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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기 윤치호의 군사문제에 관한 이해

          강명숙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6

          When we studied about the questionable figure Yun Chi-ho who was social reformer in late Joseon dynasty, it is said that Yun had been more concerned about the modernization than the independence of the country. Therefore his thoughts had been considered as pro-japanese tendency from the start. Finally Yun became one of the pro-japanese collaborators in 1938, when he was 74 years old, related the 'Hung-up Club Accident'. However, Yun insisted that modernization could not promote without preventing the aggressions of imperial countries. His career background was related deeply to military field, thanks to his family, especially his father’s assignments, which were the officer of Bulgigun(kind of Government militaty forces) and minister of National Defence. As Yun stressed on the military power of the country so he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independence and modernization of the country. Chosun Dynasty had promoted the military reformations for strengthening the king's security above all. But the reformations were not successful. There were three major reasons for that as belowFirstly, the military fields had been neglected for a long time as compared with the civilian service field by the confucian principle in Joseon dynasty. Therefore there had been not good military experts due to the social trends and thoughts in Joseon. Secondly, the surrounding foreign countries such as Japan, Quing, and America initiated the military reformations. The influence of these countries on the military systems had been frequently changed, therefore the reformations of Joseon would stop at those times. As a result, troops could not get the modern power. Thirdly, soldiers were indisciplined and corrupt to make money. For those reasons, the military reformations of Joseon were failure. The international opinion about Korea was belgian neutrality in order to keep the korean independence. On the contrary, the military reformation of Japan had been successful. Japanese society had respected martialism traditionally, so it was natural for Japan to adopt western military systems flexibly from early times. Therefore Japan had strong modern troops. Japan got the victory in Sino-Japanese War and reformed Korea on the face of it. Actually, Japan invaded and plundered the Korean peninsula. Korea wanted to use Russian powers to eliminate the japanese control. Russia and Japan competed bitterly in Korea. Finally, Japan won in Russo-Japanese War. Japan should dominate over the Korea. During the two wars, Yun would make comparisons and analyses between China and Japan, Russia and Japan in the military powers and fighting efficiencies. Yun watched and appreciated the battles and war situations in crucial times. Yun concluded that Japan should dominate over Korea. He gave up the official public services and looked for other reformations with people. 윤치호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윤치호가 국가의 독립보다 근대화를 우선시하여 문명국 지배하의 근대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윤치호의 개화론은 친일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내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문명이 발전하려면 우선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야 하고, 조선의 국정개혁도 군사개혁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독립이 근대화의 기본 조건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무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윤웅렬은 별기군의 훈련 책임자였기에 윤치호의 유학은 군사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윤웅렬이 절도사와 군부대신 등을 지내 조선의 군사개혁을 개인적으로 들여다볼 기회도 있었다. 윤치호는 조선의 군사개혁은 국왕의 안위를 위해 최우선 추진되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윤치호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보았다. 먼저 조선왕조의 유교적 문치주의가 상무정신을 말살하여 군대양성의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다음은 근대 군사력에 대한 전문가가 집단이 없어 외세의 주도로 군사력 증강을 도모하였는데 국제환경의 변화와 맞물린 주도 세력의 변화로 군사제도가 제대로 안착되지 못했다. 군대조직은 만들어졌으나 인적 물적 자원만 소비하고 군사력을 증강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외세와 연관된 조직들의 난립으로 국가적 군대로도 거듭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관료들의 부패와 맞물려 군인들의 기강도 해이해져 군대는 새로운 부패와 수탈의 통로가 되었다. 결국 윤치호가 보기에 조선은 근대적 군대양성에 실패하여 국제사회에서 벨기에 형 중립화(=보호국화)의 추진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반면 일본은 무사들이 사회 주도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어 상무정신이 사회적으로 존중되었다. 그 결과 지역의 번주들이 일찍부터 서구 열강의 군사제도를 수용하고 실험하여 종국에는 일본의 군사제도를 형성하였다. 세계 최고의 영국 해군과 독일 육군의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의 근대적 군사제도를 만들었고 근대적 무기와 작전으로 무장했다고 보았다. 일본의 근대적 군사력은 양무운동으로 유사(類似) 근대화된 청군에 승리하였다. 러일전쟁에서도 지리적 약점과 보급선의 문제로 소극적인 러시아 군대를 적극 공격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고 보았다. 윤치호는 제국주의 시대 제3세계는 외세의 침입을 방어해야 독립도 근대화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선의 관료들은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근대적 개혁을 새로운 수탈통로로 만들었다. 조선은 독립의 첫 번째 조건인 군대양성에 실패했고 국제사회는 중립화(벨기에형)라는 사기(詐欺)적 방법으로 독립의 후원자(보호국화)를 결정하려 하였다. 일본은 국제여론을 등에 업고 조선 침략을 위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승리하였다. 윤치호는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개혁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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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군사전략의 역사적 고찰

          이상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2

          Military strategy is a sort of military action plan and a way of action for the creation and operation of military means to effectively support the achievement of national interests and national goals. Therefore, the impact on South Korea's security is enormous, depending on the military strategy what the North Korea chooses. This military strategy consists of three elements such as military objectives, military strategic concepts, and military resources. North Korea's consistent military objectives has been to communize the Korean Peninsula since the government was established on the 9th of September in 1948. To achieve this military objectives, the concept of military strategy adopted by North Korea is an offensive strategy. North Korea has continued to develop military resources to realize the concept of military strategy called offensive strategy, and is now believed to be in the final stage of developing nuclear weapons. South Korea should know exactly that the North Korea's military strategy lies in communizing the entire Korean Peninsula. It also calls for an integrated countermeasure to prepare for North Korea's military threats and strengthening South Korea's national security. 군사전략은 국가이익과 국가목표 달성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군사적 수단을 조성 및 운용하기 위한 군사행동 계획이자 행동방책이다. 따라서 북한이 어떤 군사전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이러한 군사전략은 군사목표, 군사전략개념, 군사자원의 3요소로 구성된다. 북한이 1948년 9월 9일 정권수립 이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추구하고 있는 군사목표는 한반도의 공산화이다. 이러한 군사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채택한 군사전략개념은 공세전략이다. 북한은 공세전략이라는 군사전략개념을 실현하기 위해 군사자원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오고 있으며, 현재는 핵무기 개발이 완성단계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은 북한의 군사전략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는 데 있다는 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한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비하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한 통합적인 대응책 마련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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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전쟁시기 영천성수복전투의 전개과정과 군사사적 특징

          김경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4

          임진전쟁에서 조선군의 연전연패는 일본군이 한양, 평양까지 점령하는 사태로 전개되었다. 평양에서 의주의 선조를 압박하던 일본군은 후방지역에서 지역사회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에 의해 전술적 변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본 글은 이러한 기존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영천성수복전투의 전개과정 및 임진전쟁에서 차지하는 군사사적 특징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영천성전투, 영천전투 등의 용어와 달리 영천성을 수복한 전투라는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임진전쟁 초기 전황속에서 영천성수복전투의 전개과정을 조선군, 일본군, 의병 등으로 살펴보고 군사사적 성과를 정리한다. 추가하여 임진전쟁의 관점에서 영천성수복전투가 향후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 및 활용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임진전쟁의 발발이후 영천지역에 진주한 일본군은 일부 병력을 남기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영천지역의 의병은 주변 지역의 의병과 연합하여 창의정용군을 결성하고 일본군과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루었다. 의병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여 상호 연합하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 혹여 연합하더라도 지휘체계의 분란으로 효율적인 전투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천수복전투에 임한 창의정용군은 지역적 분란을 극복하고 국가위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단결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영천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주변 지역에서 이에 호응하여 다양한 지역의 의병이 참여했으며, 상호 이익관계를 따지지 않고 일본군을 축출해야 한다는 시대상황에 동의했다. 또한,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의병장이 창의정용군을 지휘하여 전근대 가장 어려운 전투였던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치루었다. 영천성수복전투는 정규군이 아닌 의병이 연합하여 최정예의 일본군을 대상으로 싸워 이긴 전투이며, 군사장비가 거의 없는 의병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긴 전투이며,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공성전을 열악한 의병이 이긴 전투였다. 영천성수복전투를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은 경상도의 주요 전략적 군사경로를 상실하고 경주지역으로 후퇴했다. 영천성수복전투는 이후 조선이 명나라의 구원군을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즉, 영천성수복전투는 단순히 전쟁사적, 전투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군사외교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결론적으로 영천지역의 창의정용군은 전쟁 초기에 가장 뛰어난 의병부대였으며, 영천성수복전투는 열악한 의병부대가 정예 일본군을 대상으로 공성전이란 가장 어려운 전투를 치루어 전쟁의 전체 전황을 크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던 전투였으며, 군사외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어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냈으며, 국제전쟁으로서 임진전쟁이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투였다. 향후 임진전쟁 연구에 있어 영천성수복전투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하여 전쟁사적 의미를 규명해야 하며, 임진전쟁 당시에 영천성수복전투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정리해야 영천성수복전투의 진정한 군사사적 의미가 밝혀질 것이다. During the Imjin War, the Joseon army's losing streak was caused by Japanese troops occupying both Hanyang(漢陽) and Pyongyang(平壤). The Japanese forces, which had pushed Pyugyang to press king Sŏnjo(宣祖) fled to Uiju(義州), were forced to make tactical changes due to community-centere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義兵) in the rear. Based on these previous research results, this article examines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永川城收復戰鬪) and the military historical features of the Imjin War. This paper examines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in the early stages of the Imjin War as Joseon, Japanese, and volunteer soldiers from the standpoint of the battle that re-seizured Yeongcheonseong(永川城戰鬪), unlike terms such as Yeongcheon Battle(永川戰鬪) and to summarize the military history of the battle. In addition, we will look at how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as recognized, evaluated and utilized in the future from the Imjin War perspective. After the outbreak of the Imjin War, the Japanese troops in the Yeongcheon region advanced north, leaving some part of troops behin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Yeongcheon region joined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surrounding regions to form Changuijeongyong-army(倡義精勇軍) and continued fighting with the Japanese army.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ere rarely associated with each other to reflect local characteristics. Even if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ere united, they could not fight efficiently due to the disruption of the command system. Nevertheless, Changuijeongyong- army, which joined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united and prepared for battle to overcome regional turmoil and overcome the crisis. In response to the outbreak of the military service in Yeongcheon, in response to the rising from the surrounding area, various military veterans participated and agreed to the era of ousting Japanese troops without regard for mutual interests. In addition, an army leader(義兵將) with excellent military capabilities successfully commanded Changuijeongyong- army, which successfully ran a siege warfare , the most difficult battle of pre-modern times.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is a battle fought against the best Japanese troops by allie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not regular troops, and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ith little military equipment . It was a battle that defeated a Japanese army, and a battle that defeated the Siege warfare, which was possible only with the overwhelming strength and experience of a poor soldier,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When the Japanese defeated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they lost the main strategic military route in Gyeongsang-do(慶尙道) and retreated to Gyeongju(慶州).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as later the most important reason why Joseon demanded the Ming Dynasty. In other words,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as a very important battle not only in terms of war and combat history, but also in terms of military diplomacy. In conclusion, the Changuijeongyong- army in Yeongcheon was the best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early days of the war, and the Reseizure Battle of Yeongcheon-castle won the most difficult battle of Siege warfare against the elite Japanese army armed with a fowling piece by the poor Changuijeongyong-army with limited military equipments. The battle was a turning point that greatly changed the overall situation of the war. This battle was of great military and diplomatic significance, leading to the involvement of Ming Dynasty’s armed forces in Imjin War, and it was the best feature of the Imjin war as an internationa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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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의 초기 서독 군사유학 경험과 그 영향

          김도민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5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the experiences of the early Korean military officers who went to study in West Germany in the 1960s and the impact of their experiences on the Korean military. Under the agreement between Korea and Germany in 1964, from 1965, the 2 cadets of Korea military academy sent to West German Army Academy as a status of military cadet, and at the same time, officers attended the West German Command and Staff college. Looking at the related research papers, there is only research on the study of Korean military to the United States. In the situation where there was little literature on Korean military's study abroad in West Germany, this article revealed the specific types and experiences of military study in West Germany by analyzing the oral records related to the Korean military collected by the Contemporary Korean Oral History Research Group of the Institute of Korean Studies, Kyujanggak Korean Studies Institute,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the early days, 10 ROK military officers were dispatched to three locations, including a military academy, a commanding and staff college, and a general university in West Germany. Furthermore, this article revealed how ROK military West German students tried to apply the German military system within the Korean military since the 1980s, when military officers or officers at the level of military officers experienced military study abroad in West Germany and promoted up to become a Korean military general. For example, the German mission-based tactics were included as an FM(Field Manual) and the German decree on military service were not only translated and but applied to some ROKA units. Not only did some of the Korean military officers who had experienced studying in West Germany studied American military at the same time, they were also able to confirm som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 American military system and German one. It is expected that the concrete situation of West German military study by the Korean military will be restored through the voices of experienced peoples, as well as fill the gap of history in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Germany 본고는 1960년대 서독으로 군사유학을 갔던 초창기 한국군 장교의 경험과 그들의 경험이 한국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964년 한국과 독일 간 협정에 따라 1965년 한국군은 처음으로 서독에 육군사관학교 생도 2명을 파겼했으며, 이후 한국군의 위관급 및 영관급 장교들도 서독 지휘참모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동안 한국군의 해외 군사유학에 관련한 연구는 미국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본고는 처음으로 한국군의 초기 서독 군사유학의 양상과 실태를 밝히고자 했다. 특히 본고는 한국군의 서독 군사유학 관련한 문헌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업단이 수집한 한국군 관련 구술자료를 활용하여 구체적인 서독 군사유학의 유형 및 경험을 밝힐 수 있었다. 초창기 한국군 장교들의 서독 군사유학은 육군사관학교·지휘참모대학·일반대학 등 세 곳에 10명 남짓 파견되는 형태를 보였다. 특히 한국군의 사관생도이거나 위관급 수준의 장교들이 초기 서독 군사유학을 경험한 후, 1980년 전후부터 한국군 내에서 장성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군 내에 독일식 군사 시스템을 적용하려고 했다. 특히 독일식 임무형 전술이 교범 내용으로 중요하게 포함되거나 독일군의 복무규율이 그대로 번역되어 한국군 일부 부대에서 적용되는 사례 등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독일 군사유학을 경험한 한국군 장교들 중 일부는 미국 군사유학도 동시에 했다. 따라서 미국과 서독의 군사유학을 모두 경험한 인물들은 미국식 시스템과 독일식 시스템의 비교 및 평가하는 구술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본 연구는 기존에 전혀 밝혀지지 못했던 한국군의 초창기 독일 군사유학의 구체적인 실태를 실제 경험한 구술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복원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 차원의 한독관계사의 양상을 밝힘으로써 기존 한독관계사 연구의 공백도 채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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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장제스 정부의 군사적 위기, 협력모색, 그리고 좌절(1949-1950)

          정형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2

          6·25전쟁 발발 이전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친미를 표방하며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여 당면한 문제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양국이 바라는 군사적 지원에 대해 방관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양국정부는 미국의 이러한 태도를 당시 양국의 군사적 위기로 간주하였다. 특히 고조되어가는 양국의 위기의식을 최절정에 이르게 한 사건은 ‘주한미군철수’와 ‘중미관계백서’발표였다. 냉전체제에서 미국은 자유진영의 리더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국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유진영 국가를 지지하고 지원할 수는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한국과 대만이 미국의 이익에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미국은 긍정적인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정부는 대체로 이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동아시아에서 이념대립을 고조시킬 수 있다며 우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북대서양조약과 같은 반공동맹을 주장했던 퀴리노가 미국의 회유에 의해 생각을 철회하고 반공동맹을 경제, 문화적 관계로 변질시켰던 것이다. 당시 이승만과 장제스는 미국을 설득하여 계속적인 군사지원을 획득하려 하였다. 그 첫 번째 방법으로 태평양동맹에 관한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 진해회담을 추진하였다. 한중양국의 결연한 의지가 미국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변화가 그다지 낙관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한편 한중양국은 차선책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양국 상호간의 군사협력이었다. 한국은 미국에게서 얻은 경제원조로 미국의 무기를 구입하려는 시도를 꾀하였지만, 그것이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치자 대만에서 군수물자를 구매할 구상을 하였고 구체적인 구매내역을 보냈다. 한편 대만은 제주도를 대륙에 반격할 수 있는 군사기지로 구상하였다. 그러나 장제스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한국정부는 근본적인 논의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부정하였다. 이승만과 장제스의 상호 군사협력 모색은 미국의 원조가 막혀 있을 때 그 차선책으로 모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장제스가 생각하는 상호협력은 다른 것이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에게서 무기원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의 부담스러운 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퀴리노의 반공동맹이 변질되어 경제, 문화적 관계로 국한된다 하더라도 따를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는 미국과의 친밀도에서 퀴리노의 역할이 장제스보다 더 확고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승만은 동맹에서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을 제외시키자는 주장도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들이 표방한 반공동맹은 냉전시기에 표출된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었다. 동맹을 맺는데 있어 기반되어야 할 것은 각각의 정권이 기반을 갖추고 영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질서 속에서 중국과 한국은 순망치한의 관계로 서로 의지해야 할 상대였다. 그러나 6·25전쟁을 전후로 장제스정부는 풍전등화와 같은 나약한 정권이었다. 또한 한중양국 모두가 의지해야 할 최우선의 배경은 바로 미국이었고, 미국에 의해 그들의 관계도 변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태도에 따라 한중양국은 우방이었으나 불가분의 우방은 아닐 수 있었다. 미국도 자신의 이익과 안정보장을 염두에 둔 국제관계를 전개해야 하는 상황에서 적어도 6·25전쟁이 발발... Before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Republic of China claimed to be pro-American and tried to address pending issues, counting on aid from the United States. The U.S., however, assumed an indifferent and passive attitude toward military assistance that the two countries wanted to receive. The two governments regarded the similar attitude of the U.S. government as a military crisis in both countries. In particular, at the peak of the sense of crisis in the two countries were the announcements of the “withdrawal of the U.S. troops in Korea” and the “White Paper on the republic of China(Taiwan)-US Relations.” In the Cold War, the U.S. played a role as a leader of the free world, but that did not mean the nation could unconditionally support and assist others in the free world, ignoring its own national interests. The U.S. was not able to give a positive answer to the question about whether the influence of Korea and Taiwan in East Asia on the U.S. interests could be undeniable or not. Moreover, the U.S. government was concerned about a possibility that its military assistance to the two countries could heighten ideological conflicts in East Asia. For this reason, Elpidio Quirino who insisted on forming an anticommunist alliance like the North Atlantic Treaty withdrew his stance by the conciliation of the U.S., and changed into the anticommunist alliance into economic and cultural relations. Back then, Syng-man Rhee and Kai-shek Chiang tried to persuade the U.S. to continue to provide military assistance for the two nations. One of their attempts was the Jinhae Meeting held to carry on discussions on the Pacific Alliance. The two leaders seemed to think that their determined attitude would press Washington. However, as the U.S. did not show a positive change in its stance, the two countries had to have an alternative plan in mind, which was military cooperation between the two nations. Korea attempted to purchase arms from the U.S. with the economic aid that Korea received from Washington, but reached a deadlock several times. Korea planned to purchase war supplies from Taiwan and sent a detailed list to Taiwan. Meanwhile, Taiwan planned to set up a military base in Jeju Island to launch counterattack mainland China. However, the Korean government denied its involvement in Chiang’s plan, saying there was no discussion about it at all between the two nations. Syng-man Rhee and Kai-shek Chiang’s attempt to seek military cooperation was considered as an alternative plan in case aid from the U.S. would be seized, but the bilateral cooperation that the two leaders envisioned was different. Later, Rhee was able to receive arms aid from the U.S., and thus to reject Chiang’s burdensome proposal. Moreover, Rhee made clear that he would follow Quirino’s anticommunist alliance even if the alliance was degenerated and was limited to economic and cultural relations. He came to think that the role of Quirino in its relation with the United States was stronger than that of Chiang. Rhee even said that he could accept the suggestion to exclude Chiang’s Kuomintang of China from the alliance. The anticommunist alliance that they claimed to support was the most commonly observed form during the Cold War. What mattered in forming an alliance was whether each government had a solid and lasting foundation. The relation between the republic of China and Korea in the traditional order was intimately interdependent, and they had to count on each other. Around the time of the Korean War, however, Chiang’s government was weak like a candle flickering in the wind. In addition, the background that both Korea and the republic of China had to prioritize was the U.S., and the two nations’ relation could be affected by the U.S.. For this reason, Korea and the republic of China were allied due to the attitude of the U.S., but the alliance was not inseparab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U.S. that had to m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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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공화국기(1948~1960) 육군 예비전력 동원체제의 형성

          윤시원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4

          The conscription system of Korea was established by the 1949 military service law. In the process of institutional stabilization of the draft system, the establishment of a reserve manpower mobilization system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During the period of the first Republic of Korea, the Ministry of Defense suffered trial and error over the years to form a reserve power mobilization system. The first stage is the formation of the National Gurad. The National Guard was essentially the type volunteer military system borrowed by the US National Guard system. As a result, the Military Service Act was declared in 1949, and conscription was introduced systematically. In the long term, if the reserves were discharged through conscription, the National Guard that recruited civilians had no basis for existence. In addition, it was difficult to keep the National Guard forces smoothly due to the lack of material base in the early days of the military. Due to the lack of manpower to train and the equipment necessary for training, the military functions of National Guard were limited. Because of this, the National Guard was disbanded in 1950. The ROK Ministry of Defense attempted to reestablish the reserve mobilization system after the intervention of the Chinese communist army during Korean War. The Ministry of Defense mobilized the 2nd grade to form the National Defense Forces and foster them as reserve forces. The National Defense Forces based upon the characteristics of conscription system. However, the National Defense Forces dismantled in a short period of time without sufficient preparation, causing a lot of controversy. Since then, the organization of the National Defense Forces has been transformed into labor divisions. The Department of Defense organized a Citizen Armed Forces in 1953, learning from the failure of the national defense forces. In 1955, however, the Army organized 10 reserve divisions and the Citizen Armed Forces lost its ground for existence. The Ministry of Defense has unified reserve power mobilization into the command system of itself through the Reserve Division. The Citizen Armed Forces dismantled naturally as an efficient reserve power mobilization system was established. The establishment of the Army's reserve division was an opportunity to complete the reserve mobilization system within the framework of the draft system. Personnel trained in military service as active duty soldiers were able to be regularly called up into the reserve division to receive military education after they returned to society. As a result, the conscription system of Korea could be completed. 징병제가 제도적으로 안정화 되는 과정에서 예비전력 동원체제의 확립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제1공화국 시기 국방부는 예비전력 동원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수년간에 걸쳐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1948년부터 추진된 호국군 편성이다. 호국군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주방위군 제도의 영향을 받은 모병제 성격의 제도였다. 이 때문에 1949년 병역법이 선포되고 징병제가 제도적으로 도입되자 모병제에 기반한 호국군은 모순적인 존재가 되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징병제를 통해 예비역이 배출되면 민간인을 모병 대상으로 한 호국군은 존립할 근거가 없었다. 또한 건군 초기 부족한 물질적 기반 때문에 호국군을 원활히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인력과 훈련에 필요한 장비 부족 때문에 호국군의 군사적 기능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호국군은 1950년 해체되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예비전력 동원체제를 다시 구축하려고 시도한 계기는 중공군의 참전이었다. 국방부는 제2 국민병 대상자를 동원하여 국민방위군을 편성하고 이를 예비전력으로 육성하려 했다. 병역법에 규정된 제2 국민병 대상자를 동원한 것에서 나타나듯 국민방위군은 본격적으로 징병제의 성격을 가진 예비전력 동원체제였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은 충분한 준비 없이 단기간에 급조되면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호국군과 마찬가지로 군사 훈련에 필요한 물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단기간내에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국민방위군의 조직은 노무사단 등으로 전환되었다. 국방부는 국민방위군의 실패를 교훈 삼아 1953년 민병대를 조직했다. 민병대의 운용방식은 호국군에 가까웠으나 동원 방식에 있어서는 징병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55년 육군이 예비사단을 편성하면서 민병대는 존립할 근거를 잃었다. 국방부는 예비사단을 통해 예비전력 동원을 국방부의 지휘계통으로 일원화 시켰다. 효율적인 예비전력 동원체제가 수립되면서 민병대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육군의 예비사단 창설은 징병제의 틀 안에서 예비전력 동원체제를 완성하는 계기였다. 징병을 통해 현역병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인력은 사회로 복귀한 뒤에도 정기적으로 예비사단에 동원되어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서 한국의 징병제는 징집 및 소집 체제를 완전히 갖출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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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대(對) 파르티아 전략: 네로의 아르메니아 전쟁(54~63CE)과 란데이아(Rhandeia) 조약

          반기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9 군사 Vol.- No.113

          이 논문은 로마의 대(對) 파르티아 전략에서 아르메니아가 차지했던 위치를 네로의 아르메니아 전쟁(54~63CE)과 그 전쟁을 종결지은 63년 란데이아 조약(Treaty of Rhandeia)을 중심으로 살핀다. 첫째로 ‘로마 제국의 전략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간략히 정리한다. 둘째로 기원전후 1세기 동안 아르메니아가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서 ‘접경화’ 또는 ‘완충지대화’한 과정에 대해 살펴본다. 셋째로 네로의 아르메니아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 과정, 결과에 대해 상세하게 다룬다. 넷째로 63년 전쟁을 종결지은 란데이아 조약과 그 이행을 위한 66년 티리다테스 1세(Tiridates I)의 로마 방문이 갖는 전략적 의의에 대해 논한다. 로마 제국에 전략이 존재했는가 여부는 로마 제국 대전략(Grand Strategy)에 관한 러트왁(E. W. Luttwak)의 연구 이후 가장 논쟁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제국의 중앙에는 분명 전략을 ‘수립’하고 그 전략의 ‘지속성’을 보장하게 하는 ‘의사 결정 집단(decision-making group)’이 존재했다. 황제 자문위(consilium principis)를 비롯해 국가의 최고위층(primores civitatis)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군사적으로 중차대한 결정의 순간마다 황제의 최측근 조언자로 기능했다. 또한 당시 로마나 파르티아 같은 대제국들의 변경 및 외교 정책이나 군사 배치, 이동, 보급 같은 것들은 상대적으로 그 주변부에 존재했던 왕국이나 부족국가들의 기준에서 볼 때 충분히 ‘전략’적이라 할 만한 것들이었다. 제 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결과, 기원전 66년 아르메니아 왕국은 로마의 동쪽 변경이자 파르티아의 서쪽 변경인 접경지대에 위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후 로마의 대(對) 파르티아 전략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해졌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 실패 이후 험악했던 양국 관계는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의 기지로 회복되었다. 아르메니아 문제는 파르티아가 추천한 아르메니아 왕위 후보자를 로마가 임명하는 형식으로 일단락됐으나, 실질적으로는 로마 황제가 아르메니아 주변 왕가들에서 친 로마적인 인사를 임명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황위계승이 걸린 빈번한 내분으로 개입의 기회를 놓치고 있던 파르티아는 서기 54년 같은 아르사케스조의 티리다테스 1세(Tiridates I)를 기습적으로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힘으로써 전략적 우위를 점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네로가 코르불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면서 아르메니아 전쟁이 시작됐다. 코르불로의 작전 수행은 로마의 기본전략이 반영된 것이었다. 동부 속주들의 방위를 재정비하고 아르메니아에서의 로마 우위를 되찾으면서 파르티아와의 전면전은 피했다. 그러나 승기에 고무된 네로가 지휘관을 파이투스로 교체하고 아르메니아 병합을 시도하면서 전면전이 불가피해졌다. 결과는 서기 62년 란데이아에서의 뼈아픈 패배였다. 이듬해 네로가 국가의 최고위층(primores civitatis)과 상의한 끝에 지휘권을 코르불로에게 넘기자 다시 상황이 로마에 유리하게 흐르기 시작했고, 코르불로는 사태를 수습하고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를 위협하여 란데이아 조약을 이끌어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향후 로마 황제가 파르티가 추천한 아르사케스조 왕족을 아르메니아 왕으로 승인할 것, 그래서 로마에서 네로의 주관으로 티리다테스 1세의 대관식을 갖는 것이었다. 서기 66년 네로는 로마를 방문한 티리다테스 1세에게 왕... This study re-investigates Nero’s Armenian War of 54~63CE and the Treaty of Rhandeia to highlight the geostrategic importance of Armenia in the context of the Roman strategy against Parthia. Firstly, I will summarize the old debate on the question whether there was the grand strategy of the Roman Empire. Secondly, I will explain the processes of forcing the kingdom of Armenia to be situated in the contact zone(or the buffer zone) between the imperial powers of Rome and Parthia, and the crucial phases of Nero’s Armenian War during the first century CE. Thirdly, I discuss the strategic intent to conclude the Treaty of Rhandeia in 63CE, which was followed by the coronation of Tiridates I by Nero at Rome in 66CE. Since E. W. Luttwak’s study on the Grand Strategy of the Roman Empire was published, it has been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topics whether the Romans had their imperial strategy. There was a certain decision-making group in the Roman imperial court, who were able to ‘establish’ and ‘maintain’ a consistent strategy. The primores civitatis(foremost authorities of the state), the consilium principis(council of the princeps) in particular, acted as the closest advisers of the emperor at times of crucial decisions. Ultimately, it is probable that the military disposition, operation and logistics of the greater empires of Rome and Parthia, along with their frontier and foreign policies, were considered to have been relatively ‘strategic’ by people of the neighbouring kingdoms and tribal states. In 66 BC, as the outcome of the Third Mithridatic War, the kingdom of Armenia was driven into the contact zone between the eastern frontier of Rome and the western frontier of Parthia, and therefore it first became to have the geostrategic importance in the Roman strategy facing against Parthia. Rome’s foreign relations with Parthia, which had been unsecured after Crassus’ defeat and fall at the battle of Carrhae in 53BCE, were restored by Augustus’ peace settlement in 20BCE. The Armenian question was resolved with the agreement that the Roman emperor appoints the king of Armenia whom the Parthian king of kings has recommended, but since then in practice the former would appoint the kings out of non-Armenian royal families while the latter often underwent civil wars of the Parthian succession. In 54CE the Parthian king of kings Vologaeses I raided Armenia and crowned his brother Tiridates I king of Armenia to take strategic superiority over the upper Euphrates. Nero decided to begin war against the Arsacid kings and appointed Gnaeus Domitius Corbulo as the dux belli(commander of war). Corbulo conducted military operations based on the Roman strategy against Parthia. He strengthened the defence of the eastern provinces, restored hegemony over Armenia, and tried to evade a full-scale war with Parthia. However, the war became inevitable when Nero had placed Lucius Caesennius Paetus in command to annex Armenia, which was resulted in the serious defeat at Rhandeia in 62CE. Nero after sought advices from the primores civitates replaced Paetus with Corbulo who rectified the urgent situation and managed to draw up the Treaty of Rhandeia with the Arsacid kings in 63CE. The main agreement of the Treaty was that the Roman emperor approves of a Parthian prince as king of Armenia, thereby crowning Tiridates I by Nero at Rome. In 66CE Nero spent a huge budget on holding the clamorous coronation for his propaganda purpose. From a strategic point of view, venturing into a full-scaled war to incorporate the kingdom of Armenia into a province of either Rome or Parthia was not any good solution to the Armenian question. The province of Armenia undoubtedly would have required much more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to control and defend the extended borderlands. It was strategically better option for both Rome and Parthia to maintain Armenia as a buffer state situated in the contact zone between them. The Treaty of Rhandeia 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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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몽전쟁기 西海道·北界에서의 海島入保策 추진 양태와 군사적 성격

          강재광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0 군사 Vol.- No.117

          Island Protection Tactics(海島入保策) during the Period of the War against Mongol was carried out for the first time in Seohaedo(西海道) and Bukkye(北界) of Goryo dynasty in 1231. The strategic experience of Haedoibbo(海島入保) that had been executed in these provinces had an considerable effect on the governments’ escape led by King into the Kanghwa island(江華遷都) in 1232. Island Protection Tactics that was propelled in Seohaedo and Bukkye in the Period of the War against Mongol, have several military characters distinguished with southern provinces of Yanggwangdo(楊廣道). The first, Haedoibbo in Seohaedo and Bukkye had come true throughout intensive military control of Choi Woo’s political power, from the start. The second, Juhyunmin(州縣民) who had entered to strategic islands of Bukkye, could come back to the homeland in 1261. They defended strategic islands from Mongol invasion, staying to designated islands for a long time. The third, Byeolchogun(別抄軍) that had stationed to strategic islands of Seohaedo, won to all naval battles against Mongol navy. As a result, Juhyunmin and defensive forces of strategic islands, prevented from Mongol navy’s coastal infiltration toward Kanghwa island. The fourth, Gyungbyeolcho(京別抄) dispatched to main strategic islands of Bukkye. Forward stationing of this unit strengthened defensive power of strategic islands of Bukkye. The fifth, Bukkyebyungmasayeong(北界兵馬使營) had been moved to strategic islands of Seohaedo and Bukkye in the end of the War against Mongol. 대몽전쟁기 해도입보는 1231년(고종 18) 서해도·북계에서 최초로 실행되었다. 1231년 9월 서해도 黃州·鳳州의 鐵島 입보는 몽골군 선봉대의 황주·봉주 방면 침략을 회피하기 위해 그 당시 安北府로 북진하고 있었던 고려 삼군 지휘부의 승낙으로 급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같은 해 10월 안북부전투를 앞두고 博州 등 북계 10여 州는 동시다발적·집단적으로 이미 지정된 청천강 하구의 전략해도에 입보하였다. 북계 제주에 대한 해도입보 명령을 내린 주체는 최우정권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231년 후반부 서해도·북계에서 추진된 해도입보 경험은 1232년 강화천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강화천도 이후 해도입보책은 고려의 유력한 대몽방어책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대몽전쟁기 서해도 방면의 해도전투는 席島·昌麟島에서 발발하였는데, 고려 측이 모두 승리하였다. 북계 방면의 해도전투는 艾島·神威島 등에서 발생하였는데, 애도전투에서는 고려 측이 승리하였으나 신위도전투에서는 섬이 몽골군에게 함락되었다. 신위도의 사례를 제외하고, 대몽전쟁기 해도전투는 고려가 몽골 수군의 침공을 대부분 격퇴시켰으며 전략해도들을 안전하게 지켜냈다고 볼 수 있다. 대몽전쟁기 서해도·북계에서 추진된 해도입보책은 楊廣道 이남 지역과 다른 군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첫째, 서해도·북계 諸州에서 실행된 해도입보는 애초부터 고려무인정권의 강력한 군사적 통제를 받아 실행되었다. 둘째, 북계 전략해도에 입보한 주현민은 1261년(원종 2)에서야 출륙했을 정도로 장기간 해도에 머물며 전략해도를 지켜냈다. 셋째, 서해도의 전략해도들은 몽골 수군과의 해상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몽골군이 직접적으로 해상로를 통해 강화도를 침공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넷째, 북계의 주요 전략해도들에는 京別抄가 배치되어 방어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다섯째, 대몽전쟁 말엽인 1256년에 北界兵馬使營이 서해도의 창린도로 옮겨졌다가 이후 1258년경 석도로 移置되었으며, 對蒙講和 이후 元宗 때 최종적으로 북계의 椵島로 옮겨져 해도입보 및 대몽전투를 총괄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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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대한(對韓) 군원정책(1976-1980) 연구-카터행정부의 특징적인 정책내용을 중심으로-

          전호훤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8 군사 Vol.- No.66

          This is an abstract on U.S. military aid and sales to Korea from perspectives of International Relations. U.S. military assistance toward Korea during 1976~1980 years were provided, considering U.S. troops withdrawal policy from Korea in president Carter's administrative. And U.S. programs have been moderated political, military objectives through military aides in accordance with intervention level. president Carter's administrative had adjusted size of FMS sales toward Korea in order to smooth troops withdrawal execution from perspectives of international security. Therefore military sales policy to Korea was changed accordingly with international and domestic circumstances & military strategic changes. but military sales policy and objectives had showed consistency gener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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