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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時代 喪禮의 죽음교육적 含意 : 金長生의 『沙溪全書』를 중심으로

        차미영 동국대학교 2016 국내박사

        RANK : 248637

        This dissertation has a purpose to research on the educational meaning of death studying the death ritual in the Joseon dynasty based on the 'Sagyejeonseo' by Kim, Jang-Saeng. In the time of Joseon dynasty, the teaching of proprieties was nationally carried out through the education of Yehak. The death ritual which is the most important part of Yehak is the service process based on the awareness of a limited life 'All beings are dead'. It contains the service of escorting a funeral with a corpse and the memorial service for spirits. To find out the educational meaning of death based on the death ritual, I categorized (a dead) as a corpse and a spirit and reconstituted the death ritual as the Six stages. For the Six stages and their characteristics, the Preliminary stage and Endlichkeit, the Purification stage and Piousness, the Burial stage and Normativity, the Lamentation stage and Internality, the Relative stage and Exteriority, the Deification stage and Transcendence. Based on it, I defined the educational meaning of death on each single level. I drew a conclusion on each stage's characteristic by analyzing the main factors of a corpse and classifying it as the preliminary stage, the purification stage, and the burial stage. For the main parts, there are Sesiwolil (preparation of the funeral service), Cheongeojeongchim (returning back to the main room) on the preliminary stage. Its characteristic is Endlichkeit. Second, the main parts on the purification stage are Mokyok (bath) and Seup (last shroud), Soryeom (covering a corpse with hemp cloth) and Daryeom (Casket). Its characteristic is Piousness. Third, the main parts on the burial stage are Taeji (selecting a land for coffin) and Gaeyoungyeok (preparation for cemetery), Pyeom (moving a corpse to the selected land) and Seongbun (making for cemetery). Its characteristic is Normativity. For each stage's characteristic, Endlichkeit, the characteristic on the preliminary stage, explains that the existing human-beings at this moment cannot be in the future. The characteristic on the purification stage - Piousness means that we should deal with a human body preciously. The characteristic on the burial stage - Normativity is to conform the right and duty as human-beings following by social rules. For the main parts of spirits, I classified into the Lamentation stage, the Relative stage, the Burial stage and drew a conclusion on each stage's characteristic. For the main parts on the Lamentation stage, there are Musigok (making a sad sound for three months after death), Joseokgok (making a sad sound from three months of death to one year in the morning and at night), and Sakmang'gok (making a sound from one year of death to three years at every first day and fifteenth day of each month), Jogok (Jo means the consolation for chief mouner, Gok is to mourn for a dead) and Sangcha (a place to think of a dead). Its characteristic is Internality. The main parts on the Relative stage are Yeokbok (changing to shroud) and Seongbok (changing cloth for a funeral), and Choibok (changing cloth for a funeral of parents). Its characteristic is Exteriority. The main parts on the Deity stage are Jejeon (Je is an informal service for ancestor, Jeon is a formal service for ancestor) and Duhyang (the change of direction of a dead's head), Jung (storage for rice), Sokbaek (inviting a spirit made by hemp cloth) and Shinju (making a symbol of the dead). Its characteristic is Transcendence. The characteristic on the Lamentation stage is Internality. Mind gets sad and grieved because of death. The characteristic on the Relative stage is Exteriority. It is to disclose the social relation caused by death. The characteristic on the Deity stage is Transcendence. It is the implicit interchange of a dead and an alive. Based on the each stage's characteristic of the death ritual in the time of Joseon dynasty, the educational meaning of death is as follows. First, it enables us to dissolve the uneasiness of life and accept death. It makes us consider Endlichkeit of an alive having limitations, learn a reverent attitude on the body, and abide by the institutional rules. Second, it enables us realize death and keep our lives going on. It lets us heal the internal sadness by death, set the exterior relationship, and experience the transcendental exchange. Through the process of accepting the bereavement, we can live our lives independently and know that the body and spirit can be divided by death and incorporated again by the process of the death ritual. So the death education can be carried out by the death ritual. This research reconstituted as the Six processes for the death ritual in the time of Joseon dynasty and suggested the educational meaning of death following by the characteristic of single step. I'd like to say that the death ritual for a dead could give a chance to change your life as finding out the life value by experiencing other's death. 본 논문은 김장생의 「사계전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상례를 연구하여 죽음교육적 함의를 고찰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는 예학을 통하여 교육을 실시하는 예교(禮敎)가 국가적으로 이루어진다. 예학에서 중요한 부분인 상례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한계적 생명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하는 의례절차로서 시신을 모시는 장송의례(葬送儀禮)와 정신을 섬기는 제사의례(祭祀儀禮)를 포함한다. 상례를 바탕으로 죽음교육적 함의를 모색하기 위하여, 체백(體魄)과 영혼(靈魂)으로 범주화하고, 여섯 가지 단계로 상례를 재구성한다. 여섯 가지 단계와 특성을 살펴보면, 예비단계와 유한성, 정화단계와 경건성, 안장단계와 규범성, 애도단계와 내면성, 친소단계와 외면성, 신격단계와 초월성의 여섯 단계로 정립하고 단계별 특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각 단계에서의 죽음교육적 의미를 도출한다. 체백의 주요 의절을 분석하여 예비단계와 정화단계 그리고 안장단계로 분류하고 단계별 특성을 도출하였다. 예비단계의 주요 의절은 세시월일, 천거정침이다. 특성은 유한성이다. 둘째, 정화단계의 주요 의절은 목욕과 습, 소렴과 대렴이다. 특성은 경건성이다. 셋째, 안장단계의 주요 의절은 택지와 개영역, 폄과 성분이다. 특성은 규범성이다. 특성별로 살펴보면, 예비단계의 특성인 유한성(有限性)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인간이 미래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화단계의 특성인 경건성(敬虔性)은 인간으로서 몸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다. 안장단계의 특성인 규범성(規範性)은 제도에 따라 인간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하는 것이다. 영혼의 주요 의절을 분석하여 애도단계와 친소단계 그리고 신격단계로 분류하고 단계별 특성을 도출하였다. 애도단계의 주요 의절은 무시곡과 조석곡 그리고 삭망곡, 조곡과 상차이다. 특성은 내면성이다. 친소단계의 주요 의절은 역복과 성복, 최복이다. 특성은 외면성이다. 신격단계의 주요 의절은 제전과 두향, 중과 속백 그리고 신주이다. 특성은 초월성이다. 특성별로 살펴보면, 애도단계의 특성은 내면성(內面性)으로 죽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아프고 슬픈 것이다. 친소단계의 특성은 외면성(外面性)으로 죽음으로 인하여 야기된 사회적 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신격단계의 특성은 초월성(超越性)으로 생자가 사자와 암묵적으로 교류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상례의 단계별 특성을 바탕으로 죽음교육적 의미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삶의 불안을 해소하고 죽음을 수용할 수 있게 한다. 한계를 지닌 생명체로서 유한성을 숙고 할 수 있도록 하고, 몸에 대해서 경건한 태도를 익힐 수 있도록 하며, 제도적 규범을 준수 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죽음을 자각하고 지속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사별로 인한 내면적 슬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하고, 외면적 관계를 정립할 수 있도록 하며, 초월적 교류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인간은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며, 죽음으로 인하여 체백과 영혼이 분리되고 의례절차를 통하여 다시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사별수용(死別受容)의 과정(process of accepting the bereavement)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례를 행하는 것 그 자체가 죽음교육이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상례를 체백과 영혼으로 범주화하고 여섯 단계로 재구성하여 단계별 특성에 따른 죽음교육적 의미를 제시하였다. 죽은 사람을 대하는 의례 절차가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죽음의 경험 속에서 삶의 가치를 주체적으로 부여하는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밝힌다. 주요어: 죽음교육, 상례, 장송의례, 제사의례, 조선시대, 사계, 김장생

      • 제주농촌마을의 기제사의례 변화 : 회천마을 사례

        현혜경 濟州大學校 大學院 1998 국내석사

        RANK : 248398

        Now, Confucian ancestor workship of every day life is very important rite in cheju island. Many people accept it affirmatively and perform it without hesitation in cheju society. Universal ancestor workship is associated with the masses, who began it at least two hundred years ago, but universal ancestor workship has included hegemony on the change of socity. In cheju socity, the change of ancestor workship has been progressing since 1980's rapidly. Human factor and material factor of ancestor workship have made a change. It is showed that the change of society is reflected in ancestor workship. This thesis looks about how ancestor workship has been progressed in Hoi-cheon farm village. Hoi-cheon farm village is in the suburbs of cheju city. The change of society and ancestor workship is easy to survey in Hoi-cheon farm village. As a result of survey, human factors include objects, participants, themes of ancestor workship and material factors include a place, mutual aid, things used in the sacriticial services of ancestor workship. All of these factors have been changing continously. In general, ancestor workship has been changing and adjusting itself to the industrial society. Specially the territorial character has been disappearing and blood relationship has been emphasizing in the change of ancestor workship.

      • 조선 초기 왕릉제사 의례의 정비과정 연구

        남보람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3 국내석사

        RANK : 232319

        孝를 가장 중시하는 전통시대 유교문화권에서 孝를 실천하는 방법 중의 하나인 조상에 대한 제사는 매우 중요한 의례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왕실에서도 宗廟와 永寧殿, 文昭殿과 懿廟, 諸陵, 眞殿 등의 장소에서 조상제사를 행하였다. 그런데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주자학의 예에 따라 廟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우선시하여 『國朝五禮儀』에 종묘와 영녕전에서의 제사를 大祀로 기재하였던 반면 문소전 이하 懿廟, 諸陵, 眞殿은 俗祭로 구별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나 俗祭로 구분되었던 왕릉제사 역시 관련 의주와 제반 사항들을 제정하고 이에 의거하여 국왕이 친히 시행하였던 의례였다. 성종 대에 편찬된 조선시대 국가전례서인『國朝五禮儀』의 길례부분에 수록된 拜陵儀와 四時及俗節朔望享諸陵儀는『世宗實錄』「五禮」에는 포함되지 않았다가 이후 『國朝五禮儀』 吉禮에 기록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왕릉제사 의례가 속제의 범위 안에 포함되었음에도 大祀-社稷, 宗廟, 永寧殿- 다음으로 의주가 기록되어 있으며-文昭殿, 懿廟, 拜陵, 眞殿- 그 뒤로 中祀와 小祀에 해당하는 의주가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순서는 序例를 기록하는 순서에도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는데 모두 국왕이 직접 참여하여 제사를 진행하였던 의식이었기 때문에 왕릉제사가 大祀의 뒤를 이어 中祀 앞에 기록된 것이라고 보인다. 특히 전통시대에서 전례서 상의 기록 순서는 의식의 중요도를 의미하므로 조선왕조의 왕릉제사는 국왕이 참여하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朝鮮王朝實錄』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국왕은 왕실의 조상제사 중 大祀로 分等된 종묘제사보다 더 많은 횟수의 왕릉제사를 거행하였는데 이러한 횟수를 감안한다면 왕릉제사는 조선왕조에서 매우 중시했던 제사 중의 하나였다. 明과의 사대관계로 인해 제후국으로서의 의례를 정비하고자 하였던 조선은 왕릉제사 의례의 의주와 각종 규례들을 明禮를 참조하는 것과 동시에 중국 唐宋시대의 예제, 즉 古制를 근간으로 삼아 정비하였다. 또한 조선 초기라는 시대적 상황은 사회풍습, 관념자체가 기존의 제도에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왕릉제사를 유교적 제사체계로 구성하면서도 고제에서 근거를 찾는 데 한계가 있었던 종래의 제도와 관습들을 부분적으로 차용함으로써 양자를 절충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한편 국가의 큰일이 있을 때마다 여러 전례들이 쌓여간 당시의 정치적 상황도 왕릉제사 의주가 정비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세종 즉위 초에 정종 ‧ 원경왕후 ‧ 태종이, 재위 말에는 소헌왕후가 사망하여 흉례와 관련된 여러 사항들이 검토되면서 왕릉제사 의주 역시 개정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책봉 및 대리청정과 같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왕릉제사 의주가 구성되고 여러 규례들도 함께 수정, 보완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들은 왕릉제사 의례가 조선이 당면했던 현실에 적합하게 구성되도록 영향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왕릉제사는 중국과 고려와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국왕 그 자체가 상징성을 지니기 때문에, 국왕이 참여하는 제사는 왕권의 정당성과 권위의 상징으로 작용하였다. 왕릉제사 시 의물이 설치되는 자리의 방향과 위치는 의례에 참여하는 자들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의 국왕은 왕릉제사를 통해 다른 참여자들과 다른 자리에 위치함으로써 정자각 앞마당에 위치한 많은 제사 참여자들 앞에 先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신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또한 제사공간의 변화에 따라 主祭者인 국왕의 의식 진행상의 편의를 위해 禮에 있어서 남북의 의미는 지키면서도 동서 방향을 공간의 변화에 따라 의도적으로 바꾸어 서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왕릉제사는 속제로 구분되었음에도 헌관을 大祀와 같은 수준으로 구성하여 운영하였다. 친제의 경우 국왕이 초헌관을 담당하고 아헌은 영의정, 종헌례는 그 다음 議政이 담당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으며, 친제가 아닌 경우에는 2품관의 헌관이 行祭하였던 것이다. 이는 1인의 헌관만이 헌작례를 행하던 중국과는 다르게 국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진행했던 조선만의 독특한 모습이었다.

      • 新羅의 祭祀와 儀禮

        김동숙 경북대학교 대학원 2024 국내박사

        RANK : 232318

        본 연구는 그간 고고학 성과로 축적되어진 유구와 유물을 통해 신라의 제사와 의례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해 보고자하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지금까지 고고학 자료를 활용한 제사와 의례 연구는 주로 고분에서 출토되는 이형토기의 형태적 특징과 부장 의미의 해석에 치우쳐 있었지만, 최근 관련 자료가 증가함에 따라 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 본 연구의 시공간적 범위는 4세기대부터 통일신라시대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만, 고고학 자료는 5세기대와 6세기대에 집중되어 있다. 또 지역적 범위도 신라권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였지만 자료가 치중되어 있는 지역에 한정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라의 장송의례에서는 신라식 제사를 추출하기 위하여 가야권역의 자료도 일부 분석 대상에 포함시켜 두었다. 이에 앞서 신라 제사의 역사성과 흐름을 이해하기 위하여 『삼국지』 동이전에 전하는 제천의례를 본 연구의 출발선에 두었다. 이에 따르면 정치체 별로 계절제의 성격을 띠는 제천의례를 거행하였으며,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이 존재하였다. 또, 신성한 지역을 정하여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섬겼다고 하는 것을 볼 때 농경문청동기와 각종 청동 의기류는 제사장이 제사의 장엄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의례용품일 것이다. 제사가 거행되는 장소는 聖所로서 접근이 쉽지 않은 구릉 정상부나, 하천을 자연 경계로 하여 생활의 공간에서 이격된 곳이 선정되었다. 제사 후에는 음주가무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동원된 경제력은 부의 재분배를 가능하게 했다. 이를 통해 제사장은 사회적 지배자로서 입지를 더욱 공고히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전쟁이 있을 때에도 의례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볼 때 제사는 정치・경제・군사・사법적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는 사회 운영의 기본 장치로 기능하였고, 이를 지휘하는 제사장은 정치적 리더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의례의 목적과 방식에 대해서는 고대와 삼국시대를 통틀어 그 성격이 가장 분명한 유적인 광주 신창동 유적과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발견된 제사유물의 종류를 통해 유추해 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두 유적은 모두 특별한 입지를 통해 천신과 바다신을 대상으로 각기 풍년과 항해의 평온을 위한 의례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두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종류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의례용품이 도출되어 신라의 의례와 제사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이에 따라 경산 임당토성과 김해 봉황동 저습지 유적은 각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 외에도 조업의 성공을 기원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신라의 왕실제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제사지를 토대로 시조묘 제사, 신궁 제사, 오묘 제사가 존재하였으며 새로운 제사 체제의 도입은 왕실의 권위를 강조하고 주변 세력을 압도하기 위한 방편이었음도 알 수 있었다. 즉 모두 조상 제사적 성격을 바탕에 두고 있지만, 보다 정통성을 강조하여야 할 필요성에 따라 신궁 제사가 출현하였고, 당과의 활발한 교류 과정에서 오묘 제사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경주 나정유적은 초기철기시대의 목책열과 우물지, 통일신라시대의 팔각형 건물지가 고구려 환도산성의 팔각형 건물지와 비교 가능하다는 점에 근거해서 신라의 국가 제사가 이루어진 공간일 가능성이 크다. 신라 왕실이 주도하는 제사는 조상 제사 외에도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례가 있었으며, 이 의례에 사용된 유물이 경주 쪽샘 41호분에서 출토된 대형 철제 농기구일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신라의 왕이 사회의 안녕을 유지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직접 산천과 바다에 나가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신라 사회에서 제사와 의례가 지니는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사실이다. 신라 사회에는 이와 같이 국가가 주도하는 제사 외에도 지역 공동체 혹은 개인 차원의 민속적 제사가 있었다. 생활유적에서 발견되는 인면문 토구, 소형 토제품, 원반형 토제품, 공자형 토제품, 복골, 동물희생 등과 같은 현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유물은 서로 공반되기도 하고 깨어진 채로 흩어져 발견되기도 하여 유물이 출토된 지점이 의례 공간인지 폐기 공간인지에 대한 검토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수혈・우물・건물의 정지면, 하천변, 성터, 조업시설, 주거지의 부뚜막 시설 등 다양한 공간에서 이와 같은 의례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을 통해 볼 때 공동체 사회에서 제사와 의례가 지니는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고분의 장송의례에서 화려하고 귀한 유물을 착장하고 사람과 동물을 희생시키는 현상은 현세의 부와 영화를 내세에도 유지하고자 하는 신라인의 계세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신라의 장송의례용 유물은 왕경에서는 상형토기와 장식토우, 경산과 의성 등 지방에서는 동물장식이부호가 사용되었다. 상형토기는 3세기대 오리모양주자에서 출현하여 6세기 초 뿔잔모양토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사용되는데, 이는 승천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라 장송의례의 가장 큰 특징은 이전의 목관묘와 목곽묘 단계에서 유지되던 축조 공정과 납관에 따른 의례에서 벗어나 高大한 봉분의 축조와 함께 적석목곽분의 봉토 외곽에 대호를 도열배치하거나 제단시설을 만들어 의례를 가시화하였다는 점에 있다. 장례는 중앙집권적 사회에서 왕과 귀족의 권위와 위엄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었으며, 이를 통해 ‘亡者와의 관계에서 산 자들’ 간의 관계로 재창조되어 권력의 재편을 도모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 무덤의 장송의례는 7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이를 무덤의 구조와 연계해서 살펴보면 적석목곽분이 축조 단계별로 가장 많은 제의물이 발견된다. 이는 최고 지배자의 무덤에서 장송의례가 매우 엄격하게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특히 시종자를 주인의 무덤에 함께 묻거나 동물의 살생이 이루어지는 희생의례, 호석 밖에 대호를 배치하여 다양한 음식물을 넣어두는 공헌의례는 최고 지배자에게 한정되었던 제사 방식이었다. 부산지역의 경우 동물형 토우를 기대에 부착하고, 창녕지역의 경우 호석 밖에 대호를 등간격으로 배치하거나 개를 제사에 이용하는 방식은 신라의 제사 체계를 온전히 따르고 있다는 점 때문에 두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참고된다. 신라 석실분의 매장 프로세스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목관의 사용이 출현기에만 확인되거나 특별한 사례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중앙은 물론 지방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목관부속구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석실분의 매장 프로세스를 다양한 관점에서 재검토해야할 단계에 이르렀다. 신라 사회의 제사에서 산천제는 고대의 농경 사회로 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장 중요한 의례였으며 이는 농경이 매우 중요한 사회 구조에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와 같은 산천제는 왕실이 주체가 되어 농사의 풍요를 위해 시작되었지만, 중앙집권기에는 국토 방위도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이와 같은 국가 단위의 제사 외에도 공동체와 개인 단위의 민속적 의례를 행한 흔적이 생활유적의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이 의례의 대상은 물의 신, 불의 신, 땅의 신으로 상정해 보았다. 의례의 대상인 천신, 시조신, 지신을 신라의 정치적 성장 과정에 맞추어 살펴보면 진한 소국기에는 천신, 마립간기에는 시조신, 중앙집권기에는 지신이 강조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신라 사회의 토속 신앙은 불교의 도입에 따라 고대의 샤마니즘적 세계관에 영향을 끼치며 사회 기층과 융화되면서 장승과 산신각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 유교 제례의 구조와 조상관념의 의미재현 : 제수와 진설의 지역적 비교를 중심으로

        심일종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박사

        RANK : 232299

        Abstract Confucian Ancestral Rites and Representation of Conceptualization of Ancestors: regional comparative study of ritual preparation and arrangement of sacrificial foods Sim, Il Jong Department of Anthropology The Graduate School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dissertation analyzes Confucian ancestral rites as practiced at the familial level. ‘Familial rites’ (kagarye) has become a familiar term for Koreans who carry out ancestral veneration. It often refers to the confusion that may arise in the ritual preparation and arrangement of sacrificial foods. The preparation and arrangement of sacrificial foods varies on many levels according to region and the ritual agent himself. This study pays especial attention to these variations, not only collecting documents and carrying out geographic comparisons, but also taking a historical perspective of the structure of Confucian ancestral rites and conceptualizations of ancestors. Though these research aims are rather straight-forward, the precise parameters of the project—the research sites, subjects, survey questions—were more difficult to determine. Consequently, this dissertation does not necessarily emphasize research design or methodology. Rather, since my project focused on comparative analysis, I focused instead on finding anthropological research sites, ascertaining the comparative value of the different sites, determining which aspects of the sacrificial food and arrangement would be compared. To this end, the sites had to meet several conditions. First, it must be a place where there was an awareness of the ancestors’ existence and a sense that the ancestors were the objects of veneration. Next, I had to determine the types of rituals I would study according to the object of veneration, timing, and location. This study examines various families’ seasonal rites (kijesa), as well as the periodic rites (sije) taking place at gravesites. Another consideration in determining research sites was my ability to meet with the individuals knowledgeable about the sacrificial foods and their ritual arrangement. This dissertation selected as anthropological sites villages where families or extended relatives gather together. As reference, I consulted villages mentioned in Korean Surnames, a text published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1934. Despite the many transformations that rural villages underwent over the second half of the twentieth-century, because of a persisting culture of commemorating ancestors’ death anniversaries at gravesites, it was nonetheless possible to find informants. In this study, I examined approximately 1,000 common-surname villages (chipsŏngch’on), from which I selected 500 or so villages for further research. To undertake a comparative analysis of sacrificial foods and their preparation, the first steps were to collect the ritual diagrams (chinsŏldo) from each region and village and observing the carrying out of the seasonal and periodic rites. I referenced ritual diagrams preserved in Chosŏn dynasty documents, focusing particularly on aspects that have become central to contemporary ritual practices. Through this process, I verified that over two hundred types of ritual foods are currently being used for ancestral veneration. With regard to the regional differences in sacrificial food, I included tables to illustrate the comparisons. Through this I have found that sacrificial foods are dependent on their environmental context, vary according to geography, and shaped by humanistic influences. Because ancestor veneration is not simply a familial rite, but a practice that involves the village community and nearby relatives, it is possible to identify fixed patterns. The act of preparing sacrificial food with sincerity fundamentally concerns a belief in creating an avenue for descendants to meet and converse with ancestors. In that sense, the ‘mythological sacrifices’ mentioned previously represents ritual participants’ compassion (injŏng) toward their ancestors as a form of self-expression and emotional outgrowth. Subsequently, in order to fully understand sacrificial food and their preparation, it was necessary to investigate the nature of contemporary Koreans’ conceptualization of ancestors. Furthermore, through so-called “transformed rites” (pyŏllye), these very conceptualizations continued to exist in Confucian society. Through this argument, the reappearance of ritual practice and its continuation represents modern people’s trust in a kind of ‘ancestral religion.’ This kind of viewpoint takes us back to the starting point of how sacrificial food and their preparation connect and promote current Confucian ancestral rites with people’s conceptualization of ancestors, as well as the view that “psychological connections reflect physical ones.”At the same time, familial rites represent Koreans’ efforts to autonomously and actively express themselves in the name of ‘familial society.’ Key words: Confucian ancestor veneration, Confucian folk practice, ancestor, ritual food, preparation of ceremonial foods, Saengsinje, ritual food for a family god, ancestral religion 국문초록 본 논문은 유교 제례의 가가례(家家禮)에 관한 연구이다. 가가례는 오늘날 조상제사를 지내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특히 가가례는 의례음식인 제수(祭需)와 이를 진설(陳設)하는 의식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효과적으로 덮는 구실을 하기도 하다. 이는 제수와 진설이 조상을 제사하는 주체와 지역에 따라 여러 층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방증하는 셈이기도 하다. 본 연구는 이 점에 착안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지역별 다양성을 비교하는 동시에 이 현상을 이전 시대에서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인 유교 제례의 구조와 조상관념을 통해 해명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목적이 단순하고 분명한 측면이 있지만,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질문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즉 실제로는 연구의 설계와 방법론이 중요시 되는 논문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연구가 목적인만큼 첫째, 인류학적 현장을 찾아야 했다. 둘째, 현장들 간에 비교의 적정수준을 유지하는 일이 관건이 된다. 셋째, 제수와 진설에서 무엇을 비교할 것인가는 세부적이지만 중요한 대목이었다. 이를 위해 전제되어야 할 조건들도 다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조상 존재에 대한 인식과 그 대상을 제사하는 일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제사 대상, 제사를 드리는 시기와 장소에 따른 제사의 종류가 결정되어야 했는데, 본 연구에서는 집안의 기제사(忌祭祀)를 조사하였고, 묘역ㆍ묘소 또는 재실(齋室)에서 거행되는 시제(時祭)가 보충되었다. 또 하나는 위의 두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제사의 구체적인 구성요소로서 제수와 진설에 밝은 제관(祭官)이나 유사(有司)를 만나는 것이 가능해야 했다. 본 연구에서 인류학적 현장은 동족이나 일족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마을을 택했다. 이때 참고로 삼았던 자료는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朝鮮 の姓(조선의 성)』에 나온 마을을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이들 농촌마을들은 20세기 중후반을 거치며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조상의 기일(忌日)을 지키고 묘소에서 제사하는 문화가 있어 적절한 제보자를 만나는 일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본 연구에서는 1000여 곳의 집성촌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고, 그 중 500여 마을을 활용하여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한편 제수와 진설의 비교는 먼저 각 지역의 마을에서 진설도(陳設圖)를 수집하는 일에서부터 직접 기제사나 시제를 참관하는 과정을 밟아갔다. 여기서 수집된 자료는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문헌에 볼 수 있는 진설도를 참조하여 현대의 제수와 진설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을 특별히 주목하였다. 이 과정에서 200여 종류의 제수가 현대 한국인들의 유교 제례의 제상에 올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수의 지역적 다양성에 대해서는 본문 표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이 때 논의의 방식은 실제 비교의 적점과 민속지식체계의 해명을 위해서 진설되는 줄[行]을 기준삼아 (1) 반(飯) 잔(盞) 갱(羹) (2) 적(炙) 전(煎) (3) 탕(湯) (4) 채(菜) (5) 과(果) 등으로 서술하였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은 첫째, 제사음식은 생태적이며, 지역적이고 인문적 환경에 영향을 받는 복합체계라는 입론이 가능해 보였다. 둘째, 이러한 복합체계로 인해 특정한 제물이 그 속성으로 인해 조상관념의 의미재현에 특별한 상징과 지위를 갖는데, 본 연구에서는 이를 ‘신화적 제물’이라는 개념을 통해 국지적인 분포를 보이는 다양한 제물들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셋째, 제수와 진설의 가가례는 무한히 개별적이기 보다는 제사상의 줄[行]을 중심으로 제물의 성격에 따라 나름의 분포양상과 지역권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였다. 제사는 가족만의 의례가 아니고, 그 마을과 그 지역에서 함께 사는 친족과 인척의 의례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정한 패턴을 보일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이러한 입론은 문화지형도를 통해 도상학적, 시각적 효과를 아울러 제시하고자 하였다. 한편 본 연구는 제사에서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여 올리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거기에 후손과 조상과의 만남과 대화의 장이 펼쳐진다는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신화적 제물’은 그런 의미에서 조상을 향한 참례자들의 인정(人情)의 자기표현이자 감정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수와 진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 한국인들의 조상관념의 실체에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나아가 바로 이러한 관념이 소위 ‘변례(變禮)’를 통해 유교 사회에 수용되고 지속적으로 공존하는 역사를 써오기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끝으로 본 연구에서는 위와 같은 유교 제례의 역사 속에서 자생한 ‘비례지례(예가 아닌 예)’에 가까운 ‘문화적 드라마’를 ‘유교민속’ 개념을 발전시켜 오늘날 한국의 가족사회의 내면적 풍경을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구체적으로 ‘생신제’와 ‘성주상’ 그리고 조선 후기 시제의 묘제화 이후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묘소의 ‘순례화’ 현상을 다루었다. 이 논의를 통해 기제사는 물론이고 사례로 들었던 의례의 재현과 지속이 곧 현대인들의 ‘조상종교’적 신뢰가 표상되는 지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다시 본래 출발로 삼았던 제수와 진설이 현대의 유교 제례에서 조상관념을 매개하고 추동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음을 재확인하면서 ‘정신적 연결은 물리적 연결을 반영한다.’는 결론에 이르고자 하였다. 그와 동시에 가가례는 곧 한국인들이 가족사회의 이름으로 자신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또 다른 표현임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 여말선초 淫祀·異端 비판과 성리학 사회의 실현

        최수연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201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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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기는 사회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는 혼란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왕실부터 민간까지 제사가 성행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종교인들은 세태가 혼란한 틈을 타 彌勒을 사칭하고 백성을 착취하였다.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고려의 제사체계를 비판하였다. 그들은 국가위기의 원인으로 “풍속이 교란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처럼 풍속이 교란한 까닭은 제사가 무분별하게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신진사대부들의 비판의 대상은 크게 불교와 민간제사로 축약된다. 그들은 특히 祀典에 기반을 두지 않고 승려나 무당들이 主祭한 제사들은 일절 금지시키고자 하였다.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제사들을 淫祀 및 異端으로 지목하고 비판하였다. 淫祀란. 신분에 따라 제사하는 대상이 다른데, 제사를 드려서는 안 되는 대상에도 불구하고 제사 드리는 것을 뜻한다. 이에 따라 국가와 민간에서 거행되는 제사 중 祀典에 따르지 않은 제사는 모두 淫祀로 규정되었다. 異端이란 유교와는 다른 체계적인 교리를 갖춘 종교를 말한다. 異端에는 불교와 도교가 모두 포함되지만, 일반적으로 ‘異端 비판’이라 함은 불교에 대한 비판을 일컫는다. 신진사대부들은 불교는 그 교리가 초현실적이며, 出家를 권장함으로서 人倫을 부정하고 三綱五倫의 질서를 헤치는 종교라고 지적했다. 신진사대부들의 淫祀·異端 비판은 단순히 ‘요망한 제사’에 대한 정비가 아니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성리학적 이상사회였다. 신진사대부들에게 유교는 正學이며 그 외의 사상은 배척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논리 아래 이루어진 개혁은 성리학에 의거한 새로운 사회인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조선 초에도 성리학적 질서를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졌다. 신진사대부들은 구체제를 부정하고 비판함으로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명분을 세우고자 하였다. 때문에 祀典을 정비하고 淫祀·異端을 배격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또한 淫祀·異端을 대체하는 제사체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朱子家禮??를 기반으로 한 제사체계가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 초까지 이루어진 淫祀·異端 배격은 신진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전파하는 데에 있어서 禮制의 개편 과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시사한다. 淫祀·異端 배격은 고려 말에는 개혁정책의 일환이었으나, 조선 건국 이후에는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실현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 고려시대 別祈恩의 성격과 祭行 형태

        정서윤 부산대학교 대학원 202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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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article dealt with the Byeolgieun(別祈恩)'s ritual aspect that was practiced in the whole Goryeo dynasty. Byeolgieun was a ritual ceremony held by government and royal family in the various Gibokcheo(祈福處; a place for invoking a blessing) such as the palace, temple, mountains, rivers, and shrines etc. As Byeolgieun was the ritual representing the Goryeo Dynasty, which recognized the existence of various divinities, Byeolgieun was performed on the basis of several ideological grounds throughout the Goryeo Dynasty. According to the flow of time, it showed each ideological tone depth progressed and so Byeolgieun's Buddhistic·Taoistic ceremony shaped in the early, middle Goryeo period, while Shamanistic tendency was stronger in the Late Goryeo period. There seems that the first Byeolgieun recording can be discovered in Byeolryegije(別例祈祭) of SImu 28, Choe Seung Ro(崔承老)'s Sangsomun(上疏文) when King Seongjong(成宗) period. Byeolgieun had already an established interpretation, that is 'Eumsa(淫祀)', means different from ritual processes and rites. But it could figure out that rites aspect regarding to the early Goryeo period Byeolgieun through trying to a new interpretation of exceptional rites such as Byeolryeyeondeunghoe(別例燃燈會) · Teukseolinwanghoe(特設仁王會). Hereafter under the unstable domestic and international conditions, Byeolgieun, which was gradually becoming more formationed and prevailed as national ritual after the establishment of a national organization related to ritual practice, GIeunsaek(祈恩色)·Byeolryegieundogam(別例祈恩都監), then from the word ‘Byeolgieun’ being called to Gieun (contracted form) started to expand, not only in the capital town and palace but conducted ceremony in local area. As entered Yuan(元) intervention period, through the dispatch of those who are in charge the officer, Oesangieunbyoelgam(外山祈恩別監) and Gieunsa(祈恩使), Byeolgieun started to be performed in local Myeongsan(名山; authorized mountains) and temples. Oesanjegosa(外山祭告使), who performed confucianstic Sancheonje(山川祭; rites of authorized mountains and rivers), concurrently served as Oesangieunbyoelgam. When they went to the local Myeongsan for performing rites, they conveyed a decree of amnesty of the king to the local prisoners and they did lots of bad activities by using the high position as national rites officials. These Sancheonje style of Byeolgieun, Oesangieunbyoelgam conducts in the temple of the Myeongsan, can regard as the transition period before type was fixed from Buddhistic·Taoistic ceremony to Shamanistic ceremony in the Late Goryeo period. From the early 13th century, gradually appearing the Mudang(巫堂; shaman)'s ceremony much more prevailed by shamanistic trend since Yuan intervention period. In the Late Goryeo period, Mudangs participated in the politic issues directly or indirectly and using these current situation, Mudangs' descendants and relatives took the higher status. Therefore Mudangs' positions were much higher and Byeolgieun was fixed Shamanistic ceremony. Because Mudangs, who charged in GiuJe(祈雨祭; ritual for rain) and several private rituals in and out of the royal family, conducted the national rituals much more than ever, preventing Shamanism theory appeared. And In this circumstance, in order to distinguish ‘Gieun’ in the previous system and separate Shamaniistic ritual formation, ‘Byeol’ was added again then named ‘Byeolgieun’. Confucian scholars' intense criticism against Shamanistic Byeolgieun, carried over Joseon, continued. Moreover several Confucian transformation made an attempt, but still remained Shamanistic ceremony. The fact that, Gukmudang(國巫堂), Byeolgieuncheo(別祈恩處; place for Byeolgieun), was located in Songak(松岳), and Gukmudang that was chief shaman(homonym of preceding thing), belonged to Seongsucheong(星宿廳), was public officer grade 2, as sort of Jong 2 Poom(official rank), copper and hoses presented to the king, and the aspect that was used the king's clothes and ornaments in the Gieun march are evidents that performers in Byeolgieun's power was as strong as king's authority in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period. 본고에서는 고려 全 시기에 걸쳐 제행되었던 別祈恩 의례의 제행 양상을 살펴보았다. 별기은은 국가와 왕실의 주체로 宮內, 寺社, 山川, 神祠 등 다양한 祈福處에서 제행된 제의이다. 다양한 신격의 존재를 인정하였던 고려의 시대상을 대표하는 의례였던 만큼, 별기은은 고려 全 시기에 걸쳐 여러 사상적 기반을 토대로 제행되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 사상적 색채의 농도에 추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에 대해 고려 초·중기에는 별기은의 佛·道祭식 제행 모습이, 고려 후기에는 巫祭식 제행의 모습이 짙다고 정리할 수 있다. 별기은으로 보이는 최초의 기록은 성종 대, 최승로의 시무 28조의 ‘別例祈祭’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를 ‘법식과 다른 기도와 제사’ 즉, 淫祀로 보는 기존의 해석이 있지만 ‘예외의례’라는 새로운 해석 시도를 통해 別例燃燈會·特設仁王會 등 고려 전기 별기은으로 보이는 의례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이후 불안했던 국내외 상황 속에서 祈恩色·別例祈恩都監 등의 제행 관련 국가기구가 설치되며 점차 체계성을 갖추어가던 별기은은 국가제사로서 편제되고 성행하게 되자 ‘別祈恩’에서 축약된 형태인 ‘祈恩’으로 불리우며, 중앙과 궁내뿐만 아니라 무대를 넓혀 지방에서 제행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담당 祭官이었던 外山祈恩別監과 祈恩使의 파견을 통해 지방 名山의 神祠에서 별기은 제행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교식 山川祭를 지내던 外山祭告使가 겸임하였던 外山祈恩別監은 각 지방의 名山에 祈恩을 지내러 갈 때 지방에 있는 죄인에 대한 왕의 사면령을 전달하였으며, 그들은 國行祭 의례자라는 높은 지위를 통해 많은 폐행을 일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外山祈恩別監이 名山의 神祠에서 山川祭식 별기은을 제행하는 모습은 이전까지의 佛·道祭식 의례에서 고려 말 巫祭식 의례로 고착화되기 전의 과도기적 형태로 볼 수 있다. 13C 초부터 서서히 등장하던 무당의 별기은 제행 모습은 원 간섭기 전후로 성행하게 된 巫風으로 인해 더욱 만연해지게 된다. 고려 말, 무당들의 직간접적인 정국 운영 참여와 이러한 시세를 틈타 무당의 후손이나 친척들이 고위관직에 오르는 상황을 통해 무당들의 입지가 더욱 높아지게 되면서 별기은은 巫祭로 고착화된다. 왕실 내외로 祈雨祭와 사적인 의례를 책임지던 무당의 國行祭 성행으로 禁巫論까지 나오는 상황 속에서, 기존의 제도 속 ‘祈恩’과 구별하기 위해 다시금 ‘別’자를 붙여 ‘別祈恩’이라고 칭하는 것에서 祈恩의 ‘무속적’ 제행 형식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으로 이어진 巫俗化된 별기은에 대한 유학자들의 강한 비판은 계속되었으며 나아가 몇 번의 유교화 시도가 이루어지지만 무당들의 별기은 제행은 여전히 잔존하였다. 게다가 國巫堂이라는 別祈恩處가 송악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星宿廳 소속 제행자 國巫堂이 정·종2품에 해당하는 品銅과 馬匹을 진헌하고, 그들의 祈恩행렬에 국왕의 의장구가 사용되는 모습 등은 여말선초 별기은 제행자의 위세가 국왕권과 견줄만큼 대단하였음을 방증한다.

      • 사후 사찰 기재의 현대적 실천방안 연구

        정기옥 한림대학교 202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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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불교 생사관의 관점에서 인간의 죽음문제를 분석하고 사후(死後) 행하고 있는 유교식 제(祭, 제사) 형태와 불교의례 행위를 살펴봄으로써, 전통기제를 불교식 재(齋) 문화로 전환 모색하고자 한다. 불자(佛子)들에게 불교식 재가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는, 유교는 견고한 자아의식(自我意識)을 기본으로 하며 사후세계(死後世界)나 피 안(彼岸)의 내세관 그리고 영혼윤회(靈魂輪廻)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불교의 가 르침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 자아를 부정하고 윤회의 주체를 업으로 본다. 불교의 윤회는 인과관계 변화에 따른 종합적인 연기(緣起, 붓다의 존재론)사상으로,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식(識)’은 생전의 업에 따라서 삼계육도(三 界六道)의 생사세계를 지속한다. 이것은 불자 가정에서 불교 생사관에 근거한 불교 재가 이뤄져야 하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삶과 죽음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 으로 추구하고 있는 사유적인 문제이면서 종교적인 문제이다. 불교 생사관의 관점에서 는 사람마다 근기나 욕구가 다르다 하더라도 최종적인 구경의 목표와 체득하는 내용 은 같다고 본다. 마음의 실상인 무상(無常)과 무생(無生)의 청정한 진여자성(眞如自性) 을 체득하여 생사대사를 초월하는 것이다. 유교의 사후관은 기(氣)의 존재성과 기의 활동인 응취(凝聚)와 취산(聚散)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영혼(靈魂, 識)이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유 교와 불교는 죽음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을 갖고 있으므로, 조상에 대한 재 의례에 대 해서도 실행 의도와 내용이 다르게 요구된다. 전통 기제는 은혜에 보답하는 효의 실천을 기반으로, 조상에 대한 성의 표현과 가 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근대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핵가족화, 저 출산 등으로 인하여 제 의례는 다양한 종교 문화와 사상 등으로 흡수되거나 전환, 축 소되고 그 의미가 상실되고 있다. 불교의 사찰 기재는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재계(齋戒) 라는 점에서, 종교의 궁극적인 완성과 수행이 동시에 요구되는 의례이다. 사자(死者) 가 무상(無常)의 도리를 깨우치고 극락왕생하기를 서원하는 의식이다. 사찰에서 행하 는 기재는 위와 같이 전통제례의 ‘효’의 개념을 흡수하면서도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동참자 스스로가 삶의 방식을 성찰할 수 있는 재(齋)의의 현장인 것이다. 또 기재를 통 하여 가족들은 고인과 만나는 주기적인 추모의 시간을 갖게 되며, 상호 이해의 시간 을 만들 수 있다. 현재 불자 가정에서 행할 수 있는 불교식 가정기제가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상황 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보급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실천적으로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점에서 본 논문에서 검토한 재의 방법론과 실천 원리들이 그동안 불 자 가정에서 유교식 전통 기제를 행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불교 가르침과의 괴리감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의 연구 성과를 통해, 불자 가정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서 행하는 재의 의미를 바로 알아서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의 계기가 되고, 여법하게 ‘재의 불교 화’를 실천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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