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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류씨(晉州柳氏)의 연원과 가문의식의 정립

                權奇奭 ( Kwon Kiseok ) 한국계보연구회 2019 한국계보연구 Vol.9 No.-

                족보는 동족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동성동본'의 계보를 모아놓은 기록이다. 따라서 가문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상계 인물에 대한 고증이 필요한데, 시조 이하 선대 인물들은 고려 이전의 먼 조상들이기에 자료적 실증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진주류씨도 시조와 계보 연결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고, 통칭 ‘移封' 진주류씨(移柳)와 ‘土姓' 진주류씨(土柳)로 불리는 두 계열이 별개의 족보를 편찬하며 상반된 주장을 펼쳐온 바 있다. 이류에서 주장하는 계보는 『안동권씨성화보』와 『문화류씨가정보』 등 초기 족보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들 족보는 신뢰도가 높고 여러 족보에 참고가 된 바 있지만, 편찬자 류희잠도 계보적 논란에 대한 여러 이견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고, 이류의 晉州 移封說에 대해서도 수긍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_晉州柳氏丙子譜_(1756)는 계보적 논란에 대해서 이류 측의 정리 내용을 공식화한 족보이다. 1423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永樂子姓編譜圖」를 인용하고, 「子姓編考證」이라는 항목을 두어 상계 논란에 대한 여러 견해를 밝혔다. 『晉州柳氏己丑譜』 (1829)는 계보적 논란을 재론하고 이류와 토류의 계보를 통합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토류에서 주장하는 계보적 근거는 16~17세기 저명 보학자인 鄭崑壽(1538~1602)와 趙從耘(1607~1683) 등의 권위에 힘입어 널리 통용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 다수의 방목류 자료가 토류의 계보 파악을 따르게 되었다. 토류의 족보에는 계보적 논란에 관하여 정리한 「晉州柳氏世譜記事」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에 인용된 柳珦妻 李氏 戶口草는 토류 측의 계보 고증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자료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호주가 되는 호적 자료는 조선시대에 실재하였기는 하지만, 관청 문서의 서식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고, 당시의 가족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이류 측의 반박도 이루어졌다. 동성동본은 한국의 족보 문화에서 동족인지 他族인지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성관 체계와 동족 관념을 형성하는 계보 고증의 과정은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류와 토류는 서로 상충되는 계보 정리를 해 오면서 독자적 가문 의식을 성장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 지속된 계보적 논란 속에서 무리하게 合譜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혈통에 대한 고증을 중시하는 것이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가문의식이 형성되는 기본 원리였음을 잘 보여준다. Jokbo, genealogical book in Korea is the record of descendants who share the family name and bongwan, the birthplace of lineage. In order to establish the scope and identity of a family to be included in any genealogical book, the ancient records must be considered, but the evidence is difficult to find. There have been many controversies over the existence of two different lineages of Jinju Ryu. The genealogy claimed by Ibong(移封) lineage is based on the early genealogical books of the 15th and 16th centuries and is highly reliable. Meanwhile, genealogy claimed by the Toseong(土姓) lineage was based on the views of the masters of genealogical research and had considerable public confidence. In particular, the family register of the early ancestors was presented as evidence, and the authenticity and reliability of which have been the subject of controversy. Through the dispute between the two lineages, who are suspicious of the offspring of the same ancestors, it is well demonstrated that the proof of genealogy was very important to form a family consciousness in traditional Korean society.

              • 조선후기(朝鮮後期) 보송(譜訟)의 일사례(一事例) - 종통계승(宗統繼承)과 위보(僞譜) -

                朴秉濠 ( Park Byoung-ho ) 한국계보연구회 2010 한국계보연구 Vol.1 No.-

                조선시대에 족보편찬이 성행하게 된 것은 대체로 18세기 이후(숙종대 이후)이며, 大宗의 법이 뿌리내리지 않았으므로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하지 않은 채로 無後家로 하거나 혹은 外孫奉祀를 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 가문에 따라서 小宗이라 할지 라도 養子를 들이는 것(繼後)이 일반화되었고, 19세기 이후가 되면 성행하였다고 보아도 좋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그릇된 宗法思想이 정착하고, 따라서 족보를 편찬할 때에 10여대 전후의 조상, 주로 조선초기인 15·6세기의 無後祖上에게 繼代를 시도하게 되고 血緣이 닿지 않은 자를 계후자로 끼워넣는 이른바 換父易祖를 자행하는 폐단까지 있게 되었다. 이것이 관행상 投托 또는 附譜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며, 平民이나 賤民의 제반 兎役, 사회적 身分ㆍ지위의 상승, 下級官職에의 등용의 수단으로서 이용되며, 그 폐단이 자주 거론되기도 하였다. 한편, 無後家繼代는 각 가문의 名祖에 대하여도 성행하게 되었으며, 宗族끼리 서로 名祖의 宗孫이 되기 위하여 恣意대로 換父易祖하는 폐단도 생겼다. 우리가 오늘날 현저히 볼 수 있는 것은 鮮初나 조선전기의 謀反大逆사건으로 死刑된 者나 그 緣坐人의 繼代를 위한 繼後子 入養의 사례이며, 宗族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僞譜사건의 전형적 사례이다. 그런데 어떠한 형태의 僞譜이건 간에 사건 자체가 官撰記錄이나 私撰記錄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지 않으며 가장 뚜렷이 기억되는 것이 세조의 정권찬탈인 癸酉靖難(단종원년, 1453)으로 사형된 金海 金文起, 晋州 鄭苯, 그리고 河陽 許詡의 경우이며, 이 가문들의 宗統訴 訟분쟁은 조선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으며, 그 재 판서류를 보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私的으로나 公的으로나 다툼의 경우 특히 재관의 경우에는 상호 간에 더 오래되고 더 확실하고 더 많은 書證을 가진 자가 승소하게 마련인데 양편이 모두 그러한 서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실재로 연좌인이 아니라도 난신들의 근친들도 혼비백산하여 멀리 도망하여 은신하며 그 자손대에는 가문의 내력을 알지 못하게 된다. 삼사백년이 지난 후의 재판에서 그 시비ㆍ진위를 가릴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다툼이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현대의 법원은 더욱 가리기 어렵다. 한 조상에 두 개의 宗統이 존재하게 되고 각자 自派를 정당화하는 족보를 편찬하며 다투고 있다. 종통으로서의 법적 특혜도 없는 현대사회에까지 족보소송이 사적ㆍ공적으로 계속되며, 화해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데에 한국적 宗法의 문화적 특성과 족보가 지니고 있는 특수 한국적인 정신적 가치관이 嚴存하고 있는 것이다. 譜訟, 원고나 피고 어느 편도 객관적ㆍ절대적 정당성을 지닐 수 없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The real proliferation of Genealogy publication throughout the Joseon society came in after the 18th century(since the reign of king Sukjong), and because the supposed 'Rule for the Grand houses[大宗]' was not fully integrated into the people's mind or customs at the time, people who did not have children did not try at all to adopt someone only to make that person a successor. They just became a ‘house without a successor[無後家],' or had their maternal descendants to uphold the family memorial services[外孫奉爾已]in the future. Yet in some local regions and some houses located there, even if they were Small liouses[小宗], they started to adopt a ‘successor(繼後),' and such trend became a norm in the 19th century. Under these circumstances, a rather false sense of obligation regarding the clan code(宗法思想) was established, and in occasions of genealogy compilation, people came to actually ‘falsify' records and change people's(even their own) fathers and grandfathers(“換父易祖") while attempting to connect certain ancestors who lived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and did not have any children to succeed them(‘無後祖上') to people who bore no blood relationship with those ancestors just to establish the latter as the successor of the former(‘繼代'), who were like 10 or more generations away. This kind of forgery was referred to as an act of Tutak/投托(entrusting oneself to the family line) ' or ‘Bubo/附譜(adding oneself to the genealogy) , ' and such manner of forgery was frequently used by commoners(平民) or low-boms(賤民) when they were trying to evade mobilization into dynastic services(“免役"), or wanted to raise their social profile or even be enlisted in low-ranldng governmental positions. The problems originated by such malpractices continued to mount in subsequent periods. In the meantime, the aforementioned attempt of ‘connecting oneself to childless ancestors(無後家繼代)' began to specifically target illustrious ancestors(名祖) in the house, and even members of the same house started to quarrel with each other in order to change and alter their own fathers and grandfathers to someone else just to be added to the line of a famous ancestor. There are some cases that are well known to us, in which people tried to 'connect' themselves to certain individuals who were implicated either directly or indirectly in major treason cases and therefore were put to death in the early days of the Joseon dynasty. Such cases became reasons for feuds inside the house, and we can regard them as classic cases of ‘genealogy forgery(僞譜).' Yet such forgery cases tend not to be included or documented in either Official records(官撰記錄) or Civilian accounts(私撰言己錄). Among few cases the one that we could most vividly confirm is the one that involved people like Gim'hae/金海 region's Kim Mun Gi/金文起, Jinju/ 晋州 regions Jeong Bun/鄭苯 and Ha'yan以河陽 regkm's Heo Hu/許亂 who were all killed when King Sejo annexed the throne with his Coup of the Gye'yu year(癸酉靖難) in 1453. Clashes over the issue of verifying some inconsistencies inside theii genealogies and also the succession lines inside the houses have been continuing since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 dynasty and are still continuing even today. Details can be seen from legal documents. People involved in either public or private conflicts that would eventually go to the court would have to determine and ultimately prove who is guilty and who is not by trying to present more evidences, yet in this case both sides lack such documentary evidences. Although not implicated, in the past relatives of accused officials tend to scatter throughout the country, and their descendants would not be able to know or remember who their actual ancestors were. And after three or even four hundred years have passed, there is literally no way to determine who is right and who is wrong. The court today too has absolutely no means to determine the right side and the wrong side between two fighting parties. As a result, a single ancestor is argued to have two lines of succession full of two groups of descendants, and both groups are creating genealogies that would legitimatize their own party. There is no legal privilege guaranteed to the so-called legitimate group today, yet conflicts are continuing either in a public or private fashion. No compromises are made and no discussions are continuing. And the unique nature of the Korean clan code culture, and the peculiar notion regarding genealogies, are behind those conflicts. As it was in the past and also is today, neither the accusor or the accused could possibly bear a truly objective or exclusive legitimacy in a lawsuit in which a genealogy issue is involved(譜訟).

              • 경주김씨(慶州金氏) 상촌공파(桑村公派)의 족보(族譜)와 문벌(門閥)의 형성(形成)

                李迎春 ( Lee Youngchoon ) 한국계보연구회 2017 한국계보연구 Vol.7 No.-

                1784년(정조 8년)에 4책으로 간행된 『慶州金氏世譜』(甲辰譜)는 이 가문의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甲辰譜는 경주김씨 太史公派의 여러 갈래 계보들을 집대성하여 정리한 것이다. 甲辰譜는 주요 4개 支派의 자손 계보가 종합 편집되어 있으므로 대동보의 원시적 형태를 갖춘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 가문에서 分派別로 派譜를 따로 간행하는 관행이 없었다. 그래서 甲辰譜는 이후 경주김씨 족보 편찬에 하나의 선례와 표준이 되었다. 甲辰譜는 判官公派와 佐郞公派 두 가문의 계보는 매우 상세하지만, 다른 두 파(萬戶公派, 恭平公派)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갑진보는 일반적인 대동보와는 달리 전체 구성원들의 명단을 항렬에 따라 배열하지 않고 분파별로 배열하였다. 그래서 갑진보는 여러 派譜들을 순서대로 묶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甲辰譜는 16세기에 편찬되었던 여러 성씨들의 초기 족보와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 子女를 아들 딸 구분하지 않고 출생 순서대로 기록하였고, 嫡庶를 엄격히 구분하여 嫡子女를 모두 기록한 뒤에 서자녀들은 ‘庶'자를 붙여 따로 기록하였다. 또 적처는 ‘配'라고 표시하고 본관 성씨에 반드시 ‘氏'를 붙였지만, 첩이나 庶子의 부인들에게는 ‘娶'라고 표시하고 본관을 쓰지 않거나 쓸 경우에도 ‘氏'자는 붙이지 않았다. 이러한 족보의 체제는 1871년(고종 8)의 辛未譜에까지 그대로 답습되었다. 그 후에 간행된 족보들에는 이러한 적서의 차별이 표시되지 않았다. 전통시대의 門閥은 하나의 유력한 친족 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혈연을 중심으로 구성된 名門巨族 家門을 말한다. 전통시대에 한 가문이 門閥로 성장하려면 과거와 관직, 학문, 도덕성, 功勳, 學脈과 婚脈 그리고 경제적 기반 등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 사회였으므로 도덕적 실천도 중시되었다. 그래서 士大夫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忠誠 孝道 貞節은 말할 것도 없고, 강직한 품성과 節義정신, 禮儀廉恥와 고결한 정신이 필요하였다. 여기에 특별한 인물이 출현하여 극적인 사건이나 흥미 있는 설화가 더해지면 가문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桑村 金子粹는 강직한 성품으로 명망이 높았고, 고려 왕조에 節義를 지켜 自決함으로써 그 자신이 전설화 하였다. 그의 玄孫이었던 十淸軒 金世弼은 己卯 名賢이 되었고, 8세손 鶴洲 金弘郁은 비분강개한 언론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홍욱은 昭顯世子의 부인이었던 姜嬪의 伸寃을 주장하였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은 가문 전체의 명성을 높이게 되고 후손들에게 후광이 될 수 있었다. 김홍욱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선조들의 후광을 입어 고위 관직으로 나갈 수 있었고, 왕실 및 당대의 문벌 가문들과 婚脈을 맺었다. 그들 중에는 國舅 鰲興府院君 金漢耈, 부마 月城尉 金漢藎, 영의정 金興慶, 좌의정 金道喜와 같은 고관들이 있었고, 寒澗 金漢祿과 秋史 金正喜와 같은 큰 학자들도 있었다. 堂上官 이상만 하더라도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鶴洲公派 외의 다른 갈래에서도 많은 고관과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 일족은 거대한 관료군을 형성하였고 집단으로서의 유력한 閥閱을 이루게 되었다. The "Gyeongju Kim's(慶州金氏) family genealogy," which was published in four books in 1784, is the oldest genealogy book of this family. It is a synthesis of the various branch genealogies of Gyeongju Kim's four main tribes. It has the primitive form of Dae-dongbo(大同譜). Thereafter, there was no practice of publishing pavo(派譜), the branch genealogies separately, in this family. So, It became a precedent and standard for the compilation of Gyeongju Kim's genealogy books. The genealogy of the two ruling families is very detailed, but the records of the other two groups are very abbreviated. Unlike the general Daedongbo, the list of all the members was arranged according to the order of the branches rather than arranging according to the general order. 적자 서자 child born of a concubine It looks similar to the early genealogy books of the various families which were compiled in the 16th century. The children were recorded in the order of birth without distinction of sons and daughters. And after recording all the children born of regal wives and then the children born of concubines were recorded with the indication 'Seo (庶: illegal)' separately. In addition, the regal wives were indicated with the mark of "配(wife)" and the seals were always attached to the surname of theirs. However, the concubines or the wives of the illegal sons were indicated with the mark of "娶(partner)" and did not write their surname, This system of genealogy was followed up even further to 1871. The genealogies published thereafter did not show any such discrimination. In the traditional era, the ‘distinguished family(門閥)' refers to a prominent family group, which was composed mainly of blood relatives. In order to grow into a distinguished family in the traditional era, it was necessary to have various conditions such as the success in the highest-level state examination, the high office, scholarship, morality, merit and the marriage with economic base. Since the Joseon Dynasty was a society of ethics, moral practice was also emphasized. Therefore, not to mention the fidelity of loyalty, firial pity and the faithfulness, it needed a strong personality, a kindness of courtesy and a spirit of integrity. If a great man appears here and dramatic events or interesting narratives are added, the status of the family would ascend higher. Kim Jae-su(金子粹), usually called Sangchon(桑村), was well-known for his upright character and dedicated his life for the Koryo Dynasty, made himself a legend. His great grand son, Kim Se-pil(金世弼) was honored to be a wise man in 1498, and Kim Hong-uk(金弘郁), one of Kim Jae-su's descendant in 8 generation, met with miserable death after claiming the victimized of Gang Bin(姜嬪), the wife of crown prince Sohyeon(昭顯世子). This tragic event raised the reputation of the whole family and became a halo to the descendants. Kim Hong-uk's descendants were able to go to high office with their efforts and the halo of their ancestors, and became acquainted with the royal family and contemporary clan families. Among them, there were dignitaries such as Kim Han-gu(金漢耈), the father of Queen Jeongsun(定順王后), Kim Hansin(金漢藎), the husband of a princess, Kim Heungkyeong(金興慶), the prime minister, Kim Jeonghee(金正喜), a brilliant scholar. Even if it was merely a hallmark, the number was incalculable. Many other dignitaries and scholars have also emerged in other branches besides. In this way, the clan formed a huge bureaucracy and achieved a powerful fervor as a group.

              • 한국적 종중의 형성과 역사적 변천과정 -진성이씨의 사례를 중심으로

                김문택 ( Kim Mun-taek ) 한국계보연구회 2013 한국계보연구 Vol.4 No.-

                전통시대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종중의 역사가 발달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 말기에 이르면 더욱 강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종중이라는 조직 속의 일원으로 생활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소속된 이들은 자신의 종중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또한 전통이 깊은 종중에서는 그들의 선조와 후손을 기록으로 남기는 족보, 그리고 조상에 대한 제사 문화를 알려 주는 자료를 남기곤 하는데, 이러한 점에서는 안동의 진성이씨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중의 형성은 顯祖, 즉 훌륭한 조상 또는 派祖를 구심으로 후손들이 집결하면서 형성, 발전하였다. 또 이들 중에서는 국가로부터 인정받거나 문중 사람들의 결의라는 절차를 통해서 4대가 지났어도 제사를 끊이지 않는 不遷位祖가 탄생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후손들은 결집하고 발전하기에 이른다. 진성이씨는 고려 말에 경상도 진보에 살았던 碩이란 인물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 아들 子脩는 안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후손들은 지금까지 이 지역 일대에 살고 있다. 이 가문은 종중이 발전하면서 1600년이 되어서는 목판으로 찍은 족보를 간행하였다. 이 족보는 부계만을 중심으로 기록하지 않고 모계를 아우르는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의 후손이든 딸의 후손이든 모든 혈손들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계보가 후대로 이어지면서 다른 성씨들이 훨씬 많이 수록되는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진성이씨는 조상을 위한 제사에도 철저한 모습을 보였으니, 조상의 묘소 아래에는 齋舍를 짓고 그곳에 관리하는 이를 두었다. 먼저 4세조 李禎을 위하여 可倉齋舍를 지었는데, 특이하게도 그곳에 僧徒, 즉 승려를 거주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종가의 사당에서는 그를 不遷位로 모셨다. 또한 이들은 종전과 달리 시조와 같은 먼 조상을 모시는 일에도 관심을 가졌다. 시조 李碩과 3세조 李云侯의 묘소는 이전에 잃어버리고 제사도 생략하였는데, 17세기가 되면서 이분들의 묘소를 찾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1643년에는 안동 佳丘山에 있던 李云侯의 묘소를 찾았고, 이어 1679년에는 진보에 있던 시조의 묘소를 찾았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朱子의 『家禮』에 의한 생활 철학을 강조하던 때였는데, 현실은 이와 달라서 조선 이전부터 이루어지던 관습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제사에 대해서 『가례』에서는 2ㆍ5ㆍ8ㆍ11월에 사당에서 지내도록 규정했지만, 사람들은 전통 명절인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등 4 명절마다 그것도 사당보다는 묘소에 가서 제사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에 대하여 李彦迪, 李榥, 李珥, 鄭經世, 李絳 등의 성리학자들은 이를 전통적인 관습으로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제사의 모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종중이나 가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선조의 묘소가 있는 산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전승되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제사 문화의 양상은 엄격함과 엄숙함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제사라는 속성상 엄숙함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제사는 후손들 간에 소통하는 장으로 서의 역할이 강화되었으면 한다. 따라서 묘제의 경우에는 종중 사람들 간의 소통의 장소로, 기제사는 가족들이 화목한 시간을 갖는 공간과 시간으로 자리 잡아 나가길 기대한다. In the traditional era, Korea had the most advanced history of clan system in the world. This situation was intensified by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which allowed plenty of people to live as a member of the clan system. They took intense pride in their clan. Some fairly traditional clans used to bequeath both Jokbo(a genealogy book) documenting the family history of ancestors or descendents and materials about ancestral rites. Jinseong Yi clan from Andong in southern Korea was regarded as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clans in this respect. The clan system was formed and developed as descendants gathered centering on Hyeonjo(顯祖), a prominent ancestor, or Pajo(派祖), a first ancestor to establish a branch(派)in the clan. Most of posterity continued to perform ritual ceremony for those who were beyond time scope of four generation from the clans originator, which resuited in Bulcheonwijo(不遷位祖), ancestors who had a permanent ancestral tablet in the shrine. The founder of Jinseong Yi clan was Yi Seok(李碩) who lived in Jinbo, Gyeongbuk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Yi Ja-su(李子修), his son, moved to Andong and his descendants lived there since then. As Jinseon Yi clan system was settled in, the clan published a genealogy book printed from wooden blocks by 1600. It recorded not only paternal lines but also maternal lines. Therefore, it contained records of all the offspring from sons and daughters, which made posterity's genealogy book include lots of different last names. Jinseong Yi clan was rigorous to pay respect to ancestors, as the clan built a memorial house(齋舍) near forefathers' tombs and hired a superintendent to manage the house. First of all, the clan set up Gachangjaesa(可倉齋舍) for Yijeong(李禎), 4th-generation ancestor from Yi clan. It was unusual that a monk(僧徒) was resided to take care of the Jaesa. In addition, Yijeong was dedicated as Bulcheonwi in the shrine of the head house. Furthermore, ancestral rites were performed for remote ancestors such as the founder of Yi clan unlike the past. Tombs of Yi Seok(李碩), a founder, and Yi "Woon―hu(李云侯), 3rd-generation ancestor, had been lost, while their ritual ceremony had been skipped. By the 17th century, however, the clan made a great endeavor to locate their tombs. As a result, the tomb of Yi Woon-hu was found in Mt. Gagu (佳丘山), Andong in 1643 before the founders tomb was discovered in jinbo in 1679. Meanwhile, even though living philosophy ixom Family Courtesy (家禮) by Zhu Xi(朱子) was emphasized during,the joseon Dynasty, people were dependent on a conventional custom practiced before the Joseon era. In particular, Family Courtesy(家禮)'stipulated to practice ancestor rituals in the shrine on aiixed date of February, May, August^ and November, while people preferred to perform the rituals in front of tombs on traditional holidays such as New Years day, Hanshik, Dano, and Chuseok. Confucian scholars including Yi Eon- jeok(李彦迪), 'YiHwang(李滉), eong Gyeong-se(鄭經世), and Yijae (李繂) recognized these circumstances as a traditional custom, while they were concerned about the situation. Ancestral rites during the Joseon Dynasty have been practiced up to the present time. Even if the ceremony is somewhat different depending on the clan system or the family, it has been passed down to the tombs in the mountain or to homes‘ It is expected that Myoje (rituals held in front of the tombs) would be a place to communicate among people and Gijesa(household rites held at night before an ancestors death anniversary) would be a harmonious time and place for family.

              • 종가문화의 기원과 실체

                정승모 ( Chung Seung-mo ) 한국계보연구회 2012 한국계보연구 Vol.3 No.-

                본 논문은 전통적으로 ‘봉제사접빈객'의 중심 역할을 수행해 온 한국 종가의 실제적인 양상을 고문서를 근거로 살펴봄으로써 다음과 같은 점을 검토하였다. 먼저, 종가의 개념과 위상이 초기에는 소종의 4큰집'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종법(宗法)이 조선사회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족보 출간과 함께 제례가 종가를 중심으로 모셔지면서 종가에 대한 인식과 위상이 변화하였다. 둘째, 구체적인 성씨 입향과 문중조직화 시기를 4개 집안 고문서를 통해 살펴보았을 때 문중조직화 시기는 입향시기와 달리 17세기 이후에 나타나고 있었다. 즉, 친족 조직화 시기는 입향 및 거주 역사의 차이보다는 제사를 통한 종법의 적용시기, 구체적으로는 5대 이상의 선조 묘제(墓祭)가 그 계기가 되고 있다. 이는 소종의 대종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종가의 지위와 역할 이 강화되고 있다. 셋째, 구체적인 친족조직으로서 문중이 조직화된 이후 종가와 문 중의 관계를 살펴보았을 때, 협력과 대립 양면성이 동시에 존재한 다. 또한, 종가는 봉제사와 접빈객의 의무를 지는 대신에 문중 성원으로부터 종가의 사회적 위세 및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중조직이 지역 간 연결로 규모가 확대되는 경우가 일제시기까지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종계(宗契)나 종약(宗 約) 등을 살펴보았을 때 문중조직의 확대는 종가에 대한 견제가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종가의 후사를 잇는 문제, 종가의 혼사 문제, 종중재산 관리문제 등에 개입하는 문중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점차 종가의 위상은 약해지고 있다. This paper examines the origins and changing aspects of what is presently called the main family of a lineage, or jongga, through case studies of several lineage organizations. As is widely acknowledged, the Neo-Confucianism of Sung China had been transmitted to Korea during the late Goryeo period, but it was not until the middle of the Joseon period that a lineage, which we currently understand as an organization of agnatic groups with a lineage grandson fulfilling the obligations of performing ancestral rituals and providing hospitality to guests, appeared. Until that period of time, therefore, the main family, termed jongga, had been meant as a “big house” (keunjip) of sub-lineages, while the duty of conducting ancestral rites by the family was not fully recognized. The cases presented in the ancient documents concerning ancestral rituals and the activities of lineage organizations, however, substantiate that the previous status of the main family as a big house of sub-lineages was changing, showing more emphasis on the main family's obligation for ancestral rituals. In this sense, the formation of a lineage organization emerged closely related with the practice of ancestral rituals, especially those performed at family grave sites, in which the members of a patrilineal descent group came to observe rituals for ancestors above the fourth generation. This process may be understood as the transformation of a sub-lineage group (sojong) into an enlarged one (daejong). In order to maintain their statuses as yangban, a particular main family and its lineage organization allied with each other in ways of accumulating lineage property, offering material aid to members, and preserving genealogies; in these affairs, the main family was not just given obligations, but also granted privileges as well. On the other hand, the lineage organization worked to keep the main family in check because lineage grandsons often disposed of lineage property according to their own volitions. The fact that legal cases concerning the disposal of lineage property by a lineage grandson were typical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xemplifies a changing aspec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lineage organizations and the main families.

              • 거창군 북상면 영모재(永慕齋)의 특징과 계보학

                金鍾秀 ( Kim Jongsoo ) 한국계보연구회 2018 한국계보연구 Vol.8 No.-

                경남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의 중산마을에 위치한 영모재는 타지인 이 곳으로 이거를 단행한 경주정씨 문중의 정우신을 추모하기 위해 중수한 추모·제례 공간이다. 정우신은 본향인 경기도 파주에서 타향인 옛 안의 현으로 전격적인 이주를 단행한 입향조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런 정우신이 타계한 이후에 후손들에 의해 입향조를 전면에 내세운 재실 영건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이번의 연구에서는 가칭 피화형 이주로 분류되는 정우신의 이거 경위와 함께, 몇 번에 걸쳐 영건된 재실의 이면사들을 면밀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정우신을 주인공으로 삼는 영모재가 읍지류에서 ‘묘각(墓閣)'조로 분류된 사실을 집중적으로 규명하였다. 묘소와 재각을 합성한 조어인 ‘묘각'은 이른바 ‘수호지제(守護之制)' 의 차원에서 재실의 기능을 규정한 결과를 반영해 준다. 이는 「학교」조로 범주화된 소위 재실형 서당과는 판이한 분류 기준으로, 재실이 수행한 다양한 기능의 일면을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에 추가하여 영모재는 종법제도상의 소종의 이념을 재실 건립을 통해 구현해 보인 점도 주목된다. 한편 금번 논의에서는 가칭 ‘재실의 사회사'라는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적용하였다. 이 방법론은 재실에 가설된 재기·상량문과 같은 기문과 주련·액호·판상시 등과 같이 고문헌에 준하는 자료들을 대상으로 한 면밀한 내용 분석을 통한 인문·사회과학적 방법을 일컫는다. 이는 조경학적·건축학적 차원의 연구에 국한되었던 기존의 연구 성과들에 대해 방법론적 각성의 의미를 지닌다. 그 결과 이번의 논의가 유교의 문화·제도사 방면에서 미개척 분야와 다를 바가 없는 재실 연구의 장도에 유의미한 계기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 Yeongmojae situated at Jungsan village(中山洞), Buksang-myoen, Geochang-gun is a rebuilt memorial service site in tribute to Bukje(北齊) Jeong-usin(鄭禹臣) the first ancestor(入鄕祖) of Gyeongju Jeong family(慶州鄭氏) who moved to Jungsan village away from paju(坡州) home. So after his death, his descendants, as a guardian of grave(守護墓), began to build a memorial service site in honor of him. This study, along with details of his move that could be interpreted as an attempt to avoid misfortunes(避禍), examined the stories behind twice-built construction of the memorial service site from the perspective of 'social culture of memorial service sites'. This methodology underwent the process of deciphering materials such as historical records(記文) and poems shown on tablets in front of the building(板上詩), which would form culture of memorial service site. As a result, the study is expected to improve the existing research trend just limited to the level of architecture and landscape. In case of Yeongmojae maintained by the settling family group, it showcased the upgrade of culture of memorial service site. Behind the rebuilding of Yeongmojae by fourth-generation descendants(玄孫) of great-great-grandfather(高祖父) Jeong-usin was an ideology of clan rule system to firmly(宗法制) set up branched-off minor family groups(小宗) from the mainstream.

              • 한국 사회에서의 종자(宗子)와 종부(宗婦)

                이영춘 ( Lee Young-choon ) 한국계보연구회 2012 한국계보연구 Vol.3 No.-

                宗子와 宗婦는 중국 고대의 宗法에서 기원한 大宗 가문의 제사 계승자와 그의 배우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宗婦의 지위는 종자와 같은 것이며, 제사와 가계 계승에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제사는 부부가 공동으로 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의 大宗의 종자들은 가문의 대표로서 휘하의 각급 소종과 종족을 보살피고 통할하였으며 사당과 묘소의 유지 관리와 제사 의 봉행 등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조상의 관작과 재산을 상속하고 종족 구성원들의 推重과 존경을 받는 등 많은 특전을 누리기도 하였다. 사회가 급변한 오늘날에는 이렇게 종자 종부를 존중하는 풍조를 기대하기 어렵고 또한 예전과 같은 많은 책임을 지우기도 어렵다. 그리고 현대에는 大宗會나 花樹會와 같은 문중 조직과 관리 기구들이 발달해 있으므로 종족의 관리도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宗家는 우리 사회의 전통문화를 계승해 온 소중한 자산이며, 종자와 종부는 그 주역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그들에게 예전과 같은 역할을 모두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친족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친목을 다지는데 그들의 기능과 역할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종족 공동체가 잘 유지되고 순기능을 하게 되면 사회의 미풍양속을 증진하는데도 크게 유익할 것이다. 오늘날 의 종자와 종부들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잘 인식하고 조상의 얼과 정신을 체득하여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하는데 노력한다면, 그들을 중심으로 우리 유교문화의 전통이 잘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The lineage heir and the mistress are the descendants of the main lineage family(宗家) according to the jongfa(宗法) which was originated from ancient China. They are responsible together for the ancestral rituals of the sacrifice. Originally the main lineage family was founded by a few highest aristocratic people such as a prince, princess and a meritorious retainer in Korea. But from the late Chosun period so many lower aristocratic families used to declare themselves the main lineage family. In the traditional ages of the east Asia, the heir of the main lineage family was the representative of a large family consisted with a main lineage and many sub-lineages. He had the responsibility to care and govern all the family members. He also did his role of maintaining the family cemetery and the ancestral shrine in which all the ritual services were done. As a result the lineage heir got many privileges, usually adopting the novel title and the hereditary property with much respect and love of the family members. In modem times we cannot expect them to do the same role and the responsibility for their lineage family. Nowadays there are many relative organizations and administrations such as the family counsels and kinship communities, which can govern the lineage members rather rationally in democratic ways. The main families of Korean society are very unique heritages which take over the traditional Confucian cultures from ages to ages. And the lineage heir and the mistress play the leads. Though they are not expected in this modem society to do the same role which they have done for many centuries, they might do their parts to keep the traditional lineage communities, which would make the society of good morals and manners. So it would be hopeful for them to be conscious of their identity as the core of the Korean tradition and the Confucian culture. If they could learn and embody the spirits of their ancestors to pass them to their descendants, the valuable Korean tradition would be succeeded well generation by generation ever more.

              • 공자 후예의 남종(南宗)과 북종(北宗), 그리고 지파(支派)

                권오영 ( Kwon Oh-young ) 한국계보연구회 2013 한국계보연구 Vol.4 No.-

                공자 가문은 중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천하제일세가(天下第一世家)”이다. 공자의 후예는 2, 500년을 거치면서 손이 번성하여 지금 86대 후손이 태어났다. 후손들의 거주지는 중국 산동성 곡부가 중심이지만 중국 전역과 한국 등 해외에 널리 펴져 살고 있다. 공자 집안의 가계도는 수많은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명(明)나라 이 후에 60년마다 한 번씩 크게 편찬하고, 30년마다 소규모의 편찬을 하도록 약속을 정했다. 『공자세가보』는 역사성이 있고 세계가 분명하여 계보학연구에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공자세가보』란 명칭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해 “세가보”로 그 이름이 정해졌다. 1684년(청 강희 23) 공상임(孔尙任)이 공씨 족보를 편찬할 때「공자세가」에 의거하여 구성을 했다고 한다. 공자는 “나는 본래 은(傲) 나라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은나라의 조상 새는 제비[玄鳥]이다. 공자의 조상이 은나라 사람이고 이 제비에 아들 낳기를 빌었으므로 공씨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공(孔)이란 글자는 새 을(乙) 자와 아들 자(子) 자가 합쳐진 것이다. 그런데 공씨 성이 구체적으로 생긴 것은 공자의 6대조인 공보가(孔父碧)의 자(字) 공보(孔父)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뒤 공씨가 노(魯)나라에 살기 시작한 것은 공보가의 손자 공방숙(孔防叔) 때부터이다. 공자의 34 대 후손 이전은 여러 지방으로 이주하여 세계(世系)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한다. 공자 후예 중에 중흥조(中興祖)는 공자의 43대 후손 공인옥(孔仁玉) 이다. 5세기 남조(南朝)의 송(宋) 대에 유경(劉景)이 공씨 사당과 묘소의 청소 역할을 맡아서 했다. 유경은 주인의 성인 공씨를 따라 성명을 공경(孔景)으로 고쳤다. 그의 후손인 공말(孔末)은 공자의 42대 종손인 공광사(孔光嗣)를 죽이고, 아울러 곡부에 사는 공자의 적자(嫡子) 계통의 후손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 이때 공인옥은 겨우 죽음을 면하여 자손이 이어졌다. 공자의 종통(宗統)은 한때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으로 나뉘어 있었다. 송(宋)나라가 금(金)의 침략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가자 공단우(孔端友)는 황제 고종을 따라 절강성 구주(衢州)에 살게 되었다. 남종은 공단우로부터 공수에 이르기까지 6대 동안 연성공의 봉작이 이루어졌다. 원(元)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1215~1294)는 공씨 손 중에 종손으로 세울 지를 논의하게 했다. 그리하여 구주에 사는 공씨의 종손인 53세 공수(孔洙)를 불러서 연성공을 봉했으나 그는 곡부에 있는 공자 후손인 공치(孔治)에게 봉작을 사양하였다. 그 뒤 공치의 아들 공사회 (孔思晦)가 연성공이 된 이후부터는 남종과 북종이 함께 연성공에 봉해지는 것은 끝이 나고, 이후 600여 년 동안 북종이 공자의 종가로 인정을 받고 종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곡부의 북종이 공자의 종가로 인정을 받아 77대 공덕성(孔德成)에 이르기까지 연성공에 봉해 졌다. 2009년에 간행된『공자세가보』는 5집 80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집은 60호(戶)를 수록했고, 제2집은 중흥조 이후 중국의 여러 지방에 나가 사는 지파(支派)를, 제3집은 중흥조 이전에 여러 지방에 나가 사는 각 파(派)를, 제4집은 선대의 세계를 잃어버린 자로 각각 자파를 세운 경우, 제5집은 해외 지파인 한국 고려파를 수록했다. 공자 후예의 지파인 한국 고려파 공씨의 시조는 공소(孔紹)이다. 공민 왕은 1349년에 원나라 수도인 북경에서 노국대장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1351년 충정왕이 사망하자 공민왕은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이 귀국할 때 노국대장 공주도 함께 왔는데, 한림학사(翰林學士)이던 공소(孔紹)가 그녀를 수행했다. 공소는 연성공 공사회(孔思晦)의 아우로 본래 이름이 공사소(孔思昭)이다. 공사소는 고려 광종의 이름인 소(昭)자를 피해서 이름을 소(紹)로 고쳤다. 공민왕은 공소를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하고 창원백(昌原伯)에 봉해 주었다. 공소의 아들은 공여(孔帑)이고, 공여는 공부(孔俯)와 공은(孔㒚) 두 아들을 낳았다. 공부의 후예는 어촌호(漁村戶)를, 공은의 후예는 고산호(孤山戶)라고 부른다. 한국 고려파 공씨는 본래 본관(本貫)을 창원 (昌原)으로 썼으나, 1794년(정조 18)에 정조는 모든 공씨의 본관을 곡부로 쓰도록 하였다. 공자의 종통이 한때 남종과 북종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국가에서 공자의 종손을 찾아서 임명할 수 있었고, 또 실제 종손은 부모에 대한 효(孝)를 내세워 자기의 종손 자리를 다른 먼 후손에게 양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유교의 의리(義理)는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유연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족보의 편찬은 세계(世系)의 순서를 밝히고, 종족(宗族)을 후하게 대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족보는 세계(世系)의 전통인 세통(世統)을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세가보』는 세통을 중시하면서도 도통(道統)의 계승을 강조하고 있다. 도(道)의 집대성자인 공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유교 국가에서는 도의 융성과 쇠퇴에 천하의 흥망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공자세가보』의 특징은 다른 족보와는 달리 공자의 도통 계승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에도 공씨들은 『공자세가보』를 편찬하면서 실제적으로는 공자 후손의 세계(世系)를 정리하고 있지만, 명분론적으로 유교의 도통 계승을 표방하고 있다. The family of Confucius is usually called the ‘First family in the world' by Chinese people. The family tree of Confucius was admitted as the ‘Oldest Family Tree in the world' in 2005. Guinness World Records in the UK, which has issued the Guinness Book, gave the certificate of world record to the cultural management committee of Gokbu, Shantung Province, which is known as the birthplace of Confucius. And now the 86th generation descendants of Confucius have been born, after producing numerous descendants for 2,500years. Though the main residential areas of his descendant are centered around Gokbu, Shantung Province in China, many of the descendants live all across China and overseas, even in Korea. In 1998, a plan for making a full list of his descendants, of which the number seemed to be several million, was established, which resulted in the completion of 80volumes of Gon/asegabo(gene2.logic2il record) in 2009,which is a detailed pedigree of the family of Confucius. Almost 1.9million descendants of Confucius have been included in these books. Especially, the works were recorded as the first compilation of pedigree in which the female descendants of Confucius were included for the first time in the compilation history. In 1937, when the family tree of Confucius was prepared, it was found out that the number of descendants was about 560,000. Despite the great number of political storms in China, it has been a principle that the family tree of Confucius should be compiled in a large scale every 60years since the Ming Dynasty, including a small- scaled compilation every 30years. The Gonjasegabo(genealogical record) is regarded as a good data for historical events, providing good resources for studies of genealogy. The family tree of Confucius includes all the branches and names of descendants which have been recorded for 4,500years since Whangje(Yellow Emperor). However, it is difficult to regard the records of ancient times as true. The title Gonjasegabo originated from ‘Gongjasega' included in the Sagi(historical records). It is said that Gong Sang-im, a descendant of Confucius, formatted the pedigree on the basis of ‘Gongjasega' from Sagihe was compiling the family history in l684(Gannghee 63, Ching Dynasty). Confucius used to say, “I am a man from Eun Dynasty” The bird of ancestor in his mother country was a swallow. The forefathers of Confucius came from Eun, and the they prayed to a swallow for a son. The family name was created by combining the Chinese character ‘Eul(乙;bird)' and ‘Ja(子;son)'. However, the family name began to be specified in the name of Gongbo(孔父),which was the nickname of Gongboga(孔父嘉> who was a forefather of Confucius. The Gong family began to live in the ancient country named ‘No',when Gongbangsuk(孔防叔),a grandson of Gongboga, came to the country to settle down. Gonggeub(孔伋),a descendant of Confucius, is known as a remarkable scholar, and in the next generation, Gonganguk(孔安國)and Gongyeongdal(孔穎達)are famous as well. It is impossible to clearly identify the branches of descendants of Confucius during the period before the 34th generation, as they moved to various regions. Among his descendants, the 43th generation Gonginok(孔仁玉)played a major role in the family prosperity. During the 5th century, in the era of Song Dynasty among southern countries, a man named Yugyeong(劉景)' took care of ancestral shrine and tomb of Gong family. He changed his own family name to Gong, his lord's name, so he was called ‘Gonggyeong(孔景)' One of his descendants, who was named ‘Gongmal(孔末)',killed ‘Gonggwangsa(孔光嗣)' the 42nd generation descendant of Confucius, and treid to kill every legitimate son of Confucius living in Gokbu at that time. At that time, Gonginok could escape death, so he could leave offspring. The family trees of Confucius used to be roughly divided into to branches, Namjong(South branch, 南宗) and Bukjong(North branch, 北宗). When the governing class of Song Dynasty fled to the south due to the invasion of ‘Geum(金)', Gongdanwoo(孔端友) followed the emperor and settled down in Guju(衢州), Jeolgang Province. The South descendant branch of Confucius maintained the noble title of Yeonseongong(衍聖公)' for 6generations from Gongdanwoo to ‘Gongsu(孔洙)'. The Khubilai, Sejo, of the Yiian Dynasty ordered his retainers to discuss as to who would be designated as the representative of descendants of Gong family. And Gongsu, a 53rd descendant generation, was called to be ennobled as ‘Yeonseongong',however, he recommended ‘Gongchi(孔治)' who lived in Gokbu at that time. When Gongsu went to the palace in 1282(Jiwon 19), he said to the emperor, “I wold rather stay with my parents rather than gain honor, so I want to go back to south, c And he recommended his younger cousin living in Gokbu at that time. The emperor praised him saying, “This man would rather exchange honor for his parents, so he must be a descent of a saint.” Since Gongsahoi, the 56th descendant generation became a Yeonseongong', only the north descendant branch was ennobled as ‘Yeonseongong', which lasted for the next 600years, so that the north branch was admitted as the head family of the descendants of Confucius. In this way, the tradition of north descendant branch began when ‘Gongsu' offered the peerage title of ‘Yeonseongong' to Gongchi, who was a descendant of Confucius. So, the head of north descendant branch was ennobled as Yeonseongong',which lastedof Confucius. King Gongmin married Nogukdaejang Princess in 1349 in Beijing, which was the capital city of Yiian at that time. When King Chungjeong passed away in 1351,he came bak to Goryeo to ascend the throne. When coming home, he brought his wife Nogukdaejang Princess, who was accompanied by Gongso. The original name of Gongso, who was a younger brother of Yeonseonggong Gongsahoi(孔思晦) was Gongsaso(孔思昭).He had to change the character in his name to So(紹) in order to use the same character in the name of King Gwangjong of Goryeo. King Gongmin enobled him as ‘Changwonbaek(昌原伯)' after appoint in him ‘Munhasirangpyeongjangsa(vice-minister of the government)'. He had a son named Gongyeo(孔帑), and Gongyeo gave birth to two sons named Gongbu(孔俯) and Gongeun(孔㒚)respectively. The descendants of Gongbu are called Eochonho(漁村戶), and the descendants of Gongeun are called Qosanho(孤山戶). As of 2009, the population of Eochonho was 9,319, and the population of Gosanho is 18,796. At first, the Goryeo descendants branch of Confucius designated Changwon as their origin of clan, but King Jeongjo(in the 18th year of his regime) ordered them to designate Gokbu as their origin of clan. In general, compilation of pedigree is aimed at identify the time sequence of family tree and treat well the members of the clan. Accordingly, a general pedigree is focused on the family tree, which is a tradition in compiling a pedigree. But, the special feature of the Gongjasegabo is that the records is focused on the succession of Confucianism, as well as the family tree. That is because their pedigree is a record of descendant of Confucius who laid the foundation of enlightenment. In a Confucianism nation, people thought that the rise and fall of a country depended on the enlightenment. Unlike other pedigree, the special feature of Gongjasegabo is focused on the succession of the enlightenment taught by Confucius. Even now, the descendants of Confucius are claiming to advocate the enlightenment of Confucius in terms of justification of the theory, though they are arranging the family tree at the bottom of their heart.

              • 위만조선과 낙랑의 성씨

                전진국 ( Jeon Jin-kook ) 한국계보연구회 2020 한국계보연구 Vol.10 No.-

                한국의 본관성씨 제도는 고려 초에 시작되었지만, 성씨를 쓰는 사례는 삼국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글에서는 위만조선과 낙랑 시기부터 성씨를 쓰는 문화가 있었음을 검토하였다. 위만조선과 낙랑에서 확인되는 주요 성씨는 한씨와 왕씨이다. 한씨는 위만 앞의 고조선 왕족이 왕위를 빼앗긴 뒤에 사용한 성씨였다. 고조선 왕족이 한씨를 썼던 정황은 『위략』과 『잠부론』에서 확인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등장하는 한음과 왕겹은 위만조선에 존재했던 한씨와 왕씨의 인물이다. 한씨와 왕씨는 중국계 성씨이며, 이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왕족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성씨를 쓰는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러한 중국의 성씨 문화가 위만조선에 전해졌다고 판단한다. 왕씨와 한씨는 위만조선 멸망 뒤 그 땅에 두어진 낙랑군에서도 확인된다. 주로 무덤에서 발견되는 글씨가 새겨진 유물을 통해 성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함께 발견되는 유물과 그 유물이 발견되는 무덤의 양식을 통해서 보면, 그 성씨를 썼던 사람들은 고조선계 토착 주민이었다. 위만조선과 낙랑의 성씨는 삼국시대의 성씨로 그 계보가 이어지지 않지만, 지배층 사이에서 성씨를 쓰는 그 문화는 전수되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한씨와 왕씨는 한국사에서 성씨 문화의 시초라 할 수 있다. In Korea, the system of adding the Choronym(Pon'gwan, 本貫) to family names began in the early Goryeo Dynasty, but the use of family names can also be found i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Furthermore, there was a culture of using family names from the Weimanchosǒn(衛滿朝鮮) and the Lolang(樂浪) periods. The main family names found in Weimanchoson and Lolang periods are Han(韓) and Wang(王). Han was the family name used by the Old Chosǒn royal family after they lost the throne to Weiman(衛滿). The records of the Old Chosǒn royal family writing Han are found in Weilueh (魏略) and Qianfulun(潛夫論). Hanum(韓陰) and Wanggyeop(王唊), who appeared in the Chosǒn(朝鮮傳) in Shiji(史記), were the people of Weimanchosǒn who used Han and Wang as family names. Han and Wang were family names used in China, and it was already common in China at that time to use surnames ranging from royalty to ordinary people. Such Chinese family name culture would have spread to Weimanchosǒn. Wang and Han are also found in Lolang, which was placed on the land after the collapse of the Weimanchosǒn. The existence of the family name can be confirmed mostly through the inscriptions found in tombs. Based on the relics and the style of the tombs, the people who used the family name were indigenous people of Old Chosǒn. The family name of Weimanchosǒn and Lolang were not directly linked to the family name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but the culture of using family names was spread among the ruling class. Therefore, Han and Wang of Weimanchosǒn were the origin of the family name culture in Korean history.

              •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가문의 계보(系譜)와 가학(家學)

                이영춘 ( Lee Young-choon ) 한국계보연구회 2014 한국계보연구 Vol.5 No.-

                尤庵 宋時烈(1607~1689)은 조선후기 200여 년간의 性理學과 政治史에 크나큰 영향을 남겼다. 그가 주창했던 春秋大義의 기치는 17세기 중반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의 관료와 지식인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것은 19세기 말 외세 침략기에 저항 정신이 되기도 하였다. 우암의 가문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연구된 것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그의 선대와 후손들의 계보를 살펴보고, 후손들의 家學 계승이나 정치 사회적인 활동을 검토해 보았다. 우암은 親子가 일찍 죽었으므로 5촌 조카 宋基泰를 입후하여 가문을 이었다. 宋基泰에게는 다섯 아들(殷錫, 疇錫, 茂錫, 淳錫, 晦錫)이 있었으므로, 우암의 후손 가문은 대단히 번성하게 되었다. 이 다섯 명의 손자들이 바로 우암 후손 가문 각 파의 중시조가 되었고, 그 아래에 수많은 자손들이 배출되었다. 우암 송시열의 정치사상과 춘추대의 정신은 그의 성리학과 함께 후손들에게 家學으로 전승되었다. 우암의 후손들 중에는 훌륭한 학자들이 많았지만 학계나 정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많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遺逸로 徵召된 분들도 많았고, 高官에 오른 분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을 닦고 여론을 주도하면서 조용히 살았다. 그들은 선조의 정치사상과 이념을 계승하고 실천하였다. Song Siyeol(1607~1689) whose pseudonym was Woam(尤庵) was a great scholar in later Choseon dynasty. His academic and political thought influenced profoundly for more than 200 years afterwards. His spiritual ideology of the Confucian justice prevailed all through the dynasty, especially in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in 19th century. Though much studies have been done on his academic achievements and political thoughts, it might be a deficiency that few investigation has done on his family backgrounds and the activities of his ancestors and descendants which is essential to understand him. This study focussed on the genealogy of his family lineage and on the activities of descendants all of whom was so much enthusiastic to inherit the spirits and thoughts of their brilliant ancestor. As Song Siyeol had no son grown up, He adopted Song Gitae who had 5 sons and 1 daughter. So Song Siyeol had a large family, and owing to his economic and social properties his descendants were flourished very much afterwards. Each of the five grandsons made their own sub lineages which had thousands of family members. There emerged many high officials and good scholars from the family. But they were very prudent to live silently, and would not eager to do important roles in politics though they were in high positions. Instead they were rather eager to take over the spirits and the ideologies of the Confucian justice of their ancestor Song Siyeol, which became the family tradition to followed up and to hand down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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