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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箕子傳承의 형성과정 연구

        오현수(Oh, Hyun-Su) 고려사학회 2016 한국사학보 Vol.- No.65

        箕子朝鮮說이 형성되기 이전의 선진시기 기자 관련 기록에 대한 정치한 분석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고는 선진시기의 문헌들과 箕子朝鮮說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전한 초기의 『회남자』・『상서대전』・『사기』의 箕子傳承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선진~전한 초기에 형성된 기자 전승은 총 열아홉 가지인데, 역사적 순서에 따른 기자 전승의 흐름은 (紂王의 失政) → 箕子賢人說→ 箕子恨歎說→ 商亡豫見說→ 箕子忠臣說→ 箕子諫言說→ 箕子奴婢說/箕子狂人說/箕子避難說/囚箕子說/箕子困窮說→ (폭정의 가속화) → (武王의 勝利) → 釋箕子說/釋箕子說-召公論→ 淨箕子之宮說→ 箕子之明夷說/箕子東來說/箕子朝鮮說→ (西周燕의 分封) → 箕族保護說→ 箕子來朝說・洪範敎授說・晉興豫見說’의 순서였다. 그러나 각각의 전승을 담고 있는 문헌은 이와 같은 흐름의 순서대로 성서된 것이 아니다. 기자 전승의 역사구조적 순서와 함께 각 전승의 형성 시기를 고려하여 전체 기자 전승의 흐름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고려한 전체 기자 전승의 흐름은 箕子忠臣說/商 亡豫見說(은말주초~춘추시대) → 箕子賢人說(은말주초~춘추시대 말) → 箕子奴婢說/晉興豫見說(춘추시대 말) → 箕子狂人說(전국시대 혹은 전국시대 말) → 箕子恨歎說/箕子諫言說/箕子避難說/箕子困窮說/囚箕子說/釋箕子說/釋箕子說-召公論/洪範敎授說(전국시대 말) → 淨箕子之宮說(전국시대 최말기~진대) → 箕族保護說(전한초) → 箕子之明夷說/箕子東來說/箕子朝鮮說/箕子來朝說(전한 무제대)의 순서가 된다. 이러한 선진~전한 초기 기자 전승은 전한 무제대의 사마천에 이르러서 집대성되어 『사기』에 수록된다. 사마천이 기록하고 있는 기자 전승은 대체로 기존의 기자 전승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商亡問答說, 箕子操作曲說, 武王訪問說, 麥秀之詩作者說, 箕子隱居說의 새로운 전승을 더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기자 전승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주목할 점은 전한 무제대에 새로운 기자 전승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자 전승의 확대 과정은 위만조선의 멸망에 대한 역사적, 사상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Accurate analysis to records the discourse of Kija-Joseon shown in PreChina-Literature yet didn"t accomplish. Therefore a systematic analysis to Kija"s legends of PreChina-Literature is tried in this article. As a result, the Discourse of Kija being imprisoned by King Zhou and the Discourse of King Wu freeing Kija were not early versions but were later versions of Kija"s legends. And there was not Kija"s legends of relating Kija and Joseon in PreChina-Literature. A historical background to form the discourse of Kija-Joseon was ideological and historical measures taken to grant moral justification to Emperor Wu of the Former Han Dynasty"s invasion of Wiman-Joseon and the need for efficient rule of Lo-lang Commandery. Therefore, the discourse of Kija-Joseon was a result of the historical needs of the time and does not reflect historical f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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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經』「韓奕」篇의 韓城과 韓侯

        오현수(Oh, Hyun-su) 백산학회 2013 白山學報 Vol.- No.96

        『시경』『한혁』편에 등장하는 한성에 대해서는 한후가 활동하던 시기와 활동 지역 등을 근거해서 보았을 때, 전통적 견해인 하북성설이 타당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한혁』편에 기재된 비휴ㆍ붉은표범ㆍ누런곰 가죽 등은 한후국의 북방적 특성을 보이는데, 맥족도 다른 여러 문헌 기사들에서 북방 종족으로 인식되어 기재되어 있다. 특히 양자의 토산물이 일치하기 때문에 양자에 대해 모종의 종족적 관련성을 상정해 볼 수도 있다. 한편 추족은 서주대의 금문 자료인 추궤ㆍ추이궤 등의 자료를 통해 산동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방 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족에 대해서는『여씨춘추』와『설문해자』및『수경주』의 기록을 보면서, 역시 산동성~하북성 일대로 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추족과 예족이 동일한 거주 위치에서 시대를 달리하여 기록된 점에 착안하여,‘추’에서‘예’로의 명칭 변화를 상정할 수 있었다. 추족중에서 하북성 일대에 거주하던 부류는 당지에서 맥족 한후의 통치를 받았을 것이다. 이 시기 하북성 남부에 근거하던 연나라는 한후가 활동하던 서주 중기에 어려운 상황에 몰리게 된다. 이것은 연나라의 북방에서 이민족의 침구 때문일 것으로, 서주 선왕은 한후와의 혼인 동맹을 통해 이와 같은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때 서주 연나라는 하북성 중ㆍ북부 지역에 거주하던 추(예)와 맥을 포착 하였을 것이다. 특히 다음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의 북벌 시기에는 이들과 직접적으로 조우했을 것인데, 이 과정에서 예와 맥을 관련된 종족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이후 전국시대 연나라가 요령 지역을 영역화하면서 자신들의 동북방 최단 외족에 대한 관념이었던 ‘예맥’의 족칭을 요령성 지역 거주민들에게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한혁』편을 통해서 북방 세력과 중원세력 간의 상호작용 관계를 알 수 있을 뿐, 이를 고조선 혹은 고조선의 종족적 실체로 간주되는 예맥과 연결시키기에는 현재로서는 곤란하다. Hancheng was first mentioned in the Hanhyi chapter of the Shijing. A opinion that the location of Hancheng was Shanxi-Hancheng has been argued for a long time. But it was called the Hanyuan, when Hanwuzi received it as a fiet. And it was't called Hancheng until the Sui dynasty. The Hanhu married with a descendant of a tribe that lived along the Fen river shore during the reign of the Xuan-king of Western Zhou, in order to form an alliance between Hanhu State and Western Zhou. At that time, the people of Western Zhou's made an attempt to connect Hanhu and the king of yu, who constructed leeves along the Fen river. Therefore the attribution of the leeve works along the Fen river to the king of Wu's son, namely Han, and a historical fact that Hanwuzi received a fief in Hanyuan connected the circumstances explained above, lead to the conclusion that Hanyuan can be identified as Hancheng. On the contrary, Hanhu is related to the Zhui, Mo and Yan, therefore we must search for Hancheng during the north of Western Zhou and Yan. But the Yan State was in a difficult condition in the mid-Western Zhou when Hanhu reigned. These difficulties were maybe due to invasions from the North. Therefore the Xuan-king of Western Zhou tried to foster an alliance with the Hanhu State to overcome these troubles. Since the tomb of Baifu is connected to the Hanhu, it received major attention, the reason for this is, the tomb of Baifu shows similarities with the culture of Western Zhou, which can't be found in other relics of the northern culture. Additionally, the Hanhu ruled the Wei tribe and the Mo tribe in Hebei-sheng during the Western Zhou dinasty. At that time, the Wei tribe and the Mo tribe were probaly un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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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箕子) 전승의 확대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중국 고대 문헌을 중심으로

        오현수 ( Hyun Su Oh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2 大東文化硏究 Vol.79 No.-

        ``朝鮮``을 기재한 고대 문헌에서 殷·周 교체기에 箕子朝鮮 조문은 14회라는 많은 회수가 기재되어 있지만, 西周代에는 단 1회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箕子와 朝鮮을 연계시키고 있는 기사들이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한 문헌 고증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우선 箕子朝鮮說 등장 이전의 기자 전승을 분석해 보았는데, 기자 전승의 원형은 기자와 紂王의 대립이었다. 이것이 ``囚箕子說`` → ``釋箕子說`` → ``箕子來朝說`` → ``洪範敎授說``의 순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기자와 조선을 연계시킨 전승이 새로이 추가되어 간다. 『尙書大傳』은 기자를 조선과 연계한 최초의 문헌으로, 前漢 武帝代 伏生의 문도가 스승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저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기자 전승은 『史記』 단계에 ‘麥秀之詩作者說’이, 『漢書』에서는 ‘箕子敎化說’과 ``犯禁八條`` 항목이, 또 『魏略』에서는 ``朝鮮侯=箕子之後孫說``이, 『三國志』와 『後漢書』에서는 ``犯禁八條制定說``이, 마지막으로 『隋書』와 『太平환宇記』에서는 ``箕子朝鮮⇒高句麗說``이 새로 등장한다. 이러한 기자 전승이 확대된 역사적 배경은 前漢 武帝의 조선 정벌과 樂浪郡의 효율적 통치, 그리고 隋·唐代 고구려 침략시에 침공의 명분을 얻기 위해 필요했던 사상과 역사 방면에서의 조치로 보인다. 따라서 箕子朝鮮說은 해당 전승이 필요했던 시대의 역사적 산물로서 실제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Among the ancient documents which record ``Joseon``, the Kija Joseon article appears as many as 14 times during the Yin-Zhou transition. However it does not appear even once during the following Western Zhou. Therefore there is a need to verify whether the passages linking Kija and Joseon reflect historical fact. Firstly, the Kija legend before the appearance of the Kija Joseon theory was analyzed, the original form of the Kija legend was that of antagonism between Kija and King Zhou. This was expanded in the following sequence: ``Kija being imprisoned by King Zhou`` → ``King wu freeing Kija`` → ``Kija visiting King wu`` → ``Kija explaining the Hongfan to King wu``. From this, a legend linking Kija and Joseon was newly added. The first document to link Kija with Joseon was the Sangseodaejeon, which was written during the period of Emperor Wu of the Former Han Dynasty by a disciple of Fu Sheng, who recorded his master`s teachings. Afterwards, new elements were added to the legend of Kija in the following sequence: the Shiji records that ``Kija composed a poem called ``maixiu`` `` → the Hanshu records that ``Kija civilized the people of Joseon`` → the Weilue records that ``Joseonhu was a descendant of Kija`` → the Sanguozhi and Houhanshu records that ``Kija enacted the eight forbidden behaviors`` → the Suishu and Taipinghuanyuji records that ``the ancestors of Goguryeo was Kija Joseon``. The historical background to the expansion of the Kija legend was ideological and historical measures taken to grant moral justification to Emperor Wu of the Former Han Dynasty`s invasion of Joseon and the need for efficient rule of Lo-lang Commandery and the Sui-Tang Dynasty`s invasion of the Goguryeo Dynasty. Therefore, the Kija Joseon theory was a result of the historical needs of the time and does not reflect historical f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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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海經』 ‘朝鮮’ 조문의 성서 시기 연구

        오현수(Oh, Hyun-Su)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3 인문과학연구 Vol.0 No.37

        『산해경』의 「해내북경」편과 권말의 「해내경」편 및 「해내서경」편에는 고조선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산해경』은 문헌적 성격이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저작자와 구체적인 성서 시기에 대해 논란이 많기 때문에, 이들 조문들을 활용하여 곧바로 당해 시기 고조선상을 복원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세 편 사료의 맥락을 분석하면서 해당 조문들의 성서 시기를 한정해 보고, 해당 조문들이 역사적 사실성을 담보하는지 검증해 보았다. 우선 「해내북경」편 조문은 ‘鉅燕’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서, 이 조문은 연장 진개의 침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 조문에 기재된 列陽은 서북한으로 비정되는데, 중원 세력이 한반도 서북부에 진출했던 시기가 전한 무제대였다는 점을 참고로 한다면, 본편 조문은 이 시기 이후에 삽입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후한대의 문헌에 와서야 등장하기 시작하는 倭가 본 조문에 기재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더욱 확신할 수 있다. 다음으로 권말의 「해내경」편에는 ‘朝鮮天毒’이 등장한다. 천독과 관련해서는 고대의 여러 지명 혹은 국명 중에서 찾아본 결과, 天遼의 오기로 보았다. 『후한서』 「군국지」에서 昌遼를 옛날의 天遼라 하면서 요서의 험독이라고 했고, 『사기』 「朝鮮列傳」에 대한 주석에서 서광도 창려에 험독이 있었다고 했다. ‘천요’는 서광이 생존했던 시기에 창려의 옛 지명으로 쓰였던 것이므로, 본 조문은 최소한 서광의 생존 전후 시기에 작성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내서경」편에 등장하는 ‘漢水’를 『수경주』에서 濡水의 지류로 나오는 ‘汗水’로 본다면, 맥국은 한수의 동북쪽, 즉 현재의 요서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러한 맥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비파형동검문화의 남동구유형인데, 이들은 재래의 요서 비파형동검문화(고조선)와 하북성에서 후퇴한 유병식동검문화(산융)의 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연나라가 맥국을 멸했다고 했으므로, 본 조문 성서의 상한은 기원전 3세기로 한정할 수 있다. 이상의 결과, 『산해경』의 기재된 조선 관련 조문들은 춘추ㆍ전국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전한대의 지리정보 및 전한대 이후에 새로 알려진 사실들과 함께 섞이어 후한대 이후에 성서되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산해경』의 세 편 조문들은 고조선 연구의 기본 사료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First, the provisions of ‘Joseon’ of the haineibeijing were written during the Age of the Warring states, because it used the term ‘Juyan’. However, after the Yan state’s invasion, it’s east boundary was the Liaodong area. And Lieyang, which belonged to Yan state, is the western part of North Korea, but this area belonged to China during the Emperor Wu’s reign period of the Western Han Dynasty. And Wo was first mentioned in the literature of the DongHan Dynasty time. Therefore the provisions of Joseon of the haineibeijing was written based on the historical fact that during the reign of King Zhao of the Yan state, but it was written after the Western Han Dynasty conquered Go-Joseon. The next, ‘Joseontiandu’ is stated in the haineijing chapter. Tiandu is incorrect transcription of Tianliao which was written Changli in the ancient literature. Changli was Xiandu which was the initial capital of Go-Joseon. However, the Mo state of the haineibeijing was an entity which was connected with the nandonggou-typeculture of the Mandolin-Shaped-Swords-culture. Therefore two chapters of the Shanhaijin were written about Huangong’s the Shanrong-invasion which was handed down from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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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魏略』 기재 朝鮮侯와 ‘取地二千餘里’의 검토

        오현수(Oh, Hyun-Su) 고려사학회 2015 한국사학보 Vol.- No.61

        이 논문은 『위략』에 기재된 ‘조선후’의 실체와 ‘2,000여 리’의 위치를 밝힌 것이다. 먼저 조선후국의 위치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위략』에 기재된 조선후국은 전국 연나라와 직접적 상호작용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기원전 4~3세기 연장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하기 이전에 연나라는 하북성 지역을 강역화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연나라는 요서지역의 정치체와 직접적인 상호작용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 반면에 고조선은 기원전 6세기 이후 심양 일대의 정가와자유형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정은 『염철론』벌공 편 연장 진개의 고조선 침략기사에서 연나라가 요수를 건너 고조선을 공격한 것으로 기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연장 진개의 활약 이전에 연나라와 고조선은 각기 하북성과 요동지역에 근거하고 있었고, 이에 반해 요서지역은 양국의 공백지대였다. 그런데 『위략』 의 표현대로 하자면, 연나라와 조선후국은 서로 이웃한 국가여야 하기 때문에 조선후국은 요서지역에 기반한 정치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연장 진개의 활약 이전인 기원전 4세기의 국제 정세는 하북성의 연나라, 요서의 조선후국, 요동의 조선이 병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요서지역에 조선후국이 성립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춘추시대 초기에 연나라의 북방에서 산융 집단이 연나라를 괴롭히자, 제나라가 산융을 정벌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산융의 위치는 하북성의 북부지역에 있었는데, 제나라 환공의 공격으로 인해 산융 중에서 일부 집답은 요서지역으로 후퇴하였다. 그리하여 요서지역의 고조선사회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고조선의 수장집단을 포함한 일부 세력이 요동지역으로 건너가 정가와자유형 중심의 조선을 형성하고, 요서지역에는 새로이 융족 계열의 집단이 전입하여 선주하던 고조선 토착민과 융합과정을 거치면서 조선후국이 등장하게 된다. 결국 『위략』에 기재된 ‘取地二千餘里’에서 2천 여리의 영역에는 요서(조선후국)와 요동(준왕 계열의 조선) 지역이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요서지역의 정치체에 대해서 그것을 기록한 당시인의 인식차에 따라 달리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의 고대 문헌인 『위략』, 『산해경』『관자』, 『염철론』 은 이를 각기 조선후 · 맥국(발) · ‘동호의 연장선’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연장 진개의 침입으로 요령지역 사회의 변화상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연장 진개의 침입으로 인해 요서지역의 조선후국은 멸망하여 연나라에 완전히 포괄되었다. 그리고 요동지역 준왕 계열의 조선은 서북한 지역으로 이동하여 부왕~준왕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기타 요동지역의 토착사회는 고조선과의 교류가 단절되고, 연나라 요동군과 밀접한 교류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There are records in the Weilue which state that the Joseonhou was Kija’s descendant and the Yan state occupied Gojoseon’s land. The former was a historical consciousness related to the Western Han Dynasty’s colonial district. However, problems where Gojoseon’s center and its lost land were in 4~3 centuries B.C. still has not been resolved. This problem can be explained, if we solve when ancient China occupied the northern part of Hobei province. Huangong of the Ji state conquered Shanrong -the north of the Yan state in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but China had not yet penetrated in this area. But because of this, some forces of the Shanrong moved to the Liaoxi area. Accordingly, Gojoseon also moved to the Liaodong area and built a Zhengjiawazi-type culture. And the Shanrong, retreating from Hobei province, met Gojoseon which resided in the Liaoxi area. Both sides together made a Nandonggou-typeculture(DongdaZhuangzi -typeculture) and they very likely recognized themselves as being Gojoseon. Then again, when the Yan state invaded Donghu and Gojoseon, China could debouch into the northern part of the Hobei province in the Age of the Warring states. As it was recorded that the Joseonhou was close to the Yan state in the Weilue, it means that he should have ruled in the Liaoxi area. So it seemed that a Nandonggou-typeculture(DongdaZhuangzi-typeculture)’s political entity was the Joseonhou, namely a coalition of forces of Gojoseon and Shanrong.

      • KCI등재후보

        감성지능을 중심으로한 간호대학신입생의 대인관계 훈련프로그램의 효과

        오현수 ( Hyun Su Oh ),김현영 ( Hyeon Young Kim ) 경희대학교 동서간호학연구소 2013 동서간호학연구지 Vol.19 No.1

        Purpos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effects of the interpersonal relationship training program based on emotional intelligence on interpersonal relationship, emotional intelligence, and self-esteem of nursing students. Methods: The study adopted a quasi-experimental study with a nonequivalent control group pre-post test. Total participants were 89 nursing students of S and K Universities. They were divided into the control (39 students) and experimental group (50 students). Participants went through the emotional intelligence program 100min which consisted of 100 minutes per session, once a week for total of 8 session from March 3th to April 21th, 2011. The contents were composed with interpersonal relationship training program to promote positive formation of emotional intelligence, interpersonal relationship, and self-esteem. All data were analyzed by SPSS 18.0 program. Results: The experimental group showed a significant increase of emotional intelligence (t=-3.17, p=.002) and interpersonal relationship (t=-3.07, p=.003). Conclusion: The interpersonal relationship training program based on emotional intelligence was effective in improving emotional intelligence and interpersonal relationship.

      • MLC 낸드플래시 분석 프로그램 구현

        오현수 ( Hyun-su Oh ),이종태 ( Jong-tae Lee ),최석환 ( Seokhwan Choi ),전중남 ( Joongnam Jeon ) 한국정보처리학회 2012 한국정보처리학회 학술대회논문집 Vol.19 No.1

        일반적으로 낸드플래시는 Matlab이나 간단한 프로그램 언어를 통하여 분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많은 데이터와 공정마다 변하는 데이터 format 그리고 여러 가지 분석방법의 다양성이 그 이유이다. 그 때문에 분석시간과 분석의 정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 논문의 낸드플래시의 분석을 정형화 하였고, DB를 이용하여 많은 양의 테스트데이터를 관리 하였다. 또한 여러 종류의 테스트데이터 format에 대하여 범용 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 하였다. 제작된 분석기는 낸드플래시의 CCI특성 및 EW cycle과 retention에 대한 stress resistance를 분석할 수 있다. 객체지향으로 설계가 되어 추후 유지 보수를 용이하게 설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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