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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대 ≪侍講院志≫ 편찬과 그 의의

        우경섭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0 泰東古典硏究 Vol.26 No.-

        17세기 후반 붕당정치의 말폐가 나타난 뒤 시강원(侍講院)의 역할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왕위계승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끝에 즉위했던 영조와 정조는 탕평을 추진하며 국정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붕당정치 체제를 뒷받침하던 관각제도(館閣制度)의 개편을 추진하였는데, 특히 이 시기 홍문관을 비롯한 여타 관각들의 기능이 축소되었던 반면 시강원의 위상과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어 갔다. 이는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당파 간의 갈등이 격화되던 상황 속에서, 세자의 교육과 보호를 담당하는 시강원의 동요를 방지하고 시강원에 대한 국왕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영 · 정조는 관각을 비롯한 주요 관서의 연혁 및 기능을 재정리한 관서지(官 署志)의 편찬을 주도하였는데, 1784년(정조 8) 유의양(柳義養)이 완성하여 정조에게 진헌하였던 ≪시강원지(侍講院志)≫ 역시 그같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편찬된 것이었다. ≪시강원지≫는 조선왕조의 세자 교육을 관장하던 세자시강원의 사적을 기록 하고 그 역할을 설명한 책이다. 그러므로 서연(書筵)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세자의 강학활동을 핵심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책봉 · 입학 · 관례 · 가례등 세자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를 비롯하여 세자의 모든 공식 · 비공식 활동에 대한 규정 및 세부 의절을 포괄하고 있다. 게다가 세자로 책봉되기 이전의 원자 교육을 담당하는 보양청(輔養廳)과 강학청(講學廳) 및 세손의 교육을 담당 하는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 등, 시강원과 별도로 운영되던 관서의 업무 역시 함께 서술하고 있다. 요컨대 ≪시강원지≫는 왕도정치를 실현할 미래의 성군을 만들어 가기 위한 조선왕조의 제도적 노력이 18세기 후반 탕평정치의 시행과 더불어 현실화되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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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0~1627년 조선의 遼民 인식과 송환론

        우경섭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22 동국사학 Vol.74 No.-

        After the Battle of Sarhu in 1619, as the Manchus advanced westward, many Chinese living near Liaohe fled over the Yalu River to Choseon territory, and the issue of Liaodong Refugees began. The number of Liaodong Refugees, which increased rapidly due to the occupation of Shenyang and Liaoyang in 1621 and the establishment of Dongjiangzhen by Mao Wen-long in 1622, quickly exceeded 20,000. 100,000 by the time of King Injo’s Rebellion in 1623, and 200,000 to 300,000 just before the 1st Invasion of Manchuria in 1627. It is not easy to believe this number as it is on the record, but it is roughly certain that at least nearly 100,000 Chinese have flowed into Pyongan Province. The Choseon Dynasty was concerned that Liaodong Refugees could communicate with the the Manchus or cause invasion of the Manchuria, and they would plunder the local people. Therefore, from the beginning of the influx of Liaodong Refugees, Choseon Dynasty decided to repatriate them to Dengzhou, Shandong Province of Ming, and continued consultations with Ming Dynasty, In addition, the Ming Dynasty also agreed in principle to repatriate Liaodong Refugees, its own citizens, and there were two opportunities to complete repatriation when Yang Zhi-yuan and Jiang yue-guang were dispatched. However, in the complicated calculation of the Ming Dynasty, which valued the strategic value of Dongjiangzhen, and the obstruction of Mao Wenlong, who tried to build and maintain his power based on Liaodong Refugees, little repatriation of Liaodong Refugees was accomplished.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본격화된 후금의 서진으로 말미암아, 요하 유역 漢人들이 대거 압록강을 넘어 조선 영토로 피난하면서 요민 문제가 시작되었다. 1621년 후금의 瀋陽·遼陽 점령 및 1622년 毛文龍의 東江鎭 설치로 급격히 증가한 요민의 숫자는 순식간에 2만을 넘어 1623년 인조반정 무렵 10만, 1627년 정묘호란 직전에는 20~3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이 숫자를 그대로 믿기란 쉽지 않지만, 적어도 10만 명에 가까운 한인들이 평안도로 유입된 정황은 대략 확신할 수 있을 듯하다. 조선 조정은 요민들이 후금과 내통하거나 후금의 월경 침입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평안도 백성들에 대한 침학 및 굶주림으로 인한 소요를 우려하며, 유입 초기부터 이들을 산동성 登州로 송환하는 방침을 정하고 명 조정과 협의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명 조정 역시 자국민인 요민을 데려오는 것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여, 감군 梁之垣과 조사 姜曰光의 파견 때 송환을 성사시킬 기회가 두 차례 있었다. 그러나 요민을 기반으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유지하려던 모문룡의 방해, 그리고 동강진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고 요민 귀환으로 인한 혼란을 우려했던 명 조정의 복잡한 계산 속에서, 정묘호란 이전 요민의 송환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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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학파(月汀學派)의 형성과정 및 학풍에 관한 시론(試論)

        우경섭 근역한문학회 2013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36 No.-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명나라로부터 새로운 문풍을 도입하여 조선 학계의 일신을 도모하였던 학자이자,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원군청병(援軍請兵) 등 명나라와의 외교 현안을 주관하였던 관료였다. 또한 그의 문하에서는 17세기 전반 대중국 외교 일선에서 활약했던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명청교체를 전후한 시기 조선왕조의 명운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학파적 관계망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해명되지 못했던 부분이 없지 않은데, 이 글은 그러한 문제를 해명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중앙정계에서 활약했던 윤근수와 그의 문인들은 중국이라는 현실적 규정력을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당대 서인학통(西人學統)의 주류로 떠오르던 사계학파(沙溪學派)와는 상이한 학풍과 현실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윤근수가 도입한 진한고문론(秦漢古文論)이라는 사상적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단지 문장론의 차원에 국한되어 발현된 것이 아니라 17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격변 과정 속에서 한대(漢代)를 국가 운영의 전범으로 삼아 당면한 현안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로 확장되어 나타났다. 이러한 학풍을 지닌 월정학파의 구성원으로는 윤근수를 비롯하여 금상헌(金尙憲)·조익(趙翼)·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이정구(李廷龜)·금육(金堉)·조위한(趙緯韓)·조경(趙絅)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송대 주자학을 국가 운영의 유일한 전범으로 삼으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던 금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 등 호서산림(湖西山林)들과 맞서는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월정학파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1580년대 서인의 영수 이이(李珥)가 세상을 떠난 뒤 1620년대 김장생의 사계학파가 중앙정계에 부상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서인학통의 핵심적 자리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둘째, 이들은 17세기 후반 이후 형성되는 ‘한당(漢黨)-낙론(洛論)-경화사족(京華士族)’ 등 서울 지역 학인들의 학문적 계보의 前史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 월정학파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월정학파의 사상적 근간인 진한고문론이 의고(擬古)라는 방법론에 치중한 나머지 한 시대를 이끌어 갈 만한 이론 내지 이념을 창출하지 못했던 한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즉 도학자라기보다는 문장가 내지 실무관료였던 월정학파의 구성원들은 17세기 중반 이후 중화질서의 붕괴라는 ‘철학적’ 사건에 대응할 만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월정학파에 속했던 학자들은 17세기중반 사상계의 재편 과정 속에서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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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두만강 지역의 유학자들-김노규(金魯奎)와 김정규(金鼎奎)를 중심으로-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한국학연구 Vol.0 No.32

        19세기 말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한 수많은 조선인들 중에는 상당수의 전통적 유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가장 먼저 두만강 너머로 이주했던 함경도 북단의 유교 지식인들은 대체로 중앙 학계에서 栗谷 李珥와 尤菴 宋時烈에 의해 정립된 서인-노론 학맥을 계승하고 있었다. 송시열의 제자 鶴巖 崔愼과 農巖 金昌協 등이 이 지역에서 강학을 시작한 이래 그 문하에서 함경도 출신 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하였는데, 19세기 말~20세기 초 이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인 鶴陰 金魯奎와 龍淵 金鼎奎 역시 송시열이 제시한 조선중화주의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생활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수’인 서구의 침략에 직면했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중국인들과 뒤섞여 거주하며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역사적 경험은 한반도의 협소한 시야에 갇혀있었던 전통적 중화주의의 폐쇄성을 일정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은 태생적 혈통 내지 지역보다는 유교문화에 대한 분발 여부가 화이분별의 주된 기준이라는 문화적 화이론의 기반 위에서, 조선이 중화문명의 계승자일 뿐 아니라 함경도 역시 문명의 중심지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화이의 可變性을 재확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이가 시대에 따라 지역적으로 순환한다는 주장을 전개하며, 자신들이 거주하던 두만강 유역을 중화문명 부흥의 새로운 공간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그 곳에서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요컨대, 김노규와 김정규 같은 한말 함경도의 유교 지식인들에게 두만강은 청과 조선, 중화와 이적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두만강 너머의 공간 또한 불우한 유랑의 땅이나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인식되지도 않았다. 지금의 함경북도 일원 및 연변 지역을 아우르는 새로운 중화세계의 건설, 그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20세기 초반 적지 않은 유학자들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연변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만들었던 사상적 배경을 이루었다. 19世紀末期, 越過豆滿江移居間島的衆多朝鮮人中也包括了相當一部分的傳統儒教知識分子。尤其是最早遷居的咸鏡道北端的儒學者們, 他們基本上繼承了中央學系中栗谷李珥和尤菴宋時烈代表的西人-老論學脈。宋時烈的弟子鶴巖崔愼和農巖金昌協等在咸鏡道講學之後, 其門下開始正式培養咸鏡道的儒學者。19世紀末到20世紀初期, 咸鏡道的著名儒學者――鶴陰金魯奎和龍淵金鼎奎繼承了宋時烈的朝鮮中華主義思想, 并以此來認識他們所處的豆滿江地區的生活世界。 在遭受“禽獸”西歐侵略的時代背景下, 再加上與當地混居的中國人共同抗日的歷史經歷, 使他們從一定程度上克服了局限于韓半島狹小視野下的傳統中華主義的封閉性。他們不按天生的血統和地區來區分華夷, 而是以儒教文化的發展程度爲標準, 即以文化的華夷論爲本, 提出朝鮮不是僅有的中華文明繼承者, 咸鏡道也可以蛻變成文明中心的可能性。他們不僅重新確認了華夷的可變性, 還提出華夷隨時代變化在地區間循環的主張, 並且將他們所在的豆滿江流域視爲中華文明復興的新空間, 爲建設豆滿江的儒教理想社會而努力。 總而言之, 對金魯奎和金鼎奎等韓末咸鏡道的儒學者來說, 豆滿江並非淸朝和朝鮮, 中華和夷狄的分界線。而且, 將這片地區視作顛沛流離之地, 或獨立運動根據地的認識還未能成形。他們的夢想是以豆滿江下流的慶源爲中心, 在現今咸鏡北道一帶和延邊地區上建設起新的中華世界。正是在這種思想背景下, 20世紀初期有不少的儒學者跨越豆滿江而遷居延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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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에서 집단전기학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4 한국학연구 Vol.- No.74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는 지난 2007년 이래 해외 각 지역에서 수행되는 한국학의 다양한 맥락을 탐색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 학술사의 재구성을 위한 지식인 집단에 대한 총합적 연구’라는 목표 아래 집단전기학(Collective Biography)이라는 방법론에 착목하게 되었다. 20세기 초반 서양 학계에서 정립된 집단전기학은 개인들의 전기적 약전(略傳)을 수집하고 이를 나열하는 작업 및 그러한 전기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특정 집단의 역사성을 포착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은 일부 엘리트들의 관념적 지향을 사회 변동의 추동력으로 간주하던 전통적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보다 많은 사람들의 현실적 관계에 대한 통계와 분석에 기반하여 사회적 연결망과 이동성을 분석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 역사학계를 돌이켜 보면 집단전기학이라는 용어는 대단히 생소하지만, 그러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기록의 나라’라 칭해지는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풍부하고 다양한 종류의 집단전기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 자료들은 첫째, 인명록과 같이 특정 범주에 속하는 인물군 전체의 정보를 망라하려 시도한 인물지(人物志), 둘째, 편찬자의 주관적 판단 아래 특정한 이념 및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들을 추려내어 수록한 인물전(人物傳)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 근대 이후 성립된 위인전집류 또한 수록 인물의 선정 과정 및 그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 편찬자의 역사관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서 및 인명록 등을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집단전기학과는 또 다른 차원의 집단전기학을 구성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자료들은 학술적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지기 어려운 지역 혹은 시대, 예컨대 해방 이후 북한학계 등을 들여다보기 위한 접근 방식의 하나로 활용될 수 있다. 그 예로서 2011년 간행된 『조선력사인물』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사회주의 역사 서술의 출발점인 계급성에 더하여 자주성으로 규정되는 민족 담론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주체사상 성립 이후 북한 역사학이 직면하고 있는 고민이 여러 인물들의 전기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 최근 서양 학계의 집단전기학 연구는 컴퓨터를 활용한 인물 자료의 전산화 작업에 기반하여, 지배층 위주의 사례 연구에서 일반 대중을 포괄하는 계량적 분석으로 이행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한국에서의 집단전기학 역시 디지털 인문학과의 결합을 통해 20세기 이후의 서구중심적 근대주의와 같은 지배적 담론 및 이데올로기의 계보 아래 구성되어 온 기존 역사 서술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론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This article was written as part of the “Prosopography of Overseas Korean Studies for Deepening and Diffusing East Asian Koreanology” project, currently being carried out by the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t Inha University. Since 2007, the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as been exploring various contexts of Korean studies conducted overseas. In the process, the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as focused on the methodology of collective biography under the goal of “comprehensive research on intellectual groups for the reconstruction of East Asian scholarly history.” Collective biography, which was established in Western academia in the early 20th century, involves the collection and listing of biographical sketches of individuals, and analyzing these biographical materials to captur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a particular group. This methodology moves away from traditional historical narratives that regarded the ideological orientations of a few elites as the driving force of social change. Instead, it has the advantage of being able to analyze social networks and mobility based on statistics and analysis of the practical relationships of a broader range of people. Although the term “collective biography” is relatively unfamiliar in Korean historiography, this awareness of the issue and the methodology itself are not entirely absent. Even in the Joseon Dynasty, which is often referred to as a “country of records,” there is a wealth of diverse collective biographical materials. These materials can be categorized into two types: first, the “Inmulji” (人物志), which attempts to comprehensively cover the information of all individuals belonging to a certain category, similar to a directory; and second, the “Inmuljeon” (人物傳), which selects and records individuals based on certain ideologies and criteria according to the subjective judgment of the compiler. Meanwhile, the biographies of great figures compiled in the modern era also offer a different dimension of collective biography. Through the process of selecting individuals and evaluating them, these compilations reveal the historical perspective of the compiler, providing a contrast to the typical collective biography that is based on raw data such as documents and directories. These materials can serve as a primary approach to regions or periods that have not been sufficiently examined or are difficult to research, such as North Korean studies after 1945. For example, an analysis of the contents of The Historical Figures of Korea published in 2011 reveals the unresolved dilemmas faced by North Korean historiograph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Juche ideology, where it was necessary to combine the discourse of nationalism, defined by autonomy, with the class-based perspective that is the starting point of socialist historical narratives. Recently, Western academic research on collective biography has transitioned from case studies focused on the ruling class to quantitative analyses encompassing the general public, based on the computerization of biographical data. In this context, collective biography in Korea, when combined with digital history, is expected to be an effective methodology for supplementing the limitations of existing historical narratives that have been structured under dominant discourses and ideologies, such as Western-centric modernity in the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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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南明王朝 인식

        우경섭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3 한국문화 Vol.61 No.-

        1644年李自成的農民叛亂軍占據北京,明朝最後的皇帝崇禎帝自縊之後,皇室的一部分後裔逃到中國南部來謀劃明朝的復興。到1662年爲止,在弘光、隆武、永曆等三代君王下, 南明王朝存續了18年,這對朝鮮的儒教知識份子也有著巨大的影響。從明朝滅亡之後到1650年期間,使臣和漂流人陸續將明朝皇室的命脈在中國南方延續的消息傳到朝鮮,朝鮮的知識份子們從中看到恢復以明朝爲中心的中華秩序的可能性,而備受鼓舞。但是,傳到朝鮮的有關南明的消息多爲流言,很難反映具體實情,再加上身受清朝的壓迫,朝鮮和南明之間并沒有實際的交聘。當朝鮮瞭解到腐敗和分裂下的南明分崩離析的實情,并獲悉1662年永曆帝的死訊后,大部份的朝鮮知識份子放棄對清朝的復仇,轉向爲保守尊周大義而專政內修。明朝滅亡之後,在表示朝鮮繼承中華文明的朝鮮中華主義的思想體系下,18世紀以來南明王朝開始以新的方式被記憶。特別是當清朝的張廷玉等人將弘光、隆武、永曆等三皇列入明史之後, 以保全中華文明爲己任的朝鮮知識份子將編纂南明歷史視爲整理中華譜系的一環而積極投入其中。由此, 出現了李玄錫的《明史綱目》、南有容的《明書正綱》、黃景源的《南明書》和成海應的《明季書藁》等歷史書籍,南明王朝的正統性也在朝鮮知識份子圈中完全確立下來。在整理南明歷史的過程中出現的正統論問題延續到19世紀, 引發了圍繞是否使用永曆年號的爭論。王德九等明朝出身的歸朝漢人子孫和柳麟錫等華西學派的部份學者強調南明的正統性,主張使用永曆年號。王德九建立了大統廟,在明太祖牌位下供奉跟隨孝宗逃到朝鮮的祖上等人,並在祭文中使用永曆年號。這表現以漢族爲中心的血統性中華觀念,與以文化傳承中華的朝鮮知識份子的觀點並不相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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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時烈의 許衡 인식과 文廟黜享論

        우경섭 진단학회 2008 진단학보 Vol.- No.106

        漢族으로서 ‘夷狄’ 元朝에 출사하여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魯齋 許衡의 삶은 用夏變夷의 필요성과 華夷分別의 당위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였다. 조선의 許衡論은 고려말의 李齊賢과 李穡에 그 연원을 두고 있었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주자학을 수용했던 그들은 허형이 원 세조를 보필하며 이룩했던 학문적 공적을 孔子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적 토대 위에 개창된 조선왕조에서도 허형에 대한 칭송은 계속 이어져, 1412년 허형은 조선왕조의 문묘에 향사되었다. ‘정통왕조’ 明朝가 동아시아 정세를 주도하였던 조선전기와 달리, 華夷論의 현실적 의미를 체감하게 된 17세기 후반의 宋時烈은 허형의 행적에 대하여 대단히 비판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효종 8년의 丁酉封事에서 世道의 혼란됨이 허형의 문묘 향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그의 출향을 효종에게 요청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허형이 살았던 원나라 초반과 자신이 직면한 청나라 초반의 상황을 동일시하는 시세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즉 청나라의 현실적 패권을 인정하며 청 주도의 동아시아 질서에 순응하려던 ‘親淸派’들을 허형에 비견하며 경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숙종초 예송의 책임을 지고 약 6년간의 유배생활을 겪은 송시열은 자신과 서인의 축출이 異端에 의한 正學의 패퇴를 의미한다고 여겼고, 주자로부터 이어지는 正學의 統緖 즉 道統을 바로잡는 일을 자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경신환국 직후에 시작된 문묘개혁 논의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때 그는 서인의 학문연원인 李珥와 成渾 兩賢의 문묘종사에 앞서 허형의 출향이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中華와 夷狄 그리고 正學과 異端의 변별 논리가 동일한 맥락 속에 자리잡고 있던 송시열의 사유방식에서 본다면, 효종대 청나라에 대한 저항의식 속에서 출발하였던 허형 출향론이 숙종대에 이르러 도통론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 속에서 다시금 현실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의 허형 출향론은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하였고, 결국 1682년 문묘제도 개정의 일환으로 중국 유학자 9인의 출향이 이루어질 때 허형은 그대로 문묘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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