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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愚 桂奉瑀(1880~1959)의 역사민속 서술과 인식

        임학성(Lhim, Hak-Seong) 한국역사민속학회 2015 역사민속학 Vol.0 No.48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국외로 망명하여 한국학 연구 및 민족 교육에 평생을 바친 北愚 桂奉瑀 (1880∼1959)의 한국 역사민속 서술 내용과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계봉우는 조선왕조의 운명이 다하던 19세기 말, 함경남도의 하층민 집안에서 태어나 북간도와 연해주, 중앙아시아(러시아) 등의 지역에서 한국학/고려학을 연구·교육하고 정립한 선구적 인물이다. 특히 그가 이루어낸 한국학 연구는 한국어와 한국문학, 한국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쳤으며, 독립과 민족 및 사회주의 운동에 전념하면서도 무려 30여 편의 한국학 관련 저술을 이루어냈다. 한국학에 대한 그의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窮究는 필연 한국 역사민속에 대해서까지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던 것이다. 그런데 계봉우가 남긴 한국학 분야의 업적에 반해, 그에 대한 한국학계에서의 소개와 연구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가 59세에 중앙아시아(현, 카자흐스탄)로 강제 이주 되어 말년을 우리와 미수교국인 소련에서 지냈던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다가 한?러 수교(1990년) 이후 계봉우의 활동 내용 및 저술들이 국내에 알려지고 수집되면서 독립운동사 방면의 연구가 이루어졌고, 최근에는 그가 남긴 한국어학·한국문학·한국사 관련 저술들을 분석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 계봉우를 일제강점기 해외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한국학자 朴殷植과 申采浩의 업적과 비교해도 거의 손색이 없다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계봉우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나 아직 역사민속학 방면에서의 考究는 이루어진 바가 없다. 이에, 본 논문을 통해 그의 역사민속에 대한 서술 내용과 인식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계봉우가 관심을 보인 한국 역사민속은 ① 종교·신화, ② 演戱, ③ 舊曆 및 名節, ④ 通俗 등으로 집약 된다. 이 가운데 연희를 제외한 나머지 역사민속 항목들은 모두 착취계급의 기만, 미신, 비과학적 몽매 등과 같은 부정적 인식 하에 서술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연희는 고대 西域과의 교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고려시대에 연희가 성행하다가 유교를 숭상한 조선시대에 들어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연희가 침체되기 시작했다고 서술·인식하였다. 그렇지만 民衆 속에서 자주 흥행되던 諷刺劇과 滑稽劇이 탄생한 점을 조선시대 연희사의 큰 특징으로 보았다. 셋째, 계봉우는 다양한 전거에 토대하여 한국의 역사민속을 서술함으로써 당대의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 교육시키고 후대의 한국 역사민속학자들에게 연계하는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민속이 지닌 긍정적, 민중적, 祈福的 요인들을 외면한 부분은 논쟁이 될 사항이라 하겠다. 한국 역사민속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전적으로 그의 思考에 크게 영향을 끼친 기독교 신앙과 사회주의 사상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This paper examines Buk-Woo, Gye Bong-Woo’s (1880-1959) writings and viewpoint on Korean historical-folklore, who fled the country under Japanese rule and devoted his whole life to nationalist education and research of Korean studies. Gye Bong-Woo, born from the low class, Hamgyeongnamdo, in the late 19th century, was a pioneer who studied, taught, and built Korean studies in North Gando, the Maritime Territory, and Central Asia (Russia). Especially, his research ranged over Korean language, literature, and history. In spite of activities for independence, nationalism, and socialism, he wrote about thirty books on Korean studies including Korean historical-folklore. Introduction and Research of his achievement was begun in the field of Korean studies after 1990, the first year of Korean-Russian relations. Collecting and examining his writings, researchers evaluated that he nearly compared with Park, Eun-Sik and Shin, Chae-Ho, the typical scholars of Korean studies in the colonial era. There has been no review of his Korean historical-folklore, however. This paper analyzes what he wrote about Korean historical-folklore and how he viewed it. The results were as follows. First of all, of all Korean historical-folklore, he was interested in (a) religion and mythology, (b) play, (c) the lunar calendar and holidays, and (d) common custom. He described on them, except play, according to the negative point of view, such as deception of the exploiting class, superstitions, and non-scientific ignorance. Secondly, he wrote that Korean play was much influenced by interactions with countries bordering west China in the ancient days. He also wrote that it was very popular during Goryeo Dynasty, but was in decline under Confucianism in Joseon Dynasty. Nevertheless, he considered the birth of satirical drama and burlesque drama, very popular with public, as an important characteristic of history of play in Joseon Dynasty. Finally, he ignored positive, popular, wish-making characteristics of Korean historical-folklore, although he described on it with various reasons, taught it Korean people in Central Asia, and left his legacy to the succeeding scholars. It seems that Christian belief and socialist thought would affect on his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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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역사민속학회 1990‘; 창립당시의 학계 정황과 창립의 학사적 의의

        주강현 한국역사민속학회 2010 역사민속학 Vol.- No.33

        본 연구는 어떤 견고한 논문이나 학술적 문제제기를 하려는 성격의 글이 아니라 보다 ‘자료적’ 성격의 글이다. 2010년 봄은 한국역사민속학회가 창립 20주년을 맞는 의의를 지닌다. 창립 당시의 학계정황을 회고하고 창립의 학사적 의의를 정당하게 인식함으로써 향후 학회의 향방에도 일조하고자 한다. 창립 당시의 정황에 관한 정확한 인식을 못할 경우도 있기에 이를 재정리함은 이후 학사 서술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본 글은 1990~1993년의 3~4년 사이에 국한하여 한정하기로 한다. 이후의 논의는 별도의 지면을 통하여 서술되어야한다. 1990년은 1987년의 민주화투쟁으로부터 불과 3년의 시점이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반은 중견 및 소장층 연구자에 의한 학회결성의 조짐이 극대화된 시점이다. 한국역사민속학회의 창립도 이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역사민속학회의 창립 취지와 방향은 ‘민중생활사연구’에 있으며, 독립과학으로서의 ‘학’을 창출할 수 있는 현실적 배려 등 중층적 요구를 반영하여 한국역사민속학회로 학회 명칭이 결정되었다. 역사민속학을 태동시킨 일군의 연구자들이 희망하였던 목표 중에서 일부는 성취되었고, 일부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시대가 변하면 학문의 방향과 내용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창립 당시의 목표가 오늘에 부합되지 않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과학으로서의 민속학’을 우리 학계에 뿌리내리겠다는 역사민속학회의 입장과 학문적 조건은 변한 것이 별로 없다. 이상의 학사 초기 자료를 통하여 21년 전의 학계 동향을 읽어내고, 이를 후대의 학사 서술을 위한 하나의 자료로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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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민속콘텐츠의 창출 현황과 대중화의 과제

        박경하,박주영 한국역사민속학회 2018 역사민속학 Vol.0 No.55

        Since the mid 1990s, there has been an international trend of neo-liberalism based on the logic of information and market competition around the world and the bailout crisis of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nationwide. Paradoxically, the popular use of historical-folklore contents was triggered as a part of efforts to overcome the ‘humanity crisis’ in the context of social pragmatism. In order to analyze the trend of popularization of historical-folklore contents, it is necessary focus on the establishment of cultural contents infrastructure to utilize the history and culture of the traditional era. For those businesses, there are 「Knowledge Information Resource management Project」 (Ministry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National Information Society Agency, 1999~ ), 「The Cultural Resource Digital Contents Development Program」 (Ministry of Culture and Tourism․Korea Culture Contents Agency, 2002~ ), 「The Digital Local Culture Encyclopedia of Korea」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04~ ). The ‘Cultural Archetype Project’ which was proposed by the Korean Culture Contents Agency under Ministry of Culture and Tourism in 2002, to make use of digital technology and make it more competitive as a creative material for the development of the cultural industry, it became a catalyst for the creation of historical-folklore contents. The field of historical-folklore contents need efforts to re-establish academic disciplines such as establishing scholarship, seeking methodology and theory. In order for the public to have high-quality contents, the university should produce outstanding individuals who can make the contents. In other words, it is necessary to develop a professional and systematic research education curriculum. The public’s perception on history is produced through contents such as movies, cartoons, or games and they perceive those contents as real historical fact. It can lead the public to understand wrong history. To correct this, it is the responsibility of historians to create a circumstances that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history when they produce historical-folklore contents. Additionally, they should continuously consider how to coexist excessive commercialization and pure academy. The efforts to popularize historical-folklore contents will not only be limited to the revival of the humanities itself and the cultural contents industry, but also be a creative process that will create a new value orientation for the entire society and be an opportunity to create a new historical-folklore and humanities in the 21st century at the same time. 1990년대 후반부터 정보화와 시장경쟁논리를 바탕으로 한 신자유주의라는 세계화의 동향과 국내적으로는 IMF의 구제금융 위기 속에서, 실용주의가 강조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학에서도 실용성이 떨어지는 학문단위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인문학 관련학과들이 통폐합되는 현실에서 이를 인문학 연구자들은 새로이 등장하는 문화콘텐츠분야에서 대안을 찾으려 하였고, 역사민속학계에서는 역사민속콘텐츠의 창출과 이의 대중적 활용에 주목하였다. 역사민속콘텐츠의 대중화 경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전통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활용한 디지털 인프라 구축사업에 주목해야 한다.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정보문화진흥원, 1999년~ ), 「문화원형디지털콘텐츠화사업」(문화관광부․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2002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사업」(한국학중앙연구원, 2004년~ ) 등이 있다. 2002년 2월에 문화관광부 출연기관인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디지털 기술을 이용, 콘텐츠화하여 문화산업의 발전에 필요한 창작소재로 경쟁력을 높이고자 공모 제안한 ‘우리문화원형사업’이 역사민속콘텐츠의 본격적인 창출의 기폭제가 되었다. 역사민속콘텐츠 분야는 학문의 정립과 그와 관련된 방법론 및 교육론의 모색, 고증, 검토 등 학문을 재정립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중이 수준 높은 콘텐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이를 제작하기 위한 인력을 대학에서 배출해야 할 것이다. 즉,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연구 교육 교과과정의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즈음 대중의 역사 인식은 영화․게임․만화 등의 콘텐츠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대중들은 이것을 실제의 역사 사실로 인식하기도 한다. 즉, 대중을 잘못된 역사 이해로 몰고 갈 수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역사민속콘텐츠의 제작에 있어서 역사의 고증을 중시하는 분위기로 만들어가는 것도 역사민속학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또 순수학문과 지나친 상업화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해 앞으로 계속 고민하며 풀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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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선교사가 주도한 근대 한국학의 발명과 국제화, 1870년대-1890년대

        육영수 한국역사민속학회 2018 역사민속학 Vol.0 No.55

        The article aims to critically comprehend the origins, the processes, and the effects of modern Korean studies, which had been primarily managed and manipulated by Western missionaries during the second half the 19th century. Relying on Michel Foucault’s concept of discourse (=knowledge/power), the article claims that Western missionaries invented, accumulated, and internationalized Korean studies in the guise of objective and value-neutral knowledge in order to justify and legitimate the implantation of “Christian Civilization” on Korean soil and mind. In pursuit of this thesis the author tries to disclose the intimate and indispensable relationships between knowledge production and colonial matrix of power. The main body of the article consists of three parts. Part One keeps trace of French Catholic priests’ effort to lay the foundation of Korean studies for the purpose of converting uncivilized-superstitious Koreans into royal Christians. The works of Antoine Daveluy, Charles Dallet, and Felix Ridel are analysed. Part Two compares John Ross (History of Corea, 1879) with William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1882) to examine how Protestant missionaries contributed to solidifying major framework of Korean studies. Part Three focuses on The Korean Repository, the first English monthly period, in which American Protestant missionaries refined, upgraded, maneuvered, and most of all internationalized the encyclopedic knowledges on Korean civilization. The author evaluates that The Korean Repository had completed the First Wave (Cycle) of Korean Studies and prepared/anticipated for the arrival of the Second Wave of Korean Studies, which was to be launched by Korean nationalist scholars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The author tentatively concludes the article by proposing a radical and “dangerous” hypothesis as followings: 1) the discourse on Korean civilization that emphasizes the negative & defective characteristics of Korean history and people was not a conspiracy of Japanese imperialism but a collaborated product of French Catholic and mostly American Protestant missionaries. 2) Judging from this perspective, the author is convinced that the challenging task for eradicating colonial heritages in the post-colonial era should begin, instead of repeatedly blaming Japanese imperialism for enforcing the colonial historiography, by shedding a new light on the hidden. unintended, and paradoxical legacy of Western missionary works accomplished under the excuse of promoting Christian Civilization in Korea. Needless to say, the author welcomes more comparative & transnational case studies written either to dispute or confirm his provocative argument. 이 논문은 19세기 후반에 서양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한국학의 발명․전파․국제화 과정과 이 작업에 동반된 제국주의 의지와 욕망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식=권력’이라는 등식으로 압축되는 푸코의 담론이론에 기대어 서양선교사들이 실증적인 사실탐구라는 명분으로 창출했던 근대 한국학이 식민지배에 대한 피식민지배자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확보하려는 헤게모니 전략에 다름이 아니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조선에 대한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창출되는 지점과 교환․소비되는 경로 및 전유․재생산되는 사이클 등에 주목하여 각 단계마다 투입되는 ‘식민지 계몽주의’가 지향하는 ‘힘에의 의지’를 폭로하려는 것이다. ‘조선을 아는 것은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실천하여 서양 선교사들이 엮고 지휘했던 담론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지식생산과 제국권력의 분리할 수 없는 운명을 파헤치려는 것이 이 논문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본문 앞부분에서는 가톨릭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그렸던 한국학의 윤곽을 더듬기 위해 다블뤼․달레․리델 신부의 글에 주목한다. 서양어로 서술된 최초의 한국역사문화 소개서인 샤를 달레의 『한국천주교사』(1874년)가 주요 분석대상이다. 다음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건축했던 한국학의 형식과 내용을 관찰한다. 존 로스의 『한국사』(1879년)와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1882년)을 비교 분석하여 신교 선교사들이 쌓아올린 한국학의 골격을 파악하고자 한다. 본문 끝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출간했던 최초의 영문 월간지인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초점을 맞춰 달레-로스-그리피스가 초벌로 스케치했던 한국학이 더욱 정교하고 치밀한 담론으로 승격되는 공정을 추적한다.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의 전통과 제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라는 기존의 질문들을 되풀이하는 대신에 ‘서양 선교사들은 어떤 의도와 세계관을 가지고 한국의 역사문화와 그 성격을 특정한 방식과 콘텐츠로 창출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고 그 대답을 탐색해보려는 것이 본문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의식이다. 위와 같은 연구결과 필자는 몇 가지 잠정적인 결론에 이른다. 1) 조선 식민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역사의 정체성(停滯性), 지배계층의 무능력, 분열적인 지역주의 등을 강조했던 ‘식민사관’은 일본제국에 지적 소유권이 있다기보다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가톨릭 신부들과 미국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공동으로 만든 담론에서 기원․파생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양문명이 먼저 경험했던 근대화 운동의 동아시아 우등생임을 자부했던 메이지 일본정부가 서구에 대한 자신의 열등적인 자아상을 식민지 조선에 투사(投射)하여 ‘메이드-인-웨스트(Made in the West) 한국학’을 식민지 운영에 ‘쓸모 있는 한국학’으로 변주하여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무기로 (재)활용했다는 것이 필자가 조심스럽게 제기하는 가설이다. 그렇다면, 2) 포스트식민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식민사관을 극복 혹은 횡단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함을 반복적으로 비난하는 대신에,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헌신적으로 실행했던 ‘문명화 사명’과 서구중심적인 진보사관 및 인식론적 식민주의 사이의 은밀하고도 의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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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철산의 역사민속학연구-사학사상의 ‘역사과학으로서의 민속학’-

        주강현 한국역사민속학회 2015 역사민속학 Vol.0 No.48

        This studies focus on fogetten Hwang-Chul San who was the best folklorist in R.O.K. He is originally born at North Korean. He pioneered the history of folklore in the North. His research methodology was the very historical. But he was forgotten in the North. At the same time he is forgotten in Korea. So this research hopes his restoration as a outstanding academics in north korea & south korea. What’s more, he is a valuable person in historical perspective. The South and the North have been disconnected. However, this one connecting South and North Korea hope through these studies. Hwang-cheol studies would be a good sample study. 황철산은 북한과 남한 모두에게 기억 속에서 사라진 역사민속학자이다. ‘역사과학으로서의 민속학’을 주창하는 한국역사민속학회의 입장에서도 황철산은 잘 모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북한사회과학원 민속학연구실 실장으로서 북한민속학의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더욱이 그의 연구방법론은 철저하게 역사민속학의 입장에 근거하였다. 북한의 역사민속학에 대한 본질적 연구가 미진한 상태에서 북한민속학의 사학사적 궤적을 옳게 알아채리는 연구자가 오늘날에도 거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황철산은 민속학방법론,역사과학에서의 민속학의 위상, 물질 생산민속, 종족문제 해결에서 민속학이 개입하는 위상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업적을 냈다. 그의 역사민속학을 통하여 남북의 통합된 역사민속학서술을 가능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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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대중화와 디지털 역사자료-역사소비의 변곡-

        주성지 한국역사민속학회 2018 역사민속학 Vol.0 No.55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correlations between digitized historical materials and the paradigm changes of popularizing history in the Korean history. The popularizing history has gone through four paradigms in Korean History : first, popularizing history happened thanks to “spread of paper” and “development of printing.” In Chosŏn(朝鮮) period, in particular, letterpress and wood-block printing led the spread of knowledge in a mutually supplementary way, which resulted in the conversion of “delivery of memories,” a traditional concept of history, into “historical studies” and “research on the past”; the second paradigm keywords were “modern” and “enlightenment.” The publishing manufacture according to modern technological advancement opened doors to the massive distribution of historical knowledge. The introduction of modern education witnessed the history subject leading the spread of history; the third paradigm represented a meaningful time in the popular spread of Korean history in the aspects of historians’ self-awareness, securement of research diversity, efforts to narrow down the gap between historians and the public, various social activities of historians, and non-experts’ growing writing about history books; and the final paradigm saw the establishment of “digitized historical materials” based on the “development of information technology(IT)” having huge impacts on the production of historical knowledge by historians and non-experts on history. The fourth paradigm was characterized by the subjects of history consumption creating new content separate from the providers of knowledge unlike in the past. This paradigm became an inflection point of history consumption where the trend of popularizing history changed from passive history consumption to active history consumption and production. In the paradigm changes of popularizing history, the major driving force behind the fourth change was the large-scale accumulation and provision of digitized historical materials. This period witnessed the growth of research findings in Korean history both in quantity and quality and the production of various kinds of historical content including videos about history. Historical dramas(TV), in particular, made a 103.7% increase in the 2000s from the 1990s. Although the production of historical films since the 2000s was poor, but there was a meaningful change with 22 historical films making the top 100 box office list(2003~August, 2018). The investigator found the cause of these changes starting in the 2000s in the influences of digitized historical materials mentioned earlier. The increase of digitally constructed historical materials and the growing access to them became the major driving force for the public to move to the stage of producing historical content beyond the consumption stage of history and made the pattern of history consumption hit an inflection point. There is, however, a concern with the possibilities that the original values of historical studies might be misused according to the growing popular consumption and production of history. Historians thus need to provide specialized materials to help the public make their own historical analysis and enrich understanding and communication between historians and consumers through interactions. In addition, they need to accumulate the research findings of outcomes according to the changed pattern of popularizing history by analyzing, sorting out, categorizing, and defining a variety of history content in continuous production. 본 논고의 목적은 디지털 역사자료와 한국 역사대중화의 패러다임 변화와의 상과관계를 밝히는 데 있다. 한국 역사대중화는 4개의 패러다임으로 변화하였다. 첫 번째는 ‘종이의 전래’과 ‘인쇄술의 발달’에 따른 역사지식의 보급인데, 특히 조선시대 활자․목판인쇄는 상호보완적으로 지식의 확산을 이끌었다. 두 번째 패러다임의 키워드는 ‘근대’와 ‘계몽’이다. ‘근대적 기술발달’에 따른 공장제 출판으로 역사지식의 대량 유통이 시작되었고, 근대교육 도입에 따른 역사 교과목의 입전은 역사의 보급을 보편화시켰다. 세 번째 패러다임에서는 역사가의 자각, 연구의 다양성 확보, 역사가와 대중과의 간극 축소 노력, 역사전문가의 다양한 사회활동, 비전문가의 역사서 집필 증가라는 측면에서 한국역사의 대중적 확산에 의미있는 시기였다. 네 번째 패러다임에서는 ‘정보기술의 발달’에 의한 디지털 역사자료의 구축이 역사전문가 및 비전문가의 역사지식 생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역사대중화의 패러다임 변화 속에서 네 번째의 변화를 이끈 주요 원인은 디지털 역사자료의 대규모 구축과 제공이다. 이 시기 한국사 연구성과의 양적․질적 성장, 역사 소재 영상물 등 다양한 역사콘텐츠의 생산 등이 나타났다. 특히 역사소재 TV드라마의 제작현황과 시대물 영화의 완성도 향상은 디지털 역사자료의 영향으로 파악된다. 그래서 디지털로 구성된 역사자료의 증가와 이에 대한 접근성 향상은 대중이 역사소비의 단계를 넘어 역사콘텐츠 생산의 단계로 진전시킨 주요한 동인이며, 이에 의해 역사소비의 패턴이 변곡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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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민속학의 궤적과 전망

        주강현 한국역사민속학회 2011 역사민속학 Vol.0 No.35

        The establishment of the historical-folklife society is a product of '87'system which desire a certain transformation and democratization in Korea. The historical-folklife society threw conservertive attitude in studies. In the field of folkstudies the exit of academic identity was being sought, and in the field of history the thirst and desire for the challenge of history, ‘folklife as a historic science’. Interdisciplinary research in the historical-folklife studies was inevitable departure. In the name of historical-folklife, the terms of contents represent a studies of people's life. The historical-folklife include in the historical category. Interdisciplinary research inevitably requires negotiation with diversity of studies. What is the name of the folk-life there has been expansion of the concept. Pre-modern deconstruction and creation of new changes in the last 100 years alone, the existing concept of folklife was unable to lead the 21st century. ‘한국역사민속학회’의 성립은 ‘87체제’의 산물이다. 87년 체제는 일정한 변혁성을 담보하며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희구하였다. 한국역사민속학회의 출현은 종전의 민속학이 갖는 성격의 불투명함, 심하게 말해 지나친 체제 온존성과 수구적 태도 등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던졌다. 당시 민속학 분야에서는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출구가 모색되고 있었으며, 1970~80년대 이래의 민속연희운동을 통한 일정한 진보적 역량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역사학 분야에서는 ‘쓰이지 아니한 역사’에 대한 갈증과 욕구가 역사민속학이라는 과제로 수렴되고 있었다. 역사민속학의 출발에서 학제 연구가 필연적이었다. 한국역사민속학회는 학회 명칭에서 ‘역사민속학’을 표방했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민중생활사’ 구현을 최대 목표로 설정했다. 역사민속학은 ‘역사과학으로서의 민속학’의 줄인 용례이다. 역사민속학은 역사학 범주이며, 학사적으로는 향후 史學史 틀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통섭 및 학제 연구의 필연성과 확충은 역사민속학이 구현하고자 했던 방향과 일치된다. 학제 연구는 필연적으로 제 학문과의 교섭을 요구한다. 또한 민속이란 이름의 개념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근대 풍속의 해체와 새로운 풍속의 생성이라는 지난 100년 간의 변동 속에서 기존 민속개념만으로는 21세기를 이끌어갈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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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민속학의 궤적과 전망

        주강현(Joo Kang-Hyun) 한국역사민속학회 2011 역사민속학 Vol.35 No.-

        '한국역사민속학회'의 성립은 '87체제'의 산물이다. 87년 체제는 일정한 변혁성을 담보하며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희구하였다. 한국역사민속학회의 출현은 종전의 민속학이 갖는 성격의 불투명함, 심하게 말해 지나친 체제 온존성과 수구적 태도 등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던졌다. 당시 민속학 분야에서는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출구가 모색되고 있었으며, 1970~80년대 이래의 민속연희운동을 통한 일정한 진보적 역량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역사학 분야에서는 '쓰이지 아니한 역사'에 대한 갈증과 욕구가 역사민속학이라는 과제로 수렴되고 있었다. 역사민속학의 출발에서 학제 연구가 필연적이었다. 한국역사민속학회는 학회 명칭에서 '역사민속학'을 표방했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민중생활사' 구현을 최대 목표로 설정했다. 역사민속학은 '역사 과학으로서의 민속학'의 줄인 용례이다. 역사민속학은 역사학 범주이며, 학사적으로는 향후 史學史틀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통섭 및 학제 연구의 필연성과 확충은 역사민속학이 구현하고자 했던 방향과 일치된다. 학제 연구는 필연적으로 제 학문과의 교섭을 요구한다. 또한 민속이란 이름의 개념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근대 풍속의 해체와 새로운 풍속의 생성이라는 지난 100년 간의 변동 속에서 기존 민속개념만으로는 21세기를 이끌어갈 수 없게 되었다. The establishment of the historical-folklife society is a product of '87'system which desire a certain transformation and democratization in Korea. The historical-folklife society threw conservertive attitude in studies. In the field of folkstudies the exit of academic identity was being sought, and in the field of history the thirst and desire for the challenge of history, 'folklife as a historic science'. Interdisciplinary research in the historical-folklife studies was inevitable departure. In the name of historical-folklife, the terms of contents represent a studies of people's life. The historical-folklife include in the historical category. Interdisciplinary research inevitably requires negotiation with diversity of studies. What is the name of the folk-life there has been expansion of the concept. Pre-modem deconstruction and creation of new changes in the last 100 yeats alone, the existing concept of folklife was unable to lead the 21st century.

      • KCI등재

        역사민속학과 기록자료 활용

        이해준(Lee, Hae-Jun) 한국역사민속학회 2015 역사민속학 Vol.0 No.47

        본고는 연구논문의 성격이라기보다 한국역사민속학회의 25년을 회고하면서 그동안 이루어낸 학술사적 성과와 반성,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들을 점검하는 소박한 글이다. 학회 창립기의 의식과 방향성이 과연 무엇이었으며, 또한 그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는지를 반추하면서, 앞으로 좀더 보완하여야 할 부면을 지적하여 본 것이다. 1990년 한국역사민속학회의 태동은 기존의 민속학연구가 지닌 역사적 이해의 한계, 즉 ‘민속의 역사적 변천과 전개 양상의 차이’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 그리고 역사학의 민중생활사에 대한 무관심을 반전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모색이자 시도였다. 창립의 주역들은 평소 민속학 연구에 대하여 비판과 문제의식을 가졌던 소장 민속학, 역사학, 인류학, 종교학 등 여러 분야 소장연구자들로 이들은 민중생활사 정리방법론, 역사민속학사의 정리, 지역자료의 광범한 발굴과 활용, 종합문화로서의 학제적 연구방법 시도 등등 기존의 학계와 다른 연구성과를 축적하였다. 본고에서는 민중생활사, 생활문화사와 관련하여 기록 자료의 다양한 탐색과 광범한 동원 활용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필자의 자료 동원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생생한 생활일기 자료라든가, 집안의 교육의 산 자료로서 가훈류 자료, 그리고 마을의 운영과 세세한 생활문화를 기록화한 성책 고문서 자료의 중요성과 활용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지적과 제안을 토대로 향후 역사민속학이 쓰여 지지 않은 자료와 쓰여 진 기록자료 사이에서 더 많은 자료원을 찾고 활용하는 방법들을 모색하기를 기대해 본다. This is not so much a research paper as a plainly written article to examine the results, reflections, and follow-up tasks of Korea Society for Historical Folklife Studies in terms of its academic history by looking back on the last 25 years. This study has investigated the consciousness and directivity of the society’s foundation, reflect how much its goal has been achieved, and the auxiliary aspects to be complemented further afterwards. The birth of Korea Society for Historical Folklife Studies in 1990 was a new grouping and trial to reverse indifference to history of folklife in our history within the limitations of historical understanding that previous folklore research has, that is, complaints and regrets about ‘the historical changes of folklore and difference in the aspects of development’. The initiators of its foundation were the researchers in such areas as folklore, history, anthropology, and religious studies having a critical mind about the folklore research constantly, and they accumulated research results different from those of previous academic circles by organizing the arrangement methodology of history of folklife and history of historical folklife studies, excavating and using regional data exclusively, or trying interdisciplinary research methods as general culture. Meanwhile, this study emphasizes the necessity to explore diversely and mobilize and use exclusively recorded data regarding history of folklife and history of living culture. Particularly they include the lively diary data found by this author’s data mobilization experience, data of family mottos as living data of family education, and the importance and utilization of classical data recording a village’s operation and detailed living culture. It is expected that this pointing out and suggestion will be used as methods to find and use more data sources from the recorded data as well as unwritten data of historical folklife studies afterw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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