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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장부 다한증에서 Clipping에 의한 흉부4번 교감신경절 상부 차단술과 흉부4번 교감신경절 완전 차단술에 대한 장기성적 비교

        최봉춘,심성보,김용환,사영조,박재길,이선희 대한흉부외과학회 2007 Journal of Chest Surgery (J Chest Surg) Vol.40 No.11

        배경: 수장부다한증의 치료 후 손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적당한 보습성을 유지하고 보상성 다한증과 같은 합병증이 없는 경우에 보다 높은 만족도를 나타낼 것이다. 저자들은 수부다한증의 치료 후 보상성 다한증을 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두부쪽으로 영향을 미치는 교감신경의 보존을 위해 제4번 흉부교감신경절 상부의 신경다발을 차단하는 시술을 시행하였다. 대상 및 방법: 흉부 제4번 교감신경절을 상하 완전 차단한 1군과 보다 간편하게 흉부 제4번 교감신경절 상부 차단술만 시행한 2군으로 분류하였고, 두 방법의 장기성적을 평가하기 위하여 수술 후 만족도 등에 대한 전화설문 조사를 실시하였다. 대상 환자는 71명(남자 45명, 여자 26명)이며, 1군은 31명(평균 연령 25.5세), 2군은 40명(평균 연령 25.9세)이었고 추적 조사기간은 1군이 수술 후 평균 24.9개월, 2군은 18.9개월이었다. 결과: 수술 후 수술부위에 땀이 나는 정도는 1군에서 전혀 나지 않는다(41.9%), 환경에 따라 약간 난다(48.4%)에 비해 2군은 각각 60.0%, 35.0%였다. 수술 후 땀이 나기 시작한 경우는 1군이 58.1%, 2군이 40.0%였고, 수술 후 손의 건조한 정도는 별다른 불편이 없다고 한 경우가 1군에서 높았고 손크림을 바를 정도라고 응답한 경우는 2군에서 높았다. 보상성 다한증의 발생은 없거나 생활에 불편하지 않은 경우가 각각 71.0% (1군), 62.5% (2군)로 응답하였고, 수술을 후회하는 경우는 1군이 1명, 2군이 2명 있었다. 보상성 다한증의 발생부위는 1군이 등, 허벅지, 가슴 순이었고 2군은 등, 가슴, 배 순이었다. 미각성 다한증은 1군에서 몹시 불편하거나(25.8%), 약간 생겼지만 불편하지는 않다(45.2%)고 한 반면, 2군은 몹시 불편한 경우는 12.5%, 미각성 다한증이 생기지 않은 경우가 45%였다. 수술 후 얼굴에 나는 땀의 정도는 양 군 대다수가 불편이 없다고 응답하였다. 수술 후 만족도는 1군과 2군 대부분이 치료에 만족하였다. 결론: 흉부 제4번 교감신경절 완전 차단술과 상부 차단술은 수장부 다한증의 치료에 효과적이며, 보상성 다한증의 발생을 줄이고 증세를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흉부 제4번 교감신경절 상부 차단술은 수술이 쉽고 안전하며 미각성 다한증의 발생이 저하되고, 수술 후 환자의 만족도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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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共産黨 派爭論

        최봉춘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5

        본 주제는 조선공산당의 파쟁문제에 관하여 필자의 이해대로 좁은 식견을 서술하였는데,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가령 조선공산당 내부에 확실히 파쟁이 존재하였다면, 그 기본 요소를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파쟁으로 막을 내린 고려공산당의 영향이 그 첫째이고, 조선공산당의 전신으로 출현하여 말썽이 많았던 초기 사회주의 연구 그룹이 그 둘째이며, 식민지시기 조선독립운동(혁명운동)단체들의 초민주주의원칙에 의한 백가쟁명이 그 셋째이다. 일제 경찰자료들은 조선공산당의 ‘분파’를 이론파와 비이론파로 구분하였는데, 이른바 ‘화요파’ㆍ‘ML파’ 등이 전자에 속하고 ‘서울파’ㆍ‘상해파’ㆍ‘이르쿠츠크파’ㆍ‘서울-상해연합파’ 등이 후자에 속한다. 이런 분파들은 기실 일제의 분화 목적에 의해 날조된 것이고 ‘화요파의 만주총국’이나 ‘ML파의 만주총국’ 따위도 역시 일제의 추악한 본질에 의해 분류된 것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앞에는 아무 딱지도 붙일 필요가 없다. 조선공산당이 ‘파쟁’ 딱지를 달게 된 것은 코민테른 6차대회의 부당한 결의와 일제 경찰당국의 믿음직하지 못한 심문조서와 학계의 무의식적인 논조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당국에서 조선공산당의 ‘파쟁’ 내막을 그토록 자세히 파악 기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조선공산당이 그만큼 온 세상이 달 알도록 활약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조선공산당이 해체된 주요 원인을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산당을 조직하였으므로 그 진리여부에 관한 분쟁을 피면하기 어려웠다. 둘째, 나어린 조선공산당이 일제 경찰 측의 고압정책에 대응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셋째, 코민테른의 졸렬한 ‘12월테제’는 실제상 식민지조선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조선공산주의운동을 말살하였고 또한 교조주의적인 ‘일국일당 원칙’은 비록 중국공산당의 세력을 어느 정도 강화하였으나 그 대신 조선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평등하고 독립적인 지위를 상실케 하였으며 이로 인해 재만조선인(특히 공산주의자)들은 막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조선공산당은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역사적 산물로서 응당 공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른바 그 ‘파쟁’ 속에 교훈들이 적잖게 들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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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중산대학 조선유학생 연구 -1930년대를 중심으로-

        최봉춘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9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0

        식민지시대 조선민족독립운동(혁명운동) 특징의 하나는 무장투쟁의 전개와 더불어 문화적 향상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조상들에게서 이어받은 자랑스런 재부로,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일제에 반항하는 조선인들이 있는 곳에는 반일단체가 있었고 그들 단체가 있는 곳에는 반일간행물들이 있은 것인데, 이것 역시 다른 민족들에게는 흔치 않다. 국립중산대학 조선유학생들에게서 바로 그러한 특징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현재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1930년대 국립중산대학 조선유학생들은 50명가량밖에 안 되는데, 그 원인은 조선유학생 대다수가 청강생으로서, 학교 등록부에 정식 학생으로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유학생들의 신원을 살펴보면 대체로 직업적인 독립운동가가 많은데, 입교 전 이미 반일활동경력을 갖고 있는 이른바 “불령선인”들이었으므로 조선 내 고등학교에서 퇴학 맞거나 또는 한 두 해 수학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국립중산대학 측의 규정은 고등학교 졸업 또는 같은 자격의 소유자로 제한되어있어 반드시 단체의 추천이나 지명인사의 소개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유학생들은 단순히 개인의 장래를 위해 신변에 고등학교 졸업증서를 미리 휴대한 경우가 적고 졸업 후에도 그냥 독립운동을 목적하고 있어 될수록 가명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 탓에 지금 그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입교 전과 재학시기와 퇴교이후의 행적을 이어놓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본고는 조선유학생들의 신원을 밝히고 그들이 교문을 나와 무엇을 했나 하는 문제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1930년대 전반기는 중ㆍ한ㆍ일 삼민족의 관계가 가장 복잡하고 가장 악화된 시기인데, 그런 와류 속에서 국립중산대학 조선유학생들의 표현과 역할은 또 어떠했을까 하는 문제도 본고에서 간접으로 논의되었다. 본고는 국립중산대학 관련 문서와 일제첩보자료와 당사자들의 회고록에 의거하여 먼저 1930년대 국립중산대학 조선유학생들을 연도순으로 열거하고 이어서 숨겨진 본명들을 논리적으로 실증한 다음, 나중에 그들의 활동단체들을 요약하여 포스터 식으로 소개만 하였다. 졸렬하고 성숙되지 못한 글을 길게 늘어놓기보다 고견을 끌어내는 게 오히려 바람직한 일로 자각하였기 때문이다. One of the feature of Chosun people’s Independence movement in colonization era is to focus on two factors like spread of armed fight and cultural enhancement. These are very proud heritage handed down from our ancestors, and it is seldom to be found in other ethnic group of people. The other feature is the fact that where there are Korean people, there also must be anti‐Japan parties in which they issued periodical publications. This is not found in other nations. That’s why I searched out the very Korean oversea student of Joongsan National University in this paper. Korean oversea students of Joongsan University in 1930s came out of present document are found at most 50. It’s because they were almost auditors who did not registered as official student. And also many of them were accepted by institutional recommendation or celebrities, so are few admitted to the University by individual challenge. Overall status of Korean oversea students in contemporary age were actionists of independence movement and so have they anti‐Japan protest career and called as “turbulent Korean” in Japanese settlement epoch. They are almost either dropped out within one or two years or removed from high schools. But according to a entrance regulation of National University of Joongsan, every students must have high school graduation and/or above, so required they of institutional recommendation or celebrities’ reference letter. Korean oversea students did not accompanied their graduation certificate from high school for the uncertain future and sought to get involve in independence movement, so used they to call alias for security reason. On account of this, we are hard to connect their behaviors before and after the entrance/graduation. Accordingly, this paper has focused on to verify status of Korean oversea students and sought to pursue their aftermath for post‐graduation era. Especially the beginning part of 1930s was the most toughest time of struggles among China, Japan, and Korea. So dealt I indirectly about some expression & function of Korean oversea students in the midst of time of upheaval. This paper, based on some related document of National University of Joongsan, secret information of Japan, and memoirs of protagonists, has enumerated their pseudo‐names in periodical order of years, on which proved real names of them, and finally made a brief explanation about their party’s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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