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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경의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 분석 연구

        김윤경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247679

        김윤경의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은 무조성을 바탕에 두고 작곡된 곡이다. 이 곡은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점’, ‘선’, ‘면’이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다. 또한 현대적 색채를 지닌 선율, 리듬,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 특수주법 등의 다양한 음악적 표현이 이 곡에 사용되었다.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은 각 악장이 통일된 음악적 재료들을 바탕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식에 있어서 3개의 악장은 모두 세 부분 형식(Ternary Form)으로 구성되었지만 각기 다른 세부 구조를 갖는다. 6개의 동기들은 서로 다른 음정 관계와 리듬 구조를 지니며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동기들은 독립적으로 구분지어지기 보다는 다른 동기로부터 파생된 음정과 리듬을 이용하여 생성되기 때문에 모두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결국 각 악장이 서로 다른 특징들 속에서 구분되고 있지만 각 악장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공통의 음악적 재료들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본 논문은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의 형식, 음정, 리듬을 각 section별로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각 악장을 표현하고 있는 음악적 재료들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 composed by Kim Yun Kyoung, is a work featuring atonality. Its three movements are entitled ‘dot’, ‘line’, and ‘plane’ respectively. This piece features a variety of musical expressions which denotes a modern character in its melodies, rhythm, articulation, and special playing techniques. The movements for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 are unified in developing a common musical material. They are identical in employing a ternary form, yet are different in their sub-structures. The six motives are developed using different tone intervals and rhythmic structures. However, each motive is not independent but rather created based on the intervals and rhythms from the other motives, thus maintaining a connection with one another. This recalls one to the fact that although each movement is unique in its own way, all three movements are united based on a common musical material. Present study analyzes each section of “The Space” for Woodwind Quintet, with regard to its form, interval, and rhythm. It aims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musical materials that each movement is trying to express.

      • 택시 교대근무자의 피로,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와의 관계

        김윤경 전남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7647

        Objective: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relationships between fatigue, sleep disturbance and job stress among taxi drivers in shift work in G city. Methods: The subjects were 72 taxi drivers in shift work from eleven taxi companies where cardiovascular demonstration project has been conducting by Korean Association of Occupational Health Nurses funded by Ministry of Labor since 2004. Study instrument to test fatigue was Checklist Individual Strength (CIS): 7-point, 20-items scale (α = .863); that to test sleep disturbance was revised version of the scale which developed for psychiatric patients Wonjin Hospital at Yongin: 4-point 5-items scale (α = .728 in day shift; α = .721 in night shift); and that to test job stress was also revised version (α = .702) of Korean version (Yoon, 2005) of Energy Reward Imbalance developed by Johannes Siegrist (1996). Data were collected by self-reported from July 2 to August 21 2007, and analyzed with frequency, percentage, χ2-test, t-test, ANOVA, Duncan's multiple range test, and Pearson's correlation coefficient using SPSS-PC win-12 program, Results: 1. Average score of fatigue was 3.98±1.12 out of 7-point; that of sleep disturbance in day shift was 2.08±.56, and in night shift was 2.18±.57 out of 4-point; and that of job stress was 3.31±.50 out of 5-point. 2. According to the demographics, sleep disturbance was milder in married group than in others (t = 2.196, p = .031) in only day shift. On the other hand, it was more severe in heavier drinking group both in day (F = 4.677, p = .012) and night (F = 4.105, p = .021) shift, and was also more severe in more frequent drinking group in day (F = 3.188, p = .047) and night (F = 4.276, p = .018) shift. Job stress was significant different according to the amount of daily income from taxi driving (F = 3.592, p = .035); and it was also more severe in the group of heavier smoking (F = 3.264, p = .032) and of much more drinking (F = 3.709, p = .030) groups. 3. According to job-related characteristics, sleep disturbance was more severe in the group who could not earn their daily due in seven days a month or more than the others in day (F = 3.766, p = .015) and in night shift (F = 3.569, p = .019). And it was also more severe in the shorter career group as driver than the others in only night shift (F = 3.727, p = .029). Job stress was also more severe in the group who could not earn their daily due in seven days or more per month (F = 4.312, p = .008) and who earned less than ₩10,000/day net income than the others (F = 4.712, p = .012). But fatigue did not show any differences according to the demographics and job-related characteristics. 4. Relationships among fatigue, sleep disturbance in both shifts and job stress showed all positive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sleep disturbance of day and that of night shift showed highest correlated (r = .895, p = .001). Conclusion: Based on the above findings, authors recommend feasible, practical measures to make sure regular working hours for taxi drivers in shift work, and some break to reduce fatigue, sleepiness and stress. And also recommend methodological research to develop appropriate study instruments to examine fatigue, sleep disturbance and job stress of taxi drivers in shift work. 본 연구는 택시 교대근무자들의 피로,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와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G 광역시에서 한국산업간호협회가 한국산업안전공단 용역으로 실시하는 뇌?심혈관계질환 예방사업장 11곳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연구대상자는 전체 정규직 교대근무자 587명중 연구 참여에 구두로 동의한 교대근무자 72명을 대상으로 하였고, 자료수집은 2007년 7월 2일 부터 8월 21일 까지 실시하였다. 연구도구로 피로정도는 Checklist Individual Strength(CIS)를 이용하였고, 수면장애도구는 원진 녹색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사용한 수면장애 측정도구를 택시 교대근무자에 맞게 수정?보완하였다. 직무 스트레스 정도는 Johannes Siegrist가 개발한 Effort-Reward Imbalance(ERI)의 한국형 도구(임상혁, 윤간우, 2005)를 연구자가 택시 교대근무자의 특성에 맞게 수정?보완하였다. 수집한 자료는 SPSS win 12.0을 이용하여 실수, 백분율, 평균, 표준편차를 구하였고, 일반적 특성과 직업적 특성에 따른 피로, 수면장애와 직무스트레스는 t-test, ANOVA, Duncan's multiple range test를 하였으며, 변수 간 상관관계는 Pearson's correlation coefficient로 분석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연구 대상자의 피로정도는 총 7점 만점에 평균 3.98±1.12점 이었고, 주간근무 시 수면장애는 총 4점 만점에 평균 2.08±0.56점, 야간근무 시 수면장애는 총 4점 만점에 평균 2.18±0.57점, 직무스트레스는 총 5점 만점에 평균 3.31±0.50점이었다. 2. 수면장애는 주간근무 시 배우자와 함께 사는 기혼 군이(1.99±0.52점) 그렇지 않은 기타 군(2.31±0.63점)보다 덜 겪었으며(t = 2.196, p = .031), 주 평균 1병 이상 마시는 군이(2.49±0.64점) 반병 미만인 군(1.90±0.44점)보다 심했으나(F = 4.677, p = .012), 음주빈도에 따라서는 유의한 차이만 나타냈다(F = 3.188, p = .047). 야간근무 시 수면장애는 주 평균 1병 이상 마시는 군이(2.56±0.57점) 반병 미만인 군(2.00±0.47점)보다 (F = 4.105, p = .021), 주 3회 이상 마시는 군이(2.41±0.59점) 1회 이하로 마시는 군(2.00±0.45점)보다 심했다(F = 4.276, p = .018). 직무스트레스는 택시 교대근무자 개인의 월 평균 수입이 적을수록 더 유의한 차이를 보였고 (F = 3.519, p = .035), 하루 평균 1갑 이상 피우는 군이(3.57±0.47점) 1갑 미만인 군(3.22±0.43점)보다 (F = 3.264, p = .032), 매주 1병 이상 마시는 군이(3.57±0.55점) 반병 이하로 마시는 군(3.14±0.52점)보다 직무스트레스 정도가 높았다(F = 3.709, p = .030). 3. 주간근무 시 수면장애는 사납금을 못 채우는 일수가 7일 이상인 군이(2.40±0.60점) 사납금을 못 채운 날이 없는 군 즉, 매일 정해진 사납금을 채우는 군(1.95±0.52점)보다 수면장애가 심했다(F = 3.766, p = .015). 야간근무 시 수면장애는 운전경력이 5년 이하인 군이(2.33±0.53점) 11년 이상인 군(1.91±0.44점)보다 (F = 3.727, p = .029), 사납금을 못 채우는 일수가 7일 이상인 군이(2.50±0.62점) 사납금을 못 채운 날이 없는 군(2.05±0.43점)보다 심했다(F = 3.569, p = .019). 직무스트레스는 사납금을 지급한 후 남은 수입이 1만원 미만인 군이(3.41±0.44점) 3만원 이상인 군(2.90±0.58점)보다 (F = 4.712, p = .012), 사납금을 못 채우는 일수가 7일 이상인 군(3.56±0.43점)이 사납금을 못 채우는 날이 없는 군(2.99±0.56점)보다 높았다(F = 4.312, p = .008). 그러나 피로정도는 일반적 제 특성과 직업적 특성에 따라 유의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4. 연구 대상자의 피로정도, 주?야간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간의 상관관계에서 상관성이 가장 높은 것은 주?야간근무 시 수면장애였고(r = .895, p = .001), 다음으로 피로정도와 야간근무 시 수면장애(r = .652, p = .001), 피로정도와 주간근무 시 수면장애(r = .645, p = .001), 그리고 피로정도와 직무스트레스(r = .506(p = .001) 순이었다. 이상에서 택시 교대근무자들은 평균근무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고 실제 수입정도도 낮은 편이었으며, 교대근무로 인해 피로,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를 겪는 것으로 나타나 산업장 간호사들의 이들에 대한 적절한 관리가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연구결과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자 한다. 1. 택시 교대근무자들의 건강문제 해결 및 완화를 위한 법정 근로시간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2. 택시 교대근무자들의 피로,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 완화를 위한 유급 휴게시간의 마련이 필요하다. 3. 택시 교대근무자들의 고유한 직무특성을 반영한 피로, 수면장애 및 직무스트레스의 측정도구 개발 연구가 필요하다.

      • 진보당 사건 관련자 양이섭의 실체에 대한 연구

        김윤경 서울시립대학교 2011 국내석사

        RANK : 247647

        이 논문은 1958년 ‘조봉암 진보당 사건’에서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고 1959년 7월 29일 사형에 처해진 ‘북한간첩’ 梁利涉(梁履涉, 일명 양명산)의 實體를 규명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양이섭의 公訴 혐의는 1955년 5월 중순경 미군 첩보기관 공작원 김동혁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노동당 정보위원회 부위원장 朴日英을 만나 북한의 지령사업을 수행할 것을 승낙함으로써 간첩으로 포섭된 후 1955년 6월 중순경부터 1957년 9월 중순경까지 12차례 월북하여 위 박일영 등으로부터 북한의 지령 및 금품을 수수하여 조봉암에게 전달함으로써 간첩예비 및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조봉암의 간첩죄는 양이섭을 통해 북한의 자금 및 지령을 받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고, 진보당을 창당하고, 기관지 󰡔중앙정치󰡕 발간을 통해 북에서 주장하는 평화통일 노선을 선전함으로써 국가변란을 꾀했다는 것이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 자녀들이 청구한 재심재판에서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판결 이유는 조봉암의 간첩죄에 대한 유죄 증거들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를 기록상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과거 판결과정에서 양이섭 진술의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양이섭의 간첩죄 판결은 별도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조봉암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양이섭의 간첩죄는 법률적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다면 양이섭은 간첩이었을까. 지금까지 양이섭의 실체에 대해서는 변론적 수준의 해석만이 존재했다. 특히 과거의 이력과 활동은 수사 및 공판과정에서 그 자신이 진술한 내용으로만 알려졌다. 본 연구에서는 당시의 수사·공판기록뿐 아니라 법정에 제출되지 않은 특무대의 미행 내사기록(국군기무사령부 존안 특무대의 기록), 일제시기 양이섭의 행적을 알 수 있는 日警 체포 보도 및 高麗共靑 기록과 신분장, 국방경비법 위반 판결사례 및 대북공작원 김동혁 사건 판결 등 새로 발굴한 자료들을 두루 활용하여 양이섭이 어떤 사람이었고, 조봉암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어떻게 간첩이 되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양이섭은 신의주우체국 집배원으로 근무하던 중 1925년 9월 거액의 현금이 든 우편행랑을 들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上海로 망명했다. 그는 臨政과 학교에 큰돈을 희사하는 한편, 高麗共靑에도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후보회원으로 入會했다. 그 무렵 조봉암을 알게 되었고, 조봉암이 주도하던 上海 한인청년동맹,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과 중국공산당 한국지부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4월 日警에 체포되었다. 재판결과 치안유지법 위반(업무횡령)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4년 7월 가출옥했다. 양이섭은 과거 조봉암과 같은 독립운동 노선에서 활동한 사상적 동지였다. 다음, 1950년대의 남북교역 사실을 확인했다. 1948년 분단정권 수립 후 남북간의 공식 교역은 금지되었지만, 1950년대에도 남과 북 양측 첩보기관들에 의해 비공식적인 교역이 행해지고 있었다. 양측 첩보기관들은 민간인을 고용하여 교역을 假裝한 첩보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교역은 ‘敵地’를 드나들어야 하는 만큼 위험부담이 있었으나, 양측 첩보기관의 보증하에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비교적 안전하고 2~5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고수익 사업’이었다. 교역수익금의 상당액은 첩보기관 운영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양이섭은 HID측 교역상인으로서 북한을 내왕했고, 교역수익금 5,000만환의 1/3에 상당하는 금액을 HID에 제공했다. 마지막으로 양이섭의 신분이 공작원인가, 이중간첩인가, 아니면 단순한 남북교역 상인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당시 첩보기관의 공작원으로는 정식 등록된 공작원 신분과 첩보기관의 공작책임자가 개별적으로 고용한 민간인이 있었다. 후자가 이른바 남북교역 상인이다. 교역상인 자신의 내심은 장사에 목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장사 행위는 첩보기관의 공작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므로, 이들도 첩보 임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또, 교역의 성격상 ‘敵側’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다른 군부대나 경찰 등 수사당국에 발각, 체포될 경우 완전히 면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첩보기관의 공작 차원에서 행해지는 교역이라 하더라도 이북지역을 내왕한 것은 사실이므로 ‘이중첩자’로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양이섭의 경우 ‘이중첩자’가 아니라 북한의 일방적인 첩자로 규정되었는데, 조봉암과 만나고 그에게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양이섭은 남북교역에 참여한 이래 첩보기관 및 특무대의 미행감시를 통해 일거일동이 파악되고 있었음에도 조봉암과 만나는 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는데,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자 특무대의 검거대상이 되었다. 특무대는 진보당 간부들이 체포되던 날 1958년 1월 13일에 양이섭의 행방을 찾아나섰다. 양이섭은 2월 8일 특무대에 자진출두한 이래 3월 17일 검찰 송청시까지 40일 동안 특무대 근처 여관에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재판과정에서는 특무대 조사시 양이섭이 자살을 시도하고 재산헌납을 강요당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런데 그 재산헌납은 자살시도 실패 후 3일 동안에 행해진 것으로 ‘관대 처우에 대한 감사의 징의’로 약정된 것이었다. 2심 재판부는 양이섭의 진술번복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진술에 대한 증거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2심 재판의 사실심리가 끝난 직후 1958년 10월 13일에는 뒤늦게 양이섭의 처와 그 자녀들의 가정교사 처가 간첩방조 및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양이섭에 대한 심리적 겁박이었다. 양이섭은 최후진술에서 사후 조봉암 옆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조봉암이 대통령이 되면 고아원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과거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조봉암이 해방된 조국의 정치인으로서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목숨을 건 남북교역에서 얻은 수익금의 1/3을 기꺼이 제공했던 것이다. 조봉암에게 있어 그는 헌신적인 후원자였으며, 죽어서도 옆에 묻히기를 희구한 존경하는 동지였다. 일찍이 조봉암에 대해서는 이승만정권에 의한 피해자이자 한국사회 반공냉전체제의 희생자라는 평가가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양이섭 역시 이승만정권의 정치적 음모사건의 희생양이자 분단된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로 규정하고자 한다. 양이섭의 公訴 혐의는 1955년 5월 중순경 미군 첩보기관 공작원 김동혁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노동당 정보위원회 부위원장 朴日英을 만나 북한의 지령사업을 수행할 것을 승낙함으로써 간첩으로 포섭된 후 1955년 6월 중순경부터 1957년 9월 중순경까지 12차례 월북하여 위 박일영 등으로부터 북한의 지령 및 금품을 수수하여 조봉암에게 전달함으로써 간첩예비 및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조봉암의 간첩죄는 양이섭을 통해 북한의 자금 및 지령을 받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고, 진보당을 창당하고, 기관지 󰡔중앙정치󰡕 발간을 통해 북에서 주장하는 평화통일 노선을 선전함으로써 국가변란을 꾀했다는 것이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 자녀들이 청구한 재심재판에서 조봉암의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판결 이유는 조봉암의 간첩죄에 대한 유죄 증거들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를 기록상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과거 판결과정에서 양이섭 진술의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양이섭의 간첩죄 판결은 별도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조봉암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양이섭의 간첩죄는 법률적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다면 양이섭은 간첩이었을까. 지금까지 양이섭의 실체에 대해서는 변론적 수준의 해석만이 존재했다. 특히 과거의 이력과 활동은 수사 및 공판과정에서 그 자신이 진술한 내용으로만 알려졌다. 본 연구에서는 당시의 수사·공판기록뿐 아니라 법정에 제출되지 않은 특무대의 미행 내사기록(국군기무사령부 존안 특무대의 기록), 일제시기 양이섭의 행적을 알 수 있는 日警 체포 보도 및 高麗共靑 기록과 신분장, 국방경비법 위반 판결사례 및 대북공작원 김동혁 사건 판결 등 새로 발굴한 자료들을 두루 활용하여 양이섭이 어떤 사람이었고, 조봉암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어떻게 간첩이 되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양이섭은 신의주우체국 집배원으로 근무하던 중 1925년 9월 거액의 현금이 든 우편행랑을 들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上海로 망명했다. 그는 臨政과 학교에 큰돈을 희사하는 한편, 高麗共靑에도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후보회원으로 入會했다. 그 무렵 조봉암을 알게 되었고, 조봉암이 주도하던 上海 한인청년동맹,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과 중국공산당 한국지부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4월 日警에 체포되었다. 재판결과 치안유지법 위반(업무횡령)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4년 7월 가출옥했다. 양이섭은 과거 조봉암과 같은 독립운동 노선에서 활동한 사상적 동지였다. 다음, 1950년대의 남북교역 사실을 확인했다. 1948년 분단정권 수립 후 남북간의 공식 교역은 금지되었지만, 1950년대에도 남과 북 양측 첩보기관들에 의해 비공식적인 교역이 행해지고 있었다. 양측 첩보기관들은 민간인을 고용하여 교역을 假裝한 첩보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교역은 ‘敵地’를 드나들어야 하는 만큼 위험부담이 있었으나, 양측 첩보기관의 보증하에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비교적 안전하고 2~5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고수익 사업’이었다. 교역수익금의 상당액은 첩보기관 운영기금으로 충당되었다. 양이섭은 HID측 교역상인으로서 북한을 내왕했고, 교역수익금 5,000만환의 1/3에 상당하는 금액을 HID에 제공했다. 마지막으로 양이섭의 신분이 공작원인가, 이중간첩인가, 아니면 단순한 남북교역 상인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당시 첩보기관의 공작원으로는 정식 등록된 공작원 신분과 첩보기관의 공작책임자가 개별적으로 고용한 민간인이 있었다. 후자가 이른바 남북교역 상인이다. 교역상인 자신의 내심은 장사에 목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장사 행위는 첩보기관의 공작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므로, 이들도 첩보 임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또, 교역의 성격상 ‘敵側’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다른 군부대나 경찰 등 수사당국에 발각, 체포될 경우 완전히 면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첩보기관의 공작 차원에서 행해지는 교역이라 하더라도 이북지역을 내왕한 것은 사실이므로 ‘이중첩자’로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양이섭의 경우 ‘이중첩자’가 아니라 북한의 일방적인 첩자로 규정되었는데, 조봉암과 만나고 그에게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양이섭은 남북교역에 참여한 이래 첩보기관 및 특무대의 미행감시를 통해 일거일동이 파악되고 있었음에도 조봉암과 만나는 것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는데,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자 특무대의 검거대상이 되었다. 특무대는 진보당 간부들이 체포되던 날 1958년 1월 13일에 양이섭의 행방을 찾아나섰다. 양이섭은 2월 8일 특무대에 자진출두한 이래 3월 17일 검찰 송청시까지 40일 동안 특무대 근처 여관에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재판과정에서는 특무대 조사시 양이섭이 자살을 시도하고 재산헌납을 강요당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런데 그 재산헌납은 자살시도 실패 후 3일 동안에 행해진 것으로 ‘관대 처우에 대한 감사의 징의’로 약정된 것이었다. 2심 재판부는 양이섭의 진술번복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진술에 대한 증거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2심 재판의 사실심리가 끝난 직후 1958년 10월 13일에는 뒤늦게 양이섭의 처와 그 자녀들의 가정교사 처가 간첩방조 및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양이섭에 대한 심리적 겁박이었다. 양이섭은 최후진술에서 사후 조봉암 옆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조봉암이 대통령이 되면 고아원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과거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조봉암이 해방된 조국의 정치인으로서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목숨을 건 남북교역에서 얻은 수익금의 1/3을 기꺼이 제공했던 것이다. 조봉암에게 있어 그는 헌신적인 후원자였으며, 죽어서도 옆에 묻히기를 희구한 존경하는 동지였다. 일찍이 조봉암에 대해서는 이승만정권에 의한 피해자이자 한국사회 반공냉전체제의 희생자라는 평가가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양이섭 역시 이승만정권의 정치적 음모사건의 희생양이자 분단된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로 규정하고자 한다. This study is a trial to investigate the truth of Yang Eseop, a North Korean spy, who was brought to trial on suspicion of spying in Jo Bongam-Jinbo Party Case in 1958, sentenced to death, and was executed on July 1959. Yang Eseop was thought that he had spied by going to North Korea 12 times from June, 1955 to the middle of September, 1957, getting orders, money and valuables, and passing them to Jo Bongam. Jo Bongam-Jinbo Party's spy crime was seemed that it attempted the national rebellion by receiving money and orders from North Korea through Yang Eseop, creating Jinbo Party, promoting peaceful unification which was suggested by North Korea through publishing Jungang Jungchi(Metro Politics). On January 20, 2011, the Supreme Court overturned the original conviction in retrial of Jo Bongam' case, declaring him not guilty for spying and violating national security law. The reasons of a judgment of acquittal were as follows: (1) it was hard to see that guilty evidences for spying was proved without sensible curiosity (2) There were no other evidences found on the record. That is, there was illegality of juridical misunderstanding, so the spy quilt for Yang Eseop remains. Therefore, was Yang Eseop a spy? So far Yang Eseop was known by his statements made during investigations and trial processes. This study utilized newly found materials - (a) records of investigations and trial processes (2) records of secreat internal investigation of Defense Security Command (3) report on Yang Eseop arrested by the Japanese poli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4) records of attending Korean Communist Party (5) personal records of the prison (6) judgement cases of violating National Defense Guard Act (7) case of Kim, Donghyuk, a South Korean Spy - and examined (1) who was Yang Eseop (2) What kind of relations he had with Jo Bongam (3) who he became a spy. First of all, Yang Eseop sought asylum in Shanghai, China where there was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eptember, 1925 while working as a postman in Shineuiju Post Office. He contributed a lot of money to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donated money to Korean Communist Party, and gave and joined as a candidate member. He got to know Jo Bongam in those days, worked in Jo Bongam's community group, and was arrested by the Japanese police in April, 1931. Yang Eseop was an ideological comrade with Jo Bongam who worked on the same line of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past. Second, the trade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were verified. The official trade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was prohibited, but unofficial trades were made in both Koreas by intelligence agencies in 1950's. Intelligence agencies in both Koreas hired civilians and carried out spy businesses, disguising trades. Trades between North & South were dangerous because they needed to go to enemy territories, but these trades were made under guarantee of both intelligence agencies, so they were high-return businesses with 2~5 times of profits. a very large sum of money of trade profits were used for operation of intelligence agencies. Yang Eseop provided about 1/3 amount of trade profits to HID (Headquarters Intelligence Department) as a trade merchant of HID side. Lastly, it is a matter that Yang Eseop was a spy. He was considered as a spy because he met with Jo Bongam and provided financial aid to him. Though all his activities were observed and followed by HID and Defense Security Command while participating in trades between both Koreas, it was not a crime to meet with Jo Bongam, but Yang Eseop suddenly became an apprehension target of Defense Security Command. Defense Security Command tried to locate Yang Eseop on the day of arresting. He was investigated under illegal detention at the inn near by Defense Security Command for 40 days till March 17, since he appeared in Defense Security Command voluntarily on February 8. The fact that Yang Eseop tried to kill himself and was threatened to donate his fortune by Defense Security Command was revealed during the trial processes. That donation of his fortune was made in 3 days after he tried to commit suicide and it was agreed as a token of appreciation for generous treatment. The judge panel of his retrial didn't check his new evidences, though Yang Eseop changed his testimonies. But in hindsight his wife and the wife of kids' tutor were arrested on the charge of aiding spies and spying, so that Yang Eseop could get more psychological pressures. Yang Eseop wished he would be buried besides Jo Bongam after his death. He used to say that he wanted to run an orphanage, if Jo Bongam would become a president. He took a keen interest in Jo Bongam when he insisted "Politics of peaceful unification and the damaged public and did his best to support Jo Bongam financially. Yang Eseop was willing to provide about 1/3 amount of profits that he gained from the life-and-death trades between both Koreas. Yang Eseop was a dedicated supporter and respectful comrade who wanted to be buried besides Jo Bongam after his death. Earlier there was a appraisal that Jo Bongam was an undeserved victim of the Rhee Syngman government and the cold war system against communism of both Koreas. This study provides that Yang Eseop was also a victim of the political plot of the Rhee Syngman government and the modern history of divided Koreas. Key Words : Jinbo Party Case, Retrial, a spy, the Rhee Syngman government,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Korean Communist Party, the Maintenance of the Public Order Act, Defense Security Command,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partment), Trade between North & South Kroea, National Defense Security Act

      • 전도서의 또 다른 이름, '유한한 인생' 향유신학

        김윤경 숭실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7631

        전도서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홀대받아온 책이었다. 그 이유는 전도서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허무적인 어조의 ‘헛되도다’는 말과 서로 모순처럼 들리는 상충하는 진술들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전도서 본문의 설교들은 대부분 인생무상이라는 서론에서 하나님 경외라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동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런 설교들은 전도서 본론에 나타나는 핵심주장인 “‘유한한 인생’ 향유 신학”을 간과하고 있다. 아울러 전도서는 허무주의적 혹은 쾌락주의적인 책이라는 혐의를 받으며 목회와 신학 현장에서 방치되어왔다. 그러나 전도서를 자세히 읽으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소중함을 자각하게 하는 구절들이 책 전체에서 여덟 번 이상 나타남을 발견하게 된다. 전도서가 단순히 모순으로 뒤얽힌 단편적인 문서들의 모음집이거나 인생무상을 말하는 비관적인 책이 아니라 일관된 주장을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순의 수사학을 사용하는 고도의 문학적 기술이 돋보이고, 인생향유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책이라는 착상으로부터 이 논문은 시작된다. 제 1장 서론은 본 논문의 목적과 의의 및 연구 방법과 범위를 소개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전도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는 데 있다. 그 새로운 이해는 전도서에 대한 자세한 주석적, 정경적,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서 이뤄진다. 특히 한글 개역, 개역개정,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성경과 영어 NIV, NASB, NRSV 성경의 광범위한 비교와 분석을 통해 본 연구의 중심논지가 도출된다. 제 2장 본론은 전도서 전체의 메시지와 구조를 논의한다. 제3장 본문 주석은 전도서 12장의 자세한 주석이다. 여기서 전도서 12장 전체를 ‘유한한 인생’ 향유의 관점으로 자세히 주석하였다. 제 4장은 주석을 통해 획득된 전도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한다. 제 5장은 전도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근거하여 전도서의 강화된 정경성을 옹호한다. 제 6장 요약 및 결론은 지금까지 연구를 요약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성경으로서 전도서의 의의를 다시금 언급한다. The purpose of the present paper is to seek a new way of reading the Book of Ecclesiastes, Qoheleth. Generally, the Book of Ecclesiastes has been degraded as marginal or even paganistic by most Christians in that the Book seems to assert that life is meaningless with several repeated clauses of "vanity" or "chasing after the wind". That is not the only reason why people pay less attention to the Book than other Books in the Bible, however. The Book of Ecclesiastes has been believed to be full of contradictions in terms of several important values such as wisdom, possession, pleasure, and life itself. The Book of Ecclesiastes has thus rarely been preached or studied by Christian pastors and scholars. With this underestimated view of Qoheleth in mind I have tried to rediscover the essence and canonicity of the Book and further give helpful advice to those people who are in doubt about their faithful life because of disappointment with an absurd and chaotic world like ours. Through this paper, I have wanted to suggest that it is possible to read this so called "nihilistic and contradictory book" in a new and different way, that is, in the name of Theology of Enjoyment of ‘Non-Eternal Life’. Chapter I introduces the purpose of studying the theology of Qoheleth, its significance, the methodology, and scope of this thesis. Its methodology can be stated in threefold: the exegetical method which focuses on the comparative and analytical readings of both Korean and English Bibles with special attention to their differences, the canonical approach, which focuses on the final form of Qoheleth simply beyond making an inquiry into historical backgrounds, and the sociological approach, which puts Qoheleth in the socio-economic matrix of the Persian period (the 5th century BCE) in consultation with C. L. Seow. Chapter II discusses the message of the Book of Ecclesiastes and its literary structure. It highlights four points of Qoheleth theology: Theology of the Enjoyment of the Moment, Theology of the Consciousness of Limited Time, Theology of the Fear of God, and Theology of Education for the Youth. Chapter III explicates the whole corpus of Qoheleth by comparing both Korean and English versions of Qoheleth with one another and analyzing the contents of the Book as closely as possible. Through this interpretive task, I have found that the Book consistently emphasizes the meaning of the enjoyment of life(esp. 2:24-25; 3:12-13; 3:22; 5:18-20; 7:14; 8:15; 9:7-9; 11:7-12:1). Moreover, I have realized that Qoheleth wanted to speak of the positive aspects of life rather than its negative ones because it affirms that life is a gift from God. Enjoyment of life in Qoheleth’s mind means “living a life to the fullest.” Chapter IV offers a new understanding of the Book of Ecclesiastes. Chapter V ends with a more strong affirmation of the canonicity of the Book of Ecclesiastes. Chapter VI summarizes the whole discussion and emphasizes its significance.

      • PCE의 생물학적 전환을 위한 미생물 공동고정화 bead 반응조내 최적 산소 포기율 선정

        김윤경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7631

        PCE(tetrachloroethylene)는 지하수에서 가장 빈번히 발견되는 난분해성 오염물질로써 혐기성 조건과 호기성 조건이 동시에 제공되는 환경에서 미생물의 공대사에 의해 완전 무기화 된다. 본 실험에서는 PCE의 생물학적 전환을 위해 필요한 혐기와 호기의 두 가지 조건을 하나의 반응조 내에서 만족시키는 bead의 특성을 이용하여 PCE의 생물학적 전환을 유도하였다. 자연계 내에서 호기성 메탄영양 미생물은 적당한 용존 산소가 녹아 있으면서 혐기성 메탄생성 미생물이 생성한 메탄을 기질로 이용할 때 최고의 활성을 보인다. 메탄영양 미생물에 필요한 적절한 산소 조건을 찾아보기 위해서 메탄영양 미생물을 넣은 회분식 반응조에 기질인 메탄과 산소를 각기 다른 포기율로 공급한 뒤, 시간의 경과에 따른 메탄 소모율과 단백질 변화를 관찰하였다. 그 결과 50ml/min 이상으로 산소를 포기하였을 경우 오히려 메탄영양 미생물의 활성이 저해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혐기성 메탄생성 미생물만을 고정시킨 단일고정화 bead와 혐기성 메탄생성 미생물과 호기성 메탄영양 미생물을 고정시킨 공동고정화 bead의 메탄 생성 계수 Y_(CH_(4))를 산출한 결과, 각각 0.37L CH_(4)/g COD, 0.21L CH_(4)/g COD로 나타났다. 이러한 차이는 공동고정화 bead에서 메탄생성 미생물에 의해 생성된 메탄이 메탄영양 미생물에 의해 이용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로써 공동고정화 bead를 이용한 PCE 생물학적 전환시 메탄영양 미생물의 기질인 메탄은 따로 공급하지 않아도 됨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PCE의 효율적인 전환을 위해 필요한 산소 조건을 찾아보았다. PCE 5ppm, 25ppm을 유입시키는 연속식 공동고정화 bead 반응조 운영시 산소 포기율을 0ml/min, 5ml/min, 10ml/min, 25ml/min, 50ml/min으로 각각 달리해 주었다. PCE 5ppm 연속식 반응조는 산소 포기율 5ml/min에서 94.98%로 최고의 PCE 전환율을 보였고, PCE 25ppm 연속식 반응조에서는 산소 포기율 10ml/min 에서 91%의 PCE 전환율을 보였다. 두 경우 모두 산소를 50ml/min으로 포기시킨 경우 가장 낮은 PCE 전환율을 보였는데 이는 과도한 산소 포기가 혐기성 미생물 뿐 아니라 호기성 미생물의 활성까지 저하시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PCE(tetrachloroethylene), non-degradable chlorinated organic compounds, are contaminants that widely exist in groundwater. It is only possible to degrade PCE by the cometabolism of microorganisms. Because both anaerobic and aerobic area are required for the complete degradation of PCE by cometabolism, the characteristic of the bead was used to meet these two conditions. Activity of aerobic methanotrophic bacteria is dependent on the proper dissolved oxygen concentration and utilization of methane is producted by anaerobic methanogenic bacteria in nature. To make a decision optimal oxygenation rate range, methane and pure oxygen of various oxygenation rate is provided in batch reactor of methanotrophic bacteria, after that methane consumption and protein content of bacteria is analyzed in each batch reactors. In the result, the fact that the activity of methanotrophic bacteria is interrupted at over 50ml/min aeration rate is observed. The methane yield of immobilized with methnogenic bacteria is 0.37L CH_(4)/g COD and co-immobilized with methanotrophic and methanogenic bacteria is 0.21L CH_(4)/g COD. The difference in methane production between the two reactors is representative of the amount of methane consumed by methanotrophs. So co-immobilized beads have no addition of methane substrate for biotransformation of PCE. In the continuous experiments, 5ppm PCE has 94.98% transformation efficiency at 5ml/min aeration rate and is reduced to 0.251ppm. 25ppm PCE has 91% transformation efficiency at 10ml/min aeration rate and is reduced to 2.251ppm of PCE concentration. The lowest PCE transformation efficiency is observed at 50ml/min aeration rate. It means excessive aeration rate impeded the activities of co-immobilized microorganisms.

      • 한국화 활용의 실용성 연구 : 예술고 학생을 중심으로

        김윤경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47631

        미술교육현장에서 한국화 교육은 그 중요성과 필요성만큼 충분히 이루어 져야 하며, 생활 속 미술을 바탕으로 생활과의 관련 속에서 한국화를 실생활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단순히 한국화를 이해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창의적이고 개성 있게 다양한 분야에 우리미술을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점차 사회가 발달하고, 변모해 가는 현실에서 우리 한국화에 대한 인식 또한 새롭게 해 보면서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한국화가 우리 현대의 생활에서 활용되고 있는 범위의 다양성과 더불어 실생활에 한국화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고등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화를 실생활에 활용하는 수업방안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에 이론적인 배경으로서 한국화의 기본적인 이해로 개념과 특성, 표현기법, 종류 및 재료에 대해 짚어보고자 하였으며, 조선시대부터 한국화가 활용된 사례에 대해서도 탐색해 보았다. 또한 고등학교 학생들의 교과서 학습내용을 파악해 보고자 미술교과서의 한국화학습영역에 대해서 분석해 보았다. 이어 한국화가 현대에는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하게 활용되어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실제 수업에 적용시켜 보았다. 한국화를 실생활에 활용해 보는 한국화표현수업을 통해 도출된 결과는 첫째, 한국화 수업에 흥미를 가지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발 시킬 수 있었다. 둘째, 학생들이 한국화의 특성과 표현기법 등을 스스로 발견하여 표현할 수 있었다. 셋째, 한국화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알게 하여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넷째, 한국화를 실생활에 직접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이처럼 한국화 교육을 통하여 생활 속 안에서 한국화를 보다 더 널리 활용하며 나아가 우리 한국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세계에 한국화의 우수함을 널리 알려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Korean painting education should be done especially its importance and necessity in art education. We should let the students have an ability that can make the most of Korean painting to practical use and also we should widen the field of Korean painting greatly. Therefore the students have not only their understanding of Korean painting, but also apply Korean painting to more creative and more various field. As the development of a new community, we see Korean painting in a fresh light, realize the its importance and take great pride in it. On this thesis, I expect the students to have understanding and to develop an ability to apply Korean painting to practical use. That's why I suggest the specific lesson plans that apply Korean painting to practical use. As the theoretical background, I would like to mention the fundamental understanding of Korean painting, concept, feature, the way to express Korean painting and materials for Korean painting. I researched How Korean painting has been used since Chosun Dynasty. In addition to, I analized Korean painting in an Art textbook so that I found out the contents of the text book. I require to announce the utility of the application of Korean painting, then I put Korean painting in actual lesson. By using this lesson, I can come to conclusions below. First, the students can take an active part in the lessons with great interest. Second, the student themselves discover the feature of Korean painting and expression method. Third, I have them know the excellence and the necessity of Korean painting and take great pride in it. Fourth, I take an opportunity to develop an ability that I make good use of Korean painting whatever I own in various ways. We need to do the constant research on Korean painting and take pride in it. That is to say, we let all people realize the excellence of Korean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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