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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에게 있어서 ‘구인(求仁)’의 문학적 실천

        安世鉉 ( Ahn Se-hyun ) 동방한문학회 2020 東方漢文學 Vol.0 No.82

        본고는 한말의 학자이자 순국열사인 毅堂 朴世和(1834~1910)의 求仁 사상을 분석하고, 산문을 중심으로 求仁의 문학적 실천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仁問答」·「克己復禮爲仁說」 등의 분석을 통해 의당이 程朱와 마찬가지로 인을 우주 만물의 생명 원리로 이해하였으며 인을 행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사욕을 제거함[去私]’을 제시한 점을 확인하였다. 다만 의당은 求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剛明’한 자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 점이 求仁에 관한 의당 사상의 특징이었다. 의당의 산문 창작은 求仁의 실천과 强忍한 자질의 함양에 있었는데,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보였다. 하나는 自警의 글을 지어서 서세동점의 난세에 의당 스스로가 仁人과 志士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를 함양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인과 제자들에게 送序나 記文을 지어주며 강인한 정신을 바탕으로 求仁去私의 실천을 권면한 것이다. 이러한 강인함이 의당으로 하여금 殺身成仁과 捨生取義의 결행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This paper is a review of the ideas and literature of Uidang(毅堂) Park Se-hwa(朴世和), who is a patriotic martyr to the Korean Empire. First I analyzed Park Se-hwa's views on how to realize Ren(仁). He suggested the removing private desire as a way of realizing Ren, and that stressed the need for firmness mind to do this. The uniqueness of his ideas lies in his emphasis on the importance of firmness mind in the practice of Ren. Next I looked at the two aspects of his realizing Ren through prose creation. Uidang developed a strong will to live as a man of heroic and noble mind by creating prose that was wary of him. He also exhorted friends and students to realize Ren based on a strong spirit in his writings given to them. In short, for him, the creation of prose was a way to realize Ren and foster a firmness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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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전반 누정기(樓亭記) 창작의 일양상 -신식(申湜)의 "용졸재(用拙齋)"에 붙인 기문(記文)을 중심으로-

        안세현 (,Se Hyun Ahn ) 민족어문학회 2008 어문논집 Vol.- No.58

        본고는 申湜(1551~1623)의 `用拙齋`에 붙인 崔립(1539~1612), 洪可臣(1541~1615), 鄭逑(1543~1620), 柳夢寅(1559~1623), 李埈(1560~1635), 李수光(1563~1628) 등의 記文을 비교 분석하여, 17세기 전반 樓亭記 창작의 한 양상을 살펴보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를 통해 한문 산문의 장르적 연구 방향과 누정기에 대한 문학적 접근 방법을 모색해보았다. 먼저 창작 연대의 고증을 통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최립의 「用拙齋記」가 가장 먼저 창작되었고 여타 문인들의 기문은 이를 의식하고 지어졌음을 밝혔다. 아울러 이수광의 「用拙齋記後敍」, 이준의 「用拙齋銘」, 정구의 「拙齋說」이 각각 `後敍`, `銘`, `說`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한문 산문의 장르 분류상 누정기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함을 논증하였다. 6편의 누정기 분석을 통해 도출한 17세기 전반 누정기의 특징을 몇 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론의 확대와 성리학적 사변성의 강화이다. 6편의 누정기 모두 齋名에 대한 의론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최립의 「용졸재기」는 성리학적 사변성이 대단히 강하며, 홍가신의 「졸재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보다 엄격한 적용이 엿보인다. 이는 16세기를 거치면서 성리학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 장자적 사유를 수용하고 諸子書의 구법을 활용하는 등 새로운 경향의 누정기 창작의 확대이다. 유몽인의 「용졸헌기」는 장자적 사유에 기초하여 논의를 전개시키고 「열자」, 「한비자」 등의 제자서의 구법을 활용하였다. 이수광의 「용졸재기후서」에도 `用`과 관련된 장자적 사유가 보인다. 이 시기 장자의 영향을 받은 누정기가 양적으로 크게 늘어나는데, 장자의 寓言 방식을 차용한 蜃樓記 계열의 누정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기존의 연미한 당송문을 벗어나 새로운 문체를 구사하려는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셋째 누정기에서 자신의 불우함이나 당대 현실에 대한 불만을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유몽인은 「용졸헌기」에서 자신의 정치적 불우함을 우의적으로 표현하였으며, 「月波亭記」와 「恩波亭記」에서는 임금의 인척인 권세가들을 은근히 풍유하기도 하였다. 허균의 「慟哭軒記」에서는 당대 정치 현실과 화합되지 못하는 허균의 불평지기를 엿볼 수 있다. 이는 붕당간의 정치적 대립이 본격화되는 17세기 전반기의 정치 상황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 시기 누정기의 전반적인 특성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최립과 유몽인을 비롯하여 비교적 많은 누정기를 남기고 있는 이정귀, 신흠, 허균, 이식, 장유 등의 누정기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There were a considerable numbers of notable writers in the field of Chosun prosaic history from the late 16th century through the first 17th century. Choi Lib(崔립), Yoo Mong-in(柳夢寅), Lee Jeong-gui(李廷龜), Shin Heum(申欽), Heo Kyun(許筠), Lee Sik(李植) and Zhang You(張維) were outstanding writers during that period. While they gave themselves up to improve the prosaic theory, they also tried to compose actual writings. But we don`t have enough knowledge about their writings compare to their prosaic theories. To figure out aspects of pavilion writings, in this paper, I compared a series of writings about a pavilion Yongjol(用拙齋), which was owned by Shin Sik(申湜), composed by six different writers-Choi Lib, Yoo Mong-in, Hong Ka-shin(洪可臣), Chung Ku(鄭逑), Lee Zhun(李埈) and Lee Su-kwang(李수光). As a result of this, I figured out that Choi Lib`s writing was the first one among them, and partly influenced on the following writings of other coming writers. Beside this, as a critical criticism, I focused on their individual composition methods. Then I recognized some typical features. First of all, they tried to imbue Sung confucianism in their writings. Second, they adopted Taoism and other philosophers` way of thinking to flourish their writings. Third, they expressed their adversity and discontents with society using allegory. I believe that this work will contribute to figure out individual writer`s special distinctive and their way of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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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중기 문풍(文風)의 변화와 과문(科文)

        안세현 ( Se Hyun Ahn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1 大東文化硏究 Vol.74 No.-

        본고는 조선중기 文風의 변화를 科文과의 관련 속에서 조명하여, 조선중기 문인들 사이에 先秦兩漢古文의 학습과 창작이 유행하게 된 내적 요인을 구명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는 전근대 사회에서 科擧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과문 학습이 문인학자 개인의 문체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문인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체가 과문에 투영되기도 하고 반대로 왕이나 試官이과문을 통해 문풍의 변화를 유도하기도 하였다는 자명한 사실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논의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조선중기 문풍의 변화를 과문의 문체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선조~인조 연간 殿試의 策文에 『장자』와 『전국책』의 문체를 가져다 쓰는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되었으며, 당시 젊은 유생들 사이에 과문 학습을 위한 텍스트로 『맹자』· 『장자』·『사기』·『한서』 등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조선중기에는 기존의 당송고문 위주의 학습에서 선진양한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조선중기에 선진양한의 고문이 유행하는데 과문 창작 환경의 변화와 宣祖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밝혀내었다. 선조대에 들어 문인학자들 사이에 과거를 통한 출세 욕구가 강해지고 別試를 비롯한 비정기 시험이 확대되는 가운데, 당락에서 책문·표문 등 詞章의 비중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선조연간에 문형을 맡아 古文辭를 주창했던 윤근수뿐만 아니라, 『장자』를 대단히 좋아하였고 문예 지향적 성향이 강했던 선조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더욱이 명나라 전후칠자의 문학론이 조선에 수용되기 이전에 이미 과문 학습 과정에서 『장자』를 비롯한 선진양한 고문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策文에서 『장자』·『전국책』의 논리와 문체를 가져다 쓰게 된 이유를 문체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시험의 당락을 결정짓는 책문에서 시관의 눈에 들기위해서는 『장자』와 『전국책』이 지닌 기발한 착상과 기세 있는 논리 전개가 대단히효과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This paper aims to research internal factors about the change of writing style during the middle period of Chosun dynasty relate to the state examination. The following is the major points of my arguments. First of all, I verify the change of writing style from the change of writings for the state examination. There were continuos movements that insist using the style of Zhuangzi and Zhanguoce from the King Seonjo to the King Injo. And studying Mencius, Zhuangzi, Shiji, Hanshu as main texts for the state examination was prevailing among the rising scholars. From this social phenomenon, we can guess that writers expanded the border of study from Tang-Song style to Qin-Han style. Second, I trace that the King Seonjo largely influenced on the change of writing style. During the King Seonjo`s reign, scholars were eager to succeed and the importance of writing ability had grown. Under this circumstance, Yun Keun-soo, who controled official documents of nation, played an important role. It was same to the King Seonjo, who was concerned literature. In this era, writers already had new understanding about Qin-Han literate style. Third, I analyzed the reason why writers used the logic and the rhetoric of Zhuangzi and Zhanguoce when they take the state examination. In short, writers used it to be in the examiners favorite as its style has novel idea and logical prec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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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柳夢寅의 「遊頭流山錄」 연구 - 지리산 遊記의 전통과 관련하여 : 柳夢寅의 「遊頭流山錄」 연구

        안세현(Ahn Se-Hyun)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7 동양한문학연구 Vol.24 No.-

        본고는 柳夢寅의 「遊頭流山錄」을 金宗直의 「遊頭流錄」을 비롯한 조선전기?중기의 지리산 遊記와 비교?분석하여, 이 작품이 지닌 구성, 주제의식 그리고 표현적 측면에서의 특징적 면모를 부각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다. 비교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비롯하여 南孝溫의 「遊天王峰記」, 金馹孫의 「頭流紀行錄」, 曺植의 「遊頭流錄」, 梁大樸의 「頭流山紀行錄」, 朴汝樑의 「頭流山日錄」, 趙偉韓의 「遊頭流山錄」 등이다. 구성적 측면에서 「유두류산록」은 이전의 지리산 유기와 마찬가지로 일기체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마무리 부분을 확대시키고 장대한 의론을 전개한 점이 특이하다. 이는 지리산의 특성과 지리산으로의 은거 의지를 전체적?집중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식의 반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두류산록」에는 일반적인 유기에서 보이는 탐승에서 오는 흥취뿐 만아니라, 인간사에 대해 회의하고 당대 현실을 우의적으로 비판하는 의식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는 기본적으로 광해군 즉위 후 대북파에 의해 탄핵을 받아 정계에서 쫓겨난 유몽인의 정치적 불우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뜻을 굽히면서까지 남을 따르려 하지 않고 붕당 정치 속에서 一人으로 고독하게 살고자 했던 그의 기질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울러 세상의 가치를 상대주의적으로 보는 장자적 사유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표현적 측면에서는 참신한 비유법과 의인법을 활용하여 경물을 묘사하거나 감회를 드러내는 것이 돋보인다. 또한 다소 장난스런 상황을 연출하여 부정한 정치현실을 우의적으로 비판하거나 경물을 묘사하는 데에 활용하였는데, 이는 여타의 지리산 유기에는 보이지 않는 「유두류산록」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focused on 「Yoodooryusanlok(遊頭流山錄)」 written by Yoo Mongin, comparing with the previous literary works to analyze effectively. I suggested 「Yoocheonwangbongki(遊天王峰記)」(南孝溫)ㆍ「Dooryukihaengki(頭流紀行錄)」 (金馹孫)ㆍ「Yoodooryulok(遊頭流錄)」(曺植)ㆍ「Dooryusankihaenglok(頭流山紀行錄)」(梁大樸)ㆍ「Dooryusanilok(頭流山日錄)」(朴汝樑)ㆍ「Yoodooryusanlok(遊頭流山錄)」(趙偉韓) and so on as representative works in this paper. First of all, I surveyed its construction. It"s written in journal type like the previous works, however it"s somewhat special that it had longer ending part and it provided meaningful arguments. I understood such aspects as for the purpose of expressing his desire of retirement. Besides we can find out the writer"s exceptional opinion in addition to the basic aspects of general travels. The writer, Yoo Mong-in, doubted about the world and criticized social irregularity of those days. This must be came from his career that he was expelled from the political circles. He decided to keep his creed instead of submitting to the opposing party. In addition, I surveyed its expression. He made full use of original figures of speech and personification to develop his argument or to describe the scenery vividly. Furthermore he inserted the sense of humor in the context to develop the situation effectively. Those techniques were un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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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蔡壽) 누정기(樓亭記) 연구(硏究)

        안세현 ( Se Hyun Ahn ) 동방한문학회 2008 東方漢文學 Vol.0 No.36

        본고는 蔡壽(1449~1515)의 누정기를 조선전기 누정기 창작의 전통 내에서 검토하여 채수 누정기가 지닌 특징적인 면모, 특히 자연 인식의 태도와 서술 방식의 특징을 부각시키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먼저 채수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徐居正(1420~1488),成俔(1439~1504) 金宗直(1431~1492) 등의 누정기를 중심으로 조선전기 누정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자연 인식 태도와 서술 방식을 정리하였다. 자연 인식 태도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산수 경물에 내재된 理法, 곧 도덕성을 궁구하고 이를 심성 수양의 계기로 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산수 경물을 정사나 민생과 연관시켜 善政 및 民利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들 누정기에 묘사되고 있는 산수 경물은 누정 주위에 실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리학적 자연관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상당히 관념화된 상징물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채수의 누정기에 보이는 자연 인식의 태도는 성리학적이지 않으며 다분히 장자적이다. 채수에게는 자연물을 통해 理法을 발견하려는 의식도, 이를 도덕적 수양과 연결시키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으며, 玩物喪志에 대한 경계 없이 산수 경물의 奇觀을 感受하며 정신적 悅樂을 추구하였다. 또한 채수는 역사적 무상성에서 오는 비애를 지금-여기에서의 즐김을 통해 초극하려고 하거나 자연 경물이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즐기는 자의 것이라는 자유의 정신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채수의 누정기에 그려지고 있는 자연물은 누정 주변에 실제하는 것이며 그 묘사 또한 상당히 구체적이다. 본고는 채수의 누정기와 여타 누정기를 지나치게 대립적인 구도에서 도식화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이는 채수 누정기의 특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간 한문 산문의 연구에 있어서 조선후기의 산문에 편중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앞으로 조선전기 산문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본고가 이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This study focused on contribution essays on pavilions of Chae Soo(1449~1515), under the influence of the early Chosun dynasty tradition. For this purpose, I investigated some articles of Seo Geo-jeong(1420~1488), Seong Hyeon(1439~1504) and Kim Jong-jik(1431~1492). I analyzed out some important characteristics of early Chosun dynasty from this work. There are a couple of views about this matter. The one is that pursuing morality from the nature. And the other is that using the nature for the practical use. In this cases, the nature from their article usually mean an abstract concept. Chae Soo`s attitude about the nature is different from above authors. He inclined to the Taoism. He never tried to use his essays for the morality or practical purpose. He just tried to get emotional delight. In addition, he regarded the nature as every person`s property. So that he described the nature as realistic as possible, and it was so concrete. I hope this study will contribute to the following studies about same kind of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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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체반정을 둘러싼 글쓰기와 문체 논쟁 -정조의 문장의식을 통해 본 박지원과 이옥의 글쓰기 태도 및 문체-

        안세현 ( Se Hyun Ahn ) 민족어문학회 2006 어문논집 Vol.- No.54

        본고는 문체가 經學 및 世道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하에 일련의 문체순정책을 펼쳤던 正祖(재위:1776~1800), 『열하일기』로 인해 정조로부터 문풍 쇠퇴의 장본인으로 지목되었던 朴趾源(1736~1805), 문체반정을 촉발시킨 한 사람이자 科文의 문체 인해 充軍 처벌까지 받았던 문체반정의 최대 피해자 李鈺(1760~1815)을 대상으로 하여, 문체반정을 둘러싼 글쓰기와 문체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정조의 문장의식을 기준으로 박지원 This paper focused on three writers Jeongjo(正祖), Park Ji-won(朴趾源) and Lee Ok(李鈺) as a way of understanding Munchebanjeong(文體反正). I suggested Jeongjo as a literary level of those days, and set last two writers in contrast point for this study. First of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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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옥(李鈺)의 「각로선생전(却老先生傳)」: 노쇠한 신체의 발견과 자기 서사

        안세현 ( Ahn Se-hyun ) 근역한문학회 2016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45 No.-

        본고는 李鈺(1760~1815)의 「却老先生傳」을 老化와 自傳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 것이다. 「각로선생전」은 족집게를 각로선생으로 의인화하고, 혹자와 나와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은 假傳의 형식을 가탁한 일종의 自傳으로, 50세에 접어든 이옥이 노쇠한 신체를 발견하고 자신의 처지를 우의한 작품이다. 「각로선생전」의 특징적 면모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문체적 파격성이다. 假傳이든 自傳이든 ‘가계-행적-평결`이라는 傳의 서술방식을 준용하는데 반해, 「각로선생전」은 각로선생을 두고 혹자와 나와의 가설적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도연명의 「오류선생전」 이래 대개의 자전이 작자 자신을 가탁한 제3의 인물을 제시하고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삶을 자부심 있게 그려내는 데에 반해, 「각로선생전」에서 이옥은 자신의 신체적 노화에 놀라고 지나 온 삶을 안타까워하며 여전히 삶의 지향을 찾지 못하는 ‘불안한 자기`를 내보였다. 「각로선생전」의 문체적 파격성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둘째, 노화에 대한 인식에 있어 신체적 변화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이를 極微하게 묘사한 점이다. 이옥 문학이 지닌 특징 중에 하나가 사물을 미시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섬세한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다. 「각로선생전」에도 이러한 특징이 그대로 나타났는데, 특히 새까만 터럭이 백옥처럼 하얗게 새는 과정이나 몸에 있는 터럭이 새는 순서에 대한 묘사는 극치를 보여준다. 이옥에게 신체의 노쇠함은 추상적으로 인식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셋째, 노화에 대처하는 태도이다. 이가 빠지고 머리가 새는 등의 노화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후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노화에 놀라고 이를 지연시키고자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화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노년의 삶을 차분하게 준비한다. 그러나 이옥은 지나 온 삶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노년의 삶의 지향점을 찾지도 못하고 머뭇거릴 뿐이다. 이런 점에서 「각로선생전」은 오십 줄에 접어든 이옥 자신의 삶을 가탁한 자전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I analyzed Kangnoseonsaeng-Jeon(却老先生傳) of Lee Ok(李鈺) focusing on the aging and autobiography. Kangnoseonsaeng(却老先生) is the personification of tweezers and Kangnoseonsaeng-Jeon is a kind of autobiography. This works are typically as follows: First of all, Kangnoseonsaeng-Jeon is unconventional style of writing. Lee Ok did not keep the narrative style of jeon(傳) and used hypothetical question and answer. This allows the psychological anxiety according to the aging. The second, Lee Ok was sensitive aware of the aging and described the aging of the body in detail. Descriptions of the process of change in hair color is especially impressive. In addition, Lee Ok has the attitude to cope with the aging differed from others. Generally people accept aging as a destiny and that are trying to mentally mature. But Lee Ok just depressed aging, it was not wisely designed the life of the elderly. In conclusion, Kangnoseonsaeng-Jeon is autobiographical work of Lee Ok entering old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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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강원도의 문화적 정체성과 현재적 의미

        안세현 ( Ahn Se-hyun ) 한국한문고전학회(구 성신한문학회) 2017 漢文古典硏究 Vol.34 No.1

        본고는 조선왕조실록, 지리지, 문집 등을 검토하여 조선시대 강원도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찰하고, 그것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풍속`조를 보면, 강원도는 경기도를 비롯한 여타 지역에 비해 유교적 문명화가 덜 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강원도가 유교문화의 미답지로 인식된 데에는 강릉과 원주를 제외하고는 향교가 활성화 되지 못하였고 향약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강원도는 태초의 순박한 풍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토착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유교문화의 정착 정도를 기준으로 보면 강원도의 풍속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으나 자연 지리에 대한 인식은 달랐다. 관동팔경을 비롯하여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등 강원도의 형승은 사대부 문인들의 대표적인 유람의 공간이었다. 고려 말 安軸의 『關東瓦注』와 李穀의 東遊記등과 같은 기행 시문을 통해, 강원도의 형승이 발견되고 사대부 문인들에게 문화적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나아가 강원도는 세속의 명리와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속의 공간이자, 정치적 좌절에서 오는 우수나 번뇌를 해소하는 치유의 공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金時習과 淸平寺, 金壽增과 谷雲, 金昌翕과 雪嶽山 등을 살펴보았다. 이제 맹목적인 중앙 추수를 지양하고 지역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치에 주목할 때이다. 강원도는 도시문명에 찌든 현대인을 태초의 시간으로 이끌어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현대의 도시문명을 좇아가기보다는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시원적 공간, 지역의 토착문화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 형승과 산수가 가져다주는 휴식과 치유 등의 문화요소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것이다. In this paper, I tried to navigate the cultural identities of Gangwon Area in Joseon dynasty and that searched for its current meaning. In Sillok(實錄), geography and anthologies, Kangwon area was negatively recognized: A solitary society isolated by mountain villages, an economically backward area, an area where Confucianism has not been established. On the other hand, Kangwon area was seen as an unsophisticated source space, and was noted as space of Unworldliness and Healing through traveling Scenic spot. Now we should refrain from blindly pursuing the center and that need to pay attention to the cultural values of the region. Modern people can repair the mind and body of the city through a travel to Gangwon area. Therefore, we should actively develop cultural elements of Gangwon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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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시호(詩湖) 박원동(朴元東)의 강릉 지역 유교문화 유산의 정리 활동과 그 의미

        安世鉉 ( Ahn Se-hyun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6

        본고는 일제강점기 강릉의 유학자 詩湖 朴元東(1873~1949)이 강릉의 유교문화 유산을 정리한 활동을 고찰한 것이다. 박원동은 강릉향교의 直員을 비롯하여 강릉의 4대 院宇인 鄕賢祠·五峯書院·松潭書院·晦庵影堂의 有司나 管理人을 역임하였다. 본고에서는 『江陵鄕賢行錄』·『五峯書院實記』·『江陵鄕校實記』 등의 편찬 배경과 과정을 집중적으로 탐색하여 박원동이 지닌 지역학 연구자의 위상을 부각하고자 하였다. 『강릉향현행록』은 향현사에 배향된 12향현의 행록을 모으고 향현사의 연혁을 덧붙인 것으로, 1931년 석판본 1책으로 간행되었다. 『강릉향현행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문중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 12향현의 位次를 바로잡았다. 『강릉향현행록』의 편찬은 12가문을 기리는 것인 동시에 강릉이 지닌 儒鄕으로서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활동이었다. 한편 총독부의 출판허가 과정에서 「범례」를 비롯한 일부 내용의 수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봉서원실기』는 오봉서원이 설립된 1552년(명종 7)부터 祭田을 확충한 1930년까지의 연혁을 정리한 것인데, 1933년에 편찬을 완료하였다. 순조 연간 우암 영정을 오봉서원에 배향할 때에 지역의 유림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박원동 당대까지도 갈등이 여전하였다. 박원동은 『오봉서원실기』에 우암 영정의 배향과 관련된 역사 기록을 충실하게 수록하여 당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한편 유림 사회의 단합을 촉구하였다. 『강릉향교실기』는 1932년 박원동이 金秉煥(1871~1947)과 함께 편찬한 것으로, 이듬해 강릉고적보존회에서 연활자 1책으로 간행하였다. 간행본의 ‘編輯人’에는 강릉 군수이자 강릉고적보존회의 설립자인 ‘다키자와 마코토[瀧澤誠]’의 이름도 들어 있는데, 이 책이 군수의 주도 하에 지역의 유림이 협력하여 간행한 官撰이었기 때문이다. 『강릉향교실기』에는 일제의 향교 정책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東洋尊聖錄」은 ‘동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유교를 식민 통치의 정당화에 이용하였던 일제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박원동이 『강릉향교실기』를 편찬한 것은 강릉의 유교문화를 계승하고 재건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유학이 침강하는 시대에 강릉의 유교문화 유산을 정리하고 재건하였던 박원동의 활동은 오늘날 지역사회에서 유교문화를 계승하는 데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주었다. In this paper, I studied Park Won-dong's efforts to organize and rebuild the Confucian cultural heritage of Gangneung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In particular, I focused on his exploring the background and process of his compilation of Gangneunghyanghyeonrok, Obongseowonsilgi, and Gangneunghyanggyosilgi. In the process of compiling Gangneunghyanghyeonrok, Park Won-dong coordinated conflicts between families and corrected the order of 12 Hyang-hyeon's plaque through thorough examination. The compilation of this book is meaningful in that it reaffirmed Gangneung's status as a town of study abroad. Obongseowonsilgi is a compilation of the history from the establishment of Obongseowon to the era of Park Won-dong. When the portrait of Uiam was enshrined in Obongseowon in the year of the Sunjo, the local Confucianism was divided into Noron and Soron, and conflicts continued until the time of Park Won-dong. Park Won-dong faithfully included historical records related to the deflection of the Uam portrait in this book, revealing the truth of the incident and urging the unity of the local Confucianism. Gangneunghyanggyosilgi was compiled by Park Won-dong in 1932 with Kim Byeong-hwan, and published by the Gangneung Historic Preservation Society in 1933. The publication's Editor also contains the name of Makoto Takizawa, the governor of Gangneung and founder of the Gangneung Historic Preservation Society. This is because this book was published in cooperation with local Confucianism under the leadership of the county governor. This book includes contents related to the Japanese colonial policy, reflecting the Japanese political intentions of using Confucianism to justify colonial rule. Even in this situation, Park Won-dong compiled this book because he had a strong will to inherit and rebuild Gangneung's Confucian culture. Park Won-dong's activities to clean up and rebuild Gangneung's Confucian cultural heritage in an era of declining study abroad provided many implications for inheriting Confucian culture in today's community.

      • KCI등재

        조선후기 초학자를 위한 독서 교육의 방법과 현대적 전망 - 언어 교육 및 작문 교육과의 연계성에 주목하여 -

        安世鉉 ( Ahn Se-hyun ) 동방한문학회 2020 東方漢文學 Vol.0 No.83

        본고는 조선후기 초학자를 위한 독서 교육의 성격을 고찰하고, 오늘날 학교 교육에서 활용할 만한 독서 교육의 방법을 제시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선행 연구가 주로 조선 시대의 독서 문화나 개별 문인의 독서관·독서 방법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데에 반해, 본고는 오늘날 학교 교육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선후기 초학자를 대상으로 한 독서 교육의 성격과 방법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조선후기 초학자를 위한 독서 교육은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으나, 한문이라는 언어를 습득하고 한문으로 글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에도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곧 유교 교육을 목표로 하면서도 언어 교육과 작문 교육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학교 교육에 적용해 볼만한 독서 방법으로는 언어 교육과의 연계로서 音讀·多讀·記誦을, 작문 교육과의 연계로서 抄讀·箚記·抄書를 제시하였다. 음독·다독·기송은 글을 소리 내어 읽고 여러 번 반복하여 암송하는 것인데, 언어 교육의 측면에서 문자를 식별하고 문법을 깨치는 데에 유용한 방법이다. 초독·차기·초서는 중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읽는다거나 의문 나는 점을 기록한다거나 특정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여러 책에서 뽑아 편저를 엮는 것이다. 이는 독법인 동시에 작법으로서 작문 능력을 기르는 데에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오늘날 학교 교육에서 독서 교육과 작문 교육은 분리되어 있으며, 독서 교육에서 音讀을 초급한 수준으로 치부하고 작문 교육에서 抄書를 표절과 같이 여기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음독·다독·기송의 과정에서 텍스트의 이해와 수용을 위한 사고 작용이 함께 이루어지며, 특히 음독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속도·억양 등의 비문자적 자질들은 의사소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이다. 초독·차기·초서의 과정에서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창의적 이해가 가능하며, 특히 초서는 작문의 과정에서 중요한 관련 정보의 수집과분석, 재구성을 익히는 데에 유용하다. 본고가 오늘날 독서 교육을 언어·작문 교육과 연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In this paper, I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reading education for beginner students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presented a method of reading education that is suitable for use in today's school education. I noted that reading education for beginners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aimed at Confucian ethics education, but it also had the characteristics of language education and writing education. Therefore, I suggested the oral reading and summarizing reading as reading methods suitable for today's school education. The qualities of speed and intonation that accompany the process of oral reading are important factors in communication. The summarizing reading is useful for training in the collection, analysis and reconstruction of relevant information that is important in the course of writing. I hope this paper will help link today's reading education with language and writing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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