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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한국학 교육 현황의 역사성: 역사적 맥락에서 하버드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LA)의 한국학 프로그램의 비교

          김지원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14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32

          Ever since the University of St. Petersburg opened Korean language class in 1897, overseas Korean studies have been expanded in numbers of researchers and students. Many individuals and organizations in Korea and world-wide had promoted overseas Korean studies. In particular, the Harvard University and UCLA has been supporting overseas Korean studies from academic perspectives. This paper will examine what has been done and to propose what will have to be done to promote overseas Korean studies, centered on programs and activities of Harvard University and UCLA. This study examines a comprehensive evaluation to apply Korean studies of two representative universities, which might be a sort of standard table of evaluation for major institutions in the U.S. Korean Studies program at Harvard University since 1952 was characterized of interdisciplinary program to fulfill the professional and academic objectives of students from the world. Although the program has provided the maximum amount of education to learn diverse subjects of Korea, few students except Koreans are interested in traditional Korean history and literature. While the Korean Studies program at UCLA since 1993 has greatly developed around West Coast areas which was characterized of diversity of courses and pre-modern period. Nevertheless, the Korean Studies program at Harvard university and UCLA need to expand the diversity of its students by offering diverse classes of art, cine.ma, and visual studies 1897년 최초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한국학 과목이 개설된 후 지난 100년 동안 한국학은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한국학은 급격히 성장했는데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대학에 한국학 과정이 늘어났고, 많은 교수직이 추가되었다. 역사와 문학에 사회과학과 시각문화에 관한 새로운 강좌가 부가되었고, 한국학 관련 수업을 받는 대학원생의 수도 점진적으로 늘어났다. 해외 대학의 한국학 발전의 동향을 어떤 기준에 의해 평가할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한국정부의 지원정책 및 해당지역의 학문적 기반과 특성에 따라 여건이 다르므로 수평적인 비교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다양한 해외의 대학을 비교했을 때 그 차이점과 기관들의 특징을 구분해 볼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해외 한국학의 특성과 흐름을 교육적 측면에서 분석하는 것도 의미가 깊을 것이다. 1990년 이후 한국학의 개념, 방법론, 그리고 진흥방안 등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한국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해 온 해외 대학들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은 거의 부재했다. 교육적 분석은 한국학 발전 동향과 역사적 고찰에 관한 나름대로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있으므로 중요한 척도라고 본다. 본 연구에서는 미국 동부지역의 대표적인 한국학 기관인 하버드 대학과 서부지역에서 한국학 진흥을 위해 중추적 역할을 해 온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한국학 교육 프로그램의 기원과 흐름을 살펴보면서 특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미국의 시기별 한국학 발전 현황을 간략히 검토하고 그러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두 대학의 한국학 프로그램에 대한 현황을 시작년도, 개설강좌, 그리고 교원 등의 측면에서 비교 분석할 것이다. 또한 한국학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최근에 두 대학이 추진하는 전략 및 동향도 검토하고자 한다.

        • KCI등재

          미국-영국 선교사와 외교관이 주도한 근대한국학 전문화와 시스템 만들기, 1900-1940년: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Korean Branch 분석을 중심으로

          육영수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21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 No.61

          The article aims to reappraise the characteristics and legacy of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RASKB) and its official Journal,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in the historiography of modern Korean studies. By analysing its membership, interpreting the contents/subject-matters, and examining the new mode of writing strategies of the Transactions published from 1900 to 1940, the author is very convinced that both RASKB and Transactions had played a critical and indispensable role in professionalizing and systematizing the field of Korean studies. The Transactions, a forum dominated by British and American missionaries and diplomats, demonstrates the maturity of modern Korean studies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thus standing at the apex of “the First Wave of Modern Korean Studies.” Imperial Japanese scholars imitated and appropriated the Western-made First Wave and had established “the First and Half Wave of Modern Korean Studies” for the purpose of legitimizing colonialization of Korea. And “the Second Wave of Modern Korean Studies” during the 1930s, which emphasized the Korean Studies by Koreans and for Koreans, was to a certain degree the extended and reinvented outcome founded on the previous two Waves. The author concludes that modern Korean studies is a hybrid (re)production of multiple nationalities and that transnational perspectives would shed an alternative light to disclose non-nationalist and post-colonial peculiarities of ‘Knowledge/Power’ usually known as ‘the discourse on Korea.’ 이 글은 영국왕립아세아학회 한국지부와 그 학술지가 1900-1940년 사이에 한국학 담론 창출과 전문화에 기여한 성과와 영향력을 재조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초창기에 한국학을 주도했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퇴조하고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학 담론을 지배했다. 둘째, 코리안 리포지터리 · 코리아 리뷰 와 비교하면 트랜잭션 은 참고문헌을 밝히고 이미지 자료를 활용하는 등 좀 더 전문적이며 체계적인 학문적 포럼이었다. 셋째, 생태환경사와 같은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고 미래 한국학 학자를 키우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담당했다. 필자는 근대한국학의 계보를 객관적·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지식 네트워크의 트랜스내셔널 뒤엉킴에 특별히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서양선교사들이 19세기말을 전후로 발명·국제화하고 20세기 초반에 심화했던 한국학의 제1의 물결, 일본제국이 한국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고 피지배자들의 자발적인 협력을 구하려는 의도로 재생산한 한국학의 제1.5 물결, 그 사이 공간에서 등장한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학의 제2물결―이런 세 갈래 물결이 부딪히고 뒤섞이며 서로를 밀고 당기며 상승하여 한국학의 역동적인 무늬와 다양한 색채를 만들었다고 필자는 강조한다.

        • KCI등재

          찰스 클라크(Charles A. Clark, 곽안련) 선교사의 한국 불교 연구

          방원일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21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 No.58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9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description of Korean Buddhism in Religions of Old Korea by Charles Allen Clark, a Protestant missionary. Clark’s work is the result of the encounter between the experience of the mission field and the theory of the academic world. He visited temples throughout Korea and met monks in 1919. He had intensive interviews with Hankyung Park, an elite monk. Encounters with the natives served as the basis for refuting the views of previous Western researchers on Korean Buddhism. He reinforced his methodology by taking courses of Comparative Religion at the University of Chicago in 1920, and composed the outline of the manuscript through addressing a lecture in 1921. He has written an unparalleled book on Korean religion and Buddhism by putting his experiences in Korea in the American academic format. Unlike his previous missionaries, he observed the reality of Korean Buddhism from the viewpoint of religious practice, and as a result, he left a study that preserved the vivid aspects of Korean Buddhism in the 1910s. 본 연구는 개신교 선교사 찰스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곽안련)의 저서 옛 한국의 종교 (Religions of Old Korea)의 한국 불교 서술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클라크의 저서는 선교사로서의 한국 경험과 서양의 학문 담론 사이의 만남의 산물이다. 그는 불교 연구를 위해 1919년에 한국 곳곳의 절을 방문하고 승려들을 만났으며, 근대 불교 교육을 주도한 승려 박한경과 집중적인 인터뷰를 가졌다. 현지인과의 만남은 그가 다른 서양 연구자의 견해를 반박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는 1920년 시카고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수강함으로써 방법론을 보강하였고, 1921년에 강연을 통해 원고의 골자를 구성하였다. 그는 한국 현지의 경험을 미국 학계의 형식에 담아내어 한국종교와 불교에 관한 독보적인 저작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전의 선교사와는 달리 종교 실천의 관점에서 한국 불교의 변화를 관찰하였으며, 그 결과 1910년대 한국 현장의 모습을 반영한 연구를 남겼다.

        • KCI등재후보

          U.S. Korea Policy, 1942-1950: Vacillating Formative Period

          장준갑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08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19

          본고는 1940년대 미국의 초기 대한정책의 특징을 논한 글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1942년부터 전후 세계질서 문제를 영국, 소련 등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인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문제도 언급되었다. 한국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주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주도적으로 제시되었고 영국과 소련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전후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신탁통치 합의도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은 미국의 최초의 한국정책이었다. 그 정책은 한반도 분단의 기원이 되었지만 한반도의 역사적․정치적 상황과는 전혀 무관한 동기에 의해 결정되었다. 루즈벨트는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여를 유도하고, 소련과 전후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통치에 소련의 참여를 허용하였던 것이다. 즉 미국의 핵심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유럽이나 일본 등에서 소련을 배제하는 데 따른 소련의 반발과 미국의 부담을 비교적 덜 중요한 한반도에서 해결하려는 정책적 구상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한국정책은 트루먼 정부에서 또 한번 변화를 겪게 된다. 루즈벨트의 대소련 유화정책 대신에 강경한 봉쇄정책을 채택한 트루먼은 한반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들게 이어가고 있던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상에서 유연성을 제거하였으며 미국의 의지와 조건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협상은 없다고 선언하였다. 국제정치적 고려에서 성립된 일시적 분단이 반영구적으로 고착화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전쟁 이전까지 국제정치에 대한 미국의 정책변화에 따라 무원칙하고 변화무쌍하게 한반도 정책이 바뀌면서 미국의 필요에 따라 한반도가 둘로 분할되기도 하고 그 분단이 고착화되었으며, 남한정부 수립으로 미국에 떠안게 된 정치적 부담을 UN으로 이전시켰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군사적 부담도 벗어났고, 미의회의 남한원조 예산 대폭 삭감으로 경제적 부담도 벗어남으로써 한반도를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었던 것이다. 분단, 분단 고착화, 한반도 포기라는 무책임하고 우유부단한 미국의 초기 대한정책은 한국전쟁에서 그 대가를 비싸게 치르게 된다.

        • KCI등재

          프랑스의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 기념과 평가

          이재원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14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33

          The First World War, which hold a special place in the collective memory of the French celebrated the centenary this year. As it has the number of total deceased, the deceased ratio compared to War soldiers, and the deceased ratio compared to total population higher than any other groups, France wanted to remember and commemorate the 100th anniversary more enthusiastically than those in any country. This paper is not an analysis for the war itself attached to the title of 'World War'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Rather, it is the research into how the First World War is recognized, experienced and memorized by future generations in the flow of time. By looking at the celebrations to commemorate the anniversary with a number of related materials, this paper particularly wants to study the discussion and evaluation over the celebration of ‘14 –18 war’ in France.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First World War has announced that it is a huge commitment to rally French society strongly. In the name of hardship, triumph and defeat, the French tried to unite themselves through the awareness of history and the fate of community tying them together. Through the national commemoration, France wanted to deal with lots of issues of memory such as the understanding of the war that the whole society participated in, the problem of how to pass on this memory to today’s French, the memorial for those who have experienced war and sacrificed and so on. 프랑스인의 집단기억 속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이 올해로 정확히 100주년을 맞이했다. 전체 사망자수와 참전군인 대비 사망자 비율, 총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이 다른 어느 참전국보다도 높았기에 전쟁의 의미가 각별했던 프랑스는 그 어느 국가들보다 열성적으로 100주년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했다. 본 논문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대전(World War. Guerre mondiale)’이라는 칭호가 붙은 이 전쟁 자체에 대한 분석은 아니다. 그보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간의 흐름 속에 후세대에 의해 어떻게 인식되고, 경험되며, 기억되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100주년을 기념하여 등장한 수없이 많은 관련 자료들과 기념행사를 살펴봄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 특별히 프랑스의 ‘14-18 전쟁’의 기념을 둘러싼 논의와 평가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100주년 기념은 프랑스 사회를 강하게 결집하는 거대한 약속임을 알렸다. 프랑스가 경험했던 고난과 승리, 패배의 이름으로 프랑스인들은 그들을 하나로 묶는 역사에 대한 인식과 공동의 운명을 통해 결집하고자 했다. 대대적인 국가적 기념을 통해 프랑스는 사회 전체가 참여했던 전쟁에 대한 이해와, 이 기억을 오늘날의 프랑스인에게 전수하는 문제, 전쟁을 경험하고 희생한 이들에 대한 추모 등과 같은 매우 중요한 여러 기억의 쟁점들을 다루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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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동양인 지위의 변화, 1939-1945

          김지원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19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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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object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change of status of Asian Immigrants in the United States from 1939 to 1945. Using Oral histories, special collections, government documents, and contemporary studies, this study analyzes how the status of Asian Immigrants diversified after the breakdown of the World War II. Their legal status was "Aliens of ineligible to citizenship" because they had to bear the brunt of the racial hierarchy in the United States. Most of the previous studies during this period were concentrated on the Attack on Pearl harbor and Japanese relocation camp. So this study focused on the Alien Registration act of 1940, Attack on Pearl Harbor, and repeal of Chinese Exclusion act in 1943 as main factors to influence the change of status of Asian immigrants. According to the Alien Registration act of 1940, Asian immigrants were divided by 'enemy aliens' and 'friendly aliens.' Also after the attack on Pearl Harbor, Japanese on the West Coast had to relocated to several camps. However, Asian immigrants except Japanese immigrants had experienced remarkable change since the repeal of the Chinese Exclusion Act in 1943 because wartime mobilization afforded almost Asians socioeconomic mobility. Above all, this period was important turning point for the change of status of Asian immigrants in American immigration history and their status and lives was greatly diversified.(Daejin University) 미국 건국 이후로 고착되었던 동양인에 대한 차별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크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시민권을 획득할 수 없는 외국인’의 지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출신국이 연합국인가 추축국인가에 의해 적국외국인과 우호외국인으로 양분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양인에 관한 이민정책과 지위의 변화 과정을 1940년 외국인 등록법, 1941년 진주만 공격, 1943년 중국인 배척법 철폐 등을 중심으로 비교 분석하려고 한다. 즉 분수령의 시기 동안 동양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인, 중국인, 한인 등의 삶과 지위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양상과 특징을 비교 분석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동양인의 지위와 정체성이 가장 극명한 변화 양상을 보였던 시기일 뿐만 아니라 이전 시기와는 달리 인종적 요건보다는 정치적 이해와 경제적 요건이 주된 변수였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동양인에 관한 정책에서 인종 문제가 배제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양인 완화정책과 일본인 집단 이주라는 극단적인 변동이 동시에 존재했던 분수령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시기의 동양계 이민자에 관한 정책의 변화는 미국의 이민정책뿐만 아니라 1952년 맥카란 워터법과 1965년 신이민법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민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기였다는 데에 그 의의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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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히스토리(Global History)의 수용과 변용 - 중국, 러시아, 한국 사례에 대한 비교연구 -

          최덕규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16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40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summarize the problems of Global History established as a new historical research methodology from the perspective of the periphery. This is because we paid attention to the fact that although the key to success of Global History depend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historical studies and related studies, the center and the periphery, there has been almost no conversation, the core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This is because although the success or failure of interdisciplinary research and the convergence study depends on the conversation and interaction between the relevant sectors, there are few studies about it. Thus, this study is to consider the following issues by examining Global History acceptance and transformation process in China, Russia and Korea, periphery countries located in the outer area of the western world around the U.S and U.K. We are to analyze 1) why the historical particularities of individual countries experience confrontation and conflict without converging in Global History and 2) to examine why two-way communication through the conversation between individual countries and civilization forming the framework of Global History establishment is difficult. This is because they are to find the cause of the conflict between the universality inherent in Global History and distinctiveness of the individual country’s history in the miscommunication arising from the absence of dialogue. 3) A moral problem of whether European imperialist countries can escape from moral responsibility or sins while not bringing up the relationship of coercion and exploitation in the past when terms of connection, access, comparison replacing the concept of conquest, exploitation, domination in the traditional world history are used in Global History is also the target of analysis. Because resistance to Globalization is getting stronger in the global studies of China, Russia, Korea and this tendency is not unrelated to this problem. 이 글은 새로운 역사연구 방법론으로 자리 잡은 글로벌히스토리의 문제점들을 중국, 러시아, 한국의 시각에서 정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글로벌히스토리 연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미국과 영국이 아니라, 그 주변부의 시각에서 새로운 세계사의 과제들을 고찰하는 것이 보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글로벌화의 변방에 있는 중국, 러시아, 한국에서 글로벌히스토리의 수용과정에서 나타난 논의들을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측면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한국과 접경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는 글로벌히스토리의 수용과 역사교육 분야에 이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유사성과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다. 중국은 2000년 포머란츠의 저작 『대분기』 발간 이후, 유럽과 중국이 대등한 비교대상이 됨으로써 글로벌히스토리의 수용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반면, 러시아와 한국에서는 글로벌히스토리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어가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의 경우, 마르크스-레닌주의 역사학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글로벌히스토리의 수용과정은 민족주의가 점차 득세하면서 서구 수입학문인 글로벌히스토리에 대한 저항이 강해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유럽중심주의는 자본권력의 담론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은 자본권력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 되어야함에도 상호의존과 교류를 강조하는 글로벌히스토리의 한계를 지적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한․중․러의 글로벌히스토리 수용을 둘러싼 논쟁들을 공통점과 차이점별로 비교, 정리하는 작업은 한국 서양사학계의 주요과제 중의 하나인 유럽중심주의 극복을 위한 방향 설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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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현대사와 박물관 전시 -전시와 ‘한국근현대사’ 시점 넘어 보기-

          김인덕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20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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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um of contemporary history should be communication space and the place is for understanding wider flow of history where asking questions at the same time. Principal for the museum should be human being and for those working in the museum. Historical exhibition in Korea yet focus mainly on historical composition. Museum should be altered its exhibit shape from Contemporary to Modern history. By the idea of this, it is necessary that giving attention to following elements to actualize Korean modern history’s exhibition. First of all, under an attempt to construct various view of study, the Korean modern history exhibition should accept the points of variety of progressive positions on the basis of discussion. Particularly, Academic research is the starting point of popularization, which should form the framework of the exhibition, and the richness of the scenario would be required. In particular, the composition of the exhibition scenario will require the opinions of curators, education experts, exhibition designers and other members of the art room. Second, both educational and enjoyable elements should be provided to promote visitors' understanding of the diversity of Korean modern history at the same time. In fact, in many cases, historical exhibitions at museum sites have not been completed by exhibitions alone. Therefore, I think understanding by educational program is a way to double the effect of the necessary exhibition. In general, the Museum of History is an easy place to become familiar with educational programs. The process of understanding history through exhibition is to create a specific historical image based on the original data, and to make the process of making history a program itself is easier to improve efficiency than any other exhibition space from an educational point of view. In the case of modern Korean history, the public interest is higher than any other times, so the educational curriculum may be higher. Third, the universality and specialty of modern history exhibition needs to be operated in harmony. Significance of this is that the viewer's position and curiosity should be noticed. In addition, benefits of art exhibitions and science development should be the start of modern history exhibition. Also, modern Korean history exhibition should be prepared by harmonized intentions and effects. The important thing in exhibi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is that role of the curator who reflect status of Korea’s consensus and peace community. 현대사박물관은 소통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역사에 물을 수 있는 공간으로 역사학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곳의 주체는 사람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공간이도 하다. 한국에서의 역사 전시는 역사상의 구성에 주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국근현대사에서 한국현대사로 역사인식 틀의 전환을 통한 전시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제 아래 한국현대사의 전시 방향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국현대사 전시는 선행 연구를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시도 아래, 다양한 진행의 입장의 논점을 논의에 기초해 수용하고 이를 전시를 통해 반영해야 한다. 둘째, 한국현대사의 다양성에 대한 관람객의 이해를 증진하는데 교육적 요소와 함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동시에 제공되어야 한다. 셋째, 역사 전시와 현대사 전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조화롭게 운영할 필요가 있다.

        • KCI등재

          전후 독일 사회와 전쟁의 기억담론 -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의 ‘문 밖에서’를 중심으로 -

          최선아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15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34

          German society underwent drastic changes from extreme poverty and turmoil to post-war reconstruction after World War II. German people shared the so-called "collective memory" during the war and the division of the nation into East Germany and West Germany. Nowadays the generations who experienced World War II has gradually disappeared, and the war will become as a sort of myth in the near future. When there is no more living witness of history, society is bound to rely on two different ways in association with the past. One is academic, historical research, and the other is media-aided "cultural memory."A noteworthy thing related to memory is the form of autobiography. An autobiography requires the identity of the writer, the narrator and the main character. This is a story that a person reminisced his or her own personal life and life history in prose, and the subject matter of it is himself or herself. In this perspective, Wolfgang Borchert's text can be one of important themes for research into the memory of post-war German society.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the "the problem of generation" in German and European society after World Wars I and II and the memory of the wars in German society by analyzing Wolfgang Borchert's work "Drauβen vor der Tür." It's specifically meant to look into criticism by post-war returned generations including W. Borchert against "creating a myth of hero" through history or the arts in German society, and into another criticism against the new "anti-hero" era and discussions on the responsibility of the wars.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사회는 극도의 궁핍과 혼란, 전후 복구 사업으로 이어지는 변화를 겪었다. 전쟁과 동․서독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독일인들은 이른바 ‘집단기억’을 형성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과 관련한 세대가 점차로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머지않아 2차 세계대전은 하나의 신화가 될 것이다. 역사의 산증인이 없을 경우, 사회는 과거와 관련한 두 개의 상이한 방식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은 학문적-역사적 연구와 매체에 의존한 ‘문화적 기억’에 의존하는 방식이다. 기억과 관련해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자서전의 형식이다. 자서전이란 작가의 상황과 극 중 화자와 주인공의 동일성이 완전히 충족되어야 한다. 자서전이란 한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생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한 산문으로 쓴 과거회상형의 이야기다. 이런 맥락에서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의 텍스트는 전후 독일 사회 기억 연구의 중요한 테마가 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양차대전을 전후하여 독일 및 유럽 사회에 등장한 ‘세대문제’를 살펴보고,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의 <문 밖에서>에 반영된 독일 사회의 ‘전쟁의 기억 문제’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기존 독일 사회에서 보여 주었던 역사, 예술 활동을 통한 ‘영웅의 신화 만들기’ 작업이 보르헤르트(W.Borchert)를 대변하는 전후 귀환 세대들에게 비판받고 새로운 ‘반(反)영웅’의 시대 비판과 전쟁 책임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어 가는 양상을 고찰할 수 있다. 현대 사회 인류 최대의 비극인 제 1,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전쟁의 비참함, 잔학성, 비인간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전쟁에 대한 반성과 책임문제에 대한 논의로서 역사와 문학을 고찰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실제 전쟁에 참전하여 전쟁의 충격과 고통을 몸소 겪었던 자신의 체험으로, <문 밖에서>를 통해 2차 대전 후 전쟁의 책임에서 도피하려고 한 전후(戰後) 독일 사회에 대한 고발과 경종을 울렸다고 할 수 있다. 세기말 이후 등장한 독일 청년운동은 독일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난 이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부자(父子)관계의 변화와 수적인 증가, 삶과 노동의 성인세계로부터의 분리, 사회동질성의 전통적 형태의 약화를 통해서 자신들을 하나의 세대로 자각했다. <문 밖에서>는 "전쟁의 패망이 지난 후 전장과 포로수용소로부터 귀향하는 병사들의 운명과 현존하는 주변 세계와의 갈등과 긴장을 다루면서, 내․외적 세계의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수립, 그리고 파국을 청산하려는 생존자들의 재고 조사"라고 할 수 있는 전후(戰後)의 귀향문학이다. <문 밖에서> 작품 속 베크만은 기존 독일 사회에서 숭배받던 영웅이 아니라 전형적인 반(反)영웅이고, 독일 사회에 전쟁에 관해 책임을 묻는 질문자라 할 수 있다. 보르헤르트는 작품 <문 밖에서>를 통해 책임회피를 하는 동시대의 전쟁 책임자들에게 자기 인식과 독일 사회의 정체성 재정립의 계기를 마련하려 하였다.

        • KCI등재

          안중근의 서양 인식

          신운용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19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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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fore joining the Catholic Church in January 1897, Ahn Jung-geun had a Confucian world view. Since joining the Catholic Church, his outlook on life and world has changed a lot. Although he became a Catholic, he did not necessarily follow Catholicism. He accepted Catholicism Rationally. This is the result of Ahn's self-learning of Catholicism. Ahn's perception of the West was formed through The western Catholic Missionaries such as Gustave-Charles-Marie Mutel, and the media such as Hwangseong Newspaper. The civilization and civil rights consciousness he advocated was formed in the influence of Catholicism and the tide at that time. His national consciousness was acquired through clashes with Western Catholic Missionaries . In particular, he recognized the reality of the world as the 'national world.' As such, Ahn has expanded and developed civil rights and national consciousness, focusing on civil rights and peoples. Ahn's "ethnic world" of the time means that countries around the world compete for the benefit of the homeland. Therefore, Korea should also compete with other countries around the world, putting the interests of the Korean people first. He also called for the unity of Korea, China and Japan on the basis of absolute independence to prevent Western aggression. In this regard, his "Eastern Peace Theory," based on his religious character, is regarded as a concrete measure to ensure Oriental peace, free from Western fallen morally. Ahn's perception of the West is also evaluated in terms of racial perspective. However, it is not conclusive that the Pope recognized the West from a racist point of view, given that he presented the peace conference as a guarantor. Rather, it should be said that they recognized and evaluated the West from the perspective of establishing a "moral world." As such, he clearly grasped the imperial character of the West and suggested a way for the East to go (building a moral world and settling peace). Park Eun-sik's assessment that Ahn Jung-geun has eyes that penetrate the East and the West is largely based on his Western perception. 1897년 1월 천주교에 입교 이전 안중근은 주교 성리학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는 주체적으로 학습하여 천주교를 수용하였다. 안중근의 서양 인식은 주창한 문명과 민권의식은 천주교의 영향과 『황성신문』 등 당시 조류 속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그는 세계의 현실을 ‘민족 세계’로 인식하였다. 안중근은 세계를 서양과 동양으로 구분하고 서양을 침략세력으로 동양을 평화세력으로 보았다. 이 점에서 종교성을 바탕으로 한 그의 「동양평화론」은 도덕적으로 몰락한 서양의 침략에서 벗어나 동양평화를 담보할 구체적인 방안이라고 평가된다. 안중근의 서양 인식은 인종론에 따른 시각에서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평화회의를 담보할 주체로 로마 교황을 제시하였다. 이 점에서 그가 인종론적 시각에서 서양을 인식하였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도덕 세계’ 구축이라는 철학에서 서양을 인식하고 평가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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