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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백제(百濟)의 건국과 구태(仇台)

          김성한 ( Sung Han Kim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4 역사학연구 Vol.56 No.-

          中國史書에 의하면 百濟는 3세기 초에 東明의 후예인 仇台가 遼東에 웅거한 公孫度의 宗女와 혼인하면서 강성해지기 시작하여 그 후손이 帶方 땅에 처음으로 건국하였다고 한다. 이는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紀에 백제가 ‘浿水―帶水―漢水'로 이어지는 지역을 강역으로 한 사실, 百濟王이 公孫氏인 帶方太守의 딸과 혼인한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仇台는 시기상 百濟의 제6대 仇首王(재위 214~234)에 비정될 수 있는데, ‘仇台'는 ‘仇首'와 ‘仇'자가 동일하고 비류전승상의 시조인 ‘優台'와는 ‘台'자가 일치한다. 백제의 王系에서 仇首王의 아들이 比流王인 사실과 비류설화에서 優台의 아들이 沸流인 사실을 감안하면, 仇台, 優台, 仇首가 동일 인물인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優'가 簡字로 ‘우'로 표기하여 ‘仇'와 자형상 유사한 사실은 이를 더욱 뒷받침한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와 건국주의 관계는 ‘始祖=建國主의 父'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에 따르면 비류전승상에서 시조는 優台이지만 建國主는 沸流가 되는데, 이는 중국사서에 ‘百濟'라는 국호가 沸流와 동일인으로 여겨지는 比流王의 재위기간(304~344) 중인 344년 이전에 등장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백제의 시조는 仇台(=優台=仇首)이고 建國主는 沸流(=比流王)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온조전승이 백제의 정식 시조전승으로 인정되면서 시조가 東明이고 건국주가 溫祚로 되어 있어, 중국사서에 전하는 것과 다른 내용을 전한다. 이는 백제의 정식 시조전승이 비류전승에서 온조전승으로 바뀌었기 때문인데, 그 시기는 백제가 자신의 出自를 ‘夫餘의 別種'에서 ‘夫餘의 正宗'으로 바꾼 사실과 관련이 있다. 泗비 천도와 함께 국호를 南扶餘로 개칭한 聖王 때 出自觀 변화에 따라 시조전승의 교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東城王―武寧王―聖王―威德王'으로 이어지는 東城王系는 近蓋婁王으로도 불린 蓋鹵王의 傍系로서 백제의 왕통에 편입되는데, 이는 ‘古爾王-責稽王-汾西王-契王'으로 이어지는 古爾系가 蓋婁王의 傍系로서 백제의 왕통에 편입되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傍系로서 왕통에 편입된 古爾王의 治績을 개국 군주에 걸맞게 미화함으로써 傍系의 의한 王統 장악을 정당화한 것이라 하겠다. 東城王系인 聖王 때 出自觀이 ‘夫餘의 別種'에서 ‘夫餘의 正宗'으로 바뀌면서 國號도 南扶餘로 바꾸고 시조전승도 비류전승에서 온조전승으로 교체한 것이라 하겠다. 시조전승의 교체에 의해 백제 국내 기록에서는 沸流의 親父를 시조로 하는 優台廟가 東明廟로 개서되었지만, 국외 기록에서는 개서되지 못하여 仇台廟(=優台廟)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According to the Chinese history book, Baekje(百濟) became powerful in the early 3rd century as Gutae(仇台), a descendant of Dongmyeong, married a daughter of Gongsun Duo(公孫度) who betook himself to Liao-dong, and his descendants founded a country in Daebang(帶方) for the first time. It is confirmed by 『Samguksagi(三國史記)』, Baekjebonki(百濟本紀) and Onjowangki(溫祚王紀) through the fact that the areas of ``Paesu(浿水)―Daesu(帶水)-Hansu(漢水)' were designated as river areas and the King of Baekje married a daughter of Daebang governor-general of Gongson Family. ``Gutae(仇台)`` whose period can be compared to the 6th king, Gusu of Baekje(King Gusu, the period of reign : 214~234) has the same Gu(仇) with ``Gusu(仇首)`` and tae(台) with the second word of Utae(優台)`` who is the founder of the Biryu folktale. Considered the facts that the son of King Gusu(仇首王) is King Biryu(比流王) in the Baekje king genealogy, and Biryu(沸流) is the son of Utae(優台) in the Biryu folktale, the possibility that Gutae(仇台), Utae(優台) and Gusu(仇首) are the same person is high. In addition, that fact that ``U(優)`` is similar to ``Gu(仇)`` in the letter type when it is expressed to ``U(우)`` in simplified Chinese more supports the above. According to 『Samguksagi(三國史記)』, the relationship of the originator and the builder of Baekje has an equality of ``Originator(始祖)`` = the father of ``Builder(建國主).`` Accordingly, in Biryu folktale, the originator is Utae but the builder is Biryu, and in the Chinese history book, the country name of ``Baekje`` is related to its appearance in the year 344 before the reign of King Biryu(比流王)(304~344) that is considered to be the same person with Biryu(沸流). Therefore, it can be considered that the originator of Baekje is Gutae(仇台)(=Utae(優台)=Gusu(仇首)) and the builder Biryu(沸流)(=King Biryu(比流王)). But as Onjo folktale is recognized as the formal originator folktale of Baekje, and its originator is Dongmyeong (東明) and the builder is Onjo(溫祚), 『Samguksagi(三國史記)』 tells a different story from the Chinese history book. This is because the formal originator folktale of Baekje was changed from Biryu folktale to Onjo folktale, and it is related to the fact that in the period, Baekje changed its origin from ``another kind of Buyeo(夫餘)`` to ``legitimate kind of Buyeo(夫餘).`` It seems that the originator folktale was changed from the change of the origin viewpoint by King Seong that changed the name of the country to Nambuyeo(南扶餘) along with the transfer of the capital to Sabi(泗비). The King Dongseong Genealogy that transfers from ``King Dongseong(東城王), King Muryung(武寧王), King Seong(聖王) to King Uideok(威德王) is included in the king genealogy of Baekje as a collateral line of King Gaero, also called ``King Geungaeru(近蓋婁王)`` and this has a thread of connection with the fact that Goi genealogy that links ``King Goi(古爾系), King Chaekgye(責稽王), King Bunseo(汾西王) and King Gye(契王) is included in the king genealogy of Baekje as a direct line of King Gaeru(蓋婁王). It is considered that the administration of King Goi that was included in the Royal line as a direct line was beautified in compliance with the meritorious founder of a country and holding the king genealogy was justified. As the origin viewpoint was changed from ``another kind of Buyeo(夫餘)`` to ``legitimate kind of Buyeo(夫餘).`` by King Seong who belonged to the King Dongsong Genealogy, so was the name of the country to Nambuyeo and the origin folktale was changed from Biryu folktale to Onjo folktale. By the change of the origin folktale, the Uate grave that regarded the real father of Biryu as the originaotr was rewritten as the Dongmyeong grave in the national records of Baekje, but overseas records did not rewrite it and the Gutae grave(仇台廟)(= Utae grave) still remains as it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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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구(舊)남부에서 주권론(州權論)과 남부내셔널리즘의 모순적 공존에 대한 역사적 해석

          허현 ( Hur Hyun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8 역사학연구 Vol.70 No.-

          미국의 대표적 분권적 정치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주권론(州權論, states' rights doctrine)은 건국 초기부터 연방정부의 강력한 권한 확대를 견제하면서 내셔널리즘에 맞서는 대표적 저항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아왔다. 따라서 주권론과 내셔널리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특히, 미국 역사에서는 이러한 주권론과 내셔널리즘 간의 적대적 대립관계가 미국 역사 최대의 비극이었던 내전(the Civil War)을 야기했던 주요 원인의 하나였다는 역사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주권론은 지역 자치권을 지켜내고자 했던 남부만의 고유한 정치철학이자 헌법이론으로서 남부 노예주들의 연방탈퇴와 남부연합의 건설은 결국 연방정부에 맞서 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체제 방어적 성격이 강했다는 통념도 여전히 뿌리 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이나 평가들은 역사적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舊)남부에서는 주권론과 남부내셔널리즘(the Southern nationalism)이 공존하면서 남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지켜내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남부연합의 탄생을 가져왔던 혁명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구남부에서 이루어졌던 주권론과 남부내셔널리즘의 모순적 공존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남부의 주권론이 고유의 실체적 내용을 갖춘 전통적인 주권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떤면에서 남부의 주권론은 노예제의 수호와 팽창은 물론, 인종주의의 지탱을 위해 이용되었던 일종의 정치적·이념적 도구 내지는 편의장치로서 성격이 강했다. 실제로 남부의 플랜터 지배계급은 노예제가 위협받거나 노예제의 확산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권론에 헌신적인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았다. 남부는 내전 과정에서 진정한 주권론의 시험대에 올랐지만 결국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남부의 주권론은 변질된 주권론이자, 본질적으로는 내셔널리즘의 일종으로서 친노예제적 내셔널리즘을 구현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부는 노예제에 관한 북부의 주권론 행사를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억누르고자 하였다. 세 번째로, 주권론과 내셔널리즘은 설령 대립적이고 모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남부'라는 새로운 노예제의 프런티어에서 서로 녹아들기에 어렵지 않았다. 연방법거부론자들이 연방탈퇴를 정당화하였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주권론이었던 절대적인 주우월주의가 ‘남부'라는 가상의 지역적·민족공동체적 공간 속에서 남부내셔널리즘으로 재탄생했던 것은 극히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이러한 남부내셔널리즘은 노예소유 주권을 주창하는 남부 노예공화국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백인지배계급 이데올로기였다. 남부의 주권론은 남부내셔널리즘과 경계가 모호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제를 전국화하려는 시도 과정에서 핵심적인 정치철학이었다는 점에서 결코 진정한 의미의 주권론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연방도망노예법의 위헌성을 주장하면서 인신자유법의 제정을 정당한 주권 행사로서 주장하던 북부 자유주들의 주권론이 진정한 주권론을 표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구남부에서는 친노예제 내셔널리즘인 남부내셔널리즘이 지배적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주권론은 수용되기 어려웠다는 역사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보고자 하는 것, 즉 남부 주권론의 모순성을 논증해 보는 것이 본 연구의 기본 목적이며 이를 통해 내전 발발 이전 시기 남부의 주권론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해 본다. States' rights doctrine, which was a major political philosophy and constitutional theory in the United States, had been established as a representative resistance ideology to nationalism, keeping the expansion of the power of federal government in check. In short, it is rightfully believed that states' rights doctrine and nationalism could not be coexistent. Especially considering a history of the Old South, however, there is some doubt on such a general interpretation or assessment because states‘ rights doctrine and southern nationalism were coexistent and working together as revolutionary ideologies, generating the birth of the Confederacy and the outbreak of the Civil War. In some sense, it would be ahistorical approach in assuming that states' rights doctrine has an essential or absolute meaning in history. At least, it can be reasoned that states' rights doctrine, like nationalism, might have a variant challenging the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it. Rather than being used as a tool for the decentralization of power, actually, states' rights doctrine had been functioned as a sort of revolutionary ideology for the birth and growth of southern nationalism in the antebellum America. In other words, states' rights doctrine, as a sort of proslavery nationalism, contributed the centralization and fortification of the Slave Power who attempted to nationalize slavery through the federal government, Congress, and the federal courts. In this respect, states' rights doctrine of the Old South could not be a states' rights doctrine in its real meaning. Indeed, the Confederacy could not pass the test of the real states' rights doctrine during the Civil War. In the end, the Confederacy “died of [real] states' right,” as one historian arg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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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전남·제주 지역의 콜레라 발병세와 지역적 질병 문화권

          임종명 ( Chong Myong Im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21 역사학연구 Vol.81 No.-

          5월 말부터 콜레라가 발병했던 전남에서는 목포 지역이 주요 발병 지역이었다. 즉 5월 말 콜레라가 발병했던 목포에서는 환자와 사망자가 계속해서 발생하면서 그 지역은 6월 중순 환자와 사망자 규모에서 경남 부산, 전북 부안 지역과 함께 남한 지역에서 3대 콜레라 발병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6월 초순 콜레라가 발병했던 여수 지역과 그달 중순 환자가 발생했던 순천 지역의 발병세는 8월 상반기에 ‘안정적'이었던 목포 지역 발병세를 추월하였다. 이는 발병 초기와는 달리 전남의 발병 중심지가 8월 중순경 전남 서남권 또는 목포 권역에서 전남 동부권, 또는 순천 권역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6월 중순에 콜레라가 발병했던 광주 등 전남 북부 내륙의 광주 권역에서의 콜레라 발병세는 강하지 않았다. 이들 추세를 배경으로 하여, 전남은 콜레라 발생 초기였던 6월 중순까지 전북과 함께 두 번째나 세 번째로 큰 발병·사망자 규모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6월 말 홍수가 집중되었던 경북과 전북 지역에서 콜레라 발병이 폭증하면서, 6월 하반기부터 발병세가 완화되기 시작했던 전남 지역의 상대적 발병 규모는 앞의 지역들에 의해 추월되었다. 1946년 콜레라가 남한 지역에서 확산하던 초기 행정적으로 전남에 소속되어 있던 제주 지역에서는 6월 10일 처음으로 콜레라 환자가 발생했다. 그 이후 계속 해서 콜레라가 발병했던 제주도는 6월 중순 콜레라 발생 규모에서 ‘선도적'이었던 부산, 목포, 또 전북 정읍 등과 함께 콜레라 발병의 선도적 지역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6월 하순의 장마를 겪으면서, 제주도는 제주도의 발병 규모가 목포의 그것을 능가하면서 그 지역은 6월 말 대구, 부산, 목포와 함께 최대 규모 콜레라 발생 지역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인구 규모 대비 제주도의 발병 규모는 경북 등 타 지역의 그것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것이었다. 또한, 도서 지역이었던 제주도의 대규모 콜레라 발병은 해방 직후 높은 인구 이동과 밀항, 밀무역 등 종전 직후 동아시아 정치·경제 상황과 제주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연관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1946년 전남과 제주 지역의 콜레라 발병과 만연이 단지 세균학적이거나, 자연적 성격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종전/해방 직후 전라·제주의 지역적, 남한의 정치·경제·사회적 맥락을, 나아가 근대 동아시아권역의 역사적 맥락을 가진 사태였다. Mokp'o in which cholera epidemic had broke out since late May 1946 worked as the center of the epidemic in South Chŏlla province. In the mid June, the harbor city became one of the top three major centers of the cholera epidemic in South Korea. In the early August, however, the number of confirmed case and death of the city where the cholera outbreaks came to be stable were to be outnumbered by those of Yŏsu and Sunch'ŏn where the epidemic broke out in the early June and the mid of the same month respectively. This shows that the center of the epidemic in the province was shifted from the southwest area of the province, or Mop'o and its vicinities from the east area of the province, or Sunch'ŏn and its vicinities. Compared with these two major areas of the province, Kwangju, the provincial capital, and its vicinities located in the north inland area of the province continued to be comparatively minor in their cholera outbreaks. Based upon the overall development of the outbreaks, South Chŏlla province continued to be ranked the second or the third in South Korea in terms of the numbers of cholera case and death until the mid June characterized as the time of the initial development of the epidemic, and also until late of the month. From that time on, the case and death in South Chŏlla provinces were outnumbered by those in North Chŏlla province and North Kyŏngsang one because the situation with the epidemic began to abate in the former province while the pandemic situation got worse than ever in the latter two provinces severely damaged by contemporary great flood. Next, there broke out cholera epidemic in Cheju area in the early June when the area was contemporarilly under South Chŏlla province in the South Korean local administration system. From the mid June on, the area became one of the major centers of the epidemic in South Korea. Especially after the disastrous flood around the country, the area, continuing one of the major centers, surpassed Mokp'o in terms of the number of case and death of the area. At the same time, the cholera outbreak in the area reached the largest percentage of population in South Korea even though the case and death of North Kyŏng province and other province outnumbered those of Cheju. The worst situation with the pandemic in relation to population was due to not a few causes; post-colonial large-scale population movement, and highly activated illegal trade and passage to and from Japan Given this, we can conclude that the 1948 cholera epidemic in South Chŏlla and Cheju area was not only a natural, or bacteriological, occurrence, but also a post-War/post-colonial East-Asian and South Korean socio-historical inc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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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호남절의록의 사료가치 검토(1)

          김동수 ( Dong Soo Kim ) 호남사학회(구-전남사학회) 2011 역사학연구 Vol.44 No.-

          호남절의록?은 호남 의향론(義鄕論)의 핵심자료 중의 하나로 널리 이용되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이용하여 여러 국난(國難)시기에 호남지방의 모의(募義)활동의 양상이나 경향 등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내는 연구들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의 기사 내용 중에는 사실과는 다른 잘못된 내용이 꽤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호남절의록의 사료 가치를 검토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몇 가지가 있겠으나 필자는 현재의 여러 형편 등을 고려하여 우선 "?호남절의록?에서 다룬 이른바 5난사에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누락없이 수록되었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수행하였다. 방법으론 이른바 5난사중의 몇 사건에 관해 출판된 몇 자료들에 수록된 인물들과 ?호남절의록?의 해당 사건의 수록인물들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 아울러 ?호남절의록?의 서지적 부분의 문제로서 저자·출판년·참고 자료 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검토해 보았다. ?호남절의록?의 수록인물들과 여타 절의록?류에 수록된 인물들을 비교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① 임진왜란 당시 장성 남문에서 창의한 사적을 다룬 ?남문창의록? 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은 남문창의의 사적이 있는 인물의 30% 정도 밖에 정리하지 않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이괄의 난 때의 거의 사적을 정리한 ?호남모의록?괴 비교하면 양서가 엇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양서 중에 서로 일치하는 인물은 100명에 지나지 않아 ?호남절의록?은 거의의 사적이 있는 인물의 68%, ?호남모의록?은 61% 를 정리, 수록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③ 1627년의 후금의 침입(정묘호란) 때의 창의사를 다룬 ?정묘거의록?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에는 정묘년 거의 사적이 있는 사람들 총 수의 약36%, ?정묘거의록?에는 약 76%의 비율로 입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호남절의록?과 ?정묘거의록? 모두 不完하지만, ?호남절의록?이 특히 누락된 인물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④ 1636년의 청나라의 침입(병자호란) 때의 창의사를 다룬 자료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이흥발 등 5현의 의진(義陣)을 중심으로 정리한 ?병자창의록?과, 은봉 안방준의 의진을 중심으로 정리한 ?은봉창의록?이다. 이 두 자료의 수록 인물들과 ?호남절의록?과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에 병자년의 거의 사적이 있는 인물로 입록된 인원은 병자거의 사적이 있는 총 인원의 30%정도에 불과한 수효가 된다. ?병자창의록?에는 총 인원의 62% 정도, ?은봉창의록?은 28% 정도가 정리되어 있는 셈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둘은 각기의 의진사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 때문에 이처럼 비교하여 수치를 제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검토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에는 병자창의록과 ?은봉창의록?에 보이는 거의의 지휘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많이 누락되어 있다. 이처럼 지휘부의 많은 인물들이 누락된 까닭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이처럼 매우 단순하고 거칠게 ?호남절의록?과 5난사관련 일부 자료에의 수록 인물들의 수효를 비교해 보는 작업을 수행한 결과 자료에 따라 비율에는 차이가 있으나 어쨌든 ?호남절의록?에 매우 많은 누락이 있음을 확인해 볼수 있었다. 인물들이 대거 누락되어 있는 것은 ?호남절의록?의 자료수집과 정리가 매우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호남절의록?이 나름대로의 편찬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인물들을 정선한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검토는 이 글에서는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수록인물에 많은 누락이 있다는 것은 곧 호남절의록 의사료가치에 큰 한계가 있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호남절의록?을 활용하여 호남지방의 의병 활동상을 정리하고자 할 때에는 이런 면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Honamjeoluirok is widely used as one of primary historical materials for Honam as Righteous Region. in Korean. For example, the book is used to academically examine the historical progresses of righteous activities of Honam people in national crises, and their tendencies. However, it is suspected that the book carries within itself factual errors. There could be various ways of evaluating the book in terms of historical material. Granting this, I focus this research upon the recording of the figures involved in so-call Five National Crises. With this focus in mind, this research compares Honamjeoluirok with other materials in their recording of the people related in Five National Crises. Also, this research critically examines the issues such as the authorship, the publication date, and the bibliographies. The comparison of the recorded peoples shows the followings. First, Honamjeoluirok recorded some 30 percentage of people contained in Nammunchang`uirok(南門倡義錄) in their accounts of the righteous activities at Nammun of Jangseong(長城) region in Japan`s 1592 Invasion of Korea. Second, Honamjeoluirok contained the almost same number of the righteous people as Honammouirok(湖南募義錄) did in their accounts of the righteous activities in the time of Yi Kwal`s(李适) Revolt. In addition, while taking into account the fact that the people commonly recorded in the two books numbered 100, we can say that the former recorded 68 percentage of the righteous people while the latter recorded 61 percentage of the righteous people in the same Revolt. Third, more people were left off Honamjeoluirok than Jeongmyogeouirok(丁卯節義錄) in their accounts of Manchus`s 1627 Invasion of Korea in that the former contained 36 percentage of all the people who had the merits in the Invasion while the latter contained 76 percentage of the total number. Forth, Honamjeoluirok recorded only some 30 percentage of all the people who had the merits in Chinese Qing`s(淸) 1636 Invasion of Korea when it is compared, in terms of the number of the people included, with the two sources which recorded the history of righteous activities in the Invasion: the one, Byeongjachanguirok(丙子倡義錄) which centered on the activities of the Righteous Camp(義陣) of Yi Heung-bal(李興?) and other leaders, recording 62 percentage of all the related people; the other, Eunbongchanguirok (隱峰倡義錄) which centered on the activities of An Bang-jun`s Righteous Camp, recording 28 percentage of them. Additionally, this research raises the question: why Honamjeoluirok left out many people, almost all of whom seem to have taken commanding posts according to the other two books. Admitting that just the numerical comparison carries within itself some methodological limitations, what is briefed above confirms the fact that Honamjeoluirok omitted not a few people worthy of notice in their activities. This implys that Honamjeoluirok was lacking in its collection and compilation of related materials, and at the same time that it does not have a great value in terms of historical material. Therefore, we need to take this implication into full account when we use Honamjeoluirok in the jobe of writing the history of the righteous activities in Ho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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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미군정기 한민당 전남도당의 조직과 활동

          임선화 ( Seon Hwa Im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1 역사학연구 Vol.42 No.-

          이 논문은 해방 이후 결성되었던 한민당 전남도당에 관한 연구이다. 전남도당은 1945년 10월 미군의 광주진주와 더불어 조직되었고, 도군정에 적극 협력하였다. 전남도당이 조직적으로 확대된 계기는 탁치정국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였다. 학생단체 청년단체를 지원하여 격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부·군단위까지 조직을 확장시켰다. 1947년 한민당은 읍·면단위까지 조직을 확장시켰으며,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1947년 후반기부터 본격적인 단독정부 수립 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한민당의 파급력은 여러 우익단체들 특히 청년단체를 앞세워 남로당 등을 무력으로 압도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한민당 전남도당에 관계하였던 이들은 미군정의 관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민당 전남도당 간부들 가운데 우익 청년단체의 지도자들도 다수 눈에 띈다. 한민당 전남도당의 가장 큰 역할은 탁치정국 이후 우익 세력이 지방에 침투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하였고, 또한 행동대 역할을 한 학생·청년단체와 함께 군·읍·면 단위까지 진출하여 단독선거를 치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This paper is about the Korean Democratic Party in Jeonnam Provincial Part which was established after the Korean Independence. Korean Democratic Party in Jeonnam Provincial Part was organized in a October 1945 after the U.S army stayed in Gwang-ju, and it cooperated so much the Provincial Government. Korean Democratic Party in Jeon-nam Provincial Part`s enlargement caused to change the Trusteeship political situation. It supported the Student Group and the Youth Group to develop the anti-Trusteeship, and it expanded to Bu and Gun. Korean Democratic Party expanded it to Yup and Myun in 1947, and the late 1947 it can lead the campaign of the establishment of a separate government. Korean Democratic Party had many right-wing especially the Youth Group overwhelmed to South Korea Labor Party. In Korean Democratic Party the Korean Democratic Party in Jeon-nam Provincial Part`s connected people served and U.S Military Government officer. Also there were many Korean Democratic Party in Jeon-nam Provincial Part`s executives served the Right-wing`s Youth Group`s leader. Korean Democratic Party in Jeon-nam Provincial Part`s main role was it spread its right wings power to the small district unit in Korea and its acting part, Student Group and the Youth Group can permeate into Gun, Yup, Myun unit and they prepared the independent e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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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임란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

          하태규 ( Tae Gyu Ha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9 No.-

          임진왜란기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 송정현교수가 선구적 역할을 하였고, 1980년대부터 조원래 교수가 주도하여 왔다. 최근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연구자들이 많은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호남의 의병의 양상과 특성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렇지만 아직 몇가지 측면에서 검토되어야할 과제가 남아 있다고 보여진다. 임란기 호남의병의 개념과 실체를 좀 분명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를 위하여는 의병진을 형성하는 지도층의 계층 구조, 의병의 전투력의 근원이 되는 병력 구성원, 국가의 전란 대응책으로서 의병 장려정책과 통제책, 그에 따른 의병의 변질 문제 등을 좀 더 세심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호남의병의 봉기의 계기와 성격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임란 초기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은 호남근왕병의 출동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도성함락과 임금의 파천``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근왕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그러나 왜군의 호남 침공으로 위기에 직면하자 지역을 지키기 위한 향보활동을 하였고, 호남지방이 지켜진 뒤에는 주로 경상도로 출동하여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 대립적으로 파악했던 호남의병과 관군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 더 고찰이 필요하다. 호남 의병은 처음부터 수령이나 관군 장수들의 협력과 지원을 받으며 결성되었고, 그들이 전투에 임할 때도 서로 협력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또한, 임란기 호남의 관군이 엄존하고 구체적인 활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의병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도 불합리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호남의병의 전술·전략적 역할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사례 검토가 필요하다. 의병 관련 사료의 발굴과 함께, 현존하는 사료의 신빙성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그동안 연구자들이 활용하였던 사료 중에는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것이 상당히 많이 있다. 따라서 의병관련 사료에 대한 검증을 통하여 기왕의 연구성과도 비판적으로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In 1970s professor Song Jeong Hyun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study of the Honam righteous army during the Imjinwaeran and professor Jo Won Rae has led the study since. Recently quite a number of researchers has announced many products of their studies with a high profile about the Imjinwaeran. The facet and the feature of the Honam righteous army have been revealed in some degree through such studies. But it would seem that there are some assignment that should be reviewed in several ways. It is considered that there is necessity to stipulate more clearly the concept and the substance of the Honam righteous army in the Imjinwaeran. For this, it is necessary to examine more closely about the hierarchy in the leadership class of the Honam righteous army, the members of army as the root of combat power, army incentive policy and control plan as the countermeasure of war, and as a result, the problem from transmutation of the righteous army etc. It is necessary to reexamine the start and character about the uprising of the Honam righteous army. In the early Imjinwaeran the action of the righteous army in Honam started with Royal guards in Honam at nearly the same time and was founded for the loyalty to the king in national crisis of ‘being taken capital city and royal refuge from the palace'. However there was the crisis because of Japanese invasion of Honam in Korea. and the righteous army started to protect their region. After guarding Honam area, it mobilized to Gyungsang province and kept on protecting the nation. Moreover there is the necessity to study more about relation between the Honam righteous army and the government army that is regarded as adversarial one. The Honam righteous army had been organized with the local governors or the royal forces' cooperation and support from the beginning and they attacked the enemy together in the battle. Also it is absurd to overemphasize only the role of the righteous army though there was the royal forces in Honam during the Imjinwaeran. Therefore it is definitely required to examine the concrete and empirical cases about the tactical and strategic role of Honam righteous army. It is needed to inspect authenticity of the present historical records with discovery of historical documents about the righteous army. There are many unclear ones among the previous historical records to be utilized by history researchers. So it is also necessary to review critically the foregone research achievement through the verification of the historical documents related with the righteous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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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호남의병 연구의 현황과 과제

          홍영기 ( Hong Young-ki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6 역사학연구 Vol.64 No.-

          이 연구는 한말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 현황과 향후 과제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해방후 지금까지 발표된 연구논저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특히,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의 경향을 살펴보았으며, 아울러 향후 과제를 제시하였다. 한말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약 70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박사학위논문도 2편이나 제출, 간행된바 있다. 물론 그 이전에는 독립운동사를 개관하는 과정에서 호남의병을 단편적으로 혹은 의병장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그후 자료집이 발굴, 간행되면서 1세대 연구자들이 1980년대 중반까지 호남의병 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990년대에 이르러 2세대 연구자들이 연구와 자료집의 간행을 주도하였고, 2000년대에는 한층 심화된 연구로 진전되고 있다. 향후 과제로는 첫째 앞으로 호남의병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연구자를 시급히 양성해야 한다. 둘째, 중·소 규모의 의진과 그것을 주도한 인물에 대한 연구로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호남의병이 후기의병을 주도한 직접적 배경이나 다양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넷째, 호남의병의 생활사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다섯째, 타 지역 의병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각 지역별 의병의 특징을 밝혀야 할 것이다. 나아가 가능하다면 다른 나라의 민족운동과도 비교함으로써 한말의병의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This study reviewed the status and future tasks of research for Honam Righteous Armies(HRA) in the Great Han Empire. For this, several prior studies which published since independence were examined and looked into especially in the 1970s which this subject started. In addition, future directions are discussed. A research on HRA of the Great Han Empire began in earnest in the 1980s. Since then, about 70 papers have been released so far, including two doctoral thesis. In the process of overview the history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ctivities of the RA leaders were focused while HRA were described in small parts. After this, the biographies of RA were discovered and released, amounting to the first generation of researchers studying HRA in the mid 1980s. As a result, a second generation of research lead to the publication around the 1990s and deeper studies were broadened in the 2000s. Future tasks are as follows : first, new researchers urgently need to be trained for the developmental study on HRA in the future. Second, the study should intensify into small and medium sized groups for RA and their leaders. Third, direct background research on several factors of the third RA which took the main lead by HRA, needs to be found. Fourth, studying the life history of HRA is also necessary. Fifth, regional characteristics of RA should be found through comparative study with other regions. Futhermore, comparing RA of the Great Han Empire more with other countries` national movements will have a more meaning in a worlds historical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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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호국기념관 건립과 운영 활성화 방안 연구

          김현익 ( Kim Hyun Ik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21 역사학연구 Vol.81 No.-

          본 논고는 호남 최초 호국기념관인 호남호국기념관의 건립의의와 과정, 그리고 운영활성화 방안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국가수호 현충시설 기념관인 호남호국기념관이 건립됨으로써 지역적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호국 정신을 기억하는 기념의 공간을 호남지역에 조성하였다는 것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호남호국기념관을 건립할 당시, 국가보훈처는 사업운영방향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독립, 호국, 민주에 관한 내용을 상설전시에 구성하려 했으나 호남의 호국영웅들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내용을 추가하면서 재차 수정되었다. 국가수호 기념관이라는 기본 틀 안에서 6·25전쟁과 호국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전시는 현재 6·25전쟁의 과정, 호남의 호국영웅과 학도병, 의병의 활동, 그리고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등으로 구성되었다. 건립 진행 과정에서 자문회의는 “패널 위주의 전시 구성은 피로감을 줄 수 있다”는 자문을 제시하였고 전시주제와 관련한 문제들도 다방면 지적하였으나 아쉽게도 반영되지 않은 채 현재의 전시구성으로 확정되었다. 신생 기관인 호남호국기념관이 호국보훈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호남호국기념관은 운영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야 하며,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여 전시를 기획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호국 관련 콘텐츠 제작과 기증운동 홍보작업을전개하고, 데이터베이스 조성을 위한 치밀한 아카이브 작업과 구술사연구를 진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장소와 시간의 제약 없이 이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한 호남 권역의 박물관 협력망을 구축한다면, 호남의 호국정신을 조명하고 소속 기관과의 교류를 통해 전문화된 프로그램을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탁운영이 종료된 이후 기념관의 안정화와 중장기적인 운영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2020년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기념관들이 휴관하면서 비대면 프로그램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학교 수업과 각종 행사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현재, 호남호국기념관에서 시행할 수 있는 비대면 프로그램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며,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앞장서 개척한다는 신념으로 운영 활성화 방안 등의 개발 과제를 완수해야 할 것이다. 국난극복의 역사와 호국정신 계승 속에 건립된 호남호국기념관이 앞으로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고, 국론통합과 지역주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에 이바지하는 기관으로 성장할지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This treatise focused on the significance and process of the construction of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the first Patriots Memorial Hall in Honam, and it was created focusing on the plan to activate the operation. The construction of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a memorial hall for National Protection Memorial facilities, enabled regional balance to be achieved, and the significance of the creation of a memorial space to remember the spirit of patriotism was created in the Honam region. At the time of the construction of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the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tried to organize a permanent exhibition on independence, patriots, and democracy in accordance with the purpose of the project operation direction, but it was revised again with the addition of Honam's patriots heros and the MND Agency for KIA Recovery·Identification, In the basic framework of the National Protection Memorial Hall, the focus was on the Korean War and patriots, and now the exhibition consisted of the process of the Korean War, Honam's patriots hero, school soldiers, the activities of Righteous army and MND Agency for KIA Recovery·Identification. During the construction process, the advisory meeting offered advice that “a panel centered exhibition composition can cause fatigue” and pointed out various issues related to the exhibition theme, but unfortunately, it was confirmed as the current exhibition composition without being reflected. It is necessary to think about what direction to proceed the new institution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should take in order to realize the value of patriots veterans. To this end,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should seek a plan to activate the operation, plan exhibitions and develop educational programs reflecting regional specificity. In addition, patriots related content production and donation campaign promotion work is carried out, and detailed archive work and oral history research are conducted to create a database so that many people should be made to use It without restriction of place and time. Also, if the museum cooperation network in the Honam region is established, specialized programs can be created through exchanges with the affiliated institutions and examine Honam's spirit of patriotism. Finally, after the consignment operation is finished, it is necessary to think about the stabilization of the memorial hall and plans to activate mid to long term operation. Many memorials are closed due to Covid-19 in 2020, further accelerating the development of non face to face programs. Now that school classes and various events are held online. the non face to face program that can be implemented at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is concerned with which direction to proceed, with the belief of pioneering in the information age of the 21st century, it will be necessary to complete development tasks such as plan to activate the operation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built in the history of overcoming the national crisis and the succession of the spirit of patriotism, aims to pay attention to whether it will grow as an institution contributing to the consolidation of national opinions and the cultivation of the spirit of love for the country of local resi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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