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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왕의 도시에서 낭만의 공간으로 — 남경 진회하(秦淮河)

        李玟淑(Lee, Min-Sook) 한국중국소설학회 2020 中國小說論叢 Vol.62 No.-

        이 논문은 남경 진회하의 명칭과 유래, 문덕교, 강남공원을 중심으로 남경 진회하가 어떻게 낭만과 풍류의 공간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남경은 金陵, 秣陵, 建康, 應天, 京師, 天京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중국 남쪽의 수도이다. 한 도시가 이처럼 다양한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 속에 담겨진 이야기가 많다는 의미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 남경을 유유히 흐르는 진회하가 있다. 진회하는 남경의 젖줄이자 역사문화의 강으로, 넘쳐나는 남경의 왕기를 잘라내고자 한 진시황에 의해 역사무대에 등장했다. 진회하는 도시의 이름이 바뀌는 동안의 남경의 지난한 시간을 함께했다. 즉 군사요충지로서의 남경,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의 남경, 태평천국의 좌절, 남경대학살, 국민당과 공산당의 혈투, 아편전쟁으로 인한 굴욕적인 조약의 도시로서의 남경을 함께 했다. 그러나 남경은 또한 진회하와, 진회하와 강남공원을 잇는 문덕교를 통해 풍류와 낭만의 공간인 남경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문덕교는 남경의 합격률을 높일 목적에 文氣를 모으기 위해 건설된 다리이다. 문덕교는 江南貢院과 진회하 양안의 기방 사이 즉 이성과 욕망의 경계에 놓인 다리이다. 이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면 군자라는 명성도 얻고 급제의 확률도 높이겠지만, 이 다리를 건너면 慾界의 仙地가 기다리고 있다. 본 논문은 문덕교를 건넌 많은 명사들과 재미난 별명을 가진 기녀들이 어떻게 남경과 진회하를 풍류와 낭만의 공간으로 만들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Nanjing Qinhuai River became a space of Talented and Romance, focusing on the name and origin of Qinhuai River in Nánjīng, Moon Deok Bridge and Jiangnan Examination Hall. Nanjing is the capital of southern China with various names such as Jīn líng(金陵), Mòlíng(秣陵), Jiànkāng(建康), Yīngtiān(應天), Jīngshī(京師), Tiānjīng(天京) and the fact that a city has such a variety of names means that there are many stories contained in it. At the center of this story is Qinhuai River, it flows through central Nanjing and is called ‘Nanjing s mother river’. Qinhuai River was born by a Qín Shǐ Huáng(秦始皇), who tried to cut off the overflowing energy of the king of Nanjing. The Qinhuai River has spent countless times of history when the name of Nanjing has changed, With Nanjing as a military hub and Nanjing as a center of maritime transport, it created a space of Talented and Romance. In this thesis, it was considered that the bridge called Moon Deok Bridge played a central role. Moon Deok Bridge is built to gather literary energy for the purpose of increasing Nanjing s the state exam pass rate. Moon Deok Bridge is a bridge between reason and desire, between the Jiangnan Examination Hall and The Qinhuai River. If you do not cross this bridge, you will gain a reputation as a ‘Jūnzi(君子)’ and increase your chances of passing the state exam, but if you cross this bridge, a place of desire awaits. It is described that many celebrities who crossed Moon Deok Bridge and Jìnǚ(妓女) with interesting nicknames made Qinhuai River of a space of Talented and Romance.

      • KCI등재

        1930년대 중국의 금융통일과정에서 본 중앙과 지방 - 광동성의 지방화폐 정리과정(1936-1938)을 중심으로

        강진아 ( Jin A Kang ) 한국중국학회 2002 중국학보 Vol.46 No.-

        本論文探討通過分析南京政府整理廣東省金融的過程, 探討中央政府如何進行廣東省 內外的商人階層的動向, 闡明30年代正是中國財政史上的一個曆史性轉期. 進而描述因此導致的中央-地方關系和國家-社會關系上的質變. 本文在結構上把30年代的廣東省政府的財政政策分成三個方面, 卽稅制改革, 財政包辨制度的改革和金融制改革, 逐次討論每個改革. 上述的三個政策不但是廣東省政在財政經濟政策上的核心政策, 而且타使圍綾財源的中央地方之間的矛盾暴露出來, 井且在廣東省政府·中央政府和商人階層之間引起了巨大的爭論. 廣東省從淸末以來形成了獨自的小洋圈, 與以上海爲中心的大洋圈隔離. 可是到1930年代, 統一貨幣金融的時機成熟, 在1933年實行了廢兩改元, 接而在1935年11月上實施了南京政府的幣制改革. 30年代時期在中國貨幣金融史上可算是個迎接轉機的時期. 1935年11月, 南京政府宣市法幣改革, 廣東省政府爲了維持割??獨立的地位, 違背南京政府的章程, 把以小洋爲本位的省券作爲廣東法幣, 禁止銀錢的流通, 實行了獨自的幣制改革. 其內容與南京的法幣政策同樣也是管理貨幣制度, 換言之, 政府壟斷發行貨幣的大權, 政府發行的不換??幣成爲在市場上唯一的合法性貨幣. 只是在貨幣的本位方面一個是小洋一個是大洋, 實行貨幣改革的主體不同而已. 廣東省政府的法幣改革開始呈現出順利勢頭, 省券的發行量一下子增加到一億以上, 取以代之政府購了大量的銀錢, 財政殷實了. 但是不久進入到1936年以來, 廣東省券(廣東法幣)在金融·匯??市場上開始. 實行管理通貨制之后, 在廣州地區省政府的行政力量加强, 取締折省券或者拒用省券的行爲, 避免??風潮, 但是民間市場對省券和陳濟棠政權的不信任通過港幣投機行爲和匯价暴漲表現出來了. 像??頭那樣政府行政力量顧及不到之處, 不久復活了雜種貨幣流通的情景, 特別從外地偸進到??省的南京政府法幣廣泛流通, ??民看好南京的法幣. 廣州的匯??危機越來越嚴重, 再加上英國和香港政府一邊支持南京政府, 영一邊利用此機會試圖提高港幣在華南地區的地位匯??危機, 暗中煽動金融波動. 結局, 因此可以說1936年的金融危機是南京政府, 廣東省政府和外國之間的政治矛盾的表現, 也是陳濟棠政權下?的導火線. 其實, 兩廣事變可以說是?濟棠在?不得?情況之下的無??的選擇. 南京政府從接受廣東省以來, 爲了改造廣東金融,井將廣東小洋法幣而合井爲南京法幣, 實施了기個階段性的描階. 當時圍繞小洋和大洋之間的比价, 廣東省民和以上海爲主的外省官民再次發生了衝突. 對于小洋和大洋的交換率, 南京政府內的官僚與浙江金融財閥支持大槪從155到160之間的比率, 廣東與論堅決支持130以下的比率, 要求提高小[毫幣]的評價. 廣東商人和軍府組織了請願運動. 南京政府採取二階段的辨法, 先把法幣(大洋)和毫幣(小洋)的交換率暫定固定在150, 後來到1937年6月公市統一幣制令, 分式選擇144案, 一方面接撫廣東的地方與論, 영一方面宣市到1938年元旦正式停止毫幣的流通, 要完成統合全國貨幣的大工程. 實際上, 幣制統一令順利地被按受到廣東省民的生活裏面, 廣東商人團體自發把物價本位從小改變到大洋, 在????業務上, 大洋化的政策基本上成功了. 但是, 中日戰爭的勃發斷了金融統一的時流, 戰爭引起廣東省民對法幣的懷疑, 法幣的信用越來越抵, 相反幣越來越被受到省民的歡迎, 廢止毫幣的原案不能按時實現, 却毫幣大大擴大了流通範圍. 只站在考廬結果的立場, 南京政府的金融政策中途挫折, 但在這個過程當中, 南京政府漸明了調地城利益和國家利益的卓越能力, 逐漸獲得了廣東省民的信任. 這些個案硏究的集積逼歷史家重新評價南京政府的流治力量.

      • KCI등재

        《儒林外史》와 南京

        崔亨燮 한국중국소설학회 2017 中國小說論叢 Vol.52 No.-

        본 논문은 남경이라는 도시에 초점을 맞추어 18세기 중국 소설인 吳敬梓(1701-1754)의 《儒林外史》를 분석해 보려는 목적에서 쓰여졌다. 오경재는 안휘성 全椒縣 출신으로 雍正11년(1733) 33살 때 남경으로 이사한 후, 줄곧 그곳에서 살다가 54세 때 揚州에서 病死한 후 남경에 묻혔다. 생애 중후반 20년 남짓 살았던 남경은 그에게 있어서 제2의 고향이자, 고향보다 더 사랑한 도시였다. 《유림외사》 속에는 고향에서의 경험과 세태, 가문과 繼父에 대한 기억 등 그의 일생이 곳곳에 녹아져 있지만, 특히 남경이라는 도시 공간, 그곳에서 교류하며 만났던 많은 사람들, 주변 도시에 대한 여행의 경험 등이 중요한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먼저, 《유림외사》의 전체적인 공간적 배경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江南’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江南 중에서 다시 ‘남경’이라는 도시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먼저 20년 넘게 남경에 살면서 경험한 것들을 작품 속에 반영한 결과이다. 다음으로 명청 시기 강남의 특별한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강남은 단순한 지리적 개념을 넘어서서 풍요로운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문화적 우월감을 내포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유림외사》에서 북경이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로 그려져 있다면, 남경은 이와 대조적인 가치와 지향을 상징하는 재야 사인들의 중심도시로 그려져 있다. 《유림외사》는 오경재가 살았던 18세기 당시 청조 사회, 타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강남 士人들에 대한 愛憎의 감정이 투영되어 있다. 다음으로, 《유림외사》 속 남경은 크게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격의 문화도시, 흥망성쇠의 역사를 표상하는 도시, 市隱들의 안식처로 그려져 있다. 남경에 대한 긍정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이미지는 활력을 잃고 점차 세속화되어 쇠락해 가는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남경에 대한 이런 이미지는 우선 청조가 들어선 후 남경의 위상 변화와 관련이 있다. 永樂帝의 북경 천도 이후에도 兩京 제도 하에서 명대의 남경은 여전히 留都로서 방대한 지역을 관할 통제하는 정치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의 중심도시였다. 청조를 세운 만주족은 남경을 점령한 후 留都로서의 지위를 박탈하고 江寧府로 격하시켰다. 또한 강희⋅건륭제 시기에 진행된 강남 士人에 대한 다양한 회유 포용 정책으로 그들의 응집력과 자부심도 점차 약화되어 갔다. 그와 함께 남경이라는 도시의 정치, 학술, 문화적 위상과 의미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유림외사》에 묘사되어 있는 남경 이미지 속에는 상술한 것과 같은 복합적인 상황과 맥락, 의미가 투영되어 있다. In this paper I analyzed the 18th century Chinese novel, Wu jingzi(吳敬梓, 1701-1754)’s Rulinwaishi(儒林外史), especially focusing on relations with the city of Nanjing(南京). Wu jingzi was born in the country town known as Quanjiao(全椒), Anhui province and moved to Nanjing at the age of thirty-three(Yongzheng 雍正 11). After dying in Yangzhou(揚州), Jiangsu province, he buried in Nanjing at the age of 54. He lived in the so-called second hometown Nanjing, during over twenty years. It may be said that he loved Nanjing more than his hometown. Though hometown’s life and society, the memories of his father and family were reflected in Rulinwaish, it can be indicated that what influenced on his creating work were mainly as follows: the city space of Nanjing, interactions among Nanjing’s literati, and travel experiences of near cities etc. After analyzing spatial background of Rulinwaishi, I got the following result: this work generally focused on Jiangnan(江南) region, and especially focused on Nanjing as the central city of Jiangnan. First of all, it was result to reflect what writer Wujingzi lived and experienced in Nanjing during over twenty years. Second, We need to remember the peculiar concept and meaning of Jiangnan in the Ming-Qing dynasties. The concept of Jiangnan at that time had special meaning to involve cultural superiority based on abundant economic foundations beyond the pure geographic concept. In Rulinwaishi, the capital Beijing was described as the city to symbolize politics and power, in contrast, Nanjing was described as the central city of the literati to remain out of government. Rulinwaishi contain not only criticism to the other, the 18th century Qing society, but also ambivalent emotions of love and hatred for Jiangnan’s literati involving writer himself. I would also like to indicate the three images of Nanjing in Rulinwaishi: cultural city of the liberal atmosphere, city to represent the history of ups and downs, and refuge of city recluse. Despite positive aspects of Nanjing, it can be said that the general image was described as being secularized badly, and declining with loss of vitality. Though Yongle(永樂) emperor transferred the capital from Nanjing to Beijing in the early 15th century, old capital Nanjing under two capitals system still had strong influence on vast surrounding region. Nanjing was Jiangnan’s cental city in politics, economic and culture. Nanjing in the Ming dynasty was also Jiangnan literati’s mental capital until the early Qing dynasty. But it degraded an ordinary city, Jiangning fu(江寧府) under Manchu rule. The status and meaning of Nanjing grew weak among Jiangnan’s literati with Kangxi(康熙) and Qianlong(乾隆) emperor’s appeasement policies. Multiple context and meang as mentioned above, were reflected in images of Nanjing in Rulinwai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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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서울 연구의 흐름과 과제

        김도연 서울역사편찬원 2018 서울과 역사 Vol.- No.100

        Seoul has history of 2,000 years, and it was second level metropolis during middle ages-Goryeo Dynasty. It was called Yangju, Namgyeong, Hanyang. After King Munjong set up the city, it was called Namgyeong. It was not a capital, but it was second largest and nearest city of capital Gaegyung. And now it is biggest city and capital of Korea. But there is a very short study of the Seoul area in the Goryeo Dynasty. Early studies are focused on installation of Namgyeong, and its change processes. King Munjong set up Namgyeong, King Sukjong rebuilt the city and the palace. And the scholars of early days thought the purpose of building Namgyeong was based on feng shui geography. In the 1990s the studies on Namgyeong was further deeper. People, administrative organization, king’s march, population of Namgyeong had been studied. But only two research books were published in the early 2000s, there is no more specialized research books on Namgyeong. In 2014~2016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published <2,000 history of Seoul>. And It has 3 books of Goryeo period section. There are studies on politic, economy, religion, culture, etc. of Namgyeong. Of course, there are limitations such as the lack of new theories in the existing discussions and the lack of discussion in the socioeconomic and ideological cultures, but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the research of Namgyeong in the Goryeo period has been faithfully compiled. However, the research on Namgyeon in the Goryeo Dynasty is still lacking. The main reason is the lack of historical data. Eventually we have to find another way. And excavation of artifacts and relics can be a good solution. They will fill the shortage of historical data. 서울의 2,000여 년의 역사에서 중세사회였던 고려시대에는 부도로 서 존재하였다. 고려시대의 서울 지역은 수도는 아니었지만, 그 다음 의 위격을 갖는 주요 대도시로서 지방 행정 조직의 최상단에 위치해 있었으며, 수도 개경의 가장 근거리에 위치한 중요 도시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격에 비해 고려의 남경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초기의 연구는 문종・숙종 조의 남경 설치와 변화 과정을 순차적으 로 주목하였고, 남경의 설치 원인을 주로 풍수지리사상과 연결해 해 석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남경 연구가 조금 더 심화되어 남경의 인물, 남경 관원과 행정조직, 국왕의 남경 순행, 남경의 인구와 사회 등으로 연구 범위가 확장되었다. 더불어 남경 설치의 정치적 배경을 다시 살피기도 하고, 문종조의 남경 설치를 다시 생각해야한다는 주 장 등 다양한 논의가 펼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종합연구서가 2000년대 초반에 2권 발표되었을 뿐, 남경에 대한 정치・경제・사상・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우리나라 역사의 통사적 입장에서 중세 서울을 다룬 연구서적이 등장하지 못한 한계 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역사편찬원(구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 원회)에서 발간한 서울2천년사 고려편은 매우 의미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존 논의에 새로운 이론을 더하지 못해 논의 확장 하지 못한 점, 사회경제・사상문화 부분 등에서 사료의 부족으로 추론 이 많다는 점 등은 한계를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고려시대 남경 연구를 충실히 정리하고 이를 편찬했다는 점은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남경은 연구도 부족하고, 연구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상태이다. 부족한 사료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고려 시대의 남경의 위상과 현재 수도 서울의 위상에 비춰볼 때 중세사회 인 고려시대의 부도 남경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매우 부족한 것이 현 실이다. 高麗史 세가와 지리지의 일부 기록과 백관지의 행정조직, 식화지의 관리 녹봉 규정 등이 전부인 사료로는 남경의 구체적인 운 영, 경제생활, 사상과 문화 등을 심도 깊게 살펴보기란 사실 상 불가 능하다. 결국 다른 방식의 연구만이 부족한 사료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해 결책이라고 생각되는데, 바로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좀 더 주목할 필 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발굴지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먼저 이미 알려진 고려시대 유물과 유적에 대해서도 재조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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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경과 남경 사이

        최종현(Choi, Jong-Hyun)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6 서울학연구 Vol.- No.63

        고려의 간선도로망과 역참제도는 12목 제도와 더불어 성종 시기(재위 981-997)에 정립되었으며 개경과 남경 사이를 오가던 간선도로는 ‘청교도(靑郊道)’에 속하는 대로였다. 고려시대 남경에 궁궐이 조성되면서 수도 개경에서 남경으로 향하는 청교도 상의 노정에 변화가 생기고 이전에 양주로 접근하는 두 갈래 길이 대로로 정비되면서 동대로와 서대로가 조성되었다. 왕실의 순행 목적에 따라서 노정은 선택적으로 이용되었는데 피난 등 급하게 움직일 일 때에는 직로(直路)가 불렸던 서대로가 이용되었다. 개경을 출발하여 청교역을 거쳐 임진강을 건너고 도솔원, 광탄원, 분수원, 혜음원, 벽지역, 덕수원, 영서역을 지나 장의문을 통과하여 홍제원에 이르는 노선이다. 반면 개경에서 남경으로 왕실의 의전 행차가 있을 때에는 비교적 평탄한 길로 이어진 동대로가 주로 이용되었다. 마산역에서 동쪽으로 향해서 차유령을 넘어서 견주 치소, 녹양역, 해촌을 지나 노원역, 남경역, 남경으로 이어지는 노정이었다. 고려의 간선도로망과 역참제도는 조선이 개국하면서 변했다. 고려 남경 시기의 역원들이 재편되어 일부 역은 양주목 관할하에 배치되면서 그 위상이 격상되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했으며 한양부 관할 하에 역 이름 개가 새로 나타나기도 했다. 중국 사신을 위하여 직로(서대로) 상의 사신들 노정에 있던 절을 원으로 고쳐 홍제원이 조성되었으며 흥인문 동쪽 5리 되는 곳에 기로와 재추들을 위하여 보제원이 설치되었다. 결과적으로 고려시대의 청교도는 와해되었으며 이때 남경역은 그 명칭이 사라졌다. 더불어 고려시대 의전으로 이용되던 동대로는 그 기능과 역할이 크게 바뀌었다. 조선시대 후기-인조대부터 왕실의 능들이 많이 조성되었으며 그에 따라 능행로가 조성되었다. 파주에 장릉이 조성되면서 이전 서대로 구간 일부에 능행을 위한 갈래길이 새로 조성되었으며 영조대에는 장릉을 파주에서 교하로 천장하면서 고려시대 서대로와는 별개로 완전히 새로운 능행로가 조성되었다. 새로 조성된 노선들이 서로 만나는 결절 지점에 있는 원(院), 신원(新院)이 수시로 이용되었다. 고려시대 남경유수관 양주 관할 하에 설치되었던 견주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하나의 현으로 양주에 속했다가 이후 해체·흡수되면서 사라졌다. 견주는 충숙왕 때에 덕비(德妃) 홍씨로 인해 고려사에 나타나고 조선 태종실록에도 등장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거란족을 비롯하여 여진족, 몽고족, 한족이 고려에 귀화해왔는데 그들의 일부가 견주에 정착해 살았다. This studies is on the (re)forming and change of paths(roads) and stations between Gaegyung(開京-the capital city of Corea dynasty) and Namkyeong(南京) from Corea dynasty to Joseon dynasty. Many stations had accomodations of staying and eating on the road of Cheonggyodo(靑郊道) which was the main path between Gaegyung and the other southern areas. Seoul was called Namkyeong where royal palace was built in Corea dynasty. Many famous buddhist temples had been constructed in the Mountain of Samgaksan near Namkyeong. The two roads(East and West road) were made to go to Namkyeong from Gaegyung for many kings to visit the royal palace or buddhist temples in Corea dynasty. West road was made to move the royal shrine of the first king of Corea dynasty to the Mountain of Samgaksan(三角山) urgently during the war and was called straight course. East road was constructed for the king’s ceremonial visit to Namkyeong since the royal palace was built there. At the beginning of Joseon dynasty, the station system of Corea was changed and Cheonggyodo was deconstructed. West road was used for royal envoy to go to Ming dynasty from the new capital city, Seoul and the status of East road was changed. The name of Namkyeong station in East road disappeared and the names of some stations in West road were changed. In the late Joseon dynasty, new paths were made in the some part of West road when many royal tombs were constructed in the north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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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전쟁시기 일본점령지로서 남경(南京)의 극장 연구(1937-1945)

        유우 ( Liu Yu ) 한양대학교 현대영화연구소 2019 현대영화연구 Vol.15 No.1

        본 연구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점령지로서 중국 남경 지역의 극장을 대상으로 전쟁 시기 극장의 명칭과 소유권, 기능의 전변, 그리고 영화 상영활동의 양상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남경(南京)은 근현대의 중국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도시였다. 1916년 원세개(袁世凱) 사후 10년이 넘는 군벌 전란으로 인해 남경의 시국은 지속적으로 요동쳤으며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화 상영활동도 거의 미개한 상황이었다. 1927년 4월에 이르러 장개석(蔣介石)을 중심으로 조직된 중화민국 국민정부(國民政府)가 남경에 성립됨에 따라, 남경은 수도로서 비로소 곤경에서 벗어나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남경에서 영화의 상영활동은 극장의 발흥과 유성영화, 특히 외화의 유입으로 새로운 모습을 찾게 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남경의 영화산업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1937년 12월 일본에 함락된 남경에서 극장들은 크게 파손되었고 영화 상영활동은 모두 일시 중단되었다. 1938년 하반기부터 남경의 극장들이 잇따라 복구됨에 따라 영화 상영활동은 점차 재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전시 통재로 일본점령지 남경에서 극장과 영화문화는 전쟁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시기 이데올로기와 흥행 사이에서 영화문화가 어떻게 재편되어 갔는지 고찰하는데 주력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ore the changes in name, ownership, function, and screening of theaters in Nanjing region of China as an occupied territory of Japan since the breakout of Sino-Japanese War in 1937. In modern China, the city of Nanjing was an important political city. Before 1927, Theaters in Nanjing were not screening any movies either caused by the Warlord Era that lasted for over 10 years. After the Nationalist Government was established by Chiang Kai-shek in April 1927, Nanjing was finally able to get out of poverty and advance forward. In addition, the movie industry in Nanjing transformed with a sudden success and sound movies, especially influx of foreign fund. The movie industry in Nanjing hit its prime by mid-1930’s just prior to the war. As the city fell by Japan in December 1937, most theaters got destroyed and all movie screenings stopped. Starting late 1938, theaters in Nanjing began to be restored and so did movie screenings. Yet, the existing film culture of Nanjing residual after the colonialism of Japan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at of prior to the war. This article focuses to contemplate on how the film culture reorganized between ideology and entertainment.

      • KCI등재

        고려 국왕의 南京 巡幸과 儀禮

        김철웅 서울역사편찬원 2013 서울과 역사 Vol.- No.85

        Royal tour of Koryo Kings was to go round their people and territory. Most kings had an inspection tour to Seokyeong and Namkyeong. The capital city based on the three in Koryo was rationized by the theory of Geomancy. Koryo dynasty established the Southern Capital(Namkyeong) around the presentday Seoul city. The Southern Capital region was called Yangju during the reign of King Taejo of Koryo dynasty. King Munjong wanted to build the southern Capital, but the project could not be finished. Kim Wije suggested to King Sukjong rebuilding of the southern Capital and the capital relocation. Royal tour to the Southern Capital was irregular visit, the highest form of domination. It took about 3~4 days, or 9~10 days long from Gaekyeong, main capital city, to Namkyeong. Royal tour was marked by ceremonial pomp and was courtesy protocol. And Royal tour involved a welcoming ceremony consisting of a review of military honor guards, parades, and the playing of royal musics by a military band. Royal tour to the Southern Capital included a Arrival Ceremony at Namkyeong. It was often with a formal address for the people. Royal tour to the Southern Capital was included usually accompanied by a senior government minister. The southern Capital was accorded a higher status than ordinary prefectures and counties. Among the three secondary capitals, the southern Capital was lower in status than the Western capital, and on a par with the Eastern capital. But as for ceremony the southern Capital' status was on a par with the Western capital. 고려의 남경은 개경, 서경과 함께 삼경으로 취급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에 남경 순행의 왕래 과정, 체류 시기 등의 여러 상황, 그리고 순행과 관련한 의례를 살펴보았다. 개경에서 남경까지, 그리고 남경에서 환궁까지 소요되는 시일은 일정하지 않아 빠르면 대략 4·5일이, 늦으면 14일이 걸렸다. 그렇지만 대체로 9~10일이 걸린 경우가 많았다. 아마 직로는 4·5일이, 우회로는 9·10일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체류 시일은 짧게는 3~4일(인종·의종), 길게는 30일, 37일, 65일 등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순행 기간은 짧게는 17~18일 정도였고, 길게는 42일~83일 등이었다. 장기간 순행한 것은 남경 순행 후에 장원정에 순행하여 환궁하였기 때문이다. 남경 순행 시기도 일정하지 않았는데, 대체로 8월·9월 경에는 남경을 순행하고 있다. 남경까지는 이른바 ‘임진 도로’와 ‘장단 도로’ 상의 역로를 이용하였을 것인데 국왕 순행 시에는 驛·館 보다는 주로 院을 이용하고 있다. 국왕들이 서경 및 남경 지역을 순행한 것은 태조의 훈요십조와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순행 전후의 통치 행위를 볼 때 국왕의 巡幸은 『서경』과 『예기』 등의 유교 경전에 밝힌 ‘省方’의 실천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고려 국왕들이 남경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풍수지리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순행은 정치적 행위로서 천자인 고려 국왕이 지역(남경)을 순수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국왕들은 남경을 행차할 때 지나온 주·현에 조세 감면의 등의 혜택을 주었고, 명산대천에 제사와 봉작을 내렸다. 남경 순행 의례는 「서남경순행의장」, 「서남경순행회가봉영의장」, 「西南京巡幸還闕奉迎鹵簿」, 「按察使別銜及外官迎行幸儀」 등이 있었다. 이들 의장에는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는데, 「서남경순행의장」은 「조회의장」 보다 많고, 「서남경순행회가봉영의장」은 고종 9년에 정한 「宣赦衛仗」 보다 더 많았다. 「서남경순행회가봉영의장」의 인원은 「법가의장」, 「중동팔관회출어위장」 다음으로 많은데 이들 의례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순행 의례는 「서남경순행의장」→「안찰사별함급외관영행행의」→「서남경순행회가봉영의장」·「서남경순행환궐봉영로부」의 순서였다. 남경 순행에서 돌아와 의봉문에 도착하면 덕음을 반포하는데 充庭 儀式으로 거행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에 삼경의 위상은 서경, 동경, 남경의 순서였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남경이 서경과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품계나 순행 의례에서는 동일하였다. 남경은 고려시대에 수 차례에 걸쳐 천도가 논의되었을 만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순행 의례를 보면 순행 인원은 개경에서 거행된 주요 의례와 별반 차이가 없는 대규모였고, 수행 관료도 分司와 같은 규모였다. 따라서 국왕이 ‘京’을 순행한다는 의미에서 서경이나 남경이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즉 의례상으로 남경은 서경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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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전쟁시기 일본점령지로서 남경(南京)의 극장 연구(1937-1945)

        LIU YU 한양대학교 현대영화연구소 2019 현대영화연구 Vol.15 No.1

        본 연구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점령지로서 중국 남경 지역의 극장을 대상으로 전쟁 시기 극장의 명칭과 소유권, 기능의 전변, 그리고 영화 상영활동의 양상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남경(南京)은 근현대의 중국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도시였다. 1916년 원세개(袁世凱) 사후 10년이 넘는 군벌 전란으로 인해 남경의 시국은 지속적으로 요동쳤으며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화 상영활동도 거의 미개한 상황이었다. 1927년 4월에 이르러 장개석(蔣介石)을 중심으로 조직된 중화민국 국민정부(國民政府)가 남경에 성립됨에 따라, 남경은 수도로서 비로소 곤경에서 벗어나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남경에서 영화의 상영활동은 극장의 발흥과 유성영화, 특히 외화의 유입으로 새로운 모습을 찾게 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남경의 영화산업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1937년 12월 일본에 함락된 남경에서 극장들은 크게 파손되었고 영화 상영활동은 모두 일시 중단되었다. 1938년 하반기부터 남경의 극장들이 잇따라 복구됨에 따라 영화 상영활동은 점차 재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전시 통재로 일본점령지 남경에서 극장과 영화문화는 전쟁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시기 이데올로기와 흥행 사이에서 영화문화가 어떻게 재편되어 갔는지 고찰하는데 주력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ore the changes in name, ownership, function, and screening of theaters in Nanjing region of China as an occupied territory of Japan since the breakout of Sino-Japanese War in 1937. In modern China, the city of Nanjing was an important political city. Before 1927, Theaters in Nanjing were not screening any movies either caused by the Warlord Era that lasted for over 10 years. After the Nationalist Government was established by Chiang Kai-shek in April 1927, Nanjing was finally able to get out of poverty and advance forward. In addition, the movie industry in Nanjing transformed with a sudden success and sound movies, especially influx of foreign fund. The movie industry in Nanjing hit its prime by mid-1930’s just prior to the war. As the city fell by Japan in December 1937, most theaters got destroyed and all movie screenings stopped. Starting late 1938, theaters in Nanjing began to be restored and so did movie screenings. Yet, the existing film culture of Nanjing residual after the colonialism of Japan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at of prior to the war. This article focuses to contemplate on how the film culture reorganized between ideology and 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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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南京圖書館 소장 한국관련 고문헌에 대한 분석

        朴現圭 열상고전연구회 2018 열상고전연구 Vol.65 No.-

        본 논고는 중국 남경도서관에 소장된 한국관련 고문헌을 실물 조사한 뒤 특별히 소개해야 할 책자를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남경도서관은 1907년(광서 33)에 양강총독 端方이 세운 강남도서관으로부터 출발했다. 그 후 江蘇省立第一圖書館, 第四中山大學國學圖書館, 江蘇大學圖書館, 中央大學區立國學圖書館, 江蘇省立國學圖書館, (남경)國立中央圖書館 등으로 개명 또는 합병되었다. 1954년 남경도서관으로 개명된 이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 중국 제3의 도서관으로 꼽히고 있다. (남경)국립중앙도서관장 구장본은 현 (대만)국가도서관과 (중국)국가도서관 고적관(북해분관)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남경도서관 소장 한국관련 고문헌의 출처를 보면 청말 4대 장서가인 정씨의 팔천권루, 무창 장서가 범지희의 목서향관, 왕정위정부 시절 진군의 택존서고 등 구장본이 상당수 있다. 한국관련 고문헌 가운데 타도서관에서 없거나 찾아보기 힘든 책자, 동아시아 서적 유통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책자들이 상당수 보인다. 명 만력간본 조선총서 『유헌록』 잔책본, 1914년부터 1916년에 전병훈이 중국 명사들로 받았던 서찰을 모은 『고려전병훈상서각당도서고』는 유일본이다. 『인재선생집』, 『어정규장전운』 등은 청 명인들의 묵기가 적혀 있다. 『고려사』, 『제중신편』 등은 청 명장서가들의 장서인 또는 초록이 보인다. 『통문관지』, 『동국통감』은 청말에 중국대륙으로 흘려 들어왔던 일본 필사본이다. 『조선태조고황제실기』, 『용비어천가』 등은 북경대학 출신 위건공이 1927년에 서울에서 구입한 책자이다. The article investigated the Korean rare books in Nanjing library of China, and analyzed the results. The Nanjing library originated from the Jiangnan library(江南圖書館) in 1907 (33rd year of the reign of Emperor Guangxu). Later it was renamed or merged as Jiangsu Sengli Diyi library(江蘇省立第一圖書館), Disi Zhongsan University Guoxue library(第四中山大學國學圖書館), Jiangsu SengliGuoxue library(江蘇省立國學圖書館) and (Nanjing) National Library of China(中央圖書館). In 1954 it changed its name as Nanjing library of China. It is regared as one of the top three libraries in China. Among the Korean rare books collected in the Nanjing library of China, there are Ding Baqian juanlou, Muxi xiangguan(木樨香館) of Fan zhixi(范志熙) and Zecun shuku(澤存書庫) of Chenqun(陳群). The collections in the Nanjing library constitutes the ancient Korean literatures owned in the National library of Taiwan and the National libray of China (Beihai annex; the annex of ancient literatures). 『Youxuanlu(輶軒錄)』, written about Joseon, during the reign of Emperor Manli(萬曆), and the 『Gyoryeo jeonbyeonghun sangseogo(高麗全秉薰上書各當道書稿)』 in which Jeon byeonghun(全秉薰) collected letters from Chinese celebrity from 1914 to 1916, are the only books. In 『Injae munjip(忍齋先生集)』 and 『Gyujang jeonok(奎章全韻)』, handwritings of Ching celebrity are written. In 『Gyoryeosa(高麗史)』, 『Jejung sinpyeon(濟衆新編)』, there are ownership stamps and abstracts of famous Ching bookcollectors. The 『Sopa nyeosa sijip(小坡女士詩集)』 of O hyowon(吳孝媛), 『Joseonsa(朝鮮史)』 of Kim gyeongjung(金暻中), 『Tangdo gihaeng(湯島紀行)』 of Gong seonghak(孔聖學), and 『Cheonyu sijip(天游詩集)』 of Park mungyu(朴文逵) are thought to be donated by the authors or the persons concerned. Also there are 『Joseon taejo gaohwangje silgi(朝鮮太祖高皇帝實紀)』 and 『Yongbi eocheonga(龍飛御天歌)』, which Wei jinggong(魏建功) of Peking University bought from Seoul in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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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京方言中的“A得一米”使用情况调查及分析

        정성헌 한국중국문화학회 2012 中國學論叢 Vol.37 No.-

        남경(南京)은 중국의 4대고도(古都)중 하나이며, 화동(華東)지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남경방언은 역사상 오랫동안 중국의 관화(官話)로 사용되었으며,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강회(江淮)방언과 오(吳)방언이 동시에 존속해 왔다. 하지만, 명대에 이르러 대량의 인구이동으로 현재는 강회방언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인구변동은 남경방언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보통화의 보편화로 인해 현재 중장년층과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남경 말은 엄격히 말해 기존의 남경방언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이들은 어떠한 정도를 조금 과장되게 표현함에 있어 “A得一米”형태의 문장 형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一米”는 원래 거리나 높이를 나타내는 단위인데, 정도부사의 변형된 형태로 대체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본고는 현재 남경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형태들의 문형 분석을 통해 “一米”가 정도부사로 사용되게 된 원인과 배경, 변화과정을 추론해 보았다. 또한, 설문조사를 통해 남경지역에서 유행하고 있는 “A得一米”문형의 실제 사용실태를 사회언어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고, 남경거주 본지인과 외지인들이 이러한 형태의 유행어 사용 및 습득에 있어서의 인식차이와 태도차이를 판단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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