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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중·후기 지역 문학장의 변모 양상과 江湖歌辭의 의미 지향

        윤지아 고려대학교 대학원 2021 국내박사

        RANK : 249727

        이 논문에서는 조선조 전반에 걸쳐 향촌사족의 문예 전통으로서 명맥을 이어왔던 江湖歌辭의 역사적 전개 양상 가운데, 특히 조선 중·후기를 대상으로 그 창작 및 향유 맥락을 검토하고 작품의 의미 지향을 밝히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구체적 현실에 주목하기 위하여 ‘문학장(場)’이라는 개념어를 전면화하고, 이로부터 그간 경제적, 정치적 입지의 차원에서 작가와 작품을 조명하였던 선행 논의의 미비점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강호가사는 조선조 시가사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적 장르이다. 현전 작품은 총 34작품으로 파악되며 전 시기에 걸쳐 비교적 고르게 분포하고 있는 편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중 15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시대에 따른 변모 양상을 밝혔다. 강호가사는 국문시가의 先驅로 출발하여 이후 문학사의 저변에서 꿋꿋이 맥을 이어왔던 장르이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기존 작품을 답습하며 그 미적 탄력성을 잃어갔다고 평가받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긴 역사적 장르 내부에 단층은 과연 없었을까, 그간의 연구 방법론이 작품의 외견에 치중하여 역사적 변화 추이에 무심했던 것은 아닐까.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의문점을 바탕으로, 현전 강호가사를 종합적 차원에서 재검토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진단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작가의 구체적 삶과 문학 활동의 기반을 드러내 줄 수 있는 도구로 ‘문학장은 문예 활동을 매개로 한 문인들의 교유 관계망을 의미하는’ 문학장(場)이라는 개념어를 설정하여 논의를 진행하였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2장에서는 ‘전형’의 형성 관점에서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강호가사 몇 작품의 의미지향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 결과 〈면앙정가〉는 전통적 이상향인 ‘낙토(樂土)’ 인식으로부터 유학적 이상세계의 전형을 창출하였고, 〈성산별곡〉은 원림미학을 통해 은둔의 전형을 탄생시켰으며, 〈서호별곡〉은 중국의 명승을 우리 국토에 연출하여 문인풍류의 계승을 모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장에서는 조선 중기 작품들을 대상으로, 이 시기에 부상하였던 지역 문학장과 이로부터 강호가사의 외연이 확장되었던 사실을 밝혔다. 조선 중기에는 사화기에 자신의 고향이나 처향 등지로 낙향한 문인들이 향촌에서 양성한 후학 및 후손들이 향촌 사회의 지배 계급으로 성장한 시기로, 새로운 계급윤리인 거향 의식이 성장하였다. 이처럼 거향 처신에 신경을 썼던 이유는 관과의 마찰을 피해 독자적인 향권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향촌 사족이 지배세력으로서 입지가 강화되었던 만큼, 지역 문학장 또한 전대에 비해 풍부해지는 양상을 보였으며, 문인들은 수학(受學), 교유(交遊), 종유(從遊) 등의 형태로 이와 같은 문학장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조선 중기의 강호가사 창작 동향을 대표할 만한 작가군을 지역적 지표를 영남, 호남, 충남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논의 결과 영남 지역은 학맥 인식의 심화 및 각축 조짐이 보이고 있었고, 이로부터 영남의 작가들은 향촌 사회 내에서 각각 다른 입지와 문화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김득연의 〈지수정가〉에는 영남 도맥을 계보화 하려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었고, 이는 그와 교유하였던 유일재계 문인들의 존재감과 자긍심을 드높이기 위한 제스쳐로 이해된다. 반면, 동일한 시기에 김득연과 교유 관계를 공유하기도 하였던 조우인의 경우 영남 사회 내에서 뚜렷한 영향력을 갖지 못했던 작가로, 영남지역에 세거하였지만 향촌 사회 내에서의 활동보다는 중앙 관료 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평생을 살아갔다. 그의 〈매호별곡〉은 영남이라는 지역적 공간에 큰 애착이나 정주의식을 보여주지 않으며, 오히려 경화사족들의 세련된 미감과 취향을 반영하여 만년의 회한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노계 박인로는 영천에 세거하며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이 대표하는 한려학파의 문인들과 교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려학파 특유의 선유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장 안에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펼쳐 보일 수 있었다. 그의 〈노계가〉는 당대 지역 문학장에서 느꼈던 대사회적 결핍을 나름대로 보충하고, 이로부터 건강한 정체성을 갖고 문학장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박인로의 낙천적인 인생관, 문학관을 담고 있다.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작가는 정훈으로 세 차례 전란을 겪는 극도의 혼란한 시기를 살았던 향촌 문인이다. 정훈은 문학 창작을 통해 ‘忠·孝’를 포함한 유가이념을 수호하는 불운처사로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으며, 향촌 사회 내 대외적 활동을 통해 문화귀족의 반열로 자신의 가문을 재건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의 〈수남방옹가〉와 〈용추유영가〉는 정훈이 만년 용추동에 은거하며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은일 생활의 감회를 노래한 작품이다.정훈은 이 두 작품의 창작을 통해 이상세계를 자기 공간에 구현하고자 하였던 유자 보편 욕망을 충족함과 동시에, 충의의 유학자로서 향촌 사회 내에서 자기 이미지 완성 또한 추구하고 있다. 충남지역은 예로부터 ‘내포(內浦)’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향촌으로서 근기지역의 특성을 공유하는 경향이다. 신계영의 〈월선헌십육경가〉는 16세기 강호가사의 계승과 17세기의 변화 양상을 모두 내재하고 있는 가운데, 서울과 호남 사이의 문화적 중간지대로서 충남 내포 지역의 문화상을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편 부여의 문인 황일호는 부여 백마강 근처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부여지역에서 나름대로 가문의 입지를 확보하고자 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황일호의 〈백마강가〉는 강거(江居)를 중심으로 하였던 문인 선유 문화를 계승한 작품으로, 강호가사와 어부가의 전통을 혼합한 장가(長歌) 양식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서 백마강은 공동체적 인식에 더해, 작가가 생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추억의 공간으로, 내면 정서를 가감 없이 토로하는 17세기적 가사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4장에서는 조선 후기 작품들을 대상으로, 지역 문학장이 더욱 세분화되고 그 과정에서 강호가사의 영향권이 일향(一鄕)이 아닌 하나의 촌락 및 가문 단위로 축소되었던 현황을 밝혔다. 향촌 세력의 약화로 향촌의 유생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향촌 문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향촌 사회 내부에서 찾고자 하였다. 특히 학맥이 심화되었던 영남의 학맥 체계는 이제 학파 뿐 아니라 가학(家學)으로 세분화되어 나타났다. 조선 후기 향촌 문인들은 완숙한 유교 문화가 향촌 사회의 미시적인 영역까지 침투하였던 상황에서, 일가(一家)를 중심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출사가 불가능했던 현실적인 이유와 맞물려 이들이 자연스럽게 거향의 길을 걷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이어지는 작가 및 작품론은 전 시기보다 축소된 문학장의 범주에 착안하여 강호가사가 산출된 세부 지역을 기준으로 영남에서는 안동 권역(안동, 영양)과 상주 권역(상주, 문경), 호남에서는 장흥과 담양이라는 구체적인 지역 배경을 바탕으로 문인들의 교유 양상 및 집단 인식을 밝혔다. 그 결과 안동 권역의 작가 이귀서와 조성신은 모두 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고, 이들이 창작한 〈하명동가〉, 〈개암정가〉 두 작품은 이러한 문학장의 변동을 반영하여 가문이 세거하였던 촌락 중심의 공간인식이 나타남을 확인하였다. 위 작품들은 전대 강호가사의 구조 및 표현을 대개 계승하는 한편, 유학자로서 살아가는 일상의 단면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표출하는 방향으로 그 의미지향이 변화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한편, 상주 권역의 조선 후기 영남 남인들 사이에서 싹텄던 영남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좀 더 강하게 나타났다. 상주 권역(상주, 문경)에서 산출된 강호가사가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가사문학 최초로 구곡가의 형식을 취한 작품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작품 내 무이구곡(武夷九曲) 차용이 그 이전 강호가사보다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상주 지역에서 유독 남인-노론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향론과, 노론으로부터 세력을 위협받고 있었던 남인들의 처지와 연관된다. 현실적 권력이 없었던 남인들에게 향론을 주도할 명분은 단 하나, 유학적 정통성과 순수처사로서 학문적 지향을 표방하는 것이었으며, 이와 같은 동인으로 무이구곡을 적극 수용하게 된 것이다. 강호가사를 창작한 채헌, 그리고 그와 교유하였던 이천섭은 인척관계로 영남을 대표하는 청대 권상일의 문인이었다. 채헌의 〈석문정구곡도가〉는 ‘주자의 무이구곡’ 이라는 외형 설정을 통해 영남지역의 유학적 정통성을 표방하고, 스승 청대 권상일과 인천 채씨 가문을 칭송하여 자신의 학맥과 가문을 영남 내부의 모범적 공동체로 이미지화하고자 한 결과물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천섭의 〈사여재가〉 또한 무이구곡을 적극적인 수용한 데에는 영남의 유학을 다시금 부활시키고 도맥을 흥기를 염원하였던 작가의 욕망이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호남 지역에서 강호가사는 장흥과 담양에서 출현하였다. 이 중 장흥 지역에 세거하였던 장흥 위씨, 인천 이씨 집안에서 가문결속을 위한 일련의 가사를 창작 및 향유하였고, 장흥 지역의 가사 향유 문화는 주변 고을에도 상당한 파급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존재 위백규로 대표되는 장흥지역의 문인들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곤궁하여 궁경가색에 나서야 할 정도로 몰락했으며, 이로부터 가문의 질서가 해체될 위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지역 문인들은 가문 결속에 관심을 가졌으며 문학장 또한 가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상계의 〈초당곡〉은 17~18세기 강호가사까지 유지되어 왔던 보편적 이상향에 대한 사고방식과 이념적 지향을 모두 탈각한 채, 작중 화자의 은일 행위가 갖는 개인적인 차원에 초점이 맞추어진 작품으로, 19세기 강호가사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당곡〉이 가문 내 소통되었음을 상기할 때, 그리고 이후 〈초당춘수곡〉으로 수용되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할 때,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작가의 처사적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강조하여, 가문 내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자긍심을 잃지 않도록 정신적 방어선을 제공하고, 향촌의 몰락한 양반이 아닌 문인으로서 자기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한편, 담양 지역의 남석하는 향촌의 정치적 소외에도 출사를 염원하였던 인물로, 이러한 염원이 문학 창작의 동인이 되었던 인물이다. 남석하의 교유 양상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은 그가 자신의 교유의 거점으로 재래의 면앙정을 활용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담양의 대표적인 정자인 면앙정의 풍류를 본받아 일향(一鄕)을 대표하는 문화 귀족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초당춘수곡〉은 남석하가 만년에 자신의 초당에서 은일하는 감회를 노래한 작품으로, 작품에는 은일 지향과 출사 지향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부조화스럽게 혼재한다. 이는 남석하의 가사 창작 방식이 지나치게 차용, 전고 나열 등에 의지하여 이루어져 개인적 발화와 잘 어우러지지 못한 탓으로 보이며, 이는 19세기 시가문학의 전반적 경향인 세속 지향, 통속성 등을 흡수하고 있었던 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조선 중·후기 강호가사의 시가사적 의의를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조선 중기의 강호가사는 지역 문학장을 기반으로 당대 사대부 가사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데에 일조하였다. 조선 전기의 강호가사가 사대부의 보편적 미의식과 이념 지향을 담아냄으로써 후대 강호가사 산출의 토대가 되었다면, 조선 중기에는 전기에 형성된 여러 전범들을 계승하는 한편, 지역적 구체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학적 경향을 흡수하여 다기한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경향성은 지역 문화에 대한 풍부한 인식 뿐 아니라, 작가를 둘러싼 학맥, 정치, 사회적 현상 등 다양한 제 경향성을 포섭하고 있기에 문학사 및 문화사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 하겠다. 둘째, 조선 중기의 강호가사에 나타난 경험 세계와 구체적 삶의 모습은 이 시기 사대부 가사문학의 다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조선 중기 강호가사는 전대 작품의 전범적 면모를 받아들이고 해당 지역 문인들의 집단의식을 반영하면서도, 그 행간에 개체적 삶의 모습과 작가 개인의 의지 등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현실을 포착하기 시작한 시선은 다양한 문학적 소재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강호가사는 견고한 관습을 지켜온 것처럼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다른 갈래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었다. 강호가사는 변하지 않는 定體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들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강호가사가 다른 유형의 가사나 다른 갈래의 문학 형태에 끼쳤던 영향력은 강호가사의 이같은 지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 조선 후기 강호가사는 본래 강호가사가 가지고 있었던 이상적 세계상을 상당 부분 탈각하고, 현실 대응의 수단으로서 향촌 문인들의 자기표현 양식이 되었다. 당대 더욱 미시화되고 있었던 지역 문학장 안에서 향촌 문인들이 처해 있었던 상황으로 보아, 이들은 누구보다 절실하게 강호가사의 창작과 향유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강호가사는 재래의 문학의 답습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쇠잔해가던 향촌 문인들의 정신적 명분으로서 절실한 자기표현의 갈래였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조선 후기 강호가사는 그 이념적 자리를 교훈, 오륜 가사 등에 넘겨주고 남은 부분은 가창문화의 일부가 되어 시조, 가창가사, 잡가 등으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문을 중심으로 한 문학장 내에서 가사가 활발히 향유되었던 영향으로, 일부 규방가사에서 사대부 가사의 미의식과 표현을 계승하여, 양반가 여성들의 품위와 고고함을 드러내는데 쓰이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문학사 내에 강호가사의 자취는 곳곳에 용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朝鮮後期歌辭에 나타난 現實認識硏究

        정의영 慶山大學校 1995 국내석사

        RANK : 249663

        The later period of Choson is a time of transition to the mordern age. The detailed analysis on cultural phenomenon during this period plays an important role in understanding an aspect of the Korean cultural tradition. Ka-Sa, originated from a genre expressing an idea of Sa-Dae-Bu in the early Choson period, was accepted even by the common and womenkind classes, so that there was more development of its works in quality. There was occurred the breakdown of social order in the Choson society after both Yim-Jin-Wae-Ran and Byung-Ja-Ho-Ran. As a result, the disordered existing value system caused a variety of actural problems. Reflecting the living aspects and actural problems in various classes, nevertheless, Ka-Sa advanced into more modern consciousness by describing the existing social conditions with realistic and satirical techniques. Ka-Sa in the later period gradually began to be based on the experience in the actual world and definite facts. And then Ka-Sa in the later period seemed to be based on the verisimilar experience world in a place of exile and different spaces. Moreover, Ka-Sa described the lamentation of women surrounded by the fetters of feudalism, together with consciousness of reality which was caused by awakening to the ego. Additionally, the common class which had been subject to a Confucian idea, began to recognize the ego. As a consequence, there appeared the definite consciousness of reality such as knowledge of human nature, criticism on covetous officials and rejection of feudalism.

      • 조선후기 사행가사의 세계 인식과 문학적 특질

        김윤희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국내박사

        RANK : 233327

        본고는 조선후기 사행가사를 연구함에 있어 내재적 분석에 국한되었던 기존의 관점을 지양하고 동아시아 관계사에 기반한 입체적 접근과 한문기록과의 상관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개별 작품들의 세계 인식과 문학적 특질을 보다 선명하게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이상에서 논의된 주요 내용을 정리하고 전망적 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삼도록 하겠다. 사행가사는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의 외교적 체험이 소재가 되어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창작&#8228;향유된 일련의 작품군으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단편적인 작품론으로는 해명되지 않았던 인식의 지층과 문학적 특질의 제양상은 통시적 고찰의 시야에서 보다 선명하게 확인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작품들에 발현된 중화주의나 화이관이 대타적 자국 인식의 기제가 전제된 관념이라는 점에 유의하여 그 현상적 변모보다는 작품이나 시기에 따라 斷續的으로 발현된 양상에 주목해 보았다. 또한 기존의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작품들의 창작 원리를 논증함으로써 자신의 사행록이나 관련 기록들을 토대로 재구성한 사행가사의 문학적 관습과 그 지속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17세기 사행가사의 전반적 특징은 중화주의와 관련하여 형성된 화자의 인식이 서정적 층위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인데 중국과 일본에 따라 그 발현 양상과 문학적 질감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17세기 중반의 작품인 <장유가B>는 ‘중화회복’에 대한 열망이 실제적 공간 인식에 투사되어 대명의리론에 기반한 감정적 진폭이 확인되는 작품이다. 중화의 공간을 夷狄(淸)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심정적 고뇌가 탄식과 회고의 정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남용익은 자신이 연행 도중 창작한 한시의 주요 구절들을 차용하며 체험의 서정적 결을 보완&#8228;심화해 나갔다. 반면 <장유가A>에서 일본은 중화의 주변국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화이관이 부분적으로 발견될 뿐 대체로 경험론적 시선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견문의 교술적 나열을 지양하고 초월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창작함으로써 가사문학으로서의 심미적 특질이 구현되고 있었다. <장유가B>와 마찬가지로 남용익은 자신의 한시 작품들 중 환상적 미감이 발견되는 구절들을 참조&#8228;재배열함으로써 사적인 향유에서의 정서적 몰입과 효용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청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선 집권층은 ‘중화계승’의식을 통해 자국 인식을 강화하게 되며 이러한 대외 인식의 변모가 17세기 후반의 사행가사인 <서정별곡>, <연행별곡>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장유가B>에 비해 자국의 공간을 인식하고 표상하는 비중이 강화되었으며 대명의리론에 기반한 탄식과 회고 의식은 감소되고 있는 것이다. 청을 비난하며 중화의 회복을 염원하는 구절도 확인되지만 <장유가B>에 비하면 부분적이며 청나라 문물을 가시적으로 인지&#8228;표상하거나 개별적 시각에서 풍경을 포착하여 감흥을 표현하는 등의 변모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후기 대청 인식의 구도와 사행가사의 문학적 표상이 상응하며 변모한 현상을 확인케 하는 일차적 사례인 것이다. 또한 <연행별곡>은 자신의 <연행일기>를 토대로 창작된 정황이 확인되는 바 일기의 인상적인 장면들이 선별되어 가사문학의 서사 내에 속도감 있게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행가사 작품들은 일기나 한시 등을 토대로 서사적 축을 설정하고 주요 감흥을 보완함으로써 문학적 미감을 생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안정된 율격과 분량을 유지하며 가창 및 음영되었던 이 시기 가사문학의 존재 기반과 유사하지만 그 창작 원리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18세기 사행가사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주요 특징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인식이 점차 개방됨에 따라 對他的 자국 인식도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 초는 대청 관계가 안정됨에 따라 조선의 외교 구도도 실질적인 변화를 보이는 시기이다. 북벌론이 주장될 만큼 중화 회복의식과 명분론에 집착했던 17세기 중&#8228;후반의 서인 집권층은 점차 청나라의 현실적 위력을 감지하게 되며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정치&#8228;문화적 안정으로 인해 연행사들은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인식&#8228;수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대내적으로는 존주론과 정통론이 강화되며 명나라 역사서가 본격적으로 저술되는 등 중화 계승국으로서의 자존적 의식을 강화한다. 기자의 계보를 추적하고 마한정통론이 대두되는 것은 물론 이 시기 연행을 다녀온 이들의 작품 속에 북방고대사 회복에 대한 소재도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모는 17세기 후반의 <연행별곡>과 <서정별곡>에서도 확인되었으며 18세기 전반의 <임자연행별곡>도 유사항 양상을 보인다. <임자연행별곡>의 내용을 보면 북방 영토에 대한 회고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명분론의 관념성과 배타성은 약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경의 문화적 풍경에 대한 관심과 구체적 사물을 포착한 어휘의 특성은 19세기 사행가사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前兆的 표상으로서의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 이처럼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대청 사행가사의 경우 북방 고토를 인지&#8228;회고하는 방식으로 중화계승의식이 발현되어 있었지만 18세기 중반의 작품인 <일동장유가>에서는 자국의 문화적 우월감과 화이론적 관념이 작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동장유가>의 화자가 일본의 물질적 번영을 찬탄하고 자국의 열세를 인정하는 등 이적국을 중화의 세계로 포섭&#8228;소유하고자 열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화이관의 수치적 변화나 동향을 파악하기보다는 그 이면에 내재한 실제적 의식을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일동장유가>의 창작 맥락을 살펴본 결과 전대의 작품들처럼 &#985172;동사록&#985173;이라는 자신의 일기를 저본으로 재구성된 작품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자족적 향유의 차원을 넘어 가내 독자를 상정하여 창작된 작품인 만큼 과장이나 허구적 장면화로 자신의 능력적 우월함을 과시하는 내용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인식의 개방 및 전달 욕구가 강화되면서 김인겸은 자신의 일기를 가사 작품에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으며 사행가사의 통시적 흐름에서 보면 이는 형식적 전변을 보이는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한문일기를 국문가사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대화체의 활용, 율격적 이완, 세밀한 묘사 등과 같이 전달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문체 특질들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특징은 19세기 사행가사 작품들에서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일동장유가>의 형식적 전변은 문학사적 연속성을 확인케 하는 지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이후에는 서세동점에 따른 근대화에 따라 사행가사에 투영된 세계 인식도 시기별, 국가별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우선 19세기 전반의 대청 사행가사인 <무자서행록>의 경우 청나라와 조선을 ‘大國-小國’의 구도 하에서 이해하며 긍정적 대청관을 견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19세기 전반의 연행사들 기록에서 대체적으로 확인되는 논리이기도 하며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을 전후한 시기에 청은 엄격하게 정보 누설을 차단했기 때문에 조선 연행사들은 청의 약화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자서행록>의 화자는 자신을 ‘편방’에 위치한 ‘고루한 소국’의 ‘촌계’로 지칭하고 있어 <일동장유가>과 비교했을 때 관념적 인식 기제가 더욱 약화되고 대타적 자의식의 현실성이 강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부분적으로 중화회복에 대한 열망이나 중화계승적 자부심도 발견되지만 산문기록인 &#985172;부연일기&#985173;와 비교했을 때 문학적 상상이 투사된 논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면 의식이 지향하는 영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는 이러한 사행가사의 효용성은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창작&#8231;향유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일부이며 <무자서행록>의 전반적 특성은 ‘遊覽誌’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 흥미성과 전달성이 강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대의 <일동장유가>와 마찬가지로 가내 소통을 전제로 창작되는 과정에서 전달의 효용성과 수용자의 흡인력을 제고할 수 있는 층위에서 연경에서의 체험 소재가 재조정되어 배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동장유가>의 경우 일기의 서사를 유지하면서 매일의 경험이 폭넓게 수용되고 있는 반면 <무자서행록>은 ‘遊覽’의 범주에서 소재가 선택되어 집중적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고 靜態的 대상들은 사실적 정보들이 나열되면서 장면이 확장되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측면이 부각되는 부분에서는 산문기록의 서사가 파열되는 양상이 발견될 만큼 ‘遊覽’ 의식이 강화되어 이국 체험의 재현에 대한 강렬한 문학적 욕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독자들이 <무자서행록>을 ‘가지 않아도 볼 수 있는 萬物圖’로 이해&#8228;수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창작 의식 때문인 것이며 이는 산문기록이나 한시와 다른 층위에서 체험을 구성하고자 한 사행가사의 차별적 영역을 선명하게 확인케 하는 사례이기도 한 것이다. <무자서행록>의 이러한 특징은 이후 <병인연행가>에서도 발견되는데 기존에는 두 작품의 차별적 영역이 고찰되지 않아 <병인연행가>의 대청관도 대체로 긍정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병인연행가>의 창작 맥락과 동아사아 관계사를 고려한 결과 <병인연행가>에는 오히려 부정적 대청관이 내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순학은 연행 도중 목도한 서양 세력에 대해 위협을 느낀 후 작품을 창작했기 때문에 <무자서행록>에 비해 자국 인식의 측면이 강화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대명의리론이 강하게 발현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홍순학은 삼사 신분이었던 만큼 <병인연행가>에서는 대명의리론이 주된 의식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전대의 <장유가>나 <임자연행별곡>과 같이 대타적 자국 인식이 강화된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기존에 화자의 보수적 세계관이나 관습적 표현으로 간주되면서 그 의미 실질이 제대로 분석되지 못하였다. <병인연행가>를 살펴보면 <무자서행록>처럼 연경에 대한 ‘유람지’로서의 특질을 보이고 있고 그 비중도 상당하기 때문에 이 지점들에서 화자의 주된 세계 인식을 추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들에서 <병인연행가>와 <무자서행록>의 상호텍스트성이 발견되고 있는 문학적 현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병인연행가>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외교적 주체로서의 체험이 반영된 부분은 산문기록을 저본으로 삼고 흥미로운 소재나 장면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무자서행록>을 참고한 정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군집화된 소재별 분류와 확장적 첨가의 방식 등을 통해 <병인연행가>는 보다 진전된 문학적 구성의 전략과 형상화의 특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전대의 사행가사 작품들과 비교해 본다면 시각적 재현과 관련된 장면이 독립적인 층위에서 이해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자서행록>과의 상호텍스트성이 확인되는 지점들은 <병인연행가>의 화자가 실제로 목도하거나 경험한 장면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찰자의 시각적 체험이 <병인연행가>&#61778; 세밀한 묘사를 가능케 했다는 기존의 전제적 인식은 재고될 필요가 있으며 경험 세계에 가치 부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셔유견문록>을 보면 근대화된 문물을 경탄의 층위에서 묘사함으로써 경험 세계에 압도되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전단계적 현상을 <무자서행록>과 <병인연행가>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병인연행가>와 동일한 연행 체험을 토대로 창작된 <북행가>는 문학적 소재 및 질감에서 상당한 이질성이 발견되어 흥미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국 인식’이나 ‘연경의 문물’에 초점을 두지 않고 지극히 사적인 시선에서 소재를 선별&#8228;형상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사행가사의 소재적 ‘변이’로 인식되었던 기존의 시각을 본고에서는 소재의 ‘확장’으로 규정하여 그 문학적 특질과 의의를 해명해 보았다. 그 결과 <북행가>는 여행의 여정과 화홍과의 애정을 교차되면서 문학적 흡인력이 생성된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사행이라는 공식적 목적을 소거했을 때 남는 여행의 설렘과 아쉬움이 기녀와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감정적 동요의 체험과 교묘히 결합되면서 사행가사가 표상할 수 있는 문학적 특질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대의 작품인 <일동장유가>에도 ‘기녀’가 등장하지만 대부분 관찰자적 시선에 포착된 부수적 인물형들인 경우가 많았지만 <북행가>에서는 서사 과정의 중요한 축에 기녀들이 배치되면서 그들과의 관계나 감정선이 중시되고 있다. 이념에 종속된 시선이나 외국 문물의 재현이라는 층위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인간의 감정에 주목함으로써 이를 극적 장면화의 수법과 서사적 연속성의 방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흡인력으로 인해 <북행가>는 경북 상주의 규방 문화권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소통&#8228;향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에 오면 본격화된 서세동점으로 인해 청 문물에 대한 적극적 호기심은 많이 감소하게 되며 사행기록도 관습적으로 반복되거나 퇴행되는 양상을 보이는 만큼<북행가> 이후 새로운 대청 사행가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병인연행가>는 여러 이본들이 확인되고 <무자서행록>의 필사년도가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만큼 새로운 연행가사가 창작되지 않더라도 독자층의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한 정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세계로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목도하게 된 일본과 서구 체험의 경우 각각 한 편씩의 사행가사가 발견되고 있다. <유일록>과 <셔유견문록>은 ‘중화’에서 ‘근대’로 세계 인식이 전변되는 양상을 확인케 하는 사행가사 작품들인 것이다. 사행 도중 을미사변, 아관파천, 단발령 등과 같은 격변적 사건들을 접하게 된 <유일록>의 화자는 근대화된 일본의 위력과 상대적인 조선의 약세를 완전하게 자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일본의 기계 문명이나 군사, 세금제도 등을 긍정하고 있으며 교육과 일부 제도는 ‘본받아야’ 한다는 논리까지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부정적 대일관은 대체로 ‘풍속’의 범주에 한정되어 발현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존에 <유일록>의 주된 대일 인식으로 부각되었던 화이관은 근대성 이외의 논리에서 부분적으로 발현되는 관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일동장유가>의 경우 발현된 화이관이 대타적 자국 인식과 상응하는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유일록>에서의 적절한 대응 논리를 형성할 만큼의 의미 실질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중화주의를 구심점으로 동아시아와 일본을 인식했던 <일동장유가>의 경우와는 달리 <유일록>의 화자는 근대성에 경도됨으로써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수용하는 논리를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청 사행가사인 <무자서행록>, <병인연행가>와 비교해 보더라도 ‘유람지’의 성격에 해당하는 부분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지만 <유일록>의 경우 ‘근대적 문물’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심화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풍속의 범주를 넘어 자료에서 추출된 지식적 층위의 담론들까지 확인된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선명하게 확인된다. 또한 &#985172;범사록&#985173;과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그 창작 원리를 규명해본 별과 대체로 한문일기의 서사를 수용하되 전달 및 기록의 욕구가 발현되는 부분에서는 장면이 확장되고 있었다. <무자서행록>이나 <병자연행가>와 문학적 특질의 유사성이 확인되는 바 창작 원리를 고려함으로써 그 동인을 해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전변의 지점들을 세밀하게 살펴본 결과 장면의 유기적 연속&#8228;확장을 위해 다른 날짜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분산&#8228;재배치되는 현상과 장면 단위 내에서도 소재들이 재배열되어 체계적 구성이 강화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장면의 실제성과 전달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정연한 구조 내에 세밀한 묘사를 보완하는 등 <유일록>도 &#985172;범사록&#985173;을 토대로 창작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문학적 특질을 확보하게 된 사행가사임을 알 수 있었다. <일동장유가>도 &#985172;동사록&#985173;을 토대로 창작되었지만 자신의 체험과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층위에서 과장 및 허구의 논리가 적용된 양상을 확인되었다. 그러나 <유일록>은 이미 자국의 열세를 인지한 상황이므로 근대적 문물과 관련된 장면에서는 내용이 보완&#8228;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사행가사에 투영된 대외 인식의 주된 관념이 중화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이러한 양상은 동시기 대영 사행가사인 <셔유견문록>에서 더욱 명확하게 발견된다. 특히 잔존하는 중화적 사고로 일본에 대한 이적관이 부분적으로나마 확인되는 <유일록>과 달리 영국의 경우 근대화의 구심점으로 설정되어 찬탄의 시선만이 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대와 달리 동아시아를 벗어난 외교 체험이 소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중화주의가 근대적 세계관으로 교체되는 轉變 양상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일록>에도 근대적 문물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 전제되어 있지만 중화주의적 가치관으로 인해 발현된 이적관과 자국의 열세에 대한 한탄도 대타적 자의식의 기제로 표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셔유견문록>에서 확인되는 자국 인식의 구심점은 ‘근대성’이며 영국을 ‘제나라’로 환치하여 이해할 만큼 근대적 세계에 대한 맹목적 동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의 패도적 국제 관계를 분쟁&#8228;종식케 하는 권력의 주재자로 영국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조선이라는 약소국이 구원될 수 있기를 염원하는 당시 지식인의 내적 반응이 투사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02년은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이 가시화되던 시기였으므로 당시의 대영 체험과 그 인식 속에는 자국의 부국강병에 대한 열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셔유견문록>도 &#985172;서사록&#985173;을 저본으로 삼되 근대적 세계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감흥을 감각적으로 재현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985172;서사록&#985173;을 변환하는 과정에서 화자는 허구적 요소를 첨가하여 조선과 영국의 친밀한 관계를 상정하는 등 인간적 내면이 형상화된 문학적 공간을 발견할 수 있는 가사작품으로서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작품의 주된 표현 특질을 보면 관념적 인식이 거의 작동하지 않아 역동적인 문체로 근대적 세계가 감각적으로 재구성되어 있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상적 장면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서사가 파열된 지점은 물론 감각적 재현을 위해 율격이 이완되어 있는 사례들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회정 과정에서 화자는 시&#8228;공간을 압축한 듯한 자신의 체험을 속도감 있는 문체로 표현하는 등 전대의 사행가사 작품들과 확연하게 변별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현전하는 마지막 사행가사인 <셔유견문록>은 전대의 작품들과 유사한 문학적 창작 원리를 보이지만 세계관적 전환이 여실히 확인되고 그 과정에서 변화된 문학적 특질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후기 사행가사를 통시적으로 고찰함에 있어 동아시아 관계사와 중화&#8228;화이관에 내재한 대타적 자국 인식의 측면을 고려함으로써 단편적 작품 분석이나 평면적 비교의 한계적 시각이 극복될 수 있었다. 또한 개별 작품들의 창작 원리가 해명되어 사행가사 작품들이 문학적 특질과 그 의의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주지하듯 전근대 지식인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차원이 가장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는 것은 자국의 경계 밖에서 사유하게 된 계기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리고 낯선 공간의 이동에 따른 다양한 체험들은 시적 주체의 시선이 유연해짐에 따라 상당히 넓은 편폭으로 수렴되어 국내 기행가사가 담당할 수 없는 층위의 경험과 어휘들로 구현된다. 이 과정에서 이념적 단일성은 물론 서사적 인과성도 유지되지 않으며 인식과 구조의 이러한 이완 양상은 작품의 장편화는 물론 문체 특질의 변화와 직접적 상관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행가사의 특질이 변모하게 되는 동력 내지는 주요 표지로서 사행가사의 변모 양상은 큰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행가사의 창작 및 향유와 관련된 기록들을 고찰함으로써 작품들의 실질적 창작 동인과 수용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대나 창작 주체에 따라 정서적 환기, 기억과 재현의 매개체, 향유층의 추체험, 의식적 열망의 대체물 등 다양한 문학적 기능이 발현되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는 ‘여행자 문학’의 시각과도 조응되며 낯선 세계에서 촉발된 자아의 내면이 시대에 따라 양상을 달리 하며 국문시가와 접속했음이 사행가사를 통해 확인된다. 기존에 사행가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이러한 시각은 내재적 분석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작품들이 실질적으로 내포했던 당대의 사회&#8228;문화적 의미를 고찰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본고의 논의는 조선시대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20세기 이후 기행을 소재로 창작된 국문시가 작품들과의 비교&#8228;분석도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학 양식은 일정한 역사성 위에서 형성&#8228;변모하는 ‘세계 인식의 질서’이며 새로운 시대에 따라 경험의 표현도 변화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근대 매체나 새로운 형식과 관련된 단절이나 연속의 지점들을 보다 세밀하게 살펴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단절적 지층이 반성적으로 조망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사행을 소재로 한 국문시조 및 국문 사행록, 기행가사 등을 통해 공시적인 층위에서의 심화된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이본들이 발견되는 작품들의 경우 면밀한 고증을 통해 필사 및 향유의 실태를 규명해 보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작품들을 새롭게 분석할 수 있는 의미망이 생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전시가는 민족의 언어로 당대인들의 절실한 내면이 형상화되어 있고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 울림에 공감하고 향유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름답다. 본고의 논의를 토대로 고전시가의 미학적, 성찰적, 현재적 의의를 더욱 선명하게 규명하기 위한 확장적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 朝鮮後期 天主歌辭에 關한 神學的 考察

        조신형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199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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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ereas the korean church has achieved a growth in wealth, as it has never been seen until now, the growth in mental and faith aspects has been poor. To overcome such a state. I thing, it is nesessary to inherit the tradition of faith, which, inspite persecutions,has been kept. Hence, the study in catholic lyrics(天主恭敬) is not a mere analysis over a piece of work, written in the past, but can throw light of faith to the korean catholic church. Unique in the history of the church in the world, the korean catholic church has been built through voluntary acception of faith. And to succeed such a tradition is the kind of work the theologist in modem time should do, indeed. - Details Gasa-literature originate form newly rising persons of high birth, the so-called Sa-dae-boo(士大夫), at the end of koryo dynasty or at the beinning of chosun dyn.sty. However, the two wars with Japanese(임진왜란) , Chinese(병자호란), put the state of the people in misery. During these wars the incompetence of the nobleman class(양반), came to light and the masses came to self-conscienceness gradually. With the growth of self-conscienceness of the commons, the Seo-min literature(서민문학) started to develop. Under such background, the high-Gasa made its appearance. Hugi-Gasa came to blossom in 18C. And this Gasa-literature appeared applied among catholic believers. Catholic lylics was composed to stand against the anti-catholic society with apologtic characters and overcome the traditional impersonal divine look through the personal christian god. And it was also composed to overcome the lack of books about faith, the difficulties in educaion of faith and the celebration of liturgies without priessts. In short, catholic lyrics was to unbelievers a medium of invitation to belief, and it was composed to serve as dogma lesson books for the prepartory believers, as a way to achieve native theology for the believers. The catholic lyrics still in existence were composed during the persecution period under chosun-Dynasty. The author and the date they were composed cannot be determined precisely. But, when we look through the details of these pieces of works, we can discover the process of deepening faith of the believers of korean church, who overcame the severe persecutions. Well, we will discuss the best-known three pieces of works this entity concentrated its analysis upon. In parts of the academic world two pieces are believed to be the first catholic lyrics : namely, Lee Byuk's [the Lyrics Respecting the Lord](cf. ch.4,3 of this entity) and Jeong Yak Jeon's [the Ten Commandment's Lyrics](cf.ch.4,2 of this entity), composed in 1779. Hence in this entity the first two lyrics were analysed mostly. 1. Jeong Yak Jeon's [The Ten commandment's lyrics] was written by Jeong Yak Jeon, Kyon Sang Hak and Lee Chong Uk together, after their study in Ju-U-Temple in November, 1779. Formally [The Ten Commandment's Lyrics] has a 4-4 rhythm, illuminate the social reality of Korea of that time through the [ten commendments] of the Old Testament. This lyric sounds very common, easy to know, and it is very realistical. It contains the every day language of the common people and speaks to the common people through that easy language. To put some of the significanc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Ten Commandment's Lyrics]:1) it is the fast piece of catholic lirics; 2) it is a missionary Gasa; 3) in its expression, it uses, instead of the difficult Chinese Compound words, easy common phrases; 4) because it was written before the persecutions, it doesn't yet express the difficult Martyrdom. To criticize the Ten Commandment's lyrics is, firstly, the lack of historical situation. The space we live [today], [here] is not mentioned. Secondly, it emphasizes on the rightfulness of ethical principles, but the principles and orders of ethics are too much to divine favour rather than human efforts, and its world view being tended towards the life after death, this world is seen only as a journey towords the future life. Hence, God lives in a heavenly world, far away from this earthly world. God, being presented as being apart above this world, stays an outsider, lack of personal God. Fourthly, if catholic lyrics are to help us to an active life of faith, its material should continually be checked, revised and replenished. Fifthly, we will have to make use of the advantages catholic lyricd have. In short, the [Ten Commamdment's Lyrics] of catholic lyrics made agreat contribution towards the early believer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having pointed out the direction of faithful life. 2. Lee Byuk's [The Lyrics Respecting The Lord] was composed in the same year as the [Ten Commandment's Lyrics], after studying at Ju-U-Temple by Lee Byuk. This lyrics is guite short. The escatological aspect of [The lyrics rerpecting the Lord] understands the last realities too much under cosmo centrial, spacial schema, just like [The Commandment's Lirics]. Al the same time it divides soul and body, showing dualistical tendency. Secondly, this lyrics was composed under patriarchal social order of the confusianism of that time. Here God, being related to the notion of patriarch and enlarged to the extremity, is the absolute lord over all the creatures in the world. And man and all the creatures have to ovey God as slaves in order to be loved by God and participate in the ever lasting sovereignty of God. Because of such notions about God. God lives only in haeven and we cannot find any expressions of the mercy and personality of God. Thirdly, this is not a mere translation of the european theology. It exspresses korean cultural feelings and is a work composed after long periods of speculations. It is, in fact, a unique theological piece of work. 3. This entity also contains important thoughts of Fr. Choi Ryang Up, analysing his letters and catholic lyrics. Firstly, Fr. Choi Ryang Up, in [three Virtues Lyric], makes a division between human beings and non human beings(animals), under the aspect of the existence of soul, the soul being the essence of human beings. And the goes on, relating the soul closely with the body. And about the understanding of death, taking the limitation of human beings as natural and the way of thinking in confusianism and christianity being mixed, his [God End Song](선종가) accepts death as inevitable and universal human situation. Fr. Choi, in [Jae-Sung] (제성), shows that poorness was issue people at that time were most interestined in. And he does not think of the charities to the poor as merciness by the rich, but as thankful answer for the mercy God has allowed him. Just as Jesus Christ's death upon cross was a testiment of love, humans as well have to show their love for Jesus Christ until they die. Hence, observation of law is an act of cuswering back to the love God gave, an act of gratefulness. Fr. Choi, in [Song Longing for Home](사향가), hopes to build the earthly [land of God] through changes of this world. In [Song Longing for Home], the notion of [heaven] does not have the traditional meaning but the [land of God]. Only Fr. Choi, being under persecutive situations like that of early church under the persecutions of Romans, gives here hopes to the catholic believers in a way just like the [Apocalypse of John]. Death is no longer the fulfillment of life, but a start to new world. And the soul then becomes the foundation for the dignity of human beings. Fr. Choi sings the process to the `heaven' in this life. Hence, heaven is expressed, under considerations of the situations of that time, as meaning the world here after. However, it actually shows the narrow way to heaven through actions done concretely in this life. Heaven is the [God's land] of Jesus Christ. This place is not for after death to go, it is this very world. This land is the `new heaven and new earth'(Apoc.21). It means an area of true `freedom', freed from the restrains of the past. Fr. Choi, thus, proclaims, in his [Song for longing Home], the `new heaven and new earth' God shows, being emancipated from the subordination by sin. In this way to get the thoughts of Fr. Choi expressed in his catholic lyrics, this entity will handle the themes we can see in his letters. He argues, criticizing first evil practices of Yang-Ban society system and pointing out the dignity of human being regardless of what class one belongs, for the breaking down of the Yang-Ban society system. And his letters mention a lot about female believers. This is the best exemple of `primary choice for the poors', a big theme in modem theology. - Conclusion Catholic lyrics, thus, were composed through the efforts of the church constituents in order to proclaim the right faith in union with the growing self-consciousness of the commons. They made the catholic dogmas fit Koreans and were composed, easy even for women and children to sing together. They are a sort of gasa. Catholic lyricd understand the life of faith, wholly committed to God on the same level as devotion to one's society and country. Thus, Fr. Choi is a pastor, who tried, on such thoughts, to evangelize the common people. He is a pastor for the common people, who practised equality. [Catholic lyric], which can be regarded as the adaptation of the good news for Korea, transcends over troubles between different social classes and takes over the traditional thoughts of confuzianism as an element. This shows the process of change in thought, advancing toward the recognition of God from the expreriences of concrete life. And it is an effort to adapt the catholic faith to the social circumstances they lived in order to proclaim it faster and easier. It is the result of the effort reform the existing mentality of the society. And it finally presented an anthropology based upon the Gospels, that in God everybody is brother and sister, over coming the pressing consciousness of social classes at that time. Particularly Fr. Choi Yank-Up not only defined what God is, but overcame the speculative confuzian way of expression and presented, to the believers under persecution, creative expressions, which are grounded upon realistic and concrete missionary life. Thus, he showed a God among alienated people, a God who cares for them. What is surprizing at Fr. Choi's [catholic lyric] is the fact that its subject is not only limited to one about God, but various subjects in theology. This entity intends to show the peculiarity of Fr. Choi's theological world. And it also accepts some of the critiques about him, partly. However, Fr. Choi's consistent thought as a whole, as it can be seen through his works, go beyond such critiques.

      • 朝鮮 後期 頌祝歌辭 硏究

        최지연 弘益大學校 大學院 200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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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조선 후기 송축가사(頌祝歌詞)에 대한 연구이다. 송축가사(頌祝歌詞)는 여러 가지 경사(慶事)를 맞이하여 축하하는 뜻과 기리는 마음을 나타내어 지은 노래이다. 송축가사(頌祝歌詞)가 송축문학(頌祝文學)으로서 높은 가치가 있음을 인식하고 조선 중기부터 1910년까지의 기간에 지어진 작품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첫째, 송축가사를 송축대상에 따라 유형화하고 각 유형별 제재의 존재양상과 주제의식을 살펴보았다. ◁표 삽입▷(원문을 참조하세요) '국가(國家)와 왕실(王室)의 송축가사'의 제재는 반정성공(反正成功), 절후(節侯), 탄생과 생신, 궁궐재건(宮闕再建), 가례(嘉禮) 등이다. 작품의 구성은 다양한 소재로 인하여 정형화되지 않았으며, 화자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관객적인 입장이다. '국가와 왕실의 송축가사'의 작자는 유교적(儒敎的) 군신관(君臣觀)에 입각한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성스러운 마음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으나, 조선 후기 부패한 관료사회의 정치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이상정치(理想政治) 구현을 희구(希求)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작자는 부패한 현실정치와 백성을 위하는 이상정치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게 되지만 갈등에 대한 주체적 해결의지가 없어 현실인식에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個人)의 송축가사'의 제재는 결혼, 과거급제, 수연(壽宴), 회혼(回婚) 등이다. 작품은 서사에서는 경사(慶事)를 맞게 된 경위를 소개하고 본사에서는 경사(慶事)의 진행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며 결사에서는 경사((慶事)를 맞은 당사자의 행복과 건강을 비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의 송축가사'는 천지인(天地人) 조화의 원리를 통하여 자연과 인간의 상보적 (相補的) 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작자의 내적 갈등양상을 통하여 조선시대의 유교적 관습의 굴레에 억압받는 여성화자의 비탄적(悲嘆的)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작자는 유교적 관습에 얽매인 삼과 자유로운 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으나, 현실에 순응하여 이상을 포기한다. '기관(機關)과 단체(單體)의 송축가사'의 제재는 신년(新年), 신문발간 의숙창립(義塾創立), 연합운동과 노래 등이다. 작품은 서사에서 송축내용을 소개하고, 본사에서 문명개혁(文名改革)과 자주독립(自主獨立)의 방안 등을 제시하며, 결사에서 황제에 대한 송영(送迎)을 하고 있다. '기관과 단체의 송축가사'는 대부분이 1900년 이후의 일제 압박기에 지어진 작품들로 문명 개혁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자주독립을 염원하고 있다. 작자는 문명개혁 하지 못한 주권 없는 현실의 조국과 문명개혁하고 독립주권을 가진 이 상적 조국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유형의 작품은 갈등채결의 주체적 의지와 구체적 해결방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인식의 진일보(進一步) 한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송축가사(頌祝歌詞)는 외면적(外面的)으로 나타나는 정서와 내면적 (內面的)으로 나타나는 정서가 상반되는 모순된 감정의 미적(美的) 구조(構造)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구체적 현실인식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社會相) 을 비판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文學的) 의의(意義)를 가진다. The objective of this study consists in inquiring into eulogistic verses in the late Cho Sun Dynasty. Here the eulogistic verse signifies a verse written to express congratulatory wills and minds for varied auspicious events. Having valued it as eulogistic literature, this study conducted a scrutinization of eulogistic verses in the Cho Sun Dynasty, especially ranging from its middle period to 1910. First, the eulogistic verses were classified by themes of celebration, and then a manifestation was carried out of the phases and consciousness of classified themes. Themes of 'eulogistic verses for the state and the royal family' include success of antigovernment activities, construction of a palace, the 24 divisions of the year, births and birthdays, coronation ceremonies, etc. Plotting of works are not standardized due to diversified subject matters, and the sense of sight that the narrator sees an event is based on an objective standpoint. 'Eulogistic verses for the state and the royal family' include loyalty to the state and the king based on the confucian view of sovereign and subject, while they often represent severe criticism of the political realities of the corrupt bureaucratic society in the later Cho Sun Dynasty, along with pursuit of the realization of an ideal political world. Here it is revealed that the author came to be confronted with severe complications between the corrupt political realities and an ideal political world for the people, but absence of the will to subjectively resolve the complications represents the limits in cognizing the realities in a correct way. Themes of eulogistic verses for private celebrations include marriage, passing the government civil service examination, birthday feasts for the aged, diamond weddings, and so forth. These verses introduce the procession of an event in the introduction, develop a story in order of procedures of a celebration in the main body, and then pray for the happiness and health of the person concerned. Eulogistic verses for private celebrations shows complementary relationships between man and nature through harmony among the three orders of heaven, earth, and man. Furthermore, an author reflects through his/her internal complications the lamentable view of the world of the narrator who is suppressed by the confucian customary bridle in the Cho Sun Dynasty. The author has complications between a life bound by confucian customs and a free life but gives up his/her ideal by adapting himself/herself to the realities. Themes of eulogistic verses for organs and organizations include verses for a new year, the publication of a newspaper, the foundation of an educational institution, a union movement, etc. These verses introduce the contents of a celebration in the introduction, suggest plans for reforms of civilization and independence, and so forth, and recite a verse for the emperor in conclusion. Eulogistic verses for organs and organizations consist for the most part of verses written under the Japanese suppression after 1900, the contents suggest concrete plans for reforms of civilization and show the heartiest wish for independence. Moreover, the author is faced with complications between the realities of the state of no sovereign power and an ideal state of independence. A verse of this kind shows an advanced feature of cognizance of the realities in that it has a method to disentangle its complications with the presentation of a concrete will. Second, Eulogistic verses are characteristic of having an aesthetic structure of contradictory emotion in which the externally expressed emotion is inconsistent with the internally entertained emotion and representing phases of social life in those days when the work was written, through the author's critic cognizance of the realities, which leads us to have literary significance in it.

      • 조선 후기 가사에 나타난 의식변화 연구 : 17, 18세기 가사의 의식변화를 중심으

        김은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2007 국내석사

        RANK : 233295

        This thesis intends to disclose how the consciousness of common people and nobility(Yangban) in the late Chosum Dynasty KASA changed. The KASA materials which used for this study were selected from The 17th century complete works of KASA and The 18th century complete works of KASA written by Yi Sang-bo, The Explanary note wordbook written by Kim Seong-bae, Park No-choon, Yi Sang-bo and Jeong Ik-seop, and The Classical literature collection written by Kim Jun-young, Choi Sam-yong, etc.. The content of this thesis is as follows. First, the background of the change of consciousness. The period of the late Chosun Dynasty was in confusion economically and politically due to the Imjinoeran(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Byoungjahoran(Chinese invasion of Korea in 1636). In those periods, Practical science and Western Learning flowed into the country, and ruined Yangban owing to the confusion of a status system enjoyed KASA as Hyangchonsajok(countries' noble families). Also the social status of common people elavated and women also enjoyed KASA. Second, the change of consciousness expressed in Yangban KASA. The ruined Yangban incorporated critical consciousness of their poor surroundings in Yangban KASA. To overcome such realities, they gave up studies and promoted agriculture. Furthermore, they criticized disordered political realities and even the dignity of a monarch. We can find that they see the reality both critical and realistic. Third, the change of consciousness of common people. Common people represented their critical consciousness through accusing realities and, they denied and commented on the existing ethics. Such trends showed the denial of Confucianist and Buddhist spirit. The consciousness-raising of women was outstanding in the Confucianism and the abolition of Buddhist ideas was outstanding in the Buddhism. Fourth,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bove-mentioned KASA and subsequent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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