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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타(柳田國男) 민속학의 중심이동과 ‘경세제민(経世済民)’ 학-오규소라이(荻生徂徠)의 ‘경세론(経世論)’과의 비교적 관점에서
남성호 실천민속학회 2016 실천민속학연구 Vol.27 No.-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 1875~1962)는 일본민속학의 창시자이며 일본 근대학문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일찍이 농무성 관료로서 농정학에서 시작하여 민속학으로 옮겨가면서 학문적 대상이 크게 변화하였다. 즉 그의 초기연구는 산인, 유랑민, 예능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지만 후기로 오면 연구대상에서 거의 제외된다. 그 대신 평지인, 토착민, 도작민으로 옮겨가 상민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게 이른다. 학문대상에 대한 중심이동은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世のため人のため)라는 그의 실천적 학문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경세제민의 民은 일반 농민이자 도작민이며, 평지인이자 정착민이었다. 경세제민 사상은 기본적인 유교 이념으로 특별하다고 할 수 없지만, 주목할 점은 야나기타의 학문적 지향방향이 에도시대 유학자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정책적 의견에 매우 근접해 있다는 점이다. 본고는 에도막부에 제안한 소라이의 정책의견서 『정담(政談)』에 나타난 경세론 즉, 농민과 무사 중심의 토지정착론이 야나기타의 상민론에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시대적 상황의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소라이는 토지정착론을 통치의 근본이라고 주장한다. 토지정착론의 대상은 농민과 당시의 사회적 지배계층이었던 무사들이었다. 특히 농민의 토지정착 방책으로 여행자유 및 거주이전의 제한 등은 통치자의 입장을 대변한 논리이기는 하지만, 밀접한 협동사회의 구축과 함께 마을 구성원간의 친밀감은 악행을 방지하고 풍속을 순화시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당시 농업에서 이탈한 농민이나 떠돌이 무사(낭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정착해야 하는 이유를 다양한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다. 반면 상인의 증가는 사회통제를 어렵게 하며 불안의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소라이의 토지정착론은 야나기타가 농정학에서 산업조합의 구성과 민속학에서의 정착민 즉 농민에 중점을 둔 상민론과 밀접한 접점을 이루고 있음을 검토하였다. 일본 민속학의 성립초기, 야나기타학이 농정학에서 민속학으로 이행하면서 학문의 대상이 크게 변한 것은 민속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서 그 위상을 세우기 위한 고심의 결과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상민에 의한 상민을 위한 학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달리하지만 두 학자의 학문적 바탕은 경세제민의 사상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Kunio Yanagida(柳田国男, 1875~1962) is the founder of Japanese folklore who exerted a great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Japan’s modern learning. He changed his direction from agricultural adminstration policy study to the folklore, which changed his academic subject accordingly. Initially, his major subject was a mountain dwellers, wanderers, and entertainers while they were replaced by plain dwellers, native people and farmers in the later period. The change of his academic subjects is closely related with his new concept of common people(常民) which reflects his practical attitude that emphasizes the idea of governing a nation and providing relief to people(経世済民). This idea is not so special as it was basically a Confucian idea. What attracts our concern is that it seems to be linked closely with the policy theory of Sorai Ogyu(荻生徂徠, 1666~1728), a great scholar of Confucianism in the Edo era. The settlement guidance theory of farmer and samurai class in Sorai’s Seidan(政談; discussion of policy) that displays a similar view-point as Yanagita’s concept of the common people. So this paper trace the possible relationship of both ideas. Sorai insists on a settlement guidance theory as the base of governing a nation. The object of his theory was focused on samurai and farmer class as it would build up cooperative cummunity, improve the social unity of villagers, and thereby purify manners and customs by reducing misdeeds even though it restricted their freedom of residence move and travelling. He proposed the merits of his idea in many points. Meanwhile, he warns that the increase of merchants and traders would cause social unrest difficult to control. In many points, Sorai’s settlement guidance theory assumes a close resemblance with Yanagita’s common people theory based on the constitution of industrial guild in agricultural administration. The early phase of Japanese folklore was led by Yanagida who broke new field of folklore escaping from agricultural administration study with his common people theory while founding its firm base as an independent science. In conclusion, it seems obvious that both scholars’ ideas start from the thought of governing a nation and providing relief to people in spite of time gap.
유학자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음악관(音樂觀) - 道’와 ‘和’의 이해를 위한 시론 -
남성호 동아시아고대학회 2014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34
본고는 일본 근세 유학자 오규 소라이의 음악관을 그의 음악관련 저술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오규 소라이는 유학자였던 만큼 그가 추구했던 道의 관념이 음악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즉, 유가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연속적인 위치를 해체하고 개인의 도덕과 정치를 분리시켰다. 또 중국 고대 성인의 시대 즉 선왕의 시대를 이상사회로 여기고 이를 궁구하기 위해 고문사학의 연구방법을 채택하였다. 나아가 음악 역시 선왕의 古樂을 이상적인 음악으로 여기고 고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가 주장한 선왕의 도와 음악관은 고문사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하여 뚜렷해진다. 그의 유가적 정치론은 군자(위정자)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대중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각기 다른 재능을 발휘하는 세계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음악에 있어서도 다양한 악기들이 서로 다른 調로 구성되면서 궁극의 목표를 和에 두고 있음에서 잘 드러난다. 실제 쟁(箏), 금(琴)의 연주자이면서 음악이론가였던 그는 이념적이고 형식적인 악론에서 벗어나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음악가였다. 중국의 古樂을 이상적인 음악으로 여기고 그 고악의 잔재가 유일하게 일본에 남아 있음을 「악률고(樂律考)」를 통해 지적하고 있으며 음악의 궁극목표인 和는 「악제편(樂制篇)」이나 「금학대의초(琴學大意抄)」등의 저술에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는 「유란보초(幽蘭譜抄)」를 통해서 고악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악서를 통해 그가 전문가적인 음악 소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 막부의 의식음악(式楽)으로 정착해 있던 사루가쿠(猿楽)에 대한 비판은 그의 古樂중심의 음악관을 보여준다. 소라이의 음악관이 유가적인 이념을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표출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규명되어야 하나, 고문사학과 선왕의 道 실현을 위한 방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