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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과류 상품 전략을 위한 라이프스타일에 따른 실버시장 세분화 연구

          이정란(Lee Jung-Ran) 한국외식산업학회 2006 한국외식산업학회지 Vol.2 No.1

          While substantial research has been conducted on silver consumer behaviors in the field of silver market studies, relatively little work has been done on lifestyle variables of silver consumers. This paper attempts to address these issues by identifying silver consumers’ lifestyle in Han-Gwa product(Korean traditional sweet stuff) market, and segmenting these lifestyle into distinct subgroups.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hreefold: to use a factor analysis to identify the underlying dimensions of lifestyle for silver consumers to segment the silver market using a cluster analysis based on delineated motivation factors; and to explore differences between segments with respect to socio-demographic and behavioral variables. Factor analysis was used for examining dimensions of lifestyles and cluster analysis for classifying the silver consumer by lifestyles. The study found four different types of lifestyles. In order to further specify the profile of four clusters, each cluster was cross-tabulated with external variables of silver consumers’ demographic, socio-economic characteristics and behavioral variables. Implications are discussed relative to marketing strategies including positioning and media strategies, and the broader lessons for silver consumer behavior research.

        • KCI등재

          辛旽 黨與 家門의 조상 감추기와 褒貶論

          이정란(Lee Jung-ran) 고려사학회 2007 한국사학보 Vol.- No.27

          族譜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는 편찬방식의 변화과정을 검토하여 당대인들이 어떤 계보의 조상을 기억하고 기록했는가를 살펴보거나, 족보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검토에 초점을 두는 정도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 신빙하기 어려운 가계기록의 무분별한 사용을 문제 삼는 연구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를 통한 족보의 활용범위 확장을 제안하거나 족보의 위조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나름의 정치, 경제 및 문화적 배경에 주목하자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최근 이상의 제안에 발맞추어 관련 논문이 제출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방면의 연구는 초기단계에 머물고 있다. 가계기록이 말하는 역사를, 그 수록 字句에 국한하여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말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사람의 편에서 역사를 재해석하는 단계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자료의 ‘가시적 현상’이 아니라 그 이면에 놓인 의미와 상징을 살펴본다면, 자료로서 족보의 활용범위는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 아래 가계 기록의 僞造 역사에 관심을 두었다. 흔히 粉飾이나 왜곡의 흔적으로 인해 사료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족보는 그 이면에 감춰진 내용에 주목하면 오히려 훌륭한 가치를 지닌 자료로 탈바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했던 개인이나 가문이 자신들의 흠결을 족보를 비롯한 각종 기록물에서 어떻게 조작하여 나갔는지를 살펴보고 아울러 그러한 행위에 대해 당대인들이 취한 태도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검토해보았다 ‘조작의 역사’를 살핌에 있어 필자는 신돈정권의 참여 인물과 그 가문을 중심 테마로 삼았다. 신돈의 黨與란 이유로 처벌받은 62명 중 42명이 史書에서 거의 인적관계 정보를 찾을 수 없는 사례였다. 물론 세밀하게 찾아보면 그중 11건의 사례에서 인적관계를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대개는 상당히 유명한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인적관계가 史書類나 심지어 族譜類에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이들의 가계에서 신돈과의 관련을 의도적으로 ‘인멸’하려고 노력했던 결과였다. 그리고 필자는 그러한 ‘조작’에 대한 적극적 증거를, 金蘭 · 金縝 · 孫湧 등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편 본고에서는 유교적 客觀이나 直書의 理想에도 불구하고 당시 위와 같은 조작이 가능했던 것은, ‘윤리적 검열’의 논리나 ‘孝’의 관념 덕택이었음을 아울러 고찰하였다. The genealogical methodology has been mainly applied to restore the publishing process of family records, through which it has been able to understand how the medieval people remembered their ancestors. Another major contribution of genealogy would be the evaluation of significance of the family record itself. This type of approach criticizes the injudicious practice of quoting from unreliable genealogical accounts, and suggests ways to expand the extent of utilization of family records by building a database which particularly shows personal relations of the family. Attempts to consider the prevarication of lineage in the whole scope of socio-political background have also been proposed. Quite a few articles have been published which followed abovementioned methodologies. However, the genealogical approaches in Korean history are still lack of in-depth study of family accounts. Profound comprehension with the intention of reinterpreting the society should be achieved by active explorations of various family records and of the way how people documented. From this perspective, family accounts could provide boundless sources which would extend the range of historical research. This paper deals with the history of prevarication of lineage from this angle aforesaid, and examines how individuals or a family falsified their lineage in order to disclose the ancestral disgrace. The main cases of prevarication investigated in this article are the descendants of the supporters of Sin Don, 42 cases out of 62 officials who were punished by reason of being Sin Don's clique are not able to trace their lineage in historical records, Although eleven of them were members of the noble families of Goryeo, they were not mentioned in historical records or even on the family accounts in which they are supposed to be documented. It is inferred that the members of Sin Dan's clique were deliberately expunged by their own family. It is particularly obvious in the cases of Kim Ran(金蘭), Kim Jin(金縝), and Son Yong(孫湧). Also, this paper attributes the logic that enabled the prevarication which suppressed the ideal of Confucian objectivity(客觀) or forthright documentation(直書) to 'filial piety' or 'ethical censorship'.

        • KCI등재

          고려 전기 국왕 諡號制의 내용과 그 의미

          이정란(Lee Jung-ran) 고려사학회 2021 한국사학보 Vol.- No.82

          국왕의 시호는 諡法에 의거하여 嗣王이 군신과 협의하여 올린 왕호를 의미한다. 사실 국왕 시호제는 대행왕의 업적을 평가함으로써 덕업의 성취를 권면하는 목적에서 마련된 제도였다. 고려는 시법에 의거하여 선왕들에게 시호를 追諡했다. 즉, 국초부터 시법을 근거로 시호의 문자를 선정하였고, 諡冊을 읽는 의례절차를 거쳐 선왕에게 시호를 올렸다. 그런데, 추시는 親親이라는 인간 본연의 마음에서 비롯된 단순한 도덕 행위는 아니다. 정치적 상황과 입장에 따라 嗣王이 시호의 내용과 의미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목적과 의사를 관철하려는 적극적인 정치 행위의 하나였다. 그런 점에서 고려의 임금들은 추시를 적극 활용하여, 선왕들과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고, 또 그렇게 규정된 관계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The posthumous title(Shiho, 諡號) of king is the posthumous name dedicated by the successor. The Goryeo Dynasty distinguished between the Shirine title(Myoho, 廟號) and posthumous title and established an independent system that making the posthumous title. The Goryeo Dynasty selected the posthumous title according to the rules from the beginning and dedicated the posthumous title to the former king after going through a regular procedure. Even though they decided Shiho based on rule, It was necessary for selecting Shiho to go through agreement. Thus, the political relationship of the age were naturally reflected in the process of choosing Shiho. We can confirm the fact that Goryoe people use Shiho as a tool to worship the King Taejo, and jutify king’s authority by searching the meaning of Shiho’s letter in early Goryoe Dynasty. One of the most important shiho is filial duty(hyo, 孝). The Han Empire put the letter of hyo in Siho to premanently possess the dynasty by imprinting the emperor’s image of take the initiative and set an example in filial behavior. It was same in Goryeo Dynasty. As showing off blood-related, moral legitimacy of the former king, Goryeo Dynasty utilized the hyo Shiho to make public justification of Succession King.

        • KCI등재

          1361년 홍건적의 침입과 공민왕의 충청지역 피난정치

          이정란(Lee, Jung Ran) 역사문화학회 2018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21 No.1

          공민왕은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파천을 단행하여 약 1년 3개월 동안의 행재소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공민왕 일행은 여러 곳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공민왕 일행의 파천지로 흔히 안동이 잘 알려져 있으나, 공민왕은 안동보다 상주와 청주에서 더 오랜 기간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국정의 중요한 개혁을 단행하였고 원과의 외교에도 변화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공민왕의 몽진 지역으로 안동만이 주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홍건적 격퇴에 있어 안동이 갖고 있던 상징성 때문에 불거진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안동행궁 시절에 홍건적을 격퇴하였던 관계로, 홍건적의 침입하면 공민왕의 몽진과 안동이 자동적으로 연상되었던 것이다. 사실 공민왕은 상주와 청주에 체류하면서 피폐해진 민심을 복구하고 국정을 정상궤도로 되돌리기 위해 상당히 중요한 행보를 이어갔다. 우선, 홍건적이 개경에서 물러난 직후 分司體制를 도입하여 개경과의 연락망을 복구하여 還都에 대비하였다. 또한 행재소에서 정규의 사신을 파견하고 과거까지 設行함으로써 행궁의 건재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즉, 공민왕은 청주행궁에서 원나라에 보내는 정규사신을 파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使行에 부수되는 拜表儀禮까지 거행함으로써 고려 조정이 정상궤도에 올라섰음을 내외에 과시했다. 아울러 국자감시 · 예부시 · 승보시를 세 달 동안 연달아 설행하여 국정이 평소와 다르지 않게 운영되고 있음을 과시했다. 나아가 환도 이후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크고 작은 제도의 개선은 물론 관제의 개혁까지 단행했다. 관제의 개혁은 상주행궁에서 실시되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이때의 개혁은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고 원나라의 불신을 무마하여 군사적 제휴까지 도모하기 위해 실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행재소에서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대외만큼이나 대내적 요인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수도를 쉽게 외적에게 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감행함으로써 천하의 비웃음꺼리가 되었던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분명 국내적 요인이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공민왕은 아마도 관제개혁을 통해 환도 후에 행할 국정의 방향을 천명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혼란한 정국을 틈타 권력을 장악하려는 친원파의 준동을 제어하기 위해 그와 같은 개혁을 단행했다고 생각된다. Invasion by Red Turban Bandits into Goryeo led King Gongmin to evacuate and stay in Chungcheong Region for about one year and three months. During the period, King Gongmin and his company wandered about in Andong, Sangju, and Cheongju. While staying at Sangju and Cheongju, he took considerably important steps. First, right after Red Turban Bandits retreated from Gaegyeong, he prepared for returning to the capital by establishing a network of contacts with Gaegyeong. In addition, he dispatched official envoys to Yuan Dynasty and even administered state examinations in his travel palace, showing off the fact that his power remained undiminished. In other words, King Gongmin sent official envoys to Yuan Dynasty in his temporary palace in Cheongju. Besides, he held magnificent ceremonies to teach manners in accompaniment with the sending of envoys, thereby informing in and out of the nation that the Royal Court of Goryeo was running back the right track. Moreover, he held three important state examinations in a row for three months, boasting of the fact that his government was under normal operation as usual. Further, for smooth operation of his government after returning to the capital, he carried out innovation of government-related laws as well as small and large improvement upon institutions. Innovation of government-related laws was done in Sangju. According to previous research, such innovation was conducted in order to tighten the discipline that had relaxed, and cover up distrust by Yuan Dynasty and achieve military partnership with the neighboring country. Nevertheless, his series of reforms were made in his travel palace, which meant that they were much influenced by domestic factors. Given that he not only gave his capital to the foreign enemy with ease but also fled from his palace, which made him subject to universal ridicule, domestic factors may have acted as important variables. Probably by proclaiming the direction of state affairs after returning to the capital through government-led reforms, King Gongmin aimed for settling the public sentiment and controlling the pro-Yuan group who attempted to seize power amid chaotic political sit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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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 王家의 龍孫意識과 왕권의 변동

          이정란(Lee Jung Ran) 고려사학회 2014 한국사학보 Vol.- No.55

          본고에서 필자는 왕위를 독점하기 위해 고려왕가가 채택한 전략과 그것의 변화과정을 살펴보았다. 고려 왕가는 天命論으로 즉위의 정당성을 내세웠지만, 한편으로는 초월적 권위에 기대어 왕권의 절대권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聖人君主論과 神聖君主論을 병행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후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龍孫認識’이었다. 용손의식은 국초부터 형성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형성과 동시에 사회적 효용성을 잃을 운명에 있었다. 유교적 합리주의 사고체계는 용왕이나 용의 후손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논리가 설 자리를 빼앗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손의식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神聖을 끊임없이 수혈하는 시스템의 마련이 필요했다. 고려의 경우 신성의 수혈은 독점과 배제로 이루어졌다. 용손 끼리의 근친혼을 지속함으로써 자기들만의 왕국을 만들어 독점을 강화하였다. 한편,용손 안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파생되는 小君을 배제하여 神聖을 저해하는 요소를 끊임없이 제거시켜 나갔다.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구축된 기반 덕분에 여러 번의 강력한 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성왕가는 독점권을 잃지 않았다. 무인집정들은 개성왕가의 독점권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龍孫十二盡이라는 讖言을 퍼트렸지만, 그러한 노력은 도리어 용손의식의 뿌리가 당시에 얼마나 강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줄 뿐이었다. 한편, 고려왕가는 몽골의 등장이후 몽골황실과의 밀착을 이룸으로써 왕권의 강화와 권위의 회복을 동시에 이루었다. 하지만 대원관계의 지속은 왕권이 상대화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것은 권위의 하락과 용손의식의 쇠퇴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고려영내에서 개성왕가가 차지하고 있던 왕위의 독점권이 서서히 부정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瀋王의 왕위도전으로 우선 표출되었다. 나아가 왕위계승권을 그 동안 원천 차단당하였던 小君들의 도전으로 이어졌다. 물론 소군들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하였지만, 그것이 ‘사실상’소군이라고 할 우왕의 즉위를 유발했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 그런데, 우왕의 즉위는 고려왕가에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왕권의 상대화와 소군들의 도전에 따른 용손의식의 붕괴가 고려후기 고려왕가에게 왕권의 정통성을 제공하는 원천이었던 元朝의 쇠락과 함께 이루어짐으로써, 고려왕이 정통성을 기댈 근거가 희박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왕권의 정당성을 입증할 이데올로기가 사실상 고려 왕가에는 부재하게 된 것이었는데, 이런 와중에 禑王과 昌王이 왕씨의 후손이 아니라는 說이 제기됨으로써 고려는 멸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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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不稱姓’의 특권과 王家

          이정란(Lee, Jung-ran) 호서사학회 2018 역사와 담론 Vol.0 No.85

          In the pre-modern times, calling one"s name was a means to cement the stratification of status. As well as reference and address terms for others to call themselves, whether calling oneself in front of others also was determined by one"s status. In the tenth year of Yejong"s reign (1114), appellation that should be used in private letters as well as official documents was prescribed. What is intriguing is that the principle of stratification also acted in calling last name in Goryeo. One"s last name not being called was a kind of privilege in Goryeo. In other words, whether one"s last name was called or not was a standard to differentiate the hierarchy in the bureaucracy, and in Goryeo the royal family and high officials received respectful treatment of their last name not being called. However, the royal privilege of unspoken family name essentially had a different meaning from that of high officials. Not calling the last names of high officials was basically a means to represent that they were in the relationship of ruler and ruled, while the royal privilege of unspoken family name was a device to show that they and the king had special relationship. As the two groups" not calling the last name had a very different meaning, inevitably the scope of application of such rule differed. In the case of high officials, their last name not being called was applied only to certain cases while the royal family was granted such privilege in all areas related to public affairs. The institution of the royal privilege of unspoken family name essentially had a different meaning from that of high officials. that seems to have already started during Hyeonjong at the latest existed solely in Goryeo. Those who became the son-in-laws of the royal family with different last names received such benefits; the principle of bilateral kindred operated in Goyreo. The royal privilege of unspoken family name contributed to sanctification of royal family, conducive to stabilization of the Goryeo"s royal authority. In fact, the royal privilege of unspoken family name was a device for the royal family name not to be called in public affairs. When a national ceremony was held, the royal family name was not able to be called and in all kinds of public documents, the royal family name was not able to be used. the royal family name also was not able to be inscribed in writings. The principle of avoiding calling one"s original names--that a noble subject should not be called nor written--was applied to the royal family name. Through such principle, the royal family name was able to obtain political and social position as a noble last name, which helped the Goryeo royal family to monopolize the th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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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전기 절장법(折杖法)의 규정과 운용

          이정란(Lee Jung-ran) 한국역사연구회 2010 역사와 현실 Vol.- No.75

          The replacement punishment of flogging, which replaced punishment on the body or freedom with that of flogging, was a distinct punishment system clearly differentiated from that of the Grand Ming [Criminal] Code which originated from the Law of Tang and was standardized in later times. Thus, it goes without saying that replacement punishment of flogging had major influence on the penal system of Goryeo which imported it as well as Song Empire which created it. Previous studies understood it as a punishment restricted to specific types of crimes. However, considering that 『Goryeosa』 already had replacement punishment of flogging in place and also provided for an elaborate system of converting the five forms of punishment into replacement punishment of flogging, it would be unreasonable to regard replacement punishment of flogging as a punishment system limited to specific types of crimes. Meanwhile, replacement punishment of flogging, in the course of its application in Goryeo, took a form a little different from that of Song Dynasty. For example, certain differences from 『Songxingtong』 can be found in subtle areas such as provisions of subsequent measures regarding the convicts as well as in the size of punishment equipment, differentiation of punishment equipment, or number of flogging. Moreover, Goryeo applied replacement punishment of flogging to “death penalty” which had been excluded from replacement punishment of flogging, thereby developing the replacement punishment of flogging in its own distinct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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