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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백헌 정재규의 주리적 심학의 형성 과정 - 한주학단과의 교유를 중심으로 -

        김낙진 ( Kim Nak-jin ) 한국철학사연구회 2021 한국 철학논집 Vol.0 No.68

        기정진의 3대 고제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정재규는 이이의 이기론을 주기적으로 해석한 전통에 반대하고 주리론적 해석을 제창하였으나, 여전히 이이의 주기철학이 주력했던 극기의 정신에 충실하던 기정진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 이진상 및 그의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주리 철학의 영향도 받았다. 이진상과 기정진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에게로 연원이 소급되는 것이었기에, 두 전통 있는 학문정신을 결합한 것이 그의 학문이다. 그의 학문은 역동적인 과정의 산물임을 가정하고, 본고는 성립 과정을 해명하는 데 목표를 둔다. Ⅱ장에서는 명덕 논의에 있던 퇴계학과 이진상, 기정진의 견해 차이를 경험했던 정재규의 고뇌를 짐작해 본다. Ⅲ장에서는 서신 토론을 통해 이진상이 그에게 피력했던 지각론의 내용을 살핀다. Ⅳ장에서는 이진상의 학설을 수용하면서도 기정진의 학문정신을 결합하여 새롭게 사상의 체계를 가다듬었음을 밝힌다. Ⅴ장에서는 그런 결합이 지닌 철학적, 시대적 의미를 추정해 본다. One of Ki Jeong-jin's three great disciples was Jeong Jae-gyu. He received the teaching of Ki Jeong-jin, who was faithful to the spirit contained in Yi I's Juki philosophy. In addition, he also was influenced by the philosophy of Juri while interacting with Yi Jin-sang and his students. Because the scholarships of Yi Jin-sang and Ki Jeong-jin were traced back to Yi Hwang and Yi I, he establishes new mind philosophy, which combines these two contradictory traditions. This paper assumes that his scholarship was the product of a dynamic process, and aims to explain the formation process. In Chapter Ⅱ, I guess Jeong Jae-gyu's agony. It is presumed that he was troubled among several theories in illustrious virtue theory. In Chapter Ⅲ, I explain the theory of perception that Yi Jin-sang revealed toward him. In Chapter Ⅳ, I explain that while accepting the theory of Yi Jin-sang, he did not abandon the academic spirit of Ki Jeong-jin. In Chapter Ⅴ, I estimated the philosophical and periodic meaning of such a combination.

      • KCI등재

        허유의 심설 토론과 갈등의 양상

        김낙진 ( Kim Nak-jin ) 한국철학사연구회 2021 한국 철학논집 Vol.- No.70

        본고는 19세기 후반기 인물인 허유가 이진상의 학문을 수용하고 주변 인물들과의 토론을 통해 학술을 심화하는 과정을 살펴본 글이다. 처음에 집중 논의된 내용을 보면 이들은 이진상의 삼간법을 공부하면서, 수간법에 따라 마음의 본질을 인식하는 방법을 이해해갔다. 이것에 동의하는지에 따라, 동조자와 비판자로 갈라선다. 허유는 비판자가 된 최정기와 「심통성정」 중·하도 특히 중도의 종지에 관해 토론했다. 하도가 호발론에 적용되는 분개법에 의한 도설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이에 비해 중도는 하도에서 분개된 마음과 감정의 선한 것들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가를 다룬 도설이었다. 최정기가 김흥락을 따라 ‘본성에 근본한다’는 공통점만을 보았다면, 허유는 이진상을 따라 리발(理發)을 공통점으로 보았다. 이들의 입장 차이는 수간법의 인정 여부에 있었는데, 그 배후에는 리의 주재와 기의 역할에 대한 상이한 인식이 있었다. 호발론적 사고의 가치를 굳게 믿는 퇴계학자들과 그것만으로는 가치혼란의 시대에 대응할 수 없으므로 수간법에 의한 대본 정립이 필요하다는 한주학단의 판단 차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Heo Yu accepted Yi Jin-sang's study and refined it through discussions with colleagues. This paper, which studied the process of his discussion activities, first examined what he and his colleagues tried to know among the theories of Yi Jin-sang. Looking at what was discussed at the outset, they studied how to recognize the essence of the mind according to the three observation methods(三 看法). Depending on their pros and cons, they became either sympathizers or critics. In succession with Choi Jeong-gi who became a critic, Heo Yu discussed the purpose of the middle and bottom diagram included in the Diagram about ‘mind governs nature and feelings’, especially the middle. There was no disagreement in that bottom diagram was a picture drawn by an analytical method. On the other hand, the middle diagram was a narrative explaining the commonalities of good minds and good emotions with different processes of origin. While Choi Jeong-gi saw only the commonality of the fact that good arises from nature, Heo Yu followed Lee Jin-sang and saw the fact that Li creates goodness(理發) as a common point. Their differences of opinion arose in the pros and cons of the new method of recognizing essence. Behind it, there was a different perception of Li domination and the role of Qi.

      • KCI등재

        이진상의 「심즉리설」에 대한 조긍섭과 전우의 비판

        김낙진 ( Kim Nak-jin ) 한국철학사연구회 2020 한국 철학논집 Vol.0 No.64

        이진상의 「심즉리설」이 저술되고 나서 지역적 기반이 같던 퇴계학자들과의 토론이 전개되었다. 그가 사망하고 문집이 간행되자 그의 이론은 영남 이외의 지역에까지 알려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쓰인 두 편의 비판적인 논문이 조긍섭의 「독한주이씨심즉리설」과 전우의 「이씨심즉리설조변」이다. 전자는 퇴계학파, 후자는 율곡학파의 견해를 대변한다. 토의가 늘 생산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상의 견해에 대한 무지도 있었고, 기존의 유사 이론에 대한 전통적인 비판도 경험 또는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이해의 증진을 저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는 이들의 논란에서 드러나는 입장의 차이와 논변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나아가서는 왜 이런 논쟁이 전개되었는지를 설명해 본다. 구체적으로는 이진상의 심즉기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비판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비판자 양인의 마음 이해의 동일성, 심즉리를 비판하는 양인의 입장 차이, 논쟁의 이유인 심법에 관한 삼인의 견해 차이를 비교한다. After the writing of Yi Jin-sang's article on Sim jeuk Li, discussions with young-nam scholars who had the same regional basis progressed. After his death, his anthology was published and his unique theory became known widely, so scholars from other schools joined the band of criticism. In the process, two critical papers were written by Cho Geung sup and Jeon Woo. The former represented Toegye school's academic view, the latter represented Yulgok school's. The discussion was not always productive. One reason was ignorance of the other's views. Traditional criticism of similar theories has also worked as a prejudice. Nevertheless, this paper intends to examine the validity of the arguments and the differences of positions revealed in these controversies. Finally, I will explain why this debate has evolved.

      • KCI등재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의 교유(交遊)와 학술 토론

        김낙진 ( Nak Jin Kim ) 율곡학회 2010 율곡학연구 Vol.21 No.-

        영남의 남인 출신 유학자인 최숙민은 호남의 노론 율곡학자인 奇正鎭의 문하생이다. 본래 心身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기정진의 문도가 된 이후 理主氣僕의 철학과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보다는 이면의 원인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학문 방법을 배웠다. 스승의 견해에 바탕을 두고 영남에서 유행하던 심설을 결합함으로써 순선한 본심의 측면을 강조하는 心卽理說을 받아들였다. 이것에 合理氣說을 더함으로써 心氣를 경계해 마지않던 전통적인 학문 정신도 수용하였다. 그는 이런 학설을 스스로 연구하였지만, 또한 견해가 상통하는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문제의식과 이해의 정도를 심화시켜 나갔다. 학문 연원을 같이 하는 노사학단의 동문들은 물론 활동공간을 같이 한 한주학파의 학자들, 경기도에서 활동한 화서학파의 학자들이 그의 학문적 동료들이었다. 이들과 위정척사 의식을 함께 소유하며 마음의 본질에 관한 주리적 학설을 공유한다. 당쟁으로 얼룩진 과거를 반성하면서 학파와 당파를 떠난 단합을 도모하던 이들이 공유하려던 정신이 이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한말 위정척사의 학자들이 주리론적 견해를 공동 소유한다고 보았던 논의를 세밀하게 가다듬으면 본심에 관한 주리론적 해석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유학의 세계가 영속하기를 바라던 이들이 의리의 정신으로 외세에 맞서 투쟁하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유학의 도를 언젠가는 회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최종 근거였다. Choi Sook Min who his family were belonged to South Party was a disciple of Ki Jeong Jin. He originally take an interest in the problem of Mind and Body. He learned the spirit of Li ju Ki bok(the theory that Li is supervisor, conversely Ki is servant) and the method of study that attach importance to the inside cause of the present condition. As the result, he received the theory of Sim jeuk Li(Li is the important content fact, and Ki is only assistance in Mind). Moreover he added the theory of Sim hap Li Ki(Mind is composed of Li and Ki), so he inherited the spirit that kept a strict watch on Mind. He went deep into this study by oneself, and deepened the theory through academic exchange with congenial scholars. His academic partners were the fellow students who studied under the same teacher, scholars belonged to Hanju school and Hwaseo school. They held in common the consciousness of Wijeong-Cheoksa(the ideas on the preservation of true science and the expulsion of wickedness) and the theory of essential Mind undersood by an angle of Ju-li-ron. They criticized the history of disunion and hostility provoked by party strife in late Cho-sun, so they devised union of Confucianism world. The basis of union was the theory of essential Mind. It was the ultimate foundation of struggle against foreign power and the recovery of Confucian Tao.

      • KCI등재

        高麗 光宗의 개혁정치와 淸州 龍頭寺 鐵幢竿의 건립

        김낙진(Kim nak-jin) 한국사학회 2016 史學硏究 Vol.0 No.121

        청주 龍頭寺 철당간 건립은 청주지역의 지방사회가 큰 이완을 겪고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청주는 궁예가 나라를 세우기 이전부터 그와 관련이 있었다. 그 이후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철원으로 옮길 때 청주인호 1천을 徙民 시켜 그의 군사적,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청주세력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크게 분열하였다. 친궁예세력과 친왕건세력으로 나누어지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중앙에서 활동하던 청주세력과 지방에 재지하고 있던 청주세력들도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청주지역 호족들의 결속력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또한 점차 강화되어가는 중앙의 지방통제는 지방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호족들의 지방민에 대한 영향력을 감소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용두사 철당간이 세워지는 광종대도 계속되었다고 보았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하면서 중앙에서 활동하던 대호족들을 숙청하였다. 이러한 개혁정치를 추진하기 위한 무력적 기반으로 주군에서 풍채 있는 자들을 뽑아 올려 자신의 시위군으로 삼았다. 이 때 뽑혀 올린 시위군은 아마도 지방 호족들의 휘하에 있던 사병들이었을 것이다. 특히 국왕을 호위하는 시위군이었다는 점에서 장교급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주군의 중소호족들도 시위군으로 선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찍부터 궁예의 군사적 기반으로서 중요성을 나타냈던 청주지방에서도 시위군이 선발되었을 것이다. 이 점은 청주지방사회의 분열을 가속하는 것이며, 청주의 주도적인 호족세력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주의 용두사는 선종계통 사찰로 추정되는데, 광종의 법상종 계통 사찰에 대한 지원으로 교종이 우세하게 되자 용두사는 점차 쇠퇴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에 따라 청주지역민들의 사상적 기반으로서의 용두사의 역할도 줄어들었다. 堂大等 김예종 김희일 일가를 비롯하여, 김수□, 김석희, 김관겸 등 청주김씨들은 경제적 비용을 책임지면서 용두사에 당간건립 사업을 추진하였다. 청주지역의 호족세력들은 이완 되어 가는 지역사회의 지배력에 대한 위기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당간 건립이라는 대규모 사업을 주도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를 통해 주민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청주김씨 일족을 중심으로 당간기에 기록된 손씨, 경씨, 한씨 등 지역의 중소호족들의 지배질서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이 때 청주지역은 이미 지방호족들의 지배력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보인다. 당간기에는 전직 시랑과 전직 병부경, 전직 사창 등 전임자와 학원경과 학원랑중 등 현직자가 보인다. 당간기에 등장하는 이름이 당시 용두사를 중심으로 한 청주지역 호족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당간건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청주김씨의 청주지역에 대한 지방 지배력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청주 용두사 철당간의 건립은 청주 지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청주김씨를 중심으로 한 지방세력의 지배질서를 재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생각된다. The construction of Iron Flagpole of Yongdusa(龍頭寺) reflects the hojok’(豪族local gentry)s decreasing influences on the local communities in Cheongju. Cheongju was closely related to Gungye(弓裔) before his accession. Gungye built a solid foundation as forcible displacements of Cheongju’s 1000households when he moved the capital to Cheorwon. The powerful of Cheongju were so badly disunited when Wang Geon(王建) was crowned king. They were divided into Loyalists to Wang Geon and the opposing part(Loyalists to Gungye). Also the local gentry of Cheongju had different interests depending on where they live. This conditions made it difficult for the cohesion of the hojok in Cheongju. Also central government strengthened it’s control over hojok’s power and it led to lessen their influence on local residents. This lasted until the reign of Gwangjong. Gwangjong executed a sweeping purge to major hojok. For that, Gwangjong picked men of great presence as the King’s guards(侍衛軍). They formed the military basis of strengthening of royal authority. These guards used to belong to the hojok privately. Especially they had a duty of escorting the king, the officers were also involved. Because of this, some of the hojok presumed to be chosen as King’s guards. From early on, Cheongju played a key role in the military support of Gungye. So selecting King’s guards in Cheongju split local societies and reduced the major hojok’s power. Yongdusa in Cheongju was estimated to be a temple of Cheontae Order. Because of Gwangjong’s(光宗) support to Beopsangjong, Gyojong was in a position of advantage over the other Buddhist sects. So Yongdusa decayed and lost its position as an ideological foundation to local people. The Kim clan of Cheongju, including Dangdaedeung(堂大等 local headman) Kim Yejong, Kim Huiil, Kim Su□, Kim Seokhui, Kim Gwangyeom, bear the cost as a part of its efforts to build the Iron Flagpole of Yongdusa. Such a large-scale project came amid a mounting sense of crisis about their power. According to the records of the Iron Flagpole of Yongdusa, the hojok of Cheongju (The Kim clan as the central figure, The Son clan, The Gyeong clan, The Han clan) wanted to build the flagpole to show solidarity for their dominating force. The hojok of Cheongju already lost their power and influence. From the records of flagpole, we could notice the list of contributors with many well-known names and the titles of the office for both predecessors and incumbents. It was not the totality of the hojok in Cheongju. Some of them did not actively participate in the construction of Iron Flagpole of Yongdusa. This means that hojok’s influence is on the ebb. Therefore the construction of Iron Flagpole of Yongdusa was actively promoted as a means of solidifying the hojok’s power.

      • 기획논문 : 남명학의 현대적 응용을 위한 검토

        김낙진 ( Nak Jin Kim ) 南冥學硏究院 2016 南冥學 Vol.21 No.-

        짧은 시간 안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둔 남명학 연구는 이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할 때이다. 그 중의 하나가 남명학에 풍부하게 있는 실천철학의 정신을 자원으로 삼아 현대 생활에 필요한 지혜를 찾는 일이다. 생명력이 다했다고 여겨졌던 성리학이 우리 시대에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발상으로부터 이 일은 시작된다. 이를 수행하고자 한다면 시대가 변하여도 인간의 욕망-가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매우 유사하다는 판단이 선행되어야하고, 또한 시대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있을 수밖에 없는 차이성을 민감하게 느껴야 한다. 현대의 범인에게 교훈을 제시하려는 시도이므로, 완성태로서의 남명 조식보다는 그가 매일매일 진행했던 일상적 삶의 과정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삶을 구성하는 맥락이 다른 만큼 남명사상을 우리 시대의 환경에 맞게 재해석하고 번역하는 일은 필수이다. 이에 더해 단순히 남명의 가르침을 현대생활에 적용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현대사상과의 대화를 통한 새로운 보편가치나 방법의 창조를 목표로 해야 한다. 논자는 인간 및 사회의 통일성과 차이성, 모범성과 일상성을 고려하면서 남명학의 현대 적 웅용방법을 논하되, 남명 사상의 현대화 가능성을 타진할 때 고려해야 할 점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The study of Nammyunghak achieved rapid growth within short period of time. Now we must prepare a turning point, it is a way to find any possibilities of practical philosophy instead of theoretical studies. We must search for necessary wisdom for contemporary life based on abundant practice spirit of Nammyunghak. This work need to shift a positive viewpoint on Neo- Confucianism, that looked as if to be dead more than 100 years ago. The main prerequisite to attain the result of this trial is that we concede the sameness of desires-values and lifestyle in spite of the changes of the times, and have to feel differences sensitive arising in accordance with the environment change. The reinterpretation of Nammyung is material from a modem viewpoint. It must aim for The creation of universal values through the way of contemporary man``s dialogue with Nammyung, instead of being satisfied to do modem appliance. I make a suggestion for attention to Nammyung``s the process of everyday life, considering sameness and differences of human being and society. And I tried to examine possibility of reutilization of his important conce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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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 武人政權과 杜景升의 정치활동

        김낙진(Kim Nak Jin)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서강인문논총 Vol.0 No.46

        이 논문은 고려무인정권기에 활약했던 두경승의 정치활동을 통해 무인정권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두경승은 무신란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이의방정권, 정중부와 경대승정권으로 이어지는 동안 무인집정의 변화 속에서도 별다른 정치적 부침을 겪지 않고 정치적 성장을 하였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지역적 기반과 금군출신으로서의 경력, 이의방과의 관계, 명종과의 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논문의 요지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두경승은 전주 만경현 사람으로 그의 외가는 남평 문씨에서 분파된 강릉 문씨였다. 그의 집안은 만경현 일대에 커다란 토지를 가지고 있었던 토착세력이었다. 이의방과 그 출신이 비슷하였다. 두경승은 그의 외삼촌이었던 상장군 문유보의 권유로 수박하러 가지 않고 공학군에 근무하다가 후덕전 견룡에 발탁되었다. 정중부 · 이의방 · 이고 등 견룡군 출신이거나 현역 견룡군 장교들이 주도하였던 무신란에 견룡군으로서 참여하였다. 그러나 난의 과정에서 남의 재물을 약탈하는 불법적인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무신란의 성공 후 이의방에 의해 내순검군 지유에 발탁되었다가 바로 낭장으로 승진하였다. 김보당의 난 때 남로선유사의 임무를 이의방의 종형인 이춘부와 함께 수행하면서 이의방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두경승은 이의방이 정중부에 의해 제거되어 정권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숙청을 당하지 않았다. 조위총의 반란에 진압군으로 나가 있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정중부 정권의 기반이 이의방 정권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의방의 문객이 아니었던 두경승 등 무장 등을 구태여 제거할 이유가 없었다. 정중부가 제거되고 경대승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두경승은 실각하지 않았다. 이의민이 경대승의 견제를 심하게 받았던 점과는 달랐다. 두경승은 경대승이 혐오했던 불법을 자행했던 무인들과는 차이가 있었으며, 용력도 가지고 있었다. 경대승이 갑자기 죽고 이의민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명종이 이의민을 통해 경대승을 견제하려고 그를 불렀으나 그는 경대승이 두려워 거부하였다. 경대승 사후에도 명종은 그를 계속해서 불렀고, 그 때는 이의민이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러했던 것이다. 명종은 이의민을 불러올려 권력을 잡게 하였지만 이에 대한 견제장치로써 두경승을 지원하였다. 두경승은 전주 만경현 출신으로 경주와 대비되는 지역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문극겸이나 문장필 등과도 인척관계를 통해 연결되었다. 특히 두경승은 이의방의 출신이 전주였던 점에서 공통의 지역적 기반을 활용할 수 있었으며, 이의방 세력에 우호적인 다수의 무신들이 당시까지도 중방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경승이 중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명종은 두경승을 지원함으로써 이의민의 독점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할 수 있었다. 두경승은 명종의 후원으로 인사권을 장악하고 공신의 지위에 오르는 등 정치적 출세를 할 수 있었다. 명종의 두경승 세력의 활용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중방체제의 강화였으며, 왕권을 안정시키는 조치로 문신세력의 활용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친왕적인 무신세력을 통해 어느 한 무신이 독점적이고 일방적인 권력행사의 통제를 통한 국왕과 무신의 연합정치체제의 구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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