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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 · 현대 한국의 실학연구와 다산

          정호훈(Jeong, Ho-Hun)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5 다산과현대 Vol.8 No.-

          연희전문-연세대학은 오랫동안 한국에서의 실학과 정약용 연구의 중심 공간이었다. 해방 후 초창기 연구에서는 현실의 폐단을 해결하고자 그 방도를 적극 모색한 ‘정치경제학'으로서 실학을 이해했다. 정약용의 정치경제 사상을 다룬 홍이섭 교수는 정약용이 조선 사회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경세유표』와 『목민심서』와 같은 책을 저술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약용이 “민생을 중시하고 국법을 높이는” 개혁안을 마련했다고 파악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김용섭 교수는 근대적 · 농민적 사회개혁사상이자 한국형 근대화론으로서의 실학론을 제기했다. 이 시각은 주자학을 지주 · 양반층의 처지를 반영한 학문론으로 평가하고 또 주자학이 한말에 이르러서는 개화파의 개혁론으로 계승된다는 판단을 전제하며 이루어진 것으로, 학계의 일반적 이해와는 크게 달랐다. 이 같은 실학관은 정약용 이해와도 맞닿아 있었다. 김용섭 교수는 정약용의 농업경영론(農業經營論)에 보이는 정치경제적 사고가, 사회 제 계층의 평등화의 문제를 모색하는 초기의 농업론, 30대 후반의 공동농장(共同農場)적인 농업경영론, 유배기에 정립한 독립자영농(獨立自營農)적인 농업경영론 형태로 변화한다고 정리했다. 정약용의 구상이 단계적으로 변화했으며, 초기의 급진적인 방법론을 벗어나 온건하면서도 점진적인 방식을 택했다는 이해였다. 실학 연구의 역사는 끊임없이 연구의 시각이 확대되며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실학 연구는 분단 체제의 극복, 통일 국가의 실현을 전망하며 그에 필요한 지혜와 방법을 모색해 나가는 노력의 하나로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The research of Silhak(實學) in the department of korean history at Yonsei University has been developed by a professor Hong I-seop and Kim Yong-seop. Hong I-seop understood Silhak as a political economy to reform social reality, and confirms it more concretely through Jeong yak-yong's thoughts. In the perspective of Hong I-seop, reformation proposal of Jeong Yak-yong(丁若鏞) aims to promote people's life and reinforce the national law. Kim Yong-seop comprehends Silhak as modern social reform thoughts and also the theory of Korean style modernization. Professor Kim thought Silhak reflects class interest of the peasants, in contrast Neo-Confucianism reflects social interest of the landowners, or the gentries. On the thought of Jeong Yak-yong, Kim esteems Jeong Yak-yong has the egalitarian orientation representing the pesant but this radical egalitarian orientation at the early period turned into rather moderate perspective as time passed. The history of the study on Silhak has been a process with constant extension and variation of a perspective regarding the research. The study of Silhak is expected to be progressed toward an Unification of the na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 of Korea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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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爲民과 休息의 정치론 : 來庵 鄭仁弘의 정치의식과 현실인식

          정호훈(Jeong Ho-Hun) 부산경남사학회 2011 역사와 경계 Vol.81 No.-

          이 글에서는 정인홍의 현실인식과 정치론의 성격을 검토하고자 하였다. 정인홍은 사류를 국가의 원기로 인정한 가운데 一黨專制의 정치를 구상했으며, 국가가 갖추고 있는 형벌, 무력을 적극 활용하는 '伐邑'의 정치를 강조했다. 이와 함께 정인홍은 '民'의 안정을 통하여 '國'의 강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보민' '위민'의 논리 위에서의 국가 공고화론이었는데, 이 생각은 정치권 일각에서 일본과의 전쟁을 거치며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국'의 영역을 강화하자는 움직임과는 대립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전쟁기에 시행되었던 召募陣, 束伍軍등의 새로운 군대를 혁파하고 감사의 留營制를 폐지하자는 주장, 수령 적임자를 뽑아 그들의 지방민에 대한 침탈을 방지하도록 하자는 주장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된 사회경제적 대책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민의 休息그리고 이를 통한 民力과 國力의 회복을 기대하는 의식과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지방에 살았던 '민'의 처지 위에서 만들어진 자연스런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민의 휴식을 강조하는 노장사상과도 연결되는 태도이기도 했다. 정인홍의 생각은 '國' 영역을 강조하며 집권 체제를 강화해 가던 당시의 大勢와는 상충하는 점이 있었다. 서인계 인물로서 성혼과 이이의 학문에 영향 받았던 이귀가 1601년(선조 34)에 정인홍의 죄를 성토했던 것은 '민'의 영역을 극히 중시하고 강조했던 정인홍에 대해 그 반대편에서 '국'의 확장과 강화를 강조했던 인물이 보내는 공격의 일단이었다. 요컨대, 정인홍의 정치적 사유는 공권에 압도당하지 않는 재지 사족의 지위와 역할을 중시하고 그 위에서 전란 전후의 위기 국면을 돌파하려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지방적 분권적 질서 위에서 조선의 현실을 진단하고 정치 운영의 방향을 설정하려는 모습이기도 했다. 정인홍 스스로 '위민론' '보민론'을 표방했지만 그 언설이 내포했던 것은 지역 士大夫의 영향력이 크게 작동하는 사회를 변함없이 유지하는 것이었다. This thesis has looked into the political concepts of Jeong, In-Hong(鄭 仁弘), the political leader of late 16th century-early 17th century in Joseon dynasty. Jeong, In-Hong focused on a single party-led political state and powerful political empowerment and valued 'citizen' rather than 'country' and tried not to be affirmative of big changes in policy and law. This seems related to the thought of rest for citizen and expectation of citizen power and national power through it and was clearly different from the moves of political parties that tried to prevent war through changes in law. Also, his thoughts collided with the current state of emphasizing the 'nation' territory and strengthening the power centralism system. The political reasoning of Jeong, In-Hong had strong tendency of keeping the current orders of local decentralization. Although he contended the theory of caring citizen and protecting citizens, the theory had implications of keeping the society that had big influence of local great man. In certain terms, at a time during the war season, the retreat of Jeong, In-Hong and the political demise of the northern party resulted into the collision of the big flow of strengthening the centralization of power and the move to keep the local decentralization orders that eventually had the latter l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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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警民編』의 再刊과 그 敎育的 活用

          정호훈(Jeong Ho-hun) 연세대학교 교육연구소 2007 미래교육학연구 Vol.20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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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에서는 건국초기부터 국가 혹은 차원에서 교화서를 작성하여 보급하였으며, 16세기 초반 김정국이 만들었던 『경민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은 수령의 지방 통치에 필요한 내용을 풍부히 담고 있었는데 17세기 중반 西人 政府에서 재간행하였다. 이 사실은 개인이 만들어 활용했던 교화서를 국가 차원에서 보급하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책은 황해도 지역이나 함경도, 제주도 등 유교적 문화가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강력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이 과정에서 朴世采와 같은 학자는 자신의 제자ㆍ친지들에게 이 책을 교육용 교재로 쓰기를 권하였다. 18세기 중반, 탕평정치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정부에서는 이 책을 지방의 面里 차원에서 향촌민의 교화서로 보급하려고 하였다. 공적 조직을 통하여 『경민편』의 내용을 교육하자는 취지였다. 『경민편』을 향촌민 교육에 활용하자는 정책적 지향은『牧民攷』 『牧綱』 등 18, 9세기에 만들어진 목민서에 반영되었다. 이들 책에서는 『경민편』을 학교 진흥과 풍속 교정을 위한 교재로 인정하고 활용하려 하였다. 한편, 『경민편』의 활용은 이 시기 상민들의 의식 성장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컸다. 낮은 차원에서나마 유교규범을 익히는 것은 양반사대부들이 전유하던 유교적 人文世界에 들어가는 일이었는데, 『경민편』의 유교 규범을 익히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世界를 보다 넓게 인식할 수 있는 힘을 키워 갔을 것이다. 조선후기 『경민편』 교육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문을 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The government republished 『Gyeongminpyeon(警民編)』 in the mid 17th century, which had been made by Kim Jeong-guk in the early 16th century. And, this fact had great significance in a sense that the national level supplies the educative book(敎化書), which had been made and utilized by an individual. This book was supplied centering on regions where Confucian culture has no great influence such as Hwanghae-do area, Hamgyeong-do, and Jeju-do, and where many homicidal cases occur. In this process, the scholar like Park Se-chae(朴世采) recommended his pupils to use this book as the teaching material for education. In the mid 18th century, at the point of time when Tangpyong(蕩平) theory is substantiated, the Seo-ron government tried to supply this book as the educative book of common people in the dimension of Myeon(面) and Ri(里) in region. It aimed to educate the contents of 『Gyeongminpyeon(警民編)』 through the public organization. The policy orientation of aiming to apply 『Gyeongminpyeon(警民編)』 to the education of the common people was recognized as the teaching material for the school promotion and the custom correction by Mokminseo(牧民書), which was made in the 18th and 19th century. Meanwhile, the utilization of 『Gyeongminpyeon(警民編)』 was highly possible of having had great influence upon the conscious growth in the common people in this period. What learns the norm of Confucianism even though being in the low dimension led to entering the Confucian cultural world, which was possessed exclusively by the gentry in the two upper classes of old Korea. These people might proceed with fostering power that can perceive more broadly self and the world, which is included self, in the process of learning the Confucian norm in 『Gyeongminpyeon(警民編)』 The education of 『Gyeongminpyeon(警民編)』 in the late Joseon has high possibility that might open such door even if having not been intended.

        • 조선후기 신국가 구상의 전통과 경세유표(經世遺表)

          정호훈(Jeong, Ho-hun)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7 다산과현대 Vol.10 No.-

          조선후기 사상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많은 학자들이 현실 조선과는 다른 새로운 국가를 구상하고 이를 책으로 편찬한 점이다.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유수원의 『우서(迂書)』, 홍대용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정약용의 『경세유표』 등이 그 대표적인 책이다. 『경세유표』는 이전에 나온 여러 책들의 전통을 계승하며 저술되었는데, 특히 『반계수록』의 영향이 컸다. 이 글에서는 『반계수록』과 『경세유표』의 비교를 통하여경세유표 국가론의 성격이 어떠했던 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 『반계수록』에서 『경세유표』에 이르는 동안 새로운 국가 구상의 핵심을 이루었던 사안은 사유재산제에 기반한 농업경제․토지제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두 책의 저자는 당시 조선의 모든 문제는 지주제로부터 비롯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이 과제 해결을 중심으로 국가를 기획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반계수록』에서는 전 토지를 공전화(公田化)한 공전제를 기반으로 국가 체제를 구상했고, 『경세유표』에서는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이 일정한 비율로 균형을 이루는 토지제도가 실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전자에서는 개개인이 가지는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혁명적으로 제한하여 국가가 이를 온전히 관리하고자 했고, 후자에서는 국가가 경제적인 방식을 활용하여 공전을 확보, 공전과 사전이 균형을 이루는 체제로 기획되었다. 당대 농업·농민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 『반계수록』에서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는 방식을 주목했다면, 『경세유표』에서는 농민의 세금 부담을 경감하는 한편으로 상업과 수공업 등 전 산업을 활성화하여 변화를 도모하는 방법을 중시했다.  『경세유표』는 『반계수록』에서 볼 수 있는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중시하는 태도를 공유하면서도 사적인 경제 활동의 장점을 최대한 긍정하는 개성을 보인다. 이 점은 정약용이 가지고 있던 국가관-인간관이 어떠했던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로 보이는데, 앞으로의 연구에서 집중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Gyeong'se yupyo (經世遺表) was written by inheriting the tradition of the new national building idea which the book such as Pan'gye surok (磻溪隨錄) raised. I tried to find out what the nature of the theory of governing the nation was through comparative analysis of these two books. What was at the core of the new national Concept from Pan'gye surok to Gyeong'se yupyo was how to solve the matter of agricultural economy and land system based on the private property system. The authors of both books thought that all the problems of Chosun originated from the land system, so it was natural to plan the nation around. In the Pan'gye surok, the system was designed in such a way as to make the whole land a common land. On the other hand, In the Gyeong'se yupyo, The state is designed to be built on a land system in which common land and private land are balanced at a certain rate. The former method has revolutionized the private ownership of each individual, and the nation has the characteristics to manage it completely. The latter is promoted in the form of securing the common land by using the economic method in order to recognize the private property system. In this system, the shared land and the private land have an appropriate balance, and Private ownership scheme of land has not been dismantled by direct pressure by the state power. Gyeong'se yupyo shares the attitude of emphasizing the dominant role of the country as seen in Pan'gye surok, This point seems to be an important indicator to see how the national-human perspective of Jeong Yak-yong was held, and it should be intensively explained in future res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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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경민편(警民編)』 초기 간본의검토 - 상허 중앙도서관 소장본의 사례 -

          정호훈 ( Jeong Ho-hun ) 한국사상사학회 2020 韓國思想史學 Vol.0 No.66

          이글에서는 건국대학교 상허도서관에 소장 중인 『경민편』(상허본)을 통해 『경민편』 초기 간행본의 모습을 검토하였다. 학계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허본은 한글 번역문이 실려 있지 않는 특성을 보이는데, 책의 간행 시점은 1579년 이전으로 판단된다. 1579년 허엽이 중간(重刊)한 간본이나 17세기 중엽 이후원이 개간(改刊)한 간본과 비교할 때, 원문이나 구결에서 이들 간본보다 앞서는 양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 상허본은 황해도에서 간행된 김정국의 초간본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며, 전라도 남원과 무장 등 황해도 바깥 지역에서 인쇄된 간본으로 추정된다. 상허본을 통해 필자는 문자적 구성과 관련하여 『경민편』이 진화되는 양상을 확인했다. 통상적인 이해와는 다르게, 『경민편』은 초기에는 한문으로만 원문을 구성했다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한글 번역을 보완하는 변화를 보였다. 이를 통해 살핀다면, 초기 『경민편』이 나왔을 때 이 책은 그 보급을 가로막는 장애를 내부에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이 책을 읽고 해독할 수 있었던 독자층 또한 유식계층(有識階層)으로 한정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경민편』은 권력의 운용 방식을 주자학의 이념에 기초하여 전면적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김정국과 기묘사림의 모습을 충실히 담고 있는 문헌이다. 상허본은 초기 『경민편』의 모습이 어떠했던지, 그리고 후대 『경민편』의 변화가 어떠한 방향으로 일어나는지를 살핌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In this article, the appearance of the early publications of 『Gyeongmin Pyeon』 was reviewed through 『Gyeongmin Pyeon』(Sangheo edition) held in the Sanghe Library of Konkuk University. The Sangheo edition, which is not yet known to the academic world, has the characteristic that Korean translations are not included. On the other hand, the Sangheo edition is not directly related to the first edition published in Hwanghae-do by Kim jeong-guk(金正國). Through the Sangheo edition, I confirmed that when 『Gyeongmin Pyeon』 was first published, it contained only the original Chinese text, but after the late 16th century, the Korean translation was supplemented. The Sangheo edition, which contains the appearance of the early 『Gyeongmin Pyeon』, is an important material for examining the direction in which the changes of the later 『Gyeongmin Pyeon』 occur.

        • 『목민심서』군현(郡縣)으로부터의 정치개혁 구상

          정호훈(Jeong, Ho-hun)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8 다산과현대 Vol.11 No.-

          이 논문에서는 『목민심서』의 성격을 군현으로부터의 정치개혁 구상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정약용은 군현을 다스리는 수령은 지방의 군현은 작은 정치 영역이지만, 이상적인 정치를 실제 구현하는 현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지방관 또한 조세 징수나 하고 백성을 탐학하는데서 벗어나 명실상부하게 ‘부모'와 같은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여겼다. 『목민심서』 는 조선의 정치 변화를 지방의 군현으로부터 혹은 아래로부터 이끌어내고자 하는 전략 위에서 구상된 책이었다. In this paper, I examined the political thought of Mokmin-simseo(牧民心書) written by Jeong Yak-yong(丁若鏞). Mokmin-simseo is a book that presents the philosophy and method that will govern the region of Joseon in the early 19th century with a new vision. Jeong Yak-yong thought that the county in the province is a small political area, but it could be the place where the ideal politics is actualized. He also believed that the local authorities could play a role like "parents", away from harassing the people and harvesting a lot of taxes from them. Mokmin-simseo was a book conceived on a strategy to bring about the political change of Joseon from the county in the province or from be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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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晝永編』의 자료 구성과 知識 세계

          鄭豪薰(Jeong, Ho-hun) 진단학회 2010 진단학보 Vol.- No.110

          이 글에서는 『주영편』을 구성하고 있는 자료·주제와 그 지식 세계의 특성을 정리하며 이 책의 사료적 성격을 살펴 보려고 했다. 『주영편』은 저자 정동유의 인식 태도, 그리고 담고 있는 내용, 학문 방법에서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정동유는 세상에 절대 권위를 가진 지식, 견해는 없으며, 세상의 변화, 지식의 변화를 시간의 흐름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사실에 근거한 판단을 대단히 중시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한편, 사건과 사실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정동유는 개인의 識見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다. 이때의 식견은 『맹자』에 나오는 “踐形以秉彛”로 설명되는데, 본래 가지고 태어난 천성을 실천함으로써 유지하는 판단 능력, 곧 선천의 고유 덕성과 결합된 지적 능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영편』에 실려 있는 기사는 정동유가 살았던 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새로운 자료와 관련된 항목, 과거에 일어났던 혹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사실 혹은 현상의 내력을 탐구 정리하는 항목, 현재 통용되거나 널리 알려져 있는 지식과 견해를 부정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내용 등 크게 보아 세 가지 성격의 기사가 뒤섞여 있다. 정동유는 겉으로 보기에 작고 세세하며 그다지 의미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상의 풍속, 관념, 상식들을 중요한 탐구 대상으로 삼아, 그것들의 역사적 내력을 살피고 그러한 내력 속에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사실과 의미를 드러내며 또 그것들에 대한 기존의 견해가 오류이며 허구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주영편』은 단적으로, 일상의 생활 세계의 일과 같은 사소한 것이 지식 탐구의 주요 대상이 되고, 그에 관한 지식이 역사적 접근을 통하여 새로이 세워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라 할 것이다. This paper treats the aspects of historical materials of Juyoungpyeon(『晝永編』). Juyoungpyeon is the summary book of various topics that the author had saw, felt, and thought usually. This book have similar aspects with Jibong-yuseol(『芝峯類說』), and Seongho-saseol(『星湖僿說』). Comparing with those two books, however, ‘Juyoungpyeon have not classified system and lots of contents. The articles of Juyoungpyeon are not classified systematically. However, it has the almost three kinds of articles. The first one is relevant with the new historical materials, which contain historical factor. The second one arranges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fact or phenomenon that happened in the past or is progressing in the present. The last one denies famous knowledges and perspectives at that time and shows its own point of view. Those three kinds of articles are mingled in Juyoungpyeon. The attitude and manner of author Jeong Dongyu(鄭東愈) completely reflect the movement of the world of thought in the late Joseon dynasty, which endeavored to create a new knowledge by focusing on the method of historical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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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당쟁과 기록의 정치성 : - ‘기축옥사' 희생자의 가해자 공방과 관련하여 -

          정호훈(JEONG Ho Hun) 한국사학사학회 2016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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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는 1589년에 일어났던 ‘기축옥사' 희생자의 가해자에 대한 공방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당쟁과 기록의 상관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많은 희생자가 나온 '기축옥사'에서 가장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는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이었다. 사건 이후, 여론은 이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정철과 유성룡 두 사람을 지목하여 공방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사건의 실상이 기록물로 만들어지고 또 유통되었다. 17세기 초반에는 대체로 유성룡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서인들이 많은 기록을 남겼다. 18세기에 나온 여러 당론서의 경우, 남인과 소론계가 작성한 글에서는 정철 때문에 이들이 희생되었다고 강조했고, 노론계 당론서에서는 유성룡을 가해자로 서술했다. 각 당파에서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료-기록, 증언, 소문 등 -를 최대한 확보하여 이를 사실(事實)로서 굳히고자 했고, 불리한 상황은 애써 무시하거나 배척했다. 이발 모자의 죽음에 누가 책임이 있는가 하는 질문 혹은 그를 둘러싼 논쟁에서 어떤 기록이 믿을 만하다고는 현재 확언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당대의 여러 기록에 제시된 내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실이 되어 조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적어도 그 세계 속에서 한 개인의 기록, 당론서의 기록은 변하지 않는 절대의 현실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당쟁 시기의 특정 기록에 대해, 오늘날 ‘참'과 ‘가짜'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척 위험하다. 오히려 여러 기록 상호간의 관계, 그리고 하나의 기록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정치 사회적 맥락을 두루 살피며 그 기록이 지닌 역사적-정치적 위치를 상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relationship between factional struggles and documentations at the late Chosŏn Dynasty focusing on the documents about the victims and assailant of Gichuk Purge. The much disputed sacrifice was a death of Lee-Bal's old mother and his son. The scholars of the late Chosŏn Dynasty were engaged in a debate to identify who is responsible for the death. Ryu-Seongryong(柳成龍) was focused by Seo-in(西人), or the Westerners, and Jung-Chul(鄭澈) was accused through the documents by Nam-in(南人), or the Southerners, and Soron(少論) Party. Each party tried to make their own opinion historical facts by having advantageous documentations such as records, testmony and rumors and ignoring situations against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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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실학의 전개와 개혁론

          정호훈(Jeong Ho Hun)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4 동방학지 Vol.0 No.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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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우수등재

          20세기 후반 미국에서의 실학 연구

          정호훈(Jeong, Ho-hun) 한국사연구회 2015 한국사연구 Vol.- No.168

          In this paper, I examine James B. Palais' conception of history through his book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Yu Hy?ngw?n and the Late Chos?n Dynasty』. Palais was critical of academic attitudes that saw history of Korea according to the theory of internal development. His criticism was also a rejection of the products of Korean historical research in the 20th Century. Palais labored to constructively confirm his criticism and rejection through his analysis of Yu Hy?ngw?n and 『Pan'gye surok』. According to Palais, elements that make up the foundation of modernity had not been formed in Late Chos?n Dynasty, thus, any discussion on modernity of the era would be incorrect in such view. In this context, Realist School of Confucianism known as Silhak that began in Korea could not qualify as a modern ideology: it was also not appropriate to analyze Yu Hy?ngw?n and『Pan'gye surok』 in terms of Silhak. James Palais understood that 『Pan'gye surok』's main thesis was to resolve problems that arose in a society in which oligarchy and aristocracy had fused into a single social structure. He also realized that Yu Hy?ngw?n lacked any sense of ethnic-nationalism in light of the fact that Yu designed social reform based on Confucian culture. James Palais' study of Yu Hy?ngw?n and 『Pan'gye surok』 became an occasion for self-examination for Korean scholars: did Korean ‘Silhak' scholarship reflect the realities of Late Chos?n Dynasty? And had the history of the period been overrated due to our fascination with ‘modernity'? However, Palais' scholarship shows its limits in that he excessively underrated the level of Chos?n's social developments from his ‘higher' perspective, and also in that he proceeded his analysis without clearly capturing the essential issues that Yu Hy?ngw?n and other Silhak scholars agonized on. Today, when Korean Studies is being discussed on a global level, James Palais' research is a critical subject that must be examined for gaining a more progressive perspective and method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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