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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儒家 아비투스의 상대화와 근대적 문장관의 출현

          한영규(Han, Younggyu)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2 동양한문학연구 Vol.35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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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대 김태준의 『조선한문학사』가 출간되면서 이건창ㆍ황현ㆍ김택영 이후로 한문학은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고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식민지시기에 창작된 한문문장은 여전히 문학사와 연구자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 내부에서 여전히 자기의 생존공간을 지닌 채 활발히 한문문장을 산출하는 문사들이 존재했다. 1924~25년에 김택영과 성순영이 변영만의 문장을 놓고 쓴 상이한 비평문에는, 이 시기 한문문장의 지향과 관련하여 여러 의제가 각축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논문은 1920년대에 한문글쓰기의 지향을 놓고 벌어진 제 문제 가운데, 특히 유가 아비투스를 놓고 벌어진 조긍섭과 변영만의 논쟁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한문 문장이 근대와 대면하여, 어떻게 당대성을 획득해 나가는지를 탐구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심재와 산강이 주고받은 편지를 살펴보면, 두 문장가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과 불일치가 발견된다. 이는 당대의 한문 문장을 지향을 놓고 벌어진 매우 중요한 노선 투쟁이기도 했다. 산강은 심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양의 崇美 高華한 문장과 沈博 壯麗한 작품이 결국 동양의 深味 奧趣가 있는 글에는 못 미친다고 하면서, 동서를 회통한 시각에서의 새로운 한문문장을 지으려고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산강은 이를 ‘한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세상에 널리 펴고자 한다.’는 말로 요약했다. 그러나 심재는 이런 제안에 반대하였다. 심재가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 중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묵자에 대한 산강의 경도에 있었다. 심재는 묵자를 ‘성인’으로 이해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으며, 이를 양계초ㆍ장병린의 견해를 묵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산강의 묵자 이해는 동양의 전통을 동서양 회통적 사유 속에서 재발견하자는 의미를 지녔다. 산강은 묵자가 지닌 박애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측면을 매우 높이 인정하였고, 이 점을 활용해 새로운 한문 글쓰기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한문으로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려면 무엇보다 유가적 아비투스를 상대화 시켜야 했다. 산강은 공자를 ‘유일한 聖人’이 아니라 ‘하나의 聖人’으로 인식해야 했다. 이 지점에서 심재와 산강은 충돌했다. 산강이 “진정한 문인이란 부유한 無家者라야 한다.”고 선언했듯이, 동양적 전통과 서양의 신지식을 이해하고 이를 다시 異化하고 상대화하는 無家者의 길을 가고자 했다. 이 지점에서 근대적 질서에 대응한 새로운 근대적 문장관이 탄생했다고 판단된다. 1920년대에는 한문 문장과 지향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 김택영은 윤희구와 정인보의 문장에 기대를 걸었으며, 조긍섭은 유가적 전통을 고집하는 소위 동성파 글쓰기의 조선적 구현을 여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변영만은 유가적 전통을 상대화하면서 동서를 회통하는 새로운 한문글쓰기를 주장하고 추구하였다. 변영만의 동서 회통의 한문글쓰기와 정인보의 實心實學의 한문글쓰기는 1920년대 이후에 근대적 한문글 쓰기로 나름의 생존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요컨대 유구한 전통을 지닌 한문글쓰기는 근대적 충격과 근대적 질서 속에서 내부 경쟁과 자기 갱신을 통해 근대적 글쓰기로서 차츰 전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intensively explores the debate between Geung-seop Jo and Yeongman Byeon aboutadhering to Confucian Habitus, among other issues addressed with respect to the orientation of writing in Chinese classic. Considerable conflicts and disagreement are found from the letters between the two writers. These also constituted a very important line struggle around the orientation of the contemporary sentences in Chinese classic. In a letter to Jo, Byeon even a splendid Western text does not parallel a profound Oriental writing. Thus, Byeon revealed his ambition to compose Chinese classic sentences in novel forms from a thorough view of Oriental and Western literature. He summarizes this into a sentence ‘I would like to unfold Chinese classic studies for the world by newly interpreting them.’ Then, he asked Jo to join him with his plan. However, Jo opposed to this proposal. The core reason why Jo did not agree lay in Byeon’s bias toward Mozi. Byeon tried to relativize Confucian Habitus. He recognized Confucius not as the ‘only saint,’ but ‘one saint.’ At this point was born a new early modern view of sentences. Chinese classic writing, with a long tradition, was progressively shifting to early modern writing via competition and self-reforms among internal powers in the early modern shock and modern order.

        • KCI등재

          富山에서 釜山으로의 漢字名 變改와 避諱

          김성진(Kim, Sung Jin)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9 동양한문학연구 Vol.52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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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부산의 한자 표기가 왜 성종 말년을 전후해서 富山에서 釜山으로 변경되었는가를 살펴 본 것이다. 부산의 한자명은 [성종실록]1년 12월 15일조에 釜山이라는 한자 표기가 나타난 뒤 한동안 富山과 병용되다가 [동국여지승람]이 완성 발 간된 1486년 이후에는 釜山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 정설화되어 있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부산의 한자명이 釜山으로 정착된 것은 1495년 4월 이후라고 보았다. 이는 [성종실록]의 기사는 실록청이 설치된 1495년 4월 당시의 정치외교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통용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486년에 간행된 것이 아니라, [동국여지승람]을 바탕으로 대폭 수정 증보한 후 1530년에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임을 감안해야 한다고 보았다. 부산은 富山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 당시부터 대일외교의 독점적 거점이었다. 따라서 富山에서 釜山으로의 漢字名 변경은 일본과 관련지어 살펴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 본 논문의 출발점이다. 본 논문에서는 그 당시 일본 무 로마치막부의 실질적인 최고권력자가 日野富子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대일외교문서에서 ‘富’자를 피휘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日野富子에 의해 쇼군이 되었다가 다시 日野富子에 의해 쇼군직에서 밀려난 아시카가 요시키가 越中公方이라는 망명막부를 세운 곳이 지금의 富山縣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하였다. 요컨대 富山을 釜山으로 바꾼 것은 日野富子와 越中公 方이 있던 富山縣의 ‘富’를 피휘한 결과라는 것이 본 논문의 요지이다. This paper aims to discover the reason for the chracter change of busan from 富山to 釜山during King SungJong s later years. The widely accepted explanation of it is this: 釜山appeared in the Annals of SungJong in his first year Dec. 15th, and that name was used jointly with 富山for a while until it was settled as 釜山after 1481 when ‘Donggugyeoji -seungnam’ was published. However, I argue that the establishment of 釜山was after April of 1495, since the article in the Annals of SungJong reflected the circumstances of political and diplomatic events of April, 1495. Another factor to consider is the fact that [Donggugyeojiseungnam] currently circulated was the ‘Newly Revised Version of Donggugyeoji- seungnam’, which was finalized in 1530. Busan was the exclusive base of diplomacy toward Japan since it had been noted as 富山in the documented literature. Therefore, it is quite reasonable to see the name change from 富山to 釜山in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Japan. When the character change began, the highest authority in Japan s feudal government, Muromachi Shogunate, was practically 日野富子. Avoiding the chinese character ‘富’ in the diplomatic documents was sensible. Asikaga Kiyosaki, who was crowned as shogun and later uncrowned by 日野富子went to seek political asylum in a place called 富山縣. Therefore, to avoid using 富was reasonable since the Japanese leader s name and the asylum chosen by his political opponent shared the character 富 and Busan s naming consequently was changed from 富山to 釜山.

        • KCI등재

          조선시대 여성글쓰기에 대한 사대부남성의 인식과 표기방식

          권정원(Kwon, Jung Won)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5 동양한문학연구 Vol.41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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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여성의 글쓰기[문학창작활동]에 대한 사대부남성들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여성의 글쓰기, 즉 문자를 통한 욕망의 표출에 대한 부정이라면, 그것이 한문이든 언문이든 표기방식과 무관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의 경우는 다르다. 여성의 한문글쓰기가 ‘문학 활동 자체가 여성의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비난받은 것과는 달리, 여성의 언문글쓰기에 대한 제재는 거의 없었다. 이는 사대부 남성들의 한문과 언문이라는 표기방식에 대한 인식에 기인한 것이다. 한문은 중세보편문화의 상징이자, 상층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사대부 남성들은 이를 통해 유교적 사상과 학문을 專有하였고, 이러한 문자사용 능력은 사회적 권위와 신분을 보장하는 상징이 되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문과 언문이라는 이중 문자를 사용해야 했지만, 사대부남성들의 세계를 유지시키는 문자는 한문이었다. 사대부남성에게 언문은 ‘여항의 비속한 말’,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이며 ‘한낱 신기한 기예’에 불과했다. 사대부남성에게 한문은 상층의 문화를 대변하는 우월한 것이었고, 언문은 하층의 문화를 드러내는 열등한 것이었다. 이러한 표기방식에 대한 인식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남성:여성=상:하=한문:언문=우월:열등’이라는 인식을 가져왔다. 따라서 여성이 언문을 사용하여 문학 활동을 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었지만, 여성이 상층 남성의 전유물인 한문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대한 불편함이 여성의 한문글쓰기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한문글쓰기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여성의 글쓰기 활동 자체를 제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여성들은 한문을 안다는 사실을 드러내길 꺼렸고, 시문 창작을 하거나 문집을 발간하더라도 죽기 전에 스스로 불태우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결국 사대부 남성의 여성 한문글쓰기에 대한 경계와 비판은 여성 스스로가 언문이라는 표기방식을 채택하도록 하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Gentry men's evaluation of women's writing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was negative in general. If the negative evaluation is the negation of women's writing, that is, the expression of desires through letters, women's writing should have been evaluated regardless of transcriptional methods, that is, Chinese classics or Hangul. However, it was not the case in the reality. Unlike women's Chinese classics writing that was severly criticized for the reason that ‘Literature activities per se are none of women's business’, women's Hangul writing was hardly restrained. This is due to gentry men's perception of the transcriptional methods; Chinese classics and Hangul. Chinese classics was the symbol of medieval universal culture and an exclusive property of upper class men. Gentry men exclusively owned Confucian ideas and learning through Chinese classics and the ability to use these characters became a symbol that guaranteed social authority and status. Although they had to use two characters; Chinese classics and Hangul after the creation of the Hangul by king Sejong, the characters that maintained gentry men's world were Chinese classics. To gentry men, the Hangul was just ‘an abusive language in the country’, ‘indecent words of middle class communities’ and ‘a novel art.’ To gentry men, Chinese classics was a superior thing that represented upper class' culture and Hangul was an inferior thing that revealed lower class' culture. This perception of transcriptional methods interlocked with neo-Confucian ideology to bring about the perception that men:women=top:bottom=Chinese classics:Hangul=superior:inferior. Therefore, although there was no repulsion against women's literature activities using Hangul, gentry men's inconvenience about the fact that women shared Chinese classics that was an exclusive property of upper class men appeared as negative views of women's writing in Chinese classics. These negative views of women's writing in Chinese classics acted as a factor that restrained women's writing activities perse. Women were unwilling to reveal the fact that they knew Chinese classics and even if they created poetry and prose or published a collection of works, they were unserved in burning it before they died. Eventually, gentry men's vigilance and criticism against women's writing in Chinese classics acted as a factor that made women adopt the transcriptional method termed Hangul by them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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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기일[James Scarth Gale]의 한문 교과서 집필 배경과 교과서의 특징

          남궁원(Namgung Won)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7 동양한문학연구 Vol.25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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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奇一[J. S. Gale]은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이다. 그는 1888년 12월 15일에 조선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한국의 언어와 문자 및 교육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은 저술 활동을 하였다. 한국의 현실 정황과 학문적 전통으로 보아 한문 학습이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알게 된 기일은 한문 교육에도 주의를 쏟았다. 그러나 기일은 기록 수단에 불과한 한문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으며, 결국 한문이 숭배 받는 이유가 한문과 유교가 동일체로 인식되기 때문임을 간파하였다. 궁극적 목적인 기독교 선교를 위해서는 유교의 약화 또는 배제가 필요했고, 한문과 유교를 한꺼번에 둘 다 버릴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 한문과 유교의 분리를 도모하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 탄생한 한문과 교과서가『유몽천자』시리즈이다. 아울러 한국의 전통 교육이 한문을 학습하되 중국의 인물, 역사, 작품등에 치우쳐 있는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여 『유몽속편』을 기획하고 한국의인물, 작품만을 교과서에 담았다. 또한 낱낱의 한자 학습을 강조하여 정확한 읽기를 강조하였다. 『유몽천자』는 시리즈로 기획하여 권차별로 단계를 높여가도록 내용을 구성하였다. 제1권은 한자어 중심, 제2권은 한자어, 한문, 제3권은 한문 중심이다.『유몽속편』은 선인들의 한문 작품을 그대로 실은 것이다.『유몽천자』의 내용은 다양하다. 서양 문물 소개가 중심인 반면, 중국의 전통 작품이나 유교 경전은 배제되어 있다. 본격적인 단원 학습에 앞서 신습 한자를 익히게 배치한 것이라든지 책의 말미에 자전을 둔 것은 한자 학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시도였다. 기일의 한문 교육은 ‘한문’을 가르치는 것이긴 하지만 전통 교육 방식과 내용은 모두 부정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문 교과서에서 유교 경전이 매우 미약한 분량으로 들어있고, 우리나라의 글들이 중국의 글보다 더 많은 점, 그리고 단원 구성시 한자 소개를 본문과 병행하여 제시하는 등 형식적인 면에서 기일의『유몽천자』는 한문 교육의 방향을 새롭게 바꾸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J. S. Gale was a missionary who came from Canada. In 1888, he left for Joseon to preach gospel. He was fully taken up literary work concerning Joseon"s culture, education and language. According to the current of the times, he also paid attention to Chinese education because Chinese learning was essential in those days. Yet he didn"t understand that Joseon"s situation of making an idol of Chinese classics. he carried out separation of Chinese classics and Confucianism. Korean Reader: the thousand character series published with fulfilling above these aims. To improve a biased view concentrating on figure, history, and literature of China mostly, issued Korean Reader: Number Ⅳ too. Korean Reader: Number Ⅳ listed figure and literature of Joseon only. He emphasized right reading and learning of Chinese character. Korean Reader: the thousand character series was made in series. This series leveled up step by step. The first volume contained Chinese characters. The second mixed Chinese character with Chinese writings. The last also covered Chinese writing. It put an Chinese writings of foregoer in a Korean Reader: Number Ⅳ. Korean Reader: the thousand character series contained a wide variety. To the exclusion of traditional Chinese writings and the Confucianism scriptures, it was based on western cultures. Before starting learning units, it was placed now Chinese characters to practice ahead. Furthermore dictionary at the end of the book. Regarding Chinese education, he taught Chinese writings by not a traditional style and contents of education but a new form and contents. Thus what is important is groping direction of Chinese education about contents and forms in Chinese wri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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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한문교육의 실태와 해결 방안 모색

          원용석(Won Yongseok)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3 동양한문학연구 Vol.37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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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most every document and national literature were historically recorded in Chinese until the late Joseon Dynasty era in this country, and they remain as a massive amount of data to us currently. In addition, since absolute majority of vocabulary of our language is composed of Sino-Korean words, it is essential in language life as well. Although the Sino-Korean subject positioned itself officially in schools in 1972, its status became too low and now its existence in itself has got uncertain as it turns into 'the 7th Educational Curriculum', 'the revised 2007 Educational Curriculum' and 'the revised 2009 Educational Curriculum' after it became an optional course in middle schools in the 6th Educational Curriculum. Gyeonggido Office of Education did not expanded chinese character teachers for the last ten years, and as a result, around more than 200 Sino-Korean teachers decreased for the past ten years. It is a result that middle schools did not select Sino-Korean, and they are fiercely competing to survive with other subjects in every school. Sino-Korean teachers are suffering from pressure due to TO reduction and it's true that their appointment is not amicable. Naksaeng High School in Bundang encouraging as it has made a case that the number of class hours increases by means of teachers' efforts, but it is uncertain when it will face a crisis without political consideration from the nation or local education offices. What should be done in established institutions in order to solve this is to put pressure on governmental organs and the person in charge for the policy to implement language planning stressing Chinese characters and Classics first of all and secondly it should be acknowledged that Sino-Korean education has two axes of 'language life' and 'Sino-Korean' to compose consequent curriculum, and thirdly, it's necessary for Sino-Korean teachers to be promoted more to professional and management positions. For solutions other than established institutions, Chinese characters and Chinese Classics should be exposed more socially to expand opportunities for the public to access to them easily, and a variety of efforts need to be provided so that people can increase interest in and curiosity about Sino-Korean. Solidarity and efforts of parties concerned are urgent including pressure on the government for studies on fundamental and concrete policy and language education, exposure of chinese characters to the eyes of the people etc. 우리나라는 역사 이래 조선 말까지 거의 모든 문서와 국서가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며, 현재 방대한 양의 자료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또한 우리말 어휘의 절대 다수가 한자어이기 때문에 언어생활에서도 필수불가결하다. 1972년에 한문교과는 학교 안에 정식으로 자리했지만 제6차 교육과정에서 중학교가 선택과목이 된 이후 '제7차 교육과정'과 '개정 2007 교육과정' 그리고 '개정 2009 교육과정'으로 변화하면서 그 위상이 너무 낮아져 이제 한문교육은 존재 자체가 불확실하게 되었다. 경기도 교육청은 지난 10년 동안 한문교사를 확충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2003년에 비하여 200여 명의 한문교사가 줄었다. 이는 중등학교들이 한문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이며 다른 교과와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문교사들은 TO감 압박에 시달리고 있으며 내신 발령 또한 원만치 않은 상황이다. 분당의 낙생고는 교사들의 노력으로 시수가 증가하는 경우를 만들어 고무적이지만, 국가나 시ㆍ도 교육청의 정책적인 배려가 없이는 이 또한 언제 위기를 맞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도권 내에서 해야 할 일은 우선 국가 기관과 편수 담당자에 대하여 한자ㆍ한문을 중시한 어문정책을 실시하도록 압박해야 하며 둘째, 한문과교육이 '언어생활'과 '한문 고전'이라는 두 개의 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하며 셋째, 한문교사들이 전문직과 관리직으로 더 많은 승진을 할 필요가 있다. 제도권 외적인 해결 방안으로는 범사회적으로 한자ㆍ한문이 더 많이 노출되어 국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여야 하며, 국민들이 한문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제고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이 제공되어야 한다. 정리하면 한문과교육이 정상화되려면 근본적이고도 구체적인 정책론의 연구와 어문교육에 대한 대정부 압박, 국민들의 시야에 한자를 노출하는 등 관계자들의 결집과 노력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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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敎育課程의 變化와 漢文敎育의 正體性 摸索의 方案

          송병렬(Song Pyung Nyul)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3 동양한문학연구 Vol.37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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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稿는 근대 이후 한국에서의 한문의 위상 변화와 그에 따른 自己 正體性을 어떻게 추구해왔는지를 밝혔다. 또한 敎育課程 編制 變化에 따른 한문과의 위기는 새로운 正體性과 漢文文化의 新談論이 요구되고 있음을 밝혔다. 中世 東아시아에서 한문은 동아시아의 다양한 思想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동아시아의 근대는 동아시아의 漢文文化로 형성된 여러 價値와 思想을 밀어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20세기 초에 漢文廢止論으로 漢文文化를 排除하고자 했다. 이에 한문문화는 國漢文體로 대응했다. 또한 1945년 이후 語文政策에서 한글 專用論으로 漢文文化를 排除하고자 했다. 이에 國文學界는 漢文學을 '國文學 속의 漢文學'으로 定義하였다. 이는 한문을 傳統文化 繼承과 東아시아 國家 交流의 주요한 敎科로 槪念 定義하는데 중요한 影響을 미쳤다. 이에 3, 4, 5차 敎育課程에서 漢文은 中學校, 高等學校 모두 必修 敎科가 되었다. 그러나 6차 敎育課程에서 中學校는 選擇 科目, 高等學校는 課程別 必修 科目으로 되었다. 7차, 2007년, 2009년 敎育課程에서는 중학교는 裁量活動 科目, 高等學校는 選擇科目으로 되면서 계속 編制 單位 時數가 줄었다. 大學入試에서도 豫備考査ㆍ本考査, 學力考査를 치르던 시절에는 國語 敎科에 漢文 領域으로 3~10問題 出題되다가, 1990년대 초 6차 敎育課程期中 大學 修學能力試驗 3년 정도 言語 領域에 出題되다가, 이후 漢文 問項이 除外되었다. 2002년 大學修學能力試驗에 제2外國語/漢文으로 出題되면서 僅僅히 命脈을 維持해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 漢文 敎科의 位相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近代 이후 漢文文化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문화적으로 位相 變化를 강요받았다. 그때마다 새로운 談論과 變身으로 漢文文化의 基盤을 유지해왔다. 21세기의 東아시아는 새로운 秩序가 形成되고 있다. 東아시아의 言語와 文字의 普遍性이 다시 漢字 語彙의 側面에서 提起되고 있다. 이는 漢文文化圈의 再形成 되었음을 意味하는 것이다. 따라서 韓國 社會가 漢文文化를 바라보는 視角의 矯正이 필요하다. 이에 漢文文化에 대한 새로운 談論을 要求한다. '漢文文化 新談論'이 大衆化되면 동아시아에서 漢字와 漢字 語彙를 가지고 문화적 보편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한자ㆍ한문 교육의 방향도 희망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enunciated the change of the Chinese character's statue since the Modern age, and how has sought self-identity following this. Also, it says the crisis of Chinese character department following the change of curriculum formation requires the new identity and discussion for Chinese character culture. In East Asia of the middle age, Chinese character was a container that holds various East Asian ideas. The Modern age of East Asia started pushing the ideas and values that formed with East Asian Chinese character culture. In Korea, Chinese character culture was intended to push as 'Chinese character abolition' in the early 20's. In response to this, Chinese character culture coped with it as a mixed style of writing Korean with Chinese characters. And also, since 1945, in the language policy, there was a attempt to push Chinese Classics as a theory of exclusive usage of Hangul. For this, the academia of Korean literature accepted Chinese Classics as Korean literature and defined Chinese Classics into the category of 'Chinese Classics included in Korean literature'. This had an important influence on the concept definition of Chinese character as a succession of traditional culture and a major subject for the exchange among the East Asian countries. Accordingly, Chinese character had become the required subject in both middle school and high school from the 3rd curriculum to 5th curriculum. However, in the 6th curriculum, it became an optional subject in the middle school and a required subject following each course in the high school. In the 7th curriculum, in 2007 and 2009, the formation unit hours of Chinse Character consecutively decreased, becoming a discretionary activity in the middle school and an optional subject in the high school. Even, in the university entrance examination, while there were preliminary exam, main exam and achievement exam, Chinese character was set from 3 to 10 questions in the Korean subject. And then, in the early 1990's, on the 6 th curriculum term, it was set in the Korean subject of College Scholastic Ability Test for 3 years, and it was excluded in the Korean subject. After that, Chinse character barely keeps itself in existence, being set as Chinese character subject of the second foreign language in the College Scholastic Ability Test, in 2002. This situation is undermining the statue of the present Chinese character subject. Since the Modern age, Chinese character culture has forced socioculturally the change of the statue in the society of Korea. On all such occasions, it keeps the foundation of Chinse character culture as a new discourse and change. In East Asia in the 21 st century, the new order is being formed. The universality of language and character in East Asia is being brought up in terms of Chinese character vocabulary. It means the reconstitution of Chinese character culture sphere. Therefore, Korean society should have the new vision to see the Chinese character culture. And also, the new discourse of Chinese character culture is required. If the 'new discourse of Chinese character culture' become popular, the importance of cultural universality with the Chinese character and its vocabulary will be recognized in East Asia. Following this, the direction of Chinese Character education will be changed hopefu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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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학과 미시사의 풍요로운 만남

          백승종(Paik Sungjong)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7 동양한문학연구 Vol.24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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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1990년대 이후 한문학의 신경향이 미시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양자의 성숙한 만남을 위해 해결되어야 할 한두 가지 과제를 언급한다.<BR>  20세기 후반 한문학자들은 학문적 관심영역을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미시사/신문화사라는 역사학계의 새로운 조류와 조우했다. 미시사와 신문화사는 국가와 민족의 일직선적 발전을 강조해온 근대 역사학적 태도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흐름으로, 역사 속에 숨어있던 익명의 개인에 대한 발견을 의미한다. 본질적으로 구래의 각종 문헌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인간 보편성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지녀온 한문학자들은, 역사학자들보다 한 발앞서 근대 역사학에서 망각된 소수자의 일상과 그들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데 앞장섰다. 그런 점에서 한문학은 독서 대중을 미시사의 세계로 안내하는 서구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정민, 강명관 및 고미숙의 저작이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하다.<BR>  그러나 한문학과 미시사의 만남은 앞으로 더욱 풍요로워질 여지를 남기고 있다. 한문학의 글쓰기는 사물의 중층성을 탐구하는 쪽으로 진행될 수 있고, 무료한 일상에 담긴 생존 전략의 다양함을 캐는 작업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 이로써 한문학과 미시사의 학제간 유대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한문학의 발전은 미시사의 이론과 실제를 더욱 살찌우는 계기가 될 수 도 있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가 있다.   This article aims at discovering the link between micro history and some recent publications by Korean scholars in Korean literature written in classical Chinese. In my view, the Koreans share theories and some research- methods with micro historians in the West. They are keen on various life styles of social minority and their strategies for survival; writings of Chong Min, Kang Myonggwan and Ko Misuk are outstanding instances.<BR>  This encourages our hopes that the fusion of the two different disciplines, Korean literature and micro history, leads to the prosperous future. The Korean scholars would describe everyday life of their old people in depth and find out complexity of the historical events and personality; it would enrich micro history in both of theory and prac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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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 향촌재지사족의 漢文懸吐小說창작에 대한 一考

          한의숭(Han Eui soong)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6 동양한문학연구 Vol.44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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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향촌을 기반으로 한 재지사족의 당대 현실 인식이 개인 출판물을 통해 표출되던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한 자료로 20세기 초 全北 扶安에 거주하던 高濟安(1845~1927)에 의해 창작된 <神機圖>란 작품과 慶南 密陽에 거주하던 尹載禧에 의해 창작된 <太極翁傳> 두 작품을 주목하였다. <신기도>와 <태극옹전>은 20세기 초에 창작된 한문현토소설로 부안과 밀양이란 지방 향촌에 거주하던 재지사족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신기도>는 1916년에 창작되어 해방 이후인 1961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향촌재지사족의 현실인식과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이 있다. 작중에서 강조한 '塞翁之馬'가 그것으로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의 고통이 지속적인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寓意'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이 해방 이후 출간된 것은 작가의 서술의도에 대한 해석이 일정부분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편 <태극옹전>은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儒家와 여타 諸家의 사상 우열 논쟁을 통해 유가이상주의를 선양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유가'로 대표되는 전근대 조선의 지배계급의 시대인식이 어떠한지 그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지배계급의 시대인식과 일제의 사상통치의 목적성이 상호 부합했던 까닭에 사전검열이 심했던 일제 강점기에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신기도>와 <태극옹전>은 일제 강점기 향촌재지사족의 현실 인식의 일단을 작품화 한 사례들로, 1935년과 1961년이란 출간시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의 출판법에 의한 검열의 문제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때 핵심은 현실 인식의 표출 방식이 어떻게 노정되었냐 하는 점이며, <신기도>와 <태극옹전>은 우회적으로 표출하거나, 일제에 편승하는 방식으로 작품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기도>와 <태극옹전>은 한문현토소설이라는 언어, 문자의 방식으로 향촌재지사족이 당대를 인식하던 시각을 보여준 사례로 향후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바탕으로 일제 강점기 신문, 잡지 등에 수록된 한문현토소설 전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This paper investigates on the phenomenon of provincial novel family expressing their perception of reality through individual publications. Two pieces were chosen for this research purpose which are <Shin-Ki-Do> created by Ko-Jae-Ahn(1845~1927) who lived in Boo-Ahn, Jeon-Buk and <Tae-Keuk-Ong-Jeon> created by Youn-Jae-Hee who lived in Miryang, Kyung-Nam in early 20thcentury. Both <Shin-Ki-Do> and <Tae-Keuk-Ong-Jeon> are identified as Han-Moon-Hyun-To novel created in Miryang region in early 20thcenturies and they have in common that the authors are from provincial novel family. <Shin-Ki-Do> is created before 1914 and it got published in 1961 right aft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shows that the reality perception is reflected on the volumes by provincial novel family. Especially in the middle of the volume, the emphasized theme 'Sae-Ong-Ji-Ma' has very high potential to be interpreted as 'a fable' which means that the pain caused by Japanese Colonial Period would not last forever. This piece being published right aft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provides enough room to have a thought of some pressure imposed on the publication process. On the contrary, <Tae-Keuk-Ong-Jeon> is published in 1935 which was still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publication chose a method to leading towards on the 'You-Ga' idealism by debating between 'You-Ga' and 'Yue-Ta-Je-Ga'. This could be considered as a way to strategically win over the 'You-Ga' which is high class in premodern ChoSun Society. Because of the strategic purpose to conciliate the class, it seems to be possible to publish the piece eve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hin-Gi-Do> and <Tae-Keuk-Ong-Jeon> was outlets of expressing the reality perception by provincial novel family in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publication years have gaps as between 1935 and 1961. The inspection of Japanese's law over publication would have caused the year gap between those two pieces. The inspection seems to weight the most on the way of expressing the reality perception and there is a clear difference about the level of expressions between <Shin-Gi-Do> and <Tae-Keuk-Ong-Jeon>. As stated above, there is a clear evidence of being affected by Japan's lawful influence over publication to see one being published during the Colonial Era and the other being published right after the era ended because of the level of expressions. <Shin-Gi-Do> and <Tae-Keuk-Ong-Jeon> are very interesting pieces to study because even though both pieces started from the same base as the expression of reality perception by provincial novel family in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y split into two different ways as they evolves as Han-Moon-Hyun-To novel. In the near future, It is exciting to look forward to have new perspectives on Han-Moon-Hyun-To novel covered by newspapers and magazines in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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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三國遺事』에 대한 인식 : 丹齋와 六堂을 중심으로

          유영옥(Yu Young-Og)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9 동양한문학연구 Vol.29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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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古典은 방대한 시공간을 함축한 문화의 바다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가치가 재규정되는 잠재적 역동성을 내포한다. 1920년대 최남선의 「三國遺事解題」에서부터 한국 上代의 最高 기록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삼국유사』가 바로 그러한 고전이다. 그 동안 불변의 古典이자 고대사 正典이었던 『三國史記』가 한말일제시기 ‘사대주의’의 굴레에 갇혀 史書로서의 가치를 일시 상실하자,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대안 내지 그 너머에서 上代의 유일무이한 原形 자료로 각광받게 되었다. 『삼국사기』를 가장 신랄히 비판했던 신채호는 『유사』가 그 대안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최남선은 유교와 支那의 한문으로 윤색된 『삼국사기』와는 달리, 풍부한 신화ㆍ설화ㆍ민담 및 향가를 수록한 『삼국유사』를 고대 문화의 原形 그 자체로 보고, 1927년 「해제」를 지어 『삼국사기』에 맞먹는 고대사의 拱璧으로 승격시켰다. 이와 같이 「삼국유사해제」는 고전 『삼국사기』의 흔들리는 위상 속에서 잉태되었기에, 육당은 『사기』에 결여된 『유사』만의 매력을 각별히 탐닉하여, 시종일관 고대의 原相을 그대로 복원할 최대 관건으로 언급하였다. 이는 인류학, 민속학, 종교학, 언어학, 고고학 등으로 ‘朝鮮學’을 제창한 그의 역사연구 방법론과도 상통한다. 또한 「삼국유사해제」는 일제 조선사편수회의 단군부정론을 타파하기 위한 순수한 분투에서 출발한 저술이기도 하다. 僧徒妄談說로 일견 요약되는 日人의 단군부정론은 『유사』에 인용된 『古記』와 『魏書』가 허구이기 때문에 『유사』는 승려의 날조이며 단군 기록도 만들어진 신화라고 주장하였다. 積年 단군을 考究한 육당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과 ‘당굴’로 단군의 보편성을 확보하여 그 존재를 증명하는 한편, 『古記』와 『魏書』의 실재를 규명하고 ‘檀君’이 아닌 ‘壇君’으로의 표기를 주장하는 등 단군부정론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유사』 기록의 사실성을 다각도로 증언하였다. 결론적으로 최남선은 「해제」를 통해 韓민족의 집단 표상인 단군에 관한 기록, 곳곳에 배치한 각종 신화와 설화의 사회적 함의를 대중에게 각인시켜, 『삼국유사』를 생명력 넘치는 史書와 문학의 寶庫로 재탄생시켰다. 이로써 『삼국유사』는 고대 문화의 원형을 간직한 最古 最大의 문헌이라는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In the period of Joseon, 『Samgukyusa』 was just treated as an unauthorized historic literature and even considered as auxiliary to an authorized history book, 『Samgukyusa』. But interestingly, 『Samgukyusa』 rose to the rank of historic classic as the modern times began in this country. Much attention began to be paid in earnest to 『Samgukyusa』 since 1927 when Yukdang Choi Nam Seon wrote a bibliographical introduction to the history book, or 「Samgukyusa Haeje」. As the modern times arrived in this country, claims against 'flunkeyism' made 『Samgukyusa』 lose its value as a historic literature, even though temporarily. In contrast, 『Samgukyusa』 became even higher reputed as an ancient history book that could be alternative to 『Samgukyusa』or even surpass it. Sin Chae Ho didn't thought that 『Samgukyusa』 could be alternative to 『Samgukyusa』, even though he criticized the latter historic literature most severely. While, Choi Nam Seon regarded 『Samgukyusa』 as the very archtype of ancient culture itself because it contained lots of myths and narratives. He also wrote 「Samgukyusa Haeje」 in which he defined 『Samgukyusa』 as the best historic literature which were comparable to 『Samgukyusa』. 「Samgukyusa Haeje」 was written for the purpose of refuting claims for the denial of Dangun. The claims were made by Joseonsa Pyeonsuhoe, a Korean history research institute established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Japanese scholars claimed that records about Dangun, which was contained in 『Samgukyusa』, was merely a false myth because the historic literature was what was forfeited by a Buddhist monk. Criticizing such claims one by one, Yukdang evidenced in many ways that records of 『Samgukyusa』 were generally true. Now,『Samgukyusa』 has become a historic classic loved by all people who are recognizing it as the very treasure house of historic and literal wri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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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訥 盧相益의 亡命 意義 硏究

          이은영(Lee, Eun-young)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3 동양한문학연구 Vol.37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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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본인의 학위논문 이은영, 「20世紀 初 儒敎知識人의 亡命과 漢文學―西間島 亡命을 中心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이 20세기 초 망명 유교지식인들의 전반적인 한문학을 대상으로 연구되었기 때문에 당시 망명한 유교지식인을 개별적으로 서술하지 못한 점에 착안하여 연구된 논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학위논문 가운데 연구 대상자 중 한 사람인 大訥 盧相益(1849~1941) 관련 서술을 기저로 연구된 논문임을 앞서 밝혀둔다. 대눌은 구한말 관료 출신으로, 경술국치 전후 은사금 거부 등으로 일제에 의해 수차례 투옥된 일이 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일제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으며 살던 대눌은 1911년 말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망명을 떠났다. 대눌이 환갑을 넘긴 나이로 망명을 떠난 이유는 한마디로 일본인을 피해서였다. 자신의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제에 대한 최고의 저항으로 망명을 떠난 대눌은 망명지에서 수많은 저술을 남기면서 항일정신을 드러내었다. 망명지에서도 끊임없이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살던 대눌은 1919년 동생 小訥 盧相稷(1855~1931)이 파리장서에 서명한 일로 구금된 후, 더더욱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1922년 군자금 모집 관련 인물로 지목되면서 대눌은 만 11년이 넘는 망명생활을 접고 급히 환국하였다. 그 후 대눌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두문불출하며 세상과 단절하며 살았다. 이는 대눌이 일제와의 단절을 꾀하기 위해 선택한 또 하나의 저항의식인 것이다. 대눌은 중간에 망명생활을 접고 환국하였지만 그가 망명지에서 남긴 수많은 작품과 저술, 그리고 일제의 문건들을 통해서 드러난 대눌의 항일정신은 다른 독립유공자들이 행동으로 보여준 독립운동과는 또 다른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눌 또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하겠다. This paper studies one of the persons who are treted in my thesis which was for exile Korean confusian intellectuals'general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in 20th century. So, I make clear that this paper studies based on writings about Sang-Iik Noh(盧相益), pen name: Daenool大訥, (1849~1941) who is one of my thesis' persons. Daenool was in government service at the end of Chosun Dynasty. Due to the refusal of a Royal Bounty he has been jailed several times by Japanese government before and after the Gyeongsul Gukchi(Japan-Korea Annexation Treaty of 1910). He lived under surveillance by Japanese government after released from prison. At the end of the 1911 year Daenool who was more than 60 years old went into exile while avoiding surveillance just for avoiding Japanese people. As leaving many writings, he exposed Anti-Japanese spirit as his best resistance to Japan. After 1919, when his younger brother Sang-Jik Noh(pen name: Sonool小訥, 1855~1931) was imprisoned because of his signature on the Paris Jangseo, Daenool lived a life not free even more than before. Being pointed one who is related to war chest, he waived exile which continued more than 11 years and returned to Korea in 1922. After that, Daenool confined himself at home to cut off the world until to his death. This is one of the methods of resistance too to sever Japanese government. Despite he returned to Korea, his anti-Japanese spirit revealed by many writings, books and papers of Japanese government should be considered to be another independence movement different from the other actions by Independence patriots. This is why Daenool deserves acknowledge as independence patr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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