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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류씨(晉州柳氏)의 연원과 가문의식의 정립

              權奇奭 ( Kwon Kiseok ) 한국계보연구회 2019 한국계보연구 Vol.9 No.-

              족보는 동족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동성동본’의 계보를 모아놓은 기록이다. 따라서 가문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상계 인물에 대한 고증이 필요한데, 시조 이하 선대 인물들은 고려 이전의 먼 조상들이기에 자료적 실증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진주류씨도 시조와 계보 연결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고, 통칭 ‘移封’ 진주류씨(移柳)와 ‘土姓’ 진주류씨(土柳)로 불리는 두 계열이 별개의 족보를 편찬하며 상반된 주장을 펼쳐온 바 있다. 이류에서 주장하는 계보는 『안동권씨성화보』와 『문화류씨가정보』 등 초기 족보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들 족보는 신뢰도가 높고 여러 족보에 참고가 된 바 있지만, 편찬자 류희잠도 계보적 논란에 대한 여러 이견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고, 이류의 晉州 移封說에 대해서도 수긍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_晉州柳氏丙子譜_(1756)는 계보적 논란에 대해서 이류 측의 정리 내용을 공식화한 족보이다. 1423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永樂子姓編譜圖」를 인용하고, 「子姓編考證」이라는 항목을 두어 상계 논란에 대한 여러 견해를 밝혔다. 『晉州柳氏己丑譜』 (1829)는 계보적 논란을 재론하고 이류와 토류의 계보를 통합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토류에서 주장하는 계보적 근거는 16~17세기 저명 보학자인 鄭崑壽(1538~1602)와 趙從耘(1607~1683) 등의 권위에 힘입어 널리 통용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 다수의 방목류 자료가 토류의 계보 파악을 따르게 되었다. 토류의 족보에는 계보적 논란에 관하여 정리한 「晉州柳氏世譜記事」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에 인용된 柳珦妻 李氏 戶口草는 토류 측의 계보 고증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자료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호주가 되는 호적 자료는 조선시대에 실재하였기는 하지만, 관청 문서의 서식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고, 당시의 가족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이류 측의 반박도 이루어졌다. 동성동본은 한국의 족보 문화에서 동족인지 他族인지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성관 체계와 동족 관념을 형성하는 계보 고증의 과정은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류와 토류는 서로 상충되는 계보 정리를 해 오면서 독자적 가문 의식을 성장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 지속된 계보적 논란 속에서 무리하게 合譜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혈통에 대한 고증을 중시하는 것이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가문의식이 형성되는 기본 원리였음을 잘 보여준다. Jokbo, genealogical book in Korea is the record of descendants who share the family name and bongwan, the birthplace of lineage. In order to establish the scope and identity of a family to be included in any genealogical book, the ancient records must be considered, but the evidence is difficult to find. There have been many controversies over the existence of two different lineages of Jinju Ryu. The genealogy claimed by Ibong(移封) lineage is based on the early genealogical books of the 15th and 16th centuries and is highly reliable. Meanwhile, genealogy claimed by the Toseong(土姓) lineage was based on the views of the masters of genealogical research and had considerable public confidence. In particular, the family register of the early ancestors was presented as evidence, and the authenticity and reliability of which have been the subject of controversy. Through the dispute between the two lineages, who are suspicious of the offspring of the same ancestors, it is well demonstrated that the proof of genealogy was very important to form a family consciousness in traditional Korean society.

            • 종중과 종가 -법률관계, 분재 사례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김화섭 ( Kim Hwa-seop ) 한국계보연구회 2013 한국계보연구 Vol.4 No.-

              종중과 종가(종손) 사이에서 발생하는 법률관계를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바람직한 관계 설정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종중 이란 공동 선조의 분묘 수호와 제사 및 종중원 상호간의 친목 등을 목적으로 공동 선조의 후손 중 성년 이상의 사람을 종중원으로 하여 구성되는 자연발생적인 관습상의 종족 집단체로서, 특별한 조직 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관습상 당연히 성립하는 것이다. 종중 대표자는 종중 규약이나 특별한 관례가 있으면 그에 따라 선출하고 그것이 없으면 일반 관습에 의하여 종장 또는 문장이 총회를 소집하여 출석자의 과반수 결의로 선출하여야 하며, 평소에 종장이나 문장이 선임되어 있지 아니하고 그 선임에 관한 종중 규약이나 관례가 없으면 생존하는 종중원 중 항렬이 가장 높고 나이가 많은 연고항존자가 종장 또는 문장이 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일반관습이다. 종중 총회는 종중의 규약이나 관행에 의하여 매년 일정한 날에 일정한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종중원들이 집합하여 종중의 대소사를 처리하기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종중 총회 소집 절차가 필요하지 않으나, 그 외에 별도로 종중 총회를 소집함에 있어서는 특별한 규약이나 종중 관행이 없는 한 종중원 중 통지 가능한 모든 성년 이상의 남자에게 소집 통지를 함으로써 각자가 회의와 토의와 의결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종중의 법적 성격은 권리 능력 없는 사단(비법인 사단)이므로 종 중 소유의 재산은 종중원의 총유이다. 따라서 그 관리 및 처분에 관하여 먼저 종중 규약에 정하는 바가 있으면 이에 따라야 하고, 그 점에 관한 종중 규약이 없으면 종중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야 하므로, 비록 종중 대표 자에 의한 종중 재산의 처분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행위는 무효이다. 종가는 계보상의 줄기와 가지의 관계를 나타낼 때에 쓰는 말로서, 이론 상으로는 본계(本系)에서 갈라지는 마디의 수만큼 종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집단적인 동질성을 가지는 부계 친족 집단의 큰집을 가리킬 때에 사용하는데, 종가의 가계는 끊겨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 자손이 없을 때에는 양자에 의해서라도 그 가계를 계승시키려 하였다. 또한, 종가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경우에는 그 친족 집단이 종가를 공동으로 돕는 것을 이념으로 하였으나 호주 상속, 재산 상속 제도의 확립과 함께 축소되었다. 종중와 종가(종손) 사이의 법적 분쟁은 1910년대 실시된 토지조사사업 당시 「조선부동산등기령」에서 ‘종중’의 등기 권리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중 재산을 종중의 명의로 등기할 수 없었고, 토지조사사업을 거치면서 많은 종중 재산들이 종손 혹은 종중의 일부인 이름으로 등기를 마쳤는데, 바로 이 등기 명의인들이 다른 종중원과의 협의 없이 종중 재산을 처분하면서 심화되었다. 최근에는 과거 활동도 하지 않고 실체도 불분명하던 종중이 총회를 개 최하여 대표자 선정, 규약 제정을 하고 종손 또는 종가의 재산을 종중이 명의신탁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먼저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는데, 위와 같은 대법원의 명의신탁인지 여부에 관한 판단 기준을 따르면 대부분의 종손 명의 부동산은 종중 소유라고 판단될 여지가 많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eek the way to establish a sound relationship between families of the same clan and the head family (the eldest grandson of the head family) by looking into their legal relationship in the precedents of the supreme court of Korea. The families of the same clan is a spontaneous and customary ethnic group comprised of adult members of the family for the purpose of protecting the graves of their ancestors, holding a memorial service for their ancestors and promoting their family bond. Therefore, no other special acts are required to organize the group but it is naturally established customarily. The representative of the families of the same clan is elected following the family custom, if there is any. If there is no particular family custom, it is elected following general customs: A leader of the clan or the family calls a general meeting and the decision will be made by majority. If there is no elected leader of the family and particular family custom or rule for its appointment, in Korean general custom, the oldest and the highest alive member of the family tree will family line. Moreover, it was a tradition for the whole kinship group to help the head family when it is having hard time, however, the tradition faded away with the establishment of inheritance systems of family headship and property. Legal conflicts between the families of the same clan and the head family (the eldest grandson of the head family) became worse during the land investigation business in 1910: The families of the same clan could not register their property in their name, as the families of the same clan was not acknowledged to be entitled to make registration according to the Real Property Registration Act in Joseon. During the land investigation business, a lot of properties owned by the families of the same dan were registered in the name of the eldest grandson of the head family or a member of the family clan and such registered titleholders disposed their properties without consent of other members of their family. There have been more cases that the families of the same clan, which did not actively function or clearly exist in the past, start to hold a general meeting to elect their representatives and set their rules. Their goal is to file a lawsuit insisting that there was a title trust agreement between the families of the same clan and the eldest grandson of the head family/the head family. According to the standard of judgment of the Supreme court, it could become a problem that the properties in the name of the eldest grandson of the head family are likely to be judged as the properties owned by the families of the same clan.

            • 『소학』의 현대적 계승은 가능한가?

              박연호 ( Park Youn-ho ) 한국계보연구회 2016 한국계보연구 Vol.6 No.-

              이 글의 필자는 『소학』을 뒷받침하고 있는 “근본 배양설”이라는 인간발달에 대한 통찰과 교육방법론을 타당하다고 보지만, ‘소학의 현대적 계승’은 두 가지 이유로 매우 어렵다고 본다. 첫째 이유는 소학을 둘러싼 외적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조선 시대에 소학이 받았던 두 개의 강력한 제도적 지원, 즉 교육에서의 소학 선강의 원칙과 과거에서의 조흘강 및 학례강과 유사한 지원을 대한민국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소학이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내용적 가치’ 중 부부(남녀)유별, 군신유의, 그리고 부자유친의 순종적 효가 현재 한국인들의 일반적 가치관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올해 광주교육대학교에서 교육고전이라는 선택과목에서 6주에 걸쳐 소학을 일독하고 수업 시간에 토론까지 마친 4학년 수강생 5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이다. 필자는 그 조사 결과를 해석하고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즉 소학의 오륜 중 부부(남녀)유별은 사실상 포기되어야 한다. 군신유의는 대한민국의 국체와 정체에 맞게 ‘헌법적 가치에 대한 신봉(constitutional faith)’으로 바뀌어야 한다. 효는 ‘부모의 뜻을 봉양하는 양지(養志)’의 측면을 ‘자식이 자유롭고 독립된 인간으로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을 북돋는 방향으로 재해석하는 적극적 노력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제안은 결국 우리 시대의 가치관에 맞는 근대적 버전(modern version)의 소학이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This paper discusses the possibility for the Little Learning to be cherished again in modern Korea. I have a negative opinion due to two reasons. The first is the circumstantial reason. In Joseon dynasty, the Little Learning enjoyed two very strong institutional supports, one of which was the priority of the Little Learning before four Classics in education, the other was the test of the Little Learning in lesser state examination. But in modern Korea, they are not available any more. The second reason is the incompatibility between the Neo-Confucian values and the modern values, among which the independence and freedom of the individual is supreme. For obtaining empirical data, I collected opinions of 50 senior students who read the Little Learning for six weeks this semester in Gwangju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by questionaire method. I interpreted the results of this survey, and presented a couple of suggestions for the Little Learning to be accepted more favorably among modern young minds. The segregation of sexes should be given up in modern situation. The righteousness between rulers and subjects should be changed into the constitutional faith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filial piety should be reinterpreted along the line that supports the development of children as free and independent individual. In short, my suggestions means that we actually need a modern version of the Little Learning.

            • 한국 사회에서의 종자(宗子)와 종부(宗婦)

              이영춘 ( Lee Young-choon ) 한국계보연구회 2012 한국계보연구 Vol.3 No.-

              宗子와 宗婦는 중국 고대의 宗法에서 기원한 大宗 가문의 제사 계승자와 그의 배우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宗婦의 지위는 종자와 같은 것이며, 제사와 가계 계승에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제사는 부부가 공동으로 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의 大宗의 종자들은 가문의 대표로서 휘하의 각급 소종과 종족을 보살피고 통할하였으며 사당과 묘소의 유지 관리와 제사 의 봉행 등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조상의 관작과 재산을 상속하고 종족 구성원들의 推重과 존경을 받는 등 많은 특전을 누리기도 하였다. 사회가 급변한 오늘날에는 이렇게 종자 종부를 존중하는 풍조를 기대하기 어렵고 또한 예전과 같은 많은 책임을 지우기도 어렵다. 그리고 현대에는 大宗會나 花樹會와 같은 문중 조직과 관리 기구들이 발달해 있으므로 종족의 관리도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宗家는 우리 사회의 전통문화를 계승해 온 소중한 자산이며, 종자와 종부는 그 주역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그들에게 예전과 같은 역할을 모두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친족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친목을 다지는데 그들의 기능과 역할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종족 공동체가 잘 유지되고 순기능을 하게 되면 사회의 미풍양속을 증진하는데도 크게 유익할 것이다. 오늘날 의 종자와 종부들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잘 인식하고 조상의 얼과 정신을 체득하여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하는데 노력한다면, 그들을 중심으로 우리 유교문화의 전통이 잘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The lineage heir and the mistress are the descendants of the main lineage family(宗家) according to the jongfa(宗法) which was originated from ancient China. They are responsible together for the ancestral rituals of the sacrifice. Originally the main lineage family was founded by a few highest aristocratic people such as a prince, princess and a meritorious retainer in Korea. But from the late Chosun period so many lower aristocratic families used to declare themselves the main lineage family. In the traditional ages of the east Asia, the heir of the main lineage family was the representative of a large family consisted with a main lineage and many sub-lineages. He had the responsibility to care and govern all the family members. He also did his role of maintaining the family cemetery and the ancestral shrine in which all the ritual services were done. As a result the lineage heir got many privileges, usually adopting the novel title and the hereditary property with much respect and love of the family members. In modem times we cannot expect them to do the same role and the responsibility for their lineage family. Nowadays there are many relative organizations and administrations such as the family counsels and kinship communities, which can govern the lineage members rather rationally in democratic ways. The main families of Korean society are very unique heritages which take over the traditional Confucian cultures from ages to ages. And the lineage heir and the mistress play the leads. Though they are not expected in this modem society to do the same role which they have done for many centuries, they might do their parts to keep the traditional lineage communities, which would make the society of good morals and manners. So it would be hopeful for them to be conscious of their identity as the core of the Korean tradition and the Confucian culture. If they could learn and embody the spirits of their ancestors to pass them to their descendants, the valuable Korean tradition would be succeeded well generation by generation ever more.

            • 조선 왕실보첩에 나타난 친족 의식

              원창애 ( Won Chang-ae ) 한국계보연구회 2013 한국계보연구 Vol.4 No.-

              고려 후기 수용된 성리학은 조선 전기를 거치면서 학문적으로 성숙되고 심화하여 17세기 이후 일상적인 삶에까지 깊이 적용되고 실천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전기에는 후한 풍속이라 중히 여겼던 전통 의식이나 제도가 성리학적 이념에 비추어 적용하고 변화되는 것이 바른 방향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조선 시대의 친족 제도와 친족 의식 역시 그러한 영향을 받았다. 조선 전기까지도 부계와 모계를 모두 중시하는 친족 의식이 17세기 이후로는 부계 위주의 친족 의식으로 변화되었다. 조선 시대 친족 의식의 변화를 잘 보여 준 것이 바로 왕실이다. 왕실의 친족 의식은 가장 오랫동안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였다. 전통적인 친족 의식을 담아서 편찬된 왕실보첩인 『종친톡』ㆍ『유부록』은 17세기 중반 이후 숙종 대부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종친록』ㆍ『유부록』을 재편한 『선원록』의 편찬, 성리학적 의식이 그대로 반영된 『선원계보기략』을 위시하여 다양한 왕실보첩이 편찬되었다. 태종 대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종친록』에는 男系만, 『유부록』에는 女系만 수록하여서 왕녀의 자손과 왕자 가계의 여계가 수록되어 있다. 『종친록』ㆍ『유부록』에는 역대 국왕의 6대손까지 수록되어 있다. 세종 대에 오복 제가 연구되고, 이에 의거하여 친족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服親은 4대인 緦麻親까지이며, 5대 단문친은 同姓親이며, 6대에는 친속 관계가 끊어진다는『예기』의 설에 근거하여 친족 관계를 정의하였다. 친족 만이 수록되는 왕실보첩에 친족 관계가 끊어지는 6대손까지 실린 것은 법 제와 전통이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다. 특히 여계를 수록한 『유부록』은 전통적인 친족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중국적 관점에서 보면 복제와 관련이 없는 외증손ㆍ외현손은 친족이라 하기 어렵다. 그런데 『유부록』에는 국왕의 외6대손까지 등재되어 있다. 조선 전기 중국의 친족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법제화하여 부계의 비중이 켜져 가고 있지만, 여전히 모계 친족도 중히 여기는 양측적인 친족 의식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성리학적 친족 의식과 전통적인 친족 의식이 양립하는 『종친록』ㆍ『유부록』은 17세기에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그 단초는 『종친록』ㆍ『유부록』에 등재되어 있는 왕실 친족의 예우 문제와 『종친록』ㆍ『유부록』의 수정 문제 가 논의된 것이다. 효종 대에 『종친록』ㆍ『유부록』에 올라 있는 천인을 속 신하는 문제를 놓고 친손과 외손이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미 보첩에 등재된 인물을 차별할 수는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전란으로 소실되어 史庫에 보관된 것을 등사한 『종친록』ㆍ 『유부록』 수정 문제가 인조 대부터 지속적으로 거론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숙종 즉위 후에 마침내 『종친록』ㆍ『유부록』수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종친록』ㆍ『유부록』으로 나뉜 왕실보첩을 재편하여 『선원록』이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또한 『선원록』 편찬에 최종적으로 참여한 서 인의 예학 경향이 왕실보첩에 반영되었다. 예학이 심화되어 갈수록 『가례』와 조선의 전통적인 관습과의 괴리를 어떻게 좁혀 갈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였다. 당시의 예학자들은 주자의 『가례』, 중국의 古禮, 그리고 조선의 전통적인 관습 등을 시의성에 맞게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17세기 서인과 남인의 예에 대한 논쟁을 통해서 서로의 의견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긴 했으나, 시의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시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서인들은 전통적인 왕실보첩의 체제가 합리적인 양반가 보첩 체제로 수정될 수 있다는 보편성을 바탕으로 한 禮意識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고례나 『가례』에는 어긋나지만 전통적인 친족 의식에 따라 6대 내외손까지 실린 기존의 왕실보첩 체제를 인정하되, 왕실 남계 손의 수록 대수를 늘려서 여계 손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 결과 이전의 『종친록』에 6대손까지 수록되었던 왕실 남계 가계를 9대손으로 늘여서 기록하고, 『유부록』에 기록된 여계 자손은 예전처럼 6대손까지로 한정하였다. 또한 보첩 내에 기록된 여성도 체제를 바꾸어서 이미 기록된 여성 이름은 사위의 이름을 기재하고, 그 아래에 細註로 처리를 하였다. 그리고 아녀자의 이름을 알아내어 보첩에 기재하기는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기록되지 않은 여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렇게 함으로써 ‘先男後女’, ‘詳內略外’의 원칙을 왕실보첩에도 적용하였다. It was presumed, by a rule of thumb, that the scopes of relatives or relative consciousness was not so much different from that of Chinese, because the neo - Confucianism had early been rooted as the ruling ideology of Chosun(朝鮮) dynasty. The following research, however, gradually has disproved this naive hypothesis that bilateral relatives of the previous dynasty, Koryeo(高麗), had changed into kinsman system. It was only around the 17th century which saw the transition from bilateral to unilateral, after many different features were accumulated in the research. Although the neo - Confucianism was imported around the late period of Koryeo dynasty, it took quite a long time to be full-fledged and practical in their daily lives, that is, from the 17th century around. In early days of Chosun, the traditional values were rather kept with the generous evaluation, ‘familiar custom’. But as the newly adopted ideology attained righteous position, they began to ratify all of the old values accordingly. The records of royal relatives also seem to reflect this sort of shift perspicuously. The records for king’s families show the transition in which early versions had conservatively preserved the old tradition for quite a long time. There are such materials remained until now for the royal families; ‘Relatives Records’(宗親錄), ‘Included Clans’(類附錄), ‘Essential Documents for Precious Blood’(廟原系譜/紀略), ‘Precious Blood Documents’ (增源錄) and ‘Records for Queens’(王妃世譜). Among them, ‘Relative Records’ and ‘Included Clans’ were drastically changed from the king Sookjong(肅宗) era, around the 17th century. That is, the ramified version of 'Precious Blood Document’, neo-confucian versions of ‘Essential Documents for Precious Blood’ and ‘Records for Queens’ had newly been edited. Their continuous enlarged versions allow us to detect which features were changed in this trend. ‘Relative Records’ list the lineage of sons (princes) and ‘Included Clans' contain daughters (princess) and additional grand daughters from each princes. Both materials delineate the 6th generations. The 4th king of Sejong(世宗) adopted ‘Five Land Divisions’(五服制) and regulated the royal relatives accordingly in the same way. Chinese ‘Canonical Script of Rites’(禮言己) says that the mourning close-relatives who should wear the most harsh garment(總麻親) expand up to the 4th descendents and the 5th nodes are allowed, only if for the same family name, to wear fine textile(袒免親). But the 6th generations onwards have no ties at all without any obligation. It is not clear yet why this peculiarity of royal genealogy reached up to the 6th nodes which was declared, by the neo -confucian ideology, not clans’ any more. 'included Clans’(類附錄) show the traditional meaning of relatives, because it still kept daughters lineages. The neo-confucian principle does not include maternal great children and great-great children who are exempt from wearing any special cloth because they are regarded not relatives any more. This does not explain why the royal genealogies kept the relative up to the 6th generations of maternal lineage. Moreover, ‘Included Clans’ fairly treat the offsprings the same way, regardless of paternal side and maternal side. Although some weight can gradually be observed more on paternal line, it can be stated that the old custom was more or less respected. It further kept some identity which sharply distinguished from aristocratic classes because female names were recorded independently. The normal way at that time was that the husband names were substituted to represent daughters throughout the whole period. The typical way to describe was the exact name of daughter which was followed by “this girl married to whom." It is not sure whether this template goes back to the previous dynasty or not. One of the earliest versions for high class genealogies, ‘Matrix of Haeju Oh Clans’(海州吳氏族圖), listed only son-in - law names which was assumed written in 1401. The bilateral model of clans began to change in the 17th century, when the cordial reception was at issue and the modification was dis cussed on ‘Relative Records’ and ‘Included Clans’ as well. The debate went on how slaves could become a commoner by paying for themselves, from king Hyojong(孝宗) era, but some persistently argued discrimination between direct discendants and maternal offsprings. But they agreed with no discrimination, only if already listed in the records, so as to pay respect to the customs. Only after the debate, in king Injo(仁祖) era, on issuing a copy production of royal records, due to destruction from several Chinese invasions(淸), there began at last to modify two records, as the king Sookjong(肅宗) was enthroned. The main points were imitation of literati styles, in which five or six rows were divided in each page of records and paternal maxims were authorized such as ‘First Males and then. Females’(先男後女) and ‘Precise for Males but Coarse for Females’(詳內外略). The coalitional edition was also published with the name of ‘Documents for Precious Blood’(增源錄). This order reflected the arguments from Western Party(西人) who took part in the edition at that time. Their urgent tasks were regulation between two different features from our tradition and from the new ideology. Although some disagreements were observed between Western Party(西人) and Southern Party(南人), they could successfully reach at consensus in which some ‘timely,and reasonable' measure counted in the negotiation of differences among ‘Family Ritual Norms’(家禮) written by Zhu Xi(朱熹, 1139~1200), Chinese old rites, and our traditional ones. The Western Party members kept some idea to merge two different systems. Although imported ideologies did not allow, the newly edition preserved the previous royal genealogy which included up to the 6th node of offsprings, while the discrimination was so attested that only male descendants expanded further up to the 9th node in ‘Relative Records’. The son-in-law names occupied the daughter nodes instead, while female names, for the time being, were inserted as a footnote. But they were ultimately removed, solely because they could not identify female names with ease. This is a way that the royal records also fit to the norms prevailed at that time; ‘First Males and then Females’ and ‘Precise for Males but Coarse for Females’.

            • 위만조선과 낙랑의 성씨

              전진국 ( Jeon Jin-kook ) 한국계보연구회 2020 한국계보연구 Vol.10 No.-

              한국의 본관성씨 제도는 고려 초에 시작되었지만, 성씨를 쓰는 사례는 삼국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글에서는 위만조선과 낙랑 시기부터 성씨를 쓰는 문화가 있었음을 검토하였다. 위만조선과 낙랑에서 확인되는 주요 성씨는 한씨와 왕씨이다. 한씨는 위만 앞의 고조선 왕족이 왕위를 빼앗긴 뒤에 사용한 성씨였다. 고조선 왕족이 한씨를 썼던 정황은 『위략』과 『잠부론』에서 확인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등장하는 한음과 왕겹은 위만조선에 존재했던 한씨와 왕씨의 인물이다. 한씨와 왕씨는 중국계 성씨이며, 이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왕족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성씨를 쓰는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러한 중국의 성씨 문화가 위만조선에 전해졌다고 판단한다. 왕씨와 한씨는 위만조선 멸망 뒤 그 땅에 두어진 낙랑군에서도 확인된다. 주로 무덤에서 발견되는 글씨가 새겨진 유물을 통해 성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함께 발견되는 유물과 그 유물이 발견되는 무덤의 양식을 통해서 보면, 그 성씨를 썼던 사람들은 고조선계 토착 주민이었다. 위만조선과 낙랑의 성씨는 삼국시대의 성씨로 그 계보가 이어지지 않지만, 지배층 사이에서 성씨를 쓰는 그 문화는 전수되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한씨와 왕씨는 한국사에서 성씨 문화의 시초라 할 수 있다. In Korea, the system of adding the Choronym(Pon’gwan, 本貫) to family names began in the early Goryeo Dynasty, but the use of family names can also be found i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Furthermore, there was a culture of using family names from the Weimanchosǒn(衛滿朝鮮) and the Lolang(樂浪) periods. The main family names found in Weimanchoson and Lolang periods are Han(韓) and Wang(王). Han was the family name used by the Old Chosǒn royal family after they lost the throne to Weiman(衛滿). The records of the Old Chosǒn royal family writing Han are found in Weilueh (魏略) and Qianfulun(潛夫論). Hanum(韓陰) and Wanggyeop(王唊), who appeared in the Chosǒn(朝鮮傳) in Shiji(史記), were the people of Weimanchosǒn who used Han and Wang as family names. Han and Wang were family names used in China, and it was already common in China at that time to use surnames ranging from royalty to ordinary people. Such Chinese family name culture would have spread to Weimanchosǒn. Wang and Han are also found in Lolang, which was placed on the land after the collapse of the Weimanchosǒn. The existence of the family name can be confirmed mostly through the inscriptions found in tombs. Based on the relics and the style of the tombs, the people who used the family name were indigenous people of Old Chosǒn. The family name of Weimanchosǒn and Lolang were not directly linked to the family name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but the culture of using family names was spread among the ruling class. Therefore, Han and Wang of Weimanchosǒn were the origin of the family name culture in Korean history.

            •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가문의 계보(系譜)와 가학(家學)

              이영춘 ( Lee Young-choon ) 한국계보연구회 2014 한국계보연구 Vol.5 No.-

              尤庵 宋時烈(1607~1689)은 조선후기 200여 년간의 性理學과 政治史에 크나큰 영향을 남겼다. 그가 주창했던 春秋大義의 기치는 17세기 중반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관료와 지식인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것은 19세기 말 외세 침략기에 저항 정신이 되기도 하였다. 우암의 가문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연구된 것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그의 선대와 후손들의 계보를 살펴보고, 후손들의 家學 계승이나 정치 사회적인 활동을 검토해 보았다. 우암은 親子가 일찍 죽었으므로 5촌 조카 宋基泰를 입후하여 가문을 이었다. 宋基泰에게는 다섯 아들(殷錫, 疇錫, 茂錫, 淳錫, 晦錫)이 있었으므로, 우암의 후손 가문은 대단히 번성하게 되었다. 이 다섯 명의 손자들이 바로 우암 후손 가문 각 파의 중시조가 되었고, 그 아래에 수많은 자손들이 배출되었다. 우암 송시열의 정치사상과 춘추대의 정신은 그의 성리학과 함께 후손들에게 家學으로 전승되었다. 우암의 후손들 중에는 훌륭한 학자들이 많았지만 학계나 정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많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遺逸로 徵召된 분들도 많았고, 高官에 오른 분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을 닦고 여론을 주도하면서 조용히 살았다. 그들은 선조의 정치사상과 이념을 계승하고 실천하였다. Song Siyeol(1607~1689) whose pseudonym was Woam(尤庵) was a great scholar in later Choseon dynasty. His academic and political thought influenced profoundly for more than 200 years afterwards. His spiritual ideology of the Confucian justice prevailed all through the dynasty, especially in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in 19th century. Though much studies have been done on his academic achievements and political thoughts, it might be a deficiency that few investigation has done on his family backgrounds and the activities of his ancestors and descendants which is essential to understand him. This study focussed on the genealogy of his family lineage and on the activities of descendants all of whom was so much enthusiastic to inherit the spirits and thoughts of their brilliant ancestor. As Song Siyeol had no son grown up, He adopted Song Gitae who had 5 sons and 1 daughter. So Song Siyeol had a large family, and owing to his economic and social properties his descendants were flourished very much afterwards. Each of the five grandsons made their own sub lineages which had thousands of family members. There emerged many high officials and good scholars from the family. But they were very prudent to live silently, and would not eager to do important roles in politics though they were in high positions. Instead they were rather eager to take over the spirits and the ideologies of the Confucian justice of their ancestor Song Siyeol, which became the family tradition to followed up and to hand down forever.

            • 조선후기 광주이씨 창시보와 합동계보 -경술보(1610)와 갑진보(1724)를 중심으로-

              朴洪甲 ( Park Honggab ) 한국계보연구회 2017 한국계보연구 Vol.7 No.-

              조선시대의 명문들 중에는 고려 말부터 두각을 나타낸 가문들이 많았다. 고려 말 둔촌(遁村) 이집(李集)이 벼슬길에 올라 현달한 인물이 됨으로써 오늘날 광주이씨를 있게 했다. 그리하여 이집은 광주이씨 시조로 까지 추앙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집의 손자였던 이인손(李仁孫)과 그의 아들 5형제가 나란히 정승과 판서를 역임하면서 당대 최고의 명문으로 우뚝 섰다. 가계기록인 족보의 초간본(初刊本)인 창시보(創始譜)는 대개 현달한 계파 후손 중에서 특정 인물이 주도하여 만든다. 1610년에 간행된 광주 이씨 경술보(庚戌譜)도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의 손자 이사수(李士修)의 노력으로 인쇄된 것이다. 그런데 경술보는 외손을 과감하게 제외하는 동성보(同姓譜)였다는 특징을 보인다. 종법(宗法) 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던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족보 형태였다. 여기에다 둔촌 이집의 방계는 동성별보(同姓別譜)를 첨부하여 싣고 있다는 특징도 보인다. 그런 한편, 간행을 주도한 이사수 직계 선조들의 이력사항들은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 매우 풍부하다. 또한 자손 등재 방식의 경우에도 선남후녀(先男後女) 방식이 아니라 출생 순이었고, 아울러 서출(庶出) 표기, 양자를 들이는 관행 등은 동 시대의 관례와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선시대 초기 족보에서 중·후기 족보로 넘어가는 과도기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한 세기가 더 흘러 1724년에 간행된 갑진보(甲辰譜)는 각 파조(派祖)를 중시하는 체제로 옮겨갔다. 이는 각 지파별 공동 작업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은 합동계보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동성보에서 벗어나 외손을 2대로 한정하여 등재하는 일반적인 관례를 수용하고 있다. 갑진보의 특징은 별록(別錄)을 첨부하여, 당시 계파별 계보인식이 달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문제점과 의견들을 정리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지면 관계상 제외하였다. The majority of renowned families during the Joseon period became prominent in the late Goryeo period. An eminent politician in the late Goryeo period named Dunchon Lee Jip had a successful career in the government and his family as a result acquired durable fame, as well. Therefore, he now is even regarded as the founder of the Gwangju Lee family. As Lee Jip's grandson Lee Yinson and his five brothers all served as the state councilor and minister, the family became the most flourishing family of the time. The first publication of a genealogy which is called Changsibo (Ch. 創始譜) in Korean is usually led by eminent descendent of a family. The first genealogy of the Gwangju Lee family published in gyeongsul year (1610) was a work of a former chief state councilor Lee Jungyeong's grandson Lee Sasu. The Gyeongsul Genealogy can be regarded as a unique example of a genealogy from the time because it only contains patrilineal information. The patriarchal clan system was not established thoroughly at the time. And the fact that the record of Lee Jip's collateral line is contained in a separate annex is also remarkable. However, there are abundant records of the direct ancestors of Lee Sasu in the genealogy. And the names of the family members were listed according to birth order so that male names were not written before female names. The notations of bastardy and adopted sons were marked on the list agreeable to the custom of those days. These features show that The Gyeongsul Genealogy reflects the transitional change of a genealogy between the early Joseon and the mid-late Joseon periods. In the following century, another genealogy from the Gwangju Lee family was published in gapjin year (1724). The fact that The Gapjin Genealogy adopted the system of putting stress on the founder of a family sect means it was a comprehensive genealogy that was published by a collaborated work of various family sects of the Gwangju Lee family. It also contained matrilineage of two generations according to the general custom of the time. The distinguishing feature of The Gapjin Genealogy is that the book recorded various perceptions of the pedigree of each family sect in a separate annex and it gives The Gapjin Genealogy a great historical significance. Following studies on this book is anticipated.

            • 경주김씨(慶州金氏) 상촌공파(桑村公派)의 족보(族譜)와 문벌(門閥)의 형성(形成)

              李迎春 ( Lee Youngchoon ) 한국계보연구회 2017 한국계보연구 Vol.7 No.-

              1784년(정조 8년)에 4책으로 간행된 『慶州金氏世譜』(甲辰譜)는 이 가문의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甲辰譜는 경주김씨 太史公派의 여러 갈래 계보들을 집대성하여 정리한 것이다. 甲辰譜는 주요 4개 支派의 자손 계보가 종합 편집되어 있으므로 대동보의 원시적 형태를 갖춘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 가문에서 分派別로 派譜를 따로 간행하는 관행이 없었다. 그래서 甲辰譜는 이후 경주김씨 족보 편찬에 하나의 선례와 표준이 되었다. 甲辰譜는 判官公派와 佐郞公派 두 가문의 계보는 매우 상세하지만, 다른 두 파(萬戶公派, 恭平公派)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갑진보는 일반적인 대동보와는 달리 전체 구성원들의 명단을 항렬에 따라 배열하지 않고 분파별로 배열하였다. 그래서 갑진보는 여러 派譜들을 순서대로 묶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甲辰譜는 16세기에 편찬되었던 여러 성씨들의 초기 족보와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 子女를 아들 딸 구분하지 않고 출생 순서대로 기록하였고, 嫡庶를 엄격히 구분하여 嫡子女를 모두 기록한 뒤에 서자녀들은 ‘庶’자를 붙여 따로 기록하였다. 또 적처는 ‘配’라고 표시하고 본관 성씨에 반드시 ‘氏’를 붙였지만, 첩이나 庶子의 부인들에게는 ‘娶’라고 표시하고 본관을 쓰지 않거나 쓸 경우에도 ‘氏’자는 붙이지 않았다. 이러한 족보의 체제는 1871년(고종 8)의 辛未譜에까지 그대로 답습되었다. 그 후에 간행된 족보들에는 이러한 적서의 차별이 표시되지 않았다. 전통시대의 門閥은 하나의 유력한 친족 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혈연을 중심으로 구성된 名門巨族 家門을 말한다. 전통시대에 한 가문이 門閥로 성장하려면 과거와 관직, 학문, 도덕성, 功勳, 學脈과 婚脈 그리고 경제적 기반 등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 사회였으므로 도덕적 실천도 중시되었다. 그래서 士大夫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忠誠 孝道 貞節은 말할 것도 없고, 강직한 품성과 節義정신, 禮儀廉恥와 고결한 정신이 필요하였다. 여기에 특별한 인물이 출현하여 극적인 사건이나 흥미 있는 설화가 더해지면 가문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桑村 金子粹는 강직한 성품으로 명망이 높았고, 고려 왕조에 節義를 지켜 自決함으로써 그 자신이 전설화 하였다. 그의 玄孫이었던 十淸軒 金世弼은 己卯 名賢이 되었고, 8세손 鶴洲 金弘郁은 비분강개한 언론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홍욱은 昭顯世子의 부인이었던 姜嬪의 伸寃을 주장하였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은 가문 전체의 명성을 높이게 되고 후손들에게 후광이 될 수 있었다. 김홍욱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선조들의 후광을 입어 고위 관직으로 나갈 수 있었고, 왕실 및 당대의 문벌 가문들과 婚脈을 맺었다. 그들 중에는 國舅 鰲興府院君 金漢耈, 부마 月城尉 金漢藎, 영의정 金興慶, 좌의정 金道喜와 같은 고관들이 있었고, 寒澗 金漢祿과 秋史 金正喜와 같은 큰 학자들도 있었다. 堂上官 이상만 하더라도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鶴洲公派 외의 다른 갈래에서도 많은 고관과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 일족은 거대한 관료군을 형성하였고 집단으로서의 유력한 閥閱을 이루게 되었다. The "Gyeongju Kim's(慶州金氏) family genealogy," which was published in four books in 1784, is the oldest genealogy book of this family. It is a synthesis of the various branch genealogies of Gyeongju Kim's four main tribes. It has the primitive form of Dae-dongbo(大同譜). Thereafter, there was no practice of publishing pavo(派譜), the branch genealogies separately, in this family. So, It became a precedent and standard for the compilation of Gyeongju Kim's genealogy books. The genealogy of the two ruling families is very detailed, but the records of the other two groups are very abbreviated. Unlike the general Daedongbo, the list of all the members was arranged according to the order of the branches rather than arranging according to the general order. 적자 서자 child born of a concubine It looks similar to the early genealogy books of the various families which were compiled in the 16th century. The children were recorded in the order of birth without distinction of sons and daughters. And after recording all the children born of regal wives and then the children born of concubines were recorded with the indication 'Seo (庶: illegal)' separately. In addition, the regal wives were indicated with the mark of "配(wife)" and the seals were always attached to the surname of theirs. However, the concubines or the wives of the illegal sons were indicated with the mark of "娶(partner)" and did not write their surname, This system of genealogy was followed up even further to 1871. The genealogies published thereafter did not show any such discrimination. In the traditional era, the ‘distinguished family(門閥)’ refers to a prominent family group, which was composed mainly of blood relatives. In order to grow into a distinguished family in the traditional era, it was necessary to have various conditions such as the success in the highest-level state examination, the high office, scholarship, morality, merit and the marriage with economic base. Since the Joseon Dynasty was a society of ethics, moral practice was also emphasized. Therefore, not to mention the fidelity of loyalty, firial pity and the faithfulness, it needed a strong personality, a kindness of courtesy and a spirit of integrity. If a great man appears here and dramatic events or interesting narratives are added, the status of the family would ascend higher. Kim Jae-su(金子粹), usually called Sangchon(桑村), was well-known for his upright character and dedicated his life for the Koryo Dynasty, made himself a legend. His great grand son, Kim Se-pil(金世弼) was honored to be a wise man in 1498, and Kim Hong-uk(金弘郁), one of Kim Jae-su’s descendant in 8 generation, met with miserable death after claiming the victimized of Gang Bin(姜嬪), the wife of crown prince Sohyeon(昭顯世子). This tragic event raised the reputation of the whole family and became a halo to the descendants. Kim Hong-uk's descendants were able to go to high office with their efforts and the halo of their ancestors, and became acquainted with the royal family and contemporary clan families. Among them, there were dignitaries such as Kim Han-gu(金漢耈), the father of Queen Jeongsun(定順王后), Kim Hansin(金漢藎), the husband of a princess, Kim Heungkyeong(金興慶), the prime minister, Kim Jeonghee(金正喜), a brilliant scholar. Even if it was merely a hallmark, the number was incalculable. Many other dignitaries and scholars have also emerged in other branches besides. In this way, the clan formed a huge bureaucracy and achieved a powerful fervor as a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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