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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연의 불교사상 -조동선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윤천근 ( Chun Guen Youn ) 한국동서철학회 2011 동서철학연구 Vol.60 No.-

        일연은 고려불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에 속한다. 일연은 고려불교사에서 그 말기적 지향을 만들어 가는데 참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일연계열에서 조선불교로 나아가는 지향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연은 특히 불교와 유학이 만나는 지점의 시대의식을 대표한다. 일연은 승려로서의 특징만큼이나 학자로서의 면모도 뛰어나게 갖추어져 있는 사람이다. 그의 성가를 결정지어 주는 것은 『삼국유사』이지만, 『선문념송사원』이나 『중편조동오위』 역시 『삼국유사』 못지않게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일연의 선불교 사상에 주목하고 있으므로 『선문념송사원』이나 『중편조동오위』를 중요한 자료로 거론할 수밖에 없는데, 『선문념송사원』은 실전되었으므로 『중편조동오위』에 치중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일연은 비교적 다작에 속하는 학자형의 인물이지만 그 저술이 남겨 전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중편조동오위』도 실전되었다가 일본에서 발견되어 국내로 유입된 것이다. 이 책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남겨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은 일연의 저서가 아니라 일연 편집본이고, 그 편집조차도 거의 일연이 개입하고 있는 부분이 없으므로, 사실상 일연의 선불교적 의식과 지향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직접자료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은 동산양개의 말을 조선본적이 취사선택하여 해설을 달고 있는 것인데, 일연은 그것이 혼란된 부분에 개입하여 짧은 의견을 끼워 넣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일연이 이 책에 주목하고, 그것을 다시 정리하며, 고려 말기의 불교계에 제출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연의 시대는 수선사 2세인 혜심의 시대이다. 수선사의 지눌과 혜심은 전 시대의 이자현의 개혁적 선풍이 제출하여 준 초석 위에 임제종 풍의 간화선의 시대를 여는 역사적 노력을 수행한다. 이것이 일연 시대의 주도적 선풍이고 일연의 선풍이다. 간화선의 선 수행자가 묵조선의 조동종에 시선을 돌려 그 기본논리를 점검하고 있는 것이 『중편조동오위』이다. 이 『중편조동오위』는 남종선이 지향하고 있는 진리관을 동산양개의 시선에서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간화선 수행자 일연에게 필요하였다는 것은 일연이 통합적 불교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음을 의미하여 준다. 이 점에서 일연은 고려불교의 한가운데에서 통합불교의 이념을 주창하였던 의천의 의식을 상속한다. 그는 남종선 계열 가지산문의 간화선 수행자였지만 모든 불교영역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저술을 남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글은 그런 일연 선불교의 모습을 역사적, 문화사적 측면에서 들여다 본 것이다. 一然的面貌, 若果看取最優先的觀點, 就是一個偉大的禪僧. 他屬於高麗南宗禪的歷史過程中, 而且行爲一定寄與這個過程之進化完成. 高麗初期就時禪宗佛敎的時代, 這種期間中流入而且流通的一種南種禪風, 卽是曹洞禪. 曹洞禪始於洞山良价, 而次繼於曺山本寂, 完成一種特殊的風氣. 這種禪風, 叫曹洞禪, 曹洞中之曹是同於曺山本寂之曺, 而且曹洞中之洞是同於洞山良价之洞. 曹洞宗屬於南宗禪之五家, 卽是臨濟宗, 규仰宗, 雲門宗, 法眼宗, 曹洞宗. 中國佛敎歷史起於天竺禪僧達磨, 達磨入國中土通過各地轉轉, 而且最終駐在於洛陽小林寺, 施法禪風的時就是西紀五百二十年, 卽是魏晉南北朝時代中之北魏. 達磨之禪風傳於五世, 而次出現中國禪宗史中之最大英雄, 則第六代祖師慧能. 此時中國禪宗通過革命的變貌, 出現了頓悟禪風. 慧能的頓悟禪風初轉於南方, 而且叫了南宗禪, 別於傳統的達磨以來之神秀的漸修仙風卽是北宗禪. 慧能的時代是自西紀六三八之七一三年. 他的直系再傳而至於馬祖道一, 活動於八世紀末葉與九世紀初葉, 此時卽是新羅末葉. 九世紀初之新羅求法留學僧, 大部分受於馬祖道一門下. 他們卽是留於中土比較長久的歲月, 終業而歸於新羅而開起於新羅各地禪宗山門. 這種各地禪宗山門中之九種, 成功的流傳於高麗初期, 這是通稱九山禪門. 一然屬於九山禪門中之一家, 就是迦智山門. 迦智山門之開山祖就是道儀, 中土留學而受業於馬祖門下中之西堂, 經過長久的三十七年歲月, 畢業而歸國於八二一年, 這是當於九山禪門開山祖中最長期留學事例, 而且他被侮蔑的待遇依於當時新羅佛敎界. 這樣馬祖文化的遺風, 就是俄們禪佛敎歷史之中的第一次樣相雲門寺. 及於羅末麗初之世, 洞山良价與曺山本寂兩人之手下完成的曹洞宗, 波及於東土, 這是俄們禪佛敎歷史之中的第二次樣相. 但這個曹洞宗風, 經過約一世紀之歲月後, 逢於高麗佛敎回歸敎宗天下, 未開而中途遮斷或停止. 又主導這種高麗敎宗佛敎時代之祐世僧統義天, 積極地批判或否定南宗禪的急進性, 而且高麗禪宗勢力自體急激衰退或弱化, 終當必然地破壞這種曹洞禪風之在於高麗佛敎中的苗脈. 爲高麗禪宗勢力之復活, 待歲月之流轉, 直到于武臣變亂而敎宗勢力當於決定的打擊. 這種革命的過程, 必然地生産一種樣相, 卽敎宗沒落與禪宗復活的局面. 武臣政權期間中, 高麗禪宗謳歌一種全盛時代, 其中最著名的一派是知訥與慧諶主導之修禪社勢力. 此外區別修禪社勢力之有力一派, 就是迦智山門, 卽是所屬一然之禪宗分派. 一然生於慶尙道地方, 這個地方看於當時禪佛敎的文化地圖上, 就是迦智山門勢力下之圈域, 別名曰雲門寺圈域. 當時迦智山門之中心寺刹, 就是這個雲門寺. 知訥之修禪社主導的當時高麗禪宗佛敎, 變更前代的禪風, 而且提出一個新鮮的禪風, 這是一種看話禪風, 淵源於中國之臨濟宗. 以生活於當代之一個禪僧, 一然當然地選擇這種看話禪風, 然此我們應當指稱他謂之看話禪修行者. 但他是不限於一個禪僧, 亦且觀心廣範地的有力佛敎學者, 而且由出祐世僧統義天之統合精神追從者. 臨濟宗風的特徵就是修養的堅決性, 曹洞宗風的特徵在於哲學的精緻性, 這兩者代表而且相互補完的南宗禪風之二大潮流. 一然以一個禪修行者的立場, 選擇臨濟宗風, 而且以一個佛敎哲學者與精神世界之統合主義者, 看取曹洞宗風, 綜合這樣二種特點具體形成了一然思想之大體.

      • KCI등재후보

        린각(麟角) 일연(一然)의 고승(高僧) 인식(認識) -『삼국유사(三國遺事)』「의해(義解)」편을 중심(中心)으로-

        명계환 ( Gye Hwan Myung ) 한국불교사연구소 2015 한국불교사연구 Vol.8 No.-

        麟角 一然이 찬술한 『三國遺事』 가운데 「義解」편은 신라시대의 敎學과 信仰[信行]의 두 측면을 統攝한 高僧 13인과 居士 1인의 전기가 집약되어있는데 이들의 교리의 이해와 전법 활동을 수록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일연의 고승 수록의 방식에 대해 주목하여 그의 高僧認識 즉, 일연의 고승수록의 필요성, 특징, 그리고 의의를 『三國遺事』 권4 제5 「義解」편에서 밝히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일연은 고려시대 몽골 침략과 원나라 간섭의 수난기에 살았다. 이때 승려였던 그가 가장 주목했던 불교사상은 ‘佛性’이었다. ‘불성’은 곧 ‘主人公’으로 ‘부처님 성품’이자 ‘우리의 참 마음’을 일컫는다. 일연에게 ‘불성’의전법은 민족의 주권과 정체성을 상실한 우리 민족에게 각자 자신은 ‘주인공’으로서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대인식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먼저 우리민족의 ‘주인공’ 의식의 고양을 위해 「의해」편 고승 13인과 거사 1인의 행적 속에서 유교적 정치이념을 지향하는 『三國史記』에서 삼국의 ‘빠진 이야기’를 드러냈고, 중국 『高僧傳』이나 『海東高僧傳』의 오류에 대한 지적을 덧붙였다. 또 중국과 다름을 지향한 ‘佛敎神異’를 담아 우리 민족 각자 자신은 주인공(불성)으로서 삶의 주체라는 것을 믿고 알게 하는 相對的 주체의식을 일깨웠다. 그리고 천민에서 왕족까지 다양한 출생신분이었던 승려들이 노력 여하에 따라 부처의 반열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또한 부처님 나라인천축으로 직접 구법을 떠난 구법승의 이야기를 담아 우리 민족 스스로가 주인공(불성)으로서 自內的 주체임을 믿고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연이 敎學과 信行을 통섭한 신라의 고승 13인과 거사 1인을「의해」편에 수록하였다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주인공(불성)이라는 확고한 믿음과 깊은 이해[信解]가 있었지만 이에그치지 않고 신라에서 강의, 강독,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전법을 실천하며 이상적인 ‘한국적 부처상’의 완성[行證]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완성에는 불교의 ‘修行四段’인 ‘信解行證’을 구족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 일연의 고승인식의 특징이 있다. 한국적 부처상의 유형은 大乘 護國型[원광, 보양], 戒律 占察型[자장, 진표,심지], 瑜伽 華嚴型[태현, 의상, 승전, 법해], 僧俗 不二型[양지, 혜숙, 혜공,원효, 사복]이 있었다. 이들의 행적은 중생들에게는 감동으로 와 닿아 삶의 모범이 되었고, 또 완전한 삶으로 비추어졌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법 자체에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實相을 바로 洞察하여 행복한 삶을 구현함에 있다. 따라서 ‘신해’가 일상적 현실에서의 ‘앎’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면, ‘행증’은 현실의 ‘삶’에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해’와 ‘행증’이 그랬던 것처럼 ‘앎’과 ‘삶’의 거리는 능동적 실천에 의해최소화 할 수 있으며, 또 ‘앎’이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의 디딤돌이라면 ‘삶’은 일상적 생활 속에서 능동적 실천에 의해 구체화 되었을 때 완전해 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연의 고승수록에 대한 의의가 있다하겠다. 이상으로 인각 일연은 『삼국유사』「의해」편의 고승수록을 통하여 ‘주체적 앎’ 즉 우리 민족에게 각자 자신은 주인공(불성)으로서 삶의 주체라는것을 ‘믿고 알아야 한다는 것[信解]’과 그 앎을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자리에서 ‘능동적으로 실천하여야 비로소 완전한 삶을 이룰 수 있다는 것[行證]’, 즉 ‘능동적 삶’을 살 것을 깨우쳐 주었다. In the Uihae (義解 the Explanation) chapter of the Samguk Yusa (三國遺 事) complied by Ingak Iryeon (麟角 一然), the biographies of 13 eminent monks and one religious practitioner are integrated. Those biographies tells about the two aspects of their understandings on the doctrines and activities of Dharma transmission. Their integrated biographies also combines both Buddhist doctrines and believing activities. This study focuses on the Iryeon``s understandings of the eminent monks i.e. the needs,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the biographies integration in volumes four and five of the Samguk Yusa (三國遺事). Iryeon was living in the Goryeo period when Mongolia invaded and the Yuan Dynasty intervened in Goryeo Dynasty affairs. Iryeon, then a monk, was primarily interested in the Buddhist concept of “buddhanature.” Buddha-nature is that refers not only to a quality the Buddha had, but also the “true mind” that is inherent in all of us. Iryeon thought Goryeo needed to receive the transmission of buddha-nature to recover its national sovereignty and identity so it could be the master of its own destiny. In order to enhance the sense of our sovereignty, Some stories that were left out of the Samguk Sagi (三國史記 The Chronicles of the Three Kingdoms) he included in the Samguk Yusa in the chapter titled Uihae. These were stories that were oriented toward Confucian political ideology and pointed out mistakes in the Chinese texts Gaoseng zhuan (高僧傳 Biographies of Eminent Monks) and Haedong goseung jeon (海東高僧傳 Lives of Eminent Korean Monks). He also included accounts of miracles performed by Korean Buddhists (佛敎神異) in order to differentiate Goryeo from China and also to give Goryeo people a sense of its own identity through knowing and believing ``Buddha nature`` to enhance a relative sense of sovereignty. In addition, he also included stories about monks from all walks of life, both high and low, who had attained the Buddha``s enlightenment. And in one story about a monk who traveled to India to seek the dharma, he tried to make people believe and understand that Goryeo was a principal agent of buddha-nature. The reason for Iryeon’s accounts of the 13 eminent monks and one religious practitioner was to show the various ways dharma could be transmitted. The reason why Iryeon recorded was to show the practiced dharma transmission through lectures, readings with comments and the idealistic Buddha``s image in Silla even though they had a concrete belief and understanding about buddha-nature. In this manner the Uihae chapter illustrates Buddhism’s “Four Stages of Practice (修行四段)”: faith, understanding, practice and realization (信解行證). It also presents Iryeon``s understanding of eminent Monks. The typical types of the Korean Buddha image are; a type of protecting the state (大乘護國型) of the Great Vehicle (Master Wongwang, Boyang), a type of divination and precept (戒律占察型) (Master Jajang, Jinpyo and Simji), a type of Yogacara and flower adornment (瑜伽華嚴型) (Master Taehyeon, Uisang, Seungjeon and Beophae), and a type of non-duality, monks and laity (僧俗不二型) (Maser Yangji, Hyesuk, Hyegong, Wonhyo, and Sabok). Their exploits impressed sentient beings and set an example to follow. However, the Buddha``s teachings are not meaningful in the actual act of dharma transmission itself; they are meaningful in the ultimate realization of happiness by giving us insight into the true reality of life. Therefore, “faith and understanding (信解)” discusses a matter of ‘knowing’ in everyday reality, whereas “practice and realization (行證) shows a matter of ‘practice’ in reality. As the relationship between “faith & understanding (信解)” and “practice & realization (行證)”, the gap between knowledge and life can be minimized by an active practice. If knowledge is a steppingstone to courage and hope for going out into the wider world, life is made whole and complete by an active practice in everyday life. This is Iryeon``s understanding of eminent Monks. In short, Iryeon``s understanding of eminent Monks, as presented in the Uihae chapter of the Samguk Yusa, teaches us that we have to believe and understand (信解) our identity as the owner of buddha-nature. He also teaches us that we have to practice and realize (行證) actively here in this world in order to have a full and complete life.

      • KCI등재

        元曉와 一然의 삶과 그 문학적 거리

        허원기 동아시아고대학회 2020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59

        This paper is a comparison and review of Wonhyo and Ilyeon from the perspective of time, space, writing philosophy, and way of life. The conclusion is as follows. First, Ilyeon was born 589 years after Wonhyo. However, as a characteristic of the times, they have a common point in that they lived in the era of war, the era of Buddhism, and the era of integration. Second, in terms of space, both Wonhyo and Ilyeon were born in Gyeongsan, and the gyeongju has an important meaning in their lives. Wonhyo mainly lived in Gyeongju, Ilyeon mainly lived in the Yeongnam area near Gyeongju. Ilyeon did not live in Gyeongju for a long time. But he had a deep interest in the cultural sites of Gyeongju. For Wonhyo and Ilyeon, Gyeongju was their spiritual home. Third, Wonhyo and Ilyeon found the basis for social integration in Silla and Buddhism, and based on it established their writing philosophy. Wonhyo was in charge of the task of the period through the writing of Ilonhwajaeng, and Ilyeon through the writing of ilyujunghaeng. Wonhyo's the writing of Ilonhwajaeng is 'writing that fuses and communicates different theories', and Ilyeon's the writing of ilyujunghaeng is 'writing that fuses and communicates different ways of life'. There is something in common between the two people in that they aimed at writing to actively unite and communicate different things. Fourth, Wonhyo and Ilyeon showed a similar way of life, sharing time, space and writing philosophy like this. It was the pursuit of a world of learning, converging and repenting in academic terms, the pursuit of a life of one merit and substance in practical terms, and the sharing of interest in the way of Zen Buddhism in the way of Buddhism Training. 이 논문에서는 일연이 원효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사실에 주목하고 시간과 공간, 글쓰기철학과 삶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두 사람을 서로 비교ㆍ검토해 보았다.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대적으로 보면, 일연은 원효보다 589년 후에 태어났다. 그러나 시대적 특징으로 보면, 전쟁의 시대, 불교의 시대, 통합의 시대를 살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원효는 삼국의 통일전쟁과 당나라와의 전쟁을 겪었고, 일연은 6차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전쟁과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을 겪었다. 원효는 외래 종교였던 불교가 교학적으로 토착화되던 시기를 살았고, 일연은 선불교가 널리 토착화되고 내면화되던 시기를 살았다. 또한 일연은 국가 간의 대외적 통합이 이루어지던 시대에 살았고, 일연은 몽골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내부적 통합이 이루어지던 시대를 살아갔다. 두 번째, 공간적으로 보면, 원효와 일연이 모두 경산에서 태어났으며, 그들의 인생에서 경주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원효는 경산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활동한 곳은 당시 신라불교의 중심지로 고선사, 요석궁, 분황사, 황룡사 등이 있었던 경주였다. 일연은 경산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원효의 흔적을 가까이에서 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가 이후로는 경주 행재소와 강화도와 남해에서 거주했던 기록이 있지만 경주 인근의 경상도 지역의 절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일연이 경주에 오래 거주하지는 않았으나 경주의 불교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주에 관련된 기록을 압도적으로 많이 남겼다. 경주는 신라불국토의 중심으로 일연에게는 정신적 고향과도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 번째, 원효와 일연은 전쟁과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회통합의 근거를 신라와 불교에서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글쓰기의 철학을 수립했다. 원효는 異論和諍의 글쓰기를 통해서, 일연은 異類中行의 글쓰기를 통해서 그러한 시대적 과업을 담당했다. 원효의 이론화쟁 글쓰기는 ‘서로 다른 다양한 학설들을 융합하고 소통시키는 글쓰기’이고, 일연의 이류중행 글쓰기는 ‘서로 다른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융합하고 소통시키는 글쓰기’이다. 원효는 불교의 학설이 본격적으로 수입되던 시기에 이들을 융합하고 소통하는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담당했다. 일연은 선불교가 정착된 이후 학술이론을 넘어 서로 다른 삶들 속으로 들어가 다양하게 구전되는 삶의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수집ㆍ정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고려인의 이상적인 삶의 원형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했다. 두 사람 모두 서로 다른 것을 융합하고 적극적으로 소통시키는 글쓰기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네 번째, 원효와 일연은 이렇게 시간, 공간, 글쓰기 철학을 공유하면서 유사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학문적인 면에서 융합하고 회통하는 학문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점, 실천적인 면에서 聖俗不二의 삶을 추구했다는 점, 불교수행의 방식에서 禪적인 수행방식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는 점이다.

      • KCI등재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

        김희만 ( Kim¸ Heui-man ) 한국사상사학회 2021 韓國思想史學 Vol.- No.68

        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최치원 관계기사를 분석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인 일연(一然)의 최치원 인식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삼국유사』에는 최치원 관련 자료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적극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작업을 통하여 『삼국유사』의 찬술자가 왜 최치원 관련 자료를 다른 인물의 자료보다 많이 삽입하였으며, 그것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였는지를 알아보았다. 먼저, 『삼국유사』 속의 최치원 관계기사를 검토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추출하고, 『삼국사기』에 서술된 최치원 관계 자료와 대비하여 분석해 보았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 관계 자료는 최치원에 ‘대한(about)’ 서술 위주라면, 『삼국유사』 관계기사는 최치원에 ‘의한(by)’ 논지 전개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었다. 즉, 일연은 『삼국유사』를 찬술하면서 의도적으로 최치원 관련 자료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일연이 최치원의 말을 원용하면서 『삼국유사』의 내용은 더욱 폭넓게 찬술될 수 있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연의 역사서술 태도가 유연하였기 때문이다. 일연은 불교 승려였지만, 유학(儒學)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최치원 관련 자료를 중시하여, 활용한 것이 바로 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유학을 공부한 학자였지만, 귀국 후 왕명으로 불교 관련 비문, 특히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을 작성하는 등 문장가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일연에게 있어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사에 정통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최치원에 대한 인식이 『삼국유사』의 찬술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다음으로, 일연의 최치원 자료 활용과 그 인식을 규명해 보기 위해서 『삼국유사』 관계기사의 의미 또는 성격을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았다. 최치원 관련 자료를 『삼국유사』에 굳이 수록하여 무엇을 밝히려고 했는 지에 대하여 검증을 시도한 것이다. 사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을 한국 고대사회 및 불교와 유교에 정통하였다는 측면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기록하게 된 것이 최치원 관련 자료이며, 일연은 그 기반 위에서 『삼국유사』의 해당 부분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삼국유사』의 성격을 유교와 상대되는 불교 또는 신이사관(神異史觀) 등으로 평가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최치원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분석한 결과, 『삼국유사』의 찬술자 일연은 불교와 유교를 접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폭넓은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할 수 있었다. In this article, we analyzed the articles related to Choi Chi-won in 『Samgukyusa(三國遺事)』, and looked into the recognition of Choi Chiwon of Ilyeon(一然), a author of 『Samgukyusa』. In 『Samgukyusa』, there are more materials related to Choi Chi-won than other figures, but no active review has been made so far. Through this study, we investigated why the proponent of 『Samgukyusa』 inserted more materials related to Choi Chi-won than other figures, and what he was trying to convey as a result. First, in order to examine the articles related to Choi Chi-won in 『Samgukyusa』, related data were extracted and analyzed in comparison with the data related to Choi Chi-won described in 『Samguksagi(三國史記』. Through this, it was possible t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while the documents related to 『Samguksagi』 focused on ‘about’ to Choi Chi-won, the articles related to 『Samgukyusa』 were developed ‘by’ by Choi Chi-won. In other words, Ilyeon intentionally used materials related to Choi Chi-won while writing 『Samgukyusa』. The contents of 『Samgukyusa』 could be more widely recited by Ilyeon citing Choi Chi-won's words, and this was possible because of Ilyeon's flexible attitude in writing history. Ilyeon was a Buddhist monk, but it is thought that he had an attitude to Accept Confucianism. The fact that he put importance on Choi Chi-won-related materials and utilized them shows that attitude. Choi Chi-won was a scholar who studied Confucianism in China, but after returning to Korea, he was active as a literary writer by writing Buddhist inscriptions, especially Sasanbimyeong(四山碑銘). Therefore, for Ilyeon, Choi Chi-won could be regarded as a Confucian scholar and well-versed in Buddhist history. I think that this perception of Choi Chi-won was reflected in the hymns of 『Samgukyusa』. Next, the meaning or nature of the articles related to 『Samgukyusa』 was examined in more detail in order to investigate the use of Choi Chi-Won's data and its recognition in Ilyeon. It was an attempt to verify what he was trying to reveal by including the data related to Choi Chi-won in 『Samgukyusa』. In fact, in 『Samgukyusa』, Ilyeon acknowledged that Choi Chi-won was well versed in Korean ancient society, Buddhism and Confucianism, and actively reflected and recorded this. He wrote that part. Existing studies have evaluated the characteristics of Ilyeon as Buddhism or historical consciousness of God(神異史觀) as opposed to Confucianism. Considering that the intention to articulate is reflected, it could be suggested that a new understanding and a broader approach are needed.

      • KCI등재후보

        一然 연구의 현황과 과제

        채상식(Chae Sang-Sik)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6 동양한문학연구 Vol.23 No.-

        올해는 一然(1206~1289)이 탄생한 지 꼭 800년이 되는 해이다. 개인의 탄생이 갖는 의미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三國遺事』의 저자라는 점에서 그를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연에 관한 대표적인 초기 연구성과는 崔南善의 『三國遺事解題』이다. 그의 해제는 우리 학계에 아직까지 유효할 만큼 귀중한 성과임에는 분명하다. 민영규는 일연이 남긴 『重編曹洞五位』라는 자료를 발굴하여 소개하고 이를 통해 그의 사상적 경향을 밝힌 성과는 주목된다. 한편 필자는 고려 후기 불교사의 흐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삼국유사』를 이해하기에 앞서 일연 개인에 관한 관심을 촉구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에 대한 높은 사학사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작 禪僧의 길을 걷었던 일연의 행적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연의 행적과 관련하여 그의 비문을 복원한 것은 중요한 연구성과이다. 현재 그의 비가 파괴되어 극히 일부만 남아있기 때문에 파괴 이전의 탁본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그런 중에 일연을 계승한 淸?이 바로 『삼국유사』에 보이는 無極임을 밝힌 점은 주목된다. 한편 일연은 간화선에 입각한 선승이지만 조동선과 운문선 등의 다른 계통의 선사상까지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탄력성을 지닌 인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그는 선사상을 기본으로 하면서 敎學과 儒學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보아진다. 일연이 다양하면서도 포용력이 있는 사상적 경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흥사에 주석한 후에는 특히 관음신앙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대몽항전이라는 오랜 전란에 지친 민중들로 하여금 신앙적 활로를 갖도록 하기 위한 현세구원적 의미가 컸다고 생각한다. 이는 『삼국유사』를 찬술한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It is just 800 years since Ilyeon(1206~1289) was born. I think that it is important to look back on him in that he was the author of well-known Samgukyusa(三國遺事), although the birth of one person is not important. Many studies on Ilyeon had laid stress on his Samgukyusa. The early remarkable work was Coi Namsun(崔南善)"s bibliographical explanation of it. But some scholars insisted that the study on Ilyeon himself should precede a study on Samgukyusa. Though we set a highly historical value on Samgukyusa, we didn"t know his works as Seon Monk(禪僧) well. The restoration of his epitaph was important to research the path of his life. It was restored on the basis of its rubbed copy which was made before it was destroyed. It was remarkable that Cheongbun(淸?), Ilyeon"s immediate disciple, was identified as Muguek(無極) who appeared in Samgukyusa through a research on his epitaph. The study results on Ilyeon"s thoughts also were accumulated. It was found that he embraced Seon(or Zen) thoughts such as Chodong Seon(曹洞禪) and Unmoon Seon(雲門禪), though he followed Kanhwa Seon(看話禪). He was well versed in Textual School(敎學) and Confucianism(儒學), not to mention Seon. Though he had various and tolerant thoughts, he put great emphasis on the Buddhism of Mercy(觀音信仰) after he stayed in Inheung Temple(仁興社). I think that his stress on it meant to provide a religious relief for the people who were exhausted by a long resistance to Mongolia. It also would be a direct motive which he wrote Samgukyusa.

      • 『삼국유사』 「피은」 편의 편찬 의도와 그 의미에 관하여

        조리라(LeeRa Jo) 慶熙大學校 大學院 2021 高凰論集 Vol.69 No.-

        『삼국유사』는 1281년경 고려의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사서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관한 연구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문학적·역사적·종교적 측면 등에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중심으로 『삼국유사』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만 『삼국유사』는 5권 9편목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편목에 관한 논의는 아직 다각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각 편목 모두 일연이 편찬 의도를 가지고 『삼국유사』의 구성으로 포함시켰을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타 편목들에 비해 연구가 덜 되어 있는 「피은」 편을 살펴보고 일연이 이 편목을 설정한 이유와 그 의미에 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우선 『삼국유사』의 의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피은」 편에 관한 분석을 진행할 것이다.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서 중 하나로 손꼽히며 문학과 철학 등 인문학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의미가 있는 책이다. 뿐만 아니라 향찰이나 이두로 작성된 내용의 글도 실려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의미를 지닌다. 『삼국유사』에는 총 9개의 편목이 있으며, 각각이 제목이 붙어 해당 제목에 속하는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수록하고 있다. 이 중 여덟번째 편목인 「피은」 편은 승려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의 출가 및 수행, 득도와 죽음 등 일련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일연이 추구하는 진정한 불교, 진정한 깨달음 그리고 진정한 피은, 즉 은거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일연은 승려 혼자만의 수행과 득도를 불교의 종착점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승려라는 특정한 계급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수행을 통해 득도할 수 있으며, 길고 어려운 수행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하나의 계기로 득도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려 뭇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행과 득도가 그 끝이 아니며, 포교를 통해 더 널리 알리는, 즉 불교홍통의 이념을 『삼국유사』의 「피은」 편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피은은 비단 속세를 떠나 숨어 살며 혼자 수행하고 득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과 단절된 은거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참여, 세상과의 소통 등 속세와 현실의 상호 관련성 측면에서 같이 고려되어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일연 역시 속세에서의 삶과 승려로서의 삶을 동시에 추구하였기 때문에 『삼국유사』를 통해 이상적인 은거의 양상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며, 이러한 일연의 생각이 가장 잘 반영된 편목으로 「피은」 편을 꼽을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민족적 자주정신과 불교에 의한 민중구원을 강조하고자 했음으로 보인다. 속세를 떠나 자기 수양만 하는 모습이 아니라 불교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제시하며, 포교와 교화가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피은」편의 조목이 불립문자 등 불교의 이치를 통해 불교홍통을 실현하는 모습을 보이며,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말하고자 한 바를 잘 전달하고 있다. 「피은」 편의 경우, 서사가 약하거나 타 편목과 이야기가 겹치고 편목만의 특성이 없다는 이유로 타 편목에 비해 연구가 다소 적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각 조목을 살펴보면 「피은」 편은 일연의 불교의 깨달음에 관한 생각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성과 속의 합일과 불교홍통 등 승려로서 일연이 깨닫고 전달하고자 한 바를 조목에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피은」 편만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Samgukyusa』 is a book compiled by Il-yeon, a Buddhist monk of Goryeo, around 1281. Research on a series of 『Samgukyusa』 has been conducted constantly. Various discussions have been made on 『Samgukyusa』, focusing on the fact that they are valuable in terms of literature, history, and religion. 『Samgukyusa』 consists of a variety of five volumes and nine articles, but discussions on some of them have not yet been made from various angles. However, all of these articles would have been included in the composition of 『Samgukyusa』 with the intention of compilation by Il-yeon. Therefore,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examine the chapter of "Pi-eun" , which is less studied than other articles, and find out the story and meaning that Il-yeon wanted to convey through this chapter. There are a total of nine editions of 『Samgukyusa』, each of which has a title and contains stories belonging to the title together. Among them, the eighth edition, “Pi-eun”, tells the story of a series of processes, such as the marriage and practice of monks and other people from various classes, as well as asceticism and death. And through this process, it explains the true Buddhism, true enlightenment, and true hermitage, which pursued by Il-yeon. Il-yeon did not set the practice and asceticism of the monk alone as the end point of Buddhism. It seems that anyone, even if they are not a specific class of monks, can gain through practice, and they can gain through one opportunity without going through a long and difficult practice process, so they seem to have tried to get close to many people. And practice and gain are not the end, and it was intended to reveal the ideology of Buddhist more widely through missionary work, that is, through the chapter of Pi-eun. Therefore, Pi-eun does not just mean to leave the world, live in hiding, perform and gain alone. It is not only about hermitage that is disconnected from reality, but also in terms of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the world and reality, such as participation in reality and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Since Il-yeon also pursued life in the world and life as a monk at the same time, he tried to convey his ideal seclusion and reflection of it in reality through his writings, and the chapter of Pi-eun is one of the best reflecting his thoughts. In the case of the chapter of "Pi-eun", some studies have been conducted compared to other stories because the narrative is weak, the story overlaps with other stories, and there is no unique characteristic of the story. However, if you look closely at the chapter, it clearly reveals your thoughts on the enlightenment of Buddhism. The characteristics of the chapter of Pi-eun can be found in that it reflects what Il-yeon wanted to realize and convey as a mo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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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然碑』에 보이는 淸玢과 山立의 정체

        채상식(Chae, Sang-Sik)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한국민족문화 Vol.59 No.-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가진 청분과 산립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일연비문」과 「일연비음기」에 각각 보이는데, 대선사라는 승계를 갖고 있었다. 이들이 같은 인물인지, 아니면 별개의 인물인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이들 양자는 별 의심없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견해를 밝힌 연구가 있었으나, 이의를 제기한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런 상반된 견해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주목된다. 곧 「일연비음기」는 통오진정대선사 산립이 지었는데, 그 내용 중에 산립은 일연 생존 시에 그를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를 보면 산립은 가지산문 소속 승려이지만, 일연의 직계 문도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일연비문」에는 일연의 행장을 충렬왕에게 올려 그의 비문을 짓도록 주선한 청분은 일연의 문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 이제현이 찬술한 「혼구비문」에 혼구가 보각국사에게 귀의하고 수학한 제자로 기록된 점을 주목한다. 이로 보면, 청분 곧 혼구와 생전에 일연을 뵌 적이 없었다는 산립은 별개의 인물인 셈이다. 이러한 상반된 내용 때문에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받은 청분과 산립이 어떤 인물이지 논란이 되었다. 양자를 같은 인물로 파악한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 내용을 주목하였다. 첫째, 고려시기에 대선사, 선사 등은 상당한 위상을 갖는 고승에게 내리는 승계이다. 이들을 대선사, 선사 등으로 임명할 때는 국가에서 정한 공식적인 절차를 따랐다. 곧 관고와 교서를 함께 내렸다. 따라서 같은 시기에 활동한 동일한 종파에 속한 2명의 승려를 대선사로 임명하면서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내렸다고는 볼 수 없다. 둘째, 「대혜종고행장」에 보이는 사례를 주목하고자 한다. 곧 ‘대혜’라는 시호를 받은 남악회양선사가 따로 있었기에 종고는 생전의 호인 대혜와 입적 후의 시호인 보각을 합해 ‘대혜보각’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같은 시대에 생존한 인물이 아님에도 혼동되는 것을 구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이로 보아 ‘통오진정’은 동일한 인물이다. 셋째, 혼구의 문도들이 지은 행장을 토대로 하여 이제현이 찬술한 「혼구비문」은 일연이 입적한 지 근 33년이 지난 시기에 찬술되었다. 이때 가지산문을 주도한 대표적인 승려인 혼구가 일연을 계승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계에서 직계 문도는 아니더라도 사상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고승이 있을 경우 그를 스승의 반열로 받들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를 계승한 것으로 표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관행은 대체로 고승의 행적을 추종하고 존숭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이는 교단을 장악하기 위한 방편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혼구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원간섭기의 시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면 양 측면을 모두 지녔을 것이다. 따라서 혼구는 일연 사후에 가지산문을 주도한 대표적인 승려로서 일연의 직계 문도는 아니었지만, 「혼구비문」에 ‘그에게 배우기도 하고 그를 계승하였다’는 표현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가탁일 뿐이다. Since Cheongbun and Sanrip had the same pen name of ‘Tongohjinjeong.’ They has been regarded as the same person. Some scholars, however, have called this idea in question. In the epitaph on the backside of the Headstone of Iryon(「一然碑陰記」), we can read that Sanrip Tongohjinjeong the Seon(or Zen) master lamented that he had not visited Iryon before his death, which means that Sanrip was not a direct disciple of Iryon. According to the Headstone of Iryon(「一然碑文」) and that of Hongu(「混丘碑文」), on the contrary, Cheongbun was not only a direct disciple of Iryon but also Hongu himself. Therefore, it might be understood that Cheongbun and Sanrip were different persons. However, I assert that Cheongbun and Sanrip were the same person for the following reasons. First, it should be noted that Command Paper and Royal Message were delivered altogether when the Seon master was appointed in Koryo. In other words, it does not make sense that the government gave the same pen name to two Seon masters who belonged to the same religious sect and worked in the same period. Second, we should consider a similar case in “Daehyejonggohaengjang”(「大慧禪師行狀」). Since Namakhoeyang the Seon master(南岳懷讓禪師) had received ‘Daehye’ as his pen name, Jonggo(宗杲) was called as ‘Daehyebogak.’ Even though they lived in a different period, their pen names should be distinguished. This implies ‘Tongohjinjeong’ is one person. Third, the Headstone of Hongu, which was based on writings of disciples of Hongu, inscribed after 33 years later than Iryon’s death. At that time, Hongu who led Gachisanmun(迦智山門) would be considered as a disciple of Iryon. Moreover, in the Buddist world, one could claim himself as a follower of the priest of virtue if the priest heavily influenced on his thought, even though he was not among disciples. In conclusion, the inscription that he had learned from and succeeded to Iryon is just a pre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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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然碑』에 보이는 淸玢과 山立의 정체

        채상식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한국민족문화 Vol.59 No.-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가진 청분과 산립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일연비문」과 「일연비음기」에 각각 보이는데, 대선사라는 승계를 갖고 있었다. 이들이 같은 인물인지, 아니면 별개의 인물인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이들 양자는 별 의심없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견해를 밝힌 연구가 있었으나, 이의를 제기한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런 상반된 견해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주목된다. 곧 「일연비음기」는 통오진정대선사 산립이 지었는데, 그 내용 중에 산립은 일연 생존 시에 그를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를 보면 산립은 가지산문 소속 승려이지만, 일연의 직계 문도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일연비문」에는 일연의 행장을 충렬왕에게 올려 그의 비문을 짓도록 주선한 청분은 일연의 문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 이제현이 찬술한 「혼구비문」에 혼구가 보각국사에게 귀의하고 수학한 제자로 기록된 점을 주목한다. 이로 보면, 청분 곧 혼구와 생전에 일연을 뵌 적이 없었다는 산립은 별개의 인물인 셈이다. 이러한 상반된 내용 때문에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받은 청분과 산립이 어떤 인물이지 논란이 되었다. 양자를 같은 인물로 파악한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 내용을 주목하였다. 첫째, 고려시기에 대선사, 선사 등은 상당한 위상을 갖는 고승에게 내리는 승계이다. 이들을 대선사, 선사 등으로 임명할 때는 국가에서 정한 공식적인 절차를 따랐다. 곧 관고와 교서를 함께 내렸다. 따라서 같은 시기에 활동한 동일한 종파에 속한 2명의 승려를 대선사로 임명하면서 ‘통오진정’이라는 같은 호를 내렸다고는 볼 수 없다. 둘째, 「대혜종고행장」에 보이는 사례를 주목하고자 한다. 곧 ‘대혜’라는 시호를 받은 남악회양선사가 따로 있었기에 종고는 생전의 호인 대혜와 입적 후의 시호인 보각을 합해 ‘대혜보각’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같은 시대에 생존한 인물이 아님에도 혼동되는 것을 구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이로 보아 ‘통오진정’은 동일한 인물이다. 셋째, 혼구의 문도들이 지은 행장을 토대로 하여 이제현이 찬술한 「혼구비문」은 일연이 입적한 지 근 33년이 지난 시기에 찬술되었다. 이때 가지산문을 주도한 대표적인 승려인 혼구가 일연을 계승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계에서 직계 문도는 아니더라도 사상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고승이 있을 경우 그를 스승의 반열로 받들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를 계승한 것으로 표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관행은 대체로 고승의 행적을 추종하고 존숭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이는 교단을 장악하기 위한 방편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혼구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원간섭기의 시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면 양 측면을 모두 지녔을 것이다. 따라서 혼구는 일연 사후에 가지산문을 주도한 대표적인 승려로서 일연의 직계 문도는 아니었지만, 「혼구비문」에 ‘그에게 배우기도 하고 그를 계승하였다’는 표현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가탁일 뿐이다. Since Cheongbun and Sanrip had the same pen name of ‘Tongohjinjeong.’ They has been regarded as the same person. Some scholars, however, have called this idea in question. In the epitaph on the backside of the Headstone of Iryon(「一然碑陰記」), we can read that Sanrip Tongohjinjeong the Seon(or Zen) master lamented that he had not visited Iryon before his death, which means that Sanrip was not a direct disciple of Iryon. According to the Headstone of Iryon(「一然碑文」) and that of Hongu(「混丘碑文」), on the contrary, Cheongbun was not only a direct disciple of Iryon but also Hongu himself. Therefore, it might be understood that Cheongbun and Sanrip were different persons. However, I assert that Cheongbun and Sanrip were the same person for the following reasons. First, it should be noted that Command Paper and Royal Message were delivered altogether when the Seon master was appointed in Koryo. In other words, it does not make sense that the government gave the same pen name to two Seon masters who belonged to the same religious sect and worked in the same period. Second, we should consider a similar case in “Daehyejonggohaengjang”(「大慧禪師行狀」). Since Namakhoeyang the Seon master(南岳懷讓禪師) had received ‘Daehye’ as his pen name, Jonggo(宗杲) was called as ‘Daehyebogak.’ Even though they lived in a different period, their pen names should be distinguished. This implies ‘Tongohjinjeong’ is one person. Third, the Headstone of Hongu, which was based on writings of disciples of Hongu, inscribed after 33 years later than Iryon’s death. At that time, Hongu who led Gachisanmun(迦智山門) would be considered as a disciple of Iryon. Moreover, in the Buddist world, one could claim himself as a follower of the priest of virtue if the priest heavily influenced on his thought, even though he was not among disciples. In conclusion, the inscription that he had learned from and succeeded to Iryon is just a pre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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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연 사상의 고유성과 독특성 ― 일연의 생애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

        조경철 ( Jo¸ Gyung-cheol ) 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2021 불교 철학 Vol.9 No.-

        일연과 『삼국유사』에 대한 연구는 세종과 ‘한글’에 대한 연구처럼 긍정적인 입장에서만 주로 다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일연의 생애에서 정치적 측면을 강조하였고 그 정치사상적인 구체적인 사례를 『삼국유사』에서 찾아보았다. 고려시대 승려에게는 구도와 정치가 별개가 아니었다. 특히 몽골의 침입과 몽골간섭기라는 시대적 격동기에 처한 승려에게는 더욱 더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연은 몽골침략기에 포산에 은거하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삼계가 환몽이라는 걸 깨달은 한편 세속에 몸을 담아도 하나도 거리낄게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포산에서 나와 정안의 남해 정림사에 머물면서 정치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정안이 정계에서 퇴출되자 다시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중편조동오위』등을 편수하였다. 일연은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강도의 선월사에서 주석하였고, 충렬왕의 일본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경주 행재소로 갔고, 몽골의 일본 정벌의 국제 정세 속에서 국존에 임명 되는 등 그의 행적에서 굵직 굵직한 사건이 중앙정치와 원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연의 정치사상은 『삼국유사』 ‘고조선’ 항목에서 잘 드러난다. 같은 나라이름을 구분할 때 ‘고(古)’를 붙인 건 ‘고조선’이 유일하다. ‘고’는 동양에서는 ‘상고주의’처럼 이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일연은 ‘고조선’을 이상국가로 보고 환인(제석)-환웅(천왕)-단군(인왕)으로 이어지는 불교국가로 해석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목적은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몽골에 저항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세계의 중심이 바뀌는 시대적 격변기에 우리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서 편찬한 것이 『삼국유사』이고 ‘고조선’ 항목이었다. 일연의 사상도 변화하는 시대를 이끌어가야 했기 때문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가지산문에 속하면서도 수선사와 선월사에 머물고 지눌을 계승했다고 하고 간화선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조동선이나 문자선은 물론 대장경에 대한 이해와 더 나아가 유교와 도교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일연 사상의 고유성과 특수성은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그 시대의 어려움을 여러 사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우리 역사의 자각을 통해 헤쳐 나가려고 했던 점에 있다. The study of Ilyeon and 『Samguk Yusa』 was mainly dealt with only from a positive point of view, like the study of Sejong and ‘Hangeul’. In this article, the political aspect of Ilyeon’s life was emphasized, and concrete examples of that political thought were found in 『Samguk Yusa』. For monks in the Goryeo Dynasty, composition and politics were not separate. In particular, I think it is even more so for the monks who are in the turbulent period of the Mongol invasion and Mongol intervention. During the Mongol invasion, Ilyeon took a passive stance, such as hiding in Foshan(包山). After leaving Foshan, Ilyeon became involved in politics while staying at Jeongnimsa Temple(定林寺) in Namhae of Jeongan. When Jeongan was expelled from politics, Ilyeon stepped back from the front line for a while, and published 『Jungpyeonjodongowi』(重編曹洞五位). When the restoration of the monarchy was accomplished, he stayed at Seonwolsa Temple[禪月社] of Gangdo Island, went to Gyeongju Haengjaeso to participate in King Chungryeol’s Japanese expedition, and was appointed as State honor[國尊]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of Yuan’s Japanese conquest. It can be seen that a major event is taking place in the relationship between central politics and the Yuan Empire. Ilyeon’s political thought is well expressed in 『Samguk Yusa』 ‘Gojoseon(古朝鮮)’. ‘Gojoseon’ is the only one that uses ‘Go[古]’ to distinguish the same country name. In the East, ‘Go’ means an ideal, like ‘sanggoism[尙古主義]’. Ilyeon saw ‘Gojoseon’ as an ideal state and interpreted it as a Buddhist state that was followed by Hwanin(Joseok), Hwanin(Cheonwang), and Dangun(Inwang). The purpose of Ilyeon’s compilation of 『Samguk Yusa』 was not to inspire national consciousness and resist the Mongols. 『Samguk Yusa』 and the item ‘Gojoseon’ were compiled after awakening awareness of us during the period of turbulent times when the center of the world changed from the Song dynasty to the Yuan dynasty. Illyeon’s thought was not biased toward one side because he had to lead the changing times. Although belonging to Gajisanmun, it is said that he stayed at Suseonsa Temple and Seonwolsa Temple and inherited Jinul. Although he was in the position of Ganhwaseon, he had a deep understanding of Jodongseon, Mukjoseon, and Mumseon, as well as the Tripitaka Koreana, and furthermore, Confucianism and Taoism. The uniqueness and specificity of Ilyeon thought lies in the fact that it tried to overcome the difficulties of that era through a broad understanding of various thoughts and awareness of our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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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에 구현된 일연의 교육사상

        안경식(An Gyeong Sik) 한국교육사상연구회 2018 敎育思想硏究 Vol.32 No.4

        이 논문에서 연구자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한 권의 교육고전으로 보고, 그 속에 구현된 일연의 교육사상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일연의 시대는 내부적으로는 무신집권기였고, 대외적으로는 장기간의 몽고 전란의 시대여서 국토는 황폐했고, 백성들의 마음은 절망감으로 가득 차있는 상황이었다. 전란이 끝나고 일연은 임금의 스승격인 국사(國師)의 지위에 올랐으며, 이 무렵《삼국유사》를 집필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의도 혹은 전략은 《삼국유사》를 통하여 이 땅이 불교적 이상세계인 불국토이며, 이 땅의 민중들이 이상적 인간인 불보살임을 ‘인식’시키는 것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교육학의 관점에서 볼 때 교육적 의도라 이해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그 의도를 달성하기 위 한 고안된 텍스트이자 미디어다. 일연의 교육사상은 한 마디로 불국토론이라 할 수 있으며, 《삼국유사》의 각 편은 불국토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기이〉편에서는 시조와 왕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들은 불국토의 설계자이자 책임자들이다.〈흥법〉편은 불국토 건설을 위해 이 땅에 진리의 가르침인 불교를 들여온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탑상〉편에서는 부처의 가시적 상징인 탑과 불상을 통해 이 땅이 곧 불국토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해〉편에서는 불국토를 이루기 위해 애썼던 스승들에 관해 서술하고 있고, 〈감통〉편에서는 중생들이 불국토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끝부분인 〈피은〉편에서는 숨어 드러나지 않았으나 불국토 건설에 공이 있는 스승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효선〉편에서는 부모님을 물질로 모시는 것을 넘어 불국토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진정한 효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연은 이와 같이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불국토론을 독자들에게 전달, 해설하고 있는데, 이 전달과 해설이 교육적 실천이자 교육사상의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인 《국가》에 비견할 수 있는 교육고전이며, 한국의 교육사상 연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저술이다. In this paper, I thought of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as an educational classic and wanted to explore the ideas of the Japanese education system. Since the Japanese colonial era was an era of internal atheism and a long time of Mongolian warfare, the nation was devastated and the people s hearts were filled with despair. After the war, the story of the war ended, he was in the position of the king s teacher, who wrote the Three Kingdoms. The intention or strategy of the three countries is to recognize through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that the land is a Buddhist ideal world, and that the people of this land are the ideal people. The whole idea is read from an educational point of view. The Three Kingdoms of Japan is a text and media to achieve its purpose. Each side is closely connected to the Japanese debate. Specifically, Gui is talking about Zizo and the King, who are the subjects of the Japanese debate. Heungkuk s book talks about the people who brought Buddhism, the teachings of truth to the land for the construction of Bulguksa.On the other side of the pagoda, the visible symbol of fire and death, the pagodas and Buddha statues, tell us that this is Bulguksa.The documentary talks about teachers and others who worked hard to complete the French national territory, while in the book, the book tells how Chinese people can enter Bulguksa. Even though Dapi, the back part of the Samguk Yusa, did not show up secretly, it is talking about teachers who worked on the construction of Bulguksa, which is beyond serving their parents with materials. In such diverse ways, the association communicates and explains the French debate to its readers in various ways, which is educational practice and meaning of educational thought. The Three Kingdoms is an educational classic comparable to Plato s idealism and a book that cannot be overlooked in Korean educational thought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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