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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기 윤치호의 군사문제에 관한 이해

          강명숙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6

          When we studied about the questionable figure Yun Chi-ho who was social reformer in late Joseon dynasty, it is said that Yun had been more concerned about the modernization than the independence of the country. Therefore his thoughts had been considered as pro-japanese tendency from the start. Finally Yun became one of the pro-japanese collaborators in 1938, when he was 74 years old, related the 'Hung-up Club Accident'. However, Yun insisted that modernization could not promote without preventing the aggressions of imperial countries. His career background was related deeply to military field, thanks to his family, especially his father’s assignments, which were the officer of Bulgigun(kind of Government militaty forces) and minister of National Defence. As Yun stressed on the military power of the country so he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independence and modernization of the country. Chosun Dynasty had promoted the military reformations for strengthening the king's security above all. But the reformations were not successful. There were three major reasons for that as belowFirstly, the military fields had been neglected for a long time as compared with the civilian service field by the confucian principle in Joseon dynasty. Therefore there had been not good military experts due to the social trends and thoughts in Joseon. Secondly, the surrounding foreign countries such as Japan, Quing, and America initiated the military reformations. The influence of these countries on the military systems had been frequently changed, therefore the reformations of Joseon would stop at those times. As a result, troops could not get the modern power. Thirdly, soldiers were indisciplined and corrupt to make money. For those reasons, the military reformations of Joseon were failure. The international opinion about Korea was belgian neutrality in order to keep the korean independence. On the contrary, the military reformation of Japan had been successful. Japanese society had respected martialism traditionally, so it was natural for Japan to adopt western military systems flexibly from early times. Therefore Japan had strong modern troops. Japan got the victory in Sino-Japanese War and reformed Korea on the face of it. Actually, Japan invaded and plundered the Korean peninsula. Korea wanted to use Russian powers to eliminate the japanese control. Russia and Japan competed bitterly in Korea. Finally, Japan won in Russo-Japanese War. Japan should dominate over the Korea. During the two wars, Yun would make comparisons and analyses between China and Japan, Russia and Japan in the military powers and fighting efficiencies. Yun watched and appreciated the battles and war situations in crucial times. Yun concluded that Japan should dominate over Korea. He gave up the official public services and looked for other reformations with people. 윤치호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윤치호가 국가의 독립보다 근대화를 우선시하여 문명국 지배하의 근대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윤치호의 개화론은 친일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내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문명이 발전하려면 우선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야 하고, 조선의 국정개혁도 군사개혁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독립이 근대화의 기본 조건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무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윤웅렬은 별기군의 훈련 책임자였기에 윤치호의 유학은 군사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윤웅렬이 절도사와 군부대신 등을 지내 조선의 군사개혁을 개인적으로 들여다볼 기회도 있었다. 윤치호는 조선의 군사개혁은 국왕의 안위를 위해 최우선 추진되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윤치호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보았다. 먼저 조선왕조의 유교적 문치주의가 상무정신을 말살하여 군대양성의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다음은 근대 군사력에 대한 전문가가 집단이 없어 외세의 주도로 군사력 증강을 도모하였는데 국제환경의 변화와 맞물린 주도 세력의 변화로 군사제도가 제대로 안착되지 못했다. 군대조직은 만들어졌으나 인적 물적 자원만 소비하고 군사력을 증강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외세와 연관된 조직들의 난립으로 국가적 군대로도 거듭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관료들의 부패와 맞물려 군인들의 기강도 해이해져 군대는 새로운 부패와 수탈의 통로가 되었다. 결국 윤치호가 보기에 조선은 근대적 군대양성에 실패하여 국제사회에서 벨기에 형 중립화(=보호국화)의 추진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반면 일본은 무사들이 사회 주도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어 상무정신이 사회적으로 존중되었다. 그 결과 지역의 번주들이 일찍부터 서구 열강의 군사제도를 수용하고 실험하여 종국에는 일본의 군사제도를 형성하였다. 세계 최고의 영국 해군과 독일 육군의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의 근대적 군사제도를 만들었고 근대적 무기와 작전으로 무장했다고 보았다. 일본의 근대적 군사력은 양무운동으로 유사(類似) 근대화된 청군에 승리하였다. 러일전쟁에서도 지리적 약점과 보급선의 문제로 소극적인 러시아 군대를 적극 공격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고 보았다. 윤치호는 제국주의 시대 제3세계는 외세의 침입을 방어해야 독립도 근대화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선의 관료들은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근대적 개혁을 새로운 수탈통로로 만들었다. 조선은 독립의 첫 번째 조건인 군대양성에 실패했고 국제사회는 중립화(벨기에형)라는 사기(詐欺)적 방법으로 독립의 후원자(보호국화)를 결정하려 하였다. 일본은 국제여론을 등에 업고 조선 침략을 위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승리하였다. 윤치호는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개혁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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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공화국기(1948~1960) 육군 예비전력 동원체제의 형성

          윤시원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4

          The conscription system of Korea was established by the 1949 military service law. In the process of institutional stabilization of the draft system, the establishment of a reserve manpower mobilization system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During the period of the first Republic of Korea, the Ministry of Defense suffered trial and error over the years to form a reserve power mobilization system. The first stage is the formation of the National Gurad. The National Guard was essentially the type volunteer military system borrowed by the US National Guard system. As a result, the Military Service Act was declared in 1949, and conscription was introduced systematically. In the long term, if the reserves were discharged through conscription, the National Guard that recruited civilians had no basis for existence. In addition, it was difficult to keep the National Guard forces smoothly due to the lack of material base in the early days of the military. Due to the lack of manpower to train and the equipment necessary for training, the military functions of National Guard were limited. Because of this, the National Guard was disbanded in 1950. The ROK Ministry of Defense attempted to reestablish the reserve mobilization system after the intervention of the Chinese communist army during Korean War. The Ministry of Defense mobilized the 2nd grade to form the National Defense Forces and foster them as reserve forces. The National Defense Forces based upon the characteristics of conscription system. However, the National Defense Forces dismantled in a short period of time without sufficient preparation, causing a lot of controversy. Since then, the organization of the National Defense Forces has been transformed into labor divisions. The Department of Defense organized a Citizen Armed Forces in 1953, learning from the failure of the national defense forces. In 1955, however, the Army organized 10 reserve divisions and the Citizen Armed Forces lost its ground for existence. The Ministry of Defense has unified reserve power mobilization into the command system of itself through the Reserve Division. The Citizen Armed Forces dismantled naturally as an efficient reserve power mobilization system was established. The establishment of the Army's reserve division was an opportunity to complete the reserve mobilization system within the framework of the draft system. Personnel trained in military service as active duty soldiers were able to be regularly called up into the reserve division to receive military education after they returned to society. As a result, the conscription system of Korea could be completed. 징병제가 제도적으로 안정화 되는 과정에서 예비전력 동원체제의 확립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제1공화국 시기 국방부는 예비전력 동원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수년간에 걸쳐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1948년부터 추진된 호국군 편성이다. 호국군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주방위군 제도의 영향을 받은 모병제 성격의 제도였다. 이 때문에 1949년 병역법이 선포되고 징병제가 제도적으로 도입되자 모병제에 기반한 호국군은 모순적인 존재가 되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징병제를 통해 예비역이 배출되면 민간인을 모병 대상으로 한 호국군은 존립할 근거가 없었다. 또한 건군 초기 부족한 물질적 기반 때문에 호국군을 원활히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인력과 훈련에 필요한 장비 부족 때문에 호국군의 군사적 기능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호국군은 1950년 해체되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예비전력 동원체제를 다시 구축하려고 시도한 계기는 중공군의 참전이었다. 국방부는 제2 국민병 대상자를 동원하여 국민방위군을 편성하고 이를 예비전력으로 육성하려 했다. 병역법에 규정된 제2 국민병 대상자를 동원한 것에서 나타나듯 국민방위군은 본격적으로 징병제의 성격을 가진 예비전력 동원체제였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은 충분한 준비 없이 단기간에 급조되면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호국군과 마찬가지로 군사 훈련에 필요한 물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단기간내에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국민방위군의 조직은 노무사단 등으로 전환되었다. 국방부는 국민방위군의 실패를 교훈 삼아 1953년 민병대를 조직했다. 민병대의 운용방식은 호국군에 가까웠으나 동원 방식에 있어서는 징병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55년 육군이 예비사단을 편성하면서 민병대는 존립할 근거를 잃었다. 국방부는 예비사단을 통해 예비전력 동원을 국방부의 지휘계통으로 일원화 시켰다. 효율적인 예비전력 동원체제가 수립되면서 민병대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육군의 예비사단 창설은 징병제의 틀 안에서 예비전력 동원체제를 완성하는 계기였다. 징병을 통해 현역병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인력은 사회로 복귀한 뒤에도 정기적으로 예비사단에 동원되어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서 한국의 징병제는 징집 및 소집 체제를 완전히 갖출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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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장제스 정부의 군사적 위기, 협력모색, 그리고 좌절(1949-1950)

          정형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2

          6·25전쟁 발발 이전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친미를 표방하며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여 당면한 문제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양국이 바라는 군사적 지원에 대해 방관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양국정부는 미국의 이러한 태도를 당시 양국의 군사적 위기로 간주하였다. 특히 고조되어가는 양국의 위기의식을 최절정에 이르게 한 사건은 ‘주한미군철수’와 ‘중미관계백서’발표였다.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자유진영의 리더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국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유진영 국가를 지지하고 지원할 수는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한국과 대만이 미국의 이익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미국은 긍정적인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정부는 대체로 이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동아시아에서 이념대립을 고조시킬 수 있다며 우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북대서양조약과 같은 반공동맹을 주장했던 퀴리노가 미국의 회유에 의해 생각을 철회하고 반공동맹을 경제, 문화적 관계로 변질시켰던 것이다. 당시 이승만과 장제스는 미국을 설득하여 계속적인 군사지원을 획득하려 하였다. 그 첫 번째 방법으로 태평양동맹에 관한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 진해회담을 추진하였다. 한중양국의 결연한 의지가 미국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변화가 그다지 낙관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한편 한중양국은 차선책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양국 상호간의 군사협력이었다. 한국은 미국에게서 얻은 경제원조로 미국의 무기를 구입하려는 시도를 꾀하였지만, 그것이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치자 대만에서 군수물자를 구매할 구상을 하였고 구체적인 구매내역을 보냈다. 한편 대만은 제주도를 대륙에 반격할 수 있는 군사기지로 구상하였다. 그러나 장제스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한국정부는 근본적인 논의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부정하였다. 이승만과 장제스의 상호 군사협력 모색은 미국의 원조가 막혀 있을 때 그 차선책으로 모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장제스가 생각하는 상호협력은 다른 것이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에게서 무기원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의 부담스러운 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퀴리노의 반공동맹이 변질되어 경제, 문화적 관계로 국한된다 하더라도 따를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는 미국과의 친밀도에서 퀴리노의 역할이 장제스보다 더 확고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승만은 동맹에서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을 제외시키자는 주장도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들이 표방한 반공동맹은 냉전시기에 표출된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었다. 동맹을 맺는데 있어 기반되어야 할 것은 각각의 정권이 기반을 갖추고 영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질서 속에서 중국과 한국은 순망치한의 관계로 서로 의지해야 할 상대였다. 그러나 6·25전쟁을 전후로 장제스정부는 풍전등화와 같은 나약한 정권이었다. 또한 한중양국 모두가 의지해야 할 최우선의 배경은 바로 미국이었고, 미국에 의해 그들의 관계도 변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태도에 따라 한중양국은 우방이었으나 불가분의 우방은 아닐 수 있었다. 미국도 자신의 이익과 안정보장을 염두에 둔 국제관계를 전개해야 하는 상황에서 적어도 6·25전쟁이 발발... Before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Republic of China claimed to be pro-American and tried to address pending issues, counting on aid from the United States. The U.S., however, assumed an indifferent and passive attitude toward military assistance that the two countries wanted to receive. The two governments regarded the similar attitude of the U.S. government as a military crisis in both countries. In particular, at the peak of the sense of crisis in the two countries were the announcements of the “withdrawal of the U.S. troops in Korea” and the “White Paper on the republic of China(Taiwan)-US Relations.” In the Cold War, the U.S. played a role as a leader of the free world, but that did not mean the nation could unconditionally support and assist others in the free world, ignoring its own national interests. The U.S. was not able to give a positive answer to the question about whether the influence of Korea and Taiwan in East Asia on the U.S. interests could be undeniable or not. Moreover, the U.S. government was concerned about a possibility that its military assistance to the two countries could heighten ideological conflicts in East Asia. For this reason, Elpidio Quirino who insisted on forming an anticommunist alliance like the North Atlantic Treaty withdrew his stance by the conciliation of the U.S., and changed into the anticommunist alliance into economic and cultural relations. Back then, Syng-man Rhee and Kai-shek Chiang tried to persuade the U.S. to continue to provide military assistance for the two nations. One of their attempts was the Jinhae Meeting held to carry on discussions on the Pacific Alliance. The two leaders seemed to think that their determined attitude would press Washington. However, as the U.S. did not show a positive change in its stance, the two countries had to have an alternative plan in mind, which was military cooperation between the two nations. Korea attempted to purchase arms from the U.S. with the economic aid that Korea received from Washington, but reached a deadlock several times. Korea planned to purchase war supplies from Taiwan and sent a detailed list to Taiwan. Meanwhile, Taiwan planned to set up a military base in Jeju Island to launch counterattack mainland China. However, the Korean government denied its involvement in Chiang’s plan, saying there was no discussion about it at all between the two nations. Syng-man Rhee and Kai-shek Chiang’s attempt to seek military cooperation was considered as an alternative plan in case aid from the U.S. would be seized, but the bilateral cooperation that the two leaders envisioned was different. Later, Rhee was able to receive arms aid from the U.S., and thus to reject Chiang’s burdensome proposal. Moreover, Rhee made clear that he would follow Quirino’s anticommunist alliance even if the alliance was degenerated and was limited to economic and cultural relations. He came to think that the role of Quirino in its relation with the United States was stronger than that of Chiang. Rhee even said that he could accept the suggestion to exclude Chiang’s Kuomintang of China from the alliance. The anticommunist alliance that they claimed to support was the most commonly observed form during the Cold War. What mattered in forming an alliance was whether each government had a solid and lasting foundation. The relation between the republic of China and Korea in the traditional order was intimately interdependent, and they had to count on each other. Around the time of the Korean War, however, Chiang’s government was weak like a candle flickering in the wind. In addition, the background that both Korea and the republic of China had to prioritize was the U.S., and the two nations’ relation could be affected by the U.S.. For this reason, Korea and the republic of China were allied due to the attitude of the U.S., but the alliance was not inseparab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U.S. that had to m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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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의 초기 서독 군사유학 경험과 그 영향

          김도민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5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the experiences of the early Korean military officers who went to study in West Germany in the 1960s and the impact of their experiences on the Korean military. Under the agreement between Korea and Germany in 1964, from 1965, the 2 cadets of Korea military academy sent to West German Army Academy as a status of military cadet, and at the same time, officers attended the West German Command and Staff college. Looking at the related research papers, there is only research on the study of Korean military to the United States. In the situation where there was little literature on Korean military's study abroad in West Germany, this article revealed the specific types and experiences of military study in West Germany by analyzing the oral records related to the Korean military collected by the Contemporary Korean Oral History Research Group of the Institute of Korean Studies, Kyujanggak Korean Studies Institute,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the early days, 10 ROK military officers were dispatched to three locations, including a military academy, a commanding and staff college, and a general university in West Germany. Furthermore, this article revealed how ROK military West German students tried to apply the German military system within the Korean military since the 1980s, when military officers or officers at the level of military officers experienced military study abroad in West Germany and promoted up to become a Korean military general. For example, the German mission-based tactics were included as an FM(Field Manual) and the German decree on military service were not only translated and but applied to some ROKA units. Not only did some of the Korean military officers who had experienced studying in West Germany studied American military at the same time, they were also able to confirm som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 American military system and German one. It is expected that the concrete situation of West German military study by the Korean military will be restored through the voices of experienced peoples, as well as fill the gap of history in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Germany 본고는 1960년대 서독으로 군사유학을 갔던 초창기 한국군 장교의 경험과 그들의 경험이 한국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964년 한국과 독일 간 협정에 따라 1965년 한국군은 처음으로 서독에 육군사관학교 생도 2명을 파겼했으며, 이후 한국군의 위관급 및 영관급 장교들도 서독 지휘참모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동안 한국군의 해외 군사유학에 관련한 연구는 미국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본고는 처음으로 한국군의 초기 서독 군사유학의 양상과 실태를 밝히고자 했다. 특히 본고는 한국군의 서독 군사유학 관련한 문헌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업단이 수집한 한국군 관련 구술자료를 활용하여 구체적인 서독 군사유학의 유형 및 경험을 밝힐 수 있었다. 초창기 한국군 장교들의 서독 군사유학은 육군사관학교·지휘참모대학·일반대학 등 세 곳에 10명 남짓 파견되는 형태를 보였다. 특히 한국군의 사관생도이거나 위관급 수준의 장교들이 초기 서독 군사유학을 경험한 후, 1980년 전후부터 한국군 내에서 장성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군 내에 독일식 군사 시스템을 적용하려고 했다. 특히 독일식 임무형 전술이 교범 내용으로 중요하게 포함되거나 독일군의 복무규율이 그대로 번역되어 한국군 일부 부대에서 적용되는 사례 등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독일 군사유학을 경험한 한국군 장교들 중 일부는 미국 군사유학도 동시에 했다. 따라서 미국과 서독의 군사유학을 모두 경험한 인물들은 미국식 시스템과 독일식 시스템의 비교 및 평가하는 구술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본 연구는 기존에 전혀 밝혀지지 못했던 한국군의 초창기 독일 군사유학의 구체적인 실태를 실제 경험한 구술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복원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 차원의 한독관계사의 양상을 밝힘으로써 기존 한독관계사 연구의 공백도 채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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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군사전략의 역사적 고찰

          이상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2

          Military strategy is a sort of military action plan and a way of action for the creation and operation of military means to effectively support the achievement of national interests and national goals. Therefore, the impact on South Korea's security is enormous, depending on the military strategy what the North Korea chooses. This military strategy consists of three elements such as military objectives, military strategic concepts, and military resources. North Korea's consistent military objectives has been to communize the Korean Peninsula since the government was established on the 9th of September in 1948. To achieve this military objectives, the concept of military strategy adopted by North Korea is an offensive strategy. North Korea has continued to develop military resources to realize the concept of military strategy called offensive strategy, and is now believed to be in the final stage of developing nuclear weapons. South Korea should know exactly that the North Korea's military strategy lies in communizing the entire Korean Peninsula. It also calls for an integrated countermeasure to prepare for North Korea's military threats and strengthening South Korea's national security. 군사전략은 국가이익과 국가목표 달성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군사적 수단을 조성 및 운용하기 위한 군사행동 계획이자 행동방책이다. 따라서 북한이 어떤 군사전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이러한 군사전략은 군사목표, 군사전략개념, 군사자원의 3요소로 구성된다. 북한이 1948년 9월 9일 정권수립 이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추구하고 있는 군사목표는 한반도의 공산화이다. 이러한 군사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채택한 군사전략개념은 공세전략이다. 북한은 공세전략이라는 군사전략개념을 실현하기 위해 군사자원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오고 있으며, 현재는 핵무기 개발이 완성단계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은 북한의 군사전략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는 데 있다는 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한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비하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한 통합적인 대응책 마련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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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전쟁시기 영천성수복전투의 전개과정과 군사사적 특징

          김경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4

          임진전쟁에서 조선군의 연전연패는 일본군이 한양, 평양까지 점령하는 사태로 전개되었다. 평양에서 의주의 선조를 압박하던 일본군은 후방지역에서 지역사회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에 의해 전술적 변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본 글은 이러한 기존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영천성수복전투의 전개과정 및 임진전쟁에서 차지하는 군사사적 특징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영천성전투, 영천전투 등의 용어와 달리 영천성을 수복한 전투라는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임진전쟁 초기 전황속에서 영천성수복전투의 전개과정을 조선군, 일본군, 의병 등으로 살펴보고 군사사적 성과를 정리한다. 추가하여 임진전쟁의 관점에서 영천성수복전투가 향후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 및 활용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임진전쟁의 발발이후 영천지역에 진주한 일본군은 일부 병력을 남기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영천지역의 의병은 주변 지역의 의병과 연합하여 창의정용군을 결성하고 일본군과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루었다. 의병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여 상호 연합하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 혹여 연합하더라도 지휘체계의 분란으로 효율적인 전투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천수복전투에 임한 창의정용군은 지역적 분란을 극복하고 국가위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단결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영천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주변 지역에서 이에 호응하여 다양한 지역의 의병이 참여했으며, 상호 이익관계를 따지지 않고 일본군을 축출해야 한다는 시대상황에 동의했다. 또한,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의병장이 창의정용군을 지휘하여 전근대 가장 어려운 전투였던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치루었다. 영천성수복전투는 정규군이 아닌 의병이 연합하여 최정예의 일본군을 대상으로 싸워 이긴 전투이며, 군사장비가 거의 없는 의병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긴 전투이며,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공성전을 열악한 의병이 이긴 전투였다. 영천성수복전투를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은 경상도의 주요 전략적 군사경로를 상실하고 경주지역으로 후퇴했다. 영천성수복전투는 이후 조선이 명나라의 구원군을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즉, 영천성수복전투는 단순히 전쟁사적, 전투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군사외교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결론적으로 영천지역의 창의정용군은 전쟁 초기에 가장 뛰어난 의병부대였으며, 영천성수복전투는 열악한 의병부대가 정예 일본군을 대상으로 공성전이란 가장 어려운 전투를 치루어 전쟁의 전체 전황을 크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던 전투였으며, 군사외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어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냈으며, 국제전쟁으로서 임진전쟁이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투였다. 향후 임진전쟁 연구에 있어 영천성수복전투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하여 전쟁사적 의미를 규명해야 하며, 임진전쟁 당시에 영천성수복전투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정리해야 영천성수복전투의 진정한 군사사적 의미가 밝혀질 것이다. During the Imjin War, the Joseon army's losing streak was caused by Japanese troops occupying both Hanyang(漢陽) and Pyongyang(平壤). The Japanese forces, which had pushed Pyugyang to press king Sŏnjo(宣祖) fled to Uiju(義州), were forced to make tactical changes due to community-centere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義兵) in the rear. Based on these previous research results, this article examines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永川城收復戰鬪) and the military historical features of the Imjin War. This paper examines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in the early stages of the Imjin War as Joseon, Japanese, and volunteer soldiers from the standpoint of the battle that re-seizured Yeongcheonseong(永川城戰鬪), unlike terms such as Yeongcheon Battle(永川戰鬪) and to summarize the military history of the battle. In addition, we will look at how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as recognized, evaluated and utilized in the future from the Imjin War perspective. After the outbreak of the Imjin War, the Japanese troops in the Yeongcheon region advanced north, leaving some part of troops behin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Yeongcheon region joined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surrounding regions to form Changuijeongyong-army(倡義精勇軍) and continued fighting with the Japanese army.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ere rarely associated with each other to reflect local characteristics. Even if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ere united, they could not fight efficiently due to the disruption of the command system. Nevertheless, Changuijeongyong- army, which joined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united and prepared for battle to overcome regional turmoil and overcome the crisis. In response to the outbreak of the military service in Yeongcheon, in response to the rising from the surrounding area, various military veterans participated and agreed to the era of ousting Japanese troops without regard for mutual interests. In addition, an army leader(義兵將) with excellent military capabilities successfully commanded Changuijeongyong- army, which successfully ran a siege warfare , the most difficult battle of pre-modern times.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is a battle fought against the best Japanese troops by allie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not regular troops, an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ith little military equipment . It was a battle that defeated a Japanese army, and a battle that defeated the Siege warfare, which was possible only with the overwhelming strength and experience of a poor soldier,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hen the Japanese defeated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they lost the main strategic military route in Gyeongsang-do(慶尙道) and retreated to Gyeongju(慶州).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as later the most important reason why Joseon demanded the Ming Dynasty. In other words,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as a very important battle not only in terms of war and combat history, but also in terms of military diplomacy. In conclusion, the Changuijeongyong- army in Yeongcheon was the best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early days of the war, and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on the most difficult battle of Siege warfare against the elite Japanese army armed with a fowling piece by the poor Changuijeongyong-army with limited military equipments. The battle was a turning point that greatly changed the overall situation of the war. This battle was of great military and diplomatic significance, leading to the involvement of Ming Dynasty’s armed forces in Imjin War, and it was the best feature of the Imjin war as an internationa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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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시기 ‘세균전’ 설 제기 과정과 내막

          전예목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1 군사 Vol.- No.120

          이 논문의 목적은 북한, 중국, 소련이 미국에 대한 ‘세균전’ 설을 제기하였을 당시 일련의 사건들과 그것의 내막을 한국, 중국, 영국, 소련, 미국에서 생산된 문서, 서신, 회고록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것이다. 이 논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1951년과 1952년의 ‘세균전’ 설 제기 과정을 조사하는 것이다. 1951년 5월 8일 북한의 외무상인 박헌영의 성명을 통해 ‘세균전’ 혐의가 대외적으로 처음 제기되었다. 1952년에는 중국 주도 하에 소련과 북한이 적극 호응하면서 ‘세균전’ 혐의에 대한 대규모 선전이 있었다. 세 국가의 지원을 받는 세 개의 조사단도 만들어졌다. 논문의 두 번째 부분은 공산 국가들이 제시하였던 ‘증거’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아본다. 이것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위생부장이었던 우즈리의 회고록과 소비에트의 문서로 입증되었고 이 문서들은 ‘세균전’ 설의 기원이 중국이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증거의 조작이 ‘세균전’ 설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반드시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과 소련은 각국의 이익을 위해 ‘세균전’ 혐의를 이용하였다. 중국은 ‘세균전’ 설을 통해 소련으로부터 군사적, 의료적 지원을 받고자 하였으며 소련은 미국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한국전쟁을 지연하고자 ‘세균전’ 설을 이용하였다. 이 연구는 새로운 사실의 제시와 문제 제기가 제한적이었다는 한계가 있으나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첫째, 1951년과 1952년 ‘세균전’ 설의기원이 각각 소련과 중국으로 서로 달랐다는 점을 밝혔다. 둘째, 1952년과 1953년을 비교하였을 때 세균전’ 설에 대한북한 지도부의 입장이 부정적으로 변화하였음을 밝혔다. 셋째, 1952년 중국 지도부는 ‘세균전’ 설이 거짓임을 알았으나 하부 조직에는 이를 알리지 않았음을 발견하였다.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a series of events when North Korea, China, and the Soviet Union raised the allegation of 'biological warfare' against the US and allies, and its inner story by comparing and analyzing documents, letters, memoirs recorded in Korea, China, Britain, the Soviet Union, and the US during the Korean War. This article consists of two parts. The first part examines the process of raising the allegations mainly from 1951 to 1952. The allegations of biological warfare by the US were first raised on May 8, 1951 by Park Heon-young, a foreign minister of North Korea. In 1952, the large-scale propaganda of the 'biological warfare' allegations occurred in cooperation with North Korea, China, and the Soviet Union. Three investigation teams were, supported by those three countries, also established. The second one looks into 'evidence' provided by communist countries was highly likely to be fabricated. This fabrication was attested to in the memoir of a head of the Chinese Army's sanitary department, Wu Zhi-ri, as also was reaffirmed in documents of the Soviet Union, implying that the origin of allegations of 1952 was from China. This revelation, however, does not necessarily conclude that the allegations were entirely manipulated. China and the Soviet Union used the allegations of 'biological warfare' for the benefit of their countries. China appeared to use the allegation to gain military and medical supports from the Soviet Union. This study limitedly presents new facts, but it reveals several new facts. First, the origins of the 1951 and 1952 'biological warfare' were different from each other, and those were the Soviet Union and China, respectively. Second, the North Korean leader's position on 'biological warfare' changed between 1952 and 1953. Third, in 1952 the Chinese leaders knew that the biological warfare theory was false but did not inform low-level government offic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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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대한(對韓) 군원정책(1976-1980) 연구-카터행정부의 특징적인 정책내용을 중심으로-

          전호훤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8 군사 Vol.- No.66

          This is an abstract on U.S. military aid and sales to Korea from perspectives of International Relations. U.S. military assistance toward Korea during 1976~1980 years were provided, considering U.S. troops withdrawal policy from Korea in president Carter's administrative. And U.S. programs have been moderated political, military objectives through military aides in accordance with intervention level. president Carter's administrative had adjusted size of FMS sales toward Korea in order to smooth troops withdrawal execution from perspectives of international security. Therefore military sales policy to Korea was changed accordingly with international and domestic circumstances & military strategic changes. but military sales policy and objectives had showed consistency gener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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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말선초 병제개혁 논의와 사병혁파(私兵革罷)를 통한 ‘공가지병(公家之兵)’의 구현

          정일태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2

          This dissertation analyzes the intents of Confucian scriptures and Chinese ancient system by examining the arguments of the people who had a intention of reforming the military system(兵制) through dismissing Private Army(私兵) in the late period of Goryo and in the early one of Joseon. And this also analyzes how the reformers cognize the problems of the military system at that time, especially how they solved the problems of military power(兵權)‘s whereabouts and methods of function according to the intents. After the Withdrawal from Wihwado, Jo Jun(趙浚)·Jeong Dojeon(鄭道傳) and others reinterpreted that the early Goryo's military system modeled on the Chinese ancient system with reflecting the sprit of the times. And they also made sure of the ideal Army(兵) who protects 'Kingship'(人君之位). Jo Jun(趙浚)·Jeong Dojeon(鄭道傳) and others executed the reformation of military system to realize the ideal Army. But the logics, behind the arguments about Wonsu(元帥)·Jeoljesa(節制使) and their soldiers away from 'Kingship' were changing uder the political circumstances. Finally, the reformers declared to dismiss Private Army and realize National Army(公家之兵) that could not be controlled as anyone and also King(人君) like and would be beneficial to all of the people of the dynasty. However, the declaration didn't mean the completion of the realization of National Army. It stood for the change of the reformers' cognition of Private Army and National Army. 본고에서는 麗末鮮初 개혁론자들이 古制의 취지를 구현하려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따라 당시 元帥·節制使의 兵權 分掌에 따른 문제를 비판하면서 결국 모든 군사가 국왕 개인이 아니라 宗廟·社稷과 臣民이 의탁하는 ‘人君의 位’, 즉 公家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인식하게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당대의 맥락과 연계된 논의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고려 말은 대외적 위협이 대두한 시기로 당시 조정은 그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각 도별 元帥를 임명하고 兵權을 나누어 장악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元帥, 이후 節制使의 수가 지나치게 증가하면서 오히려 외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위화도 회군 이후 조준은 唐 府兵制의 취지에 따라 節制使의 수를 감축하고 軍簿司를 중심으로 兵制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후 節制使는 국왕 이성계와의 친분관계를 매개로 宗親‧功臣이 임명되었고,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兵權을 가져야 개국 초의 불안한 정국 속에 人君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도전은 유교 經典과 중국 古制를 검토하면서 오히려 宗親‧功臣이 節制使로서 兵權을 分掌하면 內亂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唐의 府兵制 등을 본받아 兵權의 層位를 發命權, 發兵權, 掌兵權으로 구분함으로써 오로지 ‘人君의 位’에 복종하는 군사를 만들고자 하였다. ‘人君의 位’는 단순히 국왕 개인이 아니라 宗廟·社稷을 비롯해 모든 臣民이 의탁하는 국왕의 지위를 말하며, 이것이 대대로 이어질 때 왕조국가, 즉 公家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이방원을 비롯한 宗親·功臣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1·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며 권근‧김약채 등은 私兵革罷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유교 經典과 중국 史書의 典範에 비추어 私兵 자체를 문제시하였고, 私兵으로 인해 마음이 달라져 內亂이 발생하는 것은 至親에게도 해당되는 사람 본성의 문제라고 단정 지었다. 뿐만 아니라 私兵은 人君과 宗親‧功臣뿐만 아니라 軍民에게도 피해를 주어 생계를 보장하는 등의 仁政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권근·김약채 등은 私兵 자체를 문제로 삼고 ‘人君의 位’를 지키는 公家之兵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私兵革罷는 제도의 완비가 아닌 인식의 변화를 의미하며 公家之兵을 구현하기 위한 兵制改革은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兵權의 所在 이외에도 保法과 軍役 등 이후 다양한 兵制의 변화도 古制를 회복하려는 시대정신의 맥락에서 재검토한다면 兵制史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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