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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만 한국독립군의 성립과 항일무장투쟁의 전개

        황민호(Hwang Min Ho) 한국사학회 2014 史學硏究 Vol.- No.114

        이 논문은 1930년대 초반 재만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과 정치부위원을 역임했던 이규채의 재판관련 기록을 분석하여 한국독립당과 군의 결성과정 및 항일무장투쟁의 전개과정에서 대해 살펴봄으로서 기존의 연구성과를 보완하였으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독립당은 1930년 7월에 조직의 결성을 완료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930년 이후 한인공산주의자들의 민족진영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자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진 것으로 보이며, 시기적으로 보아 간도봉가 본격화되는 상황과 맞물려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1월 보통학교를 졸업 정도의 우수한 인력을 대상으로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으며, 초기의 병력은 1개 소대에 50명씩 6개 소대, 2개 중대로 편성된 300명 정도의 규모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한국독립당은 결성과정에서 소련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조국의 절대 독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진영의 조직임을 분명히 하였으며, 입헌민주주의와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및 의무교육의 실시 등을 주장함으로서 향후 건설될 독립국가의 면모를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국독립군은 즉각적으로 장병의 모집과 군사훈련을 통해 대일항전을 준비하였으며, 주로 중국군과 연합한 한중 연합작을 전개하였으며, 이는 이청천, 이규채, 남대관, 조경한 등의 노력으로 추진되었으며, 이밖에도 1933년 후반까지 독자적인 소규모의 전투도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한국독립당과 군은 제1차 쌍성보전투가 끝난 후 중국관내로의 이동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했던 것으로 보이며, 대전자령 전투가 끝난 후 이규채의 주도하에 추진된 중국관내로의 이동 교섭이 일단락되자 한국독립당과 군의 중요 인원의 이동이 결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This paper aimed to compensate for the existing research result by exploring the process of organization of Korean Independence Party and its army and their anti-Japanese armed struggle through analysing trial record of Lee Kyu Chae, who served as the member of political desk and the chairman of general affair in the early of 1930s. At first, we could find that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completed to form an organization, and it reflected its process of reaction when the attack of Korean communists to national party became strengthened, and interlinked with the situation that ‘the 5.30 Uprising of 1930’ became serious.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organized the Army for Korean Independence with the human resource who graduated from primary school. The troops in early time was organized with 50 in each platoon, total 60 platoons, and with 300 in 2 companies. In the process of organization,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proclaimed the national front that opposed against the Soviet communism and aimed to absolute independence and proposed the national blueprint, which would be an independent nation, in the terms of social democracy by arguing the constitutional democracy and nationalization of land and instruments of production and compulsory education. As Manchuria incident began, the Army for Korean Independence responded immediately and prepared to resistance to Japan through recruiting officers and men and military training, which mainly was conducted with combined operations with China lead by Yi Cheong Cheon, Lee Kyu Chae, Nam Dae Kwan, Cho Kyung Han. Moreover, until late in the 1933, it also carried out small battles unto itself.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and its army discussed the moving problem into China after the Battle of SSangseongbo. And when it was concluded to move into China under the leadership of Lee Kyu Chae after the Battle of Daejeonjaryeong, the move of key persons of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and its army was deci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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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기섭의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참여와 활동

        이재호(Lee Jae-Ho)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39

        윤기섭은 1911년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해 서간도로 망명한 이후 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하고 이후 10년 동안 수많은 군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920년 상해로 건너 와 일제 패망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무장 투쟁의 실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윤기섭이 1920년 이후 주요 역할을 한 곳은 임시의정원이었다. 임시의정원은 상해 임시정부 탄생의 모체로, 임시정부 운영의 법적 근거인 헌법을 제정하는 입법기관 역할을 하였다. 제7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서간도 대표로 참석하면서 의정 활동을 시작한 윤기섭은 의회의 수장인 의장을 맡기도 했다. 국민대표회의 기간인 1923년, 제7대 의장에 선임되어 의정원 내의 갈등과 이견을 조정하는 의회 민주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920년대 중반 국내를 비롯한 중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윤기섭은 임시정부를 비롯한 민족주의 인사들과 독자적인 정당 결성에 나서 1930년 1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이어 남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신익희와 함께 1932년 1월 한국혁명당을 결성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윤기섭이 임시정부의 '단일 여당'임을 자처하는 한국독립당과 별도로 정당을 창당하였다고 임시의정원(임시정부)과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한국혁명당 대표로 임시의정원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4년 윤기섭은 만주에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신한독립당의 결성은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과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을 이룬 최초의 성과였다. 정당 활동에 진력하면서 윤기섭은 의정원 참석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임시약헌은 의정원 의원이 개원 후 이유 없이 2주일까지 출석하지 않을 경우 의원직을 자연 해임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1935년 11월 2일 의원의 자격을 상실하였다. 윤기섭은 한국혁명당을 조직하고 만주에서 관내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면서 독립운동 정당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정당 활동의 주 무대가 의회라는 점에서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 이후 그의 의정 활동이 더 진행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1930년대 활발한 정당 활동의 결과 임시의정원은 1940년대 중경에서 '통일 의회'를 구성하고 여러 정당들이 참여하는 다당제를 실현하여 한국 민주정치 발전의 토대를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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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波 嚴恒燮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김윤미(Kim, Yoon Mi)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 No.75

        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一波 嚴恒燮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동안 김구의 최측근이라는 역할만 강조된 측면이 있어, 그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그리고 정당에서의 활약을 포함한 독립운동 전반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독립운동사 속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엄항섭의 역할에 대한 의미를 확인하고자 한다. 엄항섭은 1919년 임시정부 법무부 참사를 시작으로 임시정부 국무원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임시의정원에서 新到의원 자격심사위원을 맡아 새로 선출된 의원들의 자격을 검토하여 통과여부를 결정하였고, 상임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아 임시정부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였다. 1930년대부터는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정당에 속해 선전업무를 담당하였다. 한국국민당에서는 기관지 『韓民』의 편집과 발행을 맡아 당의 활동을 선전하였고, 한국독립군특무대의 총감독으로 학생들의 훈련과 중국군관학교 입학교섭을 지원하였다. 이후 한국독립군특무대의 활동이 침체되자 한국국민당의 전위단체인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조직하여 그 활동을 이어나갔다. 재건 한국독립당에서는 한국광복군과 미군의 연합작전 시행을 지원함으로써 독립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독립 후 승전국의 위치를 점하고자 했다. 1940년대부터는 임시정부 국무원에서의 활동이 집중된다. 엄항섭은 1944년 선전부장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선전업무를 책임졌다. 1940년대는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던 때로 외국어에 능통하고 남다른 정보력을 가진 엄항섭의 역량이 발휘되었다. 그의 선전 활동은 주로 對중국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주체성을 잃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엄항섭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선발대로 환국하였다. 이후 통일국가수립을 주장하며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에 희생되면서 통일국가수립의 구호는 남한 정부에서도, 한국독립당 내에서도 배척되었고 엄항섭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약화 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로 남쪽에 가족을 남긴 채 납북되어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Eom Hang-Seop, the main theme of this paper, went to China after the March First Movement in 1919 to participate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with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Known as the closest person of Kim Gu, he played roles in recruiting, financing and propaganda for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ccording to the history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refore, in order to understand Eom Hang-Seop’s role in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we need to focus on how he influenced the independence movement rather than the relationship between Kim Gu and Eom Hang-Seop. Eom Hang-Seop served as a member of the provisional assembly from the 1920s to the 1940s. He also screened the qualifications of the new lawmakers and handled fiscal bills for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the 1930s, he participated in the founding and propaganda activities of the Korean National Party(韓國國民黨) and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韓國獨立黨) that supporte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particular, he attempted to occupy the position of a victorious country as a member of the allied forces after independence by supporting the combined operation of the ROK and US forces. In the 1940s, he was involved in the propaganda work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made a diplomatic effort to get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ternationally appr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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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중국 광주지역 한인 독립운동세력의 형성과 변천

        조은경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4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81

        This study explores the formation and activities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in Guangzhou(廣州), China in the 1930s. The period ranges from 1930 when the collapsed groups were reformed in Guangzhou to 1938 when the area was taken by Japanese soldiers. This study is aimed at providing an overview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in Guangzhou during the 1930s. Another aim is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and status of Guangzhou as the hub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in Southern China. During the mid-1920s, Guangzhou became the hub of Korean revolution. However, the area became stagnant for a while as Koreans left the area at the end of 1920s. In 1930, the Guangdong province(廣東省) government promised to support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ns who came to Guangzhou. Also, the government promoted it everywhere to attract Koreans to the area. In the 1930s, the first time Guangzhou garnered attention as the hub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was 1932, the year of Yun Bong-gil(尹奉吉)'s heroic deed. As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found it hard to stay in Shanghai, the hub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ey flocked to Guangzhou. Some of them were motivated by the funding for their activities, which was arranged through interactions with influential Chinese people in Guangdong. As more and more Koreans came to Guangzhou,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Canton Branch(韓國獨立黨 廣東支部) was formed. It supported young Korean people to enter Zhongshan University(中山大學) and Guangdong Military School(廣東軍官學校) ; the purpose was to ‘produce young warriors.'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Canton Branch also led the Korean community in Guangzhou. However, serious conflicts among Koreans occurred in the organization and Zhongshan University. In the 1930s, there was political party unification movement in China. The leaders of Korean Independence Party Canton Branch were against the united political party, joining the Korean National Party(韓國國民黨). As for young groups, they supported the united political party, joining the National Revolution Party(民族革命黨). The two parties competed in Guangzhou and the Korean National Party gained the upper hand after 1936. After the Sino-Japanese War broke out in 1937, most of Koreans in Guangzhou moved to Nanjing to enter China Military School's special training class. As a result, only a small number of Koreans remained in Guangzhou. From July to October 1938,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大韓民國臨時政府) stayed in Guangzhou and Foshan(佛山) to carry on their activities. However, Koreans left Guangzhou as Japanese soldiers captured the area in October 1938. It is the second collapse of Guangzhou as the hub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forces in Southern China after 1920. 이 논문은 1930년대 중국 광저우 지역 한인 독립운동세력의 형성과 활동을 살펴보았다. 검토시기는 와해된 한인 독립운동세력이 광저우에서 재구축되는 1930년부터 광저우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는 1938년까지로 하였다. 이를 통해 1930년대 광저우 지역 한인 독립운동세력의 동향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중국 남부지역 한인 독립운동의 거점으로서 광저우의 특징과 위상을 규명해보고자 하였다. 광저우는 1920년대 중반 한국혁명의 중심으로 부상하였으나 1920년대 말 한인들이 이곳을 떠나면서 한동안 침체되었다. 1930년 광저우에 온 한인은 광동성 정부로부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편의와 자금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이를 각지에 알리며 한인들에게 광저우에서 오라고 선전하였다. 광저우가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였다. 기존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인 상하이에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광저우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광동의 중국인사들과 교류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받고자 광저우를 방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저우 한인수가 증가하자 한국독립당 광동지부(韓國獨立黨 廣東支部)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청년투사의 양성’을 목적으로 중산대학과 광동군관학교 등에 한인 청년의 입학을 지원하며 광저우 한인사회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와 중산대학 내부에서 한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1930년대 중국 관내지역에서 정당통일운동이 전개되자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간부는 통합정당에 반대하여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에서 활동하였고, 청년세력은 찬성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가담하였다. 광저우에서 두 정당은 서로 경쟁하였으나 1936년 이후 한국국민당의 세력이 우세해졌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광저우 한인 대다수가 난징으로 이동하여 중국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하였기 때문에 광저우에 남은 한인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1938년 7월부터 10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광동성 광저우와 불산(佛山)에 머물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8년 10월 일본군이 광저우를 함락하면서 한인들이 광저우를 떠나고 중국 남부지역 한인독립운동 근거지로서 광저우는 1920년에 이어 다시 한 번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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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韓國獨立黨의 특무활동 - 康秉學의 상해사변 ‘일본군 초혼제’ 투탄의거(1934)를 중심으로 -

        김용진(Kim, Yong Jin)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 No.74

        강병학 의거는 1934년 3월 3일날 중일정전기념일에 맞춰서 거행된 의거였다. 중일정전기념일은 1932년 1월 28일 발생한 상해사변 승전을 축하하고, 같은해 3월 3일 일본과 중국이 정전협정을 맺은 날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이에따라 상해홍구공원 뒤 신사에서는 일제 전몰장사의 넋을 기리는 초혼제가 거행되었다. 당시 행사에 참석한 인물들 중에는 상해에 있는 일제 고관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당일 有吉공사·今村 제3함대 사령장관·鈴木 육군무관·安井 거류민회행정위원장 등이 참석하였고 상해 각 단체 대표들과 각 학교 학생들도 참석하여, 초혼제에 대한 관심과 집중이 대단하였다. 그런 곳에 의거가 발생한 것이다. 의거의 주요인물인 강병학은 1934년 3월 3일, 19세 나이로 상해사변 일본전몰장사 추도식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초혼제식은 오전 10시에 거행되어 약 한 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강병학은 식 종료 후 11시 15분경 식장 장막 밖 도로상에서 회중전등형 폭탄을 식장 내로 투척하였으나, 안전핀을 뽑지 않은 점과 이미 관계고관들이 퇴장한 뒤였으므로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의거 일주일 뒤에 배부된 『강의사 흥구 투착에 대한 선언』에 밝혀듯이, 조소앙은 제2의 윤봉길 의거라고 칭송하였다. 비록 의거는 불발되었지만, 당시 한국독립운동계가 침체된 상태에서 아직 조선 민중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살아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였다. 한국독립당은 강병학 의거가 신라 화랑정신으로 전개된 의열투쟁이었으며, 임시정부를 지탱하는 정당으로서 외교와 실력양성에 못지않게 의열투쟁에도 적극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강병학 의거로 일제의 30년 동화정책이 실패하였음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이는 그동안 일제가 공들여서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친일동화정책으로 회유하여 일제에 부역하는 이들을 대량으로 양성하기 위해서 시행한 30년 동화정책이, 강병학 의거로 물거품이 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끝으로, 한국독립당은 현 정세를 보니 일제를 둘러싼 국제환경이 차츰 불리해져감을 피력하였다. 따라서 한국이 일제로부터 독립할 날이 머지않았으며,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강병학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천 삼백만 모든 사람이 강병학의 뒤를 이어서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강병학 의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소앙과 김구로 대변되는 당시 임시정부의 내부상황을 파악하게 해준다. 강병학 의거는 김구에게 의열투쟁의 주도권 선점을 빼앗긴 조소앙이 침체된 임시정부의 상황을 돌파하고자 추진한 것이었다. 그리고 항주 임시정부 역시 상해시기 임시정부 못지않게 의열투쟁을 지속하였음을 알려준다. 예컨대 상해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한국노병회(1922), 대한교민단 의경대(1923), 정위단(1925), 병인의용대(1926)에서 1933년 한국독립당 특무대로 이어지는, 의열투쟁의 연속상에서 강병학 의거가 가지는 의미가 적지않음을 보여준다. 강병학 의거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서 계획되었다. ① 한국독립 운동계의 침체와 대내외적 여건악화, ② 조소앙이 평소부터 가지고 있었던 항일무력투쟁에 대한 소신 ③ 임시정부 지도자 간에 주도권 선점에 따른 갈등 ④ 앞으로 창당될 신당인 민족혁명당 내에서 한국독립당의 존재감 과시 차원에서 조소앙의 기획 하에 특무대장 박창세가 강병학으로 하여금 의거를 일으키게 하여 악화된 여건을 극복하고자 했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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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리석의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체계 초안(1942)」과 안창호의 대공주의

        장석흥(Jang, Seok-heung)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49

        이 글은 차리석이 작성한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체계 초안’(1942)을 통해 1920년대 후반 안창호가 주창한 대공주의의 실체를 규명한 것이다. ‘이론체계 초안’을 작성한 동암 차리석은 도산이 제창한 대공주의 정신을 적통으로 계승한 인사였다. 신민회 이래 20여 년을 넘게 동고동락한 동암과 도산은 평생의 동지였다. 동암은 1932년 도산이 피체될 때 도산의 역사를 최초의 기록으로 남긴 『도산선생약사』를 남겼고, 1938년 도산이 서거하자 「한국혁명영수 안창호선생 40혁명분투사략」을 통해 도산의 혁명사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세상에 밝힌 바 있었다. 동암의 서술은 1920년대 후반 도산이 민족대혁명당 건설을 제창할 때의 주장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비록 대공주의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도산 사상의 본질과 핵심을 짚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8월에는 ‘이론체계 초안’을 통해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을 체계화했는데 그 요체 역시 1926년 삼일당 연설에서 도산이 민족대혁명당을 제창 때와 1938년 「분투사략」때의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다만 한국독립당의 당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이제까지의 것보다 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이며 이론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것은 삼균주의의 논리와 달리 주권독립, 건설균등, 세계공영이 불변의 당의라 규정했다. 이는 곧 도산이 민족대혁명당을 주창할 때 내세운 정신과 주의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대공주의란 ‘민족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강구된 사상이자 주의였다. 도산의 대공주의는 국민대표회 때 창조파와 개조파의 논리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모아지고 있었으며, 명실공히 민족세력의 통합을 위해 새로운 방도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새 지평을 열어간 민족대당운동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무렵 도산에게는 민족세력을 포용하여 통합으로 이끌어내는 자체가 주의와 사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공주의의 본질이자 실천이었다. 도산의 대공주의는 1930년 한국독립당이 결성될 때 당의·당강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대공주의는 1938년 동암이 작성한 「분투사략」을 거쳐 1942년 ‘이론체계 초안’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ruth of Ahn Chang Ho’s Daegongjueui(大公主義) in the late 1920s through The draft of theoretical system of Korean Independence Party’s policy(1942) written by Cha Lee Seok. Dongam Cha Lee Seok who wrote to ‘The draft of theoretical system’ was direct inherited Dosan’s Daegongjueui. Since the establishment of New People’s Association(1907), Dongam and Dosan have been great feeling of camaraderie for over 20 years. In the arrested Dosan in 1932, Dongam wrote 『Dosan’s Summary History』what the book that Dosan’s history at first. At Dosan died in 1938, He illuminated value what Dosan’s revolutionary ideas through the book that 『The Korean revolutionary leader, Dosan Ahn Chang Ho 40 revolution vigorous history』. Dongam’s description accorded with Dosan’s opinion that he advocated the establishment of The Great National Party in the late 1920s. Even if the named Daegongjueui was not, Dongam’s description accorded with the essence and point of Dosan’s idea. He systematized theory of Korean Independence Party’s policy through The draft of theoretical system in 1942. 8. Also The key point was accorded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Great National Party in 1926 and the idea of 『vigorous history』 in 1938. Simply speaking, It means more detailed systematizd process that theory of Korean Independence Party’s policy. It defined Independent Sovereignty, Equality Construction, Public Management to the World was unchangeable party policy differentiate from Samgyunjueui (三均主義). Daegongjueui was Dosan’s idea for achievement of national independence. Dosan’s Daegongjueui combined the logic behind politics of The creationist and The Reconstructionist in The Representative of the Nation Conference. Also it suggested The New Way for national unification. Consequently, The Great National Party Movement achieved good results. Dosan’s idea embraced national power be integrated. It was the essence and action of Daegongjueui. Advanced, Dosan’s Daegongjueui was reflected in party policy and principle at the establishment of Korean Independence Party in 1930. And Daegongjueui suggested more detail in The draft of theoretical system of Korean Independence Party’s policy in 1942 through 『vigorous history』by Dongam in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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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시의정원 참여와 노선투쟁

        이현주(Lee Hyun-ju)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2009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33

        1942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은 보궐선거를 통해 당선된 자파의원 13명을 임시의정원 제34차 정기회의에 등원시켰다. 임정을 무시하던 조선민족혁명당이 참여로 방침을 전환한 것은 독소전쟁(1941.6.22)과 대서양 헌장(1941.8), 태평양전쟁(1941.12)으로 이어지는 국제정세의 급변 때문이었다. 특히 대서양 헌장 발표를 계기로 유럽의 망명정부들이 동맹국 들로부터 승인을 받자 민족혁명당은 한국 임정도 승인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조선의용대의 북상과 중국 국공합작의 균열도 참여를 재촉하게 했다. 민족혁명당의 임정참여 논리는 빈약했다. 1941년 10월 민족혁명당이 임시의정원에 진입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한국독립당의 오만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민족혁명당의 저의를 의심하게 한 계기였다. 34회 회기 내내 민족혁명당이 임정을 빼앗으려 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공고한 통일전선 정부의 형성은 지연되었다. 다만 한국광복군 「9개 준승」 논쟁을 합의로 이끈 것은 성과였다. 「9개 준승」에 따르면 중국 국민당정부의 의도는 군사위원회로 하여금 광복군을 임시정부에서 분리시켜 항일전쟁 기간 동안 중국군에 종속시켜 이용하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종전 후 한국 내에서까지 광복군의 행동을 장악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결국 공통의 위기의식이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합의를 도출하게 했다. 「건국강령」 토론은 신국가의 미래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했지만 공포의 적법성 여부를 따지는데 집중되었다. 충분히 토론되지 않았으나 토지국유화 논쟁에서 민족혁명당이 국유화에 반대하고 한국독립당이 찬성한 것도 의미심장했다. 임시약헌 수개안을 제출한 것은 의외에도 한국독립당이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의 목표는 임시약헌 가운데 회기 안에 선거법 개정만을 요구한 민족혁명당과 달리 일본의 패망, 도래할 국제정세의 변동까지 반영한 완전무결한 헌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한독당 우위의 체제하에 명실상부한 헌법을 만들어 신국가 건설의 지렛대로 삼겠다는 구상이었다. 민족혁명당은 중경의 동포들만으로 시행되는 의원선거의 대표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하면서 선거구를 중국 전역과 미주, 노령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시약헌 수개를 둘러싼 논쟁은 정당정치에 의한 민주주의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The Chosu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made 13 members, who were elected in by-elections, of its own party attend the 34th regular session of the provisional legislature. The Chosu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ignored the Provisional Government so far, however, the reason why it decided to take part in the regular session changing its policy resulted from the rapidly changing world situation like the Russo-German War (June 22, 1941), the Atlantic Charter (August, 1941) and the Pacific War (December, 1941). In particular, as the provisional governments of several countries in Europe were recognized by the Allied Nations, the Chosu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foresaw that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would be recognized by them, too. The Chosun Volunteer Army’s moving northward and Chinese Kuomintang-Communist cooperation urged them to take part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The logic of its participation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was poor. The case that the Chosu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failed in entering the provisional legislature disclosed the arrogant attitude of the Korea Independence Party as well as created an opportunity to make the members of the Korea Independence Party doubt the real intention of the Chosu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During the 34th session there was a rumor that the Chosu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tried to deprive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its power. Therefore the formation of the government with the firm united front was delayed. The only result was the agreement of “the 9 fixed rules” of the Korea Liberation Army. According to “the 9 fixed rules”, the intention of the Kuomintang government of China was to make its Armed Services Committee separate the Korea Liberation Army from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subordinate the Korean Army to the Chinese Army for some time, and exploit it. And also it included the contents that the Kuomintang government would assume the reins of the Korea Liberation Army even in Korea after World War II. In the end, the common sense of crisis made the Korea Independence Party and the Chosu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reach agreement. The discussion of the program of founding a country was important in the point that it could show the people the future of a new country, however, it was focused on calling in question whether its promulgation was legal. Although the issue of the nationalization of land was not thoroughly discussed, it was meaningful that the Chosu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opposed nationalization, but the Korea Independence Party was in favor of it. Unexpectedly several articles of a temporary constitution were presented by the Korea Independence Party. But differing from the request of the Chosu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which wanted to amend election law only in session, the aim of the Korea Independence Party was to establish a perfect constitution reflecting Japan’s defeat and the change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The Korea Independence party had a plan to establish a real constitution under its dominant system and make it a lever to build up a new nation with it. Thoroughly bring into relief the issue of the representativeness of the election of the assemblymen who were elected by Korean residents in Chungking, the Chosu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claimed to expand the electoral districts to all the area in China, America and Russia. The dispute on several articles of the temporary constitution showed us the possibility of democracy development by party politics.

      • KCI등재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기관지 『韓聲』 연구

        박향란,하동명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3 한국학연구 Vol.- No.71

        『韓聲』은 한국독립당 광동지부가 발행한 기관지이자 廣州 최초의 한국인 정당 기관지이다. 이 간행물은 제국주의 타파를 위한 약소민족 연대 촉구와 선전을 목적으로 한 중국어 기관지로서, 중한 혁명가들이 공동으로 진행했던 항일투쟁운동의 실천적 결과물이자 그들의 시대적, 역사적 인식을 반영한 소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韓聲』은 그동안 제3호만 전해져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고 다만 사료적 가치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우선 『韓聲』의 서지사항과 구성내용을 정리하여 고찰하고 기관지의 필진에 대해 고찰하였는데, 많은 한인들이 필명을 사용하여 확인이 어렵다는 점, 그리고 한중연대에 있어 중국인 필진 소개는 반드시 진행되어야 할 작업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우선 중국인 필진 楊康華(石栗), 雷通群, 陳燦章, 陳振祺, 震騏, 曾應鎏의 신분을 확인하고 한인 유학생들과의 교류와 영향에 대해 논의 하였다. 그 결과 1930년대 중산대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있는 학생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하였지만 실제로 의연히 중산대학생들과 유학생들 사이에는 암암리에 비밀독서 회와 비밀 좌익단체 “맑스레닌주의 행동단”에 가입한 학생과 가까이 지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 『韓聲』의 한중연대의식의 표출양상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한국 저자들이 同病相憐이라는 동질감과 끔찍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일제 치하의 비참한 한국의 참상에 대해 고발한 반면, 중국인 필진은 일본의 본성을 간파하지 못한 자국민의 무지함과 개인이익을 위해 조국을 팔아넘긴 정치인들, 그리고 군벌들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중국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한중연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韓聲≫是韓國獨立黨廣東支部在廣州創辦的第一份韓國政黨機關報。該刊物以宣傳打敗帝國主義, 督促聯合弱小民族為辦刊宗旨, 是中韓革命家共同進行抗日鬥爭運動的實踐成果, 也是反映他們的時代認識和歷史認識的珍貴資料。但由於此前學界對≪韓聲≫的研究大多只停留在史料研究上, 而未能對其進行一個系統性的分析。因此, 本文首先對≪韓聲≫的發行情況和其構成內容進行了整理和考察。其次, 考察了該機關報的作者身份及其活動蹤跡。為了更好地分析中韓聯合意識, 本論文集中考察了楊康華、雷通群、陳燦章、陳振祺、震騏、曾應鎏等中國作者的身份, 並討論他們與韓國留學生之間的交流情況, 試圖闡明他們對韓國留學生產生的影響。結果發現, 1930年代中山大學雖強調不能接受共產主義思想的留學生入學, 但仍有部分韓國留學生與有共產主義傾向的學生密切交往。此外, 本文還對≪韓聲≫的中韓聯合意識進行了研究, 發現韓國作者為了喚起中國人民“同病相憐”的認同感和危機意識, 致力於告發日本帝國主義統治下的朝鮮慘狀, 而中國作者則尖銳地批評了未能看透日本的侵略本質、為了個人利益而出賣祖國的政治家和軍閥, 同時強調了大國的精神和責任, 由此闡發了中韓聯合的必要性。

      • 우천 조완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활동 (1940~1945년을 중심으로)

        최혜경 한국동학학회 2007 동학연구 Vol.0 No.23

        After establishm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上海 大韓民國臨時政府), Woocheon(Cho Wan Goo) constantly maintained that provisional government had to be the pivot organization. It tired to investigate Woocheon's(Cho Wan Goo) activities after settlem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located in Chongqing(重慶) in 1940 and until liberation of Korea in 1945. First of all, it examined Woocheon's(Cho Wan Goo) activities that intended to organize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韓國獨立黨) and unification of the nation against Japan. Secondly, it tried to observe establishment of the national foundation platform (建國 綱領) which pursued equality of politics, economy, education based on Samkyun Doctrine(三均主義). And then, it tired to investigate Woocheon's(Cho Wan Goo) activities regarding a process that the Korean restoration of independence army(韓國光復軍) becomes the direct control under military force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Finally, it tried to observe the organized system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Chongqing(重慶臨時政府) with priority given to 4th reform bill, which is based on president organization system(主席制), and 5th reform bill, which is based on president & vice president organization system(主席․副主席制). 임시정부가 1940년 중경에 정착한 이후 1945년 해방을맞이할 때까지 重慶臨時政府에서 우천 조완구의 활동을 고찰해 보았다. 먼저韓國獨立黨의 창당과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지향했던 조완구의 활동 및 三均 主義를 기본원칙으로 하여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추구하고자 했던 建國 綱領의 제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韓國光復軍이 임시정부의 직할군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4차 개혁안인 主席制, 5차 개혁안인 主席․副主席制를중심으로 조직체제의 변화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중경임시정부 시기 우천 조완구의 독립의지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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