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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독립운동사 서술현황과 개선방향

          오영섭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5

          현재 한국 사회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고교용 『한국사』교과서들이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현행의 『한국사』교과서들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관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을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육성한다고 하는 국사교육 본연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미흡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연구는 현행 6종의 『한국사』교과서의 일제시기 독립운동사 서술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현행 『한국사』교과서들의 한국독립운동사 서술경향은 대략 네 가지로 정리된다. 즉, 『한국사』교과서들은 1) 무장독립전쟁과 의열투쟁을 중시하고, 2) 민족유일당운동(민족통일전선)과 한중연대활동(한중연합전선)을 주목하고, 3) 다소간 반미친소적인 시각으로 국제적 사건이나 인물을 인식하고, 4) 약소국이 중시해야 하는 외교독립운동을 경시하는 서술경향을 보였다. 이로 인해 무장독립전쟁이나 민족통합(+국공합작)노선에 대한 서술분량과 외교독립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에 대한 서술분량에 편차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한국사』교과서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 서술에서 온건론보다는 급진론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온건론에 속하는 실력양성운동이나 외교독립운동에 대한 서술이 충분치 못한 반면, 그 대척관계에 있는 무장독립전쟁이나 의열투쟁에 대한 서술은 비교적 자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국실정과 국제정세에 비추어 전자나 후자나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동등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사』교과서를 개정할 때에 무장독립전쟁이나 의열투쟁에 대한 서술분량과 실력양성운동과 외교독립운동에 대한 서술분량을 균등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교과서들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온건론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승만의 활동을 거의 기술하지 않았다. 즉, 『한국사』교과서들은 친미적 국제관에 기초한 기독교민족주의를 한국에 이식하려 하고, 좌우합작과 민공협동을 배격하는 반공주의를 이념적 기초로 삼고,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의열투쟁을 반대하고 실력양성운동과 외교독립운동을 지지한 이승만의 활동을 다루지 않았다. 이는 이승만보다 역사적 중요도가 낮은 인물에 대한 독사진이 들어간 반면, 이승만 사진이 꼭 들어가야 하는 부분에서조차 이승만 사진이 빠진 것으로도 증명된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사』교과서를 개정할 때에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한 서술에서도 균형점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현행 『한국사』교과서들은 사실 서술과 해석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사』교과서의 독립운동사 서술에는 자잘한 사실에 대한 오류는 물론, 부정확ㆍ불충분한 해석이 이따금 보인다. 이는 집필자들이 특정 시대의 특정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전문학자들로서 일제시기사 전공자가 아니라는 문제점, 그리고 검인정을 받기 위해 출판사가 제출한 교과서를 검토하는 연구위원과 검정위원들이 방대한 분량의 내용을 제대로 검토하기에 역부족이었다는 문제점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앞으로 『한국사』교과서의 개정판을 낼 때에는 사실을 정확히 기술하고 해석하는 한편, 서술 내용을 엄밀히 검토하여 사실이나 해석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국사 교과서는 겉으로는 교육부의 집필지침에 따라 집필하게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상당 부분 집필자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집필되고 있다. 교육부는 국사 교과서의 각 장의 명칭과 각 절에 들어갈 중요 내용이 담긴 집필지침을 반드시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준수한 교과서만을 교육현장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사 교과서의 집필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이뤄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각 절의 체제 구성과 그 내용 및 분량 안배가 전적으로 집필자들의 자유재량에 달려 있기 때문에 집필자의 노력 여하게 따라 교과서의 내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사 교과서 집필자들은 교육부의 집필지침을 넘어서는 재량과 노력을 발휘하여 국사 교과서의 참신성과 독창성 및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There are different opinions on Korean History textbook for high school student in six types. The Korean history textbooks show that their historical perception is nationalistic and popular, it belittles on the system of liberal democracy and the market economy and it has a perception against USA and for Soviet Union in international issues. Therefore, it needs to value liberal democracy of ROK in writing Korean History. In describing the history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n History textbook for high school student, it is easy to find a number of errors in quoting and interpreting truthful facts. I think that it is because the history writers research only on the particular subject. Further, it might be because the scholars who examine the contents of textbook are not professional in the part of Japanese occupation history. Thus, they need to be more cautious in writing Korean History textbook in the future. In a sense of contents and system of Korean History textbooks, it is problematic these are so similar. After the Ministry of Education usually gives important points, only the textbooks which fit on the standard could be allowed to use. However, I think it depends on the writers in writing contents of detail. Therefore, the writers can change contents of history textbook according to their opinion. Korean History textbooks focus more on radical ideas rather than moderate ideas. While Korean History textbooks belittle upon training capability movement or a diplomatic independence movement, the textbooks considerate more on an armament independence war. Particularly, if it is composedly examined about the Korean situation and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t is possible that both the former and the latter are equal for historical value. Korean History textbooks disregard and devaluate Syngman Rhee’s activities who is the most representative moderate among the independence movement activists. The textbooks don’t deal with the Syngman Rhee’s activities which attached importance to Christianity nationalism and anticommunism and developed a diplomatic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United State of America. Thus, it needs to reduce the part of an armament independence war and extend the part of moderate’s activities like Syngman Rhee and Ahn Chang-ho in writing Korean History textbook in the future. In addition, it is to correct the point that there is no picture of Syngman Rhee among a number of historical figures in Korean History textbook.

        • KCI등재

          만주지역 유찬희의 민족운동

          박영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7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93

          유찬희는 1900년에서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추진했던 민족운동의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는 인물이다. 그는 1883년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오경을 배웠고 17살이 되는 해에는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사상을 접한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신사상을 수용한 유찬희는 유연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고 초창기에는 의병활동에 투신한다. 하지만 의병투쟁은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인해 한계에 부딪히고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유찬희는 서북학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유찬희는 서북학회를 통해 이동휘를 비롯한 기독교민족지도자와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유찬희는 그의 민족운동 기저를 형성하는 기독교민족주의를 수용할 수 있었고 강원도 이천군 교회운영에서 나아가 가솔들을 이끌고 북간도 국자가로 이주한다. 1918년부터 유찬희는 대표적인 북간도 한인지도자로 부상한다. 특히 그는 무악흥업회사를 경영하며 실업가로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다. 유찬희는 안정적인 자금력을 통해 파리강화회담 대표파견 기부금 모연, 민족학교 설립 자금 보관 등에서 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로써 유찬희는 한인사회에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여러 민족단체의 재무부문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와 한인상무총회 활동 이후 유찬희는 북간도지역 민족운동단체 대한국민회에서 총기구입위원으로 활동한다. 이어 참모장으로 영전된 그는 총기뿐 아니라 군량, 부대이동 등 구춘선, 홍범도, 안무 등과 함께 독립군의 제반 업무를 살핀다. 봉오동전투 이후 유찬희는 액목현에 은거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지역 독립군의 동향을 대한국민회에 보고하고 김일을 비롯한 의기청년들과 교류하며 일본군의 움직임을 내사한다. 하지만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대한국민회가 추진하던 무장투쟁이 어려워지자 유찬희는 공산주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그가 공산주의자로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라 판단된다. 오히려 그는 고려공산당 참사로 활동하지만 기존의 목회활동에 더 치중했고 남감리교 선교단의 일원이 되어 활약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찬희의 고려공산당 가입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이후 무장투쟁이 어려워진 현실 속에서 실천적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유찬희는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ㆍ1운동 제7주기기념행사를 추진하여 1,500여 명의 재러한인들에게 항일사상을 일깨운다. 의병투쟁, 애국계몽활동, 기독교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활동, 대한국민회를 통한 무장투쟁, 고려공산당 활동, 동성노농공사에서의 농민운동까지 유찬희는 시기와 상황에 맞춰 독립운동의 방략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자신의 실업가적인 특질을 토대로 총무, 재무 등 민족운동단체의 실질적인 직위에서 활동하였다. 그렇기에 유찬희의 민족운동과 향배를 연구하는 것은 구한말에서부터 1920년대까지 국내와 북간도, 러시아일대에서 시기적으로 변화하는 독립운동의 흐름을 추적해볼 수 있는 하나의 유형인 동시에 실업가적 특질을 갖는 민족운동가에 대한 고찰이 될 것이다 Yoo Chan-hee is a nationalist activist born in Geumcheon, Hwanghae Province in 1883. His ideological foundation was rooted in neo- Confucianism education of his childhood school seodang and modern education received in Seoul’s PaichaiHakdang. In particular, Yoo Chan-hee embraced Christianity at the Paichai Hakdang, which served as bedrock of his national movement. In 1907, Yoo Chan-hee left the Paichai Hakdang to join independent patriot Cha Dosun’s righteous army. Yoo physically fought against the Japanese military police in Goksan by carrying out arson attacks with his cousin Yoo Myung-hee. Subsequently, Yoo Chan-hee joined the North-West Society to engage in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Yoo Chan-hee settled in Yanji, China and established the Taekwang School, which means light of the national Korean flag Taegeukgi. As a principal, he supervised school operations and sought to raise awareness of national consciousness by educating the Koreans living in Yanji.  In addition to educational movement, Yoo Chan-hee actively promoted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autonomy group Ganminhoe in the North Gando region, establishing under alias Doseong. As the leading Korean social organization in North Gando, Ganminhoe conducted census research and established private schoolfor education. Yoo Chan-hee served as the secretary of the Ganminhoe and orchestrated major operations, influencing both the Chinese and Korean societies. He formed a large-scale mutual financing association by rallying enlightenment activist Jeong Jae-myung and other key figures of Ganminhoe. The financing association was operated by issuing lottery tickets, and its profits were used to operate national education schools. In addition, Yoo Chan-hee expanded informal youth gathering to conduct practical operations of Ganminhoe. In 1916, Yoo Chan-hee achieved great economic success through the Muhak Industries. As Yoo Chan-hee became one of the prominent store owners in Yanji, he assumed substantive national movements through considerable capital. In 1919, the fir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March 1st SamIl movement, took place in Longjing Village, Machuria. Yoo Chan-hee made speeches to promote national consciousness, alongside Christian national leaders in the North Gando region, such as Choi Il, Kim Young-hak. Yoo’s son Yoo Ki-seok joined the Chungreoldan to print national flag Taegeuki and flyers for independent protests. After the March 13th independence movement, Yoo Chan-hee moved to Vladivostok and subsequently joined the Korean General Assembly Sangmuchonghoe and the Korean National Council Daehankukminhoe. In particular at the General Assembly, he served as the vice-chairman, which indicates that the Korean-Russian community recognized Yoo’s financial competency. Upon returning to Gando, Yoo Chan-hee joined the Korean National Council and became a committee member in charge of purchasing firearm. The Korean National Council represented the North Gando province and was a national movement group that supported independence war. As Yoo was a firearms purchasing committee member, he was responsible for arming the troop that was under the auspice of the Council.  Furthermore, Yoo Chan-hee assumed the chief of staff role, serving alongside Hong Beom-do, ChoiJin-dong to lead the army and victory of Bong-o-dong. After the battles of Bong-o-dong and the invasion of Cheongsan-ri, Japanese imperialists sent large-scale troops to Gando to retaliate. Yoo Chan-hee, who became the head of financial affairs of the National Council, received An Jung-geun who was dispatched from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thereby serving as a communication link between the Council and the government. Additionally, Yoo contacted Meng Boo-duk who was attacking the independent army to allow for a month of troop movement, minimizing the damage to the army. In December 1921, the leaders of the Korean National Council, such as Yoo Chan-hee and Kim Ju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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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의 3ㆍ1운동 서술의 체계와 내용

          조규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9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3ㆍ1운동 서술의 체계와 내용 조규태 이 글은 2011년부터 사용되는 고등학교 한국사의 3ㆍ1운동에 대한 서술의 체계와 내용을 검토하여 분석한 글이다. 구체적으로는 3ㆍ1운동의 배경에 대한 서술 체계와 내용, 3ㆍ1운동의 전개와 의의ㆍ영향에 대한 서술 체계와 내용, 3ㆍ1운동 관련 인물ㆍ사진ㆍ도표ㆍ보론의 내용을 검토한 후, 각각의 특징과 문제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2009 개정 교육과정(2010 부분개정)>에 따라서 제작된 6종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3ㆍ1운동 관련 부분을 제Ⅵ 대단원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에서 다루고 있다. 이 대단원 아래 중단원의 제목은 대체로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라고 하고 있다. 소단원의 제목은 교과서별로 상이하나, 대체로 3ㆍ1운동의 배경, 3ㆍ1운동의 전개, 3ㆍ1운동의 의의와 영향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3ㆍ1운동의 근본적 원인으로는 먼저 일제의 무단 통치, 즉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들고 있다. 그리고 1910년대 국내의 비밀결사활동과 교육ㆍ문화 운동,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운동과 이를 통한 교육ㆍ문화 운동을 또 다른 배경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제적 배경에 대한 설명에서는, 레닌의 피압박 민족 해방 지원 천명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주목하고 있다. 미래엔 컬처그룹, 법문사, 삼화출판사, 지학사 교과서는 레닌의 피압박 민족 해방 천명 사실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보다 강조하는 것 같다. 레닌의 식민지의 민족해방 지원 선언을 주요한 국제적 배경으로 거론하지 않은 고등학교 한국사는 천재교육 교과서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국외 독립운동 세력의 활동으로 인한 영향으로는 3ㆍ1운동 직전 신한청년당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김규식 파견, 일본 유학생의 2ㆍ8독립선언, 만주 길림성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선우혁의 이승훈과의 접촉, 여운형의 연해주 러시아한족대회 참석과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참석 소식 전파 등, 국외 독립운동세력의 움직임을 3ㆍ1운동 발생의 배경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3ㆍ1운동의 또 다른 근본적 배경은 ‘문화 민족으로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 자체에 대한 반감’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레닌의 약소민족 해방 지원 천명’을 3ㆍ1운동 발생의 국제적 배경으로 들고 있으나, 민족대표 33인의 심문조서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으므로, 조금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또, 미래엔 컬처그룹, 법문사, 삼화출판사, 천재교육의 네 출판사의 교과서는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가 3ㆍ1운동의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서술하였으나,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 시기를 3ㆍ1운동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으므로, 이것을 3ㆍ1운동의 배경으로 서술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겠다. 3ㆍ1운동의 원인과 배경의 서술에 있어, 역할과 비중 등을 고려하여 순서를 정하지 않은 곳이 약간 보인다. 예컨대 법문사의 교과서에는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지도자들”, 미래엔 컬처그룹의 교과서에는 “손병희, 한용운, 이승훈 등 민족 대표”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3ㆍ1운동 시의 역할과 비중을 고려한다면, 이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지도자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대표”의 순으로 배열해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한국사의 3ㆍ1운동 단원의 전개 부분에서는 독립선언서의 발표, 서울 및 주요 도시 시위, 농촌으로의 시위 확산, 비폭력시위에서 무력시위로의 변화,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국외로의 시위 확산 등의 사항이 서술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독립선언식의 추진 주체와 민족 대표의 역할 등에 있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지학사의 교과서에서는 민족대표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점은 거론하지 않고, 서울의 탑골 공원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점만을 서술하였다. 또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천재교육의 교과서는 일제가 시위 초기부터 발포 명령을 내려 무자비한 탄압을 한 것으로, 지학사ㆍ법문사ㆍ삼화출판사ㆍ미래엔 컬처그룹의 교과서는 시위가 농촌지역으로 확산되자 일제가 무자비한 탄압을 실시한 것으로, 비상교육의 교과서는 농민 등의 비폭력 시위에 일제가 헌병 경찰, 군대 등을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주장이 다르므로, 선후관계를 다시 파악하여 내용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3ㆍ1운동을 전개한 계층을 서술할 경우에 삼화출판사의 교과서는 “처음에는 학생과 종교인들이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점차 노동자와 농민들이 주축이 되었고”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참여자 수를 볼 때 ‘농민과 노동자들’로 순서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3ㆍ1운동에 관련된 인명의 거론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교과서는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유관순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지학사의 교과서에서는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3ㆍ1운동의 주역은 소개하지 않고, 김규식과 2ㆍ8독립선언 참가자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감이 없지 않다. 화보와 캡션 설명에 있어서도 오류가 간혹 보인다. 불탄 제암리교회의 사진은 비상교육과 천재교육의 사진이 다르다. 그리고 지학사의 <종로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여성들>의 사진은 주위의 인물과 행진하는 여성들의 시선이 다른 점, 여성들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 밝은 점 등으로 볼 때 3ㆍ1운동 당시의 사진인지 의문이 든다. 전거를 확인하여 정확한 사진을 실어야 할 것이다. 법문사 교과서의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임시정부 대표단과 한국 공보국 직원들(1919.3)>이란 사진과 천재교육 교과서의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이란 사진은 동일한 사진이나 캡션은 다르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것은 1919년 4월이므로 법문사 교과서의 캡션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3ㆍ1 Movement written in textbooks of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Cho, Kyu-tae This research paper is on the 3ㆍ1 Movement written in textbooks of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used from 2011. Concretely, I studied the description forms and contents about backgrounds of 3ㆍ1 Movement written in textbooks of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And I examined thoroughly the description forms and contents about development, influence of 3ㆍ1 Movement. Finally I reviewed persons, photographs, diagrams, and supplementary explanations about 3ㆍ1 Movement. In these textbooks, Japanese political suppression and economical exploitation are narrated as fundamental backgrounds of 3ㆍ1 Movement. As external causes, Wilson’s the principle of self-determination of peoples and Lenin’s clarification for supporting the people of a small and weak power are described. In these Korean History of High School, Lenin’s clarification for this point is especially emphasized. In the section of background of 3ㆍ1 Movement, antagonism to Japanese rule itself should be narrated as a fundamental background of 3ㆍ1 Movement. And the announcement of the Daehan Independence Declaration should not be described as a background of 3ㆍ1 Movement. Because a theory has insisted that the announcement of the Daehan Independence Declaration did after 3ㆍ1 Movement. It is reasonable that the way of describing to ignore the role and importance in 3ㆍ1 Movement like “Cheondogyo, Buddhism, Christianity”, or “Son Byeong Hee, Han Yong Woon, Lee Seung Hoon” is changed to the way of describing to reflect the role and importance in 3ㆍ1 Movement like “Cheondogyo, Christianity, Buddhism”, or “Son Byeong Hee, Lee Seung Hoon, Han Yong Woon”. In the section of development of 3ㆍ1 Movement, announcement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demonstration in Seoul and great cities, demonstration in rural cities, Japanese cruel repression, and 3ㆍ1 Movement in foreign countries is described. Most of these is appropriate. But a few of these are not reasonable. Explanations on the reason of armed crackdown are different each other. We have to endeavor to find reasonable explanation of this. Jihaksa textbook emphasize students’ role in 3ㆍ1 Movement, without mentioning religion leaders. But this is different from historical fact. Therefore Jihaksa textbook should be amended to the way to emphasize religion leaders’ role. And Samhwa Press textbook should be changed to the way to put stress on peasant than laborer. Besides, a few pictures should be replaced, because these are not appropriate. And inconsistency of Bopmoonsa textbooks’s caption with it’s picture should be amended rightly.

        • KCI등재

          미군정기 국정 공민교과서의 성격과 집필진의 구성

          김동선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8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94

          미군정의 교육정책은 한마디로 ‘미국식 민주교육제도’를 남한에 실시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 의도는 남한을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bulwark)으로 만들고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시킬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인에게 장기적인 정치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미군정은 한국교육의 청사진을 마련하기 위하여 朝鮮敎育審議會(위원 100여명)를 설치하였다. 본 위원회에서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한국교육의 기본이념으로 교육법에 명시하였다. 이 이념은 교육현장에서 일제 잔재의 청산, 평화와 질서 유지, 새나라 민주시민 육성으로 구체화되어 교과편제 및 시간배당과 교수요목에 나타났다. 이러한 미군정의 교육정책의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과목이 바로 사회생활과이며, 그중에서도 公民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정은 공민교과서에서 민족주의를 배제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반공주의를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의도와 달리, 공민교과서의 내용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영국식 의원내각제 옹호, 무조건적인 자본주의 배격, 국가주의적 민족주의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국정공민교과서 편찬에 깊은 영향을 끼친 편수관과 편찬위원들 때문이었다. 공민교과서 편수책임자인 최재희는 최현배에 의해 추천되었다. 그는 자유주의를 강조하고, 공산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미군정과 인식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그는 화랑도 및 민족을 우선시하고, 당시 풍미하던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관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미군정과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국정공민교과서의 편찬위원들은 미군정 학무국장 고문이었던 김성수와 관련이 있다. 이들은 보성전문의 교직원이었다. 또한 정열모, 현상윤, 장덕수는 모두 早稻田大學에서 수학하여 학맥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편찬위원이 된 것은 김성수와의 인연이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군정은 조선어학회에 국어교과서와 공민교과서의 편찬을 의뢰하였다. 심지어 당시 편수국장도 조선어학회의 주요인물인 최현배였다. 편찬위원들도 대체로 조선어학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었던 대종교와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안호상과 정열모, 백낙준 같은 편찬위원들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중심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또한 개인보다도 민족과 국가의 안위를 우선시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뛰어난 인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공민교과서는 미군정의 의도대로 편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정이 교과서 출판과 편찬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교육 이념에 적합한 교과서 제도는 원칙적으로 자유발행제였다. 게다가 유능한 교과서 저술 인력은 트럭운전사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미군정에서 일하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군정은 필요한 만큼의 직원을 확보할 수 없었고, 교과서 편찬과 배부도 심각하게 지연되었다. 이런 현실적인 원인들도 미군정이 교과서 편찬기준을 엄격하게 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기 공민교과서는 편수관과 편찬위원 그리고 조선어학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공민교과서를 통해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정치를 소개하였다. 아울러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개인의 행복과 복리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공민’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The educational policy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in short, to carry out an “American-style democratic education system” in South Korea. The purpose of this policy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to make South Korea a bulwark against communism, and to lay the foundation for incorporating South Korea into the capitalist world market. The United States recognized that Koreans needed long-term political education. In this regard, the U.S. Military Government established the Korean Education Council (approximately 100 members) to prepare a blueprint for Korean education. In this committee, the philosophy of ' Hongik-Ingan’' was specified in the Education Act as the basic philosophy for ​​Korean education. This philosophy was reflected in the curriculum composition, the time allocation and syllabus, pursuing the settlement of the remnants of the Japanese imperialism, the maintenance of peace and order, and the cultivation of democratic citizens. One of the subjects that can best reveal the purpose of this education policy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the social sciences subject, particularly the civic education. The U.S. Military Government tried to emphasize “American democracy,” capitalism and anti-communism in the civic textbooks, without cultivating nationalism. However, unlike the intention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 content of the civic textbooks emphasized the support of the British parliamentary system, unconditional rejection of capitalism, and statism- based nationalism under the philosophy of Hongik-Ingan. This was due to the compilation editor and Compilation Board members who had a profound influence on the compilation of government-designated civic textbooks. Jae-Hee Choi, the head on the compilation Board of the civic textbooks, was recommended by Hyun-Bae Choi. Jae-Hee Choi emphasized liberalism and criticized communism, sharing common political views with the U.S. Military Government. However, Choi saw differently from the U.S. Military Government with regards to the concept of Hwangryangdo, which prioritized the people first, and his opposition to the pragmatic educational philosophy of Dewey. The Compilation Board of the government-designated civic textbooks had much to do with Sung-Soo Kim, who was the academics adviser to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y were staff members of Bosung College. In addition, Yeol-Mo Jeong, Sang-Yoon Hyun, and Duk-Su Jang had all studied at Waseda University. Therefore, it seems that their relationship with Sung-Soo Kim helped them to be on the Compilation Board. On the other hand, the U.S. Military Government commissioned the compilation of Korean textbooks and civic textbooks to Joseoneohakhoe (The Korean Language Society). Even at that time, the head of Chief Compilation Editor was Hyun-Bae Choi, a major figure in Joseoneohakhoe. The Compilation Board was also deeply involved with Joseoneohakhoe. Joseoneohakhoe was associated with Daejonggyo, which had a strong nationalistic color. Therefore, the Compilation Board including Ho-Sang Ahn, Yeol-Mo Jeong, and Nak-Jun Baek emphasized the excellence of Korea and ethnic-centered education. In addition, the state and national security was given priority over the individual. As such, the civic textbooks were not compiled according to the intention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Nonetheless, publishing was made possible because the U.S. military took a flexible attitude toward textbook publication and compilation. The textbook system suitable for the educational philosophy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in principle, a self-regulated publication system. Moreover, competent textbook writers were not willing to work in the U.S. Military Government, who received less wages than truck drivers. As a result, the U.S. Military Government was unable to secure the necessary staff, and textbook compilation and distribution was seriously delayed. These also made it impossible for the U.S. military to strictly set textbook compilation standards.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civic textbooks during the U.S. Military Government period had to be influenced by compilation editors, the Compilation Board, and Joseoneohakhoe. They introduced democratic politics based on the parliamentary system through the civic textbooks. In addition, they emphasized statism and nationalism, and sought to cultivate “public citizens” for state and nation rather than individual happiness and wel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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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만주지역 독립운동가 金昌煥의 민족운동

          박환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2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3

          김창환은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출발하여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신민회의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하여 만주로 망명한 후 끊임없이 만주벌판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무장투쟁론자이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 정의부, 생육사, 한국독립군 등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그는 신흥무관학교에서 윤기섭 등과 함께 가장 어려운 시절 10년 가까이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며 독립군 양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많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이후 서로군정서와 대한통의부의 총사령으로서 192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 투쟁을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정의부 총사령, 한국독립군의 부사령 등 독립군 지도자로서 큰 기여를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지청천과 함께 한국독립군으로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더 이상 만주에 머물 수 없게 되자 중국본토로 이동하여 신한독립당, 민족혁명당, 조선혁명당 등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하다 순국하였다. 김창환은 대한제국군인에서 출발하여 참 군인으로서 만주와 중국본토에서 군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였다. 그가 순국한 후 1935년 11월에 중국 항주에서 결성된 민족주의진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정당인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 12호(1937년 3월 1일 자)에서는 그의 죽음을 추도하여 「추당 김창환 선생 별세」라는 글을 싣고 있다. 결국 김창환은 대한제국의 군인출신으로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항일무장투쟁을 끝가지 전개한 참 군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Kim, Chang-Hwan was a Korean soldier, who represented his country on the frontlines against Japanese forces at their colony in Manchu, he did his along with his other objective in Manchu, which was to construct a base for a national independence army abroa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He took charge of important roles in representative national independence organizations in Manchu which were Seorogunjeongseo, Daehantonguibu, Jeonguibu, Saengyuksa, and Korea Independence army organization, ect. As well as working diligently training and organizing armed forces for national independence as an instructor at the Shinheung Military Officer School. He especially put in considerable work and effort to cultivate the armies for national independence at the Shinheung Military Officer School with Yoon, Kiseub and some other people for almost 10 years. It was due to these efforts that he earned the respect and admiration of the people who graduated from the school. He is estimated to have been the prime mover in th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in Manchu in 1920s, and as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Seogunjeongseo and the Daehantonguibu later. Whilst through his work as a deputy commander of the Jeonguibu, and the Korea Independence Army, he made a large contribution towards the success of pro Korean liberation organizations.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in 1931, he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with Ji, Chungchun in Manchu. However he was not able to stay for a long period in Manchu, so he moved to the Mainland of China to contribute in the resistance against the Japanese. Alas it was there that he died in combat while fighting for Korean independence; however his efforts were not in vain, as his work with organizations such as the Shinhan Independence Party, the Minzok Revolution Party, the Joseon Revolution Party etc, played a part in the eventual liberation of Korea. Kim, Changhwan performed his duty for his country as a soldier in Manchu and in the Mainland China from the Daehan Empire. After his death for the country, "HANMIN" 12(March 1. 1937) which was an organ of the Hanmin Party was organized in Hangju, China in Nov. 1935, and this was a representative independence movement party against the Japanese administration. They ran an article under the headline “(Chudang) Kim, Changhwan passed away” which mourned his sacrifice for his country. Kim, Changhwan took refuge in Manchu as a former military man of the Deahan Empire and cultivated many armies for national independence from Japan. From his efforts and sacrifice we can say he was the embodiment of a real soldier and patriot in the last fight against the Imperial Japanese admini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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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태의 한국 근대사 서술

          김수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103

          There seems to be little interest in the study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that Son Jin-tae had profound interest in. For this reason, the description of the impact of the March 1st Movement on changes in Korean society and culture, or his interests in attempting to systematize the flow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through the Korean historical introductions are not being organized properly. It seems that Son Jin-Tae became interested in narrating Korean modern history seems due to the March 1st Movement. The March 1st Movement has brought a huge change of direction both in his life and study. His participation in the March 1st Movement in Busan which resulted in his imprisonment, later led him to choose the path of historian while studying in Japan. Rather than following the conventional understanding of the Korean history in a sentimental way, he tried to narrate the Korean history in a new way. Therefore, he did not treat the history of independence movement as the center, and tried to have a new perspective on Korean social and cultural history. At first, Son Jin-tae's description of the Korean modern history covered the late 1920s after the Sino-Japanese War. And after the liberation, expanded the scope to include the period from the time when Joseon negotiated with the West to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government. At this time, he tried to systematically understand the flow of Korean modern history with an independent periodization, covering various parts such as politics, social culture, thought, and diplomacy. In this way, he focused heavily on the growth and activity of the people, a newly emerged human group, rather than the yangban, the dominant status of the Joseon Dynasty while describing the flow of Korean modern history. From this point of view, the historical position of Son Jin-tae’s description of Korean modern history has a profound meaning in the research history. It is noticeable due to the fact that this is directly linked to the characteristics of Son Jin-tae’s history, so called the neo-nationalist historicism. 현재 손진태가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던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때문에 3‧1운동이 한국의 사회나 문화의 변화에 미친 영향에 대한 서술이라든지, 한국사 개설서를 통해서 한국 근대사와 현대사의 흐름을 새롭게 체계화하려고 했던 그의 관심은 제대로 정리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손진태가 한국 근대사 서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3‧1운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을 기점으로 그의 삶과 학문에 커다란 방향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기까지 하였던 그는 이후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역사가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는 기존의 감상주의적 한국사 이해가 아니라, 새로운 방법으로 한국사를 서술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독립운동사가 중심이 되는 역사가 아니라, 한국의 사회사 및 문화사에 새로운 이해를 가지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손진태의 한국 근대사 서술은 처음에는 청일전쟁 이후 1920대 후반의 시기까지를, 해방 이후에는 그 범위를 확대시켜서 조선이 서양과 교섭한 시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의 내용까지를 서술하였다. 이때 그는 정치, 사회 문화, 사상, 외교 등의 여러 부분을 망라하면서, 독자적인 시대구분과 함께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한국근대사의 흐름을 서술할 때 크게 중점을 둔 인간집단은 조선시대까지를 주도했던 지배신분이었던 양반 보다는 새롭게 등장한 인간집단인 민중의 성장과 활동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근대사연구의 연구사에서 손진태의 한국근대사 서술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위치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사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신민족주의사학이 보여준 특징과도 그대로 연결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게 해주고 있어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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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길 속에서 일관되게 상대를 아우르려 한 令洲 金尙德

          신주백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2

          United Front Party Movement(民族唯一黨結成運動) in Manchuria. He returned to Nanjingin 1932 and participated in the unification movement by taking part in the founding of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民族革命黨). He was active in this organization until the liberation of Korea, and also in the 1940s he served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the Provisional Assembly(臨時議政院). Even as the conflict between the left and right intensified over the issue of Korean trusteeship in 1946, after he had returned to Korea as a member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s primary camp, he avoided being swept into the factional maelstrom and worked without siding with any one particular right-wing group. In the middle of the turmoil, he followed Kim Gyu-sik, the center-right leader. Kim Sang-deok showed a consistent pattern of behavior that placed the nation first and attempted to overcome ideological differences. Even after the liberation, he shunned political faction attacks on opposition groups and instead immersed himself in the left-right cooperation movement and strived to establish the proper foundations of a new nation state by bringing pro-Japanese, anti-national collaborators to justice. He pushed to bring all the forces together to realize the epochal value of his time. Kim Sang-deok’s life can be called a continuation of choices within the boundary of pro-Japanese collaboration and socialism. He was not a socialist. Among the ‘rightist figures of the national movement(民族運動 右派)’, he was clearly a ‘socialistic nationalist(社會主義的 民族主義者)’ with a very progressive tinge. But with him, there was no explosive and strong emotional behavior commonly found in figures participating in the national movement under extreme hardship or intense conflict with other people and organizations holding different views and positions. Hence he engaged with people from a very wide political spectrum and maintained a genial relationship with others who had different views. He was a man “soft outside and yet firm inside(外柔內剛).” 김상덕은 2ㆍ8독립선언의 주역이자 親日反民族行爲調査特別委員會의 위원장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이 제대로 정리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김상덕의 행적을 정리하면, 그는 민족을 우위에 두고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일관된 행동양식을 보여주었다. 광복후에도 특정한 정파에서 반대파를 공격하는데 나서지도 않은 채, 좌우합작운동에 뛰어들었고,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여 새로운 민족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노력하였다. 그는 당대의 시대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역량을 모으려는 활동에 매진하였다. 김상덕의 삶은 친일과 사회주의라는 경계선 내에서 선택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민족운동 우파’ 가운데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색채를 품었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고난 속에서 민족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폭발적이고 격정적인 행동이나, 생각과 입장이 다른 사람ㆍ조직과의 심한 갈등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상대한 사람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었으면서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였다. 그는 外柔內剛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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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昌植의 在中獨立運動과 민족통일전선 추구

          이한나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6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86

          이 논문은 1910년에서 1930년에 이르는 시기에 최창식(1892~1957)의 행적을 바탕으로 국내와 상해지역의 민족주의활동과 사회주의활동 과정을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는 1911년에 경성에서 김좌진과 함께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관여한 것을 시작으로 1912년부터는 오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3ㆍ1운동 당시에는 국내대표단으로 남경ㆍ상해ㆍ북경에 파견되어 독립운동가들과 중국혁명당원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도 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며, 국무원비서장ㆍ의정원의장ㆍ국무원내무장 등을 역임할 만큼 임정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정 활동을 하면서 그는 1920년 5월 상해 한인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이후 이동휘계열과 대립하면서 상해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원이 되었다. 1921년 6월부터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의 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사회주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나갔다. 이뿐 아니라,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떠나면서 임시정부 내의 모든 사회주의세력이 탈퇴했을 때에도 최창식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계열의 사회주의자로서 임정에 남아 끝까지 민족통일전선을 위해 활동했다. 그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은 크게 6ㆍ10만세운동과 독립운동촉진회의 설립, 홍진 내각의 결성,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 활동으로 나누어진다. 그는 임시정부 중심의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중점을 두었는데, 임시정부를 개조하여 임시정부 안에서 통일전선운동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해체 이후, 최창식은 三一印刷所를 개인적으로 인수하여 생계를 유지를 했으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세력 모두의 인쇄물 간행을 맡음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위한 노력은 계속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 선전인쇄물을 압수당하면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중역의 판결을 받고 1930년 4월 상해에서 국내로 송환되었다. 그는 임시정부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주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한 유일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최창식은 1920년대 후반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열된 독립운동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말해서 독립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독립전선을 통일해야 함을 주장했고, 독립전선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창식은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끊임없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통합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The thesis presents the nationalist activities and socialist activities conducted in Shanghai and Korea, based on the deeds of Choi Chang-Sik (1892~1957),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ctivist, who was active in 1910 to 1930. He initiated his involvement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by participating in raising military fund for establishment of independence movement base in West Jiandao, with Kim Jwa-Jin in 1911. He taught history at Oseong School from 1912 to inspire students with national consciousness. During the time of 3ㆍ1 movement, he was dispatched to the areas of Nanjing, Shanghai, and Beijing as a member of national delegation and conducted promotion activities to the Chinese Revolution Party members, with his colleague independence movement activists. He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from its establishment, serving as State Council Chief Secretary, Chairman of the interim National Assembly, and State Council Home Secretary. While serving for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he joined the Shanghai Korean Communist Party in May, 1920, and later became a member of Shanghai Irkutsk Group Koryo Communist Party, conflicting with Lee Dong-Hwi faction. He engaged in the socialist activities vigorously, serving as the executive director for the Shanghai Koryo Communist Young Men’s Association from June, 1921. In addition, when all the socialists withdrew from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s Lee Dong-Hwi left the provisional government, Choi Chang-Sik remained as a socialist of Irkutsk Group Koryo Communist Party faction and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of the National United Front. Choi Chang-Sik's National United Front Movement activities are comprised of 6ㆍ10 National Movement, establishing Independence movement promotion association, and Shanghai Choksenghae activities. He exerted efforts to realize the National Unified Front Movement within the framework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by improving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so that the National United Front would be built focused on the provisional government. Choi continued his efforts for the National United Front by running 3ㆍ1 printing office after the National United Front Movement ended in failure by the December Thesis of Comintern in 1928. However, his socialist propaganda pamphlets were confiscated and he was convicted and sentenced to three-year for violating the Public Peace Maintenance Law. It was April of 1930 that he was sent to Korea from Shanghai. Choi Chang-Sik is the only independence activist who was progressively engaged in socialist activities while participating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His idea was that the independence movement fronts should be unified for a success and the provisional government should take the initiative in unifying the fronts. He devoted himself in the National United Front Movement from the late 1920s in order to unite the nationalist camp and the socialist camp in the framework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a nutshell, Choi Chang-Sik himself adopted socialism as a vehicle for the national independence of Korea but he constantly pursued the unity of nationalism and soc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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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靑丘學會의 설립과 활동

          조범성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1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 No.107

          본 연구는 1930년대 청구활동의 설립과 활동을 통해 식민주의 역사학 (이하 식민사학)이 식민지 조선의 역사학계에 학문적으로 고착화되어가는 과정을 살피고자 하였다. 먼저 1920년대에 추진되고 있던 『조선사』 편찬사업의 전개 과정과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및 사학과의 설치, 그리고 동시기 활동하고 있던 식민사학 연구단체들의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청 구학회 설립 이전 시기의 상황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하여 강점 이후 역 사 연구에 필수적인 학문 제도의 권력을 이미 선점·독점하고 있던 식민사 학이 왜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체계화된 학회를 갖추게 되었고, 비로소 장기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1930년 청구학회의 설립 과정과 그 인적 구성, 운영 체계를 보 다 면밀히 분석했다. 청구학회는 1세대 일본인 식민사학 연구자인 오다 쇼고(小田省吾)의 감독과 지도하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조선 으로 건너온 젊은 2세대 엘리트 연구자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중심이 되어 설립·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 다. 또한 “극동문화 연구 및 보급”이라는 명분하에 1930년대 일제의 대륙 침략을 학술적으로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려 했음을 규명하였다. 아울 러 청구학회는 설립 당시 조선총독부 및 조선사편수회 관계자와 경성제 국대학 소속 교·강사와 출신자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이전의 학회들보다 풍부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시기 일 본의 역사학계에서는 청구학회의 설립과 취지를 환영하며 기대를 보내 왔다. 한편, 9년여 간에 걸친 청구학회의 활동 내용을 통해 식민사학이 식민 지 조선의 역사학계에 학문적으로 고착화되어가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청구학회는 『청구학총』을 연 4회 계간으로 간행하고, 정기적으로 강연 회·강습회를 개최하며, 연구자료와 저술을 출판하고, 고적답사도 추진하 는 등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였다. 특히 『청구학총』은 기존의 식민사학 연구단체에서 간행했던 것보다 체재와 내용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모습 을 보였다. 그리고 1939년 10월 제3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을 선언할 때 까지 매년 지속적으로 간행되어, 1930년대 생산된 식민사학의 연구 성과 를 축적하고 학계와 일반에 보급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렇게 청구학회를 통해 연구·보급된 식민사학의 성과는 한국근대역사학에 뿌리 깊게 남아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학계에서 끊임없이 비판과 반성의 대상으로 남게 되었다. Through the establishment and activities of the Cheong-gu Hakhoe(Cheong-gu Academic Society) in the 1930s, this study attempts to examine the process in which the history of colonialism (hereinafter referred to as colonial history) became academically entrenched in the history academia of the colonized Joseon. To begin with, the study reviews the development process of a compilation project called The History of Chosen that was promoted throughout the 1920s as well as the establishment of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and the foundation of its Department of History. Furthermore, this article seeks to examine the situation before the establishment of Cheong-gu Hakhoe by scrutinizing the trends among research groups of colonial history that were active in the 1920s. Through such attempts, this study aims to explain why it was not until the 1930s that colonial history, which had already preoccupied and monopolized the power of the academic system essential for history research, was not able to form a systematic academic society and eventually sustain in the long run. Additionally, the foundation of Cheong-gu Hakhoe in 1930, the organization’s personnel structure and operations system are thoroughly analyzed in this research. It can be concluded that under the supervision and guidance of Shogo Oda, a first-generation Japanese colonial history researcher, Cheong-gu Hakhoe was established and operated mainly by young second-generation elite researchers, namely Hidetaka Nakamura and Yasukazu Suematsu, who came to Joseon right after graduating from Tokyo Imperial University. Moreover, this study found out that Cheong-gu Hakhoe, under the pretext of ‘research and dissemination of Far Eastern culture’, provided academic support to Imperial Japan’s invasion of the continent in the 1930s. As Cheong-gu Hakhoe is comprised of officials working for Governor-General of Chosen and Chosen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as well as teachers and professors from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it can be seen that Cheong-gu Hakhoe was founded with a more diverse pool of human resources compared to previous academic associations. At that time the history academia in Japan welcomed and had high expectations of the establishment as well as the purposes of Cheong-gu Hakhoe. Meanwhile, through the activities of Cheong-gu Hakhoe during nine years, this study recognizes that colonial history was becoming academically entrenched in the history academia of the colonized Joseon. Cheong-gu Hakhoe planned various activities such as the issuance of Cheonggu Hakchong four times a year, frequent operations of lectures, publication of research materials and books, and promotion of history research. In particular, in comparison to the materials published by preexisting research groups of colonial history, Cheonggu Hakchong was far more superior in terms of format and content. Published annually until October 1939 when the 30th issue was released as the last publication, Cheong-gu Hakchong played a part in accumulating and dispersing research results of colonial history in the 1930s to both the academia and general public. The achievements of colonial history that were studied and distributed through Cheong-gu Hakhoe have remained deeply rooted in the Korean modern history and become the subject of criticism and reflection within Korean history academia even after liberalization.

        • KCI등재

          한국 보호국화와 호머 헐버트의 국제 담론 전략- 대미 언론 대응을 중심으로 -

          김지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7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93

          This paper aims to shed light on Homer B. Hulbert’s role and status in the history of Korea’s modern nationalist media movement through a renewed perspective on his media strategy activities toward the U.S. during Korea’s protectorate period. Strategic writing for local communities in the U.S. propaganda activities, public opinion strategies, and public opinion trends in the U.S. and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se factors will be considered. Concerning Hulbert’s strategic writing, this paper attempts to examine how he 1) created the representations of the local discourse (“Far East Question”) and Korea, 2) used them strategically, and 3) tried to draw the world powers’ attention by raising the problem of Korea to the level of international discourse in his interaction with foreign English-language media. Before discussing Hulbert's strategic writing, it is important to carefully observe the international media environment of Korea’s protectorate period, which formed the background of his strategic writing. This is not only because Hulbert produced reports in an organic and reciprocal relationship with foreign media, but also because he intentionally targeted foreign media while producing them. This paper also will examine the media of the U.K., which was the height of the world’s English media network in the 19th century to further understand international discourse 본 연구는 한국 보호국 시기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대미 언론 담론 전략을 새롭게 규명하였다. 헐버트는 대한제국 영자언론 편집인으로서 국제적 논의에 참여하고 한국의 주권 보전을 위한 국제 담론을 전파했다. 1905년 한국 보호국화 이후 헐버트는 고종의 특사로서 헤이그, 유럽, 미국에서 강연, 인터뷰, 기사 투고 등을 통한 한국문제 공론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보호국 시기는 헐버트의 언론 활동 무대를 급격히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상 지역에 따른 다양한 담론 전략을 요구했다. 특히 이 시기 미국 여론은 한국에게 매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 전후 ‘극동문제’를 둘러싼 열강의 대립 구도가 러시아ㆍ일본에서 미국ㆍ일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미국 여론과 지역 사회를 겨냥한 전략적 글쓰기를 통해 주권 회복을 모색했다. 본고는 미국 지역 사회를 겨냥한 여론 전략, 미국 내 여론 동향과 이를 토대로 한 전략적 글쓰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헐버트의 전략적 글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접근 방식을 취했다. 1) 영미 중심의 해외 영자언론과 어떠한 상호작용 속에서 지역 담론(‘극동문제’와 한국문제)를 만들어 냈으며, 2) 글쓰기의 전략적 의도와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3)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 사회의 관심을 유도하고자 어떻게 국제 여론을 활용했는지에 대해 밝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의 보호국화를 ‘극동문제’의 해결이라 선언했다. 그리고 한국을 자국의 영토에 흡수하는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해외 영자언론을 주도한 영국 언론도 ‘한국 보호국화=극동문제의 해결’이라는 지역 담론을 내세우며 일본을 지지했다. 이는 한국을 문제 지역에서 제외시키면서 식민지화에 가속을 붙이기 위함이었다. 반면 미국 내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샌프란시스코 일본인 문제와 일본의 만주 폐쇄 정책으로 말미암아 미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고조되었다. 미국 언론들은 일본의 팽창에 대한 위기감과 함께 황화론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들은 일본 팽창을 단순히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 ‘백인 문명국’의 이익을 해치는 ‘교활한 황인종 국가’로 묘사함으로써 극동 지역의 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면서 일본에 의해 대만, 한국, 만주를 비롯하여 필리핀과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인도까지 연쇄적 위협에 처해 있다는 세계 정치 지형을 조성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은 문호개방의 원칙이 적용되는 독립국이자 상업‧무역의 투자처로 부각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만주 독점 문제에 대한 영‧미 언론의 균열은 헐버트에게 호기로 인식되었다. 그는 한국문제의 대외 공론화를 위해 미국에 퍼져 있는 황화론(Yellow Peril)과의 접점을 모색했다. 미국의 ‘극동문제’를 활용하면 일본을 압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헐버트는 1906년 12월 『코리아 리뷰』를 정간하고 고종의 명령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인이었던 헐버트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활용하였다. 그는 미국 동부의 뉴욕(New York), 스프링필드(Springfield)와 서부의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거점으로 미국 지역사회 연결망을 통해 한국문제를 공론화했다. 헐버트는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구가 만든 ‘극동문제’를 재현하며 한국문제에 대한 열강들의 공동 보호를 유도하고자 했다. 헐버트는 일본의 만주 문호폐쇄 정책을 둘러싼 미일 간 갈등을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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