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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공화국 출범과 한미관계

        장준갑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13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28

        When the 5th Republic in South Korea was inaugurated in 1981, the Reagan Administration was about to start in the U.S. The two governments shared similar values on the international politics of Pacific Area: military allies come first. President Chun Doowhan of South Korea pretty much understood what the U.S. wanted from his government: strong anticommunism and pro-American policies. Kim Daejung, one of important democratic leader of South Korea, might be a valuable card to make the U.S. government support his tyrannical government. Kim also was a valuable figure on the part of American side because the United States decided to make use of Kim as a international issue. If the United States could persuade President Chun to grant amnesty for death penalty of Kim, the international public opinions and the feeling of South Koreans toward the United States would favorably be changed, and the Reagan Administration would have a good chance to solid military alliance with tyrannical South Korean government. Again in the early 1980s two nations lost chances to build more durable relations by enhancing high values such as human rights, democracy, and freedom. Instead they held tight their hands by strengthening military alliance and anti-communist policies, betraying wishes of most Koreans who wanted the United States to stop killing people and violations of human rights by Chun's military groups.

      • KCI등재

        아프리카 정책을 통해 본 케네디의 외교: 콩고 위기에 대한 정책을 중심으로

        장준갑 한국미국사학회 2012 미국사연구 Vol.36 No.-

        The paper examines how John F. Kennedy managed American foreign policy toward Africa, especially Congo in the early 1960s when the United States tried to foster a better American Africa policy. Kennedy’s aim in his Africa policy was not to make African states American allies such as European and some Asian countries, but to have them keep away from Soviet Union’s control. To achieve the policy goal, Kennedy suggested that American policy makers should understand and respect African type of neutralism or non-alignment in which Africans wanted to keep their independence from European colonialism. What Americans had to do in Africa, according to Kennedy, was to create difficult situations in which Soviets could not exercise their influence toward Africa since most of African states except South Africa had little economic and strategical values for the United States. Kennedy’s Congo policy well demonstrated his African policy. He reacted to the Congo Crisis in terms of non-military engagement because if he intervened militarily in Cono Crisis, as his advisors argued, he thought that he would have been in deep trouble with Soviets and European allies. Another reason that he tried to avoid military intervention was his political negotiation-first policy. He believed that almost every international problems or conflicts could be solved through political negotiations, not military power. He applied this political belief in case of Congo Crisis and generally in African problems: another example of his non-military and peaceful solution toward international conflicts. 미국의 아프리카 정책이 본격적으로 수립되고 미국 외교관들이 아프리카에파견되기 시작한 시기인 1960년대는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행정부를승계한 케네디(John F. Kennedy) 행정부가 출범한 시기였다. 그가 취임했던 1961년 상황이 케네디로 하여금 아프리카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들기도 했지만, 케네디 자신이 향후 냉전에서 아프리카의 중요성이 제고될 것임을 예상하고 아프리카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도 그의 아프리카 중시 정책을 설명하는 요인이다. 그는 아프리카 정책을 수행할 적절한 인사들을 선임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줌으로써 아프리카가 미국에게 중요한 지역임을 입증하였다. 또한 케네디 자신도 임기 동안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도자를 미국에 초청하여 회담함으로써 직접 아프리카 외교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가 아프리카 정책에서추구했던 목표는 아프리카 지역을 미국의 영향력 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적대세력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즉 아프리카가 미국의 관심 밖으로 멀어져서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주요목표였다.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케네디는 아프리카의 민족주의와 중립주의적 경향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아프리카가 결코 자본주의 영역으로 편입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세력인 유럽의 오랜 식민 지배를 겪은 아프리카인들이 자신들을 착취했던 자본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독립을 저당 잡히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고, 그러한 생각은 아프리카인들 의 심정을 정확히 이해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아프리카가 진정한 중립주의나 비동맹을 표방한다면 미국은 그들의 결정을 존중해야 하고 그러한 환경에서 미국의 아프리카 외교가 전개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아프리카를 친 서방세력으로 포섭하기보다는 소련의 영향력이 행사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것이 미국에게도 이롭다고 보았다. 아프리카는 유럽과 아시아처럼 미국에게 핵심적인 경제적․전략적 이해관계가 별로 없다는 면에서 케네디의 정책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그의 정책은 국내외적으로 유용한 점이 있었다. 우선아프리카에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유럽 동맹국들과의 불필요한마찰을 피할 수 있으며, 아프리카 문제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발생되는 경제적․군사적 비용의 부담을 피할 수 있고, 행정부 내의 아프리카주의자들과 유럽주의자들의 대립과 국내의 냉전 강경론자들과 온건론자들 사이의 요구를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가 아프리카 정책에서 비군사적인 정책을 고수하면서 협상과타협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데에는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고려이외에도 그의 외교적 신념 내지는 철학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의 콩고 위기에대한 정책은 그의 그러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실례 중 하나이다. 카탕가 지역의 촘베가 콩고로부터 분리독립을 외치면서 콩고의 위기가 심화되자 미국은유엔을 통하여 콩고의 통일과 안정을 확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촘베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상황이 악화되자 케네디의 참모들은 유엔군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지원을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미군의 군사 개입은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군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 ...

      • KCI등재

        전북의 극장사(劇場史)

        장준갑,김건,이상훈 전북사학회 2014 전북사학 Vol.0 No.45

        For properly comprehending and organizing the cultural history of movie theatres of S. Korea, It is inevitable to examine theatres not only in the capital, Seoul, but also in each province where the local theatres have been. In the recent studies, there are some discussions about the local theatres but nothing in the province, Jeonllabukdo. But the point is that for representing an integrated cinema history of Korea, the history of local theatres in each province would be added. What analyzing the history of movie theaters is to experience “the history of space” the cinema is always representing, and, as the result, to search the roles and functionality of the movie theatre positioned in the space. This research mainly examines the history of movie theaters in Jellabuk-do from the years before liberation from Japan to 1970s, aiming at discovering and investigating the historical way of being of films in Jellabuk-do. Thus, the research is principally showing the index as a primary database, such as the opening/closed date, the size, the number of seats and addresses, of the theaters, quarried from the text references, such as the newspaper, magazines, yearbooks and publications. Such figures are not only the basic data for the cinema history of S. Korea, but also the basic materials for analyzing mass-culture and for recording modern history. This study based on the historical materials could be utilized as an intersection point for the study of local cinema and, especially, as the basic materials for studying the history of film culture in Jeollabukdo. However, this research seems to lack in terms of the profundity and to be insufficient in terms of variety of the sources, since this study is the first attempt to illustrate it: the relation or correlation between the film industry in the local and the management of the movie theater, for instance. It will be covered by the post investigation.

      • KCI등재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위기극복의 지도력

        장준갑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10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22

        The paper examines how John F. Kennedy and Nikita Khrushchev overcame the crises they faced in Berlin Crisis and Cuban Missile Crisis in early 1960s. The two leaders representing capitalist and communist camps and contesting political and military powers in international politics could not yield their steps in the crises because their allies and peoples had wanted them to dominate the other by adopting a hard-line behavior. Facing the difficult situation of nearly an all-out war between them, Kennedy and Khrushchev decided to exchange secret letters to handle the crises. Khrushchev took initiative these high risking political actions by sending his first letter to Kennedy in the time of Berlin Crisis. Kennedy who also wanted private contact with Khrushchev responded favorably to the letter by telling him that ‘avoidance of war’ was the most important goal of international politics and both of them could work together under the basis of mutual understanding and accomplish the goal. Given the Cold War which forced them to mow down the enemy with military power and ideological supremacy, Kennedy and Khrushchev demonstrated excellent leadership in international politics on the time of high crises by giving up their hard-line contests and agreeing to work together in terms of ‘avoidance of war.’

      • KCI등재후보

        케네디의 외교적 리더십: 현실적 평화주의자

        장준갑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09 동국사학 Vol.47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9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본고는 케네디 대통령의 외교적 리더십을 재평가하기 위한 논문이다. 케네디는 냉전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인 1950-60년대에 정치활동을 했던 정치 지도자로서 1960년대 초반 대통령을 역임했기 때문에 그의 외교적 지향은 강경한 냉전주의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의 연방 하원과 상원 시절의 정치 활동을 평가한다면 그러한 평가가 매우 적절하고 정확하다. 또 케네디가 젊은 시절에 갖게 된 국제 평화에 대한 신념과 대통령이 된 이후에 그가 행했던 언행을 관찰해보면 상당히 일치하는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본고는 그가 하버드를 졸업한 이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전쟁 경험에서 얻은 교훈과 전쟁 직후 언론사 기자로서 유엔 창설과정을 지켜 보면서 갖게 된 국제 평화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 그러한 젊은 시절의 신념과 국제 정치관이 냉전적 대결 상황에서 대화와 타협이라는 수단으로 외교 정책에 반영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케네디는 특히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에 발생한 피그만 침공사건과 베를린 위기에 직면하여 소련과 대 결하거나 타협할 것을 선택해야 하는 외교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핵대결을 불사할 것을 권고하는 강경주의자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전쟁이 재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지신의 신념에 따라 소련의 강경대응을 우회적으로 회피하면서 대화와 타협의 정책을 추구하여 결국 군사적 충돌을 피하면서 대화의 국면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당시 힘의 우위를 점유하고 있으므로 소련을 힘으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미국 국내의 강경한 분위기를 고려할때 선택하기 쉽지 않은 유화적인 방법으로서 그가 평화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확고한 지도자임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정치적 ?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외교적 측면에서 냉전적 대결 논리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평화에 대한 신념과 철학을 관철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던 현실적 평화주의자였던 것이다.

      • KCI등재후보

        미군정의 제주4·3사건에 대한 대응 -폭력과 학살의 전주곡-

        장준갑 전북사학회 2007 전북사학 Vol.0 No.31

        In Fall of 1947 Truman administration gave up negotiations for Korean unification with Soviet Union which occupied the northern part of the Koran peninsular after the surrender of Japan and decided to transfer the Korean problem to the UN. The decision meant that U. S. would establish a pro·American government in its ruling area, south Korea.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imposing American will upon Korean people in south Korea, realized that it was impossible to build a strong pro·American government in the area without cleaning up the leftist that had challenged American hegemony and insisted national unification. Accordingly American occupation forces, represented by General John Hodge, suppressed leftist movements creating anti·American sentiment and socialist movements. In the eyes of American rulers in south Korea, Jeju 4·3 Incident, broken out in Jeju in April 3, 1948 to protest American social and political policy in south Korea, was a dangerous rebellion which leftists instigated innocent people to deny American authority and follow Soviet Union. That is why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moved promptly to put down the resistance and permit Korean forces under its authority to use indiscriminately enormous violence toward Jeju people including civilians. These military operations in Jeju by Americans brought about a prelude to genocide and bloody violence committed by Syungman Rhee, the first president of Republic of Korea after the American military rule.

      • KCI등재후보

        U.S. Korea Policy, 1942-1950: Vacillating Formative Period

        장준갑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08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19

        본고는 1940년대 미국의 초기 대한정책의 특징을 논한 글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1942년부터 전후 세계질서 문제를 영국, 소련 등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인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문제도 언급되었다. 한국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주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주도적으로 제시되었고 영국과 소련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전후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신탁통치 합의도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은 미국의 최초의 한국정책이었다. 그 정책은 한반도 분단의 기원이 되었지만 한반도의 역사적․정치적 상황과는 전혀 무관한 동기에 의해 결정되었다. 루즈벨트는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여를 유도하고, 소련과 전후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통치에 소련의 참여를 허용하였던 것이다. 즉 미국의 핵심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유럽이나 일본 등에서 소련을 배제하는 데 따른 소련의 반발과 미국의 부담을 비교적 덜 중요한 한반도에서 해결하려는 정책적 구상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한국정책은 트루먼 정부에서 또 한번 변화를 겪게 된다. 루즈벨트의 대소련 유화정책 대신에 강경한 봉쇄정책을 채택한 트루먼은 한반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들게 이어가고 있던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상에서 유연성을 제거하였으며 미국의 의지와 조건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협상은 없다고 선언하였다. 국제정치적 고려에서 성립된 일시적 분단이 반영구적으로 고착화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전쟁 이전까지 국제정치에 대한 미국의 정책변화에 따라 무원칙하고 변화무쌍하게 한반도 정책이 바뀌면서 미국의 필요에 따라 한반도가 둘로 분할되기도 하고 그 분단이 고착화되었으며, 남한정부 수립으로 미국에 떠안게 된 정치적 부담을 UN으로 이전시켰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군사적 부담도 벗어났고, 미의회의 남한원조 예산 대폭 삭감으로 경제적 부담도 벗어남으로써 한반도를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었던 것이다. 분단, 분단 고착화, 한반도 포기라는 무책임하고 우유부단한 미국의 초기 대한정책은 한국전쟁에서 그 대가를 비싸게 치르게 된다.

      • KCI등재

        닉슨 행정부의 아시아 데탕트와 한미관계

        장준갑 부산경남사학회 2009 역사와 경계 Vol.70 No.-

        This pater estimates changes in Korean-American relations imposed by Nixon Administration's Asian Détente. Nixon Administration implemented the relaxation of American-Chinese relationship to reduce its military expenses, but to keep its hegemony in Asia. Nixon Doctrine was announced in this context: Asianization of Asian conflicts which meant Koreanization of Korean problems in case of Korea. In the summit talks in 1969, Nixon explained Park Chung Hee, the President of South Korea, the new Korean policy of Nixon administration - reduction of U.S. armed forces in Korea, cuts in American military aid to Korea, and an easing of strained tension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ns. Park, who heavily relied on American supports for his political stakes, vainly tried to persuade Nixon not to apply Nixon Doctrine to South Korea. The implementation of Nixon Doctrine to South Korea make Park build strongholds for his own political power in internal affairs by taking actions such as a bill for amending the constitution for third term, emergency measures, Constitution for Revitalizing Reform. Korean-American relations began to change with all those factors: a sign of tensioned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1970s.

      • KCI등재

        5·16 군사쿠데타, 미국, 그리고 박정희

        장준갑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11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25

        The paper examines how the Kennedy Administration managed the military coup occurred on May 16th, 1961 in South Korea by Chung Hee Park and his men, and also analyzed Park's responses toward American actions. The conclusion of the paper is that Kennedy Administration, which pursued modernization program in the third world, did not have to pressure Park to take actions for democracy which most of third countries did not trust for their nations development.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could only be satisfied as long as Park's group make sure of anti-communist and stabilization of political situations. On the part of Park, the American policies toward himself was good enough to follow because he could be able to manage political stability and anti-communism. The military coup in South Korea made the Korean problems more simple to handle. Kennedy Administration officials saw the coup as an opportunity to establish a pro-American government in Korea that would willingly follow American policies on unification, economy, and military problems. Right after the coup, the Administration decided to go with the new group represented by Major General Chung Hee Park, who desperately needed American supports to keep his power. In pursuing their policies to the coup leaders, the Administration used American economic and military assistances as levers to lead them in its desired directions. Americans intervened, if necessary, in Korean politics to achieve their goals. But in many cases they refrained from interference in South Korea if the issues had little connections with their basic policy goals. The Kennedy Administration's Korea policy should be examined in terms of mutual relations because it needed help of the coup leaders to realize their policies; and Chung Hee Park had no choice but to follow American policy toward him, but he was smart enough to make his room in American directions by showing his strong will in some issues which Americans did not make in focus.

      • KCI등재

        닉슨독트린과 미국의 대한정책 -1969년 8월 한미정상회담을 중심으로-

        장준갑 호남사학회 2008 역사학연구 Vol.34 No.-

        본고는 1969년 7월에 닉슨독트린이 발표된 직후인 동년 8월에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의 내용을 분석하여 변화하기 시작하는 한미관계에의 영향력을 평가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밀월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한미관계는 아시아 문제의 아시아화라는 닉슨독트린으로 인하여 변화의 고비를 맞이하게 된다. 미국의 주한미군의 철수계획, 군사원조의 삭감 노력, 남북한 긴장완화 추구 등 한반도문제의 한국화 정책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남한에서 견고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박정희 정권에게 크나큰 시련을 안겨 주었다. 한미정상회담은 닉슨에게는 한반도에서 닉슨독트린을 실현할 수단으로서 중요한 회담이었고, 박정희에게는 군축과 긴장완화 요구를 최소화시키기 위하여 중요한 회담이었다. 닉슨의 정책을 되돌리거나 아니면 최소한 지연시키려는 노력에 실패한 박정희는 귀국 후 미국의 요구에 응하면서도 자신의 방식으로 남한의 한국화에 착수하였다. 그가 70년대에 내놓은 일련의 평화통일 정책들과 대북 화해 정책들과 함께 감행한 3선개헌, 긴급조치 발동, 유신체제 등 일련의 정치적 조치들이 그의 한국화 정책을 대변하고 있다. 즉 그는 미국의 한반도 문제의 한국화 요구에 대하여 박정희식 한국화를 선언한 것이다. 박정희의 이러한 노선은 1970년대의 긴장적 한미관계를 예고하는 것으로서 미국으로서는 1960년대와 전적으로 다른 박정희를 직면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This pater estimates changes in Korean-American relations imposed by Nixon Doctrine declared in July 1969. To trace the first phase of the changes I choose the Korean-American summit talks of 1969 because the meeting was held right after the declaration of the Doctrine and discussed issues announced in the Doctrine: Asianization of Asian conflicts which meant Koreanization of Korean problems in case of Korea. In the summit talks Nixon explained Park Chung Hee, the President of South Korea, the new Korean policy of Nixon administration -reduction of U.S. armed forces in Korea, cuts in American military aid to Korea, and an easing of strained tension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ns, and this would give a great distress to Park Chung Hee government which just became a powerful political group in South Korea with the help of American supports. Park vainly tried to persuade Nixon not to apply Nixon Doctrine to South Korea which, Park said, had faced a powerful enemy in the North fully supported by Soviet Union and Communist China. After returning home with great disappointment, Park followed American lines in international politics while building strongholds for his own political power in internal affairs by taking actions such as a bill for amending the constitution for third term, emergency measures, Constitution for Revitalizing Reform. Korean-American relations began to change with all those factors: a sign of tensioned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19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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