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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전쟁시기의 중소관계 ― 성세재의 역할을 중심으로 ―

        정형아 중국근현대사학회 2008 중국근현대사연구 Vol.39 No.-

        在中日戰爭時期的中苏关系上, 少不得谈历任新疆最高统治者盛世才。他在统治新疆十二年的歲月裡,回旋苏联和国民政府之间。 本论文要从盛世才的这种行为,检讨中日战争时期中国和苏联的关系变化。除了前言和结语外,本文分成四個部分; 第一,苏联对新疆的经济合作,第二,苏联和盛世才雙方的关系变化, 第三,1942年盛世才归属国民政府的问题, 第四,苏联和国民政府对盛世才问题的应付。 从这些过程中本, 论文发现一件事實, 不如前人的研究,中苏两国对新疆问题, 虽然存在有些矛盾,但他們兩国为了避免中苏两国关系恶化而努力。这與中苏两国在整個抗战期间一直显示的状况很类似。其實, 中苏两国间虽然存在意识形态上的矛盾,但是他们将国家利益放在意识形态之上,因此建立合作关系,進而尽量避免互相对立的狀况。新疆问题的处理也是如此。所以我们可以说在抗战时期中苏两国决定外交政策时,总是将国家利益摆在意识形态前面, 盛世才的新疆问题是其一例子。

      • 西鶴小說の創作原理

        鄭灐 단국대학교 1996 論文集 Vol.30 No.-

        作品이 지니는 문예성, 작품연구의 성과 등을 감안해, 일본고전산문작품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고른다면 아마도 11세기초의 『源氏物語』와 17세기후반의 井原西鶴의 一連의 소설들이 될 것이다. 위 작품들에 대한 일본에서의 적극적인 연구와 평가는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歐美의 연구자들에게도 크게 평가받고 있는 점을 보면, 비록 그들이 근대소설적 시각으로 위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위 작품들이 지니는 문학으로서의 보편적가치는 상당부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일본서사문학의 하위쟝르인 浮世草子의 창작원리, 즉 井原西鶴小說의 창작원리를 究明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西歐敍事文學의 전개과정(로망, 노블로의 이행)보다는 동아시아한자문학권의 소설사양상을 염두에 두고, 주로 작가의 문예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창작원리를 밝히고자 한다. 특히 物語의 전개양상과 浮世草子와의 관련성, 『源氏物語』의 物語虛構論의 西鶴의 文藝觀, 當代의 중심문학관이었던 宋學이래의 권선징악적 문학관과 西鶴小說의 서문 및 발문 등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慰み草」 혹은 「轉合書」로서의 小說의 의미 등의 검토를 통하여 西鶴小說의 創作原理를 究明하고자 한다.

      • KCI등재

        중일전쟁 전반기 중국의 항공전력 확보와 소련의 지원 비행기와 조종사 지원을 중심으로

        정형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2020 亞細亞硏究 Vol.63 No.4

        If naval power was a symbol in military modernization, air power could be said to be a measure of armed capacity modernized by further progressing there.For this reason, countries around the world in the early 20th century tried to develop air power further from aviation. In 1924, Sun Yat-sen’s Chinese government was able to have his own army with the support of the Soviet Union through the first cooperation. However, after Sun’s death, due to the anti-Communist activities of Chiang Kai-shek and the Incident of Eastern China Railroad, the two countries severed diplomatic ties.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in 1931, China and the Soviet Union restored diplomatic relations, but no active cooperative relations were formed. While Japan’s invasion of China was gradually expanding, China’s military power was still lagging, and most of its command, training, and weapons were mostly dependent on foreign countries. As the crisis of war escalated in Europe in the mid-1930s, most military advisers from Italy and Germany, who were active in China, returned to their home countries. Countries around the world did not try to intervene in the expanding conflict between China and Japan. With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China, which had very weak military power compared to Japan, requested aid from European and American countries. With no one trying to support China, the Soviet Union signed a Treaty of Non-aggression with China to aid China. The text noted Soviet aid to China in the early days of the Sino-Japanese War. The Japanese military prepared the mobilization plan in anticipation of a quick conclusion of the Sino-Japanese War. China’s military power, especially its backward air force, behind Japan, has left Japan unable to anticipate the need for a long-term war. Contrary to expectations, however, China was able to continue the war. Because Soviet support played a very important role. This paper focused on the Soviet air force support among them. In the early the Sino-Japanese War, the Soviet Union supported China’s war with military supplies and personnel dispatch for air power, including airplanes. The Soviet Union’s air power assistance to China has not only allowed China to continue its war, but also has significant implications for China’s progress in air power. Based on this interest, this paper reviewed the content of Soviet air aid by dividing it into aircraft support and manpower such as pilots and engineers. This will not only review the Sino-Soviet relations, which were called honeymoon relations in the early the Sino-Japanese War, but also consider the starting point for East Asian countries to have aviation power in the 1930s. 해군력이 군사적 근대화에서 표상이었다면, 공군력은 거기에서 진일보하여 현대화된 무장역량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20세기 초 세계 각국은 해군력에서 더 나아가 공군력을갖추려고 노력하였다. 1924년 쑨원의 중국 정부는 제1차 중소합작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쑨원의 사후 장제스의 반공활동과 중동로 사건 등으로 중소 양국은 단교를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 중소 양국은 다시 국교를 회복하였지만, 적극적인 협력관계는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가운데도 중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었고, 군대의 지휘와 훈련 및 무기는 대부분 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서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자 중국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독일 등의 군사고문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세계 각국은 확대되어가는 중일 양국의 갈등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1937년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에 비해 매우 낙후한 군사력을 가진 중국은 미국과유럽 각국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중국을 지원하려고 하지 않는 가운데 소련은 중국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중국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제2차 중소합작이 시작된 것이다. 본고는 중일전쟁 초기 소련의 대중국 원조를 주목하였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속전속결로 단기간에 마무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물자동원계획을 마련하였다. 일본에 뒤지는 중국의 군사력, 특히 낙후한 공군력은 일본이 장기전의 필요를 예상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중국은 선전을 하고 지구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배경에는 소련의 지원이 있고, 그 지원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본고는 그 중에서 소련의 공군력 지원을 주제로 삼았다. 중일전쟁 초기 소련은 비행기를 비롯하여 항공 전력을 위한 군수물자 지원과 인력파견으로 중국의 전쟁을 지원했다. 소련의 대중국 항공 전력지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단지 중국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차원이 아니라 중국이 공군력을 갖추고 현대적 군사력으로 진보하는데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관심에 근거하여 본문은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전면적인 중일전쟁의 발발부터 소련의대중국원조가 중단되는 1941년까지의 소련의 공군원조 내용을 항공기 지원과 조종사과 기술자 같은 인력 측면으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중일전쟁 초기 밀월관계라고 불리던 중소관계를검토할 뿐만 아니라, 1930년대 동아시아 국가가 항공력이라고 하는 새로운 진보동력을 갖추게 되는 시작점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 KCI등재

        遷徙與定居, 共同體的再形成 - 以釜山華僑與在日濟州人爲中心

        정형아,정창원 한국문화융합학회 2018 문화와 융합 Vol.40 N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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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regard of studies on commons, I have kept asking, ‘how can the research topic, commons, be approached in the area of research on history?’ The awareness of the issue raised the necessity of conducting a study on commons in line with the understanding of Jeju in its various historic and cultural context. Among several research topics based on the awareness of the issue, the one that attracted my attention was migration and settlement issues seen in the history of East Asia. Migration beyond nationality and settlement in foreign countries strengthen not only ethnic and community identities, but also new personal and cultural identities beyond nationality. In other words, commons that have maintained communities were expected to be traced by exploring various causal relationships regarding how communities were maintained and recreated in new settlements in the process of migration and settlement that each ethnic group had experienced. Unlike overseas Chinese that have formed strong migrant communities from the perspective of world history, the power and range of overseas Korean communities are relatively weaker than them. These strong overseas Chinese communities are scattered in numerous regions around the world, but overseas Chinese communities in Korea have not been grown as a relatively strong migrant community in Korean society. Unlike the overseas Chinese that are discussed in this study, in particular, overseas Chinese in Busan, people from Jeju Island who reside in Osaka, Japan, compared to other overseas Korean communities, have formed and maintained a relatively strong migrant community, which is worthy of notice. Recent migrations across borders have multipolarized and decentralized existing relations between centers and surroundings, while surroundings themselves have created internal differences. In the process where regions and the world meet face to face, transversal and hybrid cultural phenomena have been created in various new forms. For this reason, issues associated with migrations are not confined to movements between spaces, but they are the results of the combination of various internal and external networks such as system, politics, society, culture and network. In particular, commons that migrant communities can commonly embrace inevitably lie in the process of forming communities and identities. 필자들은 커먼즈(Commons)의 연구와 관련하여 줄곧 ‘공동자원이라는 연구주제에 대해 역사연구라는 영역에서는 어떤 접근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왔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제주지역이 가지는 다양한 역사문화적 맥락의 이해를 동반하는 공동자원 연구의 진행이 필요하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한 연구주제들 중,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주제는 바로 동아시아 역사 속에 보이는 이민과 정착 문제였다. 국적을 뛰어넘은 이동과 해외 정착은 종족정체성과 지역사회정체성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분정체성과 함께 국적을 초월한 문화정체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각 족군(族群)들이 거쳐 온 이주와 정주의 과정들 속에서 새로운 정착지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되고 재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인과론적 탐색을 통해 공동체의 유지를 가능하게 하였던 커먼즈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강한 이주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화교이주공동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인의 해외이주공동체는 상대적으로 그 세력과 범위가 화교의 이주공동체에 비해 미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전 세계에 수많은 지역에 산재한 강력한 화교이주공동체들 중, 유독 한국화교 공동체는 한국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이주공동체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본문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화교, 특히 부산지역의 화교와는 다르게 재외한국인 이주공동체 중, 오사카를 중심으로 형성된 재일제주인(在日濟州人)사회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이주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로 인해 기존의 중심과 주변의 관계구도는 다극화되고 분산되는 한편, 주변부는 그 자체로 내적 차이를 발생시켰다. 지역과 세계가 직접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의 횡단적이며 혼종적인 문화현상을 만들어 내었다. 때문에 이주 문제는 공간이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 정치, 사회, 문화, 네트워크 등 다양한 내외적 연결망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공동체와 정체성의 형성에는 이주 집단이 공통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커먼즈적 요소가 자리할 수밖에 없다.

      • 『一代男』の創作意圖 : 卷一の二と卷一の三を中心に 「卷一の二」와「卷一の三」을 中心으로

        鄭灐 단국대학교 1998 論文集 Vol.33 No.-

        본고에서는 前稿, 「西鶴好色物의 創作意圖(1)」­『好色一代男』의 주제와 戱作意識을 중심으로­의 후속 연구로서 「卷一の二」와 「卷一の三」에 있어서의 작자의 창작 의도를 고찰했다. 「卷一の二」의 작품 서두에서는 「卷一の一」의 『桐곤』의 雅的 표현 구조를 일부에 잔존시키면서, 주인공의 언설과 행위의 묘사는 『太平記』의 패러디를 행하기 위한 비속적인 취향과 표현 구조로 전환된다. 작자는 『源氏物語』에서 『太平記』로 이중 번안을 시도함으로써 『源氏物語』의 이른바 「みやび」의 내실과 「世之介」로 상징되는 「好色性」과의 낙차를 형상화하는 「性」이라는 원리적 주제로의 의식을 밝히는 계기로 삼고 있다. 또한 「卷一の三」에서는 「卷一の二」의 서두부 이후의 주인공에 대한 비속적 표현의 전환이 정착되어, 유형적 「世之介」像이 제시된다. 그리고 『伊勢物語』의 패러디가 집중되면서 「世之介」의 독자적 표현 구조와 작품 세계가 확립되는 것이다. 『伊勢物語』의 「男」의 「みやび」의 내실을 「世之介」의 언설과 행동과의 대비를 통해 구체화됨으로써 희작 의식과 주제성을 둘러싼 작자의 창작 의도의 일단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 KCI등재
      • KCI등재

        차선의 파트너 — 1931-1941년 중소양국의 협력관계 연구 —

        정형아 중국근현대사학회 2018 중국근현대사연구 Vol.77 No.-

        在一九三七年七月全面抗战爆发后, 中苏两国缔结了互不侵犯条约。 从此到太平洋战争爆发, 苏联就成为中国的最大以及唯一的援助国。 原来蒋介石靠第一次国共合作而统一中国, 然后展开反共活动一致与苏矛盾而断交。随着一九三一年九一八事变爆发, 并日本在中国东北地区扩张势力, 中苏两国分别重新摸索解决状况的国际关系。众所周知, 中国一边以外交的手段阻止日本的扩大, 且希望西方国家积极地介入, 另一边中国寻找改善对苏关系之路。然而西方国家不愿介入东亚问题, 并与日本难以达成协议, 因此中国终于积极地与苏联进行接触。中国方面提出了“先条约, 后复交”, 而苏联方面主张“先复交, 后条约”。最后如苏联所提, 两国先行了复交, 但是中国所愿的合作关系难以呈现。在与中国恢复国交后, 苏联仍然与日接触而谋求东亚边境的安全和自国的利益。 与此同时, 苏联响应中国的提议, 进行了有关互不侵犯条约的讨论, 而另一方面与日进行了有关出售中东铁路和承认满州国的协议, 这是苏联要与日本改善关系的一种措施。最后, 苏日两国达成协议而中东铁路出售于满州国, 并关于中苏互不侵犯条约的讨论, 只是拖延时间而已。 到了一九三七年中日战争全面爆发, 苏联终于与中国签定互不侵犯条约, 而援助中国并牵制日本势力扩大。靠这样成立的第二次中苏合作, 中国获得莫大的援助而应付日本的侵略。虽然苏联成为对华不可取代的最大援助国, 但并不完全抛弃对日关系的改善。 在欧洲苏德两国缔结互不侵犯条约, 德国劝苏改善与日关系。尤其是在諾門罕戰役后, 日本重新评估苏联的军事力, 并为难进政策的考量, 与前不同积极地寻求改善与苏关系之路。该结果就是苏日中立条约。 从一九三一年到一九四一年间, 中苏两国分别将日本看成解决东亚情势的最好的伙伴。但是两国发现难以实现这一目标, 于是以其次的伙半选择了对方。对苏日中立条约中国向苏抗议, 而这并未导致如前的断交。但不久后, 德国侵攻苏联并日本发动珍珠港事件, 苏联的对华援救就中断, 美国替代苏联成为战时中国的新伙伴。 对抗战时期中苏关系而言, 中国学者王真主张, 那就是“动荡中的同盟”, 且李嘉谷称之为“合作和冲突”。但笔者认为从头到尾中苏两国对彼此并不是最好的伙伴, 而是其次的伙伴。即使在太平洋战争爆发以后美国主导的大同盟体制之下, 中苏两国是同盟国的一员, 象抗战初期所见的合作关系, 大致到一九四一年告一段落。

      • KCI등재후보

        국공양당의 갈등과 화해에 대한 미국의 태도변화(1941-1944)

        정형아 한국중앙사학회 2010 중앙사론 Vol.0 No.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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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paper focuses on the United States intervention on The New Fourth Army Incident in 1941, external foreign propaganda between KMT and CCP in the beginning of 1940s and the KMT-CCP Negotiation in 1944 led by Hurley and the responses from KMT and CCP along with the transformation of the interactions between the two parties and foreign intervention. The incidents above may appear irrelevant, but all lie in the same frame. One thing worth mentioning about the New Fourth Army Incident is the role of international pressure in its resolution. Some Chinese scholars propose the influence of international pressure in easing the KMT’s anticommunist policies, but the effectiveness of such pressure leave rooms for questions. For example, according to materials that was exposed up to now, it's not easy to explain that the United States carried out a aggressive attitude in intervening the New Fourth Army Incident. However, it seems KMT was not able to entirely reject the U. S advice due to its needs of economical aid. Thus, KMT attempted in reducing the New Fourth Army Incident from a political and ideological collision to merely an internal disciplinary crisis. The identical logic follows for KMT’s relationship with the Soviet Union as the former was reluctant in stimulating the latter with ideological conflicts thus placing its financial assistance in jeopardy. In 1944, the United States obtained a central role in convincing the reconciliation between KMT and CCP. Desperate in warding off the Japanese, the United States urged KMT for a negotiation with CCP for an agreement between the two. However, the different stances of KMT and CCP in the concept of ‘coalition’ and ‘unification’ resulted in the difficulty in reaching an agreement. TheU.S understanding in the rooted conflict between the two parties was much too vague. Surely an agreement between the two parties would have been significant in bringing the U.S a victory in the Pacific War, which highlights the crucial relationship between domestic and foreign policies. However, the negotiation between KMT and CCP ended a failure and re-invoked a civil war.

      • KCI등재

        ‘포모사(Formosa)’와 ‘대만(臺灣)’ 사이

        정형아,정창원 역사문화학회 2020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23 No.1

        Ever since the ownership of Mainland China was shifted to the Central People’s Govern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n October, 1949, the question, ‘who is the representative of China?’ and the jurisdiction of Taiwan that was liberated from the control of Japan emerged as an important issue in the international political arena. According to the Cairo Declaration released in 1943, Taiwan should have been returned to China, but something unexpected came up in the postwar period, that is, the coexistence of two Chinas. One China in Mainland China (People’s Republic of China) argued that Taiwan should belong to the China, while the other China in Taiwan (Republic of China) argued that the China promised by the Cairo Declaration was itself. The argument was basically based on the premise that Taiwan is owned by China, and they are still at odds over this. In the meantime, many Taiwanese people have raised a question about the view that their identity is tied to China. Formosa, the English term that had been used to refer to Taiwan until the mid-20th century, started to be replaced at some point. The origin of Taiwan was discussed based on its name in the body of this study, which is very closely related to its relationship with China that Taiwanese people themselves raise a question about today. Taiwan has experienced changes in government and culture caused by various external forces over the past four hundred years, and in the midst of them various ethnic groups have formed communities. In the process, Taiwanese people who had to go through a long-lasting process of convergence both politically and culturally started to view the question, ‘who am I and where am I?’ as an international issue beyond their sole issue. For this reason, how they were called and named is the most important and real problem to Taiwanese people to define their identity, and at the same time would always be the crux that is difficult to solve to them. This study reviewed and discussed things that were overlooked in earlier studies on the understanding of the ‘name’ of Taiwan based on the findings of earlier studies. This is a part of the issue of searching for the history of Taiwan. In particular, ‘the issue of naming’ reviewed in this study would contribute to the understanding of the identity of Taiwan and their conflicts with China. Implications of this study also exist here. 1949년 10월 중국 대륙의 주인이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로 바뀐 후, ‘중국의 대 표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와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된 대만의 귀속문제는 국제정치무대의 중 요한 이슈가 되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약속한 대로라면 대만은 당연히 중국에 반환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후 국제 상황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즉 두 개의 중국 이 출현한 것이다. 대륙의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대만은 자신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 장한 반면, 대만의 중국[중화민국]은 카이로에서 약속한 중국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기본적으로 대만이 중국의 것임을 전제한 것이며, 이에 대한 갑론을박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많은 대만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중국에 있다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대만을 지칭하며 서구사회에서 통용되던 영문명칭 Formosa가 언제부 터인가 Taiwan으로 대체되었다. 본문은 이점에 착안하여 명칭을 통해서 본 대만의 연원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이 연구는 현재 대만인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는 중국과의 관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만은 적어도 400년 이상의 시간 속에 여러 외부 세력에 의해 정권이 만들어지고 문화 가 형성되었으며, 그 가운데 여러 족군이 공동체를 형성해 왔다. 그 과정에서 정치․문화적 으로 지난한 융합의 과정을 경험해 왔던 대만인들은 “나는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문제를 자신들만의 영역을 넘어 국제적인 문제로도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인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불리고 표기되느냐의 문제는 곧 그들의 정체 성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현실적 문제이기도 하며, 어쩌면 영원히 풀기 어려운 난제가 될 것 이다. 본 연구의 서술은 기존 여러 연구 성과들을 이용한 대만의 ‘이름’에 대한 이해에서 기존연 구들이 간과한 부분들을 재고찰하고 검토하는 구조로 진행하였다. 이 글은 대만의 역사를 찾 아가는 문제의 일부분이다. 특히 이 글에서 고찰을 시도하는 ‘이름의 문제’는 현재 대만의 정체성과 중국과의 갈등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연구의 문제의식 또한 여기 에 존재한다.

      • KCI등재

        중일전쟁시기 중국 공군인력 양성과 소련 — ‘이닝(伊寧)항공학교’를 중심으로 —

        정형아 중국근현대사학회 2021 중국근현대사연구 Vol.92 No.-

        This thesis focused on the training of air force manpower among the situations of cooperation between China and the Soviet Union during the Sino-Japanese War. Yi-ning Aviation School was planned as the Dihua(迪化) Branch of the Chinese Air Force Academy in order to expand the high quality aviation manpower needed for the Sino-Japanese war. China Government planned that China Air Force Military Academy which was originally in Hangzhou(杭州) and then moved to Kunming(昆明), was in charge of elementary education, and a branch school was established in Dihua to foster executive personnel who went through intermediate and advanced courses and immediately put them into war. Accordingly, it was attempted to cultivate professional manpower by dividing specialties such as fighter and bomber pilots, reconnaissance and bomber crews. The will of the Soviet Union was important because these plans were entirely dependent on the Soviet Union for manpower and supplies. The Soviet Union was China’ s largest supporter in the early days of the Sino-Japanese War, but they were also facing a European crisis. Therefore, although it promised to cooperate with the aviation school, it could not comply with the education and flight plan as China wanted, and could not provide supplies such as oil and equipment. The aviation school soon revealed the limits of its operation. The school continued to exist until it was officially closed in 1945, but it was only the 2nd graduates that actually produced graduates. From the two months after the start, the limitations were revealed, which was predicted from the stage of planning school construction. Yi-ning Aviation School did not have sufficient consultation with the Soviet Union in the conceptual stage, and it was also a unilateral demand from China. However, the aviation school established in the inning was realized by China's initiative and effort to have a professional aviation high-quality manpower because of the need for wartime. And with the cooperation of the Soviet Union, the school was able to open. Therefore, the history of Yi-ning Aviation School can be said to be a trace of understanding the Chinese war situation, which had to depend entirely on Soviet aid in the early days of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role of the Soviet Union in China’ s establishment of a new defense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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