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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 守墓人의 구분과 立役方式 -廣開土王陵碑 守墓人烟戶條를 중심으로-

        김락기 한국고대사학회 2006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41

        중국 길림성 集安市에 있는 『광개토왕릉비문』은 비문의 마지막에 기록된 수묘인연호에 관한 규정에 따라 고구려의 수묘제도와 지배영역의 확대를 전해주는 귀중한 1차 사료로서 이용되어 왔다.이러한 고구려 수묘제도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계승하면서 다음 세 가지 점을 중심으로 국연과 간연이 성격과 입역방식을 살펴보았다.첫째, 징발된 수묘인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하는 문제인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왕릉의 수묘를 담당하는 고구려 중앙관서의 존재에 대해서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물론 직접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도 있지만, 중국과 일본 등 왕릉이 있는 국가에는 반드시 수묘를 담당하는 諸陵司와 같은 관서가 있었다. 따라서 기록되지 않은 부분도 포함해서 하나의 '제도'로서 비문의 기록을 고찰하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둘째, "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라는 기록의 해석문제인데, 이 구절은 이미 광개토왕릉이 완성되고 비석도 세워져 수묘를 위한 준비가 끝난 시점에서도 阿旦城과 雜珍城의 守墓戶가 아직 구체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아단성과 잡진성의 수묘호는 적어도 능비가 세워진 414년 당시에는 수묘역에 투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또 아단성과 잡진성의 수묘호 만이 예외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그들이 포함된 범주 전체가 414年에는 수묘역에 투입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범주는 신래한예와 간연인데 신래한예는 광개토왕의 '敎言'에 따라 처음부터 수묘호로 지정된 존재였으므로 이들이 수묘의 시작 시점에서 수묘역에 종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간연이 능비가 세워진 시점에선 수묘역에 투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또 "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卄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 看烟三百都合三百 家"라는 기록의 해석도 문제인데, 지금까지는 수묘인 중에서 국연이 30家, 간연이 300家라는 1:10의 비율에 주목하고 국연과 간연 모두 구민과 신래한예로 구성되어 있는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국연 1가와 간연 10가가 하나의 노동조를 이루어 수묘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대표적인데, 구민 수묘호 110가가 징발된 이유는 신래한예 수묘호가 수묘에 관한 법칙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연과 간연을 막론하고 신래한예만으로 노동조가 구성될 수 있는 조합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셋째, 비교적 수묘제에 관한 史料가 잘 남아있는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다. 물론 사료의 연대가 약 400년 이상 차이가 나서 직접 이용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일본에는 비문이 전하는 고구려 수묘제도와 매우 비슷한 기록이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특히 "別記云, 常陵守及墓守, 幷八十四戶, 倭國 七戶, 川內國 七戶, 津國五戶, 山代國五戶, 免調 也, 公計帳文莫納, 別爲計帳也. 借陵守及墓守, 幷百五十戶, 京二十五戶, 倭國五十八戶, 川內國五十七戶, 山代國三戶, 伊勢國三戶, 紀伊國三戶, 右件戶納公計帳文, 而記借陵守也(『令集解』 卷第4, 治部省 諸陵司條의 古記에 引用된 別記)"라는 기록은 수묘인을 '常陵守及墓守'와 '借陵守及墓守'로 구분하고 각 지역별로 정원을 규정하고 있어 비문의 기록방식과 사실상 같다고 할 수 있다.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한 결과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국연은 능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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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風嗽)의 원인(原因) 증상(症狀) 치법(治法) 치방(治方)에 관(關)한 문헌적(文獻的) 고찰(考察)

        김락기,오태환,정승기,이형구,Kim, Rack-Ki,Oh, Tae-Hwan,Jung, Sung-Gi,Rhee, Hyung-Koo 대한한방내과학회 1991 大韓韓方內科學會誌 Vol.12 No.2

        This study has been carried out to investigate the cause symptom and treatment of wind-coughing ( 風嗽 ) by referring to 38 literatures. The results were obtained as follows; 1. The factors causing wind-coughing ( 風嗽 ) is wind-air. The 1st factors are mistaking of transport lung-air ( 肺氣不宣 ) and cleaning lung (肺失淸肅). 2. The symptom of wind-coughing ( 風嗽 ) is as follows. Bi Saek Sung Jung ( 鼻塞聲重 ), Gu Gun Hu Yang ( 口乾喉痒 ), A Mi Kung I Hae ( 語未竟而咳 ), Maek Bu ( 脈浮 ), Jeang Han Jang Yul ( 憎寒壯熱 ), Ja Han OU Pung ( 自汗惡風 ), Bun Jo ( 煩躁 ), Bi Ryu Chung Chae ( 鼻流淸?), Ya Jung 11 Jyung ( 夜重日輕 ). 3. The treatment-method of wind-coughing ( 風嗽 ) is as follow. Bal San Bul Ga Ha ( 發散 不可下 ), So Pung San Han ( 疏風散寒 ), Chung Yul ( 淸熱 ), Sun Pae Ji Hae ( 宣肺止咳 ). 4. The treatment-herbs of wind-coughing ( 風嗽 ) is as follow. Kwan Dong Hwa San ( 款冬花散 ), Gun Bi Cho San ( 金沸草散 ), Sam Yo Tang ( 三拗湯 ), Ji Hae San ( 止嗽散 ), Hang So San ( 杏蘇散), Sang Kuk Yeam ( 桑菊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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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세기 靺鞨 諸部의 내부 구성과 거주지

        김락기 고구려발해학회 2010 고구려발해연구 Vol.36 No.-

        靺鞨은 563년에 北齊에 조공한 것으로 역사상 처음 모습을 드러낸 만주의 고대종족으로서 후대의 契丹族 → 遼, 女眞族 → 金, 滿洲族 → 淸과 같이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국사서에 실려있는 단편적인 언급을 통해 주로 연구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주변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어져 성과가 쌓인 기존 말갈 연구를 발판으로 삼아 말갈의 내부 구성, 말갈 주요 집단의 거주지를 재검토하는 방식을 통해 말갈 자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만주의 자연환경, 식생 분포 등을 말갈 관련 기록의 그것과 대조하는 방식이나,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는 野人 관련 기록에서 말갈의 내부구성을 유추하는 방식이 기존 연구와는 다른 점이다. 이를 통해 말갈은 200여 호 안팎의 800여명으로 구성된‘小部’와 소부가 여러 개 모인‘大部’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의 인구는 대략 3만 명 전후라는 의견을 제출했다. 말갈의 거주영역은 소위 말갈 7부를 기준으로 검토하였다. 粟末部는 伊通河, 霧開河, 飮馬河, 沐石河일대에 분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중에서도 伊通河 유역의 거주민이 주로 고구려와 相爭하였다고 생각된다. 伯돌部는 淸代 白都訥인 扶餘縣를 중심으로 ?林河 이북의 黑龍江省 雙城市 부근까지 포함할 수 있을것이다. 安?骨部의 경우는 阿什河 중?하류에 해당하는 黑龍江省 阿城市와 하얼빈시 중심구역, 그리고 呼蘭河가 동류 송화강에 합류하는 하얼빈시 呼蘭區 일대를 포함하는 범위로 볼 수 있다. 拂涅部는 속말부의 동쪽에 위치한 ?林河 중류의 五常市 일대와 느牛河 부근, 좀 더 넓게 보면 五常市의 동북쪽에 위치한 尙志市 일대까지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拂涅部의 동쪽에 있다고 한 號室部는 張廣才嶺과 鍋?山 사이의 牧丹江 중하류와 鍋?山 동쪽의 ?口縣 일대에 비교적 소규모로 분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安?骨部의 동북쪽에 위치한 黑水部는 대략 동류 송화강과 목단강이 합류하는 依蘭縣에서부터 黑龍江과 松花江이 합류하는 同江市 일대에 매우 넓게 퍼져 거주하였다고 생각된다. 白山部는 위치 판단의 근거가 되는 백산이 大禿頂子山일 가능성이 크므로, 거주지는 ?安에서 鏡泊湖를 거쳐 敦化에 이르는 牧丹江 상류의 大禿頂子山 동남쪽 지역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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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경간 강박스거더교의 교량형상계수별 경관선호도 분석에 관한 연구

        김락기,임성빈,금기정,양계승 대한교통학회 2006 대한교통학회지 Vol.24 No.2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evelop landscape preference and define elements of difference in landscape preference of the 1-span Steel Box Girder Bridge by Bridge Shape Parameters(BSP) through Design of Experiments.Lately, the 1-span Steel Box Girder Bridge is dominationg much component ratio and the Steel Box Girder Bridge has strong points that is economically profitable and management has easy when construct. but landscape preference of the 1-span Steel Box Girder Bridge was evaluated low because impression of landscape is being surfeited and dulled. Do to consider optimization in design that give change to Bridge Shape Parameters(BSP) to supplement this shortcoming in this study.Therefore, this study changes Bridge Shape Parameters(BSP) and extract elements that influence in landscape preference of the 1-span Steel Box Girder Bridge, and based on the design that consider landscape preference of the 1-span Steel Box Girder Bridge, some essential guidelines for rational design of the 1-span Steel Box Girder Bridge suggested. 본 연구는 단경간 강박스거더교를 대상으로 교량의 형태적 특성인 교량형상계수를 변화시켜가며 3D- Simulation을 평가매체로 하여 경관선호도를 조사, 분석하고 경관선호도를 결정하는 시각적 선호인자와 물리적 선호인자를 분석하여 경관선호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경관선호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는 거더가 얇고 곡률이 많이 적용되며 교대를 내측으로 기울인 내측형 경사벽으로 구성된 경관으로 나타났고, 경관선호도가 가장 낮은 것으로는 거더가 가장 두껍고 곡률이 적용되지 않았으며 교대를 내측으로 기울인 내측형 경사벽으로 구성된 경관으로 나타났다. 경관선호도에 차이를 나타내는 시각적 선호인자는 높이에 관한 개방성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독특함에 관한 심미성에서 가장 작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단경간 강박스거더교의 경관선호도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를 추출한 결과 시각적 선호인자로는 심미성과 개방성이 추출되었으며, 물리적 선호인자인 교량형상계수로는 거더의 높이비, 거더의 곡률, 교대의 각도 모두가 경관선호도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연구의 결과, 경관을 고려한 단경간 강박스거더교를 설계할 때는 거더의 높이를 구조적으로 안전한 수준범위내에서 가장 얇게 적용하고, 거더에 곡률을 안전한 수준범위내에서 최대값을 적용하며, 교대의 각도는 수직형 면벽보다 외측형 경사벽을 적용하는 것이 경관선호도를 향상시키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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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9세기 고구려 안시성 인식과 ‘城上拜’ -「연행록」과 「문집」을 중심으로-

        김락기 한국역사민속학회 2013 역사민속학 Vol.0 No.42

        高句麗 安市城은 645년 唐 太宗의 고구려 침략 시 唐軍의 공격을 막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당 태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전승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 입장에서는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中國 遼寧省 海城市 八里鎭에 있는 英城子山城을 안시성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며 근래 요녕성 大石橋市 周家鎭에 있는 海龍川山城에 비정하는 의견도 제출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요녕성 鳳城市 鳳城鎭에 있는 鳳凰山城이 고구려 안시성이라는 견해가 연행록을 비롯하여 여러 문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17세기 말에는 안시성이 開平縣 인근에 있다는 기록을 따라 봉황산성은 안시성이 아니라 부정하는 견해가 나오고, 이에 대한 재반박이 나오는 등 18세기와 19세기 중엽까지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그러한 논의의 내용과 배경에 대한 검토 결과 봉황산성과 고구려 안시성을 최초로 연결하여 본 사람은 그간의 통설처럼 1610년에 사행한 趙緯韓이 아니라 1609년에 사행한 柳夢寅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 이후 南九萬이나 徐有聞처럼 안시성의 실제 위치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구체적으로 피력한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이렇듯 연행록의 저자들이 안시성을 기록한 이유에는 연행 노정에서 예외 없이 만나게 되는 사적이라는 점, 먼저 연행한 사람들의 기록을 참고하였다는 점, 반복적으로 연행에 참가한 역관․역졸 같은 수행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고 보지만, 그 바탕에는 고구려사, 나아가 한국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안시성 전투와 안시성주에 대한 관심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었던 것은, 의리를 근본으로 하는 중화주의의 계승자로 자처한 17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안시성주의 ‘城上拜’라는 행위가 중화질서의 회복을 꾀하는 자신들의 지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正統論과 尊周論의 입장에서 정통왕조인 명나라와 명나라 황제에 대한 자신들의 의리 관념을 안시성주의 성상배에 투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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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개발협력과 헬스케어’ 수강생의 국제개발협력 인지도 변화

        김락기,김수정,김민경,신은규,이효영 대한통합의학회 2022 대한통합의학회지 Vol.10 No.2

        Purpose : This study aimed to identify the educational effects of the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and Healthcare course from 2018 to 2020. Methods : Changes in awareness of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understanding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as well as government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 thoughts on aid, and thoughts on government’s aid scale) were analyzed using web-based surveys. The pre-course survey was conducted 1-2 weeks before the semester started, and the post-course survey was conducted 1-2 weeks after the semester ended. All data were analyzed using the SPSS 26.0 program, and statistical significance was set at p< .05. Results : A total of 314 people participated in the survey before taking the course, and 286 people participated in the survey after taking the course. Analysis of the changes in students’ awareness of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showed that all items (understanding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and government ODA, as well as having thoughts on aid and government’s aid scale) were improved. Regarding changes in awareness according to general characteristics, thoughts on aid were statistically significant according to all characteristics except for 2018. Regarding government’s aid scale, awareness scores increased after taking the course in students who majored in healthcare, fine arts and athletics, broadcasting and media studies, and digital contents. Conclusion : This study showed that changes in awareness of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were largest in second-year students. Compared to changes regarding international development cooperation, government ODA, and thoughts on aid, changes regarding thoughts on government’s aid scale were minor. In the future, it is necessary to develop class content suitable for the first-year level and to supplement and operate content that can change the way of thinking on government’s aid sc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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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9세기 고구려 안시성 인식과 ‘城上拜’

        김락기(金樂起) 한국역사민속학회 2013 역사민속학 Vol.42 No.-

        高句麗 安市城은 645년 唐 太宗의 고구려 침략 시 唐軍의 공격을 막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당태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전승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 입장에서는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中國 遼寧省 海城市 八里鎭에 있는 英城子山城을 안시성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며 근래 요녕성 大石橋市 周家鎭에 있는 海龍川山城에 비정하는 의견도 제출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요녕성 鳳城市 鳳城鎭에 있는 鳳凰山城이 고구려 안시성이라는 견해가 연행록을 비롯하여 여러 문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17세기 말에는 안시성이 開平縣 인근에 있다는 기록을 따라 봉황산성은 안시성이 아니라 부정하는 견해가 나오고, 이에 대한 재반박이 나오는 등 18세기와 19세기 중엽까지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그러한 논의의 내용과 배경에 대한 검토 결과 봉황산성과 고구려 안시성을 최초로 연결하여 본 사람은 그간의 통설처럼 1610년에 사행한 趙緯韓이 아니라 1609년에 사행한 柳夢寅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 이후 南九萬이나 徐有聞처럼 안시성의 실제 위치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구체적으로 피력한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이렇듯 연행록의 저자들이 안시성을 기록한 이유에는 연행 노정에서 예외 없이 만나게 되는 사적이라는 점, 먼저 연행한 사람들의 기록을 참고하였다는 점, 반복적으로 연행에 참가한 역관·역졸 같은 수행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고 보지만, 그 바탕에는 고구려사, 나아가 한국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안시성 전투와 안시성주에 대한 관심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었던 것은, 의리를 근본으로 하는 중화주의의 계승자로 자처한 17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안시성주의 ‘城上拜’라는 행위가 중화질서의 회복을 꾀하는 자신들의 지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正統論과 尊周論의 입장에서 정통왕조인 명나라와 명나라 황제에 대한 자신들의 의리 관념을 안시성주의 성상배에 투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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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세기 靺鞨 諸部의 내부 구성과 거주지

        김락기(金樂起) 고구려발해학회 2010 고구려발해연구 Vol.36 No.-

        靺鞨은 563년에 北齊에 조공한 것으로 역사상 처음 모습을 드러낸 만주의 고대종족으로서 후대의 契丹族→遼, 女眞族→金, 滿洲族→淸과 같이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국사서에 실려있는 단편적인 언급을 통해 주로 연구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주변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어져 성과가 쌓인 기존 말갈 연구를 발판으로 삼아 말갈의 내부 구성, 말갈 주요 집단의 거주지를 재검토하는 방식을 통해 말갈 자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만주의 자연환경, 식생 분포 등을 말갈 관련 기록의 그것과 대조하는 방식이나,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는 野人관련 기록에서 말갈의 내부구성을 유추하는 방식이 기존 연구와는 다른 점이다. 이를 통해 말갈은 200여 호 안팎의 800여명으로 구성된‘小部’와 소부가 여러 개 모인‘大部’로 구성되었으며, 대부의 인구는 대략 3만 명 전후라는 의견을 제출했다. 말갈의 거주영역은 소위 말갈 7부를 기준으로 검토하였다. 粟末部는 伊通河, 霧開河, 飮馬河, 沐石河 일대에 분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중에서도 伊通河유역의 거주민이 주로 고구려와 相爭하였다고 생각된다. 伯 部는 淸代白都訥인 扶餘縣를 중심으로 拉林河이북의 黑龍江省雙城市부근까지 포함할 수 있을것이다. 安車骨部의 경우는 阿什河중ㆍ하류에 해당하는 黑龍江省阿城市와 하얼빈시 중심구역, 그리고 呼蘭河가 동류 송화강에 합류하는 하얼빈시 呼蘭區일대를 포함하는 범위로 볼 수 있다. 拂涅部는 속말부의 동쪽에 위치한 拉林河중류의 五常市일대와 ?牛河부근, 좀 더 넓게 보면 五常市의 동북쪽에 위치한 尙志市일대까지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拂涅部의 동쪽에 있다고 한 號室部는 張廣才嶺과 鍋 山사이의 牧丹江중하류와 鍋 山동쪽의 林口縣일대에 비교적 소규모로 분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安車骨部의 동북쪽에 위치한 黑水部는 대략 동류 송화강과 목단강이 합류하는 依蘭縣에서부터 黑龍江과 松花江이 합류하는 同江市일대에 매우 넓게 퍼져 거주하였다고 생각된다. 白山部는 위치 판단의 근거가 되는 백산이 大禿頂子山일 가능성이 크므로, 거주지는 寧安에서 鏡泊湖를 거쳐 敦化에 이르는 牧丹江상류의 大禿頂子山동남쪽 지역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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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의 ‘遊人’에 대하여

        金樂起(Kim, Rak-ki) 백산학회 2000 白山學報 Vol.- No.56

        This article examines historical facts about Yu-in(遊人) people appearing in Sui-suo Koryojun(隋書 高麗傳). According to the text, they were taxal every three years and the burden caused by it was lighter than that of the common Koguryo(高句麗) populations. This can be regarded as an evidence that they occupied a special position socially. In former studies, they were conceived variously such as the poor(貧窮民), prostitutors(賣淫女), subordinate group(附庸民) or musicians(樂人). But it looks that they satisfied at relatively simple comprehensions about Yu-in and tended to focus on their peculiar character itself. Therefore, here I trial to figure out certain realities concerning Yu-in, especially by answering to three questions. (1) Exactly in which period(s) did Yu-in exist? (2) Did they have any relationship with Yu-nio(遊女)? If so, what kind? (3) Are there other examples in Chinese historical records mentioning the word Yu-in? Yu-in groups did not always exist. In any historical records, they appear only in association with Sui(隋) Dynasty. This fact suggests that Sui Dynasty was involved in Yu-in’s emergence. Perhaps the war between Koguryo and Sui was the crucial factor. Then, it would be reasonable to identify Yu-in as Chinese people of the late Sui who happened to remain in Koguryo among the war participants(隋末從軍沒留者). Some historical records shows that there were a lot of women called Yu-nio, without a definite husband. We can also find several records saying that she was officially forced to marry a Yu-in male. The Koguryo government induced them to settle in its territory by that way. Lastly, the word Yu-in is seen here and there in Chinese historical texts, designating wanderers away from their home village. In this regards, it would be natural that those who were left in Koguryo after the war mentioned above were described as Yu-in by the Chinese writers of Sui Dynasty. To sum up, Yu-in means those Chinese people who were left in Koguryo and settled there by marrying Yu-nio after the war between Sui and Koguryo. Also, it should be noted that the term Yu-in shown in historical records is originated from the Chinese, not reflecting Koguryo’s point of view at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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