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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맹의 정신론

        정세근 대동철학회 2015 大同哲學 Vol.70 No.-

        이글은 공맹의 정과 신의 용법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다.『노자』와 『장자』에서는 점진적으로 정과 신에 대한 강 조가 도드라지며, 마침내 『회남자』에 이르러 정신의 탄생이 정식화된다. 이 과정 속에서 신은 정에 대한 우위를, 정신은 형해에 대한 우위를 갖게 된다. ‘귀신’에서조차 신은 귀에 앞선다. 이런 경향은 정신의 독립적인 영역을 확 보하려는 도가의 철학적 자세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런데 절대적 자아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가의 경우는 이와는 상반된 현상이 나타난다. 유가에게는 객관세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사회나 국가의 역할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개인의 정신보다는 문화적 전통 속에서 배태된 예(禮)가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인간에게 예는 사회의 질서와 인간의 규범이다. 『논어』에서 ‘신’은 ‘귀신’의 신으로 7차례 등장한다. 그렇지만 공자는 귀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말할 수 없다면 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귀신보다는 이 세계의 인문화가 공자에게는 중요했다. 『맹자』에서 ‘신’은 단 한 차례 ‘온갖 신’(百神)과 같이 귀신이라는 뜻을 갖지만 그것조차 민의를 담는데 치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백신과 백성(百姓)은 가치적으로 동일선상에 놓인다. 신은 저절로 되는 교화의 신비스러움을 가리 키기도 하며, 인격의 최고경지를 표현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공자와 맹자에게 중요한 것은 정과 신이 아니라 예였다. 나아가 귀신을 뛰어넘는 하늘(天)이야말로 그들이 섬기고 자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영역을 극대화시키는 정신의 역할보다 백성을 이롭게 하는 현실주의가 우선되었 다. This paper aims at arranging Jing(pure matter) and Shen(pure soul) in the philosophy of Confucius and Mencius. Jing and Shen had been emphasized gradually in Laozi and Zhuangzi. Finally, Jingshen(spirituality) which combined Jing and Shen has been born formally in Huainanzi. In this process, Shen is superior to Jing; Jingshen is superior to body(Xinghai: shape and skeleton). Even between Gui and Shen(Guishen: ghost), Shen is proceed to Gui. This sort of tendency is related with Taoist attitude which is willing to ensure an independence of spirituality. However, Confucian who cannot accept an existence of absolute self has the opposite opinion. For them, the most important thing is not only an objective world, but also a role of society or state. Li(rite) which was conceived in the cultural tradition is more meaningful than an individual spirituality. Li is an order of society and a norm of human beings. In the Analects of Confucius, Shen appears 7 times as Guishen(ghost) though Confucius said that he could not know and tell about ghost. Confucius wanted to keep his distance against ghost. For him, humanization of this world is more significant than ghost. In Mencius, Shen appears just 1 time as Guishen. But it means whole ghosts(one hundred ghosts) which represents the will of whole people(one hundred people). Shen also means a mystery of education and the highest stage of character. The most momentous thing is Li rather than Jing and Shen for Confucius and Mencius. Futhermore, They hope to worship Tien(heaven) overcoming Guishen. Their Realistic point of view to benefit people have precedence over spirituality which maximizes the realm of individ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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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장자의 정신론

        정세근 한국동서철학회 2012 동서철학연구 Vol.64 No.-

        이 글은 장자의 ‘정’(精)과 ‘신’(神) 그리고 ‘정신’(精神)을 용례별로 정리했다. 『장자』에서도 정과 신이 연용되는 횟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정은 32차례, 신은 105차례, 정신은 8차례 나온다. 장자의 정은 ‘천지의 정’(天地之精), ‘정조의 정’(精粗之精), ‘정성의 정’(精誠之精), ‘형정의 정’(形精之精)으로 나뉜다. 천지의 정은 산천의 정, 육기(六氣)의 정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의 원질(arche)과 통한다. 모든 생명과 자연의 기원을 가리킨다. 황제나 요순이 인간의 본질(性/性情之情)이나 사물의 원질(物之質)을 망쳐 놓았기 때문에 심양(心養)해서 제 뿌리로 되돌아가자(各復其根)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산천정기’와 통한다. 정조의 정은 대소와 관련된다. 이때 정은 매우 작음(小之微)이다. 사물에는 고움과 거침이 있기 마련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거침이고, 뜻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고움이다. 가장 곱다고 해도 그것은 형태를 갖는 것으로 정은 물질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때 정은 정미(精微)와 통한다. 정성의 정은 오늘날 정성의 뜻과 비슷하다. ‘참’(眞)을 내세우면서 진정한 효성과 충절을 강조하여, 유가의 형식적인 덕목을 나름대로 실제화한다. 참을 얻어라. 술을 먹으면 늘 기쁘고, 상을 당하면 정말 슬프다. 형정의 정은 사람의 형체와 대비되는 정기를 말한다. 형태는 정기로부터 생겨났다. 번거로운 일을 버리면 형체가 힘들지 않고, 어지러운 삶을 버리면 정기가 망가지지 않는다. 형체가 온전하고 정기가 제자리를 찾으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 정력이 몸뚱이를 지탱해준다. 노자의 용례와 비슷하다. 장자의 신은 ‘신령의 신’(神靈之神), ‘형신의 신’(形神之神), ‘귀신의 신’(鬼神之神), ‘신기(神奇)와 신기(神氣)’, ‘신명(神明)’으로 나뉜다. 신령의 신은 대체로 형용사적 용법으로 사람 앞에 붙이거나 술어로 쓰인다. ‘신령스런 거북이’이나 ‘지인(至人)은 신령하다’와 같은 용례가 대표적이다. 형신의 신은 사람의 신체와 대립되는 정신을 말한다. 우리말에서 ‘몸과 마음’이라고 할 때처럼 마음으로 번역될 수 있다. 몸은 연약하지만 마음은 잘 모으고 있다는 식이다. 마음은 몸의 한부분인 눈과 대비되어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몸을 기르는 것보다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 앞선다. 게다가 이 마음은 형체를 뛰어넘어 우주와 자연의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귀신의 신은 오늘날의 귀신을 가리킨다. 귀와 신이 자주 떨어져 사용되지만 신은 귀의 조종자이다. 여전히 귀신은 놀람의 대상이다. 신기(神奇)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으로 냄새나는 것(臭腐)과 상반된다. 그러나 냄새나는 것이 신기가 되고, 신기가 냄새나는 것이 된다. 모두 한 기(一氣)이다. 신기(神氣)는 사람의 신묘한 기운을 가리킨다. 신명은 지극히 신령하고 지극히 순정한 것으로 정신성과 물질성의 최고 형태이다. 오늘날의 ‘천지신명’과 상통한다. 신도 부정적인 용법이 적지 않다. 신기(神氣)가 지나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신이 왕성하다’(神王)는 것도 부적절한 것이고, ‘신성’(神聖)도 버려야 할 것으로 묘사된다. 장자에서 마침내 정과 신이 만나면서 ‘정신이 도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이 등장한다. 정과 신은 그 순수성 때문에 결합하면서 나의 정신만이 아니라 천지의 정신에로 확산되고, 나아가 신명의 지위를 얻는다. 신으로 연결되는 정신과 신명이다. 정신이 탄생하면서 그것의 자유의 의미가 부각된다. 這篇文章按照用例整理出來了庄子的「精」,「神」,以及「精神」. 在庄子中連用精與神的場合不多. 精一字出現三十二次,神一字出現一白五次,而精神此辭부出現了八次而已. 庄子的精分爲「天地之精」,「精粗之精」,「精誠之精」,「形精之精」四種. 「天地之精」可謂是山川之精,六氣之精,相當於古代希臘的原質(arche),指的是所有生命和自然的起源. 三皇五帝삭墮「性情之情」和「物之質」,因此應該以新養各復其根. 此與所謂的「山川精氣」說得通. 「精粗之情」連關於大小, 此時,精爲「小之微」. 事物各有精粗,可以言論者是物之粗,而可以意致者是物之精. 最「精微」的也必須有形,精不能脫離物質性. 「精誠之精」類似於世人所謂的「精誠」. 庄子標榜「眞」,不但强調眞正的慈孝和忠貞,倂且將儒家的形式德目實際化了. 得眞者,以樂飮酒,以哀處喪. 「形精之精」爲對比於形體的精氣,形體來自精氣,是所謂的「形本生於精」. 庄子曰:「棄事則形不老,遺生則精不우」,又曰:「夫形全精復,與天爲一. 」精力保持身體,此相似於老子. 庄子的身分爲「神靈之神」,「形神之神」,「鬼神之神」,「神奇」和「神氣」,及「神明」. 「神靈之神」大體上是形容詞,以「神鬼」或「至人神矣」爲例. 「形神之神」指的是對立於形體的精神,正如:雖然身體虛弱,精神反而可以凝聚. 因爲目是身體的一部分,所以神相對於目,養神重於養形,此神超越身體成爲宇宙自然的普遍心. 「鬼神之神」是今人所謂的鬼神,可是神爲鬼之主,鬼仍然是량訝的對象. 「神奇」相對於「臭腐」.不過臭腐復爲神奇,神奇復爲臭腐,兩者都是一氣「神奇」是人的神妙氣運. 「神明」便是至神至精的,又是精神和物質的最高形態,所謂的「天地神明」相通. 神偶而是否定性的. 有時,神氣過分,如:「神(雖)王」,「巧知神聖」. 在庄子中,終於精與神遇到,闡明了「精神生於道」. 精與神基於純粹性而結合,以得到神明之位. 此是,精神不但是人的,而且擴散到天地,神連系了精神和神明,精神一辭的誕生帶來了自由的觀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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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정신문화와 도덕 교과의 복원

        정세근 한국동서철학회 2022 동서철학연구 Vol.- No.106

        This paper aims to propose a policy making. My subject is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t moral course for promotion of Korean human spiritual culture’. Ethics education in Korean school has undergone all sort of hardship, for example, anti-ethical national ethics, political ethic education, superficial ethic knowledge, not opened solid ethics, and pedagogic pseudo-ethics. As is generally known, ethics course of secondary education is called ‘moral philosophy’ in Austria and Australia. Eventhough Korean ethics course needs ideological education for unification of South and North Korean and moral psychology for pedagogical peculiarity, the main stream is moral philosophy or value. Philosophical society have been made 3 times desperate efforts for education of secondary school ethics. This third period(2021~2022) is held with 27 chairmen committee including 6 nation-wide society for philosophy. At this time, we tolerated all kind of ethics, for example, eastern and western philosophy, and religions. Before applying of high school credit system(2025), Ministry of education planned to notify an education course in 2022. However, it ignored the emphasis of humanity, and for that reason, philosophical society announced a statement(2021.6.25.). In the assertion, there is not only for restoration of independent moral course but also for education for humanity and civic ethics in the secondary school. The moral course of secondary education denotes ‘education for humanity’ and ‘education for citizen’. We have not a law for education for citizen but only a law for humanity now, though. The Goal of moral course is ‘Moral human and his civil justice’. ‘Faithfulness, regard, responsibility’ are applicable to education for individual moral human; values of ‘Justice for society’ to education for civilian. Furthermore, we request an essay writing examination instead of choosing 1 answer among 5 for entering college. It is necessary for ethics education to study classics. We society for philosophy with society for ethics education and society for religion insist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t moral course based on legal background. Education for humanity and citizen is a priority matter whatever your political party are. 이글은 정책 제안을 목표로 한다. 내게 주어진 주제는 ‘대한민국 인문정신문화 창달을 위한 도덕 교과의 독립적 위상 복원’이다. 윤리적이지 않은 국민윤리, 정치학으로 변형된 윤리교육, 심도 없는 윤리적 지식, 개방되지 않는 폐쇄적 윤리, 교육학 우선의 껍데기 윤리가 윤리교육학을 역사 속에서 알게 모르게 변형시켰다. 알다시피, 오스트리아나 호주 등에서는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이라는 말로 중등 과정의 윤리교육을 일컫는다. 우리의 윤리교육학에 아무리 이데올로기 교육으로 ‘통일’의 문제나 교육학적 특수성을 고려하는 ‘도덕심리학’이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그 주된 줄기는 도덕철학 또는 가치다. 윤리교육과 관련되어 철학계에서는 크게 3차에 걸친 노력이 있었다. 이번 셋째 시기는 2021~3년 현재로 전국규모의 6개 학회가 포함된 27개 철학학회 회장단 모임이 바탕이 된 ‘미래교육을 위한 전국철학회 연석회의’의 도덕 교과군의 독립적 위상 복원 요구다. 셋째 시기에는 ‘철학’이라는 말에 집착하기보다 ‘윤리’의 내용상에 들어가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그리고 ‘종교’까지 포함하여 도덕 교과군을 독립하여 복원시키자는 의견으로 그 뜻이 모였다. 교육부에서는 2025년 고교학점제 시행을 앞두고 2022년 교육과정의 총론과 각론을 확정·고시하고자 했는데 여기에 ‘인문 정신’에 대한 강조가 심각하게 무시되어 철학계가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어 ‘도덕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전국 철학회 연합회의’(‘미래교육을 위한 전국철학회 연석회의’의 전신)에서 성명서를 발표한다(2021.6.25.). 여기에는 도덕 교과군의 독립 복원만이 아니라 ‘인성교육’과 ‘민주시민교육’이 도덕 교과를 주축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염원이 담겨있다. 도덕 교과에는 ‘인성교육’과 ‘시민교육’이라는 두 축이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도 우리는 현재 ‘인성교육법’만 있고 ‘시민교육법’이 없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도덕적 인간과 그가 만들어가는 정의로운 시민사회’가 도덕 교과의 목표다. 이를테면 ‘성실, 배려, 책임 등’과 같은 가치는 개인의 인성 교육에, ‘정의로운 사회’라는 가치는 시민 교육에 해당된다. 나아가 자신, 타인, 사회, 자연에 대한 성찰은 그런 점에서 단답식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하여 서술형, 토론형, 개방형(학제적) 문제가 요청된다. 나는 서, 논술형 대학입시제도의 확립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도덕교육을 위해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교 과정부터 ‘고전’에 대한 학습과 그에 대한 평가가 필수적이다. 철학계는 윤리교육계와 종교계와 더불어 도덕교육의 독립적 위상 복원을 법률적 기반 위에서 주장한다. 관련 법률을 제정 또는 수정 제안하고, 여야 정쟁과 무관하게 대한민국 인문정신의 창달이 ‘인성 교육’과 ‘시민 교육’이라는 두 축에 바탕하여 ‘시민인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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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왕따가 철학의 문제인가?

        정세근 대동철학회 2013 大同哲學 Vol.64 No.-

        이글은 왕따가 어떻게 철학적 주제로 성립되는지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왕따는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초 중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집단 따돌림을 가리킨다. 왕따는 단순한 따돌림만이 아니라 동료들에 의한 집단적 괴 롭힘을 수반한다. 때로는 육체적 폭력과 금전적 강탈이 포함되어 자살을 유발하기도 하다. 학교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중간에 위치한다. 그런데 학교가 왕따를 방치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교육이 공 동체훈련을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학교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닌, 단순한 이익집단으로 전락한다. 학교 그 자 체로서 교육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공리주의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갖고 있다. 공리주의는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것임에도, 번역어의 문제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공리주의의 최대 난제가 ‘최대다수의 최 대행복’을 위해서는 노예제도 불사하는 것임을 떠올리자. 한국의 교육이 공리주의를 강조하면 할수록 왕따는 자라난다. 왕따는 우리 교실에서 젊은 학생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공리주의의 망령이다. 왕따는 또한 차별이라는 악귀를 기른다. 학생들은 왕따를 통해 차별을 연습한다. 왕따는 사춘기 시절의 부산 물이 아니라 장차 범죄의 징후이다. 왕따가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에게 쏠리면 인종차별이고, 여성에게 벌어지 면 남녀차별이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에게 모이면 학력차별이고, 타지에서 전학 온 학생를 대상으로 삼으면 지역차별이다. 따라서 왕따는 차별적 범죄행위의 조짐이다. 만일 학교가 왕따를 용인한다면 그것은 곧 범죄를 방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차별을 체화한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어떠한 차별을 자행할 것인가 상상해보자. 심지어 왕따는 익명적이기 때문에 더욱 폭력적이다. 가해의 주체가 숨겨져 있어 지능적이고 계획적이다. 제복 의 폭력성도 그 안에 숨어있다. 왕따는 철학의 문제다. 공리주의 문제이며, 차별의 문제다. 즐거움의 문제이고, 올바름의 문제다. 불행 앞에서 , 차별 앞에서, 폭력 앞에서 철학은 늘 고민했다. 행복과 평등 그리고 평화를 좇기 위해서 철학자는 우리 교육 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This paper aims at how wangdda comes into a philosophical subject. Wangdda stands for Korean students' group bullying after 1990's. Wangdda includes not merely bullying but also physical violence and economical seizure, which sometimes leads young students to commit suicide unfortunately. School exists between Gemeinschaft and Gesellschaft. If school neglected wangdda, then our education already gave up a practice for community. School becomes a society for individual profit rather than a community. Education as scholl itself won't persist for the future. Korean has a serious misunderstanding about utilitarianism. Utilitarianism pursues the maximum utility, instead of striving for the public welfare. However Korean regards it as the theory of public welfare because of mistranslation. The most difficult problem is that utilitarianism permits the slavery in the principle of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 As Korean education system emphasizes utilitarianism, wangdda would grow even more. Wangdda is an utilitarian ghost which incessantly tempts students in their class. Wangdda also raises a demon of discrimination. Students practice discrimination through wangdda. Wangdda is not a byproduct of adolescent but a criminal symptom in the future. Wangdda against multi- cultural family is racial discrimination; wangdda against female is sexual discrimination; wangdda against scholastic level is academical discrimination; wangdda against new comer from a different province is regional discrimination. Therefore wangdda becomes an omen of discriminative crime. If school allows wangdda, then it is not different from aiding and abetting. Let's imagine what kind of discriminative crime will be committed by students who already made a practice of bullying. Furthermore, wangdda is more violent than it sounds since it is anonymous. An dexterous assailant of violence would be hidden like man in uniform. Wangdda is actually a philosophical problem. It is the problem of utilitarianism and discrimination, related with happiness and righteousness. Philosophers have considered the present education of Korea in front of unhappiness, discrimination, and violence to follow happiness, equality,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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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과 운명애 : 위안과 선택의 사이에서

        정세근 대동철학회 2020 大同哲學 Vol.93 No.-

        철학실천에서 중요한 것은 이론을 넘어선 실천이다. 그런 실천 가운데 하나가 운명에 대해 쉽고도 상냥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영역이며 그런 자세야말 로 철학실천의 제1원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점집의 역할이 크다. 사람들은 걱정을 덜기 위해 점을 본다. 그것은 실 존적이며 돌봄의 행위다. 철학실천자들은 심려에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배려로 나아가(가 가 빠짐!)야 한다. 우리의 근심 한 가운데 운명이라는 말이 놓인다. 운명은 대체로 과거명제로 쓰인다. 모든 것이 나의 업이고 응과응보란다. 운명은 대과거 다. 왜냐하면 운명은 이미 있(었)고, 지금에서야 현실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운명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를 위로해준다는 점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이 정해진 운 명이거나 신의 시련이거나 업보라고 하면 너무나도 쉽게 내 앞의 비극적인 일을 받아들이게 된다. 운명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이해된다. 그렇다면 철학이 운명을 비틀 수는 없을까? 많은 운명론은 윤리설을 설정함으로써 운명 비틀기 를 한다. 모든 것이 운명이기에 관 조하고, 절제하고, 희생하고, 하다못해 조롱이라도 함으로써 운명에 밟히더라도 지렁이처 럼 꿈틀댄다. 운명이 생명의 생로병사라면 함부로 덤빌 일이 아니지만, 그 앞에서 서보 기 , 사귀기 , 누리기 , 느끼기 를 덧붙여 감히 의지적으로 생각한다 . 이것이 철학이다. 운명과 운명애는 다르다. 운명은 수동적이지만 운명애는 능동적이다. 운명은 우리에게 위안을 줄뿐이지만, 운명애는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끔 한다. 그런 점에서 운 명애는 선택이다. 장자가 말했듯이, 세상은 황당 하고 맹랑 하다. 그러나 위안에 그치지 않고 선택할 때 운명은 즐거운 맞이 곧 환대가 된다. Practice is more important than theory in the philosophical praxis. One of these praxes is speaking about destiny easily and tender. It is a boundary where philosophers do something for their society. Easy and tender mind of philosophers should become a prima principle of philosophical Practice. The role of fortunetellers is greater than philosophers for people in Korea. People hope to reduce their anxiety to visit them. It is existential, also is a behavior of care. Practical philosophers have to get started their walking from worry about (Besorge) finally to care about (F rsorge). There is a word called destiny in the middle of our life. The sentences for destiny is almost told by past participate. All in life had been my karma and the result of cause and effect. The destiny has written, and the event follows it. Destiny consoles us. All things just happen by destiny. It is not your fault and you can avoid. Then, we could ask whether philosophers is able to twist destiny. The most theories of destiny assume their own ethics. It is a twist of destiny. We may contemplate it. We take control it a bit. We sacrifice ourselves. We deride it. Those are a sort of ethical attitude or human act. Destiny and loving-fate is completely different. We can do nothing in destiny, but we can do love our fate at least in loving-fate. So, loving-fate is a choice of human being. As Zhuangzi said, a life is embarrassing and ridiculous. But when you can do not hate your fate and love it instead, it afford your life the hospitality. We dare to consider and treat our destiny. This is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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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감염 윤리

        정세근 대동철학회 2021 大同哲學 Vol.95 No.-

        이 글은 전 지구적 감염병인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여러 문제 가운데 인문학적 논의를 주제로 삼는다. 병의 발생과 치료라는 과학의 영역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가치 판단 가운 데 명시적으로 떠오르는 주제를 열거한다. 세계적인 유행병에 대응하는 국가차원의 태도 를 인권, 타자, 이방인, 환자, 존엄성, 소수자, 자국민 보호, 지역 이기주의와 연관하여 다 룬다. 이는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하면서도 일종의 윤리적 문제로 성립한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그것의 이해로 나가고, 그것의 이해는 마침내 공감으로 형성된다 코로나 사태는 인간의 박약함을 육체적인 . 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드러나게 했다. 더불어 사회적 정의, 문화적 포용성, 경제적 불평등, 가치관의 변화, 종교적 의례와 실천이라는 주제를 철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가져다주었다. 그것들은 코로나 윤리학, 넓게는 감염 윤리의 주제다. 감염 윤리학은 우리가 집단면역이 필수불가결한 존재임을 적시하 여 인류적 차원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기준(new normal)을 생각하게 한다. This paper treats some discussions of humanities on pandemic Covid-19. There are many obvious issues of value judgement around the scientific realm concerned in the outbreak and cure of disease. The national attitude of human rights, others, aliens, patients, minorities, protection of domestic people, regional selfism against the pandemic would be dealt. It is based on the social consensus related with ethical problems. The fear on virus goes to the understanding on it, and the understanding lastly becomes the sympathy. The pandemic situation reveals human weakness not only in the physical side but also in the mind side. Furthermore, philosopher must be faced by subjects of social justice, cultural tolerance, economic unequality, change of a sense of value, regional rites and its practice. Those are themata of Covid Ethics, that widely is, the Contagion Ethics. It shows we are the beings of herdimmunity, and also let us think about new normal of post covid era under the standard of humank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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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발표논문 : 박세당의 『도덕경』과 체용론

        정세근 한국공자학회 2012 공자학 Vol.23 No.-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박세당은 『노자』와 『장자』에 대한 완전한 주해를 내놓은 조선유일의 유학자이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사문난적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서조차 그는 이단이 아니라고 평가한다. 조선조에는 당파의 시각으로 박세당을 바라보아 그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었듯이, 현재의 우리도 선입견으로 박세당을 바라보아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문제는 조선인이나 우리나 할 것 없이 주자학이라는 거대한 사유구조의 개입이다. 박세당은 『노자』를 주석하면서 ``체용``(體用)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주희의 이기론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이기론의 짝이라할 수 있는 체용론을 원용하는 박세당은 모순이 아닌가? 박세당은 ``이름 없음``(無名)을 체로, ``이름 있음``(有名)을 용으로 해석한다. 나아가 유와 무도 ``상무``(常無)와 ``상유``(常有)라는 쌍으로 나누면서 각각 체와 용을 배치한다. 이런 해석은 왕필도 하지 않은 것으로 유와 무에 독자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박세당은 도를 형이상(形而上)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한다. ``형이상자로 형이하자를 쓴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박``(樸)을 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희의 이기론에 따르면 형이상의 리가 있어 형이하의 기를 주재하는 것일 텐데, 박세당에게는 형이하의 박이야말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체인 무(無)조차도 박의 성질을 갖는다. 박이 곧 무인 것이다. 그리고 무는 돈독하고 소박한 체가 되어 도의 근본이 된다. 박이 이름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박세당의 무는 절대적인 무가 아니라 시원의, 본래의, 자연의, 항상의 무로서 유와 늘 대립항을 이룬다. 그의 무는 일종의 원질로서 무규정의 원형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박세당은 체용불이(體用不二)라는 철저한 원칙아래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체용론을 견지하며, 노자조차 박을 추구하는 무실(無實)의 철학자로 바라보고 있다. 조선시대 노자 주석가들은 자연와 인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홍석주는 ``자연``(自然)을, 서명응은 ``조화``(造化)를 언급한 데 반해, 박세당은 ``이름 없는 박``(無名之樸)을 강조하여 세계의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 나아가, 박세당은 노자와도 다르게 삼재(三才)를 내세워 사람의 역할을 설정하고 있다. 只今所知, 朴世堂係本格註解老子與莊子的唯一朝鮮儒學家, 因而針對他的評價不免斯文亂賊. 不過, 朝鮮王朝實錄却云: 「世堂徒深於文辭, 不足爲異端也.」正如朝鮮儒家按照黨派當朴世堂成不譽, 現在的我們也由於先入見將他處難, 勿論朝鮮人或者我們, 問題在於朱子學的巨大思惟結構的介入. 朴世堂在詮釋老子時依然使用「體用」此辭的同時, 他分明拒絶朱熹的理氣論. 如衆所知, 理氣論和體用論爲雙, 而朴世堂取一捨二, 此是否矛盾? 朴世堂釋「無名」爲「體」, 釋「有名」爲「用」. 甚至於有無, 分爲「常無」和「常有」, 各屬體用. 此種解釋連王弼也不作的, 以給「有無」賦與獨自地位. 然而朴世堂反對以道詮釋爲形而上者, 主張所謂的「以形而上者用形而下者」便是「用樸」·고著朱熹的理氣論, 有了形而上的理之後, 才可以主宰形而下的氣, 但是朴世堂以形而下的樸爲甚重. 因此, 連做爲體的無也保持樸的性格, 云: 「樸卽無, 爲敦質之體, 而爲道之本.」 所以爲樸之無名在此. 一言蔽之, 朴世堂的「無」非絶對的, 而是始原的, 本來的, 自然的, 恒常的, 尤其與「有」成爲待對. 他的無是一種原質, 以指無規定的原形. 朴世堂在「體用不二」的原則下堅持「利用厚生」的體用論, 幷視老子爲追求樸的務實哲學家. 朝鮮時代的老子註解家願以解決自然和人爲的問題, 洪奭周言及「自然」, 幷徐命膺涉及「造化」, 而朴世堂講究「無名之樸」, 以强調天人合一. 不但如此, 朴世堂與老子不同的主張「三才」, 以設定人在天地間的角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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