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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고초도 위치 비정에 대한 재검토

        주철희(Cheal-hee Joo) 한일관계사학회 2012 한일관계사연구 Vol.41 No.-

        이 논문은 1441년(세종 23) 11월에 조선 정부와 대마도주가 맺은 孤草島釣魚禁約에서 ‘고초도’의 위치를 검토한다. 고초도에서 고기잡이는 대마도 어민에게 생명줄과 같았다. 이에 대마도주 宗貞盛은 조선 정부에 고초도에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간청하였다. 그러나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조선 정부는 왜인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일환으로 고초도조어금약이 체결되었다. 조선 정부가 통제선으로 규정한 남해안의 고초도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일본인 학자 長節子의 연구가 통설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長節子는 고초도 위치를 현재 전남 여수 거문도(고도?서도?동도)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문헌을 통해 항로를 재현하면 섬은 육지와 인접한 근해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당시 돛단배 항해술로 먼 바다를 이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 는 서남해안의 섬들과 지리적 여건을 비교하여도 거문도는 먼 바다(외해)에 위치하여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孤, 草兩島釣魚定約”에서 孤島를 音이 같다는 이유로 현재 거문도의 일부인 古島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단어적 의미에 불과하다. 즉 외딴 섬,외로운 섬으로 絶海孤島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거문도와 주변 섬사람의 생활에서도 거문도를 삼도라고 단정할 수 없다. 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헌 검토와 함께 지리적 여건과 바다를 이용하는 행태(해류, 뱃길, 어로범위)와 생활?문화적 환경 등을 검토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종합적인 검토를 통하여 고초도의 위치를 새롭게 비정하였다. 고려 말부터 빈번하게 출몰한 왜적으로 인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島喚居住禁止’ 조치를 내리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섬에 대한 문헌자료의 한계가 있어, 보다 다양한 접근으로 섬 연구가 시급하다고 본다. This paper checked about Gocho-do"s location that Chosun government and Tsushima island"s lord signed in November 1441 from Gocho-do Fishing Treaty. A fishing is the lifeline to fisher in Tsushima. So Their lord asked Chosun for they could fish in Gocho-do. But Chosun had to control Japanese because their frequent invasion. Therefore Gocho-do Fishing treaty(孤草島釣魚禁約) was signed. Generally, in these days Jang Joul-ja"s research was accented about Gocho-do"s location that Chosun defined as line of control. He determined Gocho-do"s location that is current Junnam Yeosu Gemun-dㅇ(Go-do, Su-do, Dong-do). But, if the sea route is reproduced through literature, We find the island were very near the land and sailing boat navigation couldn"t use out-sea at that time. Considering the southwestern coast"s island and geographical conditions, We get to know Geomun-do was not so easy to access because the island was located out -sea. In addition, He said that Go-do(孤島)"s pronunciation in the Go-do(孤島), Cho-do"s(草島) pronunciation from Fishing Treaty and currently Go-do(古島) that is part of Geomun-do were same pronunciation. But This is just word meaning, that is, a solitary island, isolated island is resonable. And, Geomun-do cannot swear Sam-do(二島) consider of Gemun-do and other island"s people life. To review of literature, to use geography condition and ocean(waterway, fishing range) and to examine cultural environment are very important to discern island"s location. Upon further examination, location of Gocho-do is defined again. Owing to the Wa enemy"s frequently intrusion from the end of Koryo, Chosun government took steps to prevent them "Island dwelling prohibition. For this reason, the literature data about the island has limits, however, the island research is urgent more microscopic approach than now.

      • KCI등재

        한국전쟁 전후 반공문화 형성과 그 의미

        주철희(Joo, Cheol-Hee)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한국민족문화 Vol.59 No.-

        이 연구는 선행연구를 토대로 하여 한국전쟁 전후(1948~1953) 반공영화를 분석함으로써 일반 생활양식으로 자리매김한 반공문화의 기원과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승만 정권은 분단체제 속에서 맹목적 반공주의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첫째가 법적·제도적 장치를 정비하거나 마련하는 것이었다. 국가 기구를 통한 물리적 법제를 통한 억압과 감시라는 배제 방식이 상층부로부터의 ‘반공주의’ 체제구축이었다면, 아래로부터 반공주의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즉, 일상생활에서도 반공주의 투철한 의식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 방위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에 적절하게 활용된 것이 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 작품이다. 특히, 반공영화는 공산주의 만행과 잔혹상을 폭로하고 북한의 실상을 통해 반공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정치적 도구로서 역할을 충실했다. 반공의 이념적 흑백 논리는 일상 생활양식으로 민중들에게 반영되어 반공문화로 자리매김했다. 반공문화는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토대로 작동하면서 비합리적 비상식적인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This study examined the formation and the meaning of anti-communist culture which have become general lifestyle as analyzing anti-communist movie around the Korean War(1948~1953) on the basis of preceding research. Rhee’s regime had various efforts to maintain and develop blind anticommunist in division system. The first effort was organizing and preparing the legal and political instrument. If exclusion method of repression and surveillance through physical laws of national institution was building ‘anti-communist’ system from the upper class, Rhee’s regime needed a system that can reproduce anti-communist from below on an enlarged scale. In other words, it means a whole range of activities that can take effect strong anti-communist awareness even in everyday life. Cultural and arts productions including film were used properly here. Especially, anti-communist movie have exposed brutality and atrocities of communism. And they fulfilled the role of political tools to advocate superiority of anti-communist system through the real state of affairs in North Korea. Ideological black and white logic of anti-communist was reflected in the people with daily life style, then it became anti-communist culture. Anti-communist culture is operating on the basis of dominating Korea’s society and is reflecting frankly contradictions of an unreasonable and absurd society.

      • KCI등재

        연구논문 : 여순사건과 지역의 기억

        주철희 ( Cheol Hee Joo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4 역사학연구 Vol.56 No.-

        여순사건으로 국가는 반공체제를 굳건하게 구축하였고, 국가 공권력은 국민을 억압 통제하면서 전남동부지역 사람에게는 피해의식이 컸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여순사건을 매우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즉 ‘반공주의자=민족주의자=애국자’란 인식에서 ‘반공 국민’으로 살아야 했다. 이렇게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민감한 사건으로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체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역사회 전반에 내재된 의식이나 분위기에 편승한 간접적인 기억도 적지 않다. 간접적인 기억에는 정부가 법과 제도를 통한 공권력을 악용한 측면과 언론ㆍ문화예술 등 통제하면서 편향적이고 왜곡되게 선전ㆍ홍보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기억하는 여순사건을 분석하기 위해 전남동부지역에서 발간한 지방지의 문헌을 살펴보았다. 1960~80년 초반까지 편찬된 문헌은 대체로 정부의 인식과 차이가 없었다. 주목할 것은 1962년에 편찬한 여순사건으로 국가는 반공체제를 굳건하게 구축하였고, 국가 공권력은 국민을 억압 통제하면서 전남동부지역 사람에게는 피해의식이 컸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여순사건을 매우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즉 ‘반공주의자=민족주의자=애국자’란 인식에서 ‘반공 국민’으로 살아야 했다. 이렇게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민감한 사건으로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체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역사회 전반에 내재된 의식이나 분위기에 편승한 간접적인 기억도 적지 않다. 간접적인 기억에는 정부가 법과 제도를 통한 공권력을 악용한 측면과 언론ㆍ문화예술 등 통제하면서 편향적이고 왜곡되게 선전ㆍ홍보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기억하는 여순사건을 분석하기 위해 전남동부지역에서 발간한 지방지의 문헌을 살펴보았다. 1960~80년 초반까지 편찬된 문헌은 대체로 정부의 인식과 차이가 없었다. 주목할 것은 1962년에 편찬한 『여수향토사』였다. 『여수향토사』에 서술된 여순사건은 발발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문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후반부터는 중립적 시각에서 지역의 상황과 민간인 피해에 관해서도 서술하는 형태로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반공주의’를 답습한 형태로 서술했다. 이는 국군과 경찰의 비호아래 우익세력의 힘이 지역사회에서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다. 이들은 여순사건을 빨갱이며 공산주의자로 짓누르면서 지역의 유지ㆍ여론주도층으로 오랫동안 지역사회를 지배하였다.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 지역사회에서도 폭넓게 재현되고 있었음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은 미완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여순사건 명예회복과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지역주민의 반응은 여전히 부담스러우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순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역주민의 기억하고 있는 편향ㆍ왜곡된 인식을 올곧게 바꾸는 것도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즉, 지역사회가 여순사건을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도 여순사건의 또 다른 진실규명이며,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여순사건으로 국가는 반공체제를 굳건하게 구축하였고, 국가 공권력은 국민을 억압 통제하면서 전남동부지역 사람에게는 피해의식이 컸다. 이러한 피해의식은 여순사건을 매우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즉 ‘반공주의자=민족주의자=애국자’란 인식에서 ‘반공 국민’으로 살아야 했다. 이렇게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민감한 사건으로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체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역사회 전반에 내재된 의식이나 분위기에 편승한 간접적인 기억도 적지 않다. 간접적인 기억에는 정부가 법과 제도를 통한 공권력을 악용한 측면과 언론ㆍ문화예술 등 통제하면서 편향적이고 왜곡되게 선전ㆍ홍보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기억하는 여순사건을 분석하기 위해 전남동부지역에서 발간한 지방지의 문헌을 살펴보았다. 1960~80년 초반까지 편찬된 문헌은 대체로 정부의 인식과 차이가 없었다. 주목할 것은 1962년에 편찬한 『여수향토사』였다. 『여수향토사』에 서술된 여순사건은 발발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문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후반부터는 중립적 시각에서 지역의 상황과 민간인 피해에 관해서도 서술하는 형태로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반공주의’를 답습한 형태로 서술했다. 이는 국군과 경찰의 비호아래 우익세력의 힘이 지역사회에서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다. 이들은 여순사건을 빨갱이며 공산주의자로 짓누르면서 지역의 유지ㆍ여론주도층으로 오랫동안 지역사회를 지배하였다.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 지역사회에서도 폭넓게 재현되고 있었음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은 미완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여순사건 명예회복과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지역주민의 반응은 여전히 부담스러우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순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역주민의 기억하고 있는 편향ㆍ왜곡된 인식을 올곧게 바꾸는 것도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즉, 지역사회가 여순사건을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도 여순사건의 또 다른 진실규명이며,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여수향토사』였다. 『여수향토사』에 서술된 여순사건은 발발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문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후반부터는 중립적 시각에서 지역의 상황과 민간인 피해에 관해서도 서술하는 형태로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반공주의’를 답습한 형태로 서술했다. 이는 국군과 경찰의 비호아래 우익세력의 힘이 지역사회에서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다. 이들은 여순사건을 빨갱이며 공산주의자로 짓누르면서 지역의 유지ㆍ여론주도층으로 오랫동안 지역사회를 지배하였다.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 지역사회에서도 폭넓게 재현되고 있었음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은 미완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여순사건 명예회복과 진실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지역주민의 반응은 여전히 부담스러우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순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역주민의 기억하고 있는 편향ㆍ왜곡된 인식을 올곧게 바꾸는 것도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즉, 지역사회가 여순사건을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도 여순사건의 또 다른 진실규명이며,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As Yeosun Revolt, the country was building firmly an anti-communist system and national public authorities gave a big victim mentality to Jeonnam east area(전남동부지역)``s people while suppressing and controlling the people. Such victim mentality was to remember that Yeosun Revolt is the extremely negative results. That is, Jeonnam east area people(전남동부지역사람) had to live ``the anticommunist national`` on an awareness of ``anti-communism=patriot=ethnic group`` This event has been remembered as a very negative perception. It is also directly learned the happened situation at the time. But it is also less indirect memory jumped on the bandwagon by awareness and atmosphere of the inherent community at large. It is also the result of the abuse of public power with the government``s laws and regulations and the result of biased and distorted propaganda·public relations, while controlling the media·cultural art. I examined the Local-History(지방지) literature published by Jeonnam east area to analyze Yeosun Revolt within local``s remembrance. There was no difference generally between the government``s recognition and the compilation of literature from 1960 to early 1980s. ‘여수향토사’ should be noted that it was compiled in 1962. Yeosun Revolt described in ‘여수향토사’ can be a very high literature values to the understanding of the situation at the time of the outbreak. Since the late 1980s, ``여수향토사‘ was signs of change into a description about the status of the local and damage to civilian in neutral point of view. But some areas still described as a form of followed anti-communism. This threw a sidelight on that strength of right-wing under the protection of the armed forces and police exerted still in community. They thought that Yeosun Revolt is Bbalgangi(빨갱이) and communist and were dominated by maintenance·opinion leaders of this area for a long time. This can be confirmed through the literature that violence by the state power has been reproduced widely in community. Yeosun Revolt is in a state of incomplete. The community is urged to enact a special law for Yeosun Revolt``s rehabilitation and clarification of truth. But the reaction of the local people at the scene still seems burdensome and sensitive. It is important legal and institutional devices for Yeosun Revolt``s clarification of truth. But it should take precedence over what changing correctly the biased·distorted perception within local people``s remembrance. In other words, that local residents remember correctly Yeosun Revolt was also another Yeosun Revolt``s clarification of truth and was able to confirm the firs step for historical reassess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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