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 KCI등재

        동아시아학술원 20년 철학방면 연구성과 ― 유학과 경학 방면 연구를 중심으로

        李昤昊 ( Lee Young-ho ),金渡鎰 ( Kim Doil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20 大東文化硏究 Vol.112 No.-

        동아시아학술원의 대표적 연구공간은 대동문화연구원, 유교문화연구소, 학술원 산하 인문한국연구소 등이다. 이 세 단위 연구기관에서 이루어진 철학 방면 연구는 주로 저술(저역서, 영인출판)을 통해 수행되었으며, 학술대회와 자료구축을 통해서도 그 연구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유교문화연구소에서는 학술원 개원 이래 ‘유교문화번역총서’와 ‘유교문화연구총서’를 통해 유학의 현대화 문제에 천착하였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이루어진 학술대회에서도 ‘경학(유학)’의 현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연구소에서는 한국유학(경학)을 기반으로 하는 동아시아 고전철학의 모색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활동을 하였는데, 최근에 이르러서야 동아시아적 연대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대동문화연구원에서는 영인총서를 통하여 조선유학(경학)의 연구의 기반을 구축하였는데, 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학술적 자산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한편 자료구축의 측면에서는 유교문화연구소의 ‘유경정본화사업’, 인문한국연구소의 ‘한국경학자료시스템’, ‘한국주자학용어시스템’을 거론할 수 있다. 이 세 사이트에서는 한국 유학, 특히 한국 경학에 관한 자료 구축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향후 한국고전철학연구에 있어 필수불가결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학술원은 지난 20년 동안 이룩한 고전철학 방면의 성과를 토대로 앞으로 연구의식의 심화와 자료구축의 확장을 도모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현재까지 진행된 동아시아 고전철학연구에 대하여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혹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자생의 학술담론은 이러한 관점과 의식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Three representative research institutes of the Academy of East Asian Studies are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Institute of Confucian Philosophy and Cultures, and Humanities Korea Project Institute. Their philosophy research was mainly conducted through writing (publication of books, translated works, and photocopy editions) by these three and has been expanded its scope through academic conferences and establishing database. Since its opening of the Academy, the Institute of Confucian Philosophy and Cultures has published Confucian Culture Translation Series and Confucian Culture Research Series to address the issue of the modernization of Confucianism. Also, academic conferences held since the 2000s focused on the modernization of the Confucian studies (Confucian Classics). In contrast, the research by the Humanities Korea Project Institute has been focused on East Asian classical philosophy based on Korean Confucianism, and only recently has the foundation of East Asian solidarity been established. In addition, the publication of Classic Photocopy Series by the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laid the foundation for the study of Joseon Confucian classic, which has become a very important academic asset, both at home and abroad. On the other hand, in terms of database establishment, the Institute of Confucian Philosophy and Culture's 유경정본화사업 Project, the HK's Korean Confucian Classics Data System, and the Terminology Data System of Zhu Xi's Learning can be discussed. These three sites are good examples of the establishing database on Korean Confucianism, especially Korean Confucian Classics. This is indispensable database for future research on Korean classical philosophy. The Academy aims to deepen research awareness and expand its database archiving based on the achievements in classical philosophy over the past two decades. In this process, we will maintain a critical view of East Asian classical philosophy research so far and endeavor to identify problems. Based on this, we will ultimately seek out a self-sustaining academic discourse that is recognized in East Asia of globally.

      • KCI등재

        디지털 경전주석학의 모색 ― 한국경학자료시스템을 중심으로

        이령호 ( Lee Young-ho ),함영대 ( Ham Young-dae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8 大東文化硏究 Vol.101 No.-

        전통시대 유학의 근간이었던 경학은 동아시아의 사상과 문화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에 이르기까지 그 기본 원리를 제공한 학문이다. 이러한 경학 저술에 대하여 중국과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목록의 정리에서 자료의 회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의 전통이 마련되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전통적인 경학자료의 회집이 없지는 않았으나 상대적으로 미흡했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은 1988~1998년에 조선조에 단편적으로 이루어졌던 한국경학자료를 회집하여 『韓國經學資料集成』이라는 명칭으로 출간했다. 또 이 총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정부의 지원하에 2004년부터 단계적으로 DB화를 진행하여, 현재 한국경학자료시스템(http://koco.skku.edu/)이라는 명칭으로 공개하고 있다. 이 글은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완간한 『한국경학자료집성』과 그 DB화의 성과인 한국경학자료시스템을 검토하고, 이어서 한국의 경학자료를 DB화한 또 다른 사이트를 살펴보면서 한국의 경학DB를 활용한 경학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 것이다. ‘디지털 경학주석학’이라고 명명한 이 연구방법론을 수립하기 위해 그 현황과 성과를 점검했으며, 보완한 몇 가지 사항을 짚어보았다. 검토 결과 『한국경학자료집성』의 완성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에 비해 그 회집의 역사가 일천했던 한국 경학자료의 규모와 위상을 확인한 학술적 진전이었다. 한국유학의 저력을 구체적인 자료로 입증할 수 있는 문헌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효과적인 방식으로 전산화한 한국경학자료시스템은 中日에는 이제까지 없었던 주석별 검색이라는 방식을 전산화 과정에 도입함으로써 경학자료를 활용한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나 보완작업 역시 요청되고 있다. 원천자료에 대한 수습과 정리의 보완, 이본대조를 통한 교감과 정본화, 표점작업, 일반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다양한 원전자료의 국역본의 제시가 그것이다. 한국경학자료시스템의 활용성을 확장하고 디지털 경학주석학 연구의 발전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그 지속적인 보완은 여전히 요청된다. The study of Confucian Classics, which was the basis of Confucianism in the traditional era, provided the basic principles from thoughts and cultures to politics and economies in East Asia. For the writings about Confucian Classics, a variety of research traditions was developed in China and Japan earlier on. It ranged from cataloging the writings to assembling them. In contrast, there was a traditional assemblage of the writings of Confucian Classics in Korea. However, it was relatively insufficient. Finally, this insufficient work which was carried out fragmentarily in the Joseon Dynasty was completed in 1998 after beginning the work in 1988 by the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of Sunkyunkwan University(DIKSSU). DIKSSU gathered Korean Confucian Classics materials and published it under the title of The Complete Collection of the Korean Study of Confucian Classics. Furthermore, with the support of Korean government which recognized the value of the Collection, DIKSSU has gradually developed the digital database and opened the Korean Confucian Classics Data System (http://koco.skku.edu/) and opened to the public. This paper examined The Complete Collection of the Korean Study of Confucian Classics, which was completed by the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of Sunkyunkwan University, and also examined the Korean Confucian Classics Data System which was the result of its database. Also it pursued for a new horizon through searching another similar websites. In order to establish the research methodology named 'a Commentary Study of Confucian Classics in Digital Form', we checked its current status and achievements and several details that were improved later.The paper finds that the completion of The Complete Collection of the Korean Study of Confucian Classics made an academic progress that confirmed the size and status of the Korean Confucian Classics' materials, which has insufficient history of gathering compared to them of China and Japan. The Collection provides a literal basis for verifying the strength of Korean Confucianism with concretely established data. An effectively computerized < the Korean Confucian Classics Data System > has innovated the field of relevant researches by introducing the searching method by classified annotations, which had never been available in China and Japan. However, additional works are also needed to improve the system. In order to expand the applicability of < the Korean Confucian Classics Data System > and to improve the Commentary Study of Confucian Classics in Digital Form, it is necessary to gather and arrange original materials, to correct errors by comparing different versions, to work for marking and to provide Korean versions of the original materials for interacting with public. And these works continuously needs to be improved.

      • KCI등재

        북위후기(北魏後期) 낙양(洛陽) 거주 서역인(西域人)과 서역문화(西域文化)

        최진열 ( Jin Yeoul Choi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4 大東文化硏究 Vol.87 No.-

        본 논문은 북위후기(北魏後期) 낙양(洛陽)에서 활동했던 서역인(西域人)과 서역상품(西域商品), 서역문화(西域文化)를 다루었다. 북위후기(北魏後期) 수도 낙양(洛陽)에는 관리(선건(善乾)과 안토근(安吐根), 화안(和安))와 무사(武士), 황제(皇帝)의 후궁(우선희(于仙姬)), 상인(商人), 악인(樂人), 무인(舞人), 승려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서역인(西域人)이 거주하였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따르면 북위후기(北魏後期) 이후 낙양(洛陽)의 인구는 10만 9천여 戶였다. 서이(西夷), 즉 西域人이 거주했던 모의리(慕義里)에 거주하는 1만 호(戶)는 洛陽 전체 호수(戶數)의 9.1%에해당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북위(北魏)의 수도 洛陽에 체류한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가 3천여 인이었고, 당시 북위(北魏)의 선무제(宣武帝)가 영명사(永明寺) 천여간(千餘間)를 세워 이들을 거주하게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명사(景明寺)에도 서역호(西域胡) 사문(沙門)이 거주하며 수도하였다. 이처럼 北魏後期의 수도인 洛陽 인구의 10%를 상회하는 西域人들이 당시 洛陽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西域人들은 서역(西域)의 불교(佛敎)를 북위(北魏)에 전파하고 유리제품과 은세공품 등서역산(西域産) 제품과 호상(胡床)·호가(胡家)·비파(琵琶) 등의 악기(樂器)를 들여왔으며 서역(西域)의 잡기(雜技)와 가무(歌舞)를유행시켰다. 北魏後期 수도 洛陽에는 西域人뿐만 아니라 다양한 외국인이 거주하였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성남(城南)」 선양문조(宣陽門條)에 따르면 영교(永橋) 남쪽에 김릉관(金陵館)·연연관(燕然館)·부상관(扶桑館)·엄자관(嚴自館) 등 북위(北魏)에 귀부(귀부(歸附))한 외국인들을 수용하는 사이관(四夷館)이 있었다. 北魏에 귀부한 외국인들은 이곳에서 3년을 지낸 후에 남조(南朝) 출신(원문에는 오인(吳人))은 귀정리(歸正里), 북이(北夷)는 귀덕리(歸德里), 동이(東夷)는 모화리(慕化里), 서이(西夷)는 모의리(慕義里)로 옮겨 거주하였다. 洛陽에서 출토된 도용(陶俑)을보면 洛陽에는 아프리카 흑인과 아라비아인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중앙아시아나 몽골고원의 유목민과 고구려인(高句麗人)들도 거주하였다. 이처럼 ‘국제도시’ 洛陽에서 거주했던 한인(漢人)이외의 다른 종족(種族)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문화와 습속을 유지하며생활하였다. 洛陽에 거주했던 西域人과 西域文化는 洛陽에 漢人과 한문화(漢文化)만 존재했을 것같은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西域人과 西域文化는 호인(胡人)(유목민)들이 漢人과 漢文化에 일방적으로 경도(傾倒)되는 것을 막는 완충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洛陽에 살았던 북방의 유목민, 고구려(高句麗) 등 만주와 한반도의 사람들, 남조(南朝)에서 귀화한 사람들, 중앙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 등 西域 사람들의 고유 문화도 다른 種族들에게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北魏의 호인지배층(胡人支配層)이 일방적으로 漢文化만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種族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洛陽이었다. In this essay, I analyzed the people, goods and the culture of Western Region in Luoyang in last half of BeiWei Dynasty. There were many people of Western Region such as officials, soldiers, royal concubines, merchants, musicians, dancers, and Buddhist priests etc in Luoyang, capital city of BeiWei Dynasty. According to “The Monasteries of Luoyang”(Luoyang qielan ji), population of Luoyang were 109,000 households or so, where ten thousands of people from Western Region lived, 9.1 percent of Luoyang population. Furthermore, at least 3 thousands of Buddhist priests from Western Region were engaged in missionary work and meditated in the temple of Yongming and Jingming in Luoyang. The one-tenth people from Western Region affected the culture of Luoyang. For example, they brought Buddhism into the Luoyang and around the city, sold the glassware, silver wares, table of Western Region, and the musical instruments such as the hujia, Western mandolin and so on. Many kinds of acrobat, music and dance from Western Region were spreaded in Luoyang. There were also many other foreigners in Luoyang, such as the Afiricans, the Arabs, nomads from Central Asia or the Mongolia grassland, the Koguryo people, and the Chinese from Sourther China called Souhtern Dynasties(Nanchao). They lived in Luoyang, mantaining their orginal food, clothing and shelter, languages, and other native customs. The people and the culture of Western Region in Luoyang in last half of BeiWei had the shock absorbing role between the Xianbei people and the Chinese people, or between the culture of Xianbei or nomad culture and the Chinese culture. The foreigners from the Afirica, Arab, Central Asia or the Mongolia grassland, Koguryo and Souhtern Dynasties in Luoyang made achievements in cultural interaction. Luoyang, the capital city of BeiWei in last half of BeiWei Dynasty was not a melting pot of race and culture but a salad boul of of race and culture, Which was attributed to the people of Western Region.

      • KCI등재

        냉전텍스트 『실패한 신(The God That Failed)』의 한국 번역과 수용의 냉전 정치성

        李奉範 ( Lee Bong-beom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22 大東文化硏究 Vol.117 No.-

        이 글은 1949년 문화냉전이란 분명한 의도에 의해 기획·탄생한 『실패한 신(The God That Failed)』이 한국에서 번역되는 맥락과 그 수용의 양상에 초점을 두고 『실패한 신』이 지닌 냉전텍스트로서의 위상과 그 영향을 구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실패한 신』은 공산당에 입당했거나 공산주의에 동조한 바 있는 스티븐 스펜더, 아서 쾨슬러, 이냐치오 실로네, 리처드 라이트, 루이스 피셔, 앙드레 지드 등 저명한 서구지식인들의 공산주의 가담, 체험, 환멸, 탈퇴의 과정을 상세히 고백한 공산주의체험 에세이집이자 공산주의 (재)전향의 기록이다. 이 전향텍스트의 특장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소비에트체제)/자유주의 이데올로기(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동시적인 비판이라는데 있다. 그러나 『실패한 신』은 CIA의 문화냉전 전략에 의해 공산주의(체제) 실패를 입증해주는 결정적 증거로 의미화 되면서 문화냉전의 대표적인 심리전 텍스트로 활용되었다. 또한 문화자유회의를 비롯한 국제적 냉전문화기구를 매개로 세계적인 확산과 냉전텍스트로서의 권위와 영향력이 확대되기에 이른다. 따라서『실패한 신』은 문화냉전의 세계적 연쇄와 냉전지식의 동아시아적 및 한국적 변용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보기 드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고는 『실패한 신』의 한국 번역 및 수용의 양상을 연대기적으로 살피는 가운데 네 가지 지점을 해명하는데 주력했다. 첫째, 문화냉전의 세계적 연쇄와 냉전지식의 한국적 변용에 대해 탐색이다. 국제적 냉전문화네트워크와의 연계하에 이루어진 한국에서의 번역메커니즘과 복수의 번역주체가 변용·전유한 냉전정 치성을 파악함으로써 한국 냉전문화사의 특수성을 규명하고자 했다. 둘째, 『실패한 신』의 번역 실제에 대한 총체적 정리이다. 셋째, 전향 의제의 냉전정치성과 사상사적·문화사적 영향이다. 넷째, 동아시아 문화냉전의 기원에 대한 비교사적 고찰이다. 큰 시차 없이 한국 및 동아시아 국가들에 번역되는 특징에 주목하여 그 수용의 공통점과 차이를 비교사적으로 분석하여 냉전아시아 문화냉전의 기원을 탐색하고자 했다. 『실패한 신』의 한국 수용은 냉전분단체제의 거시적인 규율 속에 반공산주의의 정당성을 확증해주는 텍스트로, 체제옹호를 뒷받침해주는 대내외 심리전텍스트로 두루 활용되는 기조가 유지되었다. 좌익에 남아 있던 공산주의전력자의 증언으로만 구성한 『실패한 신』의 텍스트성과 그로 인해 출간 당시 『실패한 신』 및 저자들이 좌우 진영 모두로부터 의혹과 비판을 받은 바 있는 이 냉전텍스트가 한국에서는 반공산주의텍스트로 비교적 단일한 의미 변용을 거쳐 수용되었고, 그것이 오랫동안 지배적으로 관철된 특징이 있다. 포도레츠가 특히 경계했던 제3세계에서 이 텍스트의 반공주의 지식으로서의 불충분성과 반 소주의의 정치적 미흡함이 한국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실패한 신』의 기획 의도가 한국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구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이 가능했던 원천은 냉전분단체제하 사상 전향이 내포한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구속성 때문이었다. 이 같은 수용은 지배 권력의 통치술로 확대 강화된 면이 컸으나 한국사회에 광범하게 정착된 냉전멘털리티가 이에 못지않게 작용했다는 판단이다. 특히 공산주의의 실제 체험은 『실패한 신』의 냉전텍스트성과 심리전 효과를 증폭시키는 주된 바탕이었다. 이는 동아시아국가들의 번역 수용과도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실패한 신』은 문화냉전텍스트로 규정되어 전파되었으나 그 내용과 영향을 고려하면 러시아혁명 이후 20세기 세계사를 포괄한 지성사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전력자들의 사상적 고뇌와 지적 유토피아니즘에 대한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실패한 신』의 재독이 필요한 시점이다. This article focuses on the context in which 『The God That Failed』, which was planned with the clear intention of the Cultural Cold War in 1949, was translated in Korea and the aspect of its acceptance, and aims to investigate its status as a Cold War text and its influence. 『The God That Failed』 is a collection of essays on communism experience and a record of conversion to communism, which confessed in detail the process of joining, experiencing, disillusioning, and withdrawing from communism by prominent Western intellectuals who joined the Communist Party or sympathized with communism. The special feature of this conversion text is that it is a simultaneous critique of communist ideology(Soviet system)/liberal ideology(capitalist system). However, 『The God That Failed』 was used as a representative psychological warfare text of the Cultural Cold War as it was meant as decisive evidence to prove the failure of communism by the CIA’s Cultural Cold War strategy. In addition, through international Cold War cultural organizations, including the Cultural Freedom Council, it has spread worldwide and its authority and influence as a Cold War text have been expanded. Therefore, 『The God That Failed』 can be said to be a rare text that can simultaneously grasp the global chain of the Cultural Cold War and the East Asian and Korean acculturation of the Cold War knowledge. The acceptance of 『The God That Failed』 into Korea was maintained as a text that confirms the legitimacy of anti-communism in the macroscopic discipline of the Cold War system, and is widely used as a psychological warfare text both internally and externally to support the advocate system. In Korea, it was accepted as an anti-communist text through a relatively single meaning change, and it has a characteristic that it has been dominantly carried out for a long time. It can be said that the insufficiency of this text as anti-communist knowledge and the political inadequacy of anti-Sovietism in the Third World, which Podhoretz was particularly wary of, did not exist in Korea. This shows that the planning intention of 『The God That Failed』 was most practically implemented in Korea. This was possible because of the strong ideological constraints implied by the ideological conversion under the Cold War system. This acceptance was largely strengthened by the ruling art of the ruling power, but it is judged that the Cold War mentality that was widely established in Korean society worked no less than this. In particular, the actual experience of communism was the main basis for amplifying the Cold War textuality and psychological warfare effect of 『The God That Failed』. This is also a point of distinction from the acceptance of translation by East Asian countries.

      • KCI등재

        한국전쟁 이후 극장 문화 로컬리티(Locality) -강원도 도시를 중심으로

        위경혜 ( Gyeong Hae Wee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2 大東文化硏究 Vol.77 No.-

        이 글은 영화의 역사적 존재 방식을 살피는 것으로, 한국전쟁 이후 극장 설립 및 영화 상영을 둘러싼 담론과 문화적 실천(practices)을 살펴 영화가 개입한 지역 사회 역사를 규명하고 있다. 본 글은 한국전쟁 경험이 지역민 일상생활 주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강원도 도시 지역-원주와 춘천 그리고 속초와 강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쟁 경험은 전후 강원도 지역 도시 성격을 규정하였다. 전후 원주와 춘천은 군부대 집결지이자 미군부대 주둔지가 되었으며 속초는 월남민 정착 수복 도시로 성장하였다. 반면, 강릉은 관동 지역 전통 도시를 대표하면서 식민지시기 형성된지역 엘리트의 사회적 영향력이 전후까지 지속·확장되는 모습을 보였다. 강원도 도시별 극장 문화는 반공의 사회 질서에 바탕을 둔 흥행장 논리와 미군부대 주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 검증 그리고 지역 엘리트 집단의 권력 구조등 요인으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도시별 극장 문화는 지역 간 유사성과 상이성이 혼재된 양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들을 관통하고 있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군부대 존재는 강원도 도시 극장 문화의 로컬리티를 발현시키는 절대적 요인이었다. 둘째, 지역 엘리트에게 있어서 극장 설립과 영화 상영은 지역 내 패권적 문화 권위를 생산하는 주요한 매개로 기능했다. 셋째, 영화 상영 주체들 - 극장, 문화원 그리고 官- 이 협동하여 전개한 지역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 영화 상영은 반공 이념의 문화 국가 건설에 일조하였다. This essay examines the historicity of cinema in the Locals during South Korea`s post-Korean War era, spanning from the mid 1950s to the 1960s. In order to investigate the Locality of the cultural practices surrounding foundation of movie theaters and the film exhibition, this work deals with the backdrop of the advent of the movie theaters in the Gangwon-do, focusing on the major cities whose characteristics were intensively shaped by the experience of the Korean War. Considering that the narration of the historical experiences in the major cities in the Gangwon-do could be different from those of the whole country, this work endeavors to declare the historicity of the discourse on foundation of movie theaters and the film exhibition practices, which was interlinked with the social changes of the cities followed by the Korean War. In response to the effort, this work brings about the following results. Due to their identities as the rear areas for military lines, the two cities such as Wonju and Chuncheon showed the prosperity of the Local movie theaters based on the rhetoric of the anti-Communism and pro-Americanization. And the film exhibition in the city of Sokcho was to exert its function as an effective means to verify the identity of the Local resident as the South Korean people because the great portion of the population in the city was composed of the north Korean refugees. Meanwhile, the city of Gangneung displayed somewhat different film exhibition practices from those of the other cities. It is noticeable feature that the city of Gangneung represents the Local influentials` collaboration in its community, leading the film exhibition for both entertainment and propaganda by the members of the one`s own family. In conclusion,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the social changes after the Korean War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major cities features prominently in the cultural practices - the discourse on foundation of movie theaters, the film exhibition practices, etc. - in four major cities in the Gwangwon-do. The residence of the American Army base was the fundamental element for producing the Locality of Cultural landscape surrounding movie theaters in the Gwangwon-do. The foundation of movie theaters and the film exhibition functioned as the way of seizing supremacy in the process of culture production for the Local elites in their Local communities. And the interlocking relationship among the leaders of the film exhibition such as movie theaters, the Culture Center and governmental foundations contributed the construction of Korean-ness based on the Anti-Communism.

      • KCI등재
      • KCI등재

        4-6세기(世紀) 동아시아에서의 문헌(文獻)의 유통(流通)과 확산(擴散)

        김경호 ( Kyung Ho Kim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4 大東文化硏究 Vol.88 No.-

        농업을 경제 기반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이 근대국가로 진입하기 이전까지 중국의 군현 통치 외연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른바 ‘동아시아’지역의 문화적 통합이 秦漢시기 이래로 줄곧 강화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또한 문화적 통합의 핵심적 요소는 중국의 한자, 율령, 유교.불교 및 도교이며 정치적 문화적 여러 요소들 역시 모두 한자를 매개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동아시아세계를 ‘漢字文化圈’이라 정의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와 관련한 종래의 문헌 관련 연구 내용은 주로 한자의 성립이나 전파 또는 각 지역에서의 그 사용 실태 등에 집중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종래 연구에 기초하여 종이의 사용 이후, 後漢末.魏晋時期 민간사회에서의 문헌 유통의 내용과 위진시기(4~6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동아시아 세계로의 문헌유통과 그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고대 중국에서 제작.유통된 문헌이 주변 국가에서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중국 문화의 선진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변 국가는 중국 문화를 수용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성장.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까닭에 주변 국가에 한자와 문헌이 유통.확산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朝貢秩序體制가 형성되었으며, 각 국이 고대 국가로 발전하면 할수록 주변 국가의 한자 문화가 중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발전한 것이다. 본문의 내용에서 검토한 이른바 “중국과 동일하다(同於中國)”이나 “중화의 법에 의존한다(依中華之法)” 등의 표현은 이러한 정황을 반영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삼국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인 新羅 元聖王 4년(788)에 실시한 讀書三品科의 교재로서 五經과 史書 및 諸子書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중국 문헌에 대한 熟知의 정도가 관리 선발의 기준이었을 뿐만아니라 중국에서 유통된 문헌이 신라 사회 전반에 보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질서는 조공과 책봉체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을지라도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자국의 독자적 문화와 중국문화를 융합하여 중국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 新羅에서 吏讀의 사용을 통한 기록이나 한자를 기초로 만들어진 일본의 히라가나(平假名)와 가타카나(片假名)가 그 좋은 사례로서 동아시아 각국에서의 문화가 유통되고 확산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ast Asia that based on the agriculture economy was in the extension of Gun-Hyun government before the process of transition to the modern state. This fact means cultural integration in East Asian has been continually strengthened since Qin and Han Dynasties. Because Chinese character, law code, Confucianism·Buddhism·Taoism were the core components of cultural integration and all the political and cultural components were spread by Chinese character as well, East Asian world was also defined as Chinese Characters-Using Area. The former studies about East Asian literature were mainly focusing the establishment, diffusion and reality of usage, etc in each area of Chinese character. Based on these former studies, this paper organized the distribution of literature in civilian society in the Late Han and Wei-Jin period after the usage of paper, and the distribution of literature in East Asia area and its meaning which began in earnest from Wei-Jin period(4th-6th century) as follows. The fact that literature made and distributed in ancient China spread into neighboring countries shows the advancement of Chinese culture, meanwhile it means neighboring countries had to accept the advanced culture and develop into ancient countries. The more actively Chinese character and literature spread in neighboring countries, the China-centered tribute system formed; the more developed into ancient country, the Chinese character culture in neighboring countries reached in a equal level with China. The expressions like the same as China or based on the Chinese law used in this paper reflect this situation. The Five Classics(五經), History book(史書) and All Classes of Others(諸子書) were chosen as textbooks of Employment of Officials in Three Ranks(Dokseosampumgwa, 讀書三品科) which carried out in King Wonseong(元聖王) 4(788) in Silla, the latest country of accepting the Chinese civilization among three countries. This tells us that the degree of understanding about Chinese literature had become the standard of selecting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the literatures distributed in China had been diffused in the whole Silla society.

      • KCI등재

        식민지의 ‘문화’주의, 變容과 事後

        유선영 ( Sun Young Yoo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4 大東文化硏究 Vol.86 No.-

        이 연구는 1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 이성중심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서 구 문명을 인류 보편의 문명으로 간주하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사상적 대안으로 부상한 문화주의가 식민지 조선에서 어떻게 변용되었는 지를 분석하고 있다. 문화주 의는 독일에서 구성된 문화(kultur) 개념을 근간으로 하며 계몽주의적 문명화를 가 리키는 문화(culture) 개념과 대척해 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문화주의는 문 명화론이었으며 그것이 가진 진보성, 반식민주의적 저항성, 문화적 및 민족적 특수 성에 대한 지향을 상실하면서 무력화되었다. 문화적 민족주의는 무력화한 문화주의 의 한 樣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연구는 문화주의의 변용과 식민지적 전유에 개입한 5가지 요인을 구분하는데 일본문화주의 영향하에 인격주의적 개조주의가 주 도하는 식민지적 맥락, 강대국에 의존한 민족주의-서구중심주의, 구한말 이래 근대 주의와 쌍을 이루어 正典化한 문명화론, 문화를 사회의 하위영역으로 주변화한 사 회주의, 그리고 문화를 假想의 영역으로 무력화한 문화정치의 문화주의가 그것이다. 이 요인들에 의한 문화주의의 변용에서 문제적인 것은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의 視 點이 흐릿해 진 것만은 아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쿠르트르 문화주의가 해체의 대상으로 설정했던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주의, 물질문명주의의 과잉, 기계적 과학주 의, 도시주의 같은 생활방식과 가치체제를 20세기 초에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것도 포함된다. This study inquires into how the Culturalism of the early twentieth century had been re-arranged in colonial Korea ever since it was introduced after the March First Movement. Culturalism was based on the concept of kultur which was invented as an alternative to the Western Enlightenment thoughts and French cultural hegemony over the West and the rest of the world. In German perspective, the Western civilization is doomed to be failed by its logo-centric rationalism, materialism, anti-naturalism, imperialism driven by destructive competition over the colonies and the West-centered universalization which tries to assimilate non-western cultures of colonies into the westernized civilization and culture. In this terms, kulturalism could be accepted as an alternative and liberal thought to the Western civilization and imperialism since after the end of the World War First. In colonial Korea, culture means civilization and then culturalism was understood and appropriated as a self-reconstruction-ism in a direction to get civilized. Addition to this, dependent nationalism on the West powers, Socialism, and cultural-politics of Governor-in-General in 1920s contributed together to blur the anti-colonial implications of kulturalism and to make cultural practices and activities as powerless ``fiction``. I argue that culturalism in colonial Korea lost its anti-colonial perspective by desiring for civilization`s universality instead of pursuing for cultural distinctions and particularities which express intellectual, aesthetic, moral and spiritual qualities of a society, nation, ethnic and group. In conclusion, I suggest kulturalism would have been a rare chance for us to reflect on the West-centeredness which has possessed Koreans ever since the late 19th century. I mean re-arranged civilizational culturalism in 1920s has weakened the de-colonial and post-colonial potentiality of the kulturalism itself.

      • KCI등재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