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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은(農隱) 김문주(金汶株)의 삶과 문학에 대한 소고

        김새미오 ( Kim Sae-mi-o ) 영주어문학회 2018 영주어문 Vol.40 No.-

        본고는 農隱 金汶株(1859~1935)의 삶과 문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김문주는 구한말 제주문인으로, 무과에 합격하여 40대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다. 하지만 시대가 어지러워지면서 관직을 버리고 은둔의 삶을 선택하였다. 그는 陶淵明을 처신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의 교유관계는 화갑시에 차운한 인물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교유관계의 이면에 浮海 安秉宅과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그의 인식은 勉庵 崔益鉉ㆍ忠武公 李舜臣등을 제재로 한 작품에서 보다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하지만 김문주는 많은 나이로 인해 실제 항일투쟁을 옮길 수 없었다. 김문주의 의식과 암담한 현실은 분명히 달랐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행동은 다음세대에서 이루어 졌다. 아들인 金明植ㆍ金瀅植, 손자인 金允煥 등은 여러 방식으로 항일의지를 실천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들을 철저히 탄압했고,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김문주는 이 지점에서 무력한 자아에 대해 비통한 감정을 토로하였다. 이것은 어쩌면 당대 지식인의 무력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풍광의 기술 역시 주목할 만한 사항이었다. 김문주는 기존에 있던 『瀛州十景』을 중심으로 재창작하였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예전의 영주십경을 기준으로 보다 자유롭게 제주풍광을 해석하였다. 그 중에서 「漢拏山」·「龍淵夜帆」 등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창작하였다. 김문주의 이런 창작방식은 당시에 제주풍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studied the life and works of Nong Eun Kim Mun-Joo (here after Kim). Kim went through several governmental posts after he passed the military service exam. However, as the time became troubled, he gave up his governmental post and decided to lead the life a recluse. Kim referred Doh Yeun-Myoung for making such decisions. His companionship was organized through the figures recited in poems. It was identified that Kim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Boohae Ahn Byung-Taek, which indicates his fighting spirit against Japan’s colonial power. Such spirit was clearly described in the works that discussed Myun Ahm Choi Ik-Hyun, Admiral Yee Sun-Shin However, Kim could not act himself against Japan’s power as he became already older. Kim’s fighting spirit could not come along with those days in dark, hopeless situations. Real actions were made by his offspring. His two sons Myung-Shik and Hyung-Shik and his grandson Yun-Whan practiced in diverse ways the fighting spirit against Japan. However, Japan’s colonial power persecuted them severely and Kim’s sons and grandson could not help but giving the anti-Japan movement. Kim expressed his bitter emotional pains about his powerless self. This might represent symbolically the powerlessness of intellectuals at those days. It is also worthwhile to pay attention to his descriptions of Jeju Island’s landscape. Kim recreated Jeju’s landscape by focusing up Youngjushipgyung (The Ten Great Landscapes of Jeju). However, he did not follow simply the previous styes. He interpreted on his own styles with more freedom the landscapes of Jeju. Of particular, he created Halla Mt and Yongyeonyabum (also known as youngyeon pedestrian overpass) by giving special meanings to them. Kim creation styles with full of free spirit can be said meaningful in that they suggest new perspectives on Jeju’s landscape at those days.

      • KCI등재

        제주유배문학의 연속성에 대한 시론(試論) -김진귀-김춘택-임징하를 중심으로-

        김새미오 ( Kim Sae-mi-o ) 영주어문학회 2017 영주어문 Vol.36 No.-

        본고는 제주유배문학의 연속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본고의 관심사항은 제주유배라는 형벌아래 문학양상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고민한 것이다. 본 연구는 “만구와 김진귀-북헌 김춘택-서재 임징하”를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북헌은 만구와의 아들이고, 서재는 만구와의 사위였다. 이들은 시기를 달리하면서 제주유배를 경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盤龍硯이라는 벼루로 그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제주유배문학을 연속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盤龍硯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이들의 심적 공감대를 살폈고, 이어서 각 작가의 제주유배시문을 통해 유배문학의 연속성을 점검하였다. 이들의 문학적 연결성은 형식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고민해보았다. 김진귀 제주유배문학의 특징은 청음 김상헌의 『남사록』에 맞춰 화운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이는 청음이 유배인은 아니었지만 같은 노론계열의 인물이었고, 『남사록』이 당시로서는 제주도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춘택의 경우는 아버지 김진귀의 유배공간과 제주지식인들을 계속적으로 만나면서, 유배지에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펼쳐 나갔다. 김춘택의 제주유배문학은 김진귀 제주유배 때의 공간, 인물, 감정 등을 그대로 이어나갔다. 김춘택이 이럴 수 있었던 것은 김진귀의 제주유배 시기에 제주도에 왔던 경험 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징하는 앞선 두 인물에 비해 짧은 제주유배생활을 하였다. 임징하의 작품에서는 특히 김춘택의 제주유배시기 작품에 대해 화운한 점이 주목된다. 임징하는 김춘택에게서 반룡연을 전해 받은 만큼, 제주유배에서 김춘택의 흔적에 대해서 매우 관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세 인물의 문학적 성격을 통해, 제한적이지만 제주유배문학이 내면의 감정으로 서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 다룬 문학의 연속성의 문제는 학계에서 심도있게 연구가 진행된 분야가 아니다. 이와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어 보다 정확한 문학좌표가 설정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This study examines the continuity in the exile literature of Jeju. A particular attention is made to the inquiry of how the lineage of literature descends under the hardship of exile to Jeju. For the inquiry, this study focuses upon the literature lineage that descends from Manguwa Kim Jin-Gwi to Seojae Im Zhing-Ha through Bukheon Kim Chun-Taek. Bukheon is the son of Manguwa and Seojae is the son-in-law of Manguwa. All of them were exiled to Jeju for different periods and they left their exiled experiences in writings using the identical stone ink of banyongyeon. Therefore, I consider their exiled experiences delivered through bangyongyeon are the places to understand well the continuity in the exile literature of Jeju. This paper first looks into the mentally experienced aspect of the three authors through the process of bangyongyeon to be delivered to them; and further into the continuity in the exile literature of Jeju by examining the poetry and proses that express the experiences of exiles to Jeju made by each of the three authors. For the connectivity in their writings, a formal style in their writings is examined. Kim Jin-Gwi composed several verses that respond to the words of Namsarok by Cheongeum Kim Sang-Heon. Cheongeum was never exiled to Jeju but he was the person belonging to the political group of Noron like Kim Jin-Gwi. Also, Namsarok consisted of the most accurate information of Jeju at those times. Kim Chun-Taek extended his literary world by making continuous interactions with Jeju intellectuals in his exiled land of Jeju to which his father Kim Jin-Gwi was also sent as an exile. The exile literature of Jeju made by Kim Chun-Taek succeeded his father Kim Jin-Gwi`s expressions for spaces, figures, and emotions. Kim Chun-Taek was able to do this because he visited Jeju during the time his father Manguwa Kim Jin-Gwi spent exile years in Jeju. Im Zhing-Ha spent relatively shorter periods of exiles compared to the previous two figures. Of particular, Im Zhing-Ha made extensive numbers of verses in response to the works of Kim Chun-Taek, these being done during Kim`s exile to Jeju. Im Zhing-Ha received bangyongyeon from Kim Chun-Taek so that he is considered to have a great interest in the traces of Bukheon Kim Chun-Taek during his exile to Jeju. The examination of the literary characters of the three authors enables us to confirm that the exile literature of Jeju is linked to each other through the internal emotions. The continuity in literature that this paper examines has not been well shed upon in this research field. Further studies upon this research topic is expected to pave well to establish the proper orientation for the exile literature of Jeju.

      • KCI등재후보

        『일재 변경붕 문집』에 나타난 18∼19세기의 제주사회 성격에 관한 일고―유교사회로의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

        김새미오 ( Sae Mi O Kim ) 영주어문학회 2010 영주어문 Vol.20 No.-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character of Jeju society by looking at the Anthology of 通政大夫 司憲府 掌令 authored by Byon Kyong Bung. Byon (born in 1754; died in 1824) comes from Shin Do Ri, Dae Jeong County, Jeju. He passed the exam of 島科; and later on went through several official jobs in the government. He held a typical confucian character; accordingly he authored several manuscripts that represent Confucian ideas. Byon fully recorded his experience of Shamanism in Jeju. The Anthology revealed diverse conflicts that involve Chung Geum An, which has not been found in other writings that dealt with Jeju society during his time. This finding has indicated that while the character of the ruling class of Jeju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was dominated by confucian ideology, shamanism was a underlying force in its perception. In addition his opinions about Chung Geum An point that Confucian based country village was formed in Jeju; however was not fully established. This paper confirmed the previous findings that nineteenth century ruling class of Jeju represents Confucian character on the surface; but at the same Shamanism character was coex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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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노사학맥 부해 안병택 서당의 교육과 그 의미 ― 『근재북학일기(謹齋北學日記)』를 중심으로

        김새미오 ( Kim Sae-mi-o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7 大東文化硏究 Vol.0 No.97

        본고는 『謹齋北學日記』를 중심으로 부해서당의 교육과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근재북학일기』는 근대 제주지식인 근재 김균배가 1년 6개월에 걸쳐 부해서당에서 배웠던 것을 차근차근 기록한 학습일기이다. 부해서당의 주요 학습내용은 크게 노사학맥에 대한 인식과 시국에 따른 정신교육강화로 정리할 수 있었다. 부해 안병택은 자신이 배웠던 노사 기정진 선생의 모습을 학생들에게 전하면서, 노사학맥의 생각과 가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 하였다. 이는 부해서당이 단순한 내용을 전달하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아닌, 사상과 가치를 후세에 전하는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병택은 당시 일제강점기라는 시국과 맞물려 학습자들에게 치열한 학습자세를 주문하였다. 이런 내용은 역사적 비유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부해서당의 학습방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선배와 후배가 같이 수업하면서 토론하는 방식, 둘째, 실제생활에서 학습내용을 적용하는 방식, 셋째, 학습일기를 작성하고 일기를 통해 학습을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학습방식을 통해 학습효과를 높일 수 있었음을 물론 학습자 간에 강한 유대감을 지닐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해서당에는 전라도 지역은 물론 제주도 등지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찾아왔다. 이는 노사학맥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문인들이 융합된 공간이었음을 뜻한다. 사람간의 교유뿐만이 아니라 학맥 간의 교유 역시 주목할 사항이었다. 부해서당은 화서학맥과 간재학맥의 사상이 오가는 허브의 역할을 하였다. 이들 학맥은 방식은 달랐지만 항일이라는 공통된 내면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맥 간의 교류에 대해서는 앞으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고, 이를 통해 부해서당의 위치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education styles of Seodang(a private school between the periods of Koryo and Chosun) established and taught by Boohae and its meanings drawing upon the text, Kunjae`s Journal of Learning the North(China). The text is the journal that records details of what Kunjae, the intellectual native to Jeju Island, learned from the Boohae`s school for one and a half years. The main contents of learning from the Boohae`s School concerns perceiving the scholarly linkage of Nosa network and strengthening the mental state facing the difficult political period of the Japanese Rule. Boohae Ahn Byung-taek passed down the impressions of Nosa Khi Jeong-jin from whom Boohae himself learned. This indicates that the Boohae School is the place where not only leanings were made but also scholarly thoughts and values were passed down to through generations. Also, Ahn Byung-taek asked the students to hold their mental state strong facing the difficult political situation caused by the Japanese Rule, which were expressed through historical metaphors for it. The learning methods of the Boo-hae`s school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ly, senior and junior students in the school teach each other and discuss together. Secondly, what are learned in the school is aimed to be applied to everyday life. Thirdly, by drafting a diary of learning and by sharing the diary leaning contents and styles were able to be shared among the students in the school. Through these ways of learning not only the learning effects could be maximized but also the bonded feelings among the students could be maintained. The Boohae school was widely visited by intellectuals not only from Jeonra Province but also from many parts of Jeju Island. This indicates that the school functioned as a place where the local intellectuals of Jeju Island collected together. What draws our attention is that the school provides a venue where not only the exchanges of intellectuals but also that of different generations of the scholarly network of Nosa were made possible. The learning school of Boohae played a pivotal role as a hub in which the knowledge of the scholarly networks of Hwaseo and Khanjae was exchanged. The two networks were different in its main scholarly ideas but they shared in common the fighting spirit against the Japanese Rule. A further extensive study is necessary as to the exchanges between different scholarly networks through which the standpoints of the learning school of Boohae can be more clearly underst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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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의 비지문(碑誌文)에 대한 일고

        김새미오 ( Kim Sae Mi O ) 한국한문학회 2011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47

        본고는 연천 홍석주의 비지문에 나타난 그의 인식과 서술양상을 논술하였다. 비지문을 바라보는 연천의 첫 번째 시각은 ``누가 썼는가?`` 이다. 그가 작가의 문제를 거론한 것은 올바른 작가라야 한 인물의 평가를 정확히 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直筆을 통해 객관적 사실의 기술을 중요시 했고, 사실관계를 증명하는 자료를 철저히 섭렵할 것을 주장했다. 연천의 이런 주장은 비지문을 하나의 역사로 인식했기 때 문이며, 당시 넘치는 감정을 서술했던 경향에 대한 암묵적 반발이었다. 이런 연천의 저작태도는 ``辭達``, ``단어사용``, ``구성 변화`` 의 비지문장론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연천은 작품의 구성과 서술방식의 변화를 통해 문장의 활력을 찾았다. 연천은 이를 통해 비지문의 한계를 구성으로 해결하려고 하였고, 경서와 당송고문의 범위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접근하였다. 연천의 글에 나타나는 인물 서술 양상은 ``사건 중시의 행적 서술``, ``인물성격의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묘사``로 정리할 수 있었다. 연천은 이와 같은 서술을 통해 강조점을 부각시켰고,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이 모두는 인물의 특징을 부각시키기 위한 연천의 글쓰기 전략이었다. 또한 연천의 이런 전략은 대체로 모곤을 비롯한 명대의 당송고문파와 그 궤를 같이한다. 이는 연천이 당송고문에 대해 심도있는 고민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This paper describes perception and writing styles of Yeon Cheon Hong Seok Joo that are presented in Biji scripts. The very first analytical view of Yeon Cheon on Biji scripts is to answer the question. ``who wrote it``. The reason that lies behind problematizing the author of the scripts draws upon his judgement that in order to examine correctly, the authorship is crucial. Moreover he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description of objective facts: and argued for mastering data proving a fact. This argument of Yeon Cheon came from his perception of Biji scripts as a history: and from a implicit rejection against tendency in those days describing emotions. This kind of attitude was presented in the sentence theory of Bill that covers his use of words and construction change. Specially Yeon Cheon tried to recover the dynamics of sentences through the change in construction and description style of sentences. By doing this Yeon Cheon overcome the limit of Biii scripts: and approached very concretely the extent of Kyong Seo and Dang Song Kho Mun. The way to describe a character that is found in the writing of Yeon Cheon is to locate core points upfront and the emphasis of subsequent mentioning according to characters. By doing this Yeon Cheon made it obvious the emphasizing points and described characters in a concrete shape. All of this was writing strategy of Veon Cheon that emphasized the characters of figures. Also this strategy is consistent with Dang Song Ghomun School during Myeong period including Mho Ghon. This implies that Yeon Cheon had many thoughts over Dang Song Gho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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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소백(小栢) 안달삼(安達三)의 교유와 그 의미

        김새미오 ( Sae Mi O Kim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2016 탐라문화 Vol.0 No.51

        본고는 조선후기 제주 문인인 小栢安達三(1837~1886)의 삶과 교유관계를 통해 그의 학술적 좌표를 살펴본 글이다. 본고에서는 안달삼이 학계에 다소 생소한 인물이기 때문에 먼저 그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그는 제주도 조천 출신이었는데, 조천은 당시 제주도를 대표하는 포구여서 많은 정보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그의 집안 분위기 역시 본토의 정보에 밝았고, 유가적 소양을 갖춘 문중에서 성장하였다. 이는 당시 제주도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사항이었다. 이어서 『소백처사유고』를 점검하였고, 문집에 보이는 교유관계를 중심으로 소백 안달삼의 학문적 위치를 추적하였다. 교유관계에 있어서는 특히 노사 기정진과 면암 최익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문헌상으로 안달삼은 모두 3차례 노사 기정진을 만났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고, 두 번째만남에서는 노사 주변 문인과 제자들을 만나 교유하였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아들인 부해 안병택이 동행하여 노사 기정진을 만난다. 이렇게 스승을 찾아 바다를 건너는 경우는 현재 제주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안달삼은 면암 최익현이 제주도 유배 시에 처음 만났다. 최익현은 당시 안달삼이 가지고 있던 기정진의 글을 보고, 이에 공감을 가졌고, 제주도 해배 후에기정진을 찾아가 만나게 된다. 이를 통해 노사학파와 화서학파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후 교유는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간다. 이 두 학파간의 교류의 시작점에 안달삼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학술상의 좌표를 표시할 수 있었다. 또 그 공간이 제주였다는 것 역시 매우 독특하면서도 유의미한 성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이들 학파는 안달삼의 아들인 안병택을 통해 재생산되고, 확대되어 간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제고할 수 있었다. This paper looks at the academic position of Sobaek Ahn Dal-Sam (小栢安達三), native to Jeju (1837-1886) by examining his life course and academic networks. Ahn Dal-Sam has not been known to the academia so that it is necessary to look at his life course first. He was born in Cho-Cheon in Jeju in which a port was famous as a site for diverse ranged information to flow through between the island and the mainland of Korea. He came from the family which knows well to the information from the mainland; and he grew up in the family which is well equipped with Confucius knowledge. This is quite unusual in Jeju at that time. Next, I examined the book of Ahn Dal-Sam, Sobaekcheosayugo and traced his role and standing in the relevant academic circle by focusing upon his academic networks. For his academic networking, I focused upon his exchange with Nosa Ki Jeong-Jin and Myunam Choi Ik-Hyun.According to the book, Ahn Dal-Sam met Nosa Ki Jeong-Jin three times in his life. On the first meeting, the two were a professor and a student; and he further exchanged meetings with academics that are close to Nosa and his students. For the third meeting, his father Boohae Ahn Byung-Taekcame along with him in order to meet Nosa Ki Cheong-Jin in the mainland. Ahn Dal-Sam first met Myunam Choi-Ik Hyun during his exile period to Jeju. Choi Ik-Hyun came to know the writings of Ki Jeong-Jin through Ahn Dal-Sam, for which he was greatly impressed ; and later on after completing his exile term in Jeju, he made a visit to Ki Jeong-Jin himself. By this visit, the academic exchange of the Nosa Circle and the Hwaseo Circle began; and afterwards the exchange of meetings expanded gradually. It can be said that Ahn Dal-Sam was instrumental in connecting the two academic circles and this points out his role and standing in the academia. It is also meaningful and characteristic that it is in Jeju that the interchange of the two academic circles were made. Furthermore, the two academic circles were reproduced and expanded by Ahn Byung-Taek, the son of Ahn Dal-Sam, which also holds significant imp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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