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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퇴계의 경사상과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 비교연구

        김춘식 ( Choon Shik Kim ) 한국행정사학회 2014 韓國行政史學誌 Vol.35 No.-

        퇴계에 있어서 경(敬)이란 학문과 수양의 원리와 법칙이며 실천방법이다. 경이란 의식적으로 잡념을 배제하고 현재의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의식을 현실에서 살아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도덕적 관점에서 말하면 경이 마음을 주재함으로써 항상 도덕적 자각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경은 이치를 탐구하는데 있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데 있어서도 지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오랫동안 끊임없이 지속하면 성인의 경지에도 도달할 수 있다. 몰입이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칙센트미아이는 몰입을 플로우(flow)라고 명명했다. 몰입이란 ‘어떤 일을 하다가 거기에 푹 빠져 시간 감각도 잃어버리고 잡념도 없이 그 일에 완전히 몰두하는 상태’를 말하며 외적 보상이 없더라도 일 자체를 즐기는 상태를 말한다. 몰입은 즐거운 경험이며 삶의 질을 높인다. 그러나 즐거움만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 조화로운 세상에 기여하려면 의식의 복합성을 높여 초월인이 되어야 한다. 초월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수양하고 책임감을 배양하며, 단순히 깊이 생각할 뿐만 아니라 지식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퇴계의 경사상은 철학적 사유의 산물이고,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은 경험적 연구를 통하여 얻은 이론이다. 전자가 경건한 몰입을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즐거운 몰입을 강조한다. 이처럼 퇴계의 경사상과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은 접근방법이나 강조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함으로써 지혜와 덕성을 함양하여 조화롭고 질서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이바지하게 한다는 점에서 두 이론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mpare with T’oegye’s mindfulness theory and Csikszentmihalyi’s flow theory. T’oegye(15011570) was a master of Neo-confucianism. The purpose of T’oegye’s philosophy is to make ethical and harmonious society. For this purpose T’oegye insisted the most desirable state of mind is mindfulness (敬). Holding and maintaining mindfulness, according to him, is the basic method for serving both thinking and learning, learning through rest and motion, harmony within and without oneself, through both obvious and obscure unity. To hold and maintain mindfulness, one should always strive to keep up the originally good human nature and self-reflection. Mihaly Csikszentmihalyi(1934 ­ ) is noted for his work in the study of happiness and creativity, but is best known as the architect of the notion of flow. Csikszentmihalyi describes flow as being completely involved in an activity for its own sake. In his flow theory that people are happiest when they are in a state of flow. It is a state in which people are so involved in an activity that nothing else seems to matter. Theflow state is an optimal state of intrinsic motivation, where the person is fully immersed in what he is doing. This study concluded that mindfulness theory and flow theory are different in approaches, but two theories are common in which the ultimate goals are become a sage or transender to pursue harmonious and well-being society.

      • KCI우수등재

        왕권신수설과 天命思想의 비교연구

        金春植(Kim Choon-Shik) 한국정치학회 1996 한국정치학회보 Vol.30 No.3

        서양의 절대군주국가 시대에 나타난 왕권신수설과 동양의 천명사상을 비교 연구하였다. 비교연구의 촛점은 두 이론의 등장배경, 왕권의 정당성의 근거, 왕권의 존재목적과 폭군에 대한 저항권의 문제 등이다.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종교적 기반이 서로 다른 두 사상을 단순비교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를 수 있으나 이들 정치사상간의 다음과 같은 유사점과 차이점이 밝혀졌다. 첫째, 왕권신수설과 천명사상 모두 내란으로 인한 혼란기에 나타났으며 그 목적은 왕권을 확고히 하고 국내질서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장되었다. 둘째, 왕권신수설은 비교적 단명한 이론이었는데 비해 천명사상은 매우 오랫동안 지지되었다. 그 이유는 전자는 내란을 극복하고 민족국가의 안정성을 확보한다는 목적을 제외하면 왕에게만 일방적으로 유용한 이론이었는데 비하여 후자는 왕과 백성 모두에게 나름대로 유용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세째, 왕권신수설은 왕권의 근거가 神에게서 직접 유래하며 왕권이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 신민의 동의 또는 암묵적 동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民의 의사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또 神의 뜻이 변할 수도 있다는 개념이 그 속에 존재하지 아니한다. 이에 비하여 천명사상에서는 왕은 天으로부터 命을 받지만 동시에 天意는 民意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民意의 여하에 따라 天意도 변할 수 있다는 天命慶常의 개념을 상정하고 있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넷째, 두 이론 모두 왕권은 신민 또는 백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같으나, 만약에 왕이 이러한 임무를 위반하고 폭군이 될 경우에 저항권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왕권신수설은 신민의 저항권을 부정하나, 천명사상은 저항권을 인정한다. 天命思想은 군주국가시대의 王權의 正當性의 根據이자 왕권의 남용을 예방하고 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왕권신수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천명사상의 독특한 성격이다.

      • KCI등재

        율곡의 인재등용론

        김춘식 ( Choon Shik Kim ) 한국행정사학회 2013 韓國行政史學誌 Vol.32 No.-

        율곡 이이(1536∼1584)는 유능하고 도덕적인 인재의 등용 여부가 국가 운영의 성패와 직결됨을 주장한다. 율곡은 선조 당시의 여러 가지 폐단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어진 인재를 등용하지 못한데 있다고 본다. 여기서 어진 인재란 군자를 말한다. 군자에게 정치를 맡기면 나라가 평안해지고, 소인에게 맡기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주장한다. 임금이 군자를 등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주 자신이 수신되어야만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안목과 지혜를 얻게 된다. 둘째로는 철저한 인사검증 절차를 거칠 것을 주장한다. 먼저 여론을 통해 훌륭한 인재라고 인정되면, 인사권자가 그를 만나 대화를 통해 직접 살펴보고, 업무처리능력으로 그를 시험한 뒤 현명하다고 판단되면 그를 등용하라고 주장한다. 셋째로 임금이 사욕(私慾)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금이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거나 아부하고 순종할 자만을 찾아서 인사를 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현명한 인재를 등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율곡이 주장한 인사검증의 원칙과 순서만 지킨다면 오늘날에도 보다 유능하고 도덕적인 인재가 공직에 임용될 수 있을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tudy Yulgok`s(1536-1584) thought on selection of fit persons for higher public positions. He thinks the most important thing for successful government is the public personnel administration. Specially, the appointment of senior positions is the most important thing. The ideal type of senior officials is the sage, that is wise man and superior persons. To become a sage, he must be cultivate his mind-and-heart. Yulgok persisted that the positions, in particular high-ranking government positions, had to be appointed by the candidates`s personality and ability. It must be appointed by ``the rule of the right person to the right position``. Since appointing senior officials is more important, candidates had to be examined thoroughly and deliberately. For this reviewing procedure Yulgok suggest 4 steps. first inquire public opinions to the candidates, second estimate through conversation, third test by performances, and finally appointment if he is competent. For the reviewing system works with fairness, it is necessary that the king cultivate his mind-and-heart, and become a sage.

      • KCI우수등재

        퇴계의 행정사상에 관한 연구 - < 조선왕조실록 > 에 비친 안민사상을 중심으로 -

        김춘식 ( Kim Choon - Shik ) 한국행정학회 1992 韓國行政學報 Vol.26 No.2

        행정을 함에 있어서 `백성들을 평안하게 잘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安民思想은 民本思想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민본사상을 구성하는 핵심적 내용으로 파악한다. 퇴계는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것이 王政의 근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흉년에 인력을 동원하거나 병적을 정비하는 것을 하지 않고, 흉년에 대비하여 평소에 경비를 절약하여 식량을 비축해 둘 것을 주장한다. 상업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백성들이 지킬 수 없는 법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가난하고 불쌍하며 늙고 병든 사람들을 보살펴줄 책무가 있으며, 탐관오리들로부터 백성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도덕적인 자기수련, 현명하고 도덕적인 인재의 등용 및 인사행정의 공정성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퇴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전쟁의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할 것을 건의한다. 전쟁이 일어나서 우리백성들이 화를 당해서는 안되므로 외교관계에 있어서 명분에만 매달리지 말고 실리외교를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퇴계의 사상이 朱子學的 當爲觀에 얽매여 백성들의 생활안정이나 국방책 등 급박한 현실에 대한 대책은 외면하고 자신의 안일과 학문적 유희만을 추구했다는 주장은 허위임이 밝혀졌다.

      • KCI등재후보
      • KCI등재후보

        퇴계의 사직소(辭職疏)에 나타난 인재등용관

        김춘식 ( Choon Shik Kim ) 한국행정사학회 2009 韓國行政史學誌 Vol.25 No.-

        이 논문은 퇴계 이황(1501-1570)이 58세에 명종에게 올린 무오사직소(戊午辭職疏)와 68세에 선조에게 두 차례에 걸쳐 올린 무진사직소(戊辰辭職疏) I·II에 나타난 인재등용관을 분석한다. 이 두 사직소에는 고위공직자의 추천 및 인사검증과 관련한 퇴계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퇴계의 사상이 오늘날의 고위공직자의 임용과 관련한 추천 및 인사검증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퇴계는 인재를 등용하는데 있어서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고위공직자의 등용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므로 인사검증을 철저히 하여야 한다. 인사검증을 하는 과정에서 측근의 말만 믿어서는 안 되고, 여러 신하들과 백성 모두에게 적합하다고 검증받은 인물을 왕이 직접 검증해 보아 훌륭하다고 판단될 때 등용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에 인사권자가 철저한 검증없이 자신을 추천한 경우 추천된 본인 스스로 자신이 과연 그 직책에 합당한 인물인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만약 능력이나 도덕적 면에서 부족하다면 스스로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국가를 위해서도 , 본인 스스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고위공직자의 등용에 있어서 철저한 검증을 통해 능력과 도덕성에 따른 임명을 강조하고,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능력과 도덕성을 살펴 공직제의를 거절하거나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퇴계 스스로 이를 실천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실한 이론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thought of Thoegye Yi Hwang`s (1501-1570) appointment of senior officials. The text of this study will be the three letters of resignation he sent to the emperor in 1558 and 1568. In these letters, Thoegye Yi Hwang contended that the posts had to be distributed according to the candidates`s ability. Since appointing senior officials was most important, candidates had to go through a thorough reviewing procedure, and if the selected candidates considered themselves incompetent in their ability or morality, they themselves had to leave the post. Thoegye emphasized a two-way review process for the confirmation hearing procedure in which he highly valued the self-review procedure as much as the thorough reviewing process of the possible candidates. His theory was ethical and appropriate then as now.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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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서원 교육정책에 관한 연구

        김춘식 ( Choon Shik Kim ) 한국행정사학회 2011 韓國行政史學誌 Vol.28 No.-

        조선왕조는 유교이념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체제를 유지·강화하기 위해 교육체제를 정비하였다. 서울에는 성균관과 4학을 지방에는 향교를 설립하여 교육하였다. 서원은 중종 38년(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에 의해 처음으로 설립 되었고, 퇴계에 건의에 따라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 서원은 국가의 지원정책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발전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서원의 남설과 서원전의 확대로 국가재정에 많은 부담을 가져오게 되었고, 서원이 군역도피처로 이용되는 등 여러 가지 폐해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서원설립에 대한 허가제를 실시하고 학생의 수도 제한하였으며, 영조17년(1741) 이후에는 불법적으로 설립된 서원을 철폐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후반 이후에 문중서원들이 난립하게 되고 그 폐해가 커짐에 따라 고종8년(1871)에는 대원군에 의해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교육내용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서원의 자율에 맡겨져 있었다. 오늘날 교육당국이 지나치게 사학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정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으로 서원의 무질서한 남설과 도덕적 해이가 서원에 대한 정부정책을 통제와 강제철폐로 이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자율성과 통제 사이에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Joseon Dynasty(1392 - 1910) was based on Neo-Confucianism and focused on cultivating talent and edification. So the government established educational institutions especially like those of Sungkyunkwan, Sahak and Hyanggyo. But over time, management of national schools became weak, and private schools, Seowon, appeared in the mid 16th century. Administrative and educational policy towards private schools, Seowon in Joseon Dynasty is studied in this paper. Among the early Seowon the most famous was the Baegundong Seowon established by Chu Se-Bung, in 1543. Subsequently Yi Hwang(the foremost Korean Confucianist philosopher of his age) persuaded the king to bestow a hanging board on this Seowon "academy of received learning"(Sosu Seowon). Sosu Seowon was the first of the so-called royally charted private academies. Seowon sprang up everywhere by the end of King Seonjo`s reign. The number of royally charted Seowon also increased at the same time. In the early days the government took an affirmative and supportive attitude in establishing private schools bestowing on them books, lands and slaves. But because too many private schools were built, many abuses emerged in the 17th century to avoid military duty and reduction of tax. So In the mid 17th century, the government policy changed from support to regulation and then Seowon could only be founded by government grant. In the mid 18th century, unauthorized Seowon were abolished by the government. By this time hundreds of Seowon possessed large agricultural estates and slaves to work them, and they enjoyed the special privilege of corvee labor and exemption from taxation. As Seowon were ravaging the economic foundation of the state in 1868, Daeweongun(the King Gogong`s father) ordered that taxes be levied on Seowons, and finally, in 1871, he carried out a drastic reduction in their number, closing all but a scattered forty-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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