 중국의 正史에 따르면, 辰韓에서는 秦代의 고풍스러운 漢語를 사용하였고 百濟도 辰韓의 遺俗을 이어받아 고풍스러운 漢語를 섞어 썼다고 한다. 한자음도 일부분은 上古音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古韓音」이며,『 日本書紀』의 한반도 관련 기사에 나타나는 借字表記나「推古期遺文」의 일부 假名의 기초가 되었다. ⑤ 고대 일본의 문장에는 處格의「中」, 具格의「以」, 終結辭「之」등 이두적인 표기가 보인다.『日本書紀』에는 處格의「中」字가 3例, 具格의「以」字가 10例보이는데, 주로 β群에 편재하고 있다. α群에는 각각 1例밖에 사용되지 않으며, 모두 卷25「孝德紀」의 詔勅에 나타난다. 사실「孝德紀」의 詔勅은 後人에 의해 加筆된 부분으로, α群본래의 述作者에 의한 표기라 할 수 없다. ⑥ 終結辭「之」字는『日本書紀』에 모두 232例 나타나는데, 그 중 216例가 β群에 偏在한다. 그것은 β群이 和化漢文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α群에는 15例, 卷30에는 1例나타나는데, α群의 15例 중 5例는 後人에 의해 加筆이 이루어진 것이며, 2例는 原史料가 그대로 反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머지 8例중 7例는 모두 百濟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관계 기사로, 百濟의 史料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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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書紀 全濁上聲字의 去聲合流와 次淸音字의 去聲優位에 대하여

        이성근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2022 비교일본학 Vol.54 No.-

        日本書紀 區分論과 관련해서 先行硏究에서 지적되어온 日本書紀 全濁上聲字의 去聲合流 와 次淸音字의 去聲優位에 대하여 재검토해본 결과 다음과 같다. 1) 森博達씨는 α群에서 全濁上聲이 去聲과 함께 기피되고 있는 것은 α群의 原音인 中國 北方音에서 全濁上聲字가 去聲으로 合流한 것을 반영한 결과라고 하고 있지만, β群에서도 全濁上聲字는 平聲・去聲에 비해 여전히 낮은 비율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全濁上聲의 기피 현상은 α群・β群에 모두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β群에서도 동일한 설명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더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2) 高山倫明씨는 「β群의 去聲字優位에 대하여, α群의 上聲字優位」를 주장하였는데, 이 러한 주장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 보이어진다. 3) 위 2)와 관련하여, 森씨의 1991년 논문에서는 「α群聲調表記者는 당시 中國原音의 去聲 이 현저한 上昇調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기피하였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日本書紀 去 聲次淸音에서 나타나는 것을 a聲・b聲・c聲과 비교해 볼 때 c聲(上昇調)은 거의 없으며, a聲(低 平調)도 많이 보인다. 따라서 書紀에 나타나는 調値는 이것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書紀가 완성되기 이전의 것이 답습되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 次淸音字의 경우 α群에서는 牙音에서만 나타나지만, β群에서는 牙音이 절대적인 우위 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書紀α群은 中國原音에 있어서 牙音 次淸音字의 有氣性의 弱化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朝鮮漢字音資料에서도 牙音에 한해서만 次 淸音인 「ㅋ(kʿ)」이 아닌 「ㄱ(k)」으로만 나타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focuses on the results of a study about the confluence of the sounds within Kyosho(去聲) in Zendaku-Josho(全濁上聲) as well as the superiority of Kyosho(去聲) in Jisei`on(次淸音) from Nihonshoki(日本書紀). The results of this research are as follows. The Japanese linguist, Mr. Mori Hiromichi stated that the avoidance of Zendaku-Josho (全濁上 聲) with Kyosho(去聲) in group-α was the result of the sound of Kyosho(去聲) from Zendaku- Josho(全濁上聲) joining at the northern region of China. However, there are a low proportion of Zendaku-Josho (全濁上聲) to Hjōsjō(平聲) in Kyosho (去聲) in group-β as well as group-α. This shows that the avoidance of Zendaku-Josho is a common phenomenon in both group α and β. Therefore, a closer study on group-β for the same explanation is recommended. 2) The conclusion reached by Mr. Takayama Michiaki about the superiority of Kyosho(去聲) in group-β and the superiority of Josho(上聲) in group-α seem likely and conclusive. 3) According to 2), Mr Mori’s thesis of 1991 “the speakers intonation in group-α avoided using Kyosho(去聲) in the Chinese original sound because of its prominent rise”. There are however, small C-sounds(上昇調) and multiple A-sounds(低平調) in comparison with the A・B・C -sounds within Nihonshokikyosho(去聲) and Jisēon(次淸音). Therefore, there is no relevance to Chyōchi(調値) or Shoki(書紀) sounds. 4) Jisei`on(次淸音) appears only as velar sounds in group-α. Therefore the velar sounds don`t get a dominant position in group-β. Group-α in Shoki(書紀) reflects the weakness of Jisei`on (次淸音) an aspirated velar sound, in the original Chinese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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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書紀』에 보이는 古代韓國의 漢字文化의 影響(續篇)

        森博達 한국목간학회 2011 목간과 문자 Vol.8 No.-

        『日本書紀』(30券, 720년 편찬)는 표기의 성격에 의해 α群ㆍβ群ㆍ권30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 중β群(卷1~13ㆍ22~23ㆍ28~29)은 知化漢文으로 쓰여져 있어 한반도의 漢字文化와 佛敎漢文과의 공통적 특징이 보인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日本書紀』에 보이는 한반도의 漢字文化와 佛敎漢文으 영향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또β群의 述作者로 추정되는 山田史御方과 최종단계의 加筆者로 보이는 三宅臣藤麻呂의 출자와 경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① 『日本書紀』의 문장에는 誤用과 奇用이 많은데, 그것들은 주로 β群에 偏在해 있다. α群에서 보이는 열외는 原史料의 반영과 後人의 加筆로 처리되었다. 본고에서는 대표적인 誤用과 奇用을 2가지씩들었다 전자는 「有」字의 誤用과 부정어 어순의 잘못을 예로 들었으며 후자는 「因以」 와 종결사 「之」字를 예로 들었다. ② 필자는 山田史御方을 β群의 述作者로 추측하고 있다. 山田史는 한반도 축신의 도래계 씨족이다. 御方은 학승으로 신라에서 유학하고 귀국후 환속해 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β群은 佛典과 佛敎漢文의 영향을 받고 있다. 佛敎漢文의 영향으로 생각되는 용어에 「末經幾~」라는 어구가 있는데, β群에만5례 보이고 있다. 또 부사 「亦」을 주어의 앞에 위치한 용법은 政格漢文에서는 誤用이여도, 佛敎漢文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 이러한 용례는 『日本書紀』에 40례 보이는데, 39례가 β群에 偏在되어 있다. ③ 新羅碑石에는 「도」字가 3례 나타나고 있다. 「도」는 生僻字로 佛典에는 이용되지만 漢籍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日本書紀』에는 11례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 4례는 韓國關係記事, 2례는 後人의 加筆이고, 나머지 5례도 後人의 加筆일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加筆者를 三宅臣藤麻呂로 추측하고 있다. 書記의 加筆 부분의 문장에는 다수의 倭習과 吏讀的인 표기가 보인다. 「도」字도 藤麻呂의 加筆로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쉽다. ④ 『日本書紀』에는 이외에도 古代韓國의 吏讀용법과 공통되는 變格語法이 있다. 여기에서는 주어의 앞에 위치하는 「別」字, 具格助詞 「以」字, 動名詞語尾 「在」字를 가지고 그 분포를 검토했다. ⑤ 필자는 『日本書紀』 編纂의 最終段階의 加筆者를 三宅臣藤麻呂로 추측하고 있다. 三宅氏의 姓에는 三宅臣ㆍ三宅人ㆍ三宅連ㆍ三宅史가 있고, 그 중 三宅臣이외는 한반도에서 渡來한 歸化人인 것이 확인되었다. 이것에 의하면 三宅臣도 도래계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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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일통의식의 형성 시기에 대한 고찰

        노태돈(盧泰敦) 한국목간학회 2016 목간과 문자 Vol.0 No.16

        삼한일통의식이 7세기 말 8세기 초에 형성되었다는 기존 설을 부정하고, 이 의식이 9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다고 여기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 기술된 삼한 기사를 검토하여, 신라에서 삼한 의식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일본서기에 기술된 ‘삼한’ 기사를 검토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즉 ‘삼한’은 삼국을 뜻하며, 삼국은 모두 일본에 시종 종속적인 번국(蕃國)이었다고 여기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빨라도 7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이었다. 645년에 일어난 대화개신(大化改新) 직후, 왜국 조정이 고구려 사절에게 전한 말에서 고구려왕을 신의 아들(神子)이라 표현하여 공경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일본서기 천지(天智) 원년(662) 12월조에 기술된 ‘삼한’을 언급한 기사의 일부는 중국 책 문선(文選)의 서도부(西都賦)의 기사를 원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서도부의 ‘구주(九州)’라는 단어를 일본서기에서는 ‘삼한’으로 바꾸어 기술하였다. 수·당대의 삼한 용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예이다. 삼한을 구주(九州)나 천하와 같은 뜻으로 여기는 이러한 일본서기의 ‘삼한’ 개념은 신라로부터 도입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 뒤 삼국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삼국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668년 신라가 일본과 국교 재개를 한 뒤, 669년부터 신라가 당과 교전을 벌림에 따라, 신라는 일본의 지원을 바라게 되었고, 최소한 일본의 중립을 유지키 위해 진력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일본은 신라에 대해 우월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 일본을 달래려고 신라는 물자를 보내는 등 저자세 외교를 감수하였다. 아울러 백제 땅이었던 금마저에 자리 잡은 고구려 유민의 나라인 소고구려도 신라의 통제 하에서 일본과 교섭하면서 시종 저자세를 취하였다. 676년 신라와 당 간의 군사적 대결이 휴전 상태가 된 이후에도 이런 측면은 당분간 지속되었다. 이런 신라와 소고구려의 일본과의 교섭 양태와, 그리고 일본 열도로 이주해 간 삼국 주민들의 열악한 형편은 당시 일본인들의 삼국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삼국 모두 일본에 굴종적인 약소한 나라들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런 인식이 역사 서술에 반영되어, 거슬러 삼국과 일본과의 교섭 초기부터 그러하였다는 식의 기술을 낳게 하였다. 이런 식의 인식이 성립한 것이 언제 부터인가를 생각할 때, 유의되는 것이 신공황후전설에 대한 고사기와 일본서기 간의 기술의 차이이다.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에선 신공황후가 신라를 원정하니, 삼한(三韓) 즉 삼국 모두가 항복해왔다고 하였다. 그에 비해 712년에 간행된 고사기(古事記)에서는 신라와 백제가 신공황후에게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을 삼한으로 지칭하고, 삼한이 시종 일본의 종속국이라는 서술이 등장한 것이 720년 이후였음을 말해준다. 곧 삼국을 삼한이라고 칭하고 그것이 신라로 통합되었다는 신라인의 인식이 7세기 후반 이후 일본에 전해졌고, 다시 그러한 삼한이 거슬러 이른 시기부터 일본에 종속국이었다는 식으로 일본식의 삼한인식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역으로 신라에서 삼한일통의식이 7세기 종반에는 형성되었음을 추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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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海金氏璿源譜略』의 `伷`의 實體에 대하여

        林範植(lim beom-sik) 한일관계사학회 2014 한일관계사연구 Vol.49 No.-

        본고의 목적은 한국의 正史 『三國史記』 초기기록과 일본의 正史 『日本書紀』 상대기록 간에 상호 간접적으로 내지 논리적으로 일치하는 기록이 있음을 金海金氏大宗譜인 『김해김씨선원보략』에 나타난 ?라는 인물을 통해 증명하는데 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上에는 首露王이 2세기 말인 199년에 薨하는 記事가 나오고, 『日本書紀』 崇神, 垂仁紀에는 蘇那曷叱智나 都奴我阿羅斯等, 혹은 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는 大加羅國王子의 使行記事가 보인다. 이 두 기사의 상호관계는 표면적으로는 명확치 않지만, 우리 역사학계의 대선학이신 천관우 선생은, 『三國史記』 ?신라본기? 199년조의 수로왕의 薨사건 기록과 그 2년 뒤에 이어지는 금관국으로 여겨지는 가야의 신라에 대한 請和사건 기록이, 무언가 가야 내부에 중요한 변동이 생긴 것을 의미하고, 『김해김씨선원보략』의 수로왕 七子의 ‘’厭世上界‘’라든가 거등의 왕자 ?의 ‘’乘雲離去‘’라는 기록 등과 대비하여, ‘2세기 말 3세기 초 무렵’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농경기마민들이 건너가던 추세로 미루어 볼 때에, 삼국사기의 두 기록은 구체적으로 금관국의 주축세력이 일본 열도로 빠져 나간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본고는 이 천관우 선생의 가설을 받아들여 연구해 본 결과, 다른 기록은 몰라도,적어도 ‘2세기 말 3세기 초 무렵’ 일본열도로 빠져나간 거등의 왕자 ?는, 그 실체가, 『日本書紀』 崇神, 垂仁紀에 보이는 蘇那曷叱智나 都奴我阿羅斯等, 혹은 于斯岐阿利叱智干岐 등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고,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와 『日本書紀』 上의 세 인물의 兩者는 2세기 말 3세기 초라는 동일 시기에 상호 존재하였다. 둘째, ?와 『日本書紀』 上의 세 인물의 兩者는 국적이 동일하게 금관국이었다. 셋째, ?와 『日本書紀』 上의 세 인물의 兩者는 그 이름의 의미가 모두 ‘’뿔 모양의 곳깔을 쓴 渠帥혹은 貴人‘’으로서 동일하다. 이상과 같은 본고의 연구결과는 고대 한일관계 연구에 있어 그동안 도외시되어 왔던 새로운 사료의 발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며, 아울러 『日本書紀』 上代記事에 대한 盲目的不信을 再考케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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