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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문화의 무형문화유산적 특징과 의미 -만경강과 동진강을 중심으로-

        정성미 ( Jeong Seongmi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21 한국문화연구 Vol.40 No.-

        강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강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접근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각종 개발 사업과 강 문화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강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조사한 자료가 강과 관련하여 시간, 공간, 주제의 다면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이 연구는 강과 인간과의 관계를 무형문화유산적 관점에서 해석해보았다. 강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면담조사를 토대로 그들이 강을 기억하고 인식하는 관념을 무형문화유산 속성에 비추어 분석하고 핵심적인 가치를 찾아보았다. 특정 지역을 관통하며 흐르는 강은 친환경적 개발의 대상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삶과 문화가 가치 있게 조사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강 문화는 고유의 생태계와 통시적으로 인간의 행위가 다양하게 반영되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강 문화라고 해서 강과 바다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합수 지점과 바닷물의 영향을 받는 감조하천 구간의 사례를 통해서 확인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고 있는 중요한 자원으로 바라보고,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즉 자연과의 상호조화를 이루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지속해온 사회문화적 속성에 주목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It is necessary to change the perception of river culture. What are some approaches to understanding river culture?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various development projects and river culture? Can the data surveyed on people living near the river enable a multi-faceted approach to time, space, and themes related to the river? This study analyzed the relationship between rivers and humans and their influence on life from the perspective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Based on interviews with people living near the river, the idea of remembering and recognizing the river was analyzed in the light of the attributes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nd its core values were searched. Rivers flowing through a specific area should be investigated and documented in value, as well as eco-friendly development, and the life and culture of the area. This is because river culture can be understood in the process of variously reflecting human behavior with its own ecosystem. In addition, it was confirmed through the case of the Tidal River section that is affected by seawater that the river culture should not be divided into a dichotomy between the river and the sea. Academic research that can contribute to realizing a rich and prosperous culture should be conducted, seeing it as an important value resource that contains the history and culture of the region. In other words, research is needed to pursue mutual harmony with nature and pay attention to the socio-cultural attributes that have been shared and sustained among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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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청시기 서원 강회의 발전 과정에 관한 일 고찰

        박종배 한국교육사학회 2013 한국교육사학 Vol.35 No.3

        본 논문에서는 크게 명대 중기와 명말·청초 두 시기로 나누어 중국 서원 강회의 발전 과정에 대해 고찰하였다. 논문에서 고찰한 바에 따르면, 명대 중기 이후 서원의 회강 전통을 부흥시키고 강회 제도를 발전시키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담약수(1466-1560)와 왕양명(1472-1529) 등 심학(心學) 계열의 학자들인데, 특히 서원 강회의 제도화와 보편화에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은 왕양명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주자학 일통의 시대를 끝내고 심학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왕양명과 그의 제자들의 노력은 적극적인 강회 활동의 전개로 이어졌고, 가정 4년(1525) 9월의 용천사 중천각강회를 시작으로 각지에 서원을 세우고 강회를 조직하여 명대 중엽 이후 강회 전통의 확립과 강회의 제도화·보편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명말·청초의 서원 강회는 이른바 ‘천하동림강학서원(天下東林講學書院)’을 중심으로 ‘심학에서 이학(理學)으로의 전환’과 ‘강학에서 정치로의 확대’라고 하는 변화가 이루어진다. 17세기 이후의 강회 전통은 당대 최고의 서원으로 명성을 날렸던동림서원의 주도 하에 형성되었는데, 동림서원과의 밀접한 연계 속에 관중서원과 인문서원, 자양서원, 수선서원 등 많은 서원들이 선명한 학술적 특색과 정치적 경향을 띠고 적극적인 강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심학에서 이학으로의 전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휘주(신안) 지역의 자양서원과 환고서원의 강회였다. 특히 청대에 들어와 환고서원에서 존공종주(尊孔宗朱)의 기치를 내걸고 순치 원년(1644)부터 건륭 6년(1741)까지 총 124회의 신안 6읍 대회를 개최한 것은 명·청시기 서원 강회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本論文分別考察了明代中期與明末淸初兩個時期中國書院講會的發展過程. 据論文的考察, 對於明代中期以後的書院會講傳統復興和講會制度發展做出最大貢獻的人物是湛若水、王陽明等心學者. 尤其是王陽明和王門後學, 對於講會的制度化和普遍化做出了巨大的貢獻. 王陽明自身極力從事於書院講學二十多年, 爲了顚覆朱子學而打開心學的時代, 王陽明和王門弟子們積極展開了講會活動.從嘉定四年(1525)九月的龍泉寺中泉閣講會開始, 陽明學派四處創建了書院而組織了講會. 這對於講會的制度化和普遍化的促進起到了深遠的作用. 到明末淸初, 以所謂的天下東林講學書院爲中心, 中國書院講會進入新局面. 這個時期講會的特點在於由心學轉向理學、由講學而汎化爲政治的新風氣. 這種新傾向是在當代影響力最大的東林書院領導下形成的. 這個時期, 關中書院、仁文書院、紫陽書院、還古書院等屬於以東林書院爲代表的一個有着鮮明學術特色和政治傾向的天下東林講學書院的範圍內. 由心學轉向理學的最典型的書院就是徽州紫陽書院和還古書院. 特別是淸初還古書院, 從順治元年(1644)到乾隆六年(1741), 在尊孔宗朱的講會宗旨下展開了總124次的新安六邑大會. 這是明淸時期中國書院講會史當中的一大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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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관응력효과를 고려한 고강도강 X형 원형강관접합부의 수치해석 연구

        김선후,이철호 한국강구조학회 2018 韓國鋼構造學會 論文集 Vol.30 No.2

        Internationally representative steel design standards have forbidden or limited the application of high-strength steels to tubular joints, partly because of concerns about their unique material characteristics such as high yield ratio. Most of design standards stipulate that for steels whose yield strengths exceed 355 or 360 MPa, the strength equations cannot be utilized or strength reduction factor below 1.0 should be multiplied. However, the mechanical background behind these limitations is not clear. Experimental testing of high-strength steel CHS (circular hollow section) X-joints recently conducted by the authors also clearly indicated that the current limitations might be unduly conservative. As a continuing work, extensive, test-validated numerical analyses were made to investigate the behavior of high-strength steel CHS X-joint under axial compression. Three steel grades covering ordinary to very high strength steels were considered in the analysis. Again it was found that the high strength penalty to the joint strength in current standards is too severe and needs to be relaxed. The high-strength steel joints under the effects of chord stress generally showed higher strength than the ordinary steel joints and their strengths were conservatively predicted by current standards. It is also emphasized that current format of the CHS X-joint strength equation does not reflect observed behavior and needs to be recast. 고강도 강재의 높은 항복비와 같은 특이한 물성에 대한 우려 등의 이유로 국내외 대표적인 강구조 설계기준에서는 강관구조에 고강도강재를 적용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의 설계기준에서는 강관의 항복강도가 355 또는 360MPa을 초과하는 경우 제시된 설계강도식을 사용할 수 없거나 강도저감계수를 통해 설계강도를 낮추어야 한다. 반면 이러한 제한사항에 대한 역학적 근거는 명료하지 않다. 또한 최근 저자들에의해 수행된 X형 원형강관접합부에 대한 실험연구는 고강도강에 대한 규제가 과도하게 보수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본 연구에서는고강도강 X형 원형강관접합부의 지관 압축 하에서의 거동을 더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 실험에 이은 수치해석 변수연구를 수행하였다. 일반 강재부터매우 항복강도가 높은 고강도 강재까지 넓은 범위의 강종을 고려하였다. 본 수치해석 연구에서도 현행의 고강도강 페널티가 매우 보수적이며 완화될여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주관 축응력 하에서의 고강도강 접합부의 거동을 분석한 결과 현행 기준식이 고강도강 접합부의 주관 축응력에의한 강도 감소 효과를 보수적으로 예측함을 확인하였다. 일반적으로 주관 축응력이 작용할 때 고강도강 접합부는 일반강 접합부에 비해 접합부 강도를 더 잘 유지하였다. 더불어 현행 기준식의 형태가 실제 접합부 거동을 정확히 표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며 개선될 여지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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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律解辯疑ㆍ律學解頤ㆍ大明律講解의 상호관계에 관한 실증적 연구

        심희기(Sim, Hui Gi) 한국법사학회 2016 法史學硏究 Vol.53 No.-

        일단의 연구자들은, 大明律講解(이하 ‘강해’혹은 ‘증보전 강해’로 약칭함)를, 적어도 世宗대 이후 구한국 시대까지 수백년에 걸쳐 조선의 재판실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된 ‘대명률 주석서’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재까지 강해의 최초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중국인․중국’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우세하였었다. 그런데 2015년에 다나카 도시미쓰(田中俊光)는‘강해의 편집자․편집지’는 ‘조선인․조선’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강해는 중국계 율령에 대한 조선최초의 독자적 주석서가 되는 셈이고 강해의 실체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게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강해가 과연 (1) ‘ 주석서’를 지향한 문헌이었는지, (2) 주석서로서의 독자성을 인정할 만한지, (3) 과연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세밀한 검증을 하려고 한다. 14~15세기의 중국에서 출현한 후 조선에 유입되어 이용된 대명률관련 주석서로는 律學解頤(이하 ‘해이’로 약칭함), 律解辯疑(이하 ‘변의’로 약칭함), 律條疏議(이하 ‘소의’로 약칭함)의 3종이 중요하다. 따라서 해이, 변의, 소의의 주석단편(註釋斷片)과 강해의 주석단편의 연관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논증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선행하는 3종의 주석서와 강해의 비교연구에 필요한 몇 가지 형식적인 지표들을 검토(Ⅱ) 한 후, 강해에 추가된 주석단편들을 변의의 그것과 양적․질적으로 비교(Ⅲ, Ⅵ)한 다음 成宗 9年(1478)의 李繼孫․李封의 食物求請 사건의 擬斷 논쟁과 添入 기사의 계기를 상세히 살펴 본(Ⅴ) 다음 증보강해의 존재와 증보내용을 증보전의 그것과 비교분석(Ⅵ)한 후 결론에서 강해의 위상을 재검토(Ⅶ)한다. 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증보전 강해에 부착된 주석단편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먼저 출현하였던 다른 3종의 문헌들(해이, 변의, 소의)의 그것 보다 대단히 疏略한 것이었다.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가 ‘중국인, 중국’이었든지 아니면 ‘조선인, 조선’이었든지와 상관 없이 증보전 강해에 주석서로서의 독자성이나 독창성을 부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증보강해의 주석서적 성격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증보강해도 거의 전부 다른 선행하는 주석서의 주석단편을 기계적으로 轉載한 수준이므로 주석의 독자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증보전 강해가 조선말기까지 널리 보급되어 활용된 이유는 그것이 주석서로서 유용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대명률을 온전히 담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증보전 강해’는 군데 군데 주석단편을 담고 있지만 그 주석단편들의 수는 최소한으로 억제된 것이고 ‘증보전 강해’의 주안점은 오히려 대명률본문에 있었다. 따라서 증보전 강해는 대명률주석서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 널리 보급된‘보급판 대명률’로 바라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에 반하여 증보강해는 주석서로서의 기능이 더 강조된 문헌이지만 널리 이용된 것 같지 않다. 다음에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중국인․중국’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인․조선’이었을까? 첫째, 증보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조선․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증보강해의 출현은 성종실록의 첨입기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째,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는 조선․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조선초기의 사료들은 ‘조선인들조차도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를 몰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조선인들에게는 증보전 강해의 편집자와 편집지가 ‘중국․중국인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조선인이었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Daemyeongryul-Ganghae(DaMing lü jiangjie, 大明律講解, hereinafter ‘KH’) had been most popularly studied, read and used official law code by Korean officials during the entire Choson Period(from late 14<SUP>th</SUP> century through late 19th century). However, when and by whom and how KH was written has been totally unknown. Until now mainstream Korean legal historiography has conjectured that KH probably must had been written by Ming Chinese in Ming China in about late 14<SUP>th</SUP> century or early 15<SUP>th</SUP> century, and considered it as a kind of commentary book of Great Ming Code (Daminglü, 大明律, hereinafter ‘GMC’). However, in the year of 2015, a young Japanese scholar offered a new perspective about KH. He conjectured that probably KH would have been written by Korean in early Choson Dynasty. In addition to that he also judged KH as a Korean version of ‘good’ commentary of GMC. In this essay I raised a question whether we can judge KH as a ‘good’ commentary of GMC, and if the answer is yes, what kind of commentary book it was. What I found in this essay are as follows. First, there were two kinds of KH. The one, which I call it as a ‘pre-enlarged early KH’, could be considered as a law code rather than a commentary book of GMC because of the low-quality of commentaries. On the other hand, the other, which I call it as a ‘later enlarged KH’, was a proper commentary book of GMC without any doubt. Second, the qualities of the commentaries of KH, whether it is ‘pre-enlarged early KH’or ‘later enlarged KH’, cannot be judged positively because of non-authenticity. All the commentaries of ‘early KH’and ‘later enlarged KH’were borrowed mechanically from other authentic imaginative commentary books of GMC such as Lüjie bianyi(律解辯疑) or Lǜxué jiě yí(律學解頤) or Lütiao shuyi(律條疏議) and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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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과 "회": 중국양명학의 엘리트 단계에서 민간화 단계로의 전화

        전명 퇴계학부산연구원 2011 퇴계학논총 Vol.18 No.-

        명나라 중기에서 말기에 걸쳐 중국양명학이 발생하게 된 상황 가운데 하나는 엘리트 단계에서 민간화 단계로의 전화과정이다. 중국 양명학에 있어서의 이러한 전화과정은 주로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강우 등의 지역에서발생하였다. 명 중후기 민간종사의 보편화 추세와 종족의 민중화 진행과정에서 각 향에서 주관하는 사학이나 사숙 또한 나날이 가숙 등과 같은 종족성의 사학조직을 매체로 교화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결합하였으니,이로부터 당시의 강학활동은 점차적으로 민간화되었다.그렇다면 회와 강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회강"은 다만 강학의확대화에 지나지 않다. "회강"과 "강회"는 하나는 "강"에 중점이 있고, 하나는 "회"에 중점이 있다. 하나는 "강"을 학(學)으로 하고, 하나는 "회"를 학으로 한다. 학술면에 있어서는 "강회"보다는 "회강"의 범위가 크게 할 수 있으니, 이는 오늘날의 시민강좌와 유사하다. 그리고 "강회"는 오늘날의 대중문화제와 유사하다 할 수 있으니, 이는 일반적으로 그룹회의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학보다는 "회"에 오락성이 많고, 회에 비해 강이 보다 학술성을 띤다고 하겠다. "강"의 대상은 상대적으로 좁은 데 비해, "회"의 대상은 강보다는넓다. "회"의 주요 연결체는 종족이고, 중요무대는 사당이며, "회"의 주요대상은 족인(族人)이다. 또한 제사 같은 종족활동과 결합시켜 강회활동을 전개한다. 이에 비해, "강"의 주요 연결체는 사우(師友)이고, 주무대는 서원이며, 주로 동지(同志)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학을 밝히고 도를 증명하는 등 학술활동과 결합되어 강학활동이 전개된다.당시 전개되었던 왕학강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상의다원화 2. 수단의 다양화 3. 대상의 집단화 4. 강간의 유동화 5. 시간의 자유화 6. 입회의 규모화 7. 구조의 계층화 8. 교양의 생활화 9. 활동의 오락화 10. 의식의 종교화. 이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은 사상의 다원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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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古代 滿洲의 ⽔路交通과 松花江

        이승호 백산학회 2023 白山學報 Vol.- No.127

        본고에서는 만주 지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松花江 수운에 주목하여, 부여와 고구려‧ 물길‧발해 등 고대 만주의 諸세력이 이러한 강의 ⽔路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검토하였다. 먼저북류 松花江 중류 유역에서 성립‧발전한 부여를 중심으로 해당 시기 松花江 수운의 의미를 짚어보았다. 嫩江 유역에 위치한 ⽩⾦寶‧漢書 유적, 동류 松花江 유역의 望海屯 유적과 索離溝-慶華城 址 유적, 북류 松花江 유역의 楡樹 ⽼河深 유적 등 부여 문화와 관계된 주변의 ⽔邊 유적들을 검토하고, 이들 유적과 부여 문화의 관계가 松花江-嫩江 ⽔路를 통해 형성되고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古代의 만주 지역 수로교통 실례로서 『魏書』 勿吉傳에 전하는 ⼄⼒⽀의 사행길을 검토하였다. 당시 ⼄⼒⽀의 사행에 松花江-嫩江-洮兒河 수로가 활용되었던 사실에 주목하고, 당시 이러한 수로를 통해 대규모 물자 운반이 가능했음을 확인하였다. 松花江 수운은 고대 부여의 지배 영역을 이어 주던 교류망의 핵심이었으며, 고구려와 북방의 유목‧수렵 세력을 연결하였던 교통로였고, 勿吉이 국제 사회로 나아가는 창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이처럼 松花江을 중심으로 펼쳐진 북방 수운 교통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통합적으로 운용하였던최초의 국가는 발해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嫩江-松花江-⿊⿓江 수로는 만주 각 지역을 연결하는교통로이자 물자 유통의 혈맥이었다. This paper focuses on the water transportation of the Songhua River(松花江), which flows across the Manchuria region, and analyzes how ancient Manchurian states such as Buyeo, Goguryeo, Wuji (勿吉), and Balhae(渤海) used the waterway of the Songhua River. First, the water transport traffic of the Songhua River during that period was examined, focusing on Buyeo, which was founded and developed in the middle basin of the Songhua River flowing to the north. Baijinbao(⽩⾦寶)‧Hanshu(漢書) ruins located in the Nunkjang(嫩江) basin. The wanghaitun (望海屯) ruins and the suoligou(索離溝)-Qinghua(慶華) ruins in the east-flowing Songhua River basin. Laoshu(楡樹) Laoheshen(⽼河深) ruins in the north-flowing Songhua River basin. The relationship between ruins related to the Buyeo culture and the river that flowed around them was analyzed. This suggested the possibility that these ruins and the Buyeo culture were formed and connected through the Songhua River-Nunkjang waterway. And, as an example of water transportation in the ancient Manchurian region, the travel route of the Eulyeokji(⼄⼒⽀) reported in Wei Shu(魏書) Wuji Biography was reviewed. We paid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Songhua River-Nunkjang-Taoer River(洮兒河) waterway was used in the travel of Eulyeokji according to the records, and confirmed that large-scale transportation of goods was possible through this waterway. Songhua River water transportation was the core of the transportation network that connected the ancient Buyeo dominions. This was a transportation route that connected Goguryeo with the nomadic and hunting countries of the north, and was also a window through which Wuji advanced in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nd Balhae was the first country to organically connect and integrate northern water transport centered on the Songhua River. The ancient Songhua River-Nunkjang-Heilongjiang(⿊⿓江) waterway was a transportation route connecting each region of Manchuria and a blood vessel for material dis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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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두만강 지역의 유학자들-김노규(金魯奎)와 김정규(金鼎奎)를 중심으로-

        우경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한국학연구 Vol.0 No.32

        19세기 말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한 수많은 조선인들 중에는 상당수의 전통적 유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가장 먼저 두만강 너머로 이주했던 함경도 북단의 유교 지식인들은 대체로 중앙 학계에서 栗谷 李珥와 尤菴 宋時烈에 의해 정립된 서인-노론 학맥을 계승하고 있었다. 송시열의 제자 鶴巖 崔愼과 農巖 金昌協 등이 이 지역에서 강학을 시작한 이래 그 문하에서 함경도 출신 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하였는데, 19세기 말~20세기 초 이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인 鶴陰 金魯奎와 龍淵 金鼎奎 역시 송시열이 제시한 조선중화주의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생활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수’인 서구의 침략에 직면했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중국인들과 뒤섞여 거주하며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역사적 경험은 한반도의 협소한 시야에 갇혀있었던 전통적 중화주의의 폐쇄성을 일정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은 태생적 혈통 내지 지역보다는 유교문화에 대한 분발 여부가 화이분별의 주된 기준이라는 문화적 화이론의 기반 위에서, 조선이 중화문명의 계승자일 뿐 아니라 함경도 역시 문명의 중심지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화이의 可變性을 재확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이가 시대에 따라 지역적으로 순환한다는 주장을 전개하며, 자신들이 거주하던 두만강 유역을 중화문명 부흥의 새로운 공간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그 곳에서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요컨대, 김노규와 김정규 같은 한말 함경도의 유교 지식인들에게 두만강은 청과 조선, 중화와 이적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두만강 너머의 공간 또한 불우한 유랑의 땅이나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인식되지도 않았다. 지금의 함경북도 일원 및 연변 지역을 아우르는 새로운 중화세계의 건설, 그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20세기 초반 적지 않은 유학자들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연변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게 만들었던 사상적 배경을 이루었다. 19世紀末期, 越過豆滿江移居間島的衆多朝鮮人中也包括了相當一部分的傳統儒教知識分子。尤其是最早遷居的咸鏡道北端的儒學者們, 他們基本上繼承了中央學系中栗谷李珥和尤菴宋時烈代表的西人-老論學脈。宋時烈的弟子鶴巖崔愼和農巖金昌協等在咸鏡道講學之後, 其門下開始正式培養咸鏡道的儒學者。19世紀末到20世紀初期, 咸鏡道的著名儒學者――鶴陰金魯奎和龍淵金鼎奎繼承了宋時烈的朝鮮中華主義思想, 并以此來認識他們所處的豆滿江地區的生活世界。 在遭受“禽獸”西歐侵略的時代背景下, 再加上與當地混居的中國人共同抗日的歷史經歷, 使他們從一定程度上克服了局限于韓半島狹小視野下的傳統中華主義的封閉性。他們不按天生的血統和地區來區分華夷, 而是以儒教文化的發展程度爲標準, 即以文化的華夷論爲本, 提出朝鮮不是僅有的中華文明繼承者, 咸鏡道也可以蛻變成文明中心的可能性。他們不僅重新確認了華夷的可變性, 還提出華夷隨時代變化在地區間循環的主張, 並且將他們所在的豆滿江流域視爲中華文明復興的新空間, 爲建設豆滿江的儒教理想社會而努力。 總而言之, 對金魯奎和金鼎奎等韓末咸鏡道的儒學者來說, 豆滿江並非淸朝和朝鮮, 中華和夷狄的分界線。而且, 將這片地區視作顛沛流離之地, 或獨立運動根據地的認識還未能成形。他們的夢想是以豆滿江下流的慶源爲中心, 在現今咸鏡北道一帶和延邊地區上建設起新的中華世界。正是在這種思想背景下, 20世紀初期有不少的儒學者跨越豆滿江而遷居延邊。

      • KCI등재

        영산강의 인문지리와 "갱번"문화 試論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11 島嶼文化 Vol.0 No.38

        <P>&nbsp;&nbsp;본고는 영산강의 생활문호를 논의의 기반으로 삼아 그 속에 형성되어 온 인문지리적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부침을 통해 형성되어 온 영산강은 현재 생태환경의 측면에서 난관에 봉착해 있다. 본고에서 고찰하는 인문지리적 키워드로 이를 극복하는 돌파구를 마련해볼 수 있을 것이다.</P><P>&nbsp;&nbsp;영산강의 어로와 농경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 중에서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들노래와 농경생활, 광주시 서장 만드리와 농경생활, 나주 동강면 옥정리의 어로생활,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의 옹기생활,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 들소리와 농경생활, 영암군 삼호면 산호리 어로생활, 무안군 옥암리 초당산 반농반어생활, 염암군 나불도 어로생활, 목포시 하당 갓바위마을 어로생활, 영암군 용당마을 어로생활 등 현지조사를 통해 농경과 어로생활의 중첩을 살펴보았다. 또 이것이 영산강의 물류를 따라 장시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남도문화권역의 민속음악이 발전해가는 토대가 되었음을 살폈다.</P><P>&nbsp;&nbsp;어로와 농경을 기반으로 한 영산강의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키워드로 첫째 ‘갱번’을 들었다. ‘갱번’은 서남해 도서지역에서 바다를 호명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반대로 영산강 중, 상류지역에서도 강을 바다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따라서 강과 바다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 인식 즉, ‘갱번’이라는 호명방식을 통해 이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고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두 번째는 매향비이다. 영산강 주변과 서남해 각 지역에 있는 매향비가 강과 바다의 결절지에 존재한다고 하는 점을 들어 ‘갱번’의 인식에 대한 논거를 보충하였다. 세 번째는 고려 이후 존속되었던 영암군 남해포의 위치다. 삼대 해신사의 하나인 남해포는 강원도의 양양, 황해도의 풍천과 더불어 각각 동서남쪽의 바다의 접경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남해포 이하 영산강은 바다라는 인식이 가능하다. 네 번째로 영산강 조수간만의 경계다.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영산강 상류까지 조수감조구간이 확장된다는 점을 논거하였다. 다섯 번째로 물길에 따라 구획되었던 전통적인 행정구역을 들어 ‘갱번’의 논리를 보강하였다.</P><P>&nbsp;&nbsp;이를 통해 영산강 문화권역을 ‘갱번’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고 보고 이를 ‘홍어삼합론’으로 이론화해보았다. 홍어가 연안다도해인 흑산도에서 출발하여 영산강을 거쳐 내륙인 나주 영산포에 이르는 길이 바로 남도문화의 삭힘의 길이라는 것이고 이를 홍어삼합론이라는 문화적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질뢰즈의 영토화 개념 즉 리토르넬로를 인용하여 홍어 판매로가 영산강 뱃길의 물류기술이듯, 바다문화가 내륙문화로 이어지는 ‘길’에서 만들어진 문화기술이 ‘삭힘’의 기술이고 이것이 판소리와 남도민요의 독특한 ‘시김새(삭히다의 명사형)’가 된다고 보았다. 이를 바다와 강이 크게 구분되지 않는 즉 ‘갱번’권역을 미학적 준거로 삼는 공간의 삼합(연안다도해 → 영산강 → 내륙)으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생태적으로 매우 막중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영산강의 문제를 ‘갱번’의 공간인식으로 재구성하여 남도문화에 대한 재영토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보았다.</P>

      • 朝鮮時代文人들의 豆滿江에 대한 認識과 文學的形象

        洪順錫 강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8 인문과학논집 Vol.19 No.-

        豆滿江은 白頭山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동북지방, 러시아의 연해주 사이의 국경을 거쳐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한민족에게 있어 두만강은 백두산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고려시대에는 尹瓘이 九城를 쌓아 영토를 확장하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金宗瑞가 六鎭을 개척하여 강토를 굳건히 했던 곳이다. 현대사에선 만주·연변 지역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민족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대장부의 기개를 펼치고 자긍심을 느끼게 했던 두만강이다. 그러던 두만강이 근대시기에는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노래되기까지 하였다. 현재의 우리에겐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으로 시작하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 가장 익숙하다. 두만강은 중국, 러시아와 경계를 형성하는 자연물일 뿐 아니라, 한민족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인식된다. 많은 한민족의 작가들이 두만강을 소재로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논문은 두만강이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가를 살피기 위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史書와 文集類고문헌에서 두만강에 대한 기록을 발췌하여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의 두만강에 대한 인식과 文學的形象을 살폈다. 그리고 이러한 두만강의 문학적 형상이 현대의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제시하는 가를 밝혔다. 두만강은 시대에 따라 달리 인식되고, 형상화되었다. 중국과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대상에서 확대되어 한민족의 역사 현실을 상징하는 시적 공간으로 인식된다. 朝鮮時代초기에는 자랑스런 한민족의 영토를 에워싸고 흐르는 강이며, 대장부의 기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한민족이 회복해야할 영토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역사의 강으로 인식된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독립항쟁으로 얼룩진 공간으로 민족의 욕된 운명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남북분단 이후의 현실에서는 한민족 통일에의 염원으로 형상화된다. 한민족에게 있어 두만강은 영원히 함께 해야할 역사 현실의 공간이요 정신적 안식처이다. Duman River runs from Baekdu Mountain down to East Sea via eastern China and the borderland between Yonhaejoo lands of Russia. With Baekdu Mountain, Duman River is taken as a representative symbol of Korean people, and many Korean writers have used Duman River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subject matters for their literary works. This paper studies how Choseon Literary Men appreciated Duman River in their literary works. Choseon history books and anthologies, especially those mentioning Duman River, are used to research as to how Choseon literary men appreciated and symbolized Duman River. In addition this paper studies the influence of their appreciation to the contemporary literary trends. Duman River has been appreciated in different ways as time goes by. For Koreans Duman River is not merely a landmark for a national boundary but a poetic space symbolizing ancient and current cultural situations. During the early Choseon Period Durman River was recognized as an important symbol of national pride of prosperous Dynasty and of high-spirit of Choseon people. During the late Choseon Period Duman River was understood as a historical symbol appealing restoration of Korean national boundary and pride. During the period of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Duman River was taken a blood-stained battlefield and a symbol of guilty feeling of Choseon people who could not stop Japanese control over their motherland. After the division of Korea into north and south, Duman River was a symbol of cherished wish of Korean people for reunification of Korean Peninsula. For Korean people Duman River has been eternally a scene of history and a space to find spiritual peace.

      • KCI등재후보

        19세기말 서원 강회를 통한 학파의 분화와 학설의 형성과정 -주리사상을 중심으로-

        정순우 ( Chung Soon-woo ) 한국서원학회 2021 한국서원학보 Vol.12 No.-

        본 논문에서는 19말 조선의 강회(講會)가 사상의 분화(分化) 과정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였는지를 주리(主理) 철학의 흐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제기한 심즉리(心卽理) 이론은 그의 사상적 모태 역할을 하였던 퇴계학파(退溪學派)로부터 맹렬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미묘한 시점에 열린 산천재(山天齋) 강회(講會)는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이 과연 남명학파(南冥學派)와 노사학파(蘆沙學派)의 중심부로 무난하게 진입할 수 있는지를 알려 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 모임은 사상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 모임에 주빈으로 참가한 박만성(朴晩醒)의 경우 이진상이 해설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심설(心說)에 대해 본격적인 비판을 제기하였다. 반면 조성가(趙性家)와의 토론은 이진상이 노사학파(蘆沙學派)와의 만남을 구체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특히 이 강회에 참여하였던 후산(后山) 허유(許愈)는 스승인 이진상의 학설을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에 뿌리내리고, 그의 사상을 남명 학파와 노사 학파 내부에 전달하는데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어서 열린 선석사(禪石寺) 강회는 그 동안 퇴계 학파의 강력한 영향권 내에 경상우도 지역의 학문적 지형도(地形圖)가 재편되는 첫 단서를 보여 준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원장(院長)을 역임하였던 이종기(李種杞)가 퇴계의 전통적인 학설을 대변하였다면, 장복추(張福樞)는 퇴계학과는 사상적 성향을 달리하고 있던 여헌(旅軒) 학파의 주리론을 표방하였고, 이진상의 심즉리(心卽理) 설은 주리론의 또 다른 분화과정을 제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선석사(禪石寺)의 강회는 영남(嶺南) 주리론의 분화과정을 잘 알려 준다. 한편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학자들이 주관한 오천강회(浯川講會)는 퇴계의 주리철학이 이진상의 학설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정치적 당파의 색깔을 뛰어 넘어 퇴계학파의 주리론(主理論)과 사상적 흐름을 공유하는 화서(華西) 학파의 장담강회(長潭講會)는 주리철학이 서양을 배척하는 척양(斥洋)의 논리로 전환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이렇게 19세기 말 각각의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강회는 서로 다른 이념적 지평을 유지하면서도, 상호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시대정신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과 공감의 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This thesis examines the role of Ganghoe(講會) in the late 19th century in the process of differentiation of ideas, focusing on the flow of Chu-li(主理) philosophy. The theory of simjeonri(心卽理) proposed by Han Ju(寒洲) Jinsang Lee(李震相) faced fierce criticism from the Toegye School (退溪学派), which served as the birthplace of his ideology. The Sancheonjae(山天齋) lecture(講會), held at such a delicate point, is a lecture that shows whether Hanju Lee Jinsang's theory of Chu-li(主理) can safely enter the center of the Nammyung(南冥) school and the Nosa(蘆沙) school. Although this meeting had a very peaceful atmosphere on the surface, it can be seen that there was a major conflict in ideology. In the case of Park Man-seong (朴晩醒), who participated in this meeting as a guest, he raised a full-fledged critique of the Taegeukdo theory(太極圖說) and the heart-seol (心說) explained by Jinsang Lee. On the other hand, the discussion with Seong-ga Cho(趙性家) provided an opportunity to materialize Lee Jin-sang's meeting with the Nosa School. In particular, Husan(后山) Huo Yu (許愈), who participated in this lecture, took a special role in establishing his teacher Jin-sang Lee’s doctrine in the Gyeongsang-u-do province and transmitting his ideas to the Nammyung School and the Nosa School. The lecture at Seonseoksa(禪石寺) Temple, which was held next, shows the first clue to the reorganization of the academic topographical map of Gyeongsang-Udo(慶尙右道), which had been within the strong influence of the Toegye School. Lee Jong-gi(李種杞), who served as the director of Dosanseowon (陶山書院), consistently represented the traditional doctrine of Toegye(退溪). In the case of Jang Bok-chu(張福樞), he argued for the Chu-li theory of the Yeoheon(旅軒) school, which had a different ideological inclination from the Toegye School. Now, Jinsang Lee's theory of Simjeonri(心卽理) became a clear sign suggesting another differentiation process of Chu-li theory. The lecture at Seonseoksa Temple contained the process of eruption of Chu-li thought in Yeongnam(嶺南) province. Meanwhile, the Ocheon Ganghoe(浯川講會) organized by the scholars of Dosanseowon(陶山書院) tells how Toegye's Chu-li philosophy responds to the theory of Lee Jin-sang. And the Jangdamganghoe(長潭講會) of the Hwaseo(華西) School, which shared the ideological flow with the Chu-li philosophy of the Toegye School beyond the color of political factions, turned the Chu-li philosophy into a logic that rejected Western ideology and culture. As described above, it can be seen that the lectures held in each region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were a forum for discussion and sympathy to seek a new spirit of the times while maintaining different ideological horizons and mutually influencing each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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